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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된 ‘강경 보수 성직자’, 그는 누구인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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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된 ‘강경 보수 성직자’, 그는 누구인가

CIA bear 허관(許灌) 2021. 8. 6. 23:30

에브라힘 라이시는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최측근으로 지난 6월 이란 대선에서 당선됐다. 올해 예순 살, 강경한 보수 신념의 성직자다.

라이시 신임 대통령은 지난 5일 공식 취임했다. 그는 스스로를 ‘부패에 대항하고 전직 대통령 아래 이란이 겪어 왔던 경제 문제를 해결할 최적의 인물’이라고 묘사한다.

이란에서 대통령은 최고지도자에 이은 사실상의 ‘2인자’다.

라이시는 이란 사법부 수장을 역임했고, 강경 보수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이란에선 정치범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형 집행이 진행됐는데, 많은 이란인들과 인권 활동가들은 그 배후에 라이시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1960년, 이란의 2대 도시이자 무슬림 시아파의 성전이 있는 마사드에서 태어났다. 마찬가지로 성직자였던 아버지는 그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라이시는 선지자 무하마드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시아파의 전통 복장, 검은 터번을 늘 쓰고 다녔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열다섯 살 때는 이란 시아파의 성지 쿰에 있는 학교에 진학했다.

학창 시절엔 서구 사회와 손 잡은 당시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에 반대하는 시위들에 참가했다. 팔라비 국왕은 1979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끈 이슬람 혁명 당시 축출됐다.

혁명 이후 그는 사법부에서 검사로 일하며 여러 도시를 전전했다.

당시 그의 ‘상사’격이었던 하메네이는 1981년 이란의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라이시는 스물다섯 살 나이에 테헤란의 검찰 부총장 자리에 올랐다.

그 시기 라이시는 1988년 설립된 비밀 재판소, 이른바 ‘죽음 위원회’ 소속 재판관 4명 중 1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재판소는 이미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정치범들을 다시 재판했다. 대상은 대부분 좌파 야당 무자헤디네 헐크(Mujahedin-e Khalq)의 일원이었다.

죽음 위원회가 사형을 선고한 이들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권 단체들은 그 수가 5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단체들은 사형수들이 비석조차 없는 집단 묘지에 묻혔다며 ‘인간성을 짓밟는 범죄’라고 비난해 왔다.

이란 당국은 사형이 진행됐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각 사건의 법적 정당성과 세부 사항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다.

라이시는 집단 사형 사건과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 다만 해당 판결들에 대해 “하메네이의 종교적 판결 ‘파트와(Fatwa)’에 의한 정당한 조치”라고 옹호한 적은 있다.

5년 전, 녹취 테이프 하나가 유출됐다. 라이시와 다른 재판관들, 그리고 부지도자였던 고 아야톨라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1922~2009)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테이프에서 몬타제리는 당시 사형 집행이 “이란 역사상 최대의 범죄”라고 주장했다.

1년 뒤 몬타제리는 호메이니의 후계자 지위를 잃었다. 1989년 호메이니 별세 이후 그 자리에 오른 게 현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다.

그 사이, 라이시는 테헤란 검사직을 거쳐 주 검사 기관장, 사법부 부장관직을 역임했다.

2014년엔 검찰총장으로 임명됐다.

2년 뒤,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라이시를 이란 최고 권위의 종교 기관인 아스타네 쿠즈 라자비(Astan-e Quds-e Razavi, 이하 라자비)의 관리인 자리에 앉혔다.

라자비는 마사드에 위치한 이란 8대 시아파 이맘(이슬람교 지도자) 레자의 사당을 관리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각종 자선단체 등 협력 기관들과의 업무를 관장한다.

미국에 따르면 라자비는 건설과 농경, 에너지, 통신,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막대한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

2017년 라이시는 대권 도전을 선언하며 화제를 모았다.

핫산 로하니 당시 대통령은 첫 투표에서 57%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란 대선은 1차 투표에서 과반 이상 득표자가 나오면 곧장 당선인이 결정되고, 그렇지 않으면 2차 투표에서 1, 2위 후보자가 겨룬다.

라이시는 반부패 공약을 내세워 맞섰지만 38% 득표에 그쳤다. ‘라이시가 사법부를 이끄는 동안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로하니 측의 공세가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패배는 라이시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히진 못했다. 2019년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그를 사법부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 직후 라이시는 국가지도자위원회(The Assembly of Experts)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국가지도자위원회는 차기 최고지도자를 뽑는 조직으로 성직자 88명으로 구성돼 있다.

사법부를 이끌며 그는 각종 개혁을 추진했다. 사형 판결 건수, 특히 마약 관련 범죄로 처형되는 이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란은 중국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가장 많은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다.

사법부는 안보 기관들과 손 잡고 반정부 인사들을 탄압하고, 이중 국적자나 해외 영주권자들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는 작업도 이어 왔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라이시를 제재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미국은 이란이 범죄 연루 시기 미성년자였던 이들까지 처형한 사실을 문제 삼았다. 부정선거 논란이 일었던 2009년 대선 이후 야당 세력이 벌인 ‘녹색 운동’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한 것도 문제가 됐다.

라이시는 올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국가 행정 관리와 빈곤 문제 해결, 부패 척결 및 차별 방지 등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독립적으로 이 무대에 섰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은 주요 중도파와 개혁파 후보들이 잇따라 출마 자격을 박탈당하며 논란을 빚었다.

반정부 인사들과 개혁주의자들은 투표 보이콧을 주장했다. 이들은 투표 절차가 라이시가 별다른 경쟁 상대 없이 이길 수 있게끔 설계됐다고 비판했다.

라이시는 1차 투표에서 62% 지지를 얻었다. 이렇게 압도적인 지지율로 곧장 당선됐지만 사실 당시 투표율은 49%를 밑돌았다. 1979년 이란 혁명 이래 최저 투표율이었다.

라이시의 사생활에 대해선 알려진 게 많지 않다. 아내 자밀레는 테헤란의 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두 사람 사이엔 장성한 두 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라이시의 장인은 마사드의 고위 성직자 아야톨라 아흐메드 알라몰로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된 ‘강경 보수 성직자’, 그는 누구인가 - BBC News 코리아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된 ‘강경 보수 성직자’, 그는 누구인가 - BBC News 코리아

‘엄청난 강경 보수’로 분류된다.

www.bb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