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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70주년 특별기획 '잊혀진 그들' 본문

Guide Ear&Bird's Eye/한국전쟁과 유엔군 16개국 자료 발굴

6·25 70주년 특별기획 '잊혀진 그들'

CIA bear 허관(許灌) 2020. 6. 27. 22:36

(1회)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

◆아직도 北 억류된 채 참혹한 삶 국군포로의 귀환, 시간이 없다

1954년 교화소(교도소)의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누울 시간이지만 대한민국 이등중사(하사) 출신 김성태(현재 89세)씨는 눕지 못한 채 앉아있어야 했다. 그가 있는 곳은 사방 1m 크기의 징벌 독방.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대소변도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씻지도 움직일 수도 없으니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김씨가 독방에 갇힌 이유는 탈주였다. 김씨는 수감된 교화소를 탈출했지만 잠복해 있던 북한 경비대원들에게 체포돼 징벌 독방에 갇혔다. 눕지도 못하는 독방 생활은 15일이나 이어졌다

국군포로 출신 김씨는 21일 세계일보 취재팀과 만나 당시를 떠올리며 “(그 안에선) 꼼짝 못할 정도였다. 가만히 앉아있다가 눈 감으면 자는 거다. 사람이 아니라 해골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1966년 만기 출옥한 김씨는 함경북도 온성의 추원탄광에서 노역에 시달리다가 2001년에야 탈북했다.

김씨는 1948년 3월 경기도 포천에서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에 입대했다. 국방경비대원들의 절도 있는 태도와 멋진 군복을 보고 나이까지 속여가며 군인이 된 그였다. 경기도 동두천 초성리 소재 제7사단 1연대 3대대에 배치된 김씨는 대대장 연락병을 거쳐 의정부 사단본부에 있던 하사관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됐다. 이등중사 김씨는 부대와 함께 경기도 양주 덕정의 산꼭대기에 올라가 대기했다. 6월28일 북한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중대장이 교전 도중 부상했다. 김씨는 다친 중대장을 업고 산을 내려오다가 6월30일 북한군에 포로가 됐다.

전쟁 초기 북한군에 포로가 된 김씨는 1953년 7월25일 군사재판에 회부돼 ‘국가 반역자’라는 이유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은 뒤 간난신고 끝에 2001년 어렵게 귀환할 수 있었다.

6·25전쟁 정전협정 직후인 1953년 8월, 유엔군사령부는 북한군·중국군에 포로가 되거나 실종된 국군 규모를 8만2318명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1954년까지 진행된 포로교환을 통해 귀환한 국군은 8343명에 불과하다. 최소 7만여명의 국군이 포로로 남았거나 실종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유엔군과 한국 정부는 이 문제를 거듭 제기했지만 북한은 그때마다 “다른 인원들은 전향했다. 국군포로는 없다”고 일축했다.

시간이 흘러 1994년, 국군포로였던 조창호 소위가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조 소위의 탈북은 북한 주장이 거짓임을 온몸으로 증거했다. 조 소위는 남한 품에 안겨 12년을 산 뒤 2006년 사망했다. 이후 김씨의 경우처럼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80명의 국군포로가 조국의 품에 안겼지만, 2011년부터는 귀환 행렬도 끊어졌다. 북한에 억류됐던 국군포로의 실상 등 구체적인 사항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등 관심마저 사그라들었다. 6·25전쟁이 70주년을 맞았지만 국군포로들은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잊혀진 존재’가 돼가고 있었다.

1994년 돌아온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던 그들, 국군포로

21일 돌아온 국국포로나 탈북자의 증언 및 각종 자료 등에 따르면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은 북한에서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을 살았다. 북한군에 강제 편입됐고, 제대 후에는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북한은 1956년 ‘내각결정 143호’를 통해 국군포로들에게 공민증을 발급하는 등 표면적으로는 북한 출신 주민과 동등하게 대우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143호’ 또는 ‘43호’라 부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차별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에 걸친 체제 재정비 과정에서 대부분의 국군포로들은 통제구역 내 공장이나 협동농장, 광산 등으로 추방됐다.

미귀환 국군포로들은 북한 내 체류가 길어지면서 결혼을 하는 등 가족을 꾸렸다. 하지만 가족들도 성분불량자 가운데 최하위로 분류되어 교육과 사회적 이동이 엄격히 제한됐다. 1990년대 북한 전역을 덮친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식량난의 영향을 가장 심하게 받아 사소한 병에 걸려도 쉽게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6·25전쟁 초기 북한군에 포로가 됐던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군사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교화소에 갇혀있던 그는 정전협정 이후 북한이 착수한 전후복구에 강제동원됐다. 당시 김씨에게 주어진 식사는 강냉이(옥수수)에 콩이 들어간 밥과 된장 시래기국이 전부였다. 정월 초하루와 공화국 창건일에만 쌀밥 두 끼가 나올 뿐이었다. 일은 많고 고된데 밥은 적으니 몸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북한에 침투했다가 붙잡힌 남측 공작원들로부터 남한 소식을 전해들은 김씨는 교화소에서 탈주를 시도했다가 붙잡혀 징벌 독방의 고역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고령화로 생존 확률 더 낮아져… “시간이 없다”

최근 4반세기 동안 귀환한 국군포로는 80명. 생존자는 지난해 9월 기준 24명이다. 귀환 국군포로 숫자는 1994∼1999년 8명에 불과했지만 2000년 한 해에 9명으로 늘었다. 2001년과 2002년엔 각기 6명이었다. 2004년엔 14명에 달했지만 2005년부터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2010년 1명을 끝으로 국군포로가 귀환했다는 소식은 없다.

국방부는 “1953년 정전협정을 기준으로 해도 60년 넘게 세월이 흘러 국군포로들의 연령이 대부분 고령”이라며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 귀환은 이전보다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입장이다. 2010년 이후로는 국군포로들의 연령이 90세 안팎에 달할 정도로 고령화가 진행돼 자력으로 귀환할 여력이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탈북자와 귀환 국군포로의 증언을 토대로 생존 추정 국군포로 규모와 명단 등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국군포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고, 남한 내 가족이 생존을 확인할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정부는 북한 거주 국군포로와 그 가족의 신변이 위협을 받을 수 있고 신원확인도 어렵다는 이유로 관련 자료를 전면 공개하지는 않고 있다.

군 소식통은 “미국은 북한과 협상을 벌여 6·25전쟁 전사자 유해를 봉환하고 실종자를 찾기 위해 수천명의 참전용사들을 상대로 증언을 청취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국군포로들의 고령화로 시간이 없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북한에 송환을 촉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임진각서 사진전 6·25전쟁 70주년을 앞두고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21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을 찾은 시민들이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주제로 전시한 사진들을 관람하고 있다. 

◆“명예회복을 원한다” 북한에 손해배상 소송도

정당한 대가도 받지 못한 채 북한에서 강제노역을 했던 탈북 국군포로 중 노사홍(91)·한재복(86)씨는 2016년 북한 당국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탈북 국군포로가 북한 지도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송 변호인단을 이끄는 김현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현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은 21일 세계일보와 만나 “다음달 7일 예정된 선고공판에서 북한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면 국군포로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처음 소송했을 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반응도 있었고 ‘북한과 잘 지내야 하는데 부적절하지 않으냐’는 지적도 있었다”면서도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 북한과 김 위원장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국군포로들의 소망이 가장 중요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재판 과정에서 정부 기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소송을 한 국군포로들이 귀환 당시 국방부나 국가정보원 조사에서 어떤 진술을 했는지 등에 대해 지난해 사실조회를 신청했지만 유의미한 답을 얻지 못했다”며 “당사자와 탈북자 증언 및 역사적 자료를 모아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재판을 치렀다”고 토로했다.

김 변호사는 2016년 평양에 1년 넘게 억류됐다가 풀려난 뒤 사망한 오토 웜비어의 가족이 북한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북한은 5억달러(약 5800억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 낸 사례를 참고했다고 한다. 그는 승소 이후의 계획에 대해선 “국내 방송·출판사들이 북한 영상·저작물을 사용하고 북한에 낸 저작권료가 법원에 공탁돼 있는데 약 20억원 정도다. 그걸 강제집행할 것이다. 강제집행이 이뤄지면 김 위원장과 북한의 책임을 인정한 첫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 방북에도 송환 이슈화 안 돼… 국가가 적극 나서야”

사단법인 ‘물망초’에서 국군포로송환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수한 예비역 육군 준장(현 울산대 사회과학대학 교수·사진)은 21일 “국군포로 문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부분으로, 북한에 지속적으로 송환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위원장은 이날 서울 방배동 사단법인 물망초 사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 실종자를 기억하면서 그들이 살아서든 시신으로든 꼭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 미군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정 위원장과의 일문일답.

―6·25전쟁 당시 귀환하지 못한 국군포로가 적지 않다. 북한이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자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2만~8만명의 국군포로가 정전협정 이후에도 북한에 억류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전후복구사업에 투입할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구소련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군과 일본군 포로를 즉각 돌려보내지 않고 강제노역에 동원한 사례가 있다. 전쟁 과정에서 많은 인적 손실을 경험한 북한은 전후복구에 국군포로를 투입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포로의 의사를 반영한 송환은 안 됐다는 얘긴가.

“정전협정은 자유송환 원칙을 적용해 복귀하고 싶은 사람은 막지 말고 돌려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국군포로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북한은 포로들에게 휴전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남한으로 갈 것인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남한에 돌아가고 싶은 의사를 드러내면 총살했다는 증언도 있다. 북한은 처음부터 국군포로들을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고 정전협정 체결에 필요한 소수의 인원만 송환한 것으로 본다.”

25일 서울공항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 국군 전사자들의 유해가 봉환되고 있다. 연합뉴스

―나라를 위해 싸웠는데, 국군포로 문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부분 아닌가.

“당연하다. 국군포로 증언에 의하면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러 평양에 온다는 소문이 북한에 있었다고 한다. 일부 포로들은 ‘북한 땅에 국군포로가 살아 있다는 것은 남한에도 알려져 있으니 포로 송환을 요구할 것이다. 김 대통령이 방북하면 돌아갈 수 있다’고 기대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어 한스러웠다고 한다. 대통령 3명이 북한에 갔는데 국군포로 문제가 한 번도 이슈화되지 않은 것은 서글픈 일이다.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지 않으면 앞으로 전쟁이 났을 때 누가 목숨 바쳐 싸우겠나. 워낙 고령이신 분들이라 한시가 급하다.”

―정부 협조가 없으면 국군포로 문제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제가 볼 때는 그동안 정부가 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 같다. 살아 있는 증거가 있고,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그분들을 기리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현역 시절 미군과 함께 만찬행사를 할 때, 미군이 테이블 하나를 별도로 만든 것을 본 적이 있다. 단상 옆에 테이블을 마련해 깃발도 걸고 초를 켜고 레몬도 둔다. 와인잔도 엎어놓는다. 그 테이블은 돌아오지 않는 동료를 위한 자리다. 초는 그들이 돌아올 때 길을 밝혀 줄 등불이다. 레몬은 그들의 고통을 상징한다. 미군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 실종자를 기억하면서 그들이 살아서든 시신으로든 꼭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다. 미군들은 그걸 보면서 ‘나도 전장에서 포로가 되거나 실종돼도 국가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나를 잊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정부가 더 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입해 생존해 계신 국군포로 지원을 강화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

사무엘 웰스 우드로윌슨센터 선임연구원은 21일 세계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은 미국이 냉전 상황을 효과적으로, 또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며 ‘잊혀진 전쟁론’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드로윌슨센터 홈페이지(웰스 박사 제공)

◆“한국전, 잊혀진 전쟁 아냐 … 세계 갈등에 혜안 주는 창”

미국에서 냉전사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사무엘 웰스 우드로윌슨센터 선임연구원은 21일 “한국전쟁에 개입했던 국가들은 여전히 나름의 문제로 대립하고 있다”며 “한국전쟁은 여전히, 오늘날 세계의 갈등에 혜안을 주는 창”이라고 강조했다.

6·25전쟁은 ‘두 개의 한국’ 간의 전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1991년 소련 해체 전까지 냉전의 구도를 재정립하는 전쟁이기도 했다.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미국은 대외정책과 안보정책을 바꾸고 대대적인 군비 강화에 들어갔다. 당시 전쟁에 개입해 전쟁의 판도를 바꾸고 미국을 곤란하게 만든 중국은 오늘날 미국과 새로운 갈등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웰스 박사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세계일보와 진행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한국전을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한다”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2차 세계대전의 다른 기억과 달리 성공적으로 비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전쟁 후) 미국의 목표는 한반도 문제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가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오늘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겹쳐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는 6·25전쟁의 중요성을 간과해선 결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전쟁의 경험이 미국의 대외정책과 안보정책을 바꿔놨고 또 강화시켰다”며 “전쟁은 미국이 냉전 상황을 효과적으로, 또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고 강조했다.

웰스 박사는 최근 미국 안팎에서 제기되는 주한미군 축소 또는 철수 주장과 관련해 “지금은 주한미군 축소나 철수를 거론할 때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최근 주한미군 축소와 방위비 분담에 대한 논란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잘못된 국가주의자(mistaken nationalist)의 길을 걷고 있다”며 “문재인정부와 미국은 대북정책에서 대열을 맞춰 나가야 하며 가능할 땐 중국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 부상 이후) 새롭게 출현하는 G2 시스템에서 한국은 과거와는 달리 때로 미국과 정치, 경제, 안보 이익에서 다른 우선순위를 가질 것”이라며 “미국은 이 관계를 주도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효율적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또 공통의 정책을 만들기 위해 워싱턴과 서울은 가능한 한 자주 세밀한 대화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전쟁은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나.

“다양한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미국과 소련 사이 이미 패권 경쟁이 진행 중이었다. 남북은 어느 쪽이 주도하는 통일을 이룰 것인가를 두고 대립했다. 당시 얄타회담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무역과 철도 등을 놓고 중대한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소련의 전면적 지원을 받고 남쪽에 있는 공산세력의 지원을 받으면 1주일 내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의 대담한 해결책은 마오쩌둥에게 그가 원하는 모든 협조와 양보를 하고,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허가하며, 마오쩌둥에게 북한의 남침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는 것이었다. 소련으로서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부활에 맞서 협력적 완충지대를 갖고, 한반도의 부동항과 천연자원, 중국과의 혈맹관계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진영을 확대하는 효과도 노렸다.”

―해리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은 전쟁을 제한전으로 치르려 했다. 당신의 평가는.

“나는 대체로 한국전쟁에서 트루먼의 결정에 대해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남침 전 트루먼의 관심은 주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1950년 11월 의회선거에서 공화당의 세력을 키우는 것과 같은 국내 이슈에 집중돼 있었다. 북한이 침입하자 트루먼은 곧바로 한국에 대한 미군의 지원을 승인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미국의 개입을 최소화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남한 군대가 무너졌고, 트루먼은 지상군 투입을 승인했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큰 성공을 거뒀을 때 트루먼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38선을 넘어 북상하는 것으로 목표를 확대했다. 하지만 중국의 대규모 개입이 다시 백악관의 전략을 수정시켰다. 미국의 목표는 항상 소련과의 전면전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한국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책 제목, ‘최악의 시나리오 대비’(Fearing the Worst)는 어떤 의미인가.

“트루먼 행정부는 시간이 갈수록 한반도에서 위협을 느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1954년쯤 소련의 핵능력이 미 본토로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그해 10월 중국의 대규모 개입은 위협을 훨씬 증가시켰다. 11월 말, 트루먼과 그의 최측근 참모들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공, 소련과 전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긴 전략적인 검토를 한 뒤 트루먼 행정부는 제한전략을 승인했다. 38선 인근에서 강력한 저지선을 확보하고, 휴전협상을 하는 전략이었다.”

―전쟁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나.

“대체로 성공이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트루먼 행정부는 남한의 독립을 지켜냈다. 한국 주변에 위치한 공산국가 세 곳에 심각한 상처를 입히면서 말이다. 이 전략은 한국의 대비태세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는 한반도의 두 당사자 사이에 갈등을 재고조시켰고, 결국 ‘두 개의 한국’이 남게 됐다.”

―미국에선 6·25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 된 건가.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한국을 잊혀진 전쟁으로 생각한다. 미국인들에겐 이 전쟁이 2차대전의 다른 기억과 달리 성공적으로 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전에서 미국은 ‘비겼다’. (공산 진영에)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2년간의 교착 국면을 거쳐, 휴전선이 설정되고 포로들이 귀환한 뒤 전쟁에 대한 관심은 식었다. 공화당에서 트루먼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아졌고, 1952년 대통령 선거도 쉽지 않은 국면이 됐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전쟁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한 이 같은 해석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여러 당국자들과 전문가들이 평가하듯이, 나는 한국전쟁의 경험이 미국의 대외정책과 안보정책을 바꿔 놨고 또 강화시켰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냉전 상황을 효과적으로, 또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

―전쟁 후 한국은 미국에 어떤 의미였나.

“한국전쟁은 미국에 남한의 전략적 중요성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이는 오랜 안보동맹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확대하고, 또 경제적 원조를 확대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산업 발전이 가능했다. 아이젠하워 정권은 미국정보센터(the 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를 만들어서 전 세계에 미국의 문화, 교육, 정보의 동맹을 만들었다. 한국 학생들을 미 대학에 초청해 교육했고, 한국은 경제, 교육, 사회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혜택을 받았다.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1980년대 이후 북한 핵개발이 본격화되면서 훨씬 심화됐다.”

―당신은 왜 6·25전쟁을 연구하나.

“나는 한국전쟁이 당시 지도자들의 행위와 동기를 연구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는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또 전쟁에 주요국들이 모두 개입돼 있으며 그들이 여전히 나름의 문제로 대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연구에 매료됐다. 한국전쟁은 여전히, 오늘날 세계의 갈등에 혜안을 주는 창이다.”

―오늘날 미·중경쟁이 과거 미·소경쟁을 대체하고 있다. 차이는.

“가장 큰 차이는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소련과의 사이에서 동맹국들과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시시각각 조정하지 않아도 됐다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 동아시아의 미국의 동맹국들은 중국과 광범위한 무역, 금융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와 대북제재 불이행, 남중국해에서의 항행의 자유 침해를 제재하려는 워싱턴의 정책 목표에 미국의 모든 동맹국들이 동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훨씬 복잡한 정책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이 처한 상황도 과거 냉전시대와 다른것 같다.

“새롭게 출현한 G2 시스템에서 한국은 과거 냉전시대와는 달리 때로 미국의 우선순위와 다른 정치, 경제, 안보 이익을 가진다. 미국은 이 관계를 주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효율적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공통의 정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워싱턴과 서울은 가능할 때마다 세밀한 대화를 가져야 한다.”

―전쟁 이후 지금까지 미군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축소, 혹은 재배치를 원하는 듯하다.

“최근 주한미군 축소, 방위비 분담에 관한 논란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잘못된 국가주의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동맹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으며, 동맹을 편협한 사업적 거래의 틀로 취급하려 한다. 그의 생각은 동아시아 지역안보에서 미국의 전략기조와 맞지 않다. 미국과 한국이 북한의 도발과 중국의 자국중심주의적 정책을 맞닥뜨렸을 때, 미국은 주한미군의 움직임과 관련해 어떤 것이라도 한국과 긴밀히 협의해야 한다. 지금은 주한미군 축소나 철수를 거론할 때가 아니다. 문재인정부와 미국은 대북정책에서 대열을 맞춰 나가야 하며 가능할 땐 중국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사무엘 웰스 박사는…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국제관계·안보 분야 싱크탱크 우드로윌슨센터에서 냉전사를 연구하고 있다. 1997년 우드로윌슨센터에 국제안보연구 프로그램을 설립했고, 윌슨센터 부소장을 지냈다. 냉전사 연구에 손꼽히는 역사학자이자 국제정치학자로, 한국전쟁 연구에도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왔다. 최근 ‘한국전쟁 냉전 판세를 바꾸다 - 최악의 시나리오 대비(Fearing the Worst)’를 출간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졸업 ●하버드대 석·박사 ●웰즐리대학,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교수 ●우드로윌슨센터 부소장, 국제안보연구 프로그램 총괄 디렉터

국군 유해발굴단 장병들이 최근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 화살머리고지에서 6·25 참전용사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있다. 국군 유해발굴단 제공

(2회) 찾지 못한 전사자 유해

◆고향 땅 못 밟고 산야 떠도는 호국영령… 기약 없는 ‘귀환 약속’

지난 17일, 강원도 철원군 일대 비무장지대(DMZ) 내에 화살촉 모양으로 돌출됐다 하여 이름 붙여진 ‘화살머리고지’. 군 당국은 이곳에서 진행 중이던 유해발굴작업을 잠정 중단했다. 전날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이날 인민군 총참모부가 추가 군사행동을 예고한 뒤였다. 발굴 현장이 군사분계선(MDL)을 중심으로 북측과 바로 맞닿아 있는 만큼 장병들의 안전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군은 다음날인 18일 화살머리고지 일대 유해발굴작업을 전격 재개했다. 9·19 군사합의 유지의 의지가 반영된 결정으로 풀이됐다. 군은 지난해 진행한 단독 발굴작업에서 이미 261구의 유해를 찾아낸 성과도 있었다. 군 관계자는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은 남북한이 손을 맞잡고 평화와 화합의 길로 가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6·25전쟁 종전선언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상징성을 지닌 사업이기도 하다”며 “언제까지 남측 단독 발굴만 하진 않을 것”이라고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65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6·25전쟁이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닿아 있는 살아 있는 역사”라고 강조했다. 우리의 삶과 닿아 있는 6·25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많은 국군 장병들의 유해는 아직도 이름모를 산야에 남겨져 있다. ‘마지막 한 분의 유해를 모시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귀환(歸還)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 걸까.

◆6·25 전사자 유해발굴 현황

정부는 2000년에 처음으로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2007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된 이래 10여년간 전사자들을 조국의 품으로 모시는 사업을 진행해 왔다. 2000년부터 2019년까지 1만2137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이 중 아군 전사자는 1만614구로 판명됐다.

6·25전쟁이 끝나고 50여년이 지난 뒤에야 발굴사업을 시작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작지 않은 성과다. 지난해에는 DMZ 내 화살머리고지에서도 유해발굴을 진행했다. 2018년 남북이 ‘9·19 군사합의’를 통해 군사적 긴장을 완화, 오랜 세월 동안 다가서지 못했던 DMZ 내에서의 유해발굴을 가능케 만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12만3000여구의 국군 전사자가 전국의 산야에 묻혀 있다.

국방부는 지난달 6일 올해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11월 말까지 전국 36개 지역에서 전개된다고 밝혔다. 경기도 의왕시 ‘모락산 전투’ 전사자 유해발굴부터 시작됐다. 이곳은 6·25전쟁 당시 국군 제1사단 15연대가 중공군 1개 연대와 나흘간 혈전을 벌였던 곳이다. 한강 이남에서 유엔군 북진을 저지하려던 적의 의도를 무산시키고 1·4후퇴로 내주었던 서울 재수복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원래는 올 3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발굴사업을 전개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지연됐다. 한동안 유해발굴이나 유가족 탐문 대신 발굴지역 분석과 자료 검증, 유전자 데이터 분석 등에 치중했다.

◆호응 없는 北… 남북공동 유해발굴은 언제쯤

강원도 철원군 일대 ‘화살머리고지’에서는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과 7월에 국군과 중국군의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로부터 65년이 흐른 2018년. 남북은 9·19 군사합의를 통해 DMZ를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이 화살머리고지에서 공동 유해발굴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후 공동 발굴을 하자는 남측의 요청은 묵살됐고, 지난해엔 남측 단독으로 유해발굴작업이 진행됐다. 지난해 2월 말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아무런 성과 없이 ‘노딜’로 끝난 직후의 일이다. 우리 정부는 단독 발굴작업을 남북공동 유해발굴을 위한 사전준비 차원이라며 애써 위로했다.

합동안장식 지난 19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6·25 전사자 발굴유해 합동안장식’ 영현 봉송 중에 서욱 육군참모총장(왼쪽에서 두번째)이 유가족을 부축하며 이동하고 있다. 육군 제공

지난해 4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된 단독 발굴작업에서 261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유골은 2030점, 유품은 6만7000여점을 회수했다. 유해 261구는 국군 117구, 중국군 143구, 유엔군 1구로 추정됐다. 특이한 점은 중국군의 유해가 143구로 예상보다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현재 DMZ 내 미수습 국군 전사자 유해는 약 1만여구일 것으로 추정된다.

국방부 유해발굴단 관계자는 “애초에 국군 전사자 유해 2백여구를 포함해 미군과 프랑스군 등을 합해 모두 3백여구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됐는데 발굴 면적의 약 40%에서만 261구가 나왔으니 추정치보다 훨씬 많은 유해가 나온 것”이라며 “올해엔 약 60%의 면적에 대한 발굴작업이 진행될 예정으로 지난해보다 더 많은 유해가 발굴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군은 올해도 이곳에서 홀로 유해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앞서 지난 4월 20일 재개된 유해발굴작업에 대해 군 통신선을 통해 북측에 재개를 통보했다. 북측에서는 아무런 답도 얻지 못했다.

올해 유해발굴작업에는 지난해엔 없었던 공병대대가 새로 참가한다. 국방부는 “지난해 12월에 창설된 지뢰제거 전담부대인 지작사 예하 특수기동지원여단 소속의 공병대대가 참가함에 따라 다수의 전사자 유해와 유품을 발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발굴 범위를 넓히면서 불발탄과 지뢰 등의 폭발 위험을 고려한 것이다.

◆다양한 협업 추진

국방부는 올해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등 10여개의 관련 부처와 함께 유해발굴사업 관련 다양한 협업을 추진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올해 1만2500개의 유가족 유전자 시료를 확보하고, 오는 10월까지 신원확인센터를 준공해 발굴 유해의 신원확인을 위한 여건을 갖추기로 했다.

현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모두 5만여개의 유가족 유전자 시료를 확보하고 있지만, 미수습된 12만3000여명의 전사자와 실종자를 고려하면 아직도 모자라는 수준이다. 이 때문에 국방부는 발굴 유해의 신원확인에 필수적인 유가족 유전자 시료 채취를 독려하는 데 힘을 쏟을 방침이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임진각서 사진전 6·25전쟁 70주년을 앞두고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21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을 찾은 시민들이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주제로 전시한 사진들을 관람하고 있다

유해발굴단 관계자는 “6·25전쟁 이후 발굴한 유해 1만여구와 아직 미수습된 유해 12만3000여구 등 모두 13만3000여구의 유해에 대한 유전자 시료 채취가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3월 기준으로 6·25전쟁 참전 전사자 신원확인이 끝난 유해는 고작 142구에 불과하다.

국방부가 정한 올해 유해발굴의 비전은 ‘국가를 희생하신 분들을 찾아 가족의 품으로 모시는 국가무한책임 완수’다. 2022년까지 유가족 유전자 시료를 11만개 확보하고, 연 500구 이상의 유해를 발굴하고 군단급 발굴팀과 발굴부대의 예산·물자·지침서를 조기 하달하는 등 여건을 보장하는 게 목표다.

국방부는 지난해 ‘최근 5년간 최다 유해발굴’, ‘2018년 대비 유가족 유전자 시료 2배 이상 증가’ 등 성과를 거뒀다며 올해는 양적 성공을 유지한 가운데 질적 향상을 이뤄내도록 노력을 집중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700여명 요원 36개국서 실종·전사자 추적

‘조국은 당신들이 돌아올 때까지 결코 잊지 않겠다.’

미국 하와이에 위치한 미 국방부 산하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의 표어다. 미국이 전사자 유해 수습과 송환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2018년 7월 27일 오전 주한미군 장병들이 북한 원산 갈마비행장에서 6·25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를 싣고 경기 오산 미 공군기지에 도착한 C-17 글로브마스터Ⅲ 수송기에서 전사자 유해가 담긴 상자를 옮기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미국은 과거에 개입했던 전쟁에 참전했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와 전사자를 찾는 임무를 수행하고자 1976년에 전쟁포로·실종자 확인 합동사령부(JPAC)를 만들었다. 하지만 미군 실종자 전사자 가족들이 포로·실종자 귀환 노력과 유해 발굴 사업을 강화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사무소(DPMO)와 공군 생명과학연구소를 통합해 2015년 DPAA라는 통합기구로 개편했다. DPAA의 예산은 2020회계연도 기준으로 1억4630만달러, 우리 돈으로 무려 약 1800억원에 달한다.

700여명의 DPAA 요원은 36개국에 흩어져 근무한다. 이들은 실종자와 전사자를 찾기 위해 북한을 비롯한 미수교국도 방문한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을 비롯해 제1·2차 세계대전 당시 실종자와 미수습 전사자까지 찾고 있다.

DPAA 요원들은 미군 유해가 있다는 정보나 문헌 자료 등을 입수하면 현지로 이동해 유해를 수습, 하와이의 본부로 송환한다. 이후 DNA 검사와 정황 증거, 인류학적 분석 등을 통해 유해의 신원을 정확히 확인한다. DPAA는 사망한 지 수십년이 지난 유해에도 적용할 수 있는 정밀한 유전자 감식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신원이 확인되면 가족을 찾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

DPAA는 2018년 6월 제1차 북·미 정상회담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6·25전쟁 미군 유해송환 문제를 제기하면서 북한이 55개의 상자에 담아 송환한 미군 유해 중 59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DPAA는 추가 미군유해 발굴 및 송환을 위한 협의를 재개하고자 북한 측에 여러 차례 연락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6·25 전쟁 70주년인 2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차량 유리창에 맺힌 빗물에 태극기 모양 조형물이 비치고 있다. 연합뉴스

(3회) 흐르는 세월 속에 속타는 이산가족들

황해도가 고향인 유모(96)씨는 6·25전쟁 당시 혼자 월남하면서 가족들과 헤어졌다. 이미 70년이 지났지만 북에 두고 온 어머니나 동생들을 잊은 적이 없다. 그는 아직도 북에 두고 온 3명의 동생 등을 찾고 있었다. 유씨의 아들 김모(60)씨는 최근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가 공동 운영하는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어머니가 연로하셔서 가족분들의 생사만이라도 꼭 알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올해 남북 간에 이뤄진 전체 이산가족 교류는 상봉이나 생사확인은 고사하고 민간 차원의 서신교환 3건이 전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은 개별적이고 고유해 절절했지만, 남북 간 대치는 절절함의 개별성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6·25전쟁을 전후로 남북 국경을 건넜다가 영원히 가족과 헤어지게 된 이산가족 1세대 생존자가 점점 줄고 있다. 본격적으로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시작된 지 올해 20년째이지만 여전히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특히 최근 남북관계가 위기에 빠지면서 이산가족들은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상봉의 날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다.

◆이산가족 고령화에도 상봉행사 ‘찔끔’

22일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등록 이산가족은 13만3386명이다. 등록된 이산가족 가운데 8만2019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생존자(5만1367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2004년까지만 해도 10만명이 넘었던 생존자는 해가 지날수록 줄어들고 있다.

특히 생존자의 3분의 1가량은 80세 이상의 고령자다. 80대가 39.6%로 가장 많고, 이어 90세 이상이 25.8%, 70대 20.5%, 60대 8.1%, 59세 이하 5.9% 순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이산가족이 만날 기회인 상봉행사는 2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지 않아 이산가족의 애를 태우고 있다. 2018년 8월 진행된 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가장 최근 행사다. 당시 행사는 2018년 4·27 판문점선언 이행 차원에서 마련된 것으로, 2015년 10월 이산가족 상봉행사 이후 2년10개월 만에 성사됐다.

통일부는 올해 이산가족 상봉 20주년을 맞이해 대면상봉과 고향방문 등의 민간교류행사도 추진한다는 계획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접촉이 어려울 경우 화상상봉과 영상편지 교환도 준비돼 있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이런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다.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군사행동을 예고하는 등 남북관계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으면서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2018년 9·19 평양공동선언에서 상설면회소 복구, 영상편지, 화상상봉을 먼저 합의해서 작년에 화상상봉장 개보수 등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을 진행했다”며 “최근 남북관계가 정체되고 있어서 북측과 하는 사업 형태로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남북관계의 악화에 따라 이산가족 교류까지 멈춘 상황이 처음은 아니다. 1985년 ‘남북한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이 꾸려져 서울과 평양에서 역사적인 첫 상봉이 이뤄지고 15년 뒤에야 남북 6·15공동선언 합의와 함께 본격적인 상봉이 진행됐다. 이후 2007년까지 매년 1∼3차례씩 상봉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2008년부터 현재까지는 진행되지 않은 해가 더 많았다. 특히 남북관계가 경색됐던 2011∼2013년, 2016∼2017년은 장기간 이산가족 교류가 이뤄지지 않았다.

◆생사확인이라도 먼저 해야

이산가족이 초고령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면적인 생사확인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히고 있다. 당국 차원에서 가족의 생사를 확인한 경우는 전체 이산가족의 절반에 못 미친다. 통일부가 2016년 이산가족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시급하게 추진돼야 할 정책으로 응답자의 압도적인 다수(76.3%)가 ‘전면적인 생사확인 추진’을 꼽았다. 응답자는 이어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10.3%), ‘남북 간 서신교환제도 마련’(4.0%), ‘정부 차원의 전화통화제도 도입 및 활성화’(2.9%), ‘추석 등 정기적인 고향 방문 추진’(2.6%) 등을 선택했다.

이산가족 교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직접 상봉 규모를 획기적으로 늘릴 필요성도 제기된다. 상봉 대상자로 선정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보니 거의 ‘희망고문’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이산가족 상봉은 대부분 1회당 남북 각 100명씩에 그쳤다. 이 정도 인원으로 지금까지 모두 4355가족, 2만761명이 상봉했다. 화상상봉은 2005∼2007년 557가족, 3748명을 대상으로 진행됐지만 이후 중단된 상태다. 2000년 이후 대면상봉과 화상상봉 모두 합쳐서 1년 평균 245건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평균기대수명을 초과한 고령의 이산가족을 대상으로 특별상봉을 진행하거나 혼인·사망·생일 등 가정 대소사와 명절에 수시상봉을 만들자는 제안도 나온다.

무엇보다 남북이 이산가족을 정치적 문제에서 분리해서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부모, 자식 또는 형제, 자매 등 가족이 서로 생사확인과 교류를 하는 것은 철저히 인도주의적 문제인 만큼 정부가 우선 과제로 삼고 정례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北, 항상 정치적 이용… 고향 방문 번번이 막혀”

“부모님 모두 북한에 있는 고향땅 한 번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산소가 휴전선 안에 있어서 먼발치까지 성묘를 하러 몇 번 갔었는데,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도 가지 못해서 안타까워 하셨죠. 6·25전쟁 때 경황 없이 빈손으로 피란 와서 평생 남들보다 열심히 사셨는데….”

장만순(61·사진) 일천만이산가족위원장은 지난 18일 세계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6·25전쟁 이산가족으로서 끝내 가족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는 통일부에 등록된 유일한 이산가족 관련 민간단체로, 올해 설립 39주년을 맞았다. 위원회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부터 1953년 7월 휴전 전까지 남에서 북으로 이주하며 생겨난 이산가족이 남북 합쳐 1000만명에 이른다. 세월이 지나 현재 남아 있는 실향민은 대략 4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산가족 상봉이 한동안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최근의 남북관계 위기까지 맞으며 이산가족들은 더욱 애를 태우고 있다.

장 위원장은 “초고령 이산가족의 고향 방문 생각은 굴뚝같지만 항상 북한이 정치적으로 이용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북한은 남쪽에서 접촉하면 꺼리고 우리와 같은 민간단체도 북한과 접촉하려면 제약조건이 많았지만 해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등을 했던 적이 많다”며 미국과 호주에 있는 해외지부 등을 통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을지도 알아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산가족문제를 인권문제로 국제사회에 호소하는데도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엔 인권이사회 총회가 열릴 때 이산가족에 대한 것을 설명하는 등 국제사회에 이 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에서 60∼70대인 2세대와 30∼40대인 3세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1세대가 못 이룬 고향방문 소원을 위해 세미나 개최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의 아픈 과거를 되돌아보고 해결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이산가족의 날’(8월12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는 것도 추진하고 있다.

장 위원장은 “정부가 이벤트 같은 상봉 대신 고령 이산가족을 위해 1년에 20회든 30회든 상봉 횟수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고향땅에서 성묘하는 방안을 추진하면 좋겠다”며 “이와 함께 국제단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지구촌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서 북한의 호응을 끌어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4회) 사라져가는 참전국 병사들

1953년 2월 한국 파병 직전의 데이비드 밀스씨

◆“美에 한국 같은 동맹은 없어… 70년 전 참전용사 기억 감사”

화려한 조명 속에 휴전협정이 한창이던 1953년 4월24일 밤, 서울에서 동북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강원도 철원의 ‘철의 삼각지대’ 일부인 ‘아웃포스트 해리’. 미군 기지와 중공군 기지 사이에 위치한 아웃포스트 해리에 중공군 수천명이 인해전술식으로 몰려들었고, 어둠 속에서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됐다.

17세의 나이에 미 제3보병사단 15연대 2대대 소총수로 아웃포스트 해리 전투의 한가운데 있었던 데이비드 밀스(85)씨는 22일(현지시간) 세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그날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 되뇌었다. “그날 밤 17세 소년은 어른이 됐거든요.”

데이비드 밀스

밀스씨는 중공군 수천명의 거센 공격을 받은 그날에 대해 “가장 힘든 전투였다”며 “중공군은 미군의 월등한 무기 수준을 감안해 야밤에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17세의 소년은 무려 아홉 군데나 부상을 입었다. 철모에 총탄 구멍이 2개 있었고 그중 하나는 상처가 깊었다. 6발은 다리, 1발은 팔에 상처를 각각 남겼다.

전투 끝에 중공군에 붙잡힌 밀스씨는 정전을 거쳐 8월 24일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기까지 4개월간 혹독한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중공군에게 잡혔을 때 목에서 피가 나는 등 크게 다친 탓에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좌절하기도 했다. 밤새 가족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일어서면 머리가 닿고 다리를 뻗을 수 없는 데다 천정은 나무로 얼기설기 얹어 하늘이 훤한 독방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2주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상처가 감염되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며 “살기 위해 먹었고, 광산에 세워진 수용소에서 6주 동안 포로가 물밀듯 들어왔다”고 말했다.

밀스씨는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기 2∼3일 전 북측 수용소에서 국제적십자사가 제공하는 미군 음식을 4개월 만에 처음 먹었다. 송환 당일 판문점으로 이동하는 러시아 트럭에서 미군 장교가 건넨 담배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밀스씨처럼 당시 미군 8000여명이 중공군과 북한군의 포로가 됐고, 그중 4000여명만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보고 있다. 미국과 영국, 터키, 오스트리아, 캐나다, 프랑스 등 16개국이 참전했다. 인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이탈리아, 독일 등 6개국은 의료지원국이다. 연인원 178만9000명이 참전한 미국은 전사·부상·포로·실종자가 13만3996명에 달한다.

밀스씨는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주 휴턴의 본가에서 가까운 뉴욕 군경찰로 남은 복무기간을 채운 뒤 1955년 12월 3년2개월여 군생활을 마쳤다. 전역 무렵 결혼해 두 아들과 두 딸, 6명의 손자와 7명의 증손자를 뒀다. 군 복무 등으로 고교를 졸업하지 못한 그는 40세에 펜실베이니아대 경영전문대학원(MBA) 와튼스쿨을 졸업한 뒤 필라델피아의 대형병원 부원장까지 지내고 은퇴할 때까지 줄곧 의료계에 종사했다.

밀스씨는 6·25전쟁 당시 겪은 한국인에 대해 “똑똑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감사할 줄 안다”며 “전쟁이 거의 70년 전 일인데 아직도 참전용사를 찾아 감사를 전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인은 정말 훌륭하다”고 말했다.

밀스씨는 “미국에 한국만큼 절실한 동맹은 없다”며 “미국 최고의 동맹으로 이런 관계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최근 북한의 잇따른 도발에 대해 “사람들은 평소 ‘터프하게’ 행동할 때가 있는데, 진짜로 강한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북한의 행동들은 모두 쇼이고, 이것이 북한”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의 역사를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다면서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들어서기를 기도하겠다”고 강조했다.

1953년 6월 한국 파병시절의 프레드릭 호너먼씨

프레드릭 호너먼(90) 미 육군 25사단 27보병연대 예비역 중위도 22세에 6·25전쟁에 투입됐다. 그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에 처음 투입된 1953년 서울역 앞에서 사진을 찍은 기억이 난다. 인근 빌딩이 다 무너져 있었다”며 “그때는 한강에 다리가 하나였는데 지금은 40개가량의 다리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회고했다. 2년 전 한국군 창설 7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돼 서울을 방문했을 때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호너먼씨는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1월 장교로 전장에 투입됐다. 그해 6월 서울과 평양을 잇는 다리 중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평화의 다리를 사수하는 임무를 맡았고, 파주 인근에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양쪽 다리를 다쳐 파주의 한 병원에서 1차 수술을 받았다. 상황이 급박해 서울로 이송된 지 하루 만에 일본으로 후송돼 2차 수술을 받은 뒤 3개월을 꼬박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몇 달간 재활치료 끝에 제대하고 미시간대학에 복학했다

프레드릭 호너먼

호너먼씨는 “일본에서 환자로 3개월을 보낸 인연으로 한국전쟁 이후 일본에서 성직자의 비서로 42년을 살았다”면서 “그 기간에 한국을 몇 차례 오갔고, 한국의 발전상은 나를 매번 놀라게 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1958년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이주해 세 아들을 뒀고, 2000년 고향인 미 필라델피아 랜케스터로 돌아와 은퇴한 뒤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은퇴자 커뮤니티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호너먼씨는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며 “한국은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다. 한국에 아주 큰 일이었다. 그 이후 일본과 관계가 좋지 않지만 더 좋아질 것이고 꼭 그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울러 “한국은 통일돼야 한다. 한 나라이어야 한다”며 “하나의 언어, 같은 인종, 같은 지역인데 지금은 갈라져있다. 그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호너먼씨는 6·25전쟁 참전국에 여전히 호의를 보이는 한국 정부에 거듭 감사 인사를 전했다. 2018년 10월 국군 창설기념일에 정부 초대로 한국을 찾았을 때 정경두 국방장관과 한 테이블에 앉아 여러 이야기를 나눴고, 그 인연으로 올 초 정 장관이 워싱턴을 찾았을 때 다시 만나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과거를 중요하게 여기고 70년 전 도움을 준 참전용사들을 변함없이 기억해준다. 너무나 감사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고 우니 나야 대령의 유가족들이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주일골에 있는 기념비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대구 수성구 제공

◆각 지자체, 유엔 참전용사 추모제로 끝없는 보은

“북괴의 남침을 저지하다 숨진 고(故) 나야 대령에게 신의 가호가 있으라.”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가 치열하던 1950년 8월 12일, 경북 칠곡군 왜관읍 지역을 시찰하던 중 북한군이 매설해둔 지뢰가 폭발해 39세의 나이에 이국땅에 묻혀야 했던 인도군 대령 우니 나야(Unni Nayar)를 기리는 비문의 한 구절이다.

나야의 시신은 당시 유엔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주일골 야산에서 화장됐고, 그해 12월 7일 기념비도 건립됐다. 기념비를 관리하는 대구 수성구는 2012년 국비와 구비 1300만원을 들여 헌화대 설치 등 나야 대령 기념비 정비 공사를 했고, 매년 6월이면 참배 행사를 열고 있다.

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전국 지자체들이 추모제와 참배행사를 여는 등 한국으로 달려와 젊음을 불사른 해외 참전용사들의 값진 희생을 기리고 있다.

24일 부산시 등에 따르면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인 ‘부산 UN기념공원’에는 현재 11개 참전국 2309명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 이곳에는 매년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유엔군 전몰장병을 기리자는 뜻에서 국제 추모행사인 ‘턴 터워드 부산’을 열고 있다.

참전용사 가운데는 고국에서 생을 마감한 11명이 한국 땅에 묻히기를 희망하면서 이곳에서 영면에 들었다. 미국(2명), 벨기에·영국 각 1명 등 총 4명의 참전용사도 사후 안장 허가를 받은 상태다. UN기념공원 내 기념관에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사진 자료와 기념물이 전시돼 있다.

이연수 재한유엔기념공원 관리처장은 “UN기념공원은 한국전쟁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유엔군의 희생과 봉사 정신에 감사하고 추모하는 성지”라며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에서도 매년 기초지자체가 기념비를 세워 해외 참전용사들의 넋을 달래는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나야 대령을 비롯해 한국전쟁 당시 주한미군 후방기지 사령관으로 활약한 메카우 장군, 미국 공군 대령으로 전쟁에 참전한 딘 헤스 대령 등이 대표적인 참전용사로 꼽힌다. 김대권 대구 수성구청장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장렬히 순직한 참전용사의 기념비가 지역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꾸준히 그 희생정신을 되새겨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5회) 미래까지 잊혀져선 안 된다 <끝>

◆한·미 동맹, 안보 외 영역으로 진화 예상… ‘선제 대응’ 과제로

“20년 동안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미국 시민이 중국으로 여행을 하거나 중국과 교역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했다.”

6·25전쟁은 남북 간 분단체제만 강화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중국사 전문가 폴 로프는 책 ‘옥스퍼드 중국사 수업’에서 발발 70년이 된 6·25전쟁이야말로 “중·미 관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며 이같이 적었다.

6·25전쟁은 우리에겐 동족상잔의 비극이었고, 로프의 지적처럼 세계사에는 냉전을 고착화시킨 전쟁으로 기억된다. 남북은 분단이 강화됐고, 1980년대 북한의 핵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긴장은 더욱 심화했다.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냉전은 무너졌지만 중국이 부상하면서 미·중 간 전략경쟁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한반도가 짊어진 이중적 구조인 셈이다.

한국은 남북 통일을 지향하면서 새로운 한·미 동맹 및 주변국들과의 관계 개선을 동시에 모색해야 할 처지이다. 6·25전쟁 70년의 시점에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동북아 현대사의 빅뱅이었던 6·25전쟁에 가려진 ‘잊혀진 미래’를 추적한다.

◆미래로 가는 한·미 동맹

오늘날 한·미 동맹은 새 도전을 맞고 있다. 미·중 전략경쟁이 미·소 경쟁을 대체하면서 한국은 새로운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대북 포용정책을 강조하는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과 미국은 대북 정책에서 항상 같은 대열에 서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미국에서 전통적 동맹 중심주의를 뒤흔들고 있다. 악화하는 한·일 관계도 한·미 동맹에는 부담이다.

지난해 12월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 국무부 부장관과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는 워싱턴포스트에 공동 기고한 글 ‘66년간 지속된 한·미 동맹이 깊은 곤경에 빠졌다’에서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GSOMIA) 종료 결정을 ‘동맹 남용 행위’라고 비판했다.

한국의 대응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이를 70년 한·미 동맹의 위기로 보고, 동맹의 가치가 더 훼손되기 전에 이를 지켜내야 한다는 쪽이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25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한·미 동맹의 위기는 지엽적 문제보다는 가치에 대한 기본이 제대로 서 있느냐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최 부원장은 “중국의 부상을 바라보는 시각, 북한의 핵위협을 바라보는 시각, 또 한·미 양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체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미 동맹은 가치 동맹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이다.

반면 변화된 구조를 새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은 통화에서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지던 동맹을 세속화할 수 있어야 미래지향적 한·미 동맹이 가능하다”며 “한·미 관계는 깊어져야 하지만 동맹은 얕아지는 게 바른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동맹의 출발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고, 동맹의 존속은 역설적으로 한반도에 군사적 위협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미국 내 동맹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 같은 인물의 등장을 역으로 미래 지향적 동맹관계 설정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새 시대의 동맹에 대해 대립된 견해가 있지만, 어느 쪽이든 70년 전 전쟁으로 형성된 한·미의 ‘특별한 관계’는 존속될 것이라는 점에는 공감대가 있다. 제임스 파라다이스 연세대 교수는 지난 1월 유라시아 논총에 기고한 ‘한·미 동맹의 현황과 과제’에서 “양국 동맹은 안보 외의 영역으로 초점을 확대하면서 계속 진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위기든, 세속화든 결국 한·미 관계는 새로운 시대에도 우리 외교 지형의 주요 변수다.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한국 외교에 남겨진 과제다.

◆대결에서 협력으로

이와 함께 6·25전쟁의 잔재 속에서 대립해온 국가들과도 새로운 관계 맺기가 진행 중이다. 이미 1990년대 초 공산진영 해체 이후 한국은 공산권 국가들과 경제적 협력을 바탕으로 지난 30년간 꾸준히 관계를 형성해왔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급부상, 대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협력의 필요성 증가 등은 한국외교에 새 과제로 다가오고 있다.

이 가운데 미·중 경쟁 사이에서 대처하는 것은 한국 외교의 가장 큰 과제가 될 전망이다. 그간 한·중은 안보와 경제를 분리하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란부터는 이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

6·25 당시 피란 행렬 6·25전쟁 당시인 1951년 경북 지역에서 피란민들이 미군 지프 옆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사진은 미군이 찍은 것으로 추정되며 부경근대사료연구소가 보유하고 있던 것이다. 연합뉴스

러시아를 비롯한 폴란드, 헝가리 등 동구권 국가들과도 자유화 이후 우리 기업들의 대거 진출로 비교적 긴밀한 관계가 형성돼 왔다. 특히 이 나라들과는 지난해부터 수교 30년 행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지역 구 공산권 국가들과는 신남방정책으로 경제협력, 외교 다변화 등의 측면에서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관계 맺기가 진행 중이다.

이들과의 협력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북한과 여전히 우호·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립의 시작으로 회귀하는 셈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24일 논평에서 “북한은 중국 및 러시아와의 인적교류와 경제 협력을 서서히 재개함으로써 체제의 생존과 발전을 모색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 다수도 여전히 북한과 우방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9년 하노이 북·미 회담 당시에도 베트남은 회담 개최국으로서 중재역을 자처했다.

별개로 정부는 16개 유엔 참전국에는 ‘보은 외교’를 펼쳐왔다. 에티오피아에서 근무했던 한 외교관은 “한국전 참전국이라는 점이 외교 현장에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코로나19 확산 국면에서 해외 참전 용사들에게 마스크를 보낸 것도 이 때문이다.

◆‘전작권·유엔司 논란’ 여전히 진행 중

6·25전쟁이 한반도에 남긴 가장 큰 흔적 중 하나가 한·미 연합방위체제다. 연합방위체제는 한·미연합사령부(CFC)를 주축으로 미군 4성 장군인 연합사령관(유엔군사령관 겸임)이 유사시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구조로 설계돼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0년 6·25전쟁 직후 유엔군사령관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전격적으로 이양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로부터의 철수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상황이었다. 평시작전통제권은 1994년 한국군으로 넘어왔지만 전작권은 지금까지도 미군이 갖고 있다.

논란은 진행 중이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25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전작권 전환은 언젠가는 해야 하지만, ‘대통령 임기 내’라는 시점보다는 전작권 전환에 선행하는 세 가지 ‘조건’에 방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미는 2014년 전작권 전환에 합의하면서 ‘조건에 기초한’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한국군이 연합방위체제를 주도할 핵심 역량을 갖추고, 유사시 미측 전략자산 전개 전 한국 스스로 방어할 ‘방위 충분성 능력’을 확보하며, 한반도와 동아시아 전략 환경이 안정된 뒤 전작권을 찾아온다는 것이다.

비핵화 협상 국면에서는 종전선언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세 번째 조건 충족 가능성이 높게 평가됐지만,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고 최근 다시 남북 대치 국면에 접어들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늘어나고 있다. 정부는 1단계 기본운용능력(IOC), 2단계 완전운용능력(FOC), 3단계 완전임무수행능력(FMC) 중 올 하반기 2단계 FOC 평가를 앞두고 있다. 2006년 처음 전작권 전환 합의가 이뤄진 뒤 2010년, 2014년 두 차례나 연기됐지만 문재인정부는 임기 말까지 실현 의지가 높다.

25일 서울공항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 전사자 유해를 운구한 공중급유기에 미디어파사드 영상이 상영되고, 드론이 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별개로 남북이 2018년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했듯 종전선언이 이뤄지게 되면 유엔사의 역할이 사라지느냐를 놓고도 논란은 불가피하다. 정전협정상으로는 평화협정 체결이 유엔사 해체의 전제 조건이다.

정전협정 체결 후 한반도에 설치된 유엔사는 6·25전쟁과 연합방위체제의 다른 상징이다. 1970년대부터 소련과 북한이 거듭 해체를 주장했지만, 1978년 한·미 연합사 창설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유엔사는 첫째 한국을 방어하고, 일본에 있는 유엔사 후방기지가 유사시 전력제공국의 병력과 장비를 지원받아 한국으로 전개한다. 이 전력제공국에 일본이 참여하느냐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평화협정 체결 후 유엔사의 구조와 체계를 어떻게 이어갈 것이냐는 여전히 논의 대상이다. 전작권과 유엔사는 한국이 6·25전쟁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