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청계천 옆 사진관]사진으로 보는 5·18 본문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발생한지 40년을 맞았다. 당시 광주에서 일어난 일은 외부로 잘 알려지지 못했다. 계엄당국의 보도검열 때문에 신문이나 방송 등을 통해 소식이 전해질 수 없었다.
당시 신군부의 계엄사령부는 1980년 5월 31일 ‘광주폭동사태’로 규정 ‘무장폭도에 의한 살상파괴 방화 약탈과…’로 발표했다. 발표직후 천주교 광주대교구는 ‘군은 유혈사태를 유발하여 놓고 그 책임을 광주시민에게 전가…’ 와 같은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6공화국이 들어선 1988년 2월 정부는 ‘폭동’이 아닌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했다.
1980 년 5월 당시 본보기자(황종건, 김녕만)들이 기록한 광주 모습을 통해 그때의 실상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base@donga.com-
광주민주화운동 진실 규명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4·19의거 및 5·16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새로운 민주공화국 제4공화국 유신헌법 전문]"
5.18광주시민항쟁이 유신헌법을 존중했다고 하더라도 무장투쟁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제4공화국 헌법으로 통치하고 있는 유신정부 제3대 대통령 최규하정부에서 일어날 사건이다[유신정부 1대 대통령 박정희, 2대 대통령 박정희, 3대 대통령 최규하, 4대 대통령 전두환]
5.18광주민주화운동도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수습대책위원회(무장해제, 투항파) 입장이 돼야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무장항쟁 투쟁 민주시민투쟁위원회(투쟁파) 입장이 될때 민주화 운동이 아닌 폭동이나 내란으로 볼 수 있다[광주지역에서 일부세력 사수파들이 무장으로 저항했고 광주나 전남등 대부분 지역에서 정부입장으로 자진해산 했다]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검찰부의 1995년 7월 18일 발표에 의하면 그때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193명인데 이 중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이다. 부상은 852명으로 확인되었다.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보상자 통계를 보면, 사망자 240명, 행방불명자 409명, 상이 2,052명 등 총 7,716명이 보상금을 신청했으며, 이 중 인정된 보상자는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0명, 상이 1,628명 등 총 5,060명이다. 보상금 수령자 총 5,060명 중 중복 지급자 698명을 제외할 경우, 보상금 수령자는 4,362명이다
노무현전대통령이나 문재인대통령도 유신헌법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분들이다
5월 16일 금요일 이전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전국 대학생 10~20만 명이 모여 지상 서울역 광장 주변에서 집회.
5월 15일 대학생 단체 간부들에 의해 대한민국 경찰의 출동 소식을 사전에 접하고 서서히 해산.
5월 17일 토요일21시 40분: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22시 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
24시 00분: 5월 17일 24시부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신군부 계엄포고 제10호를 통해 정치활동 금지, 언론검열 강화, 대학교 휴교령 선포. 주요 도시의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 전북대 농학과 2년인 이세종(당시 21세)은 5월 17일 12시께 계엄군에 쫓기다 전북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추락사).
5월 18일 일요일01~02시 경: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가 김대중 등 재야 인사와 김종필 등 공화당 지도자를 체포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점령. 국회 기능 마비됨.
0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 학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10시 00분: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를 향해 투석을 시작.
10시 15분: 학생들이 던진 돌에 부상자가 발생한 데에 분개한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의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계엄군측, 시민측 첫 번째 부상자 발생)
10시 20분: 일부 학생들이 교문을 벗어나 광주 금남로로 이동함.
11시 00분: 전남대 300여 명 가톨릭 회관 집결,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시킴.
12시 00분: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옴.
15시 40분: 금남로 유동 삼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로 추정되는 시민들을 잡아다가 구타 및 현장 체포함.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장애인인 김경철이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 당함.
19시 02분: 계엄사령부, 통행금지령 확대 국내외 방송을 통해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함.
20시 00분: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에 불안, 흥분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에게 동조.
21시 00분: 계엄사령부 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 해산 경고문 발표함.
5월 19일 월요일03시 00분: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청각장애인 김경철 병원에서 사망 - 두 번째 희생자).
09시 30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10시 00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위력 시위 이후 착검한 상태로 진입, 대검으로 인한 자상자 발생.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했고, 3~4명이 한 조가 돼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14시 40분: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돼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
15시 00분: 시내 기관장과 유지들, 회의를 하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
16시 30분: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20시 00분: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침.
5월 20일 화요일08시 00분: 고등학생들의 참여에 자극받은 정부는 문교부를 통해 광주 시내 및 광산군, 나주군 일대 고등학교에 휴교 조치 하달.
10시 20분: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끌려나와 마구잡이 구타 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
18시 4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
20시 0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 및 공수부대원의 진입을 가로막음.
20시 10분: 시위대, 도청으로 서서히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택시와 차량에 가로막힌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함.
20시 00분: 3공수, 11공수 여단장 실탄 분배 지시 (3공수여단장 실탄 장착 지시, 11공수의 경우 61대대, 62대대가 각각 1,000여발씩 분배)
21시 00분: 택시 200여 대와 버스들은 진입로를 차단, 공수부대 및 경찰과 충돌. 일부는 우회해서 감.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 사망.
21시 50분: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 MBC 건물 방화.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사망. 시민 수십 명 부상.
5월 21일 수요일0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광주역에서 철수하던 계엄군, 대검과 곤봉 등으로 시위대 2명 살해. 계엄군 측 부상자 5명으로 보고됨.
02시 18분: 시외전화 두절.
0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함.
04시 30분: 광주 KBS 건물 방화.
0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20사단 병력과 충돌함.
10시 00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탈취해 광주시 내로 몰고들어옴.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함.
12시 10분: 전남대 진출을 시도한 시위대가 전남대 앞에 배치된 공수부대원들의 저지에 밀려 신안동 굴다리까지 1 km 후퇴. 공수부대의 진압 도중 시민 4명 사망함.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3시 00분: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13시 20분: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이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에 올라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시작.
14시 00분: 시위대가 나주시, 화순군 등지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 시작.
14시 15분: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을 종용하는 설득 방송.
14시 40분: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16시 00분: 화순군, 나주군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16시 43분: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
17시 30분: 7공수여단, 11공수여단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로 철수.
-20일부터 도시빈민과 노동자들도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양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되었다. 많은 희생자를 냈던 20일 밤의 충돌로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21일 오전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군용차량을 탈취하였다.
이에 계엄군은 정오 경 도청에서 시위대에 조준사격을 하였으며 결국 시민들은 무장을 위해 오후 1시 경부터 화순·해남·나주 등 광주의 인근 시외지역에 진출하여 무기를 탈취하였고 농민도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오후 3시 경부터 시민들에게 무기들이 지급되어 계엄군과 시가전이 벌어졌다. 시민봉기가 무력항쟁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겼다
-21일이 되면서 시위대는 본격적인 무장 항쟁을 벌였다. 이들은 나주, 영산포, 화순 등지의 경찰관서에서 카빈총과 M1 소총 800여 정과 탄환 5만여 발을 탈취해 시위 현장에 반입했다. 또한 시위대는 화순 탄광 광부들의 협조로 화약과 뇌관을 확보했고, 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80여 대의 대형 버스와 장갑차 등을 몰고 왔다.
계엄군은 건물 옥상에서 장갑차에 올라탄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총과 실탄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등장한 것은 이날 오후부터였다. 시민군의 구성은 학생부터 노동자, 공사장 인부, 접객업소 종업원, 날품팔이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시민군이 계엄군 임시본부가 있는 도청을 공격하자, 계엄군은 작전상 일단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계엄군은 광주에서 외곽으로 통하는 모든 교통과 통신을 차단한 채 광주를 고립시키고 봉쇄했다. 이로써 항쟁 나흘 만에 계엄군이 광주 시내를 포위하고, 교도소를 제외한 시내 전역을 시민군이 점령하였다.
5월 22일 목요일광주 시내가 계엄군에 의해 고립됨.
0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10시 30분: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라는 내용의 전단 살포.
11시 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12시 00분: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13시 30분: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 항의 수습안 전달.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17시 18분: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18시 00분: 20사단이 통합병원 진입로 확보를 위해 1 km 전진하며 사격, 작전 중 지역 주민 8명 사망.
19시 00분: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 보도.
21시 30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08시 00분: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10시 00분: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를 개최함.
10시 15분: 수습위 무기회수반을 조직해 총기 회수 작업 시작.
11시 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13시 00분: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13시 20분: 11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4명 사망.
14시 20분: 송암동에서 11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 9명 사망 40여명 부상,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이 주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 처형.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11시 00분: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메시지와 함께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
15시 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2일 아침부터 27일까지 광주를 장악한 시민군은 자치활동을 수행하였는데 23일 오후부터 매일 오후 2시에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투쟁목표를 재확인하려 하였다(26일에는 오전 11시 30분과 오후 3시 2차례 개최).
그러나 22일 오후 도청에서 도청간부까지 참여하여 구성된 수습대책위원회가 광주시민의 요구를 수렴하기보다는 미온적인 태도로 계엄사령부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원상복구와 사태회복에만 주력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무기 회수를 둘러싸고 수습위 내부는 물론 시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일부 시민은 무기를 반납하였으며 일부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해 이러한 갈등은 결국 강·온 대립을 낳았다. 이에 강경파 학생들은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수습대책위원회를 비판하고 25일 밤 10시 새로운 투쟁지도부를 자처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22일에는 공무원, 변호사, 목사, 신부, 기업가 등 15명으로 이루어진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사태 수습 이전 군대 투입 반대, 연행자 전원 석방, 군대의 과잉 진압 시인, 사후 보복 금지, 부상자와 사망자의 치료, 보상, 요구 관철 시 무장 해제 등을 결의하고 계엄군과 교섭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구 사항에 군사 정권 퇴진이나 계엄 철폐 등이 포함되지 않아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 데다 계엄군도 이를 거부해 무기만 절반 정도 반납한 채 교섭은 흐지부지되었다
이에 23일에는 천주교 광주교구 대주교 윤공희(尹恭熙)를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측에서 10명, 학생대표 20명이 각각 참여했다. 일부 수습위원은 무기 200점을 계엄군에 반납하고 연행된 시민 33명을 넘겨받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신임 국무총리 박충훈(朴忠勳)이 광주를 시찰하고 질서 회복을 호소했다
5월 26일 월요일05시 20분: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0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
10시 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4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15시 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19시 10분: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
24시 00분: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됨.
5월 27일 화요일02시 00분: 계엄군의 광주시 진입.
03시 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함.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04시 00분: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0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05시 00분: 시민군 생존자들 자진해서 자수. 자수 과정에서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 3명을 시민군이 자진해서 체포해 계엄군과 경찰에게 넘겼음.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에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 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었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05시 10분: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06시 00분: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07시 00분: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게 도청 인계.
0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 재개
-최규하 대통령은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9년 10월 27일부터 1979년 12월 6일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1979년 12월 6일부터 1980년 8월 16일까지 군부 실권하의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최규하전대통령은 1979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2월 6일 통대에서 최규하가 유신헌법 제3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다음 날 국무회의에서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의결하였다. 12월 10일 최규하는 총리직을 사직하고 신현확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였다. 이후 12월 21일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12월 6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96.7%(2,465표)의 득표율을 얻고 당선되었다. 특이한 점은 무효표가 무려 84표나 나온 것이 특징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5월 25일 광주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최규하는 상무대에 와서 담화문만 발표하고 사태 수습을 외면하고는 서울로 되돌아갔다. 26일 오후 6시 최규하 대통령은 국방장관 주영복 등을 대동하고 광주에 왔으나 전남, 북 계엄분소장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뒤 상대방 쪽은 면담도 하지 않고 형식적인 담화문을 밤 9시 KBS 방송으로 내보냈을 뿐이었다. 그날 밤 10시에 속히 서울로 되돌아왔다.
최규하정부의 무장투쟁 자진해산 요구에도 광주지역에서 일부세력 사수파들이 무장투쟁으로 저항했고 광주나 전남등 대부분 지역에서는 정부입장으로 자진해산 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5월 27일 신군부의 요청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이 됐다. 신군부는 권력 접수 시나리오대로 국가비상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안을 5월 26일 최규하에게 재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최규하는 이들의 비상기구 설립 요구를 회피하며 하루 동안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것이 27일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5월 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하는 국보위가 발족됐다. 국보위는 일종의 군사혁명위원회였다.
1980년 7월 30일 경기도 수원의 새마을 연수원을 시찰했다. 1980년 7월 30일 신군부의 부탁을 받은 김정렬이 청와대로 찾아가 최 대통령과 5시간 담판을 하여 최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했다. 8월 16일 최규하는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한편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가원수로 추대된 전두환은 박정희의 전례에 따라 육군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전역한 다음 1980년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9월 1일 잠실체육관에서 제11대(유신헌법 4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0년 초 전두환은 악화된 대미관계를 풀기 위해 "사거리 180km, 탄두 무게 453kg 이상의 미사일은 절대 개발하지 않겠다"라는 내용의 각서를 썼고, 이에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를 승인했다
그 해 9월 국가보안법의 연좌제를 공식 폐지했고,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10월 17일 비리정치인 정치활동 금지법 발표와 함께 정당해산령을 내려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민주당계 야당인 신민당, 혁신 정당인 통일사회당, 민주통일당 등을 강제 해산시켰다.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됐다
이듬해인 1981년 1월에 창당된 민주정의당에 입당했고, 민주정의당의 초대 총재에 추대됐다. 이어 전두환은 12대 대통령에도 출마할 의사를 밝히고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다. 국민당의 김종철(金鍾哲)은 기호 1번, 기호 2번은 김의택(金義澤), 3번은 민한당의 유치송(柳致松)이었고 전두환은 기호 4번을 차지했다.
전두환은 헌법 개정 과정에서 영구집권이 가능한 유신헌법의 6년 연임제 대신 7년 단임제로 바꾸었고, 입법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등 형식적으로는 민주화를 따르는 듯 했다.
그러나 '1인 장기집권' 대신 사실상 '1당 장기집권'을 고수하였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서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았다
[미국정부나 김대중전대통령은 전남주민들의 무장항쟁을 반대했고 미국은 이미 22일에 광주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신군부가 요청한 4개 대대의 한국군을 미국의 통제에서 풀어달라는 안에 동의한 상태였다. 미군은 앞서 5월 초 질서 유지에 필요하다면 시위자들에 대한 무력 사용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한국 정부에 전달한 바 있었다.
머리소리함과 국민들은 5.18광주민주화 운동 세력 내부 무장투쟁 세력에 대해서는 무력진압(국군 투입)을 승인했다]
-제45조 대통령의 임기는 7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
제70조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대한민국 제6공화국 헌법]
"世界潮流浩浩 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中華民國 建國과 孫中山 先生 思想(3.1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사상)]
1980년대부터 민국(民國,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소련, 중국이나 북한등 사회주의 국가 내부 교조주의 노선 지도자는 버려야 할 세력이며 수정주의 노선 지도자는 대화할 세력이 돼야 경제대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교조주의는 일국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사회주의 공화국) 노선으로 마스-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주의이며 수정주의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등소평이나 고르빈 정책으로 친미,친서방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세력이다
등소평은 권력이 집중한 마오 시대의 반성에서 국가주석 3선 금지를 함으로 중국 모든 기관이나 단체의 장 임기를 사실상 3선 금지를 했다[국가기관 수장의 임기를 제한했다]
민주정의당 출신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을 중국 공산당 내부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 민주파 중국 등소평으로 평가하고 있다 전두환정부의 자유화 개방화 조치 이후 자본주의 정부로 평가하고 있으며 대통령의 임기제한 단임제는 민주주의 첫 걸음이 되었다
-18일자 노동신문은 ‘반미, 반파쇼 투쟁사에 아로새겨진 영웅적 항쟁’이라는 제목에서 광주 시위가 ‘반미자주화, 통일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반미, 반정부 투쟁에 떨쳐나서라고 남한 주민들에게 호소했다.
북한의 이러한 반미, 반정부 선동은 남남갈등을 부추기고 북한의 대남 혁명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수순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1984) 김정일 논문은 광주민주화운동도 반미자주화투쟁으로 서술하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 내부 무장항쟁 투쟁파 입장이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김정일 先軍정치 노선이 되지 말아야 한다. 전남지역에서도 주체사상 추종세력(자주파)이 미국과 친미정부에게 무장항쟁을 호소하고 있다
제6공화국은 국민들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있다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헌법 전문]
제6공화국 헌법에서 불의에 항거한 국민들의 저항권을 인정함으로 6공화국 출범이후 5.18 광주사건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 기념일로 규정할 수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이 불의에 항거하여 투쟁한 역사적 의의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였고 많은 희생자를 민주화 국가유공자로 예우(禮遇)해오고 있다.
대법원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이후의 정권 장악 과정을 내란죄 및 반란죄로 인정하면서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12·12군사반란을 통하여 군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함과 아울러 국가의 정보기관을 완전히 장악한 뒤, 1980. 5. 초순경부터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국기문란자 수사계획',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계획'을 마련하여 이를 검토, 추진하기로 모의하고, 그 계획에 따라 1981. 1. 24. 비상계엄의 해제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예비검속,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국회의사당 점거·폐쇄, 광주시위진압,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운영, 정치활동 규제 등 일련의 행위를 강압에 의하여 행한 사실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행한 위와 같은 일련의 행위는 결국 강압에 의하여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회의, 국회의원 등의 권한을 침해하거나 배제함으로써 그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된다
-배상과 보상
손해배상제도는 위법한 직무행위로 인한 배상이고 손실보상제도는 적법한 공권력에 의한 손실의 보상이다.
광주민화운동은 배상금이 아닌 보상금이다
"5.18 민주화 운동은 북한 입장 민족해방운동(반미자주화 운동이나 독립 공화국 이론)이 아닌 민주화 운동(民有,民治,民享의 민주정부 수립운동)이다“
제6공화국 헌법전문에서 '불의에 항거한 국민들의 저항권을 인정함'으로 6공화국 출범이후 5.18 광주사건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 기념일로 규정하고 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이 불의에 항거하여 투쟁한 역사적 의의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였고 많은 희생자를 민주화 국가유공자로 예우(禮遇)해오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이 북한정부 의견처럼 반미자주화 민족해방운동이라면 제6공화국에서 보상이나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테러단체나 무장혁명단체로 친북 불법단체이다
전두환정부의 가장 큰 성과는 3중 철책선 구축과 자유화 개방화(통금해제나 자율화 조치, 긴급조치 철폐와 군인 계엄해제, 선거인단 도입과 단임제 헌법 등) 조치이다[올림픽과 평화적 권력교체. 88년 간선제 선거인단 대통령 선거에서도 양김연합이 민정당 후보에게 승리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5.18민주화운동은 두 전직대통령 재판과정이 국가차원에서 자료책자를 발간하여 판매했고 민주화 출신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도 최종 입장을 정리했다. 5.18민주화 운동 각종 수상자도 민족해방 운동보다 민주화 운동으로 돼야 한다. 5.18민주화운동은 서로 용서와 화해가 필요하다
미국정부 머리소리함 인맥이 김영삼정부에 가담하여 국가보안법 찬양 고무죄, 불고지죄 폐지와 대북정책 전환을 추진했다.
그리고 좌경(좌익)세력도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공존(존중) 민주화 사회(자유사회) 입장으로 인정하고 사회주의 공화국 노선(김일성 헌법)은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반미나 반한 테러범)으로 불법화 했다[북한 제2,3,4공화국 김일성, 김정일 헌법은 자국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으로 인민 민주주의 노선 인민회의정부가 아니기 때문에 민주헌법으로 볼 수 없고 유엔이나 국제적으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헌법으로 규정한다]
-유신시대 파출소나 근무소 치안부대는 향토사단 방위병이다. 긴급조치와 야간통행금지조치로 말단 행정자치단체 동,면 단위로 4개 이상 치안 초소를 파출소 방위병(향토사단 병력)으로 운영했다
일부에서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세력이 박정희 유신정부 공화당 항거로 보는 분도 있다. 광주사건이 유신정부 시대 긴급조치를 추진하기 위하여 향토사단 방위병 중심의 치안부대를 육성해왔고 말단행정단위(파출소나 동, 면 사무소)에 20-30명 이상의 방위병이 근무했다 이들의 일부 항거도 광주 무장투쟁을 부추기었다는 의견도 있다 전두환정부 때 긴급조치폐지와 방위병 치안부대에서 전경제도 도입이다. 유신헌법은 군부통치 모델이고 군이 경찰과 말단행정도 장악하여 통치하는 모델로 군(군부 지도자-군벌)의 분열이 내전으로 일어날 수 있는 정부이다[유신헌법은 군정통합주의 군사정책보다는 군정분리주의 군사정책이다. 국군이 국가(국민)의 군대가 아닌 지도자(박정희)의 군대이다. 군이 정치적 중립이 보장할 수 있는 헌법이 아니다]
*민주국가(민주공화국, 입헌군주국, 연방공화국) 헌법[민영자본체제(民營資本體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중화민국 헌법]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일본국 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프랑스 헌법]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사회주의 국가 헌법[국영자본체제(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의회나 국민이 이에 간섭할 수 없다는 주장[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는 김일성이다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서는 주체연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은 신으로 우상화 신격화 하고 있다 신(주체연호)에 대한 도전을 하는 세력(세습제 반대 운동)이나 제작물은 금지되고 있다 대북 삐라나 유인물을 가장 두려워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국가건설사상과 업적이 구현된 주체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국가 북한 제3공화국 헌법]
유엔은 친북성향이나 남북 정치협상 세력을 좌파세력이나 진보세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제4공화국 유신헌법이 교조주의 헌법이라면 제5공화국 헌법은 실용주의 헌법이다
교조주의는 구체적인 조건을 상관하지 않고 불변의 진리라고 판단되는 개념과 명제만을 고집하는 태도이다
교조주의(敎條主義,Dogmatism)란 특정한 사상이나 종교경전을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교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어디에나 정통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행태를 비판하는 말로 쓴다. 실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왜 마르크스가 모든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비평한 이유를 다양한 배경에 근거하여 생각하지 않고, 분쟁이 일어나면 무조건 '계급투쟁'이라고 하는 것을 유사 마르크스주의라고 비평한다. 때문에 마오쩌둥, 블라디미르 레닌 등과 같은 혁명가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무분별하게 고수하던 교조주의를 맹렬히 비판했으며, 이들은 각 노동 계급이 처한 현실에 맞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켰다. 종교적으로는 경전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종교인을 교조주의자나 원리주의자라고 한다. 교조주의는 사상과 종교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이므로, 학문적 곧 논리적 비평에 대해 대화와 토론으로 극복하기보다는 무조건 거부하거나 탄압하는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교조주의자는 좌익 파시즘이나 우익 파시즘 세력을 지칭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군국주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노동자당)나 이탈리아 왕국 국가 파시스트당 (1923년~1943년), 일본 제국 대정익찬회 (1940년~1945년) 등이 교좆주의 단체들이다]
수정주의(실용주의)는 새로운 정세에 점진적이고 온건한 입장에서 대응하기 위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학설을 수정하려는 경향이다
수정주의를 실용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베른슈타인은, 노동가치론과 경제결정론 및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물리치면서 독일 사회에서는 마르크스의 예언 중 몇 가지가 틀렸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고, 자본주의는 붕괴에 직면해 있지 않으며, 자본이 갈수록 소수인에게 몰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중산 계급은 사라지고 있지 않으며, 노동 계급이 '갈수록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있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당시의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볼셰비키 혁명 후 수정주의라는 용어는 공산주의자들이 확립된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어떤 종류의 이견들을 매도하는 데 쓰이게 되었다
실용주의(實用主義)는 19세기 말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 행동을 중시하며, 실생활에 효과가 있는 지식을 진리라고 주장하였다. 사고나 관념의 진리성은 실험적인 검증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제임스, 듀이 등이 대표적이다.
실용주의 철학은 "인간의 경험 안에서 실행적 시험을 거쳐야" 아이디어의 특정되는 적용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실용주의는 이상주의, 사실주의, 토미즘 등이 세계를 불변의 것으로 파악하는 것과 달리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촛점을 맞춘다.
실용주의란 말은 원칙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정치적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도 혼용되었다
마스-레닌주의 노선을 고집하는 모택동주의를 스탈린주의 노선으로 교조주의라면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국가주석 임기제한을 추진한 개혁개방세력 등소평주의를 실용주의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국 군사정부에서 볼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유신헌법 박정희정부를 교조주의 노선이라면 대통령 단임제와 자유화 개방화 정책 제5공화국 헌법 전두환정부를 실용주의 노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유신정부의 초헌법기관 통일주체국민회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이 추천하는 국회의원 정수의 1/3을 선출(대의원들에 의해 선출된 원내교섭단체 국회의원들은 유신정우회 회원이었음)했다
제5공화국부터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이 도입돼 정당 득표별 의원을 배정했다 유신정부는 초헌법기관 통일주체국민회의 때문에 우리 나라 헌정상 가장 폭압한 독재권력이며 건국헌법을 부정하고 있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국민적 조직체로서 제4공화국의 국민 주권적 수임기관의 역할을 했다.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된 임기 6년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대의원은 2,000~5,000명이었다. 1972년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초대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당시 전국 평균투표율은 70.3%이고 206개 선거구에서 225명이 무투표 당선되었다.
12월 16일 초대 대의원 2,359명이 확정되었고, 직업별로는 농업이 전체의 48%였으며 연령별로는 40대가 전체의 48%를 점했다. 특히 여성대의원은 입후보자 54명 가운데 24명이 당선되었다.
이러한 통일주체국민회의 기능은 ① 통일에 관한 중요정책을 심의하고, ② 대통령이 추천하는 국회의원 정수의 1/3을 선출하며(대의원들에 의해 선출된 원내교섭단체 국회의원들은 유신정우회 회원이었음), 국회가 발의·의결한 헌법개정안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것 등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2년 12월 23일 제1차 회의를 개최하여 박정희를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이래 관제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부칙에 의해 해체되었다.
1972년 12월 5일: 초대 대의원 선거 - 2,359명 선출
1972년 12월 23일: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 - 제8대 대통령 박정희 선출 (투표 2,359명, 찬성 2,357표, 무효 2표)
1978년 5월 18일: 제2대 대의원 선거 - 2,581명 선출
1978년 7월 6일: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 - 제9대 대통령 박정희 선출 (투표 2,578명, 찬성 2,577표, 무효 1표)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선출 (투표 2,549명, 찬성 2,465표, 무효 84표)
1980년 8월 27일: 제11대 대통령 전두환 선출 (투표 2,525명, 찬성 2,524표, 무효 1표)
-제4공화국 유신헌법은 일당제 국가이다
한국정부의 유신헌법 제4공화국은 일당 우위 정당제보다는 일당제 국가이다[여당 공화당과 대통령이 추천하는 국회의원 정수의 1/3을 선출하여 대의원들에 의해 선출된 원내교섭단체 국회 의원들은 대통령 친위대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로 구성됨]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유정회)는 제4공화국 때 설립되었던 국회 내의 국회의원 단체이다
1972년 유신헌법에 따라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의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추천하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승인·선출하였는데, 이렇게 국회의원이 된 의원들이 만든 단체가 유신정우회였다. 그 탄생 배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유정회는 유신체제를 지지하고 박정희의 의지를 정치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단체였다.
제9대 국회에서 원내 제1교섭단체로 출범하게 된 유신정우회는 자신의 목적을 유신헌정을 수호하고 그 헌법정신을 국정에 구현하도록 하며, 그 이념과 목표를 국민들에게 인식시켜 국력의 신장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한 원내외 활동을 전개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렇게 자체 목적 설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유신정우회는 박정희와 유신체제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국회내 다수 여당(일당제)을 만들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제4공화국 제3장 통일주체국민회의
제35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온 국민의 총의에 의한 국민적 조직체로서 조국통일의 신성한 사명을 가진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이다.
제36조 ①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대의원으로 구성한다.
②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수는 2,000인이상 5,000인이하의 범위안에서 법률로 정한다.
③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장이 된다.
④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제37조 ①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될 수 있는 자는 국회의원의 피선거권이 있고 선거일 현재 30세에 달한 자로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국민주권을 성실히 행사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
②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될 수 있는 자의 자격에 관하여는 법률로 정한다.
③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으며, 국회의원과 법률이 정하는 공직을 겸할 수 없다.
④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
제38조 ①대통령은 통일에 관한 중요정책을 결정하거나 변경함에 있어서, 국론통일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심의에 붙일 수 있다.
②제1항의 경우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재적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통일정책은 국민의 총의로 본다.
제39조 ①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토론없이 무기명투표로 선거한다.
②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재적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자를 대통령당선자로 한다.
③제2항의 득표자가 없는 때에는 2차 투표를 하고, 2차 투표에도 제2항의 득표자가 없는 때에는 최고득표자가 1인이면 최고득표자와 차점자에 대하여, 최고득표자가 2인이상이면 최고득표자에 대하여, 결선투표를 함으로써 다수득표자를 대통령당선자로 한다.
제40조 ①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의 국회의원을 선거한다.
②제1항의 국회의원의 후보자는 대통령이 일괄 추천하며,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을 투표에 붙여 재적대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당선을 결정한다.
③제2항의 찬성을 얻지 못한 때에는 대통령은 당선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계속하여 후보자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변경한 후보자명부를 다시 작성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제출하고 그 선거를 요구하여야 한다.
④대통령이 제2항의 후보자를 추천하는 경우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거할 국회의원 정수의 5분의 1의 범위안에서 순위를 정한 예비후보자명부를 제출하여 제2항의 의결을 얻으면, 예비후보자는 명부에 기재된 순위에 따라 궐위된 통일주체국민회의선출 국회의원의 직을 승계한다.
제41조 ①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회가 발의·의결한 헌법개정안을 최종적으로 의결·확정한다.
②제1항의 의결은 재적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제42조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조직·운영 기타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일민(一民) 이기택선생의 회고록 ‘우행(牛行)’ 책 내용 중에 '1.1% 승리'입니다
"1978년 12월 12일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여당을 누르고 승리했다
특히 사무총장인 나로서는 나이 많은 국장들을 지휘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야당의 승리를 일궈낸 것이기에 내심 자부심도 느꼈고 사실 칭송도 많이 받았다
신민당은 이 선거를 '유신체제 6년의 공과를 심판할 기회'로 간주하고 박정희 정권의 '10대 비정'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선거결과 신민당은 총 유효투표의 32.8%를 얻어 31.7%를 얻은 데 그친 공화당을 누르고 이른바 '1.1% 승리'를 거뒀다. 야당이 여당보다 득표율이 높았던 것은 선거사상 초유의 쾌거였다"[牛行 187페이지 내용 일부]
야당 신민당 총선에서 여당 공화당에게 승리하지만 유정회 때문에 여당(공화당과 유정회)은 꾸회의원 재적이원 3분의 2이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야당 신민당은 승리해도 항시 재적 의원 3분의 1 이하 수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장기집권용 유신체제는 박 전 대통령이 심복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탄에 쓰러지기 전에 스스로 출구를 찾기 어려운 체제였다”
“전후 독일이 나치 헌법을 무효화했듯, 우리 국회는 지금이라도 유신헌법 무효선언이 필요하다. 유신은 헌정사에서 제외해야 할 헌법의 진공상태였다”
“유신체제는 법치를 부인하고, 입법부와 국민주권을 부정했으며, 권력자(박정희)를 법과 제도 아래 두는 공화국 원리를 부정한 세계사적으로도 극히 드문 헌정 파괴행위이다”
-제5공화국 헌법은 한국 헌법을 제정한 이래로 8차 개정한 헌법이며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선출하되, 선거인단은 국민이 선출하도록 개정하였다.
8차 개정은 유신헌법 전문을 전부 개정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헌법에 따라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였으나 곧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3월 보안사에서는 정보처를 부활하고,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가 정치에 나서는 것을 정당화 하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K공작계획을 실시했다. 1980년 4월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어 국내의 모든 정보 기관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신군부 세력은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리고,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정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주체로 실시된 간선제에 따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0월 27일에는 임기 7년의 단임제 대통령제 등을 골자로 하는 제5공화국 헌법이 제정됐으며, 1981년 3월 3일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로 선출되어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전두환이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 정권이 시작되었다.
12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을 전면 부정했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는 헌법 개정 과정에서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했다. 또한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면서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제5공화국 정권은 형식 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였다. 일단 대통령의 임기를 6년에서 7년으로 늘린 대신 영구집권이 가능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연임제 대신 중임 제한을 기본으로 하는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한 단임제를 택했다. 또한 대통령의 권한 중에 법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과 국회의원을 임명하게 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을 삭제했으며, 국회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유신체제 당시에는 야당인사의 대선 출마가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으나 (명목 상으로는 허용했으나 정부기관이 이를 방해했기 때문에 금지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5공화국은 야권의 출마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유지를 위한 확고한 보장을 위해, 제4공화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변형시켜 새롭게 대통령 선거인단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제5공화국은 유신체제처럼 간선제를 고수했다.
그럼에도 국가의 사회복지 의무에 대한 규정을 설치하고(헌법 제32조), 경제 질서에 대한 공법적 규제를 확대했다. 기본권에 대해서도 대체적으로 제3공화국의 조항 수준으로 회귀했고, 행복추구권(헌법 제9조)이나 연좌제의 금지(헌법 제12조 3항), 사생활의 보호(헌법 제16조), 환경권(헌법 제33조) 등의 조항도 신설됐다. 헌법 개정에는 국민 투표를 통한 개정만 가능하도록 규정해 절차를 일원화시켰다(헌법 제131조).
제5공화국은 김영삼, 김대중 등을 비롯한 주요 야당 인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채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등의 이른바 관제야당을 내세워 정당정치를 형식화하는 등 사실상의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야당 참여자를 미리 선별했을 뿐 아니라, 일부 운영비를 보조하고 전국구 후보들의 당비 헌금 한도액(1억원)까지 친절하게 정해줬다. 정치규제자의 친인척, 친 김대중 인사, 해직 언론인 등은 공천에서 제외하도록 엄격히 관리하기도 했다.[3] 대선 때는 야권의 입후보를 허용하면서도, 정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 가능했다. 제5공화국은 임기 내내 정권 성립 과정에서 발생한 5·17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등 정통성 없는 정권 창출 과정에 대해 재야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1983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김영삼은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했다
이러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제5공화국은 사회 정책 면에서 규제해제를 지향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야간통행금지의 해제와 중고등학교 교복 자율화,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씨름 등의 스포츠산업의 활성화 등이 대표적이었다. 컬러 텔레비전의 보급과 컬러TV방송도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 경제적으로는 회복되어가던 국제적 경제에 힘입어 물가안정, 경제 성장, 서울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유치 및 개최 준비 성공, 무역흑자 재달성 등의 경제적 성과를 이룩함으로써 암울했던 박정희 정권 말기의 경제난을 해소하였다. 후대에 이 정책들은 3S 정책으로 통칭되게 된다. 삼청교육대라는 이름 아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던 폭력범 내지 범죄자들을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일률적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경찰서의 오행으로 오늘 날 인권유린의 현장으로 조명받는 곳이기도 하다.
80년대 중후반 경, 정치활동 금지에서 해제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여러 정당들이 창당되었다. 그 가운데 1985년 민주화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신한민주당이 창당되었고, 부패정치인으로 몰려 정계에서 축출되었던 구 민주공화당계 인사들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그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12대 총선 투표 날짜를 예년과 달리 겨울인 1985년 2월 12일로 정했는데 이는 신한민주당의 창당 날짜와 최대한 가까운 시기에 총선을 치러서 야당 돌풍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물론 당시의 선거제도 자체가 여당에게 유리하게 짜여져 있어(정부는 야권 후보로 의미 없는 후보를 내세우기도 했고, 야권의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여당의 과반수 의석 확보는 어렵지 않았으나, 명목상의 야당이었던 민한당과 국민당이 밀리고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이 될 경우에는 정국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안기부의 분석 결과, 신한민주당은 최대한 좋은 여건이 주어진다고 해도 12 ~ 13석을 얻는데 그치고 특히 종로·중구 선거구에서는 민정당 이종찬과 민한당 정대철이 각각 1위와 2위로 당선,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는 3위로 낙선할 것으로 예상되어 전두환은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는 단순한 이변을 넘어선 '돌풍' 그 자체였다.
창당한 지 불과 한 달도 채 안된 신생 정당 신한민주당이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는 돌풍을 일으키며 지역구 50석과 전국구 17석을 차지하고, 특히 종로·중구에서 예상을 깨고 이민우가 2위로 당선된 것이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지역구에서 제1당이었던 민정당에 전국구 의석중 2/3을 배분한 결과로 사실상 민정당이 패배한 선거였고 전두환이 우려한대로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급부상하였다. 이에 전두환은 격노하였고 잘못된 선거 분석을 내놓은 노신영 안기부장을 질책한 후 사실상 경질하였다.
1986년 12월,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는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조치를 먼저 단행할 경우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양김을 중심으로 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파가 이민우 구상에 대해 반발하였고, 이철승·이택돈 등의 내각제 개헌파가 이에 반박하면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 여파로 신한민주당에서 탈당한 인사들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게 된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학생 시위에 참가했던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4월 13일, 정부는 '5공 헌법에 의한 대권이양'을 골자로 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 개헌 요구를 전면 부정하였다. 그러자 야권·재야가 재결합하고 학계·종교계 등에서도 이에 반대하는 시국선언·농성이 잇달았다. 이후 5월 27일 각계를 망라한 각종 단체가 총결집된 '민주화추진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슬로건으로 대정권투쟁에 돌입했다. 국민운동본부는 '6·10 민주화 장정대회'를 개최, 6월 항쟁의 대막이 올랐다.
1987년 6월 10일, 노태우는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같은 날 전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불법집회로 규정한 정부는 무한정한 공권력을 투입하여 원천봉쇄를 시도했으나 서울·부산·광주·인천 등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시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겸 총재 노태우를 내세워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하게 하고, 이를 통해 제5공화국 헌법이 개정된다. 그 결과 1971년 이후 16년만에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 형태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지만, 민주화 세력의 분열속에서 5공 주역이었던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는 제6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은 종식됐으나 사실상 1993년까지 연장되었다.
-전두환정부의 개혁개방정책과 경제성장
10대 대기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9년의 33%에서 1989년에는 54%로 증가하고, 30대 대기업의 계열기업은 1970년 126개, 1979년 429개, 1989년 513개로 늘어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농촌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고, 이농민의 대다수는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여 막노동에 종사하거나 산업노동자 혹은 서비스업으로 전환하였다. 수출호조에 힘입어 국민총생산이 급속히 성장하여 매년 평균 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인당 GNP가 1987년 현재 3천 달러를 넘어서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게 되었다.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성장의 한 징표였다
-대통령 선거인단 [大統領選擧人團]
5공화국 때, 국민의 직접 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대통령 선거인으로 구성 되었던 조직
1.배경과 선출 과정
1980년 전두환은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유신헌법 대신 새로운 헌법인 제5공화국 헌법을 마련해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헌법의 핵심은 10월 유신의 저항점인 1인 영구집권식 선거 방식 대신 7년 단임제로 변화인식을 주었으나 확고한 계승을 담보하기 위한 제도로 변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방식인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제를 도입 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비교할 때 다른 점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특권폐지와 정당 소속원의 출마를 허용 하였다는 점이다.
2.선거인단
선거인단은 민정당 소속이 3,675명이고, 민한당 소속 411명, 한국국민당 소속 48명, 민권당 소속 20명, 무소속 1,123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들 무소속 중 대다수는 전두환을 지지했다.
3.입후보와 선거
여당은 전체 선거인단의 53.1%가 입후보하고 친여무소속 31.8%가 입후보한 데 비해, 제1야당은 전체 선거인단의 12.5%에 불과한 1,165명만이 입후보하는 등 선거인단 선거 자체가 형식적인 절차여서 전두환 후보는 선거인단 90% 이상의 압도적 득표로 제12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제5공화국이 개막되었다.
민주정의당의 전두환 후보는 4,755표, 민한당의 유치송 후보는 404표(7.7%), 국민당의 김종철 후보는 85표(1.6%), 민권당의 김의택 후보는 26표(0.5%)를 득표하였다.5,278명의 선거인단 중 기권이 6명인데, 구속수감자 4명과 도서지역 불참 선거인 2명이었다. 선거 참여율은 99.88%였다.
전두환 후보가 가장 많은 득표율을 얻은 지역은 제주도로 98%였고, 강원도는 97.7%, 경상북도는 95.9%, 충청북도와 경상남도는 93%였으며 서울은 82.2%였다.
전두환정부는 신민당 창당 이후 국회의원 선거애서 야당과 재야 김영삼 김대중 세력이 대거 국회로 진출하였고 직선제 요구로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개헌을 하게 되었다
제5공화국 헌법 선거인단 간접선거로 13대 대통령 선거를 하더라도 양김 연합이 승리할 수 있었다
제5공화국 헌법 선거인단 특징은 정당 소속이 출마할 수 있기 때문에 국회의원 선거에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제5공화국 제39조 ①대통령은 대통령선거인단에서 무기명투표로 선거한다.
②대통령에 입후보하려는 자는 정당의 추천 또는 법률이 정하는 삭의 대통령선거인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③대통령선거인단에서 재적대통령선거인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자를 대통령당선자로 한다.
④제3항의 득표자가 없을 때에는 2차 투표를 하고, 2차 투표에도 제3항의 득표자가 없을 때에는 최고득표자가 1인이면 최고득표자와 차점자에 대하여,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이면 최고득표자에 대하여 결선투표를 함으로써 다수득표자를 대통령당선자로 한다.
⑤대통령의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제40조 ①대통령선거인단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대통령선거인으로 구성한다.
②대통령선거인의 수는 법률로 정하되, 5,000인 이상으로 한다.
③대통령선거인의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http://blog.daum.net/007nis/15875575 [대한민국 역대 공화국 헌법자료]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MLM, 중국 공산당 내부 교조주의 노선(모택동 계열)]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Marxism–Leninism–Maoism, MLM)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결합한 정치 사상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2세대 노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 정통 공산주의자들의 새로운 이념으로 주목받고 있다.
(1)개요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는 1993년에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더욱 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인 노선으로서 창시되었으며 현재에는 국제혁명운동이라는 대표적 마오쩌둥 사상 단체가 이를 추구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인도 공산당이 이 이념을 추종하고 있다. 여기에 프라찬다 노선과는 구별된다.
*인도 공산당 (마오쩌둥주의)(Communist Party of India (Maoist), 힌디어: भारत की कम्युनिस्ट पार्टी (माओवादी))는 인도의 비공식 정당이자, 준군사 조직으로, 인도 정부에서 반국가단체로 지정된 집단이다.
인도 공산당 마오파는 인도 공산당 ML파에서 형성된 급진파이다. 이들은 인도 사회를 반봉건반식민자본주의(半封建半植民資本主義)로 규정하며,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통하여 인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기 위한 인민민주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도 공산당 마오파는 이 노선을 마오쩌둥 사상에 근거해서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 노선이라고 명명했으며,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야 한다는 계파와 다르게, 반제애국적 소상인 및 소농·영세농과의 통일전선을 추구하고 있다. 이들은 인도 서북 지역에 적지 않은 규모의 게릴라 전선을 구축하였는데, 인도 정부는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공 기관을 쳐부수고, 수많은 공산당원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대량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마오쩌둥주의를 따르는 네팔 공산당과는 협력 관계에 있다.
마오쩌둥주의 인도 공산당의 준군사 조직을 낙살라이트라고 하는데 인도정부는 낙살라이트에 대한 백색테러를 하는 작전명을 'Green Hunt'(녹색 사냥 작전)이라고 한다. 이 작전으로 인해 공산당원 8000명과 무고한 민간인 2147만명이 대량학살당했다.
[낙살라이트(Naxalite)는 인도 공산당 (마오쩌둥주의)의 준군사 조직이며, 반정부 집단이다. 인도 정부에서는 테러 집단으로 본다.
낙살라이트는 인도 서뱅골 주의 낙살바리라는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하였고, 낙살라이트 봉기는 1967년 낙살바리에서 자룸 마줌다르와 카누 샨얄이 주도한 농민반란으로부터 기원되었다. 낙살라이트가 본격적으로 무장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은 인도 공산당과 당 산하 인민자유게릴라군(PLGA)이 등장한 2000년대 초반이다.
인도의 600여 지구 가운데 180여개 지구가 낙살라이트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차티스가르 주에서의 활동이 제일 활발하다]
*마르크스-레닌-마오-프라찬다주의 노선, 줄여서 프라찬다 노선(네팔어: मालेमावाद र प्रचण्डपथ 말레마바드 라 프라찬다파흐)은 네팔 통일공산당(UCPN(M))의 이념이다.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의 발전형이며 UCPN(M) 당수인 푸샤파 카말 다할의 별명인 프라찬다를 붙였다. 프라찬다 노선은 2001년 천명되었으며, 자신들의 이념을 "마르크스-레닌-마오-곤잘로 사상"이라고 칭하는 페루 공산당과 유사하다.
a.군중노선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당 중앙위원회 '사회주의 국가에서 '간부회'의 역할을 했던 모든 종류의 중앙 집행 기관'의 활동을 중점으로 사회주의 건설, 그리고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에로의 투쟁을 서술하였지만, MLM 노선은 사회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혁명 과정에서 당과 인민 사이의 강력한 연대, 대규모 군중 직접 행동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노선은 혁명당 ― 흔히 '공산당'이라 불리는 ― 이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강력한 전위력을 갖춘 전위당의 역할을 급진적으로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과 이어진다. 이러한 군중 노선으로 당은 인민의 의지를 투쟁 과정에 적절히 반영할 수 있으며, 인민은 당의 영도권에서 이반하지 않을 수 있다.
b.신민주주의
MLM 노선은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반제국주의 노선을 강화하여 반제 투쟁의 한 예외적 계급인 '민족부르주아'(national-bourgeois)의 역할과 통제에 대해 심도있게 논하고 있다. 민족부르주아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화에 저항할 수 있으며, 통일전선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계급이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이므로 생산 관계의 모순을 청산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통일전선을 꾀할 때 이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통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며, 이는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오늘날 공산주의 진영이 쇠퇴한 시점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이들(넓게는 자유주의자들)과 언제든지 협력하고, 협력한 상태에서 다변화된 전략을 구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MLM 노선이 시사하는 바이다.
역사적으론 중국 국민당과 연합을 했던 중국 공산당의 예를 들 수 있으며, 블라디미르 레닌이 잠시 도입했던 신경제정책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제 2차 세계 대전 시기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성립된 인민전선도 통일전선의 한 예로 들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천두슈 주도의 중국 공산당은 민족부르주아 세력인 중국 국민당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이에 대한 무지는 상하이 쿠데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무참히 학살된 것과 관련이 크다. 마오쩌둥은 제2차 국공합작에서 이 민족부르주아들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혁명 전략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지식을 갖춘 상태였으며 결과적으로 그는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민족부르주아와의 부분적인 타협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MLM 노선은 현대 공산주의 운동이 퇴조한 시점에서 수많은 개발도상국(왜냐하면 선진자본주의 정체에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의하는 '민족부르주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의 혁명을 지도하는 이념으로, 새로운 통일노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c.문화대혁명
1990년대 중반에 구체화된 MLM 노선은 과거 존재하던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 현상에 대해 분석해야 했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은 당의 수정주의화, 관료주의였다. 그들은 이러한 것의 원인을 대규모 대중 운동을 배제하고 중앙위원회에 모든 것을 맡기는 기존의 현실사회주의의 특유의 제도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으며, 당의 수정주의화를 막기 위해 일정한 기간마다 전체적인 문화대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군중 노선에 근거해야 한다.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공산주의로의 투쟁 과정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 내부의 반동 공작 문제보단 외부적 문제에 모든 것을 쏟았다면, MLM 노선은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통제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하부 구조의 변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상부 구조 변형을 급진적으로 진행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계속혁명론'(繼續革命論)이라고 부른다.
d.적대적 모순/비적대적 모순
마오쩌둥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하며, 스탈린의 공산주의 정립을 정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상은 중국 현실에 맞는 〈발전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고 있기에 일부 이론에서 스탈린의 이론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특히, 모순론(생산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변증법적 모순에 대한 이론)은 1920년대 데보린 학파에 의해 전개된 유물변증법과 더불어 이오시프 스탈린이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밝힌 모순론과 비교되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그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모순의 본질은 제반경제투쟁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일치하며, 그것은 어떻게 하든 현실에서 계급 투쟁(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의 형태로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지도되는 사회주의 정체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반면, 마오쩌둥은 모순을 적대적 모순(敵對的矛盾, Antagonistic contradiction)과 비적대적 모순(非敵對的矛盾)으로 나눈 다음, 전자의 모순은 처음부터 끝의 과정까지 모순의 과정을 관통하며,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순, 즉 본질적 모순에 해당하고, 후자는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순이라고 하였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는 계급 전쟁에서 최일선에 해당하는 모순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모순이므로, 서로의 계급 전쟁에서 나름대로의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또한, 갖가지 양태를 갖고 있는 모순으로 변화하게 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의 싸움이 될 수 있으며, 제국주의자와 반제국주의자, 남성 권위주의자들과 여성 사이의 투쟁, 심지어 노동자와 농민 및 빈곤노동자 사이의 투쟁으로도 양태화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이것들이 본질적인 모순에 해당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구분하기 위해서는 결국 매개 모순의 특수성, 즉, 모순의 진행도를 인식하고 그것을 정합(整合)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모순의 진행도가 제각각인 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에서 논한 자연물 사이에서의 모순을 포함하여 모든 본질적인 모순이 가진 보편적인 것(보편성)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주요 모순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에 따르면, 주요 모순은 모순성의 특수성을 정합성에 따라 인식한 후에 판단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황에 따라 또 유동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입장은 혁명에 현실성을 부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식을 받아들인 기존의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양태를 갖고 있는 모든 본질적 문제를 단적인 경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투쟁으로 환원시키고 그것들의 속성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주의적 단견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수많은 본질적 분쟁인 사건을 비본질적 분쟁으로 취급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의 비판 대상인 교조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은 소부르주아이기에 본질적인 혁명 동력이 없다고 봤으며,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양분적 대립 등을 비본질적 모순으로 보아 그것들의 중요성을 무시했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기조가 본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취지에 어긋나며, 교조주의자들의 입장을 '혁명에서의 소극주의 경향'으로 규정하고 단죄하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 투쟁 관계를 단순히 무산자-임금노동자와 유산자-사업가의 싸움으로 표시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그것의 본질은 사실 무산자와 유산자 사이라는 간극보다는 혁명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세력과, 반동으로 나가는 세력 사이의 간극이라고 본 것이다.
마오쩌둥이 혁명의 시기인 192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에 농촌에 기반한 농민운동에 중점을 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철학적 지론에서 나온 것이다.
MLM 노선은 기존의 교조적 계급론으로 모든 사회 현상을 쉽게 설명하기 힘들며, 대중에게도 와닿지 않으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새로운 혁명론적 모순관으로 채택하였다. 이 새로운 형태의 변증법적 견해에 따르면, 공산주의 운동은 반식민주의 투쟁·반인종주의 투쟁·여성해방투쟁에 보다 유연하게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
e.반수정주의
기본적으로 MLM 노선은 반수정주의를 지향한다. 이들은 공산주의 운동 쇠퇴의 원인을 수정주의로 보고 있다. 비록, 스탈린의 DIAMAT 원리에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첨가하여 새로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혁명 노선에 있어서 볼셰비키당의 유산을 간직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MLM 노선을 지지하는 당 또는 단체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강력한 반수정주의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와 흐루쇼프 이후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도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2)마오쩌둥주의와의 차이
MLM 노선은 마오쩌둥주의에 크게 영향받았으나, 기본적으로 공업 사회에 적용하기 위해 형성된 혁명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MLM 노선 자체도 마오쩌둥주의의 특수성보단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다. 즉, 마오쩌둥주의는 혁명 전의 중국 상황과 유사한 국가들에서 '특수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 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MLM 노선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이 노선이 공업 사회, 농업 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스 레닌주의 노선[교조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쩌둥 사상, 호치민 사상, 티토주의, 주체사상, 호자주의, 게바라주의, 카스트로주의,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
1.영향
국가자본주의, 극단주의, 급진주의, 레닌주의, 반수정주의, 사회제국주의, 전체주의, 좌익 독재, 프롤레타리아 독재
2.단체
공산당 계열, 코민테른, 공산당-노동자당 국제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극좌
-흐루시초프나 등소평, 고르바초프, 옐친 등은 수정주의 노선이다
*모택동주의[교조주의]
민중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반사회제국주의, 반수정주의, 신민주주의, 탈서구중심주의, 농촌혁명론, 모순론, 실천론, 지구전론, 제3세계론, 군중노선, 문화대혁명, 인민민주독재
1.영향
공산주의, 스탈린주의, 낙살라이트, 전체주의, 법가, 주관주의, 황금방패
-금순공정(金盾工程) 혹은 황금방패(黃金防牌)는1998년부터 시작된 중화인민공화국의 디지털 공안 체제로 중국 공안부에서 운영한다. 또다른 별칭들로는 만리장성에 빗대어 방화장성(防火長城) 또는 만리방벽(萬里防壁, Great Firewall)이라고도 불린다
2.단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당 연맹, 혁명적 국제주의자 운동, 아프가니스탄 해방전선, 아르헨티나 혁명공산당, 볼리비아 인민혁명전선, 부탄 공산당, 캐나다 혁명공산당, 중국 공산당(1969 ~ 1976), 콜롬비아 혁명공산당, 에콰도르 공산당, 인도 공산당(마오쩌둥주의), 이란 공산당 ,이탈리아 마오쩌둥주의자당(붉은 여단), 네팔 공산당 (마오쩌둥주의), 노르웨이 노동자당, 필리핀 공산당, 포르투갈 노동자공산당, 터키 공산당, 미국 혁명공산당, 흑표당, 중국 공산당 홍위병, 일본 적군파(일본 공산당 내부 2단계 혁명론 NLPDR계열), 극좌[동아시아 각국 좌파운동이 대부분 모택동주의 운동이다][콜롬비아의 마오(모택동)주의 무장 혁명군[인민군], 마오(모택동)주의자 이탈리아 붉은 여단[이탈리아의 극좌파 비밀 테러 조직], 네팔 마오쩌둥(모택동)의 공산당과 무장단체, 아프가니스탄 마오(모택동)주의 청년공산주의 단체, 인도 마오(모택동)주의[마오주의공산주의센터(MCG)와 인민전쟁파(PWG)],필리핀 마오(모택동)주의[공산반군], 칼리만탄섬 공산당 마오(모택동)주의자, 태국 마오(모택동)주의자[태국 공산당], 미얀마 마오(모택동)주의자[북부 미얀마 공산반군], 페루 마오(모택동)주의자 "빛나는 길", 일본 마오(모택동)주의자 적군(赤軍, 붉은군) 등 세계 11개국 모택동(마오쩌둥)주의자 신봉단체]
3.인물
마오쩌둥(毛澤東), 아크람 아이노, 천보다(陳伯達), 애비마엘 구즈만, 이브라힘 카이파카야, 린뱌오(林彪), 짜루 마줌다르, 시라지 시크데르, 피에르 물렐레, 휴이 뉴턴, 프라찬다, 장칭(江靑), 호세 마리아 시손 야오원위안, 장춘차오(張春橋), 사미르 아민, 리민치(李民騏), 쯔엉찐, 폴포트, 샤를 베틀랭, 알랭 바디우,
오늘날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는 수정주의 노선으로 나아가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수정주의 노선은 국영자본체제와 노농조합(지역 지방 의회) 도입 그리고 노동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프롤레타리아독재체제)와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의 임기제한 등이다
국영기업이나 농장이 노농조합(지역 의회)에 의한 운영과 함께 개인의 사유재산, 이윤추구, 시장경쟁원리의 자본주의 3원칙을 인정하고 상업적 공농(工農) 생산품을 생산하여 판매하여 그 수익으로 세금과 경영 비용, 노동자나 농민들에게 임금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국영기업이나 농장의 부패와 관료주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노농조합(지역의회)애 의한 책임자 선출과 임기제한 그리고 사업 의결권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이 의회보다 지도자론(영도론)으로 나아갈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1인 전체주의 정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최고지도자)의 임기제한을 해야 인민회의정부(인민의회정부)가 될 수 있다. 중국 등소평헌법이나 쿠바 신헌법은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베트남도 형식상 국가주석 4년 중임제이다
당이나 노농조합(지역의회) 독재나 우위는 인정하지만 국가주석이나 대통령, 농장 책임자나 국영기업 책임자 개인의 독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노농조합이나 지역의회 그리고 연방의회(중앙의회)에서 선출된 국영기업(농장) 책임자나 국가주석(대통령)의 임기는 제한이 돼야 세습화나 부패를 척결할 수 있다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동상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붉은 별도 제거해야 합니다
날짜:
1989년 6월 4일 - 1991년 12월 26일
지역:
유럽 및 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유럽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종류:
시위 등 다양함
결과:
동구권의 몰락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평화적 정권 교체.
냉전의 종결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유혈 혁명이 됨
소련의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 몰락
1991년 인도 국민 회의가 신자유주의를 채택
러시아 연방이 탄생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유고슬라비아 해체 및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1989년 톈안먼 사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해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회의론 대두
유럽 통합의 진전
성별 선택 낙태로 동유럽의 성비 변화
동구권에 인터넷이 확산됨
동구권에서 소비자 운동이 대두함
예멘의 통일
발트 3국의 재독립
몽골, 아프가니스탄, 베냉, 예멘,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 공화국, 소말리아에서 공산주의 붕괴
북한의 고난의 행군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종결
미국의 문화가 동구권 국가에 전파됨
NATO와 EU에 동구권 국가 가입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의 시장 경제 도입
미국이 전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신세계 질서
소비에트 전후 충돌의 첫 발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국민의(民有,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聯邦共和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
전두환 회고록 2 청와대 시절 "실용주의 노선"
전두환 회고록 2 권 청와대 시절은 개혁개방정책 실용주의 노선으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운동의 첫발로 평가할 수 있는 책이다
개혁개방정책이 민간 자본주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지만 민주화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최초의 무역수지 흑자 전환, 88서울올림픽 유치, 최초의 평화적 정권이양 등을 일궈낸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대통령.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5.18광주사태로 수많은 민간인을 희생시킨 학살자. 이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인물이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들의 중심에 서 있으며 수많은 굴곡과 험난한 인생 여정을 거쳐 온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켜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모든 삶과 아직도 논쟁 중인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10년의 준비기간, 방대한 기록과 수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펴낸 이 회고록에는 미처 말할 수 없었던, 말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때론 솔직하게, 때론 담담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회고록의 출간은 또 다른 논쟁의 시작인 동시에 새로운 역사관에 대한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전두환 회고록』2권 '청와대 시절(1980~1988)'에는 1980년대를 이끌어간 5공화국의 국정 수행 기록이 담겨 있다. 최초의 무역수지 흑자시대 진입, 한국형 원자력 기술 개발의 성공, 중산층 확대를 위한 다양한 경제 시책들부터 다양한 규제 해제(연좌제 금지, 통행금지 해제, 교복 자율화 등)를 통환 열린사회의 시작을 돌아볼 수 있다. 한편 끊임없는 북한의 도발로 인한 아웅산 테러 사건, KAl기 폭파 사건 등 무수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공조를 통해 안보를 공고히 하며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이양을 일궈내기까지 혼신을 다해 수행한 국정의 기록을 정리했다.
한국 군사정부에서 볼 때 민주국가의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자본체제와 제한된 민주주의 제도) 성향 유신헌법 박정희정부를 교조주의(국가자본주의) 노선이라면 대통령 단임제(평화적 수평적 권력교체 권위주의 성향 민주주의)와 자유화 개방화 정책 (민영 자본주의 체제 성향) 제5공화국 헌법 전두환정부를 실용주의 노선(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노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목차
제1장. 제11대 대통령 취임
* 새 시대의 개막
제2장. 경제 살리기
* 정책의 기조를 바꾸다
* 고통을 수반한 안정화 정책
* 기적으로 보답 받은 국민의 희생
제3장. 다 함께 열린사회로
* 문호개방과 자율의 확대
* 공정경쟁을 통한 균형발전과 동반성장
제4장. 전 국민의 중산층화
* 본격화된 복지정책
* 중산층을 두텁게
제5장. 과학기술의 진흥
* 미래에 투자하다
* 핵무기 개발과 원전原電 기술의 자립
제6장. 교육 혁신과 문화 창달
* 교육 기회의 확충과 내실화
* 민족정신 함양과 문화의 생활화
제7장. 국방?외교 역량 강화
* 정상회담을 통한 한미 혈맹관계 복원
* 힘의 우위 확보를 통한 전쟁 억지 전략
* 88서울올림픽 유치
* 40억 달러 차관의 극적인 타결
*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 노력
제8장. 김일성과의 대결과 대화
* 싸우지 않고 이기는 길을 찾아보자
* 북한의 대남對南 파괴 공작
제9장. 최고의 올림픽대회를 향해
* 다시 태어난 한강
* 올림픽의 성공을 위하여
제10장. 헌정사의 숙원, 평화적 정권 이양
*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다
* 6.29선언
전두환 정부의 대통령 임기를 단임제로 표방하여 수평적 권력 추진함으로 국내외적 업적
(1)아시아게임과 올림픽 유치 그리고 행사개최
(2)자유화 개방화 조치
ㄱ.통금 해제 그리고 24시간 각종 영업 추진
ㄴ.스포츠 자유권 인정--프로야구나 프로 축구등 창단
ㄷ.개인의 행복추구권 보장과 연좌제 폐지
ㄹ.소비자 보호 규정 [소비자 운동이 대두함, 소비는 투자라는 경제적 자유와 개혁개방정책 도입으로 계획경제(국영자본체제)에서 민간경제(민영자본체제)로 전환 추진. 김영삼정부 때 계획경제와 경제기획원 폐지와 WTO가입]
ㅁ.학도호국단 폐지와 직선제 총학생회 등장 그리고 대학 자율권 인정
(3)평화적 수평적 권력교체
전두환정부는 단임제를 표방함으로 여타 제3세계 군사정부처럼 피의 혁명 시민혁명(민중혁명) 수직적 권력교체가 아닌 선진국 나라들처럼 선거에 의하여 수평적 권력교체를 함으로 1인당 GDP 1500달러수준 한국 경제발전에 공헌했다
그러나 우리 헌정상에서 불행하게도 종신제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은 시민혁명(민주혁명)이나 저격으로 물러나야 했다
(4)수평적 권력교체의 성과
ㄱ.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 추진
(ㄱ)구소련과 수교. 중국과 수교
(ㄴ)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남북냉전구조 청산에 기여
ㄴ.3당 합당과 문민정부 등장 그리고 박정희정부때 과거 반체제 인사들이 제6공화국 틀에서 정부 출범 가능하게 함[제5공화국 때 재야 출신 인사들을 정치권이나 문화, 학계등에 대거 영입과 정부차원 임용]
(ㄱ)김영삼 정부 등장---박정희 정부에 의하여 의원직 제명 처분이 된 김영삼의원
(ㄴ)김대중 정부 등장 ---박정희 정부에 의하여 구금된 김대중의원
ㄷ.제6공화국의 국내외적으로 신뢰도 상승으로 1인당 GDP 1만달러 선진국 진입
ㄹ.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로 나아감
(ㄱ)사회주의 진영 국가와 수교
(ㄴ)진보적 좌파서적 자유화 개방화 조치. 단,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사회를 부정하는 혁명논리 서적은 금지조치
( ㄷ)노인. 아동. 여성등의 지위보장 및 특별보호
(ㄹ)국민의 기본권 확대 강화---국가구조 청구권
(ㅁ)국회기능 활성화---국정감사권과 조사권 그리고 위원회 중심의 수집. 조사. 판단. 정책. 입법 강화
(ㅂ)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나 대통령의 비상조치권 폐지와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권 부여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의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은 교조주의 국가가 아닌 수정주의(실용주의) 국가입니다
전후 독일이 나치 헌법을 무효화했듯, 유신헌법 무효선언이 필요하지만 유신정부 권력자를 부정할 수 있지만 유신공화국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 수정주의(실용주의) 입장니다
제5공화국 전두환 전대통령이나 제6공화국 노태우 전대통령은 유신정부 때 장군 군인 출신 대통령이고 김영삼 전대통령은 유신국회 신민당 야당 출신 대통령이며 노무현 전대통령은 유신정부 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유신정부 판사출신 대통령이고 문재인 대통령도 유신헌법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해왔습니다
유신정부를 청산할 수 있는 방법은 유신헌법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신정부 시절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창조론 입장으로 할 수 없고 지금부터 가능한 세대교체(유신세대 인적쇄신) 개조론 수정주의(실용주의) 입장에서 가능합니다
제6공화국에서 유신세대(유신정부 공무원 세대)의 가장 큰 약점이 제5공화국을 부정하고 제6공화국 세대 처럼 착각하고 실용주의 입장보다 민주화 인사처럼 행동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유신헌법과 유사한 반인권적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왕권신수설) 북한 주체헌법과도 협력세력으로 유화하는 것이 문제점이 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이며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유신헌법을 부정해야 북한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북한 제3공화국 김일성 김정일 헌법)를 부정할 수 있습니다
국가지도자나 내각, 의회 정당은 한국정부를 교조주의 입장에서 정책을 개발할 것이 아니라 수정주의(실용주의) 입장에서 정책을 개발해야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교조주의자들의 약점은 모험주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4공화국 유신헌법이 교조주의 헌법이라면 제5공화국 헌법은 실용주의 헌법이다
교조주의는 구체적인 조건을 상관하지 않고 불변의 진리라고 판단되는 개념과 명제만을 고집하는 태도이다
교조주의(敎條主義,Dogmatism)란 특정한 사상이나 종교경전을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교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어디에나 정통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행태를 비판하는 말로 쓴다. 실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왜 마르크스가 모든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비평한 이유를 다양한 배경에 근거하여 생각하지 않고, 분쟁이 일어나면 무조건 '계급투쟁'이라고 하는 것을 유사 마르크스주의라고 비평한다. 때문에 마오쩌둥, 블라디미르 레닌 등과 같은 혁명가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무분별하게 고수하던 교조주의를 맹렬히 비판했으며, 이들은 각 노동 계급이 처한 현실에 맞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켰다. 종교적으로는 경전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종교인을 교조주의자나 원리주의자라고 한다. 교조주의는 사상과 종교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이므로, 학문적 곧 논리적 비평에 대해 대화와 토론으로 극복하기보다는 무조건 거부하거나 탄압하는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교조주의자는 좌익 파시즘이나 우익 파시즘 세력을 지칭하고 있다[대표적으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 일국사회주의(자국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 노선인 나찌 독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1933년~1945년)이나 이탈리아 왕국 국가 파시스트당 (1923년~1943년), 일본 제국 대정익찬회 (1940년~1945년), 소련 공산당 스탈린 서기장(1922년 ~ 1953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및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수상(총리)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 국방 담당 위원(군사위원장, 최고사령관)겸직) , 중화인민공화국 모택동주의 중국 공산당(1969 ~ 1976. 모택동 사후 중국 공산당도 마스-레닌 모택동주의 보다는 개혁개방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음 ) 등이 교조주의 단체들이다]
수정주의(실용주의)는 새로운 정세에 점진적이고 온건한 입장에서 대응하기 위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학설을 수정하려는 경향이다
수정주의를 실용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베른슈타인은, 노동가치론과 경제결정론 및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물리치면서 독일 사회에서는 마르크스의 예언 중 몇 가지가 틀렸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고, 자본주의는 붕괴에 직면해 있지 않으며, 자본이 갈수록 소수인에게 몰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중산 계급은 사라지고 있지 않으며, 노동 계급이 '갈수록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있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당시의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볼셰비키 혁명 후 수정주의라는 용어는 공산주의자들이 확립된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어떤 종류의 이견들을 매도하는 데 쓰이게 되었다
실용주의(實用主義)는 19세기 말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 행동을 중시하며, 실생활에 효과가 있는 지식을 진리라고 주장하였다. 사고나 관념의 진리성은 실험적인 검증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제임스, 듀이 등이 대표적이다.
실용주의 철학은 "인간의 경험 안에서 실행적 시험을 거쳐야" 아이디어의 특정되는 적용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실용주의는 이상주의, 사실주의, 토미즘 등이 세계를 불변의 것으로 파악하는 것과 달리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촛점을 맞춘다.
실용주의란 말은 원칙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정치적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도 혼용되었다
마스-레닌주의 노선을 고집하는 모택동주의를 스탈린주의 노선으로 교조주의라면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국가주석 임기제한을 추진한 개혁개방세력 등소평주의를 실용주의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국 군사정부에서 볼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유신헌법 박정희정부를 교조주의 노선이라면 대통령 단임제와 자유화 개방화 정책 제5공화국 헌법 전두환정부를 실용주의 노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등소평은 권력이 집중한 마오 시대의 반성에서 국가주석 3선 금지를 함으로 중국 모든 기관이나 단체의 장 임기를 사실상 3선 금지를 했다[국가기관 수장의 임기를 제한했다]
민주정의당 출신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을 중국 공산당 내부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 민주파 중국 등소평으로 평가하고 있다 전두환정부의 자유화 개방화 조치 이후 자본주의 정부로 평가하고 있으며 대통령의 임기제한 단임제는 민주주의 첫 걸음이 되었다
-전두환정부의 개혁개방정책과 경제성장
10대 대기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9년의 33%에서 1989년에는 54%로 증가하고, 30대 대기업의 계열기업은 1970년 126개, 1979년 429개, 1989년 513개로 늘어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농촌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고, 이농민의 대다수는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여 막노동에 종사하거나 산업노동자 혹은 서비스업으로 전환하였다. 수출호조에 힘입어 국민총생산이 급속히 성장하여 매년 평균 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인당 GNP가 1987년 현재 3천 달러를 넘어서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게 되었다.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성장의 한 징표였다
북한 핵무기 보유 이후 동북아 정세
동북아 정세는 다자간의 북한 핵무기 포기 정책이다
자유민주정부는 러시아와 일본, 몽골, 한국이며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는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과 주체연호(주체사상-김일성 김정일 헌법) 1인 종신직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이다
정치적, 안보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과 중국이 협조체제이며 민주국가인 러시아와 일본, 몽골, 한국이 협조체제이다
군사적으로는 중국 주도 러시아,중국, 북한이 공존하고 있다
정치적, 안보적으로 민주국가인 러시아와 일본, 몽골는 한국(남한) 주도 남북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며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모택동파(마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세력)는 북한 주도 남북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고 등소평파(실용주의, 수정주의)는 남한 주도 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러시아나 중국정부 내부 실용주의자는 남한내부 친북세력(마스-레닌주의 김일성노선 교조주의 세력)을 싫어하는 입장이다
북한 핵무기 포기 정책을 주도한 6자회담 주최국은 중국이다
북한 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한국, 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6개 나라가 참가하는 다자회담이다.
-중국정부 내 실용주의자는 수정주의자로 마스-레닌주의 보다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입장이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헌법은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으로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이다
북한 주체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은 자유선거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러시아 공산당도 아니다
북한 주체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은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 내부 NLPDR 2단계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는 모택동 추종세력이다
-중국 공산당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마스-레닌주의 노선 모택동주의 정당이었고 모택동 사후 중국 공산당도 마스-레닌 모택동주의 보다는 실용주의(수정주의) 노선 개혁개방세력으로 지칭하고 있다
중국 모택동 공산당의 국제적 원조 정당[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 :
마르크스-레닌주의자당 연맹, 혁명적 국제주의자 운동, 아프가니스탄 해방전선 , 아르헨티나 혁명공산당, 볼리비아 인민혁명전선, 부탄 공산당, 캐나다 혁명공산당, 중국 공산당(1969 ~ 1976. 모택동 사후 중국 공산당도 마스-레닌 모택동주의 보다는 개혁개방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음 ), 콜롬비아 혁명공산당, 에콰도르 공산당, 인도 공산당 (마오쩌둥주의), 이란 공산당, 이탈리아 마오쩌둥주의자당(붉은 여단), 네팔 공산당 (마오쩌둥주의), 노르웨이 노동자당, 필리핀 공산당, 포르투갈 노동자공산당, 터키 공산당, 미국 혁명공산당, 흑표당, 홍위병, 일본 적군파 등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마스-레닌주의 노선 모택동주의 정당이나 무장단체이다
실용주의 노선(수정주의 노선)은 자본주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국제 공산당 원조(지원)[무장단체 활동]를 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적군파(赤軍)은 사회주의 세계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의 총사령관 모택동으로 추앙하면서 미국을 몰아내고 자본주의민주주의 일본 입헌군주국을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 수립 목표로 무장 투쟁한 모택동주의자들이다[모택동 노선 NLPDR]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사회주의 공화국(사회주의 국가) 세력은 국가자본주의 일본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할 때 민족해방과 왕권신수설 전체주의 군주, 지주계급이나 매판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혁명 체제 사회주의 국가 승리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개인 우상화, 신격화로 1인 장기집권으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도취되고 있다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련군, 6·25초기 한국군 전방사단 무전 감청… 남침 지휘 증거” (0) | 2020.06.24 |
---|---|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0) | 2020.06.13 |
함께 전선에서 : 전장 카메라맨이 본 위대한 애국전쟁[러시아정부 자료] (0) | 2020.05.14 |
조종사와 저격병, 간호사.위생병 - 제 2 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의 여성은 어떻게 싸웠는지 (0) | 2020.05.01 |
75년 전 : 소비에트 군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생존자를 해방했을 때 (0) | 2020.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