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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 毛 암살 계획 본문

同一介中華(中國)/북경정부-中華人民共和國(中國)

린뱌오 毛 암살 계획

CIA Bear 허관(許灌) 2020. 3. 2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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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뱌오(林彪)의 시체 모습

1971년 3월22일 린뱌오(林彪)와 예췬(葉群) 부부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上海)에서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林立果)와 저우위치(周宇馳) 등이 마오쩌둥(毛澤東) 암살을 목표로 한 쿠데타 계획을 작성하였다.

문화대혁명을 군사적으로 지원한 공을 인정받아 마오쩌둥의 후계자의 위치에 오른 린뱌오는 바로 그때부터 마오의 견제를 받았고 미국과 화해 시도 등 중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외되자 위기의식을 갖고 급기야 쿠데타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무장폭동을 의미하는‘무장기의(武裝起義)’의 '무기의(武起義 : 우치이)'와 발음이 같은‘571’을 작전명으로 삼아 이 작전계획을 '571 공정기요(工程紀要)'라고 명명했다.

쿠데타 계획은 군사천재인 린뱌오의 전술개념이 농축되어 있다. 이 계획은 군사적인 선제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하여야 한다며 준비가 되어 있건 되어 있지 않건 간에 ‘가마솥을 깨트리고 배를 침몰시켜야 한다(破釜沈船)’는 점을 강조했다.

계획은 고위 정치집회를 공격하여 일망타진하거나 폭파, 차량사고, 암살, 납치, 도시유격전 등의 방식을 통해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군사정변을 일으켜 전국 정권을 수립하거나 혹은 할거 상황을 만들어 궁극적으로 린뱌오의 천하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린뱌오의 건곤일척 작전계획은 실행되기 전 누설되는 바람에 결국 실패했다. 밀고자는 다름 아닌 린뱌오의 딸 린리헝(林立衡)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린리헝을 제외한 린뱌오 일가족은 이해 9월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 탑승기가 몽골 상공에서 의문의 추락을 하는 바람에 모두 사망했다.

2006년 문혁 발동 40주년을 맞아 당시 59세에 이른 린리헝은 베이징 고급호텔의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는 근황이 소개되었다.

린리헝은 린뱌오 탈출사건 이후 2년간 격리 조사를 받았으나 덩샤오핑(鄧小平)이 복귀한 뒤에야 사회생활을 재개할 수 있었다.

린리헝은‘대의멸친(大義滅親: 대의를 위해 가족간 정도 끊음)’했다는 평가를 받고 공산당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66년 문화혁명 발동 당시 19세로 홍위병 활동에 적극적이던 린리헝은 결정적 순간‘린뱌오의 딸’이 아닌‘문혁의 딸’을 선택한 것이다.

마오의 인간 개조 노력은 결국 실패했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하 데는 성공한 것이다.

린리헝이 사장으로 있었던 호텔은 베이징 싱푸(幸福)거리에 있는 황허(黃鶴)호텔이다.

린뱌오는 마오의 토사구팽 칼끝이 후계자 전임인 류사오치와 류등 실권파를 쓰러뜨리는 주역 문혁 청년 3걸을 거쳐 자신을 겨냥하는 사실을 재빠르게 판단하고 주인이 방심하는 틈을 타 주인의 목을 물어 뜯으려 하였으나 결국 삶아 죽이는 꼴을 당한 셈이다.

마오는 한 고조가 항우를 쓰러뜨리는데 1등공신인 한신을 부인 여후에 의해 차도살인한 것처럼 자신의 부인 장칭 등이 포함된 4인방에 의해 린표의 제거를 기다리는 여유를 부리다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기습을 받을 뻔 했던 것이다.

그는 린뱌오 사망 5년 뒤에 죽는데 천운이 작용하여 용케 피한 린뱌오의 쿠데타 기도에 충격 받은 것도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오는 린뱌오의 쿠데타 계획을 보고 받고 괄목상대와 함께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그동안 치열한 수다한 파워게임에서 자신의 승리를 최종적으로 결정지은 회심의 수가 카운트다운이 진행 중이던 '571 공정'에 고루고루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선수 빼앗기', 좌고우면하지 않는 '참수 작전', 상대의 '외곽 때리기'에 '중앙 돌파'로 응수 등.

당시 마오는 린뱌오라는 '대마'를 잡기 위해 호위무사 4인방을 내세워 외곽에서 전투에 몰입하도록 유도했다.

그는 최후의 수를 궁리하며 린뱌오가 기진맥진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린뱌오는 외곽에서 손을 빼 중앙돌파 작전을 전개했다. 국면 전환의 선수 빼앗기다.

그리고 린뱌오의 작전 개념은 '참수'였다. 마오로서는 5년 전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말로 류사오치라는 과녁을 정조준하면서 혼돈스런 판세를 일거에 뒤집었다.

마오는 5년 뒤 자신이 '류사오치'이고 린뱌오가 '마오'라는 린뱌오의 판세 구상을 읽었을 것이다.

사마중달이 제갈공명을 물리칠 수 있엇던 것은 전략 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뜻 때문이었다.

워털루 회전에서 나폴레옹의 패배도 전략상 실패가 아니라 천운이 웰링턴에게 기울어져서였다.

마오도 천운이 작용했다는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 게임의 '아르마다' 를 자부한 마오의 충격은 그의 수명을 단축할 정도로 심대했다.

린뱌오식 건곤일척은 41년 뒤인 2012년 정치적으로 벼랑 끝에 몰린 보시라이에 의해 재연될 조짐을 보였으나 중앙 권력에 사전 차단되었다.

토사구팽과 건곤일척의 배반 승부수라는 양상의 최고 권력투쟁 패턴은 '윤회'한다. 서해 서편쪽에서도 동편쪽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