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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색 불교기 본문

-미국 언론-/아시아뉴스

오방색 불교기

CIA bear 허관(許灌) 2019. 10. 27. 16:26


                                                                                                 오방색 불교기

불교기는 1950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세계 불교도 우의회(世界 佛敎徒 友誼會)'에서 만국공동의 불교기로 정식 승인되었으며, 현재 세계 불교국가의 불교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다. 원래 불교기는 1882년 영국인 불교도이면서 미국 국적을 가진 올코트(Colonel Henry Stell Olcott)대위가 창안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성도(成道)시에 성체에서 육종의 색광이 방출되는 것을 근거하여 일면육색기(一面六色旗) 를 설계하였다고 한다.

불교기의 5색의 가로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5(....)의 세로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영원 불멸하다는 뜻을 상징 한다. 불교기에 사용한 색깔이 상징하고 있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靑色(푸른색)은 자비 즉 일체중생에 대한 차별없는 대자대비심을 상징하고, 黃色(노란색)은 중도 즉 극단을 여읜 팔정도를 상징하고, 赤色(붉은색)은 정진 즉 무명/갈애/번뇌에서 해탈하기 위하여 정진함을 상징하고, 白色(흰색)은 해탈열반의 청정함을 상징하고, 朱黃色은 부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상징한다.


*靑色(파란색): 자유. 청명. 순수

*白色(하얀색, 흰색): 평등. 정직, 이타

*赤色(붉은색, 빨강색): 박애. 우애(민족). 동무. 유혈(혁명)

*黃色(노란색): 광명. 해방

*黑色(검정색) 정의. 무정부주의. 파시즘, 죽음에 대하여 애도

*綠色(녹색): 국토, 환경(생명존중), 이슬람교()

*朱黃色(주황색): 자유분방하고, 즐거움, 우크라이나의 2004년 민주화 운동은 흔히 오렌지 혁명이라 불린다.

오렌지색은 우크라이나 혁명의 상징이다. 오렌지색은 독립 광장의 집회활동에 사용되기 이전부터, 젊은이들과 정치적 관심이 높은 주민들이 옷이나 장신구 등에 착용하였었다. 이후 오렌지색에 빅토르 유셴코의 상징이 더해졌다. 유셴코 선거 위원회는 자신들의 상징으로 오렌지색을 사용하였다. 오렌지색 바탕 위에 Так!’ (러시아어로는 Да!, YES!라는 의미)이라는 로고를 새겨 넣었다. 유셴코의 지지자들은 혁명의 상징으로써 오렌지를 서로에게 선물했으며, 정적에게도 선물하였다



중화민국의 국기[靑天白日旗]

                                                                                         중화민국의 국기[靑天白日旗]

"同一介中華(中國).

中華民國(中國), 中華人民共和國(中國)[中國 建國者 孫中山 先生]"



손문이 베이징의 위안스카이 정부에 대해 2차 혁명을 벌이다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한 뒤 창당한 중화혁명당이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최한 혁명방략(方略) 토론회에서 청천백일만지홍(靑天白日滿地紅)기를 중화민국의 국기로 정한다고 결정하였다.

 

청천백일(靑天白日)'푸른 하늘의 태양', '만지홍(滿地紅)'누른 황토의 중국 대륙'을 각각 상징한다.

 

'백일(白日)' 즉 태양은 일본의 일장기(日章旗)를 본떴다는 인상을 주며 태양을 둘러싼, 좌측 상단 박스는 흙 색깔의 누런색보다는 '붉은 색깔이다.

 

중국 대륙을 상징하는 만지홍'은 후에 공산 중국의 국기 오성홍기를 도안하는 과정에서 혁명을 뜻하는 홍색(紅色)을 국기의 배경 바탕색으로 하는데 착안점을 준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홍기'라고는 하지만 피 빛깔을 연상하는 적색(赤色)보다는 청천백일기보다 더 황토색의 땅 빛깔을 연상하게 한다.

 

중화혁명당은 191110월 신해혁명 후 베이징의 집권 세력 북양 군벌 정권에 맞서 남부 지역을 기반으로 중화민국을 세운 중국동맹회의 후신이었기에 당기가 아닌 국기를 제정했던 것이다.

 

청천백일기로 약칭되는 이 깃발은 비밀 지하혁명 정당인 중화혁명당이 대중 정당인 국민당으로 전환하고 그 국민당의 국민정부가 북벌로 중국 전역을 일단 통일하면서 정식으로 중화민국의 국기가 되었다.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쫓겨온 이후 대륙의 공산정권은 '] 五星紅旗'' 새로운 국기로 제정했다. 공산 정권이 국호를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바꾸고 국기도 새 것으로 변경한 것이다.

 

대만에서는 여전히 청천백일기가 국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국호도 당연히 중화민국으로 유지하고 있다.

 

대만 독립을 지향하는 민진당 정권이 첫 집권했을(2000~2008)때도 이어 2016년 재집권한 이후에도 청천백일기는 변함없이 국기로 사용되고 있다


대만에서는 여전히 청천백일기가 국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국호도 당연히 중화민국으로 유지하고 있다.

 

대만 독립을 지향하는 민진당 정권이 첫 집권했을(2000~2008)때도 이어 2016년 재집권한 이후에도 청천백일기는 변함없이 국기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민진당을 포함한 독립지향 세력은 그들의 행사에서 대만섬을 도안으로 한 '대만기를 사용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이를 국기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71년 대만이 유엔에서 축출된 이후. 각종 국제행사에서 청천백일기는 게양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여자 태권도 49kg급에 출전, 대만에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준 천스신(陳詩欣, 26) 선수는 시상식에서 청천백일기 대신 대만 올림픽위원회 깃발이 게양되고 국가 대신 국제올림픽 위원회(IOC)국기가(Song of the National Flag)'가 연주되자 시상대에서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20161' 청천백일기의 샤오제'가 중국 대륙 전역과 대만 등 양안 모두를 뒤흔들었다.

 

한국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가수 쯔위가 한국 케이블 TV에 출연, 청천백일기를 흔들었다가 중국 대륙의 누리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자 '하나의 중국'을 인정한다는 취지의 사과 문을 억지춘향식으로 발표한 것이 인화점이 되었다.

 

총통 선거와 총선 투표 실시 직전에 터진 이 사건은 대만에서 엄청난 역풍을 불러와 양안우호 지향의 집권 국민당이 대만 독립 강령의 민진당에게 참패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민진당은 2014년 말 정부와 의회 권력을 장악한데 이어 의회 권력과 대권을 싹슬이 하였다. '청천백일기의 당''청천백일기 퍼포먼스'로 치명적 타격을 당한 아이러니가 연출된 셈이다.

 

대만은 한국과 수교 중이던 1986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참가한 농구 대표단이 경기장에서 청천벡일기 사용을 금지하자 이에 항의, 철수한 적이 있다.

 

한중수교와 대만 단교는 6년 뒤인 19928월이었지만 한국과 대만 관계가 결정적으로 금이 간 것은 이때다.

 

서울 아시안 게임 당시에는 대만에서 반한 시위가 거세게 벌어졌으나 정작 한중수교 때 단교했을 때는 조용했다.



                                                                               루하오둥이 처음 도안했던 靑天白日旗

 

*루하오둥(陸皓東,육호동, 본명(本名)은 루중구이(陸中桂, 육중계), 1868930~ 1895117)은 중국 청() 황조 시대 흥중회(興中會) 소속 혁명운동가이며 시인 겸 서예가이다.

()는 셴샹(献香, 헌향)이고 아호(雅號)는 하오둥(皓東, 호동)이다.

그는 청나라 장쑤 성 상하이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청나라 광둥 성 광저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청나라 광둥 성 샹산에서 성장하였다. 일찍이 옛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반제반청 혁명사상(反帝反淸 革命思想)을 접하여 이에 큰 공감과 감명을 한 그는 일찍이 친구 쑨원(孫文)과 아울러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여 1891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청 제국(淸 帝國) 타도 운동을 전개하다가 청나라 관군에 체포되어 1895117일을 기하여 27세의 젊은 나이로 사형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으로 인한 그의 죽음은 친구인 쑨원에게 청나라 타도 의식을 더더욱더 두텁게 굳히는 도화선이 되어 쑨원은 끝끝내 기어코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일으켜 청 왕조를 타도하였고 이듬해 1912년 청 제국을 멸망시켜 중화민국(中華民國)을 건국하는 쾌거로써 대업의 성과를 이루었다.

그는 훗날 중화민국(中華民國)의 국기로 사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흥중회(興中會) 소속 시절에 도안하기도 하였다.

그는 쑨원(孫文), 쑹자수(宋嘉樹), 여우례(尤列), 양허링(楊鶴齡), 관징량(關景良), 천사오보(陳少白)와 절친한 친구 관계였다.

-홍콩(Hong Kong) 빅토리아(Victoria) 개신교전문학교 전문학사

-()나라 장쑤 성 상하이 취안바오 학당(江蘇省 上海 銓補 專門學堂) 전문학사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중화민국의 국기이다

청천백일만지홍기는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을 청색, 적색, 백색의 세가지 색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청색은 청명, 순수, 자유를, 적색은 희생, 유혈, 형제애,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다민족국가인 중국을 상징하고, 백색은 정직, 이타, 평등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 청천백일기의 태양에서 뻗어나오는 12개의 빛줄기는 하루 24시간을 2시간씩 12개로 표현하고 112개월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국민들이 끊임없이 정진하고 자강불식(自強不息)할 것을 상징한다.


국기의 캔턴 부분인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는 공화당 혁명으로 목숨을 잃은 루하오둥이 디자인하였다. 1895221, 그는 흥중회와 홍콩 반청회에 혁명군을 상징하는 디자인을 제시하였다. 이 디자인은 나중에 중화민국의 국장과 국민당 당기로 쓰이게 되었다. 1906년 겨울, 쑨원에 의해 붉은 바탕이 추가되었고, 중화민국의 국기의 형태를 잡게 되었다.

 

1911, 우창 봉기가 일어나 전 중국에서 여러 군정(군사 정부)이 나타났고, 다양한 군정들은 각자의 국기를 가지고 있었다. 루하오둥의 청천백일기는 광둥 성, 광시 성, 윈난 성, 구이저우 성에서 쓰였다. 그 시각, 우한 시에서는 우창 봉기 당시 쓰였던 18개의 행정 구역과 시를 상징하는 국기가 사용되었다. |하이 군벌과 중국 북부 군벌은 오른쪽의 오색기를 사용하였는데, 다섯 개의 줄무늬는 한족(빨강), 만주족(노랑), 몽골족(파랑), 후이족(하양), 티베트족(검정)을 상징한다.

 

191211일 중화민국의 건국을 선포하였을 때, 임시 상원 의원에 의해 오색기가 국기로 채택되었고, 혁명군기는 군기로, 청천백일기는 해군기로 채택되었다.

 

1913, 국민대회를 해산하고 국민당을 법적 무효화함에 따라 위안스카이가 독재권력을 가지게 되고, 강제추방된 쑨원은 도쿄로 망명해 중화혁명당을 결성, 망명 정부를 세우고 청천백일기와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사용하였다. 19281217, 북벌이 성공함에 따라 베이징 정부가 무너져 청천백일만지홍기는 중화민국의 공식 국기가 되었다.

 

중일 전쟁동안 일본은 많은 괴뢰 정부를 세움으로서 여러가지 국기들이 나타났다. 1938년 개혁 정부(괴뢰)의 공식 국기로 여러 괴뢰 국가들의 통합을 위해 오색기를 채택했다. 1940년 왕징웨이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왕징웨이 정권을 세우고,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공식 국기로 채택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은 오색기를 원했다. 일본은 청천백일만지홍기의 위에 노란 삼각 패넌트를 추가하고 검은색으로 평화, 반공, 국가건설이라는 글을 쓰는 것을 추가 제안했으나 왕징웨이는 거부했다. 결국, 왕징웨이와 일본은 노란색 기는 야외에서만 쓰기로 협정했고, 1943년 왕징웨이가 그 기를 국기로 포기할 때까지, 국기가 같은 나머지 두 정부는 서로 자기가 중국의 유일 합법 정부라 주장하였다.

 

청천백일만지홍기는 1947년 제정된 중화민국 헌법에 6개의 조항에 따라 정확히 서술되었다. 1949년 국공 내전 이후, 장제스는 타이완 섬으로 난징의 국민정부를 이전해 계속 중화민국을 유지해 나갔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 새로운 국기인 오성홍기를 국기로 채택했다. 19541024일 타이완의 국기와 국장은 중화민국 입법원에 의해 국기의 크기, 길이, 비율, 제작, 사용에 대한 규정이 발표되었다


                                                                                                     중국 팔로군 깃발

소비에트 홍군에서 중화민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개편

1937년 7월 27일 마오쩌둥(毛澤東), 장원톈(張聞天)이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국공합작에 따른 홍군개편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항일전 기간 홍군이 ‘8로군’으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홍군 통솔기구의 명칭에 대해서 양보할 수 있지만 홍군과 소비에트 지구에 대해서는 전권을 보유한다고 천명했다.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이 홍군의 인사에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 이날 천명된 원칙의 요체였다.

다음 날인 28일에 8월 15일까지 홍군의 재편성을 마치고 같은 달 20일에 항일전에 출동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어 장제스(蔣介石)에게 전문을 보내 홍군을 국민혁명군으로 개명하여 장제스의 지휘 아래 항일전쟁에 동참시킬 뜻을 전달하였다.

공산당은 이 제안에서

①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실현

② 국민당정권의 전복을 위한 모든 폭동정책과 지주의 토지몰수 정책 취소

③ 소비에트정책과 홍군 명칭의 취소

④ 국민혁명군으로의 개편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명령 수용 등의 4개항을 제시하였다.

8월 장제스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지휘부를 인선하였다. 하지만 이 인선은 공산당이 결정한 것을 추인하는데 불과했다.

8로군 총사령관은 주더(朱德)이고 부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정치부를 설치하여 런비스(任弼時)를 주임에 덩샤오핑(鄧小平)을 부주임으로 하였다.

그 아래 3개 사단을 두었는데 115사 사단장에 린뱌오(林彪), 120사 사단장에 허룽(賀龍), 129사 사단장에 류보청(劉伯承)이 임명됐다.

8로군 개편 당시 총병력은 4만 5,000명이었다.

한편 주력군을 8로군으로 개편한 뒤 따로 1만 명의 병력으로 보안대를 창설하고 사령관에 가오강(高崗)을 임명했다.

8로군은 이후 국민혁명군 제 18 집단군으로 개칭됐으나 계속 8로군으로 불렸다.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활동한 중공 계 정규군과 유격대의 총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항일전쟁 개전 직후 8로군은 맹렬한 전투와 유격전으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항일전쟁 종전 뒤에는 신사군(新四軍)등과 합쳐져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3대 기율 8항주의(三大規律 八項主義)’로 대표되는 인민에 봉사하는 엄격한 규율에 의해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것이 중일전쟁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최대요인이 되었다



[팔로군(八路軍),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은 1937년 제2차 국공합작후에 중국 공산당 휘하 독립적 성향을 가진 부대로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설립되었고 신사군과 함께 화베이 지방에서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한 부대이다. 적극적인 항일전과 민심도모로 인해 중일 전쟁 기간에 중국 공산당에 큰 발전을 기여했다


1.개요

마오쩌둥은 군벌이나 열강에 대항하려면 민중에 의한 혁명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 국민당에서는 1920년대 1차 국공 내전 당시 빈약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군대의 수나 그 재정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군대를 이용해 상하이 쿠데타(중국어: 四·一二事件)를 부흥시켰고, 제1차 국공 합작을 붕괴시켰다. 중국 공산당은 이 씁쓸한 경험으로부터 독자적인 군대의 창설을 해야했다.

중국 공산당에 있어서 큰 기회로 바뀌었다. 마오쩌둥에 의한 인민전쟁 이론(「점화한 적군을, 인민의 바다안에 매장한다」―인해전술)에 따라, 공산당은 중국 각지에의 침투 공작을 적극적으로 행했다. 공산당에 협조적인 지역을 넓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공산당 세력은 풀뿌리적으로 증식하였고 중일 전쟁이 끝난 1945년 980,000명 정도의 게릴라 군을 모으게 된다.

그러나 1937년에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후 8년동안 중국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무기와 군사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국민당 정부군은 전쟁발발 직후부터 일본에 밀리기 시작하여 충칭으로 임시수도를 옮기고 서부 산악지대를 근거로 지구전을 펼쳐야만 했다. 팔로군은 일본군에 제대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동부해안지대에서 북경-서안-장사-계림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중국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다. 중국 국민당의 국민 혁명군과 중국 공산당 휘하에 있던 팔로군은 전쟁기간동안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일본의 패전 후, 국공 내전이 재개하면서 팔로군은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만주의 할힌골 전투(러시아어: Бои на Халхин-Голе)에서 승리한 소련군은 관동군의 장비를 접수하였고 이것을 그대로 팔로군에게 주었다. 또 일본군의 군인이나 민간인을 팔로군에 가세하는 것으로 군사 기술이나 전문 기술을 얻을수 있었다. 공군이 없었던 팔로군은 일본군의 항공 부대의 장교를 회유하여 항공대원 양성하였고, 포병 전술, 전략 측이 미비하여 기본적으로 체계화 된 일본군의 포병 전략을 베이스로 하였다. 또한 팔로군 내 조선인이 간호, 의사들 그리고 좌익 아나키스트 계열의 항일군이었던 조선의용대를 필두로 국공 내전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승리하고도 팔로군은 긴 세월에 걸쳐 징용 했고 팔로군은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최종 승리하여 1949년 10월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큰 역할을 완수했다.

2.활동 지역

팔로군은 주로 관동군 점령지역의 후방 교란과 게릴라전을 담당했다. 1940년 8월에는 화북에서 백단 대전이라고 하는 철도나 탄광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 공세를 실시했지만, 관동군은 이 팔로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특수치안부대, 간도특설대를 미리 조직하였고 팔로군 일부는 백단 대전에서 금세 소탕되었다.

3.승전국(勝戰國)

2008년 현재, 중국 국민의 대부분이「중공은 일본과의 전투로 승리했다」라고 믿고 있다.「중공은 일본과의 전투로 승리했다」라고 하는 이유는 원래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상대로 해서 이길 확률이 거의 없었으나, 갑자기 터진 중일 전쟁에 의해 중국 공산당은 활발한 게릴라 작전등을 펼쳤고 이에 대해 지지를 얻었다는 애매모호한 주장들을 펼치고 있다.

4.전신 체계

당초 조직 된 홍군(중국 공산당군)은 마오쩌둥 지휘하의 중국공농홍군과 남창 봉기로 주덕 밑의 홍군인 정강산에서 합류해 중국공농혁명홍군 제4군이 되어 후에 중국공농홍군 제4군이 되었다. 제4군은 서금의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에 본거지를 두었지만, 5회에 걸치는 국민당군의 포위 공격에 맞아, 근거지를 떠나고 대장정을 시작하게 된다


 

5.규모 및 규모 변화

팔로군은 비정규적인 게릴라 전을 구사하였으나 정규 전술을 썼던 국민당에 비해선 사상자가 적었다. 중국측 자료주장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의 경우는 약 300,000명의 사상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팔로군은 소련에 의해 압수된 수 많은 일본군측의 장비와 무기들을 소련측으로부터 흡수함으로써 장비로서 정규적 전술을 펼칠수 있는 군대를 만들수 있었으며, 팔로군의 숫자를 계속 늘릴수 있었다.

(1)국민혁명군 제8로군

1937년 - 120,000명

1938년 - 156,000명

1940년 - 400,000명

1944년 - 600,000명

1945년 - 980,000명

(2)중국 공산당

1946년 - 1,200,000명

 

6.조직

(1)지휘부

사령관:주더

부사령관:펑더화이

참모장:예젠잉

정치부(제8로군정 지부) 주임:런비스

(2)예하 부대

제115 사단장 린뱌오, 부사단장 네룽전, 부대 주 지휘관 뤄룽환

제120 사단장 허룽, 부사단장 샤오기, 부대 주 지휘관 관웅

제129 사단장 류보청, 교위단장 쉬샹첸, 부대 주 지휘관 장하오

각 사단은 각각 2개 여단이 있다.

독립단- 조선인으로 구성 된 여단이다. 조선의용대 또는 1940년대 초반에 차출된 동북항일연군이 주축을 이뤘다.

기병단 - 주로 측면을 교란하던 기병대였다.

포병단 - 팔로군이 숲속이나 농촌지에 요새를 구축할 때 그 수성전은 주로 포병단이 맡았다.

타격단 - 팔로군의 주력 여단이었으며 게릴라 전술을 통한 관동군 후방 교란이 주요 목적이었다.

교도단 - 주로 경비 또는 죄수 교도를 맡았다.

특무단 - 지금의 헌병대의 역할이며 팔로군 내 군경 역할을 했다.

국민당군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중일 전쟁 기간 내에 장비는 우수했지만 병력 보존에 우위를 두어서 일본군과의 정면 결전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관동군이 전략 요충지로 결정하고 쳐들어 오는 곳에서는 격렬히 저항하였고 정규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항상 소규모 전투에서 패전을 했으며, 같은 국민 혁명군에 속했던 팔로군을 간접적으로 탄압하였다. 또한 팔로군에 대해서 적극 공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예로 신사군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당군이 병력 보존을 고려한 것은 중일 전쟁이 끝난 후 공산당을 무력으로 즉각 없애버리려는 의도였지만, 이 전략은 완벽하게 실패가 되어 버린다. 항일전에서 과감하게 일본군과 싸운 팔로군은 화북을 중심으로 민중의 지지를 모은 것이었다. 그에 비해 국민당군에 대한 민중의 평판은 확고히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국민당을 돕던 미군도 사실상 팔로군과 주로 작전 수행을 하였다.(미국 육군으로부터 파견되었던 죠셉 스티르웨르 중장의 해임사건도 이것이 원인이 되었다.)

팔로군은 군복과 군모의 색은 함께 황토색.하지만 홍군시대의 남색의 군복의 군인도 많았다. 왼팔에 「8로」라고 쓰여진 완장을 붙인다. 군화는 신지않고 포화나 짚신을 신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팔로군은 점령지에서 어느 정도의 소지를 소유한 농민을 「부농」이라고 판단해 인민재판에 걸쳐 처형했다. 이것은 팔로군의 힘을 과시해 주민에게 공포심을 안게 하기 위한 목표였고 팔로군에 대한 부정적 측면으로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잔학행위는 지역 내의 빈곤한 자의 질투심, 복수심을 채우는 일로도 판단되어,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공헌한 면도 있다.

7.3대 기율과 8항주의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에는 「3대 기율 8항주의」(三大纪律八项注意)라고 하는 규칙이 있었다. 이는 팔로군이 대중에게 지지를 받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으며, 후에 한국전쟁 당시 중국에서 파견된 인민지원군에게도 나타났다. 이 규율을 어긴 팔로군은 중형을 받게 되었고 심하면 총살형에 처해졌다. 팔로군은 장개석 휘하의 국민혁명군과는 반대로 이 엄격한 군대 교조로 인해 게릴라 전으로 큰 전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1)3대 기율[三大規律]

1.모든 행동은 명령에 따라야한다

2.인민의 바늘 하나, 실 한 오라기도 공짜로 취하지 않는다.

3.모든 전리품은 공유하여야 한다.

(2)8항주의[八項主義]

1.병사를 구타하거나 욕하지 않고 불필요한 상명하복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사람은 때리거나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2.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3.공평하게 사고 판다[매매는 공정하게 하여야 한다]

4.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

5.말할 때는 온화하게 한다[말을 부드럽게 하여야 한다]

6.빌린 것은 반드시 되돌려 준다.

7.파손한 물건은 반드시 배상한다.

8.농작물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8.소멸

1947년에 제2차 국공합작이 국민당군의 선공으로 붕괴하면서 팔로군은 신사군과 함께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편입되었다.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국 공산당의 당군이며,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규군이다.

*신사군 사건(新四軍事件) 또는 원난 사건(皖南事变)은 중일 전쟁중인 1941년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이 공동 항일 전선을 펼 당시 일어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고 이론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사건을 두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가들의 평가가 나뉘는데 중화민국 쪽에서는 이를 공산군의 불복종에 대한 징벌이라고 보는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쪽에서는 국민당의 배신행위라고 보고 있다.

제2차 국공 합작이후 양쯔 강 남쪽에서는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신사군이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산군과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장제스는 점차 공산군과의 협력을 꺼리게 되었고 1940년 12월 신사군을 안후이 성 및 저장 성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은 이에 동의하고 병력을 양쯔 강 이북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신사군 공산당 장교들은 이 명령에 반발했으나 결국 이동에 합의했다.

예팅이 이끄는 신사군의 정예 병력 9,000명은 3개 방면으로 나눠 양쯔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고 1월 5일 도하를 마치고 집결하였다. 이때 갑자기 8만명의 국민혁명군이 나타나 이들을 포위하고 다음날 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숫적 열세에 밀려 신사군은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고 부대장 예팅은 부하를 살리기 위해 1월 13일 국민당군측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예팅이 협상하러 오자 갑자기 국민당측은 그를 체포해 버렸고 결국 신사군의 부부대장도 전사하고 2,000명의 병사만 살아서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1월 17일 장제스는 신사군의 해체를 명령했고 예팅은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그러나 1월 20일 옌안의 공산당 군사위원회는 부대를 재건하기로 결정하고 천이가 새로운 부대장이 되었고 류샤오치는 정치위원이 되었다. 신사군은 7개 사단 및 1개 여단으로 구성된 9만병력의 규모로 재편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실상 제2차 국공 합작은 결렬되었고 국민당은 항일전선을 깨뜨렸다는 비난에 당면한 반면 공산당은 항일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비록 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인해 양쯔강 남쪽의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인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국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전쟁기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기

빨간색 바탕 왼쪽 상단에는 노란색 별이 그려져 있으며, 별 안쪽에는 노란색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다.

노란색 별 주위에는 키릴 문자 "ЗСФСР"가 쓰여져 있다.



홍군(紅軍)의  군기


                                                                                          신사군(新四軍) 깃발

1938년 1월 6일 신사군(新四軍)이 난창(南昌)에서 정식으로 구성됐다.

신사군은 1934년 10월 홍군의 주력이 장정(長征)을 시작, 서천북상(西遷北上)한 뒤 화중(華中), 화난(華南)에 남아서 유격전을 계속해 온 홍군 잔존 부대로 구성되었다.

신사군이란 명칭은 2차 국공합작 후 국민당 정부가 1937년 10월 이들 잔존 게릴라 부대의 재편을 허용하고 이 부대에 '국민혁명 신편 제4군(國民革命新編第四軍)'이란 부대명칭을 붙인데서 비롯됐다.

군장(軍長)에 예팅(葉挺), 부군장에 샹잉(項英), 참모장에 장윈이(張雲逸), 부참모장에 저우쯔쿤(周子昆), 정치부 주임 위안궈핑(袁國平)이 임명됐으며 4개 지대를 관할했다.

3년 뒤인 1941년 1월 6일환난(皖南), 즉 안후이(安徽)성 남부에서 활동 중이던 신사군 9,000명이 장제스(蔣介石)의 명령을 받고 양쯔강(揚子江) 이북으로 이동하던 도중, 국민당 군 7개 사단 8만 명의 포위공격을 받는다.

2,000명만이 포위망을 돌파했으며 부군장 샹잉과 7,000여 명은 전사하고 군장 예팅도 포로가 되었다. 이는 공산군 세력이 강화되고 있는데 대한 국민당군의 초조감의 발로로 ‘환난사변(皖南事變)’으로 불린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적인 일본군을 앞두고 벌인 동족상잔에 대해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를 빗대 ‘千古奇冤 江南一葉; 同室操戈 相煎何急’ 이라는 시를 신화일보(新華日報)에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은 천이(陳毅)를 대리군장으로, 류샤오치(劉少奇)를 정치위원으로. 장윈이(張雲逸)을 부군장으로 삼아 신사군 재건에 나섰으며 한층 강한 군대로 발전했다. 항일전쟁 후 내전 당시 화둥(華東)야전군으로 활동했다.

 

*미군시찰단 연안(延安) 방문

1944년 7월 22일 미군 대령을 단장으로 한 미군 시찰단이 주중 미군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홍군의 최고 지도부가 위치한 옌안(延安)을 방문했다. 8월 7일에는 2차 시찰단이 비행기 편으로 옌안에 왔다.

이들의 시찰 목적은 전선 후방 지역에서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의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젠잉(葉劍英)과 양상쿤(楊尙昆)의 영접을 받은 이들은 마오쩌둥(毛澤東),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만났으며 펑더화이(彭德懷)와 천이(陳毅) 등으로부터 8로군과 신4군의 전투 활약상황을 브리핑 받았다이들 시찰단은 옌안 외에 진찰기(晋察冀)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허베이성 일대), 진수(晋綏) 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네이멍구 일대) 등 홍군의 항일 근거지 등을 시찰했다.

이들 시찰단은 시찰을 마치고 미국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 공산당과 그 무장역량을 중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이들 미군 시찰단을 맞아 옌안에서 발행되던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우방 미국 군사사절단 환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시찰단이 미국에게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호의적 평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중 미군 총사령부의 군사시찰단 파견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움직임과 연계된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미국은 중국에서의 제2전선 역량 강화를 위해 모든 중국 군대의 통합을 희망했다.

헨리 월레스(Henry Wallace) 미국 부통령은 1944년 6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개선하여 항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7월 초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를 포함한 전 중국군 지휘자로 스틸웰(Stilwell) 장군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 초기 한국군의 작전권을 요구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협정을 통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렇게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루스벨트의 이 제안은 필연적으로 공산당이 참여한 중국의 연합정부 창설 제안으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이 일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미군 시찰단의 옌안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루스벨트는 결국 장제스와 심한 불화를 보였던 스틸웰을 소환하고 웨드마이어(Wedmeyer)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 공산당을 포함한 연합정부를 제안한 가우스(Gauss) 대사도 이해 11월 30일 스틸웰의 소환을 주장했던 패트릭 헐리(Patrick Hurley)로 교체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시도가 좌절된 셈이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은 유럽에서 처칠이 추구한 유고 정책 을 본 뜬 것이다. 유고에서는 나치 침공 후 왕정 세력의 게릴라와 티토가 이끄는 공산 세력 게릴라가 별도로 활동했는데 처칠은 티토의 게릴라가 적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역할을 하자 그들이 공산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햇다.

이 결과 2차 대전 기간 티토의 게릴라는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티토의 게릴라 세력은 종전 후 벌어진 유고 내전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왕정 세력을 격파하고 자체적으로 유고를 공산화하였다.

1940년 8월 20일부터 그해 12월 5일 까지 8로군 부총사령관 펑더화이가 지휘한 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미국에게 영국이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의 공산 게릴라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했던 것처럼 미국에게 마오쩌둥의 홍군의 전략적 가치를 괄목상대하게 만들엇다.

스틸웰 등 중국 주둔 미국 지휘부는 국민당 군대의 만연한 부패와 이에 따른 군사적 무능과 비효율에 불만을 품고 처칠이 유고에서 취했던 것처럼 공산 게릴라 세력을 적극 지원, 대일본 제2전선을 구축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 민주당 행정부는 2차 대전 기간 중국의 유고화를 시도하지 못했으나 이러한 기조는 루스벨트 사후 트루먼 행정부에 이어져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는 것을 방치햇고 중국 공산화 이후에도 애치슨 라인 발표 등 중국 유고화를 부단히 추구했다. 이런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무산시킨 것은 한국전(6.25 사변) 발발이었으며이 전략은 1971년 공화당 닉슨행정부의 키신저가 부활시킬 때까지 동면해야했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한반도 문제 해결 위한 4자 회담과 남북교차 승인, 유엔동시가입 등을 제의했다(1976).

 


                                                                                              중화인민공화국 국기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또는 오성홍기(五星紅旗, 오성붉은기)는 저장 성 출신 경제학자 겸 예술가 쩡롄쑹이 고안하였다. 그의 도안은 공개 모집된 약 3,000개의 도안 중에서 뽑힌 최종 38개 안 중에서 채택된 것이다.[1949927]

큰 별은 중국 공산당을 뜻하며 네 개의 작은 별은 노동자, 농민, 소자산 계급과 민족 자산 계급을 나타낸다. 빨간색은 공산주의와 혁명, 노란색은 광명을 뜻한다. 네 개의 작은 별은 큰 별의 중심으로 한 곳으로 모여 있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의 영도에 따른 혁명 인민의 대단결을 상징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가 제정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1949714일부터 815일까지 인민일보, 해방일보, 신화일보를 통해 국기 도안을 공모했으며 총 2,992점이 접수됐다. 이 중에는 미주(美洲)에서 응모한 23점을 포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그리고 북한 등 외국에서 응모한 것도 있었다.

심사결과 쩡롄쑹(曾聯松)의 도안이 채택되었다. 이 것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로 사용되고 있는 오성홍기(五星紅旗)’이다. 여기서 바탕의 홍색(紅色)은 혁명을, 5개의 별은 공산당 영도하의 혁명인민의 대단결을 상징한다. 중앙의 큰 별은 중국공산당, 주위의 작은 별은 각각 노동자, 농민, 지식계급과 애국자본가 계급을 나타낸다.]


                                                                             타이완(대만) 독립파 타이완(대만)공화국 국기[타이완 지도]

                                                                         윗 로고는 민진당 로고로 대만기는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타이완(臺灣) 지도]

민진당을 포함한 독립지향 세력은 그들의 행사에서 대만섬을 도안으로 한 '대만기를 사용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이를 국기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타이완(대만) 지도


  중화민국 임시정부 깃발  오색기[북양정부의 국기 (1912-1928) ]

오족공화(五族共和)는 중화민국 성립 초기의 정치 슬로건이다. 이것은 쑨원이 중화민족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내면서 청나라의 지배계층인 만주족과 몽골족 그리고 후이족들의 지배에서 벋어난 피정복민들인 한족으로서는 국가의 명분이 세워지지 않아 만들어낸 정치 슬로건이다. 이 원칙은 청나라에 살던 민족들과 관련이 있다. 당시에 사용된 국기인 오색기(五色旗)에서 노란색은 만주족, 파란색 몽골족, 하얀색은 후이족(회족),빨간색은 한족, 검정은 티베트족을 뜻한다. 오색기는 1928년 북양 정부가 무너져 타이완으로 도망을 치고 중국 국민당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사용되지 않고 있다.


                                                               중간에 그려져 있는 오색기(아래쪽에 "공화만세"(共和萬歲)라고 쓰여져 있음)


                                                                                                           만주국 국기

만주국의 국기(滿州國國旗)193231일에 만주국 정부가 만주국의 국기 제정에 관한 건을 채택하면서 제정되었으며 1945년에 만주국이 소멸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1912년부터 1928년까지 사용되었던 옛 중화민국의 국기를 바탕으로 하여 노랑, 빨강, 파랑, 하양, 검정의 색을 사용한 기이다. 그러나 중화민국 시절의 깃발에서 각 색깔이 상징하는 민족이 달라졌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한다.

                                                 만주족, 한족, 몽골족, 조선족, 일본족등 5개 민족 자치정부의 오족협화를 주제로 한 만주국의 우표


                                                                                            홍콩 특별행정구의 기(旗)

홍콩의 깃발은 붉은 바탕에 자형화가 새겨져 있고 그 안에 다섯 개의 별이 새겨져 있다. 이 깃발은 199771일에 제정되었으며, 같은 날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공식적으로 게양되었다

홍콩의 국기 혹은 홍콩 특별 행정구의 기는 199044일에 채택되어 1996810일 홍콩 특별 행정구 준비 위원회에 의해 공식 제정되었으며, 199771일 영국이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함과 동시에 열린 홍콩 반환 기념식에 처음 게양되었다.

빨간색 바탕 가운데에는 하얀색 바우히니아가 그려져 있으며, 다섯 개의 꽃잎 안에는 다섯 개의 빨간색 꽃술과 별이 그려져 있다. 빨간색과 하얀색은 일국양제를 의미하며, 바우히니아는 홍콩을 상징하는 꽃이다.

다섯 개의 빨간색 별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를 바탕으로 한 디자인으로, 이는 홍콩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임을 의미한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1959년부터 1997년까지는 파란색 바탕에 하얀색 원 안에 당시 영국령 홍콩의 문장이 그려져 있으며, 깃대 위쪽에 영국의 국기가 그려져 있는 디자인의 기를 홍콩의 기로 사용하였다.


                                                                                            영국령 홍콩의 기 (1959-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