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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역에 방송될 장진호전투 영화는 힐러리에게 악재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미 전역에 방송될 장진호전투 영화는 힐러리에게 악재

CIA bear 허관(許灌) 2019. 10. 23. 15:21



                                  

                                  

                                         두만강과 압록강 맞은 편에는 중국 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와 장백 자치현이 있습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압록강 도하를 시작했다. 이날 이후 중공군 18개 사단이 압록강을 통해 한반도로 진입, 한국전에 개입했다.
이 날은 이해 10월 초 38선을 돌파한 유엔군( 한국군은 10월 1일에 38선 돌파햇고 미군은 그 몇일 뒤엿다)이 평양에 입성한 날이다(백선엽 장군이지휘하는 국군 1사단은 이보다 4일 전인 10월 15일 평양에 진입했다).
미국이 한국전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해군과 공군을 한국에 파병하고 제7함대를 대만 해협에 출동시키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는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국이 대만을 침략한 것이라고 비난, 중국의 한국전 개입을 예고했었다
중국과 북한은 공식적으로는 이보다 6일 뒤인 1950년 10월 25일을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일로 기념하고 잇다.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고 1951년 1월 4일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19581026일 한국전에 참전했던 중국 인민지원군이 북한에서 완전 철군했고, 1961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중국은 한국전 개입을 ‘항미원조(抗美援朝)’로 부르고 있으며‘집과 국가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것(保家衛國)’으로 규정하고있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도하하고 있는 모습.


미국 공영방송 PBS가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장진호 전투'를 다룬 2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를 1(현지시각) 미국 전역에 방송한다고 미국의소리(VOA) 방송이 보도했다.

1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의 전설적인 전투"라며 "죽음과 혹한 등 2주간의 시련을 직접 겪은 참전용사 20여 명의 개인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고 소개했다고 VOA는 전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한 장진호 전투를 이렇게 대대적으로 보도한다는 것은, 그것도 직접 참전했던 용사들의 대담을 담은 기록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은 한국전쟁이 미국 병사들과 그 가족들에게 그리고 미국 국민들에게 얼마나 참혹한 전쟁이었는지를 상기시켜 줄 것이다.

결국 1주일 정도 남은 미국 대선투표에서 북핵 제거를 위한 전쟁 불사를 외치고 있는 클린턴 힐러리 후보에게 매우 불리한 영화가 될 전망이다.

 

장진호 전투에 대해 미국과 한국에서는 중공군의 포위에 들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데 북은 인민군의 포위섬멸공격으로 미 해병 1사단 2만여명이 전멸되다시피 한 미국의 패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의 관련 영상에서는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관련 북의 동영상을 보면 비밀리에 장진호반 근처로 끌고와 매복시켜놓은 포를 이용한 대대적인 공격으로 추위 때문에 한꺼번에 몰려있던 미군들을 일거에 소멸한 전투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키백과사전을 보면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는 생존자가 몇 안 된다 하여 영어로 그들을 가리켜 "The Chosin Few"라 하였는데 그 말은 "The Chosen Few" (선택 받은 소수) , ‘몇 명 살아남지 못한 전투라는 수식어가 당시에 붙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장진(長津)을 영어로는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ちょうしん)이라고 부르는데, 미군이 한국전 당시 일본에서 만든 지도를 사용하다 보니 미군이 장신을 Chosen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또 위키백과에서는 당시 뉴스위크지에서 이 장진호 전투를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평가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물론 요즘 미국과 한국에서는 중공군의 포위를 뚫는데 성공한 전투 흥남철수를 통해 10만 명의 북 주민들 후퇴에 성공한 전투라는 평가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는 후에 얼마든지 미화될 수 있고 관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에 가공이 가장 덜 되었을 당시에 보도 내용과 직접 경험한 병사들의 체험담이 진실을 파악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

 

따라서 당시 뉴스위크의 평가나 당시 사람들에게 유행했던 몇 명 살아남지 못한 전투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북미관계가 호전되어 미군 유해발굴 사업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 미군 유해발굴도 주로 이 장진호 인근에서 진행해오고 있다. 미군이 가져오지 못한 시체만 2000여구에 이른다고 한다.

 

따라서 장신호 전투에 참가했던 병사들의 대담을 담은 2시간 분량의 영화를 미국 전역에 방송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힐러리 후보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북미대화의 중요성을 미국 국민들에게 깨우치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이후 미군 유해 발굴 사업의 중요성을 부각시킬 수도 있다고 본다.

 

전례를 보면 이 미군 유해발굴 팀 속에 북과 관계개선을 위한 막후 협상팀이 함께 들어가 진지한 협상을 했기에 미군 유해발굴 사업의 진행은 곧 북미관계개선 신호탄으로도 볼 수 있다.

 





                                                                                                            장진호 전투

-1950,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지원 요청으로 비밀리에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의 일부를 한반도로 비밀리에 투입한다. 여기서 쑹스룬은 '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한 인민해방군 9병단을 이끌고 장진호 전투에서 미 10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쑹스룬은 성격이 불같았기 때문에 올리버 스미스장군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를 전멸시키려고만 했기 때문에 미 해병대를 상대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반면 후퇴하는 미 육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추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북중연합군 중국 모택동정부 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 만큼 평가하면서 큰 성과로 선전하는 전투가 바로 장진호 전투이다 장진호 전투는 중국정부 내 조선족 자치정부 중심으로 산악으로 잠입작전으로 성공한 한반도 전쟁에서 두번째 큰 전투이다 

중국군은 맥아더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기도비닉을 유지한 체 압록강을 은밀하게 도강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군은 연합군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낮에는 산속에 숨어있다 밤에만 행군하는 방법으로 백만군대를 소리 소문 없이 한반도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동북항일연합군 인민전쟁 모델]


장진호 전투는 2차대전시 독일 6군과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였던 전투와 더불어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2대 동계작전 중에 하나이며,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철수작전의 사례로 꼽힙니다. 아울러 미 해병대가 창설이후 세계 곳곳에서 치렀던 전투 중에 가장 치열한 전투로 손꼽입니다.

재미난 것은 전쟁의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군이 쏙 빠지고 미국과 중국군이 남의 나라인 한국에서 수 만명의 꽃다운 자국의 젊은이들을 희생해가면 싸운 전투라는 겁니다...어쩌면 이런 점 때문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야기 일수도 있습니다만 이 전투에는 여러 가지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겁니다..

전멸에 위기에 빠진 군인들이 어떻게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잘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만심과 허영심의 결말은 어떤 건인지..위기를 감지하고 대비할줄 아는 리더의 역량과 희생정신은 어떤 것인지를......

 

19509월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의 전선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구상한다. 그는 휘하 군대를 미 제8군과 10군단으로 나눠 서쪽 방면은 워커장군의 제8군이 서울 북쪽으로 개성-사리원 평양 축을 따라 압록강으로

동쪽 방면은 알몬드 장군의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하여 압록강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가 동서로 분할하여 섬멸한다는 구상을 하게 된다.

이 구상은 한만 국경으로부터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으로 이어져 동서로 나눠진 한국의 지리적 특성과 이에 따른 군수지원 문제를 감안하여 결정된 것이나 취약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지휘권이 동서로 양분되고 동서 양 부대의 거리가 멀어 상호 지원이 불가능함에 따라 거의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쪽으로 속절없이 패주를 하고 있었고 그들의 군수시설도 연합군의 공중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된 상태라 별 걱정 없이 작전은 추진되기 시작한다.

한편 중국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는 경고를 했지만 연합군 사령부는 이런 중국의 태도를 거의 무시하고 있었고 중국군의 압록강 도강과 북쪽 지역 출몰도 거의 형식적인 지원부대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1차대전의 전공과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장군은 만년에 한국전쟁을 지휘하며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미국의 영웅이 되어 있었고 이 출중한 능력을 보유한 군인은 벌써 한국전쟁도 승리로 이끌었다고 자평하며 자만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나 중국군은 맥아더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기도비닉을 유지한 체 압록강을 은밀하게 도강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군은 연합군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낮에는 산속에 숨어있다 밤에만 행군하는 방법으로 백만군대를 소리 소문 없이 한반도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원산 앞바다의 기뢰 때문에 계획보다 한참이 지난 19501026일에 원산에 상륙한 미해병 1사단의 올리버 스미스(Oliver. P. Smith) 장군은 상급부대인 10군단의 에드워드 알몬드 (Edward M. Almond) 중장의 작전계획을 보곤 걱정이 앞섰다.

 사단의 작전거리가 무려 480km에다 도로라는 것이 거의 좁은 산길이라는 점과 해병1사단 예하 보병연대를 1연대는 원산 주변, 5연대는 신흥, 7연대는 수동 북쪽에 분산배치 시켜 진격을 하라는 알몬드 장군의 진격명령과 사단 장비의 타부대로의 차출 지시로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게다가 도주하는 북한 패잔병만 있을 줄 알았던 유엔군은 압록강 부근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이 출몰하여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해병1사단 전방에서 포로로 잡힌 한 중국군은 대군이 산속에 숨어 때를 기다리다 일거에 포위하여 연합군을 섬멸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주었으나

    

사령부의 지휘관 누구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승전무드에 젖은 미군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거대한 재앙의 전조를 무시했다.

 

 1.지 휘 관

 (1)미 제 10군단장 알몬드 장군

 북진의 동부전선을 담당하는 미 제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전황을 너무도 낙관하고 있었고 전방의 중국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게다가 작전지역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리한 진격명령을 내리는 과오를 범했다.

그는 완강하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로 맥아더 원수의 신임이 아주 두터운 장군이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부하들의 헌신적인 충성을 요구하였으며 맥아더 장군에 충실하여 조속히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려는 맥아더 장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자신의 10군단과 소속 해병1사단의 성급한 진격을 명령하게 된다.

 장진호 전투에서 그가 보여준 인상적인 행동으로는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과 따뜻해 보이는 방한복을 차려입고 헬기로 전방을 방문해 중국의 세탁청소부 몇몇 때문에 진격이 저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일장 훈시를 하고 전방에 고립일보 직전의 부대원들에게 훈장 몇 개를 달아준 것이 고작이었다.

그날 훈장을 받은 육군 7사단 소속 대대장인 페이스 중령은 알몬드 장군이 돌아가자 신경질적으로 훈장을 가슴에서 떼어내고 훈장 말고 지원군을 주지라고 했다.

    

(2)미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장군

 해병1사단장 스미스 장군은 깡마른 체구에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원칙주의자였고 전장에서는 특유의 대범함을 보여주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대한한 독서가로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장교로도 유명했다. 특히 그는 속기의 명수로 자신이 겪은 전장에 대한 세세한 메모 덕에 장진호 전투 역사기록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항상 최악에 상황에 대비하라 그리고 최악에 상황에서도 항상 낙관적으로 임하라는 평소 소신에 따라 이번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전시에 말단 부하가 먹는 음식을 똑같이 먹고 허름한 야전 지휘부를 설치하고 부하 장병들과 동거 동락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원산 상륙 이후부터 10군단장 알몬드 장군과 삐걱거리기 시작 했는데 그는 알몬드 장군의 낙관적인 전황파악과 비상식적인 부대 배치명령으로 그의 지휘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상륙작전이 끝난 이후 대규모 지상 작전 시에는 어쩔 수 없이 육군의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해병대다. 따라서 육군 장성이라 할지라도 상관은 상관이고 명령은 명령이라 알몬드 장군의 지시를 따르기는 했지만 주도면밀하게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 나갔다.

그는 알몬드 장군의 분산배치에 정면으로 반박을 하고 부대를 장진호 축선상에 집중배치를 여러 번 요구했고 결국 관철시켰다.

 만일 해병1사단이 알몬드 장군이 원했던 대로 각 연대별로 쪼개져 진격했다면 분명 중국군에 의해 각개 격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알몬드 장군의 진격명령을 거의 명령불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지연시켰으며 작전지역의 특성을 잘 관찰하여 장진호 축선상 보급로가 좁아터지고 꾸불꾸불한 산악도로라는 것을 파악하고 충분한 양의 탄약과 보급물품을 하갈우리와 몇몇 곳에 비축해 놓았고

 야전활주로를 건설하게 한 것은 그의 선견지명이었다. 결국 지휘관의 이런 노력으로 해병1사단과 육군 7사단의 전멸이라는 재앙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3)중국군 제9병단 사령관 송시륜 장군

 그는 중국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1927년 농민무장군을 조직 유격대장 생활을 하다 1930년 중국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홍군 20군단 참모장을 시작으로 전장을 누빈 사람이다.

그는 19492월부터 홍군 제9병단을 맡아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9병단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게 된다.

 홍군출신답게 게릴라 전법을 구사 낮에는 미군의 공중폭격과 야포 공격을 피해 산속에 숨어 있다 밤에만 극도의 행군 군기를 유지하면 도로가 아닌 산 능선을 타고 남쪽을 진격해들어 왔다.

 그는 장진호 축선상의 좁은 산악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진격해오는 해병1사단을 최소한의 병력으로 접촉을 유지시키며 진흥리-고토리-하갈우리-유담리 사이에 좁은 산악도로에 길게 늘어서 배치되기를 기다렸다. 작전은 성공했다.

 주력부대들을 산악도로를 따라 주변 산정상에 배치시켜 해병1사단과 육군7사단을 커다란 자루 속에 넣어 완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이 작전이 성공하자 해병1사단과 주변 미군을 완전 전멸시키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자만했다. 그는 해병1사단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195011월이 되자 알몬드 장군은 스미스장군에게 압록강 방면으로 진격을 하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11월 중순경에는 해병1사단이 장진호 서쪽 유담리까지 진격을 했다.

 송시륜 장군의 의도대로 장진호 축선상에 길게 늘어져 배치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예하 부대들이 여기저기 수십킬로 씩 흩어져 있지 않고 비교적 지근거리에 위치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장진호 지역에 미군 병력은 해병1사단 13,500명 과 육군 7사단 일부 병력 4,500명 정도였고 주변에 중국군은 대략 7만명이 넘는 수준이었다.

 11월 초에 첫눈이 내리고 얼마 되지 않아 기온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장진호 주변은 평균적으로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역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개마고원 지역으로 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 30도이며 종종 영하 45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는 극한지였다.

이제 미군과 중국군은 상대방 보다 더 무서운 적 동장군과도 싸워야 할 판이었다. 이 동장군은 병사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는데 혹한의 날씨는 식수와 음식 모두 얼려버렸고 모든 장비의 성능을 크게 떨어뜨렸다.

소총의 발사불능, 야포의 불발율이 크게 증가했고 환자용 혈액과 몰핀도 얼어붙어 위생병이 몰핀 앰플을 얼지 않게 입속에 넣고 다닐 정도였다.

 부상자는 잠시만 눈위에 두어도 바로 동사했고 대부분 병사들의 발은 동상으로 시커멓게 변해갔다. 무시무시한 추위는 병사들을 무기력증에 빠지게 했다.

 특히 중국군은 열악한 방한장비로 인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멍하니 웅쿠리고 있다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집단으로 투항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2.중국군의 포위

 19501127일 북쪽으로 전진하던 해병1사단 5연대와 7연대 앞에 전방에 강력한 중국군 진지가 구축되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사실 이때 중국군은 이미 유담리 부근 일대를 완전히 포위한 상태였다.

밤이 되자 기온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갔다. 유담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30cm가 넘게 얼어붙은 땅을 파고 진지를 구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9시가 넘자 중국군은 유담리를 애워싼 고지능선을 따라 인해전술로 물 밀 듯이 공격해 해왔다.

중국군은 79사단과 89사단이 유담리 지역을 공격할 때 중국군 59사단은 유담리와 하갈우리 사이 도로상 요충지인 덕동고개 쪽으로도 공격을 해와 유담리 지역 해병부대를 고립시키려 했다.

 치열한 전투는 밤새 지속되었다. 해병 5연대와 7연대는 탄약과 수류탄이 떨어지자 육탄전으로 진지를 지켜냈다.

한편 하갈우리와 고토리 주변 지역도 중국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제 서야 미해병대는 자신들이 중국군이 쳐놓은 덧에 걸려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영국 해병 코만도 부대의 적진돌파

 1128일에 쯤에는 고토리도 중국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당시 사단본부 지휘소는 하갈우리에 설치되어 있었고 하갈우리 남쪽 고토리와 진흥리는 해병 1연대 병력이 후방을 방어하기 위해 주둔 중이었다.

스미스 장군은 고토리와 하갈우리 사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국군을 격퇴하여 보급로를 확보하고 병력일부를 하갈우리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하갈우리는 1사단 지휘소와 보급기지, 건설중이던 야전비행장이 있는 요충지였으나 본부 근무부대와 기타 잡다한 사단 직할부대들이 가까스로 지키고 있었는데 병력수가 1개 대대 규모 정도여서 부대 충원도 필요했기 때문에 고토리리로부터의 보급로 확보와 부족한 병력 충원이라는 두 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토리 지역을 담당하던 1연대장 풀러 대령은 1개 중대를 보내 이 임무를 수행하게 했으나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이어지는 이 도로 주변에는 중국군의 강력한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어 더 이상의 진출이 불가하여 철수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마침 하갈우리로 북상중인 영국 해병 제41 코만도 부대와 미해병 1연대 G중대 그리고 육군 7사단 B중대가 임시로 편성되어 북쪽 하갈우리로 진격하여 보급로를 개통시키려는 두 번째 시도가 개시된다.

이 임시부대는 영국 해병 41코만도 부대 지위관인 드라이스데일(Douglas Drydale) 중령 지휘하에 개시되었다. 900여병의 병력이 차량에 분승하여 전차의 호위아래 하갈우리로 돌파를 시도하기로 되어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의도를 중국군이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는 점이고 이에 대비해 주 도로 옆 고지에 부대배치를 완료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드라이스데일(Douglas Drydale) 중령이 휘하 부대를 이끌고 하갈우리로 진격해 들어가자 중국군의 집중사격이 개시되었다. 부대는 도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으나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드라이스데일(Douglas Drydale) 중령은 하갈우리 사단본부에 무전으로 사상자가 급증하고 있다며 전진을 계속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스미스 장군은 군 지휘관으로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런 결정을 해야 했다. 증원부대고 오지 않으면 사단본부가 적에 손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는 단호하게 명령을 내린다.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파하라!”

 드라이스데일 부대의 선두가 하갈우리와 고토리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중국군의 공격은 절정에 다 달았다. 빗발치는 총탄 앞에 부대는 다시 정지해야 했고 순간 탄약을 가득 실은 차량에 박격포탄이 명중되자 큰 폭발과 함께 차량이 도로에 전복되어 버린 것이다.

후속부대가 따라올 것이라 생각하고 선두부대는 적의 화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속력을 높여 앞으로 전진을 계속했지만 후속 부대들은 전복된 차량으로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하고 중국군의 총탄세례를 계속 받아야만 했다.

 

결국 후속부대는 철수를 해 다시 고토리로 돌아오거나 포로 신세가 되어야했고 드라이스데일(Douglas Drydale) 중령을 포함한 선두부대는 가까스로 하갈우리 사단 지휘소에 도착 할 수 있었다. 훗날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자신이 지나갔던 이 길을 죽음의 계곡(hell fire valley)이라 했다.

 

4.고립무원

 아군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끊기고 1개 사단 병력이 꼬불꼬불한 한국의 살길을 따라 고지몇 개를 지키며 중국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중국군은 미군의 공중폭격과 야포 공격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만 공격을 해왔다.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중국군과의 혈전 끝에 고지를 지키기도 했지만 빼앗꼈다 주간에 역습을 가해 다시 탈환하기도 하면서 절망적인 전멸 일보직전의 상황을 지키고 있었다.

이 일이 외부로 알려지자 미국 본토는 발칵 뒤집혔다. 곧 승리할 것으로 알고 잊혀져 가던 한국 땅에서 미국 최정예 부대가 완전 포위당해 곧 전멸하던지 투항해야 하는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유명 일간지 일면에는 미해병대 한국 동북부 장진호에서 전멸위기뭐 이런 기사로 도배가 되었다. 해병대 사령부에는 자식을 해병대에 보낸 부모 형제 아내 친구들의 전화로 교환대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미 해병대의 위기는 2차대전당시 타라와 과달과날 이오지만 등지에서 숫하게 있었지만 1개 사단 전체가 전멸에 처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 위기감은 정말로 심각했다.

 미국 전역의 신문 대부분이 해병1사단의 전멸을 예상했고 미 정부 고위 관리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1130일 경 해병 1사단 5연대와 7연대는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 포외된 상태였고 장진호 아래 하갈우리에는 사단 지휘소에 1개 대대 병력이 방어중이고, 장진호 동쪽에는 미 7사단 일부 병력이 하갈우리 아래쪽 고토리에는 해병 1연대 병력이 중국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야말로 고립무원 처지였다.

이건 후퇴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이다~!

121일경 스미스 장군은 장진호 전투 전체의 양상을 바꾸는 결정적인 명령을 내린다.

유담리에 5연대는 유담리 지역 전부를 방어하고 7연대는 5연대가 시간을 끄는 동안 전 부대원을 이끌고 하갈우리 쪽으로 돌파하라. 7연대가 하갈우리 쪽으로 접근을 하면 5연대도 서서히 유담리 지역을 벗어나 하갈우리로 후퇴하라~!

때마침 희망의 불빛이 보였다. 스미스 장군이 장진호 전투 초기부터 진행시켰던 하갈우리 야전활주로가 121일 경에 부분적으로나마 개통된 것이었다.

 

전투 초기 스미스 장군이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 등지에 야전비행장 건설을 강력히 추진하는데 대해 일부에선 야전지휘관이 너무 신중을 기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훗날 역사가들은 이 당시 야전비행장이 건설되지 못 했다면 분명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오후 2시경 C-47 수송기가 활주로에 착륙을 하자 부상자 수송이 시작되었다. 이 활주로가 고립무원의 해병1사단과 외부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 보급품 수송과 부상자 이송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124일경 5연대와 7연대는 치열한 전투를 거치고 수백명의 부상자를 대동한 채 유담리에서부터 23km의 지옥 굴 같은 포위망을 돌파해 하갈우리로 후퇴했다.

하갈우리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단 지휘부와 부대원들은 유담리 방향에서 돌아오는 병사들을 보고 마치 유령이 걸어오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이 시기 각 언론사들의 특파원과 기자들이 수송기 편으로 하갈우리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뉴욕 헤럴드 튜리뷴의 미모의 여성 기자였던 마가릿 히긴스의 도착은 하갈우리 병사들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 여기자는 스미스 장군에게 이 작전이 후퇴작전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방을 포위당해 어딜 가나 적군인데 후퇴는 가당치 않다.

"후퇴라니 빌어먹을 우리는 다른 쪽으로 공격중이라고"~! 라고 호기 있게 대답했다.


이 말은 지상을 통해 세계각국에 보도됨으로 써 유명한 말이 되었는데 특히 이 전투를 상징하면서 매 해병대의 불굴의 투지를 알리는 말로 역사에 남게 된다.

특히 사단장의 이 말이 장병들에게 전파되면서 중국군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기약 없는 철수작전을 수행 중이던 많은 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5.흥남방향으로의 돌파

125일 스미스 장군은 자신이 말한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을 위해 예하 지휘관을 불러 작전회의를 갖는다. 늦가을에 원산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100km나 진격한 해병대는 이제 반대방향으로 진격하여 흥남으로의 힘겨운 철수를 해야만 했다.

스미스 장군은 참모들의 건의에 따라 적진 돌파시기를 126일로 결정한다. 유담리서 철수한 제5, 7연대의 휴식과 재편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선 스미스 장군은 사단병력을  5연대를 근간으로 영국 41코만도, 육군 31연대 전차중대, 포병1연대 등으로 구성된 5연대 전투단과 7연대를 근간으로 육군 7사단 31연대 임시대대, 포병11연대 2개 대대, 사단 지휘부 등으로 구성된 제7연대 전투단

그리고 제1연대를 근간으로 육군 7사단 31연대 2대대, 사단 본부대대 등으로 구성된 제1연대 전투단으로 부대를 구성한다

 

스미스 장군의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하갈우리에 있던 제5, 7연대 전투단이 우선 고토리-진흥리 도로를 따라 함흥으로 돌파한다.

우선 5연대 전투단이 하갈우리 전부를 방어하는 동안 7연대 전투단이 먼저 고토리 방면으로 돌파를 하고 7연대가 하갈우리를 빠져나가면 5연대 전투단이 그 뒤를 이어 고토리로 철수하면서 사단 전체 후방을 방어한다.

1연대 전투단은 고토리와 진흥리 일대를 확보하다 7연대 전투단이 고토리를 통과할 때 호위를 하고 7연대가 빠져나가면 그 뒤를 따라 후속한다는 계획이었다.

포병부대들은 그 배치를 상호 지원 포격이 가능할 정도로 근접시켜 축차적으로 이동하고 적과 접적되어 있는 전투부대들은 지상 근접지원 전투기들의 엄호아래 신속이 전투지역을 이탈하게 했다.

지상의 해병부대와 해군 대지공격 전투기들 간에 효율적인 협조체제가 그 어느때 보다 필요한 시기였다.


6.탈 출

각 전투단들은 고토리와 진흥리 방향으로의 철수 와중에도 주변 진지를 탈환하여 측면을 보호해 가며 전진을 해야했고 도로 양쪽 5km 이내에는 전방 항공통제관이 미해군과 해병 항공대 소속 전폭기들과의 교신을 통해 지상부대들을 위한 근접 항공지원을 요청해가며 힘들지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 갔다.

중국군은 도로 옆 고지에서 내려와 도려 주변 지역에 계곡과 민가에 숨어있다 기습적인 공격을 가해와 차량들을 파괴하고 도로를 일시적으로 폐쇄시켜 미해병대의 진격을 중지시킨 이후 대규모 부대들이 도로 전면을 가로막는 등 거세 공격을 해왔다. 특히 주변지역 민간인 피난민들 때문에 미군은 골머리를 앓았다.

 10만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은 중국군을 피해 미군 부대 근처로 무질서하게 몰려들었고 종종 피난민 속에 섞인 중국군들 때문에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각 부대들은 이를 격퇴시켜 가며 도로 개통을 유지한 상태로 죽음의 장진호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126일에서 시작된 흥남으로의 철수작전은 11일 전 사단이 진흥리를 통과하여 흥남에 도착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하갈우리에서 고토리 그리고 진흥리를 지나는 길은 중국군의 마지막 격렬한 공세와 추위, 폐쇄된 도로와 교량을 개척해가며 악전고투 끝에 일궈낸 승리였다.

 

7.투 혼

 애초부터 미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는 지휘부의 적정분석 실패와 오판으로 재앙을 예고하고 있었다. 지옥 같은 개마고원의 혹한과 중국군의 인해전술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병력의 열세를 특유의 투지와 전투정신으로 극복했다.

이는 전장에는 죽음이 따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료 전우와 부대 명예를 위해 임무 수행을 하다 전사한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한국전쟁 중 미국의 무공훈장중 최상위급에 해당되는 명예훈장 수여자가 총 131명인데 그중 미해병대에 수여된 명예훈장이 무려 46명으로 1/3가량이 되고 그중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장병중 명예훈장을 수여 받은 이가 13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한국전쟁때 파병된 미 해병대 수가 고작 1개 사단 규모임을 감안하면 장진호 전투에서 보여준 미 해병대원들의 투혼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8.결 론

 장진호 전투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맥아더가 구상한 북진전략의 실패속에 이뤄진 전술적인 승리였다. 당시 중국군은 총 7개 사단이 정진호에서 미해병 1개 사단과 육군 1개 연대를 포위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결론적으로 중국군 제9병단은 해병1사단 전멸과 흥남까지 밀고 내려간다는 당초 목표를 달성하기는 커녕 전사 25천명 부상 12천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괴멸되다시피 했다.

미 해병대도 718명의 전사자와 3508명의 부상자를 내며 단기간에 가장 많은 전상자를 낸 전투를 치러냈으나 그들의 값진 희생으로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했다.

전사에 길이 남을 이 철수 작전은 미해병1사단의 단결력과 장병들 간에 끈끈한 전우애 그리고 신뢰 속에서 그 승리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긴박한 전쟁터에서 환자와 보급품 수송이 가장 급한일 임에도 불구하고 전사한 전우의 시신이라도 전장에 두고 떠나지 않는 다는 그들의 오랜 전통에 따라 1구의 시신이라도 후송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을 타군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 출신 사진작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이 찍은 당시 사진은 라이프지에 표지를 장식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때는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 같이 매서게 추운 아침이었다. 그 야말로 매일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감사 그 자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저녁이면 그 밤이 셀 때까지 견딜 수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인생이 짧게도 또는 영원같이도 느껴지는 세계다.

여기에서 해병대원에게 크리스마스날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일을 달라라고 대답하는 세계인 것이다. ” 





-중국 인민해방군이나 소련 붉은 군대 그리고 북한 인민군은 게릴라부대(저격여단)로 산악 등지로 침투하여 인민전쟁을 추진해왔다

중국 인민해방군도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전에 게릴라 군대(저격여단, 9시단)가 함경북도나 평안북도 지역 산악을 장악해왔다

한국전쟁 때 지리산 빨치산부대(남부군) 지휘부는 한국전쟁 초기에는 남로당(조선공산당)이 주도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인민군(조선의용대) 출신이 주도했다

전쟁의 승리는 군대나 무기보다 민심(民心)이다

-북한은 6·25전쟁에 참전했던 중공군이 19584월부터 철수함에 따라 병력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종래 사회안전부의 지휘를 받던 자위대를 해산하고 1959114일에 노동 자, 농민, 제대군인, 학생 등 약 50만 명으로 노농적위대를 창설하였다. 처음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였으나 1962년에 전인민 무장화 정책에 따라 18~45세의 남자와 18~35세의 미혼여성까지 편입시켜 조직을 확대하였다. 1971년에는 노농적위대의 해당 연령을 50세로 연장하고, 다시 17~60세의 남자와 미혼여성 가운데 교도대에 편입되지 않은 주민을 모두 편성대상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01010일 당창건 65주년 기념 군사 열병식에서 노농 적위군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였고, 이후 북한은 노농 적위군으로 호칭하기 시작하였다

로농적위군의 소속은 인민군이며 명령체계는 인민무력부이다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 인물 저우바오중(周保中, 주보중)-붉은 군대 예하부대 각 민족 빨치산(공산당 무장단체) 부대 

194310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제88독립저격여단(국제여단, 각 민족 빨치산 부대) 대원 사진. 1열 좌로부터바탈린( N. S. Batalin, 巴达林, 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 중국), 왕일지(王一知, 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중국), 김일성(金日成, 1영장, 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1904~?)2장광적(张光迪, 중국), 풍중운(冯仲云, 중국), 왕효명(王效明, 중국), 왕명귀(王明贵, 중국), 팽시로(彭施鲁, 중국)3양청해(杨清海, 중국), 서철(徐哲, 조선), 강신태(姜信泰, 강건, 조선), 김광협(金光侠, 조선), 수장청(隋长青, 중국)4: 안길(安吉, 조선), 박덕산(朴德山, 조선), 최용진(崔勇进, 조선), 도우봉(陶雨峰, 중국), 김경석(金京石, 조선)[사진: 소련 제88국제여단 소속원 - 중국 길림성 도서관]



주보중(周保中, 1902- 196422)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중국 남서부 윈난성(雲南省, 운남성)에 사는 소수민족 바이족(白族, 백족) 출신이다 건국 전에 김일성, 최용건 등 조선인의 항일 빨치산도 소속한 동북 항일련군(東北抗日聯軍)의 제2군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고 동북항일련군(東北抗日聯軍)이 적군(赤軍, 소련군)의 제88 독립저격여단(88独立狙撃旅団)으로 조직 개편할 때 제88 독립저격여단(88独立狙撃旅団)의 여단장이 되었고 소련군 제88독립저격여단의 만주침공 이후 소련군의 장춘위수부사령관(長春衛戍副司令官)이 된다. 국공 내전에서 동북 인민해방군의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윈난성 인민정부 부주석,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 등을 역임한다.

 

주보중(周保中)1902년 윈난성(雲南省, 운남성) 다리시(大理市,대리시)에서 태어났다.

1917 15세의 나이에 호법운동(護法運動,에 참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윈난성(雲南省, 운남성) 육군강무당(陸軍講武堂)에서 수학(修學)했다.

1926년부터 북벌(北伐)에 참가했고 국민 혁명군 제6(国民革命軍第6)으로 활동했다.

19277월에 우한시(武漢市, 무한시)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2712월 후난성(湖南省, 호남성), 저장성(浙江省, 절강성),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등으로 수송과 연락 임무에 종사했다. 국민혁명군(国民革命軍) 6군의 제18사단의 부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1928년 소련 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에 유학했다.

 

1931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귀국하여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만주지역의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 등으로 김일성과 최용건등의 조선인과 협력하여 항일 게릴라를 조직 하였고, 1935년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면 제2군 군장(2軍軍長)에 취임하였고, 1937년 연군 개편시(聯軍改編時)에 제3로군장(3路軍軍長)이 되었다

길림성 동부(吉林省東部)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소탕작전에 의해 큰 타격을 받게 되면서 1940년에 소련의 극동 지방에 탈출하여 소련군의 산하 제88독립 저격여단(88独立狙撃旅団)의 여단장(중령)이 되었다. 김일성은 대대장(대위)이었다.

 

19458월 소련군의 만주침공과 함께 만주로 돌아와 소련군 장춘 위수 부사령관((長春衛戍副司令官)에 임명된다 같은 해 9월 이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동북인민자위군(東北人民自衛軍)으로 개칭되고, 총사령관에 임명 되었다

1031일 이전 항일련군(抗日聯軍)과 토착 무장조직을 규합하여 새로운 동북 인민자치군(東北人民自治軍)이 편성되면서 임표 총사령관에서 주보중 부총참모장에 임명 되었다.

 

1946114일 동북인민자치군(東北人民自治軍)이 동북민주련군(東北民主連軍)으로 개칭되면서 임표 사령원(司令員)에서 주보중 부사령원(副司令員)에 임명 되었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이 시작되면서 1946년부터 1948년 국공내전에서 중국 동북부 장춘시 해방 전투에서 활약했고. 194810월 제2차 장춘시 해방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19481월에 민주련군(民主連軍)이 동북 인민해방군(東北人民解放軍)으로 개칭 된 뒤 11월 제4야전군(第四野戦軍)으로 개편되면서 주보중 부사령원을 해임 되었다

 

1949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19502월부터 윈난성 인민정부 부주석(雲南省人民政府副主席), 서남 군정위원회 정법위원회 주임 겸 민정부장(西南軍政委員会政法委員会主任 兼 民政部長) 등을 역임했다.

195110월부터 19575월까지 운남대학 교장(雲南大学校長)을 역임했고 또한 19538 월부터 195410월까지 서남정법학원 원장 겸 당 위원회 위원장(西南政法学院院長兼党委員会書記)을 역임했다

1954929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의 결정에 따라 국방위원회 위원에 임명 되었고, 1955년에는 일급팔일훈장(一級八一勲章), 일급독립자유훈장(一級独立自由勲章)을 수여 되었다.

1956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대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선출 되었다. 19569월 중국 공산당 제8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에 선출 되었고, 1959428일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민족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됨과 동시에 동 회의의 결정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재임 되었고 196422일 베이징시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

 

북한 노동신문에서도 칭찬되고 있는 북중 관계의 상징이자 김일성의 친밀한 상관이고 소련에 소개한 은인이기도 한 주보중과 그의 일족은 광물 자원과 예술과 무기 거래 등 외화 획득에 중요한 사업으로 다양한 편의를 도모하고 북한 경제의 버팀목이 되어 있는 것이 해외 언론에 보도 되고 있다

 

                                                                           1946년 8월 길림성 연길 주보중 장군

                                                                                             주보중 장군이  착용한 비옷

*호법운동(護法運動

1917년에 중국의 북양 군벌 돤치루이에 반대하여, 남방의 혁명 세력이 일으킨 운동. 돤치루이가 정권을 장악하여 안후이파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자, 쑨원 등 남방의 혁명 세력이 옛 국회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일으켰다


*주보중 약력

1902년 운남성 대리시에서 태어났다.

191715세의 나이에 호법 운동에 참가했다.

1922~ 1924년까지 운남육군강무학당에서 수학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제6군에서 활동, 북벌에 참가했다.

19277월 우한시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12월 국민혁명군 제6군 제18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하여 호남성, 절강성, 하북성 등에서 수송 및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28년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레닌학교에 유학했다.

19319월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만주 요녕성 등에서 항일 게릴라 조직을 결성했다.

1935년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면서 제2군 군단장에 취임했다.

1937년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되면서 제3로군 군장에 취임하여 길림성 동부의 산악 지대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 일본 관동군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 때문에 1940년 소련 연해주로 피신했다. 그리고 소련군 산하 제88독립저격여단의 여단장(중령)이 되었다.

1945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과 함께 만주로 돌아가 소련군 장춘위수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59월 동북항일연군이 동북인민자위군으로 개칭되면서 총사령에 임명되었고, 1031일 동북항일연군과 토착 무장조직들이 규합하여 동북인민자치군이 편성되자 총사령 린뱌오 밑에서 부총참모장을 역임했다.

1946114일 동북인민자치군이 동북민주연군으로 개편되자 린뱌오 사령원 밑에서 부사령원을 역임했다.

1946~ 1948년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중국 동북부의 장춘시 전투에서 활약했고, 194810월 제2차 장춘시 해방 전투에도 참가했다.

19481월 동북민주연군이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된 후, 11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되면서 부사령원에서 해임되었다.

1949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19502월부터 운남성인민정부 부주석, 서남군정위원회 정법위원회 주임 겸 민정부장을 역임했다.

195110~ 19575월까지 운남대학 교장을 역임했다.

19538~ 195410월까지 서남정법학원 원장 겸 당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54929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의 결정에 따라 국방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55년 일급팔일훈장 및 자유독립훈장이 수여되었다.

1956년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69월 중국공산당 제8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고, 1959428일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민족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및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재임되었다.

196422일 베이징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 빨치산 조직(소련군의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성격)으로 지금까지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당계의 조선인, 중국인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문호를 넓혀 우파 항일 무장단체를 받아 들여 1936년부터 개편되어 갔다.

주보중이나 김일성 등 중국인과 조선인의 유명한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소속으로 나중에 소련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조직으로 개편하여 그 구성원 중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의 중추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다)

 

1.성립

1930년대 초반에서 만주국(満州国, 193231일 건국일)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조선인, 중국인의 항일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편성되어 있었지만, 조선인 대원 400명 이상이 친일 스파이로 의심 받고 숙청된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 등으로 탈출도 잇따라 조직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편,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統一人民戦線)의 결성을 호소되면서 중국 공산당도 8월 테제를 발표하고 제2차 국공합작(2次国共合作)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만주에서도 항일 반만(抗日反満)” 구호로 내세우면서, 국민당 계열의 독립 무장단체를 포함한 모든 단체와 합작하여 흡수를 목표로 정책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미 1934년경부터 국민당계열의 마적(馬賊, 말 타고 다니는 소수 무장단원의 군벌)이나 의용군(義勇軍)도 공산당의 지도하에 정리하려고 시도했던 것이지만, 토착 무장단체는 주로 부농(富農), 부호(富豪)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해 공산주의 색깔(노동자 계급 령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을 싫어하여 국가자본주의(국가사회주의) 일만측(日満側, 일본과 만주국)에 돌아는 경우가 많았다. 최대한 공산주의 색깔을 엷게 하여(통일전선 구축) 존속하고 있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소규모 마적과 독립 무장단체를 흡수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되어 갔다.

 

그러나 통화성(通化省)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계열의 최대의 항일 무장단체 왕봉각(王鳳閣)

의 반만항일군(大刀会, 대도회)과 만주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조선인 민족주의자 무장단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우파는 공투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집단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큰 세력이 될 수 없었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제1. 2군이 남만주, 4. 5. 7. 8. 10군이 동만주, 3. 6. 9. 11군이 북만주로 확장했다

1936년 우선 남만주군(南満)이 제1로군(第一路軍)이 되고, 이것이 두고 두고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주력부대인 것으로 계속되어 나가게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간도는 민생단 사건이 꼬리를 이어 내분이 계속되고 좀처럼 재편은 부진했지만 1937년에는 동만주군 제2로군(東満軍 第二路軍)이 되었고, 1939년 북만주군 제3로군(北満軍 第三路軍) 것으로, 일단의 재편을 하게 되었다[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제1군으로부터 제11군까지 존재했으며, 1, 2군이 남만주에서, 4, 5, 7, 8, 10군이 동만주, 3, 6, 9, 11군이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후에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으로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으로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2. 편성

편성 당시의 제1로군(1路軍)의 인원은 중국 공산당측 자료 "中共延辺党組織活動年代記(중공연초당조직활동연대기)“ ”동북항일연군투쟁사(東北抗日聯軍闘争史)“ 6,000여명 추측되고 일본측의 만주공산 비적의 연구(満州共産匪研究)“에 따르면 1,630명 정도에서 상당한 차이가있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아래의 인물은 사사키 하루타카(木春隆) "한국전쟁 이전의 한국 독립운동 연구와 강재언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라했다.

서대숙 "김일성 사상과 정치 체제가 자세 하지만, 동북인민혁명군 시대(東北人民革命軍時代)에 전사 한 인물이 실리는 등 착오가 보여 자료로 피했다.

해방 이후 최현(崔賢),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강건(姜健), 최용진(崔勇進). 김일(金一), 이영호(李永鎬)은 살아남아 나중에 북한의 요직을 차지한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으며 제88독립저격여단을 소련군으로 지칭하고 있다]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부총사령 왕덕태 [副総司令-王徳泰]

정치위원 위증민[政治委員魏拯民]

 

1로군 군단장 양정우[ 第一軍 軍長-楊靖宇]

1사단 사단장 정빈[第一師 師長-程斌]

· 3여단 정치부 주임 이질수[3 政治部主任-李鉄秀]

4여단 단장 수상태 [4 団長-隋祥太]

6여단 단장 유인봉[6 団長-劉仁鳳]

2사단 사단장 조국안[第二師 師長-曹国安]

8여단[8]

3사단 사단장 왕인재[第三師 師長-王仁斎]

5여단[5]

7여단[7]

 

2로군 군단장 왕덕태[第二軍 軍長-王徳泰]

정치주임 오성륜(),이청()[政治主任-呉成崙. 季青]

4사단 사단장 안봉학[第四師 師長-安鳳学]

1여단 단장 최현[1 団長-崔賢]

2여단[2]

3여단[3]

5사단 사단장 진한장[第五師 師長-陳翰章]

4여단[4]

5여단[5]

6여단[6]

6사단 사단장 김일성[第六師 師長-金日成]

7여단 단장 김주현[7 団長-金周賢]

8여단 정치위원 박덕산(김일)[8 政治委員朴徳山金一]

9여단[9]

10여단[10]

 

독립여단 여단장 방진성[独立旅 旅長-方振声]

1여단 단장 최춘국[1 団長-崔春国]

2여단[2]

 

교도여단[教導団]

 

2로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주보중[第二路軍 総司令兼政治委員-周保中]

  참모장 최용건(최석천)[参謀長-崔庸健崔石泉]

4군 군단장 이연평[第四軍 軍長-李延平]

부군단당 왕광우[副軍長-王光宇]

1사단 사단장 관서범[第一師 師長-関書範]

1여단[1]

2여단[2]

3여단[3]

2사단[第二師]

2사단 정치위원 도정비[第二師 政治委員-陶浄非]

4사단 정치위원 김광협[4 政治委員-金光侠]

5여단 정치위원 박동화[5 政治委員-朴東和]

6여단[6]

3사단 사단장 이문빈[第三師 師長-李文彬]

8여단[8]

9여단 정치위원 강신태(강건)[9 政治委員姜信泰姜健]

 

7군 군단장 이학복[第七軍 軍長-李学福]

군단장 대리 최석천(최용건), 경낙정[軍長代理-崔石泉,景楽亭]

정치주임 정로암, 포림(政治部主任-鄭魯岩,鮑林)

1사단 사단장 왕여기[第一師 師長-王汝起]

  정치부 주임 팽시노[政治部主任-彭施魯]

1여단 여단장 최용진[第一団団長-崔勇進]

2사단 사단장 유기창[第二師 師長-鄒其昌]

7여단 정치위원 이영호[第七団政治委員-李永鎬]

3사단 사단장 경낙정,운학영, 수장청[第三師 師長-景楽亭,雲鶴英隋長青

 

8군 군단장 사문동[第八軍 軍長-謝文東]

10군 군단장 왕악신[第十軍 軍長-汪雅臣]

구국군[救国軍]

의용군[義勇軍]

 

3로군 총사령관 장수전(이조린)[第三路軍 総司令-張寿籛李兆麟]

참모장 허형식[参謀長-許亨植]

정치위원 빙중운, 김책[政治委員-馮仲雲, 金策]

3군 군단장 허형식[第三軍 軍長-許亨植]

6군 군단장 장수전[第六軍 軍長張寿籛]

7군 군단장 이화당[第九軍 軍長李華堂]

11군 군단장 기치중[第十一軍 軍長祁致中]

정치부 주임 김정국[政治部主任金正国]

 

                                                                                             1932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만주국 지도] 

3.활동 상황

(1)1일로군 제1(一路軍第一軍)의 서쪽정벌

1936년 남만주에서 제1일로군(第一路軍)이 성립한 당시 중국 공산당은 소위 장정(長征) 한창이었지만, "항일동정(抗日東征)“ 깃발을 들고 산서성(山西省)에서 하북성(河北省)에 진출하여 동쪽으로 향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일로군 1(第一路軍第一軍)의 첫 번째 활동은 이에 잇따라 움직을 하여 서쪽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1차 서쪽 정벌은 제1사단(第一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66월 하순, 번시(本渓,본계-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동부의 중공업도시)와 안동성 봉성현(安東省鳳城県)의 경계에 있는 화상 모자산(和尚帽子山)을 출발하여 요양(遼陽)에서 남만주 철도와 요하(遼河)를 넘어 요서(遼西)에서 열하(熱河)로 나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수암현(岫岩縣)의 산악 지대에서 만주국군(満州国軍)에 포위되어 뚫고 탈출했지만, 다수의 도망자,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2차의 서쪽정벌은 제3사단(第三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전원이 기마대(騎馬隊)가 되어 결행(決行) 하게 되었고, 193611월 하순 싱징현(흥경현,興京県) 경계에서 기마로 출발하여 만주국군(満州国軍)의 추격을 받으면서 청원(清原)에서 철령(鉄嶺)을 넘어 요하(遼河)유역에 도달 하였다

그러나 따뜻한 겨울을 위한 요하(遼河)가 결빙(氷結, 물 따위가 얼어붙음) 되지 않고, 한달의 행군으로 피폐 결국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400명의 대원이 백 수십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3사단(第三師)의 대원 수가 400명이었다고 한다면, 6개사단(6個師) 모든 동일 숫자라고 하는 단순 계산으로 제1일로군 전체(第一路軍全体)2400명 정도가 6000여명으로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었다고 알 수 있다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로군 제1(一路軍第一軍)은 서쪽 정벌에 실패하면서도 또한 팔로군(八路軍)과의 연계를 지향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목적으로 제3사단(第三師)의 생존을 중심으로 청원(清原), 서풍(西豊), 개원(開原) 일대로 활동을 계속하였고 별동대가 심양(瀋陽), 무순(撫順) 일대에 진출하는 등 소모(消耗)를 거듭했다.

 

(2)김일성 부대에 의한 보천보 습격

한편, 1936년 제1로군의 제2(第一路軍 第二軍)은 장백지구(長白地区)에 근거지를 만들려고했다. 4사단 사단장(第四師 師長) 안봉학(安鳳学)체포되어 투항하였고 제2군 군단장(第二軍軍長) 왕덕태(王徳泰)이가 만주국군에 포위되어 전사하는 등 상당한 희생하면서 우선 김일성이가 사단장을 맡고 있는 제6사단(第六師)의 근거지 개척에 성공하여 1937년에는 제1로군(一路軍)의 제1군 제2사단(第一軍第二師)과 제2군 제4사단(第二軍 第四師)이 장백(長白)에 근거지를 옮기고 있었다.

 

원래 1932년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시작한 것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반석현위원회(中国共産党満州省委磐石県委)이었지만, 그 당시부터 고참 조선인 멤버에 오성륜(呉成崙) [全光, 전광]], 이상준(李相俊)[이동광(李東光)]이가 있었다.

오성륜(呉成崙) 2(第二軍)의 정치주임이었고 이상준(李相俊)도 제2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들은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의 반성에 따라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의 지지를 얻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호소하기 위하여 재만주지역 조선인 조국광복회(祖国光復会)를 조직하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백(長白) 침공은 이에 따른 것으로 제6사단(第六師)의 지지기반 구축 공작을 시작하고 그 일환으로 압록강 유역의 조선반도 내부 함경남도 (현재 양강도) 갑산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금철(朴金喆), 박달(朴達) 등 공산주의 단체 (후에 조선 노동당 갑산파)와 연락을 하게 되었다.

 

19376월 제6사단(第六師)은 압록강을 건너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甲山郡普天面保田里)[보천보(普天堡)]의 습격(보천보 전투)에 성공했지만, 이것은 갑산그룹 안내와 참가해서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조선뿐만 아니라 조선반도를 단속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일본측에서도 공비[共産党匪賊(공산당 비적)]으로 거물시 되는 것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 하는데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이 전년(前年) 6사단(第六師)의 장백(長白, 백두산) 근거지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수 십명 규모의 소대 김일성 부대를 자칭 무송(撫松)과 장백(長白)에 출몰하여 약탈을 반복 만주군 수비대와 충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한이 해()에 들어서는 갑산 그룹의 활동도 활발해 지고 조선인 부호(朝鮮人富豪)에서 금품을 갈취 등의 사건도 있었다. 또한, 최현를 단장으로하는 제4사단 제1여단(第四師第一団)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무산(茂山)에 진입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미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을 전년(前年) 조선반도의 신문은 김일성 부대의 동향을 전했다. 1936911일자 매일신보는 "혜산 건너 편에 출몰하는 적단(賊団, 도적 단체)150 - 160명으로, 3분의 1이 만주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이고 ... 관헌과 같은 복장으로 소련식 중국식의 소권총, 강한 기병2(軽機二丁), 대포1(大砲一門)을 가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계(東北抗日聯軍系)에서 장백현(長白県) 방면에 파견된 이 부대의 수령(首領) 김일성이라고 한다. 이들은 15-20 명씩 소대 약탈반을 꾸어 조선인 부락에서 식량을 약탈하였다"와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정보를 싣고 있다. 참고로 뒤를이었다 경성일보 기사에서는 "비수(匪首, 도덕의 두목) 김일성 일당이 있고, 6사단(第六師)'김일성 부대'를 자칭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19375, 최현 부대(崔賢部隊)가 무산(茂山)에서 남하(南下) 하여 혜산 경찰서 관내(恵山署関内),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 상흥경수(上興慶水) 부락 고뢰조재목작업소(高瀬組材木作業所,)을 습격했다

금품 많은 것을 약탈 한 후, 주 임무인 일본인 1, 조선인 5, 중국인 30명을 납치해 강유역으로 도망친 후 몸값을 요구했다.

그에 이은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이다. 보천보 300호 남짓의 마을에서 일본인 26, 중국인 2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다. 그래서 무차별 적으로 금품을 강탈하고 동사무소 나 소방 회관, 우체국, 초등학교 등에 방화하고 도망한 것은 충격을 받은 단속측 조선총독부는 김일성과 최현에 거액의 상금을 걸고 수배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크게 보도했다. 이 신문의 논조는 그들을 비적(匪賊)으로 비난하고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동정(同情)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관헌 (조선 총독부)에 의한 검열을 위해 항일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곤란이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중국 공산당과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소련의 원조도 얻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물자 보급을 위해 종종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의 구별없이 금품강탈이나 몸값 목적의 유괴 등 폭력적인 약탈 행위도 했다. 또한 몸값 목적 외에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주민을 납치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어 넣어 인원 충당하고 있었다. 물자와 인력의 공급 수단에 있어서는 비적(匪賊)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보천보전투 양강도는 중국 장백산과 한국 백두산으로 접경을 두고 있으며 두만강, 압록강이 양국으로 접경하고 있다  

(3)혜산사건과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

김일성부대의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에서 추격한 혜산경찰서의 경찰부대는 매복을 받아 32 명 중 7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상에 급히 함흥 보병 제74연대 김인욱(金仁旭) 소좌(소령)이 혜산 수비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이 혜산 수비대가 경찰부대와 협력하여 최현 부대와 합류하고 있는 김일성 부대를 급습하여 타격을 주었다. 이는 김일성 부대가 다시 국경을 넘어 조선에 침공하는 것은 없어졌지만, 갑산 그룹의 활동은 운흥면(雲興面) 금광을 습격하여 사금(砂金)을 강탈 하였다. 도적단이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는 삐라를 뿌리고 있던 것으로부터, 동조(同調) 갑산 그룹의 존재가 드러나고, 갑산측에서 162, 장백현에서 59명이 검거됐다. 혜산사건의 시작이다 .박금철도 이 때 검거 되었다.

혜산사건(恵山事件) 1차 검거의 자백도 이듬해 1938년에는 박달을 포함한 279명이 검거 돼 만주국 주재 조선인 조국광복회(在満韓人祖国光復会)와 거기에 기담한 갑산그룹이 괴멸했다.

한편, 1938년 초에 제1로군(第一路軍) 주력군은 주로 집안현(輯安県)의 삼림 지대에 있었다. 중국인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와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은 팔로군과 연락을 고집해 여러 번 서쪽 정벌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 중에 제1사단(第一師)의 사단장 정빈(程斌)과 그의 부대가 일만토벌부대(日満討伐部隊)에 투항했다. 일만측(日満側)은 투항자를 처형하지 않고 상금이나 직장을 보장하는 귀순 전략을 취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한 것이다. 따라서 서쪽 정벌은 중지(中止)가 다음과 같이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이 이루어졌다.

인원의 숫자는 강재언(姜在彦)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른다.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 정치위원 위증민, 군수처장 오성륜, 총서령부경위여 여장 방진성 (500 )[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政治委員魏拯民 軍需処長呉成崙 総司令部警衛旅 旅長方振声 (500]

1방면군 지휘 조아범(250)[第一方面軍 指揮曹亜范 (250]

2방면군 지휘 김일성(350)[第二方面軍 指揮金日成 (350]

3방면군 지휘 진한장(300여명)[第三方面軍 指揮陳翰章 (300人余)]

이 중 제2방면군(第二方面軍), 3방면군(第三方面軍)은 기존 제2로군(第二路軍)의 활동 범위로 되어 있던 동만주의 화룡(和竜), 안도(安図), 연길(延吉), 왕청(汪清), 혼춘(琿春) 등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 이 활동 구역으로 통합 되었다.

 

(4)1로군(第一路軍)의 괴멸

중일전쟁이 발발했던 1937년 소련은 만주국, 조선과 접하는 국경을 경계하여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조선인) 모두 친일세력으로 간주하고,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렇게 한 것은스탈린의 대숙청에 처음부터 관계 당국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에 있었다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 겐리후 류시코후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위태로워 것을 헤아려 19386월 연해주에서 국경선을 넘어 만주국로 망명했다. 류시코후는 혼춘( 琿春)헌병대에 연행 된 후 도쿄의 참모 본부에 보내 망명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망명 사건에서만 아침의 국경은 극도로 긴장하여 소련군과 일본군 수비대가 충돌하는 장고봉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이듬해 1939년 노몬한 사건이 일어나 일단 휴전은 되었지만, 일본측의 경계가 높아져 관동군에 의해 만주 국내 항일세력에 대한 철저한 단속이 시작 되었다. 2 독립수비대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에 만주국군(満州国軍) 7개여단, 경찰대 30개 대대가 배속되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하여 대적 하게 되었다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작전은 군, 경찰, 행정기관, 민간조직의 연락을 긴밀히하여 그물망을 잘게 치고 게릴라 활동을 봉쇄 민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 일반 주민에게 토벌대와 게릴라 부대가 교대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신변안전을 위해 쌍방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토벌대가 게릴라 부대를 몰아 약탈과 납치 위협을 완전히 봉쇄하여 치안을 유지한다면 게릴라 부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적극적으로 토벌대에 협력하게 된다. 결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사람이 없는 삼림 지대에 몰려 식량과 의류의 확보도 곤란해 질 것이다

 

토벌대 중에서도 가장 유능하게 움직인 것은 정빈(程斌) 등 투항한 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구성하고 있는 경찰부대였다. 그들의 활약으로 제1로군(第一路軍)은 점차 멀리 분산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40년 초에는 경위여장(警衛旅長) 방진성(方振声) 체포되어 처형, 투항들도 잇 따랐다. 그 투항자 때문에 총사령관 양정우의 동정(動静)이 알려져 단신 행동을 강요 될 때까지 되었다. 양정우는 몽강현(濛江縣)[현재는 양정우을 따서 정우현으로 개명 됨]에서 산 일에 들어간 주민과 접촉하여 통보돼 투항을 거부 사살 되었다. 토벌대는 최후의 절개에 흠모하여 불교행사를 영위하고 영혼을 달랬다.

 

양정우 사후, 1로군(第一路軍) 지도자로 추대된 위증민(魏拯民)은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주력 부대를 북상시키기 위해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남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그 직후 지휘관 조아범(曹亜范)이가 대원에 의하여 살해 되었고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내분에 의해 해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김일성이가 이끄는 제2 방면군(第二方面軍)100 ~ 300명 정도의 집단 활동을 유지하고 습격, 약탈, 납치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19403월에는 안도현(安図県) 대마록구(大馬鹿溝) 산림 경찰대(森林警察隊)를 습격하여 사상자 각 2명의 피해를 주고 금품 23천엔을 약탈하고 대충 약 140명을 납치했다. 이틀 뒤 피랍자 중 25(일본인 1, 조선족 13, 만주족 9, 백계 러시아인 2)을 석방. 나머지 납치 인질 70여명과 함께 도망을 계속했기 때문에 만주 경찰과 마에다군단(前田隊)의 쫓는 곳이 되었지만, 2 방면군(第二方面軍)의 매복으로 마에다대(前田隊) 140명 중 일본측 문서 전사자 수 58, 전상자 27, 실종자 9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주고 건재함 인상을 남겼다.

 

이 가을에서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활동은 다시 활발해지면서 제2 방면군을 주요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김일성 부대도 소수 부대에 분산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의식(衣食)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제1로군 중추의 위증민도 연락이 취하지 못하고 김일성을 포함한 수십명은 8월에서 10월경에 자신의 판단으로 소련령으로 도망쳤다. 소련 측과의 연락도 없이 갑자기 입소였기 때문에 김일성은 억류 돼 한때 투옥 되었다.

 

3 방면군(第三方面軍)1939년 제2로군 제5(第二路軍第五軍)과 대규모 공동 작전에서 한때 안도현 대사하진(安図県大沙河鎮)을 점령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해 겨울부터 군 단위(軍単位)의 활동은 불가능하므로, 전사, 전상(戦傷), 도망, 투항자가 이어 괴멸 상태가 되었다. 1940년말 지휘관의 진한장은 추격에 의하여 전사한다.

그러나 활동을 계속 되어 김일성 부대 입소 이후 소수 인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소련에 입국했다. 13여단(十三団)을 이끌던 최현도 그 안에 포함돼 있다.

 

1로군 총사령부(第一路軍総司令部)도 괴멸 상태였지만, 194011월경에는 군의관 처장 서철(徐哲)도 경위대 살아남은 몇 명을 데려 입소했다. 만주에 남은 제1로군 수뇌부에 관해서는 19411월에 오성륜(呉成崙) 투항 귀순. 3월 질병에 시달리고 고립되어 있던 위증민이 토벌대에서 발견되어 전사 혹은 병몰 후 발견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제1로군의 만주에서의 활동은 거의 끝났다.

 

                                  1939年秋魏拯民左二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指戰員在一起

(5)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과 소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원래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재편 된 것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있었지만, 소련의 극동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한 대응은 상황에 따라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1로군(第一路軍)의 활동 범위는 소련 국경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원래 지원을 받을 수도 적었지만 국경 근처의 동만주나 북만주에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 밀접하게 소련과 염려 했다.

 

국경선이 긴장하고 있던 1938년 말에는 개편 이전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제65(第六軍五師)가 일본군에 쫓겨 부대마다 월경했지만 사단장(師長)이 체포 될 뿐만 아니라 전원이 신장성(新疆省)으로 보내졌다.

 

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은 함께 대규모 내분을 안고 있었지만, 그 조정(調整)에 지도력을 발휘하고 양군 통해의 중심이 되어 있던 것은 제2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 겸 정치 위원 주보중(周保中)이었다. 1940년의 1월 그가 중심이 되어 소련 극동당국과 1차 하바롭스크 회의를 받고 중국 공산당 중앙과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황 소련 극동당 조직과 극동 방면 군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임시 지도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합의가 성립했다.

 

194011월 주보중과 참모장 최용건은 사전에 소련측의 연락을 받고 부대마다 입소하고 살아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다른 대원도 그 뒤를 이었다. 투옥되어 있던 김일성의 신원을 보증한 것은 주보 중이다.

 

3로군(第三路軍)은 총사령관 이조린(李兆麟) 등의 간부는 입소했지만, 소련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고, 참모장의 허형식(許亨植)의 지휘 아래 부대의 절반이 북만주에 남아 싸움 계속했다

.허형식(許亨植)1942년 경안현 청봉령(慶安県青峰嶺)에서 장렬한 전사를 이루었다. 일단 입소했던 정치 위원의 김책은 허형식(許亨植)의 의지를 이어 1943년 연말까지 입소를 거부하고, 봉산현(鳳山県)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1941년의 시점에서 제1로군에서 입소한 인원은 88명 정도 제2로군에서 110명 정도로, 200여명이 소련령에 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939년 김일성(앞줄 좌로부터 네번째)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지휘부 전투지휘자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

[金日成前左四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部指戰員攝於1939金日成於1932年春到安圖創建游擊隊先後擔任汪清反日游擊大隊政委東北人民革命軍第二軍獨立師第三團政委第二軍第三團政委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三師後改為第六師師長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


                                                 東北抗日聯軍第第一路軍女戰士左三為金貞淑


                                       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警衛旅部分指戰員攝於1939年夏


3.그 후

소련에 망명한 구성원은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88독립저격여단)에 편입 되었다. 이 여단은 소련군에 흡수된 형태였지만, 소련 사람을 섞으면서 그 구성원이나 직책 등 주보중이 여단장되는 등 대체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중국 공산당은 이 여단을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이라고도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대원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분리 된 소련군 정보국 직속되어 만주국에 침투해 공작에 종사했다. 위험한 임무에 종사한 그들이었지만, 숙청과 일본군의 스파이로 간주 형을 받은 사람도 있다.

 

또한 김일성은 스스로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에 편입 된 것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출판)"로 인정하지만 소련군과는 연계된 것만으로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88독립저격여단)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조선반도의 해방군이 되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 대원은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38 도선 이북의 조선)에 돌려 보내 북한 인민위원회와 조선 공산당 (이후 조선 로동당) 및 조선 인민군의 요직에 올랐다.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만주파 (파르티잔파, 빨치산파)라는 파벌이 되어 남로당파 (남조선 노동당 출신), 연안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중국에서 귀국 한 자, 조선의용군) 소련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파견 된 자. 소련군 출신이나 행정,기술관료 출신), 갑산파(보천보 전투 등으로 동북항일연군과 공동 투쟁 한 자)을 잇따라 숙청하고 북한 권력을 독점했다. 조선 로동당에서 정적을 제거하고 구축한 만주파는 1967년에 당의 지도 이념으로 유일사상 체계를 채택하고 이후 북한은 주체 사상에 기초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걸어 가게 된다.

 

김일성은 만주국(만주지역 조선족 자치정부) 조선 공산당 활동가에서 소련군 예하 각 민족 빨치산부대로 그리고 2차대전 때는 소련측(좌파진영) 연합군 조선인(한국인) 부대로 활동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보다는 철저한 마스-레닌주의 노선 공산주의자이며 스탈린 추종세력이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스탈린을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후에 그는 바트당(아랍 사회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 공산당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이론 비슷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 자본체제) 이론이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과 소련 공산노동당 그룹이 있다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이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라면 공산노동당 그룹이 교조주의자들이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사회주의 공화국(사회주의 국가) 세력은 국가자본주의 일본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할 때 민족해방과 왕권신수설 전체주의 군주, 지주계급이나 매판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혁명 체제 사회주의 국가 승리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개인 우상화, 신격화로 1인 장기집권으로 왕권신수설에 도취되고 있다

   

만주국을 승인한 국가

중국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역, 교통, 통신을 위해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3년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33)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323, 법률상 1941413), 이탈리아(19371129), 스페인(1937122), 독일(1938512), 헝가리 (193919)에 승인되었다.

 

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61), 프랑스(1940712), 루마니아(1940121), 불가리아(1941510), 핀란드(1941718), 덴마크(19418),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82)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1130), 태국(194185),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만주국 인구와 오족협화

만주인(한족·만주족·한민족) 30,190,00097.8%

일본인 590,7601.9%

타인종(러시아인·몽골인 등) 98,4310.3%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이후 만주지역 항일운동은 만주국 협화회(의회) 조선족 협화회(만주국 의회 조선족 의원, 조선족 자치조직)를 파악해야 잘 이해할 수 있다

만주국 협회(만주국 의회)는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일족(야마토 민족의 연합정부 오족협화를 의미한다

만주국은 강덕제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야마토 민족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관동군이 주도하였다.

김일성(김성주)은 만주국 건국 이후 남만주나 동만주 지역에서 반일이나 반만주국(반만국)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의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헌병 보조원[만주군 통역 ]으로 생활했다

만주국과 조선총독부는 다른 성격이다

만주국은 자치를 보장된 위성국가이며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직할지역이다

만주국 협화회에 가담한 조선족 자치조직이 만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가 조선족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종일전쟁 때 중화민국 지원국과 일본제국 괴뢰국

중화민국 지원국:

미국 (1941-)

소련 (1937-1941, 1944-)

영국 (1942-)

나치 독일 (1933-41)

공동 교전국

몽골 몽골 인민공화국 (1945)

비시 프랑스 비시 프랑스 (1940)


일본제국 괴뢰국가:

만주국 (1932-)

몽강연합자치정부 (1936-)

왕징웨이 정권 (1940-)

둥방공자치정부 (-1938)

중화민국 임시정부 (-1940)

중화민국 유신정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기조가 일어나자, 당시 만주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인민전선론'이 대두됐다

조국광복회 간부들은 대부분이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로 채워졌으며, 군사활동뿐 아니라 국내 정치활동에도 주력,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자·천도교·지주까지 참가시켰다[조국 광복회와 보천보 전투]

북한 공산주의자 김일성, 김책, 강건 등 은 만주지역에서 만주국 조선 공산당  항일 운동이 소련정부의 대일정책에 따라 움직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이 중일전쟁때 중화민국 지원국일때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활동이 대단했고 소련이 공식적으로 만주국을 승인할 시기에는 1941년 부터는 만주국 내부에서 공산당 활동이 침체되었고 협력자들이 등장했다 1944년 경부터  소련이 연합군으로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주도할때는 만주국 내부 공산당 세력들이 반만주국 반일 투쟁 활동과 만주국 점령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제1전선 구축 소련군 주도, 제2전선 구축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공산주의자 주축으로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만주국 오족협화] 소련 제1극동전선군  88독립 저격여단 연합으로 추진 되었다


193777일 중일전쟁과 소련의 만주국 승인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 등을 정리될 때 정확하게 만주지역 조선족 좌파(소련 원조 공산당)나 우파(중국 장개석정부) 항일운동을 재정리할 수 있다


88독립 저격여단 

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1개이다

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 여단 1 대대장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 88독립 저격여단  사실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부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남은 자들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활동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 편성 동북 항일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88독립저격여단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 소련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받은 적군 계급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지휘 관직 붉은 군대(소련군) 장교 임명 되었다. 병사 적군 군복 착용했다.

 

1944 4 현재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 - 스 메르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9 ~ 1943 7 현재)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
88 여단 병사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 주보 1940 ~ 1943 사이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 1945 10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이 사진은 김일성이 토벌군에 쫓기다가 소련으로 도주했을 당시 오케얀스카야에서 좌로부터 김철호(최현의 부인), 리영숙(안영의 부인), 김정숙(김일성의 부인), 황순희(류경수의 부인 조선혁명박물관장)의 모습이다.


                                                           1941년 동북항일연군 전투지휘자들이  소련 남부 야영 훈련장에서 촬영한 사진

[在南野營整訓的部分東北抗日聯軍指戰員攝於1941

前右金日成

一排右李英淑第七軍戰士)、右三金貞淑第二軍戰士)、右四黃順姬第二軍戰士)、右五金哲鎬第二軍戰士)。

二排右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

三排右一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三排右一柴世榮右二季青。]


                                    제88 독립저격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青, 중국인), 최현(崔贤), 안길(安吉)

88독립 저격여단 소부대 활동시기 촬영한 사진[在小部隊活動時期的合影]

金日成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營長

季青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四營政治副營長

崔賢曾任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一師後改為第四師第一團團長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三團團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第一連連長

安吉曾任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四團政委第三方面軍參謀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政治副營長


                                          동북항일연군 지도여단의 일부[東北抗日聯軍教導旅部分乾部]

일렬(一列)심태산(沈泰山)최명석(崔明錫)김경석(金京石)서철(徐哲)장광적(張光迪)

두렬(二列)바슈코비츠(瓦什科維茨,와십과유자)최춘국(崔春國)강신태(姜信泰)양청민(楊清海)도우봉(陶雨峰)주암봉(周岩峰)

삼렬(三列)장석창(張錫昌)유철석(劉鐵石)범덕림(范德林)고만유(高萬有)교수귀(喬樹貴)유안래(劉雁來)진덕산(陳德山) [19457月的合影(19457월 촬영)]


19475, 왕효명. 팽시로, 왕일지 등 동북항일연군 관계자는 조선인 출신 동북항일연군 인사를 조선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만났습니다

[19475王效明彭施魯王一知分另受有關部門委派先後赴朝鮮平壤圖為他們與原東北抗日聯軍的朝鮮戰友在朝鮮人民軍總司令部合影留念]

앞열(前排)김일(金一)주위(周偉)왕일지(王一知)왕효명(王效明)안길(安吉)팽시로(彭施魯)

가운데열(中排)이영호(李永鎬)최광(崔光)김광협(金光俠)심태산(沈泰山)최춘국(崔春國)유창권(柳昌權)이을설(李乙雪)

뒷열(後排)박우섭(樸禹燮)김려중(金麗重)최용진(崔勇進)강상호(姜尚鎬)유경주(柳京珠)오진우(吳振宇)김창봉(金昌鳳)오백룡(吳伯龍)전문섭(全文燮).






소련군을 환영하는 김두봉 북한 초대 국가수반과 북한지역 지도부들  



만주 전략공세작전

만주 전략공세작전(러시아어: Манчжур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만츠주르스카야 스트라테기체스카야 나스투파텔나야 오페라치야[*]) 또는 줄여서 만주 전역(러시아어: битва за Маньчжурию), 다른 명칭으로 소련의 만주 침공은 194589일 소비에트 연방이 일본 제국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침공해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 제국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앞당기는데 기여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또 다른 괴뢰 정권인 몽강국(내몽골 지역), 일본의 점령지였던 한반도, 사할린, 쿠릴 열도에 대한 공격도 포함된다. 이 전투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이후 맺은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이루어졌다. 얄타 회담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유럽 전쟁이 끝난 3개월 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로 이미 다른 연합국과 약속한 바 있었다. 공격은 정확히 나치 독일이 항복한 58(모스크바 표준시로 59043)에서 3개월이 지난 89일에 이루어졌다. 86일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고, 8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은 이 두 원자 폭탄 투하 못지않게 일본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쟁이 계속 되었더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다른 연합군이 규슈에 도달하기 전에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까지 점령할 생각이었다. 독소 전쟁으로 경험을 쌓았고 질적으로 크게 발전한 소련군과 비교하여, 일본군은 전력의 태반이 남방으로 가 있는 데다가 새로 모집한 병력은 훈련 부족과 10만 명 이상이 소총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물자 부족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만주 곳곳에서 일본 관동군은 격파되었고 일본은 815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지만, 소련군의 공격은 8월 말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8월의 폭풍 작전(Operation August Stor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1983년 미국의 군사역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의 논문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으로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은 이러한 이름을 전혀 쓰지 않았다.

1.배경

할힌골 전투에서의 참패를 계기로 일본은 소련군의 강력함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소련과의 충돌을 가급적 삼가고자 하는 것이 군부의 일반적 의견이었다. 반면, 소련에게 있어서 일본은 잠재적인 적국임이 분명했지만, 머나먼 아시아보다 당장 눈앞의 나치 독일이 더 큰 위협적 존재임이 분명하였기에, 소련 역시 일본과 굳이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여, 19414월에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에 더 심화되었다. 당장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소련에게 일본은 관심쓸 겨를이 없었다. 일본 역시 그 시기에 대미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독일의 희망사항이던 소련 뒤통수치기 식의 선전포고는 할 여력이 없었다. 덕분에 소련은 극동과 시베리아의 병력을 모두 유럽으로 돌려서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는 19455월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최대 주적인 독일을 제거한 소련은 일본을 공격할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동시에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 항전에 생각보다 큰 희생을 치른 미국은 거듭해서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올림픽 작전이 벌어지면 서방 연합국은 백만 명 정도의 엄청난 인적 손실이 예정된 마당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이 손실을 없애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일본의 위협을 제거하고 극동에서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와 소련의 필요가 맞물리자 스탈린과 소련군 지도부는 유럽에서 승리한 뒤 3개월 이내에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만주 공격을 결정하고 그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 스타브카는 8월 중순 만주지역에 전면적인 공세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미국이 86일 히로시마에 핵공격을 단행하자, 일본이 조기에 항복해 향후 전리품 분배에 참여할 수 없게 될 거라는 불안감은 소련의 공세 계획을 앞당기게 했다.

 

88일 오후 5(모스크바 현지시각, 서울·도쿄 시각으로는 오후 11)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사토 나오타케 주소 일본 대사를 불러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의 파기와 선전포고를 통보했다. 89일 오전 0시에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1) 관동군의 상황과 소련군의 딜레마

만주를 관할하는 일본 중 25개 사단이 1945년 창설된 신규사단이고, 그 병력 자원의 질적 수준도 최하였다. 게다가 관동군의 사단 편제는 당시 세계적으로 표준이 된 3개 연대+1개 포병연대의 삼각편제가 아닌 제1차 세계 대전식의 4개 연대 편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동군이 아무리 장비나 병력이 빈약하더라도 만주국군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가까운 병력 수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독소전쟁에서 군인 1천만 명을 포함해 약 3천만 명 이상에 이르는 인적 손실을 입은 소련으로서는 관동군과의 싸움에서 다시 큰 인적 손실을 낸다면 더욱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할 판국이었다.

 

또한 만주의 지형 또한 소련군의 공격을 어렵게 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만주의 주위 삼면은 산과 삼림으로 에워싸여 있어 통행이 어려운데, 특히 서쪽의 대싱안링 산맥은 해발 1,900m에 이르고 산 너머 내몽골 지역은 광활한 반사막 지대이다. 몇 안 되는 고개도 늪지인 데다가 장마철이 되면 더 심해져서 습도, , 진흙으로 작전을 펼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통행의 어려움에 더해서 만주의 엄청난 크기는 잠재적인 공격 측의 기를 꺾어 놓았다. 만주 북쪽 끝에서 황해까지의 거리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코 앞까지의 거리였다. 관동군 사령부는 이 험한 지형을 이용, 인적 물적 열세를 지형적 이점으로 상쇄해 소련군을 격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소련군이 대싱안링 산맥을 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동쪽, 북쪽, 북서쪽의 철도를 따라 집중시켰다. 이 지역의 국경은 수많은 국경 요새들로 보호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1방면군은 종심 방어를 위해 휘하 부대들을 후방으로 물렸다. 3방면군은 만주의 서부를 담당했는데, 휘하 병력은 만주 평원 안쪽에 넓게 퍼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붉은 군대가 마냥 물량만으로 관동군을 이기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2) 소련군의 공격 준비

대일전 시작 전 극동 지역에는 종래에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satern Front)과 보로실로프(현 우수리스크)의 연해주군단(Primorsky Group of Forces)이 있었다.

 

스탈린은 만주에서 한참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자 극동의 전선군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자체 사령부인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하바로프스크에 설치하고, 그 아래에 만주동부 전선을 담당하는 연해주군단을 개편한 제1극동전선군, 만주북부 전선을 담당할 종래의 극동전선군을 개편한 제2극동전선군과 만주서부 전선을 담당할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을 설치한다. 극동군 총사령관에 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를 임명하고 공격 준비에 착수하게 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과의 전투 전력이 있는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적임자라는 말이 많았으나 스탈린은 바실렙스키를 택했는데 이는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주코프의 위신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렙스키는 위의 딜레마들을 고려하며 단독으로 8월의 폭풍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에 따른 전선군의 진군 방향과 사령관들 교체를 시작했다.

 

극동의 각 전선군 사령관들이 스타브카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제1극동전선군에는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독일 북부 집단군을 상대로 많은 경험이 있었으며 경보병 군단의 창설자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가 임명되었고 트랜스바이칼전선군에는 쿠르스크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서 명성을 쌓고 중앙유럽 중부를 석권하며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임명되었다. 2극동전선군에는 종래 극동전선군의 사령관인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이 임명되었다. 극동함대 사령관에는 해군대장 이반 유마셰프 제독이 임명되어 쿠릴 열도와 사할린 상륙 작전을 책임질 예정이었다.

 

한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이 제한된 데다가 극동에 전방 배치된 소련군이 별반 활동을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458월에도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고, 심지어 1945년 봄까지도 소련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연히 이와 달리 소련군 지도부는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된 최정예 부대 약 90여 개 사단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은밀하게 극동 지역으로 전개시켰다. 부대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 자신들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4년 동안이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소련으로서는 이 작전은 엄청난 역작이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많은 부대가 대개 중년과 소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2. 전개

소련군은 보로쉴로프(현재의 우수리스크)의 제1극동전선군, 하바로프스크의 제2극동전선군, 그리고 시베리아와 몽골에 전개한 트란스바이칼전선군을 통해 만주를 좌우로 협격하는 것을 시도했다.

 

트랜스바이칼전선군은 제6근위전차군을 주력으로 하여 고속 진격과 이를 통한 만주와 중국 본토의 단절, 일본군의 분산 및 포위를 시도했다. 이들의 좌측을 엄호하는 제36군은 하이라얼을 공략하는 한편, 다른 부대로 남하하여 일본군을 대싱안링 산맥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1극동 전선군은 동쪽에서 만주의 중심으로 진격하며, 813일에는 무단장까지 진출,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여 815일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은 주력부대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로 진격하여 함경북도 일대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조공 성격인 제2극동전선군은 15군과 2군을 투입해 각각 하얼빈과 치치하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러한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 관동군은 나름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장비, 물자, 병력,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소련군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독일을 상대로 단련된 소련군의 고속 진격은 독일이 1940년에 보여준 전격전의 재현이라고 할 정도였다. 소련군의 전차 및 기계화부대의 쾌속 진격 앞에 관동군은 산산조각이 났고, 주요 도시나 요새는 보병들의 맹공격으로 하나하나 함락당했다.

 

815일 일본의 항복 당시, 소련군은 이미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관동군에 대한 전과확대 단계에 진입한 상태였으며, 한반도에서도 89일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811일 웅기(선봉)를 시작으로, 812일에는 나진을 점령하고 813일에는 청진으로 진격했는데 이곳은 일본의 항복 후에도 전투가 계속되어 816일이 돼서야 점령했고 소련의 고려인 정상진도 소련 부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4] 소련군은 일본의 항복선언을 무시하고 계속 진격해서 한반도의 함흥을 거쳐 중부의 개성시(823일 진주, 92일에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 38선 분할 점령에 합의하면서 철수)와 랴오닝 반도의 끝인 뤼순까지 진출했다.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은 베이징을 공격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3. 결과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89~15)의 짧은 기간동안 2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과 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쿠릴 열도 상륙 작전(러시아어: Курильская десантная операция, 영어: Invasion of the Kuril Islands, Kuril Islands Landing Operation)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8월 소련군이 일본 제국이 지배하던 쿠릴 열도에 상륙한 작전이다. 이 작전이 성공하여 쿠릴 열도는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Soviet marines or infantry are loading on a ship[쿠릴 열도 상륙 작전]


2극동전선군


                                                                              아무르강을 건너는 제2극동전선군 예하 제2적기군


2극동전선군 (2-й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фронт)은 서구의 군집단과 같은 규모인 소련 육군의 전선군 중 하나였다. 이 군단은 만주 전략공세작전 직전에 창설되어 194585일 임무를 시작했으며 같은 해 101일 해산되었다.

1.역사

창설된 직후 제2극동전선군은 일본 제국의 제1방면군과 제5방면군, 4군을 상대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2극동전선군이 상대해야 할 일본군은 만주, 사할린섬, 그리고 쿠릴 열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전선군이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을 건너 일본군의 저항을 무력화하는데 성공했다. 820일 전선군의 제15군이 하얼빈을 점령했으며, 이후 제2적기군이 칼로찬과 륜츠전 지역에 입성했다. 15군은 이 사이에 산신 군을 점령했고, 5소총군단은 볼리 지역에 입성했다. 대부분의 일본군은 820일 이후 소련군에 항복하기 시작했다.

한편 811, 16군은 남부 사할린에 공세를 가해 818일까지 섬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819일부터 25일까지 제16군은 홀름스크 항구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고 코르사코프에서 공정작전과 상륙작전을 동시에 수행했다. 825일 소련군은 사할린의 행정중심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점령했다. 9월 초 일본군의 저항은 끝났지만 소련군의 침공이 지연되어 일본 본토에 위치한 홋카이도 침공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한편 제101소총사단은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45101, 스타프카 VGK의 지시로 전선군은 해산되어 극동군관구로 재조직되었다.

 

2.19458월 구성부대

T2극동전선군은 194589일에 아래와 같은 예하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2적기군

-제5소총군단

-제15

-제16

-제10항공군

-캄차카 방어군단 제101소총사단

-아무르 군사전단

-북태평양 전단

 

3.참전

만주 전략공세작전의 주요 공격군[역할]

-만주 전략공세작전 남사할린 침공

-쿠릴 열도 상륙작전

-슘슈 섬 전투



막심 푸르카예프


                                                                                                                           1940년대의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

막심 알렉세비치 푸르카예프(Максим Алексеевич Пуркаев, Maxim Alekseevich Purkayev, 1894.08.14~1953.01.01)는 소련의 군인이다. 1940년대 전반 소련 하바로프스크의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사령관으로 김일성이 소속되었던 제88국제여단을 관할하였고, 19458월의 소련의 만주 침공 작전 당시 만주 북부 전선을 담당한 제2 극동전선군을 지휘하였다.



 

푸르카예프는 1915년 러시아 제국 군대에 징집되었고, 1918년 적군에 가담하였다. 1936년부터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Frunze Military Academy)에서 공부하였다. 1943425일부터 194584일까지 하바로프스크의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사령관을 지냈다. 소련이 만주 침공을 단행할 때인 194585일부터 101일까지는 만주 북부 전선을 담당한 제2 극동전선군(2nd Far Eastern Front) 사령관으로 소련의 만주 침공 작전을 지휘하였다.[1][2] 전후에는 19471월까지 제2 극동전선군이 개편된 극동군관구(Far Eastern Military District)의 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김일성이 소속되었던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제88국제여단을 관할하였고, 19458월말 또는 9월초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북한 지도자 후보로 김일성을 면접 심사할 때 이오시프 쉬킨 상장과 함께 면접위원이었다. 이후 평양의 소련군정은 제25군이 소속된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 휘하의 제1 극동전선군(1st Far Eastern Front)이 개편된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의 연해주군관구(Primorsky Military District) 사령부가 관할하였다.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 189767~ 19681230)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야전군 지휘관이었으며,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에는 극동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을 격파하고 한반도 북부에도 진주했다.

1.성장과정

메레츠코프는 모스크바 남동쪽 라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66월에 러시아 제국군에 자원입대하여 정비병으로 복무했으나, 19178월에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다. 이듬해인 1918년에 붉은 군대에 입대했고, 붉은 군대의 전신인 적위대에서 참모장이 되었다. 내전 중에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나 여러 차례 전투에 투입되어 졸업하는데 시간이 걸려 1921년에 졸업했다.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근무했으며, 1936년 에스파냐 내전이 발발하자 1년여간 군사고문관으로 공화파를 지원했다. 1937년에 귀국한 메레츠코프는 1939년에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군은 대숙청의 홍역을 치렀지만, 메레츠코프는 별 탈 없이 넘겼다.

 

2.겨울전쟁

소련은 그 해 12월에 보로실로프를 사령관으로 하여 핀란드와 전쟁을 시작했다. 핀란드의 접경지대인 레닌그라드 군관구를 맡고 있던 메레츠코프도 이 전쟁에 참전한다. 그러나 전쟁은 12월 중순에 이르러 모티 전술과 같은 효율적인 전투 방식을 개발한 핀란드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손실에 대한 비난에서 야전군 지휘관인 메레츠코프도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책임은 메레츠코프의 탓으로만 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이 무렵 소련군은 전략적 지침도 존재했고, 당시 서방과 다른 군사전략을 수립하고 있었지만, 대숙청의 여파로 경험 부족의 장군 및 장교들이 지휘하는 사단급 및 그 이하 제대의 전술 수행 능력과 전투 능력 자체에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스탈린은 메레츠코프를 다시 7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다시 한 번 전쟁을 지휘하도록 했다. 세묜 티모셴코가 보로실로프를 대신하여 레닌그라드군관구 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19402, 소련군은 재차 공세를 가했고, 이번에는 크게 승리했다. 메레츠코프도 소련 국가영웅 칭호를 수여받았고 더 나아가 총참모장이 되었고, 방위위원회 멤버가 되었다.

 

3.독소전쟁

1941622,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메레츠코프는 소련군 최고사령부인 스타브카(STAVKA)의 구성원이 되었고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노력을 계속 경주했다. 그러나 19419NKVD 수장인 라브렌티 베리야가 그를 반역자로 체포했다. 체포된 메레츠코프는 10월까지 구금되었고,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유능한 장군이 부족했던 스탈린은 그를 석방시켰고, 12월에 북쪽의 볼크호프(Volkhov)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442월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볼크호브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메레츠코프는 북쪽 방면의 독일군 북부집단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레닌그라드가 완전히 포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레닌그라드는 라도가 호수를 통해 소량의 보급품을 어느 정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메레츠코프와 볼크호프 전선군은 레오니트 고보로프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협동으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깨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19432, 두 전선군은 시니아비노(Siniavino)에서 서로 연결되었다. 이후 두 전선군은 독일군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깨기 위한 일련의 공세를 개시했다. 이 시도들은 19442월에 마무리되었다.

19442, 메레츠코프는 볼크호브 전선군을 떠나 더 북쪽의 카렐리안 전선군으로 부임했다. 여기서는 그는 핀란드를 공격하려는 고보로프의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원했다. 10,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를 통해 노르웨이로 철수하는 독일군을 추격했다. 10,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의 페차모를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받아 그가 가진 극지전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여 페차모-키르케네스 작전(Petsamo-Kirkenes Operation)을 실시했다. 이 작전으로 독일군은 완전히 밀려났으며, 이 공로로 메레츠코프는 원수로 승진했다.

 

                                                                     1944년 핀란드 전선. 붉은 색 화살표는 소련군의 진격이고, 검은색은 독일군의 후퇴다


왼쪽 지도에서 붉은 화살표는 소련군의 공격 방향이며, 검정색은 독일군의 후퇴 방향이다. 스웨덴이 나름대로 야무진 군대를 가진 중립국인데다가 독일의 주요한 철광석 공급원인 관계로 독일군은 스웨덴을 거칠수 없었고 핀란드를 관통하여 노르웨이로 철수해야 했다. 붉은 화살표중 위쪽의 것이 메레츠코프이다.

소련은 노르웨이까지 독일군을 추격할 심산이었으나, 전후 처리 문제에서 소련이 노르웨이를 장악하는 것을 영국이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스탈린은 노르웨이-핀란드 국경에서 진격을 중지시켰다. 이후 종전 때까지 이 전선은 큰 전투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메레츠코프에게는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4.만주 전략공세작전

메레츠코프의 다음 부임지는 만주였다.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메레츠코프는 1 극동전선군을 이끌고 만주 전략공세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만주를 공격했다. 메레츠코프의 부대는 손쉽게 관동군을 격파했다. 이미 1938년 노몬한 사건에서 게오르기 주코프가 일본 관동군을 무참하게 격파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이 무렵의 소련군은 독일과 4년간 격전을 치르면서 단련된데다가 걸작 T-34/85로 대표되는 기갑 전력 또한 일본을 충분히 압도했다. 메레츠코프는 만주를 거쳐 한반도 북부에도 진주했다. 평양에 입성한 25군 및 치스차코프 25군 사령관도 메레츠코프의 휘하였다. 이후 메레츠코프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서 군정사령관 치스차코프를 지휘했다.

 

5.전후

전쟁 후 메레츠코프는 극동군관구 사령관직을 수행한 후 여러 군관계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681230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체는 화장되어 현재 크렘린 궁에 묻혀 있다.

 

메레츠코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유능한 장군들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하며, 소련 국가 영웅 호칭을 비롯하여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이다. 러시아군 전차학교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고, 모스크바, 노보고로드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존재한다.

  


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시티코프 중장(中將)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小將)

             1947년 7월 서울의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담소하는 미소 양군 대표: 좌로부터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 소련측 대표 레베데프 소장과 스티코프 중장 [사진]

.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스티코프 중장(中將)

테렌티 포미치 시티코프(러시아어: 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벨라루스어: Цярэнцій Фаміч Штыкаў 차렌치 파미치 슈티카우, 1907228~ 19641025)는 소련의 군인이었다. 그는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해방 후 북한의 소련 군정을 총지휘했다. 그의 유고 "시티코프 일기"는 해방 직후 남북한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1.생애

(1)생애 초기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고교 졸업후 레닌그라드의 기관차 수리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자로 근무하였다.

 

(2)공산당 입당

22세 때인 1929년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당에 입당했다. 그는 곧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 지구당 제1서기이자 소련공산당 중앙당 정치국원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측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눈에 들어 가까운 사이가 되고, 고속승진하여 평당원에서 얼마 뒤 레닌그라드시당 제2서기로 올라갔다. 시티코프가 즈다노프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는 루머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1941년 겨울부터 약 900일 동안 진행되었던 레닌그라드(페체르부르크) 포위전 때 '식인단속 기동타격대' 대장을 역임한 바 있다. 당시 굶주린 시민들이 인육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시티코프는 식량배급, 방첩 부대, 즉결처형부대 운영, 외부 연결통로 운영 등 생사여탈권을 휘둘렀다

 

(3)소련군정 지도자

소련은 19453월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에서 분리하여 보로실로프(오늘날 우수리스크)에 연해주 군단(Maritime Group of Forces)을 설치하였다. 19458월 초 대일본전을 위해 보로실로프의 연해주 군단은 제1극동전선군으로, 하바로프스크의 종래의 극동전선군은 제2극동전선군으로 개편하고, 만주서부를 침공할 트랜스 바이칼 전선군 등을 설치하며, 3개 전선군을 총지휘할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하바로프스크에 두었다. 일본전이 끝난 후인 930일에 제1극동전선군은 연해주군관구(Primorsky Military District)로 개편된다. 시티코프는 19454월 보로실로프의 연해주군단으로 부임해와 제1극동전선군, 연해주군관구로 명칭이 바뀌는 동안 줄곧 사령관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 휘하의 군사위원으로 있었다.

 

시티코프가 한국문제에 관여한 시기에 그의 정치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1945920일 스탈린이 연해주군관구와 25군 사령관에게 하달한 명령서에 북한의 민간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을, 즉 시티코프가 총괄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은 제1극동전선군(연해주군관구) 산하 부대이다.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사령관은 표면적으로는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1900~1979) 대장이었지만 그는 정치를 잘 모르는 야전군인이라, 실제로는 연해주 군관구의 군사위원 시티코프가 보로실로프와 평양을 오가며 소련군정을 총지휘하였다. 평양에 상주한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는 뒷날 증언에서 시티코프에 대해 '그가 조선에 있건 연해주군관구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 없이 38선 이북 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란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4)북한 주재 대사

a.북한의 전쟁 준비 동향 보고

한편 남한의 미군정을 빨리 철수시킬 생각으로 38선 이북 북한에 임시인민위원회를 세우라고 하고 정권을 이양했지만 미군은 1949년까지도 남한에 머물러 있었다. 북한 주재 소련 대사로 있던, 시티코프는 1949115~25일 중 남한의 군인과 경찰이 수차에 걸쳐 38선을 넘어 침입해 온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고(127)했다. 그러나 그는 대내외상황을 고려할 때 현시점에서 남한군의 침입이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고 보고 남한의 38선 부근 병력 집결은 북한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23일에는, 38선 부근에서 일어난 북한군 초소에 대한 남한군의 공격에 관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북한군은 1명당 소총 탄약이 3~10발 정도밖에 없어 대부분의 경우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극동군구 사령부가 북한의 2개 여단에 대한 무기공급을 지연시키고 있는 바 무기가 조속히 공급될 수 있도록 몰로토프 외무장관이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음 날(24)에도, 그는 남한군의 초소 공격과 관련해 북한 내무성이 상세한 사실을 알리는 문서를 25일 발간할 예정임을 보고하였다. 이 문서는 이러한 무력도발이 유엔 한국위원단의 도착에 즈음해 발생하고 있음과 미군의 한국철수를 늦추기 위한 책략임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827, 그는 812~14일의 김일성과의 면담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1. 현재 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며 그중 남한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됨. 북의 공격시 미국은 남쪽을 무기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 2. 북의 대남공격은 미국이 대소련 모함선전에 이용할 수 있음.

3.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북은 아직 남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4. 남한은 이미 상당수 강한 군대와 경찰력을 창설하였음.(시티코프는 김일성이 제의한 강원도 지역의 '해방구역' 창설계획에는 찬성하고 또한 인민군에 의한 옹진점령계획도 군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고했으나 남한의 반격시 이 작전이 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언급)

스탈린에게 제출한 915일자 보고서에서, 그는 김일성과 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 무력통일을 안하면 통일이 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남한 정권은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북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진을 시작할 때 소련과 중공이 원조해줄 것을 기대하는 듯하다.”고 썼다. 그의 견해는 남북의 내전은 북에 유리하나 북한군이 남한 공격을 개시하면 소련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며 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남한을 적극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 물론 북한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는 것은 좋다. 옹진작전은 유리한 상황하에서는 실시 가능하고, 이를 위해 38선 지역에서 남쪽의 도발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는 현재의 대내외적 상황으로 보아 남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지침을 시티코프에 하달하였다.(924)

 

b.소련의 한국전쟁 승인 중개

시티코프는 1950117일 박헌영 관저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하여, 김일성의 전쟁 승인 요청을 받았다. 129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비공개회의(16)의 내용을 외무부에 보고했다. 그 내용은

1) 분쟁 발생시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희망은 별로 없다는 것,

2) 미국은 대만방어를 위해 장제스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

3) 영국의 중국 승인(195016)은 서방의 북한 승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320, 김일성은 시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

 

(5)소련으로 소환

한국전쟁 시기 북한 주재 소련대사의 직을 맡고 있던 시티코프는 1951년 초 갑자기 모스크바로 소환 당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한 전세 역전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보인다. 그는 1964102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심한 증세가 아니었으나 그날이 일요일이라 병원에 의사도 없고, 제때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 주된 사인이다. 김일성은 그가 사망했을 때 조전(弔電)조차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2.스티코프 일기

그가 기록한 "시티코프 일기"가 구소련 붕괴 후에 발굴되었는데, 소련군정의 북한 통치와 대남공작에 대한 주요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1. 스티코프는 누구인가 게 재 일 : 1995050910(40)

454월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하면서 한국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스티코프는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47~48), 북한주재 초대 소련 특명전권대사(48~51)를 지냈다.

북한에서의 경력에서 보듯 북한정치문제를 담당하면서 북한정권수립(48)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정권수립이후에는 특명전권대사를 맡는 등 사실상 북한 최고 실력자다. 그는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등 북한의 정치지도자 뿐 아니라 남로당 등 남쪽 좌익까지 떡 주무르듯 했고 북한의 모든 것이 그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1,2美蘇공동위원회(463~5,475~8) 소련 측 수석대표로 나서 군정과의 협상에서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29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스티코프는 한국에오기전 38년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비서, 39년 소련. 핀란드전쟁시기에 제7군 군사평의회 위원, 43년 볼호프스키 전선 군사평의회위원, 44년 카렐스키전선 군사평의회위원 등을 역임했다. 군인이면서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노련한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56~61년 소련공산당중앙위원, 63년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당국가검열위원회 부위원장 등 당 경력도 화려하다. 64년 휴가차 레닌그라드에 갔다가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2. 9월총파업과 10월폭동 게 재 일 : 1995050910(40)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가 발굴한 스티코프 비망록은 북한정권 수립 기에 북한의 최고실권자였던 스티코프가 그날그날 있었던 구상과 생각들을 꼼꼼히 일기형식으로 적어놓은 중요 사료(史料).

이 비망록은 스티코프를 정점으로 한 소군정이 북 한을 이미 완전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은데 이어 남한 정세에까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스티코프 비망록은 이런 점에서 북한정치사는 물론 남한정치사의 또 다른 이면적 진실을 밝혀주는 실마리를 제공한 셈이다.

따라서 비망록은 기존 가설을 문서로 입증해주거나 전혀 새로운 사실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해방정국에서 매몰되고 유실된 우리역사를 복원, 한국 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고 있다.

이로써 중앙일보는 지난해 12월 소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에 이어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스티코프 비망록까지 발굴함으로써 북한정권수립의 내막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게 됐다.스티코프 비망록의 주요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 6회에 걸쳐 해설과 함께 연재한다. [편집자]

19469월 좌익계열의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全評)가 주도한 9월 총파업 때 북한의 군정이 2백만엔을 , 뒤이어 발생한 10월 폭동때는 3백만엔의 자금을 지원한 것은스티코프비망록에서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이는 당시 남한정세 에 소련이 깊숙이 개입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까지 9월 총파업은 조선공산당 지시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왔다. 10월 폭동에 대해서도 일부 학자는 조선공산당의 개입사실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비망록은 9월 총파업이 조선공산당의 지시 차원을 넘어 군정의 지시에 따른 것 이고, 10월 폭동에도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군정까지 직접 개입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그동안 조선공산당과 소련의 개입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불식시킨 셈이 됐다.

9월 총파업은 467월 조선공산당이 군정에 대한 종래의 우호정책을 철회하고 군정의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운동을 강력히 전개하기 위해 채택한 신 전술의 구체적인 행동표현이었다.

신 전술이 채택된 같은 달 중순 전평 상무위원회는 당의 신 전술 지령에 입각해 4610월 파업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이 계획을 바꿔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길 것을 지시했다. 김남식(金南植.평화연구원)연구위원은조선공산당이 군정 운수부가 운수부 노동자 25%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기로 한 기회를 이용하려 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비망록은 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총파업일정을 앞당긴 결정은 바로 군정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이다. 비망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4699일 박헌영(朴憲永)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했다.이에 대해 스티코프는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비망록에는 스티코프의 이런 지시가 9 11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내려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전평 지도부의 긴급회의가 910일 소집돼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길 것을 결정한 점으로 미뤄 볼 때 아마도 스티코프의 지시는 박헌영이 이 문제에 대해 질의한 99일이나 아니면910일 이른 아침에 하달됐을 가능성이 크다.

계획대로 총파업은 46923일 부산철도 노동자 7천여명이 일급제 반대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감으로써 불을 댕겼다.

다음날 서울을 비롯한 철도종업원 4만명이, 925일에는 출판노조가, 연이어 전신관계 종사자들이 동조파업을 단행함으로써 파업여파는 각 부문으로 확산됐다.

총파업 기간에 대한 비망록 내용 중 주목을 끄는 대목은 군정이 총파업이 최고점에 달한 926일과 28일 두 차례나 파업투쟁 방향을 지시한 점이다.

특히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등 정치문제를요구조건 속에 포함시켜 이를 관철할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지시한 것은 총파업을 정치투쟁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군정이파업투쟁 자금으로 2백만엔을 긴급 지원한 사실 역시 파업투쟁을 고취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총파업이 각 지역에서 계속되는 가운데 101일 대구에서는 1천 여 명이 식량 배급을 요청하며 시위를 벌였다. 파업노동자 등의 가세로 시위가 점차 확대되자 경찰은 진압을 위해 발포했다. 이 와중에 시위군중 한명이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

다음날 흥분한 대규모 시위대가 경찰서 무기를 탈취하는 등 극렬 행동을 서슴지 않자 군정 당국은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출동시켜 소요를 진압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부터 시위는 대구인근 지역으로 번졌고 급기야 11월 중 순까지 경북전지역과 경남 강원. 전남 등지에서 계속됐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교량. 철도가 파괴됐으며 우체국 등이 방화돼 통신망이 두절 됐다. 왜관에서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수명의 경찰관이 학살됐다.

그러나 시위는 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들의 적극적인 진압노력으로 11월 중순을 고비로 그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이제까지 일부 학자는 10월 폭동에 조선공산당 지도부가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주장해 왔다. 그러나 비망록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군정까지 10월 폭동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10월 폭동이 시작된 그 다음날 스티코프는 남조선 투쟁기금으로 3백만엔을 보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趙斗元)은 폭동이진행중인 1021군정에 대해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이런 사실들은 10월 폭동 역시 조선공산당이 상황전개에 따라 군정과 교감을 가지면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3. 스티코프비망록 1. 일지 게 재 일 : 1995050910(40)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다(4699)

남조선 정세와 지원조치. 로마넨코 .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조직할 것(46911)

북조선에서 남조선으로 반입할 출판물을 증대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를 조직할 것. 미군정과 남조선 반동파의 행동을 폭로하는(46916)

레베데프에게 전화 걸었다. 남조선 좌익의 활동방향에 대해(46921)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달하다.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은 공산당지도부에 대한 체포명령의 취소, 좌익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할 것. 로마넨코. 4만 명의 철도종업원들이 파업에 돌입. 남조선에서는 파업투쟁이 진행 중이다. 철도종업원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925일 오후부터 출판인쇄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됐다(46926)

로마넨코. 남조선에서 파업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이 파업투쟁에 합류했다. 요구조건의 관철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경제적인 제 요구,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권력의 양도 요구를 잠시 철회. 5백만엔을 요청하고 있다. 재정지원을 위해 2백만 엔을 지급.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경제적인 제 요구,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의 요구가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할 것. 이 요구가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 미군정과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성명할 것(46928)

남조선 사태에 대한 북한의 반응. 남조선 인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집회 개최와 남조선 인민을 지원하기 위해 매일 두 시간씩 노동시간을 늘려 그 임금액을 남조선 지원기금으로 공제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서울 에서 시위를 시작할 예정이다. 3백만엔을 더 요청하고 있다. 불가닌에게 전화하다. 우리의 (남조선)동지들에게 3백만엔의 재정지원을 제공하는 문제 및 집회개최와 공제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듣다(46101)

3백만엔의 지원과 집회개최를 위해 작업시간을 단축하는 문제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46102)

46106일 박헌영이 남한을 탈출해 북한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 했는데, 그를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했다(46107)

부산에서는 농민들의 진출이 시작됐다. 지금 파업운동은 어느 정도 축소됐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은 향후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문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빨치산부대들이존재하고 있으며, 반동진영과 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투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할지 혹은 자제해야할지를 문의하고 있다. 박헌영. 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 진화했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에 농민 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461021)

발라사노프와 샵쉰을 호출해 남조선 정세에 대한 그들의 정보보고를 청취했다(461022)

김일성. 박헌영과 회담할 것. 회담 때 남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제반 사태에 대한 평가를 전달할 것(46114)

(정체불명)은 박헌영에게 39만엔이 지출됐다고 보고했다. 더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46126)

로마넨코. 그의 계좌에 있는 122만루블에 대해 논의했다. 그 돈을 박헌영에게 전달하고 계좌를 정리할 것을 명령했다(46127)

 

4. <인터뷰>스티코프 장남 빅토르씨 게 재 일 : 1995051109(40)

중앙일보 현대사 자료 발굴 팀이 7개월간에 걸친 수소문 끝에 찾아낸스티코프비망록은 스티코프의 장남 빅토르(61)의 집 차고 먼지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안성규 모스크바 특파원, 전현수 연구위원 등 본사자료 발굴 팀은 빅토르를 끈질기게 설득, 비망록을 본사에 기증하게 됐다. 한국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는 귀중한 사료가 비로소 빛을 본 순간이었다.

자료팀은 아버지의 화려한 삶과는 달리 평범한 노동자로 쓸쓸히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는 빅토르를 만나 아버지 스티코프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아버지가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위원으로 북한문제에 깊이 개입하셨고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를 지내셨다는 사실 외에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너무 어렸을 때니까요.

 

-아버지가 자료를 많이 남겼다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앨범. 문서. 노트. 사진들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년 뒤인 66년 북한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자료들을 거의 모두 가지고 갔습니다.

 

-자료유실이 어느 정도입니까.

86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는 모든 자료를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사를 40번이상이나 다녀야 했고 제가 이 분야를 잘 알지 못해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상당한 양이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아버지는 평소 심장병을 앓았지요. 아버지는 64년 여름휴가를 레닌그라드에서 보냈는데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아버지가 이날도 시내 러-일전쟁 기념비를 촬영하러 가다가 네프스키 프로스펙트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 같이 있던 당시 운전사 의 말에 의하면 심한 증세는 아니었는데 그날이 일요일이라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평양을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까.

472차 미소공위가 진행 중일 때 여름방학을 이용해 아버지와 함께 평양과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평양과 서울 모두작지만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한국이 어째서 아직도 합쳐지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일기가 공개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광일 뿐입니다. 지면에 공개되면 꼭 보내주십시오.

빅토르 스티코프는 중령까지 군 생활을 하다 아버지가 외무부고문으로 있을 때 퇴역, 열차운전사로 일했다. 얼마 전 은퇴하고 지금은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는 부인 잉가 니칼라예브나(61)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 변두리의 두칸짜리 아파트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페레스트로이카가 몰고온 생활고 때문에 연금으로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벌 기 위해 열차관리소에서 야간수위를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모스크바=안성규 특파원. 전현수 연구위원]

 

5. 스티코프비망록 2. 3당합당 게 재 일 : 1995051109(40)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을 두 달 앞둔 19467월 남북 좌익세력의 새로운 판짜기가 시작됐다. 북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 남에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3당이 합당해 남조선노 동당(남로당)을 결성하는 작업이 추진된 것이다. 공산당이 유일집권당으로 등장해 사회주의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고, 남에서는 흩어져 있던 좌익세력들을 통합해 구심점을 형성한 후 군정과 본격투쟁에 나서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북로당의 결성은 군정의 후원을 받아 8월 말 순조롭게 완성됐지만, 군정의 탄압과 3당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남로당결성은 예정보다 3개월이나 늦게 이루어졌다. 그만큼 좌익 3당 합당을 통해 남로당이 결성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 을 겪어야 했다. 3당 합당이 지연되자 군정 최고지도부와 북로당은 합당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직접 남쪽 정치상황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발굴한스티코프 비망록은 이러한 상황을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준다. 3당 합당 과정에 군정이 직접 개입했음이 문서로 처음 밝혀진 것이다.

남쪽에서 3당 합당은 박헌영(朴憲永)이 비밀리에 평양과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46712일 서울로 돌아온 직후 갑작스럽게 여운형(呂運亨)에게 좌익 3당 통합문제를 통보하면서 시작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여운형도 7월말 북쪽의 진의파악을 위해 급거 평양을 방문했다.

83일 인민당은 합당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공산당. 신민당에 합당제안문을 발송했다. 이에 공산당과 신민당이 즉시 합당교섭을 개시하자는 회답을 보내면서 3당 합당이 구체화됐다. 그러나 군사령부. 북로당의 지시에 따라 순조롭게 출발한 합당작업은 잠재돼 있던 공산당 내부의 갈등이 폭발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반전(反轉)됐다.

85일 이정윤(李廷允). 강진(姜進)박헌영간부 6인이 합당을 하기 전 당대회를 열고 지도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반대파를 제명. 무기 정권시켰다. 이후 당대회 소집을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면서 공산당은 완전히 두 파로 갈라졌다.

이렇게 되자 인민당과 신민당도 합당을 신중하게 추진하자는 의견이 대두돼 좌익3당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에 직면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박헌영은 94일 합당을 지지하는 세력만으로3당 합당을 추진해 남로당 준비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인민당 당수 여운형과 신민당 당수 백남운(白南雲)등이 반발하자 3당 합당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당황한 군정의 움직임도 바빠졌다.스티코프비망록은 스티코프가 910일 북로당위원장 김두봉(金枓奉)을 호출해 남쪽의 3당 합당문제 및 지원대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사실을 보여준다. 밀사를 파견해 남쪽의 정세를 파악한 사실도 드러났다.

스티코프는분파주의자들은 북조선의 압력과 관련하여 잠잠해졌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박헌영 반대파들은 9월 총파업 진행 중인 28일 당 대회 준비모임을 갖고 총파업반대와 당대회 소집을 주장했다. 다른 당의 대표들도 평양의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박헌영의 독선적 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비망록은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 고찬보와 여운형의

평양방문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스티코프는 923일부터 30일까지 평양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각별히 신경을 썼다. 여운형은 새로 만들어진 남로당의 당수로 내정돼 있었다. 스티코프가 여운형에게 북조선 지도자들과의 회담을 허용하고 북조선이 그를 신뢰하고 있다고 말 할 것을 지시한 것은 여운형이 정치력을 발휘해 좌익정당 내부의 분열을 수습해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또 비망록은 신민당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합당에 비판적인 백남운을 물러나게 하고 합당에 적극적인 정노식(鄭魯湜)을 신민당 위원장으로, 무소속이며 박헌영 지지자였던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하는 작업이 군정과의 교감 속에서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107일 이그나치예프 대령은 합당사업이 수준까지진척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1016일 백남운. 강진등 박헌영의 독주에 반대하는 세력이 남로당과는 별개로 사회노동당을 결성하면서 3당 합당은 두 갈래로 추진되는 혼선을 빚게 된다. 좌익세력의 단결을 위해 추진된 3당 합당이 분열의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6. 스티코프비망록 2. 일지 게 재 일 : 1995051109(40)

김두봉(金枓奉.북로당 위원장)을 호출하다. 남조선의 정세 ,남조선 3당 합당 문제 및 지원대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다.(46910)

보로실로프에서 로마넨코(蘇軍民政사령관)와 남조선정세에 대해 전화 논의. 아널드(군정장관)가 여운형(呂運亨.조선인민당 당수)을 호출해 미군사령부는 남조선 좌익3당의 통합을 현재로서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했다.(916)

로만넨코 보고. 남조선에서 912일 밀사가 도착했다. 여운형은 아마도 곧 합당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백남운(白南雲.남조선신민당 당수)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분파주의자들은 북조선의 압력과 관련해 잠잠해 졌다. 이강국(李康國.남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사무국장)은 자신의 거처와 관련해 북조선으로 활동공간을 옮기는 것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합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남조선에 좌익3당을 그대로 존속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두 명의 지도자, 여운형과 백남운이 반대한다면 합당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19)

로마넨코. 오늘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가 김일성(북로당 부위원장)을 방문했다. 그들은 변장을 하고 머리. 수염 등을 깎았다. 찬보(高贊輔)는 신민당 중앙위원이자 인민당 중앙위원이다. 그는 3일간의 일정으로 북조선을 방문했다. 그는나는 북조선에 의지하고 있지만 북조선은 나를 신임하지 않는다. 나는 좌익이다. 미군정은 나를 못살게 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당분간 통합을 추진하지 말 것을 제기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에 입당하고 있는데, 그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게끔 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또한 박헌영(朴憲永.조선공산당 당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박헌영이 무엇인가 일을 추진하면 10일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그에게 3명의 지도자를 추천했는데 이중 2명이 공산주의자였다. 그는내가 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의 서신들을 접수했지만 나는 그것들을 당신의 서한으로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탈린 동지 앞으로 암호전문을 보내 여운형에게 어떠한 답변을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령을 요청했다(921)

로마넨코 보고. 김일성과 여운형의 회담이 있었다. 여운형은 재차 소련군사령부 지도부와의 회담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여운형에게 어떠한 답변을 줄 것인가에 대해 지시를 하달(925)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들을 하달했다.

 

 

-북조선 지도자들과 여운형의 회담을 허용할 것.

-남조선 좌익3당의 합당을 잠시 중단할 것.

-공산당은 반드시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명령의 취소, 감옥으로부터 좌파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할 것.

-북조선의 상황과 북조선에서 실시되고 있는 민주주의적 제 개혁에 대해 설명해 줄 것. 북조선은 여운형을 신뢰하고 있다고 말할 것.

로마넨코 보고. (신원불명)와 중앙위원회 위원 2, 김일성, 김두봉, 영하(朱寧河.북로당부위원장), 장주익, 허가이(許哥而. 북로당 조직부장)등 회의.

인민당과 신민당 두 정당의 합법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산당은 지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는 남조선의 정세에 대해 보고했다. 남조선의 정세에 대해 논의했다. 종파주의자들이 대회를 소집했고, 2백명이 대회에 출석하였다. 대회에서 어떠한 문제들이 심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신민당은 대회를 개최해공산당 지지자들을 모두 당에서 축출했다. 대회는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926)

 

로마넨코 보고. 서울에서 남조선신민당 조직부장 심운(沈雲)의 연락원이 도착했다. 신민당 중앙위원회의 다수는 백남운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백남운은 미군정과 경찰의 보호 하에 당 대회를 소집했는데, 대회에는 당에서 제명당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김두봉은 대회를 무효로 인정할 것과 부위원장 정노식(鄭魯湜)을 위원장으로,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승인할 것을 제안했다(102)

이그나치예프 대령(민정부 정치부 차장). 합당사업은 도 수준까지 진척되었고 지하에 정치위원회가 조직되었다(107)

 

7. 스티코프비망록 3. 3당합당 게 재 일 : 1995051610(40)

박헌영파(朴憲永派)가 남로당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수습 기미를 보였던 좌익 3당 합당은 1016일 박헌영 중심의 합당에 반대하는 강진. 백남운 등이 독자적으로 반대파를 규합해 사회노동당(사로당)을 결성하면서 또 한 차례 폭풍에 휩싸이게 된다. 뜻밖의 사태전개에 당황한 군정과 북로당은 남쪽 상황에 더욱 깊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스티코프비망록은 이러한 개입의 사례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우선 로마넨코와 김일성. 김두봉이 반대파의 대부격인 강진. 백남운을 각각 만나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를 추궁했다. 지금까지 반대파들이 북으로부터 비판당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 구체적 내용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군정과 북로당의 호된 질책을 받은 백남운과 강진은 남으로 내려오자마자 사로당이 자신들과 관계가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사로당 해체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111일 사로당은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백남운. 강진이 포함된 중앙위원을 선출했지만 여운형. 강진. 백남운은 참석하지 않았다.

북로당 중앙위원회는 개별인물에 대한 비판 외에도 사로당을 공식 비판하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1116일 북로당은 남로당 정치노선 절대지지와 강진등을 분열주의자로 규정하는사로당에 관한 북로당의 결정서를 발표했다. 이것은 군정의 지지를 기대했던 사로당에는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군정의 입장이 강력하게 표명되자 사로당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들이 급속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간부들의 탈당성명이 잇따랐다.

 

결국 남로당은 1123~24일 양일간 결성대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고, 사로당은 472월 당 대회를 열고남조선 민주진영의 세력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다 는 자기비판과 함께 해체를 선언했다. 군정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박헌영의 승리가 확정된 것이다.

스티코프는 122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사업에 대해 박헌영에게 축하할 것을 지시해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어렵게 결성된 남로당은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군정의 기대와는 달리 이미 10월 폭동을 겪으면서 불법화된 상태였다. 대중적 기반도 약화됐다.

남로당과 북로당 창당 작업이 완료되자 두당간의 원만한 관계 정립이 현안으로 등장했다. 스티코프가김일성과 박헌영은 업무상 긴밀한 연계를 확보해야한다고 지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티코프는 126일에도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와 관련, 461212일자비망록은 전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박헌영이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한 비합법적 중앙을 창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고 이에 김일성도 동의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이다. 이것은 48825 일 만들어진남북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구성을 북로당이 남로당을 흡수하기 위해 강요했다는 통설을 뒤집는 내용이다.

박헌영은 월북 후 자신의 당내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남북노동당의 연합중앙위원회 구성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46123일 스티코프는 모스크바로3당 합당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이로써 4개월간에 걸쳐 파란을 겪었던 3당 합당이 사실상 마무리 됐다. 그러나 남한 좌익정당의 단결과 강화를 위해 추진된 3당 합당은 좌익세력 내부의 갈등과 분열의 앙금만을 남겼다.

단일한 좌익정당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군정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려던 군정의 의도도 합당 전에 10월 폭동이 발발함으로써 사실상 좌절됐다.

 

8. 스티코프비망록 3. 일지 게 재 일 : 1995051610(40)

로마넨코(蘇軍民政사령관)와 대화했다. 강진(姜進.조선공산당 중앙위원)1029일까지 북조선에 머물도록 약속 했다. 로마넨코와 강진의 회담 후에 김일성(金日成.북조선노동당부위원장)이 강진과 대담할 것이다.(461019)

김일성 보고.

종파주의자들과 강진은 인민대중을 기만했다. 그들은 17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소집,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반대파의 통합이라는 구실 하에 대회를 개최해 다시 한 번 인민대중을 기만했다. 여운형(呂運亨. 조선인민당 당수)도 대중을 기만 했다. 그는 사회노동당(사로당)중앙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두 조직의 중앙위원회 성원은 모두 종파주의자들과 친미분자들로 구성되었다. 여운형을 비판할 것. 그러나 너무 과격하지 않게.(1021)

김일성의 보고.

김두봉(金枓奉.북로당위원장)이 백남운(白南雲.남조선신민당 당수)과 만났다. 과 함께 3명이 북조선에 도착했다. 은 사로당을 정당화하기위해 북조선으로 왔다. 여운형은 그가 북조선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하지(미군사령 관)가 불러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인정할 것을 요청했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는 우리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고 북조선을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김두봉은 에게 왜 좌우합작에 동조 했으며,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를 물었다. 은 자신이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로당을 조직했다고 대답했다.

강진과 만났다. 나는 합당사업이 결렬된 모든 책임이 강진에게 있다고 말했다. 또 나는 그에게 제국주의의 주구인지 아닌지는 확증할 수 없지만,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당신에 의해 소집된 대회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와의 통합을 위한 것이 아니라 투쟁을 위한 것이었다.

당신은 대회를 소집할 자격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에서 제명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합당을 방해할 목적으로 대회를 소집했다. 박헌영 동지의 결정은 그 자신만의 견해가 아니라 북조선 40만당원의 견해이기도 하다. 당신은 당으로부터 권한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당신은 박헌영 동지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을 구실로 삼고 있지만, 당에 손실을 입힐 권한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당신이 지금까지 행동해왔던 것과 다른 진정한 혁명가가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가. 그는 조언을 구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좋게 평가하기를 원한다면 당신 스스로가 분파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신을 전에 이미 호출했지만, 당신은 오지 않았다. 그는 남조선노동 당과 사회노동당을 통합시키겠다고 대답했다.(1022)

김두봉과 대담하다. 그는 남조선 정세에 대해 동요하는 입장을 보였고 남조선 반동파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1025)

로마넨코, 3당 합당 상황에 대해 보고. 수준에서통합이 완료되었다.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고 중앙위원회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중앙위원회 대표가 허헌(許憲.남로당 당수)을 만나 박헌영의 지시를 전달했다. 반대파들은 사로당을 결성했다. 사로당의 강령이 발표된 후 대중들은 이 당을 거부하고 있다. 사로당이 우익과 합동을 도모하고, 입법기관의 조직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좌익정당의 분개를 사고 있다.

사로당은 파업과 무장봉기를 이유로 공산당을 비난했다. 백남운은 사로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사로당의 선언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성명했다. 강진도 자신의 오류에 대한 비판을 표명하고 있다. 여운형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성명했다.(1112)

로마넨코, 남조선 노동당대회 총괄보고. 지시를 내리다.

1.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사업에 대해 박헌영에게 축하할 것.

2.다른 정당들이 파악할 수 없도록 당중앙위원회를 구성할 것.

3.박헌영은 향후 행동방침에 대한 지령을 허헌에게 하달해야한다.

4.박헌영이 수행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선전사업에 대한 방침을 숙고할 것.

5.김일성과 박헌영은 업무상 긴밀한 연계를 확보해야 한다.

6.급사를 통해 일체의 당대회 자료를 보내도록 지시를 내릴 것.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로 보낼 남조선 3당 합당 사업총결 보고서를 준비하도록 크라프초프에게 지시를 내리다.

박헌영은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한 비합법적 중앙을 창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나는 김일성의 의향을 알아보았다. 그도 역시 동의했다.(1212)

크라프초프가 전화했다. 사로당 문제로 서울에서 보고가 있다고 알려왔다. 우리의 지시가 대개는 전적으로 받아 들여졌으며, 사로당의 붕괴가 계속되고 있다. 당 축소의 지지자는 강진이다.(1217)

9. 스티코프비망록 4. 좌우합작 추진 말라 게 재 일 : 1995051810(40)

19465군정이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할 때 소군정(蘇軍政)이 이를 강력히 저지하려 한 사실이스티코프비망록에서 처음 밝혀졌다.

또 좌우합작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미군정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려 하자 소군정이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주장등 그에 대한 대응책을 남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직접 지시한 사실 역시 새롭게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들은 당시 박헌영(朴憲永)이 이끈 남한의 좌익계열이 좌우합작에 반대하고 입법의원선거를 전면 거부한 배경을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은 난항에 빠진 한국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좌우합작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남한에 소련 측이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세력을 등장시켜 이들로 하여금 남한의 정치적 통합을 주도하게 함으로써 장차 소련과의 협상을 원만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온건좌파를 분리시킴으로써 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도 함께 포함됐다.

한편 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이만규(李萬珪)여운형은 자신이 좌우세력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개인적 사명 때문에 좌우합작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당시 좌파의 지도권을 놓고 박헌영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터에 미 군정으로부터 좌우합작 추진 제안을 받자 박헌영을 고립시킬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고 이를 수락한 측면이 강했다.

반면 김규식은독립정부를 수립해보겠다는 의욕에서 좌우합작에 뛰어들었다고 스스로의 입장을 밝혔다.

좌우합작운동은 46525일 좌우익 지도자들 간에 첫 회합을 가진 이래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같은 해107좌우합작7원칙이라는 합의점을 도출해 냈다.

지금까지 김일성(金日成)을 비롯한 북한지도부가 좌우합작에 반대한 것은 알려져 왔다. 그러나 소군정이 좌우합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망록에 따르면 스티코프는 46924일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무슨 답변을 주어야 할지 스탈린의 지령을 요청했고, 이틀 후 소군정 민정(民政)사령관인 로만넨코에게남조선 좌우합작을 추진하지

 

                                                         북한 정권 수립의 막후 인물인 스티코프 中將(왼쪽)과 니콜라이 레베데프 少將(오른쪽).


                                                               1946년 미소공위에 참석하러 서울에 온 시티코프가 덕수궁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가운데가 스티코프중장


                                                19465, 1차 미소공위 미국측 대표인 브라운 소장과 악수하는 여운형(가운데가 스티코프 중장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19451014'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뒤의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쪽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가 개회를 선언하고, 이어 레베데프 소장이 등단하여 소련군이 온 의의와 진의를 설명하고 조선인민에게 축하와 격려의 말을 하였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小將)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Георгиевич Лебедев, 1901~ 1992510)[1]는 소련군 장성이다. 1945년 해방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김일성 정권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N. G. 레베데프는 1901년 러시아 칼루가 주(Калужская область) 지즈드린스키 군(Жиздринский район)의 부다(Буда) 마을에서 태어났다. 1916년까지 부드스크 젬스트보 학교(Будская земская школа)에서 공부했다. 1920년부터 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에 복무했다. 1941615일에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고, 1942126일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58월 제1극동전선군 산하 제25군의 대일본전 지도자의 한명으로 북한에 진주하였다. 평양 소련군정의 명목상 최고 책임자는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이었으나 그는 정치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았고, 소련군정을 실제로 총지휘한 사람은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의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였다. 레베데프 소장은 25군의 군사위원으로 평양 현지에서 스티코프 등 상부의 지시를 받아 이행하는 실질적 책임자였다.

 

그는 국내에서 무명 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여러 정치 공작을 지휘했다. 당시 김일성대 부총장으로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교습한 박일(朴一)은 레베데프 소장이 최초로 김일성 우상화 공작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1948910일 공식적인 북한 정부 수립 후 소련으로 귀환하는 그에게 김일성은 훈장을 수여하였으며, 이후 한동안 매년 그를 북한으로 초청하였다 한다.

 

그는 비교적 장수하여 199010월 한-소 국교수립 직후인 1991년에 모스크바의 자택으로 찾아간 중앙일보 특별 취재팀에게 소련군정 당시의 여러 일들에 대해 많은 증언을 해 주었고,[7] 이듬해인 1992510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은 소련군정의 북한통치 및 대남공작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 자료이며 구 소련 붕괴 후에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에 응하여 남긴 증언도 많이 있는데, 평양의 소련군정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레베데프는 한반도 분단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련 점령군 사령부 핵심인물이다. 그는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위해 정열적으로 일했으며 그 내용을 소상하게 일기로 쓴 것이 바로 이 비망록이다.
편자는 이 비망록을 통해 북한 정권창출에 소련이 어느 정도 개입했으며, 그리고 남북협상의 추진 내막과 진행과정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을 통하여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9468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오른쪽 부터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김일성, 박정애이다.


               1947년 김두봉,김일성과 소련군 장성들이 담소하는 장면 사진. 오른쪽 끝이 김일성, 가운데서 왼쪽을 보며 이야기하는 사람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북한 정권 수립후 1948년 말 소련으로 귀환하는 레베데프 소장에게 김일성이 메달을 달아주는 장면



. 소련 제25군의 사령관이며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大將)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러시아어: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탸코프, 1900914- 197937)는 소련의 군인으로, 1945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의 사령관이었으며,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소련 제1극동전선군 산하 제25군은 소련의 대일전 개시와 함께 194589일 북한지역으로 침공해 들어온다. 1945815일 일왕이 라디오로 무조건적인 태평양 전쟁 항복선언을 하였다. 8월말까지 소련 제25군은 북한 전역을 장악하고, 사령관인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은 북한 소련군정의 명목상 최고 책임자가 된다. 826일 비행기로 평양에 도착한 그는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을 숙소인 평양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다. 그 장소에는 조만식도 입회하였다. 같은 날 밤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 지사를 역시 철도호텔로 불러 행정권을 이관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야전군인이라 정치문제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고, 소련군정을 실질적으로 총지휘한 사람은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 상장이었다. 평양 현지에서는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 스티코프의 지시를 이행하는 책임자였다.

 

평양에 온 그가 발한 이른 바 치스차코프 포고문은 맥아더 포고령[5]과 대비되어 오늘날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치스차코프 포고문의 내용과는 달리 소련은 주민들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없이 대중의 지지가 높은 조만식을 제거하고, 각종 정치공작을 통해 자신들이 88 국제여단(88독립 저격여단)에서 교육시킨 대리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워 북한을 공산화시킨다는 확고한 정책을 강제로 밀고 나갔다.

 

이외에 소련군정 사령관으로서 치스차코프가 한 결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의 수도를 함흥과 평양 중 어디로 할지를 결정하라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의 지시를 받고 평양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병사들이 벌인 민간인 약탈, 강간 등의 만행, 일제가 남긴 산업시설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반출한 것, 반탁 데모와 반공 의거를 강제 진압하면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것 등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그는 19473월 소련으로 귀국했고 후임 사령관으로 겐나디 페트로비치 코로트코프(Gennadii Petrovich Korotkov, 1898 1982) 중장이 부임했다.

 

저서로 25군의 전투행로가 있다.

I.M.치스챠코프, 25군의 전투행로, 소련과학아카데미 편, 레닌그라드로부터 평양까지 : 조선해방에 있어 소련장성 11인의 회고록(서울: 함성, 1989.05.01)에 수록됨.

소련으로 망명한 전 북한 외무 부상 박길용 (朴吉用, 1920~1997은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선을 해방시켰다는 북한 역사책들의 주장은 치스차코프의 회고록 25군의 전투행로에 나오는 내용중 소련군 25(88독립 저격여단)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바꾸어 옮겨적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19458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을 숙소인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 장면으로 그 장소에 조선인 대표로 조만식()도 입회하였다


정권 이관의 광경: 1945826일 밤 철도 호텔에서 왼편의 소련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 대장이 오른 편의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지사로부터 행정권 이양을 받는 모습


1945824일 함흥에 도착한 치스차코프가 환영나온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이때까지 함흥과 평양 중 어디를 수도로 할 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함흥에 먼저 들린 것으로 보인다. 평양을 북한 수도로 결정한 사람은 치스차코프로 알려져 있다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6일부터 진주하여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부터 철수하여 1948년 말까지 철군했다 


-한국전쟁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 부대 또는 저격여단) 등 이다[빨치산부대를 소련에서는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공수부대로 표현하고 있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은 스탈린 부대(일국 사회주의노선, 자국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그룹]이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은 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은 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이다



-스탈린의 한국 전쟁 개입

194935, 북한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남한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12월 남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1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30,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중국 공산당)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6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남한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모택동의 한국전쟁 개입에 대한 후회

1950년 한국전쟁 기간부터, 친소련파였던 김일성으로는 북한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다고 본 마오쩌둥(모택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 김두봉, 김무정 김원봉등의 조선의용대(독립동맹-모택동의 신민주주의와 중국 공산당 계열)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과의 교류는 김일성에 의해 차단된다.

그는 1948년에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고려 공산당 계열) 박헌영을 통해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영향력 행사를 기도하였으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은 김일성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수반으로 낙점한다. 한국전쟁 기간 중 그는 김일성의 견제세력으로 박헌영과도 연결을 시도했는데, 박헌영을 김일성의 대안으로도 고려했다. 1953년부터 19558월 종파 사건으로 북한의 남노동당원들이 대규모 감금, 체포, 처형당했을 때 그는 북한 외무성을 통해 압력을 넣어 박헌영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일성의 박헌영 처형 의지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의 상의도없이 멋대로 북한 인민군을 후퇴시켜 결국 중공군은 유엔군의 기습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보급 손실을 받았다. 마오쩌둥(모택동)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다. 그후 북중 관계는 악화되었다. 1975년 김일성은 베트남 공산화와 남한 박정희 유신정부 혼란으로 남침을 할 수 있는 국내외 상황의 기회로 보고 마오쩌둥(모택동)에게 찾아가 다시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오쩌둥(모택동)은 거절하였다. 이유는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고백을 했고 김일성은 매우 무례하고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망나니놈이라고했고 북한에 군대를 파병보내 김일성과 북한을 도운 것을 후회하였고 한국(남한)이 통일되게 나뒀어야 했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남북통일이 군사력보다는 신민주주의(민주화) 입장에서 남북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은 남북통일을 개인 우상화와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군사력에 치중함으로 남북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 제6공화국 수립이후 남한정부 주도 민주화 정책으로 남북통일을 주도하고 있으며 남북 주민들이 지지하고 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38선 월경과 평양점령 입장(유엔군)이냐


                                                                                  인천상륙작전(사진)

1950년 6월 25일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정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야포와 자동화기의 굉음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침략군은 이내 38선을 넘어 반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 경찰군을 밀어내며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 후 유엔은 북한군의 침략 저지를 위한 회원국의 단결과 원조를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안을 통해 미합중국을 결의안 내용의 실행과 한국 내 유엔군 작전 지휘를 담당할 집행국가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산세력이 자유국가를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당시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 공군 및 해군을 투입하고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유엔 사령부 총 사령본부를 설치하였다.

유엔의 호소
한편, 유엔은 모든 회원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항전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기타 원조 제공을 촉구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미 보병 24사단 21 보병연대가 유엔 지상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로 명명된 이들은 일본 내 주둔지로부터 공수된 병력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미 양국의 군대는 우세한 전력의 북한군을 상대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 사령부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수적으로나 장비 측면에서 열세인 가운데 유엔의 다른 회원국이 약속한 지원을 기다리며 조금씩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9일, 영국 제 27여단이 부산에 도착, 한국군 및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엔 사령부에 합류하였으며 곧 대구 서쪽의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가 자국 병력을 파병하였고, 남아프리카 연합은 공군병력을, 덴마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은 의무부대를 지원하였고, 당시 비회원국이던 이탈리아는 병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유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다

3년 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연합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유엔 사령부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침략행위 저지를 위한 유엔의 의지를 확인시켰다.

한국 땅의 혹서기와 혹한기를 견뎌내면서 영국, 이디오피아, 한국, 태국, 터키, 미국 등을 비롯한 연합국 출신의 젊은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현대 전쟁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능선, 장진호, 함흥, 단장의 능선, 화천호, 철의 삼각지, 펀치볼, 부산 등은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들이다. 연합군의 용맹스런 장병들이 흘린 피는 불모고지의 흙먼지와 한강과 임진강의 흐르는 강물도 붉게 물들였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총성은 멈췄다.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전투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록 전투는 끝났으나 군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2,000미터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자유의 대가

부산항 부근에 위치한 당곡 평야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빛 바랜 터키와 이스라엘의 '초승달과 별'과 '다윗의 별' 문양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33,629 명의 미군과 수많은 한국 병사들, 717명의 터키 병사들, 그리고 1,109 명의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산화해 간 흔적인 것이다. 이 곳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12 개국 병사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하다.

휴전협정과 함께 유엔 사령부 회원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후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은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 연합군의 병력은 932,964 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 - 590,911

콜롬비아 - 1,068

미 합중국 - 302,483

벨기에 - 900

영국 - 14,198

남아프리카 - 826

캐나다 - 6,146

네덜란드 - 819

터키 - 5,455

룩셈부르크 - 44

호주 - 2,282

필리핀 - 1,496

뉴질랜드 - 1,389

태국 - 1,294

이디오피아 - 1,271

그리스 - 1,263

프랑스 - 1,119   [유엔군사령부 자료]


                                                                                인천에 상륙하는 유엔군




                                                                                    38선을 돌파한 유엔군


                                                                                    대동강을 도하하여 평양을 진입하는 모습



                                                                                              유엔군을 환영하는 평양시민들 모습


유엔군의 평양 탈환을 환영하는 대회를 열고 있는 평양시민들



                                                                         10만명의 평양시민 환영대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유엔군 미주리 전함이 단천, 청진, 성진, 원산, 함흥, 흥남등 동해안 북한지역을 점령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북중연합군 창설과 38선 월경, 서울점령 입장(중국과 북한군)이냐







                                                                서울을 점령한 중국 인민해방군 모습(사진)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압록강 도하를 시작했다. 이날 이후 중공군 18개 사단이 압록강을 통해 한반도로 진입, 한국전에 개입했다.
이 날은 38선을 돌파한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한 날이다(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은 이보다 4일 전인 10월 15일 평양에 진입했다)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1951년 1월 4일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북한을 침범한 미국을 분쇄하고 중국안전 보위하기 위하여 중국은 한국 전쟁 참전을 정의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중국은 한국전 참전 55주년을 기념하여 인터넷상에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紀念館)’을 개설하고 24일부터 정식 운용에 들어갔다.

 

중국은 1025일을 한국전 참전기념일로 삼고 있는데 이는 19501019일 압록강을 도하한 중국 정규군이 국군과 처음 교전한 날이다.

 

항미원조기념관은 전쟁소개(戰爭簡介)’ 14개 코너에 중국 인민지원군과 관련된 문자자료와 사진 및 영상자료들을 올려놓았다.

 

중국은 피로 주조한 중화(血鑄中華) ’라는 이름의 인터넷 '혁명기념관'을 개설하고 그 산하에 공산중국 성립 전후의 전쟁기념 사이트를 잇달아 개설하고 있는 데 이 인터넷 기념관도 그 중 하나이다.

 

현재까지 ‘9.18사변(만주사변)기념관(九一八事變紀念館)’. ‘항일영웅열사기념관(抗日英烈紀念館)’ 130개의 기념관 사이트가 개설되어 있다.

 

이 항미원조 기념관 사이트는 공청단(共靑團) 중앙, 중국사회과학원의 주관아래 공청단 중앙 산하의 정보팀(團中央信息辦),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와 중국청소년컴퓨터정보서비스망(中靑網 : 中國靑小年計算機信息服務網)이 협력하여 개설, 운영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사이트는 전쟁소개(戰爭簡介) ’코너에서 한국전의 발발에서 종결까지의 진행과정을 약술하고 있다.

 

그 첫머리는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정당화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항미원조 전쟁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의 요청에 의해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유엔군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침범한 것을 분쇄하고 중국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해 지원군을 19506월부터 19537월까지 파견하여 수행한 정의의 전쟁이다.”

 

또한 누가 전쟁을 발발했는 지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한국에서 내전이 폭발했다"고 기술했으며 "신중국(新中國) 성립(중국 공산화) 이후 미국이 장제스(蔣介石)정권에 대해 군사원조를 계속하고 한국과 베트남의 반동세력을 부추겨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였다"고 적고 있다.


                                           1950년 12월 북중(朝中)연합군 창설과 중국 인민해방군 한국전쟁 개입[김일성과 팽덕회 모습]


                                                                          중공군 14개 사단이 압록강을 도하하고 있는 모습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紀念館)

항미원조 전쟁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의 요청에 의해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유엔군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침범한 것을 분쇄하고 중국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해 지원군을 19506월부터 19537월까지 파견하여 수행한 정의의 전쟁이다.”

항미원조기념관은 단동시 금강산 서쪽기슭에 있다. 1959년에 건설하였다. 1984년에 중앙 의 비준을 거쳐 확건하였다. 1991년에 착공하여 19937월에 준공하였다. 인민대중들에 대해 애국주의와 국제주의교양을 진행하는 장소로 되고 있다. 부지면적은 18m2, 건축면적은 1m2이다.

 

주요한 건축으로는 기념탑, 진렬관이 있다. 기념탑은 금강산 서쪽기슭에 위치. 탑 높이는 53m로서 1953년 항미원조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등소평동지가 탑명을 썼다.

 

진렬관은 3층으로 되었다. “항미원조 보가위국부각군상을 배경으로 정 중앙에는 모택동과 팽덕회의 거형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관내에는 12개 전시청이 있다. “항미원조전쟁관”, “영웅모범렬사관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 위대한 전쟁의 력사적 화폭을 전면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이밖에 또 대형무기진렬구에는 항미원조에 나갔던 비행기와 대포 땅크, 자동차 등 무기장비들이 진렬되어 있다.


                                                                    중국 공산당 수뇌부가 모여 지원병 파병에 대해 의론하는 장면


                                                             항미원조 전쟁에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는 모택동과 엄정경고문을 발표하는 주은래


                                                                                  팽덕회(彭德懷)사령원이 전선을 둘러보는 장면


                                                                                        모택동의 지원에 감사해 하는 김일성








                                                                                            조중우의를 다짐하는 깃발들

남노당 등 남한 각지에서 중공군의 지원을 열렬히 환영하는 내용의 깃발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 그리고 북한 노동당 내부 자국 사회주의(민족 사회주의) 연합전선 구축은 남한이나 일본등지 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에 잠입작전입니다. 당 정치국 요원이 잠입하여 공산주의나 자국사회주의(민족사회주의) 정치부대를 결성하고 내전이 발발할때 인민전쟁을 추진해왔습니다. 대표적인 단체가 일본 적군파와 남한 한국민족민주전선(반미단체 자주대오)등입니다[북한이나 중국 인적자원 구성(붉은 깃발이나 자주대오)-->지역 내전 추진--->군사적 조치와 점령]"


한국전쟁 북한 공산세력 참가국 군인

북한(1950625일): 80만 명

소련(1950625일): 26000

중화인민공화국(19501025일): 135만 명

한국 전쟁 초기 그는 한국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는 국방부장관격인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참여하지 않았고, 차수인 김책이 관여 하였다. 미군이 참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선사령부를 중심으로 전쟁이 치루어졌다. 미군이 개입하자 195074일 김일성은 최용건 대신에 자신이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 전선사령관 김책, 총참모장 강건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그는 서울방어와 인민군 재건을 지휘하였다.

한국전쟁은 소련군 저격여단 주도로 추진했고 유엔군 개입과 중공군 개입으로 중국의용대 주도로 전개 되었다


   抗美援朝戰爭簡介


  新中國成立後,美國繼續在軍事上援助蔣介石,同時扶持朝鮮、越南等國的反動勢力,建立針對中國的包圍圈。 1950年6月25日,朝鮮內戰爆發。美國即採取武裝干涉政策。 6月27日,美國總統杜魯門聲明,宣佈出兵朝鮮,並命令美國海軍第七艦隊侵入台灣海峽。同日,聯合國安理會在美、英等國的操縱下通過決議,聯合國會員國要派兵隨從美國軍隊入朝。 6月28日,毛澤東發表講話,號召“全國和全世界的人民團結起來,進行充分的準備,打敗美帝國主義的任何挑釁。”同日,周恩來代表中國政府發表聲明,強烈遣責美國侵略朝鮮、台灣及乾涉亞洲事務的罪行。號召“全世界一切愛好和平正義和自由的人類,尤其是東方各被壓迫民族和人民,一致奮起,制止美國帝國主義在東方的新侵略。”

1950年7月10日,中國人民反對美國侵略台灣朝鮮運動委員會在北京成立,並在14日發出《關於舉行'反對美國侵略台灣朝鮮運動週”的通知》。抗美援朝運動開始播及全國,形成第一個高潮。

  1950年9月15日,以美國為首的“聯合國軍”75000人在朝鮮西海岸的仁川港登陸。此後,朝鮮人民軍腹背受敵,損失嚴重,轉入戰略退卻。 10月1日,美偽軍越過三八線,隨後侵占平壤,並繼續向中朝邊境的鴨綠江進犯。

  從8月27日起,美國飛機多次侵入中國領空進行偵察和轟炸掃射。面對這種形勢,中共中央根據朝鮮黨和政府的請求,作出了抗美援朝、保家衛國的決策。 1950年10月8日,毛澤東代表中央軍委命令中國人民志願軍赴朝參戰。 10月19日,以彭德懷為司令員兼政治委員的中國人民志願軍開始分別從安東(今丹東)、長甸河口、輯安等渡過鴨綠江,進入朝鮮參戰。從10月25日至12月24日,志願軍同朝鮮人民軍一起,連續進行了兩次戰役,殲敵5萬餘人,於12月6日收復平壤,並把敵人趕回到三八線附近,初步扭轉了朝鮮的戰局。

1950年10月26日,中國人民保衛世界和平反對美國侵略委員會(簡稱中國人民抗美援朝總會)成立。各行政區、省市先後成立分會或將原有的保衛世界和平委員會、反對美國侵略委員會合併改組為抗美援朝分會。 11月4日,中國共產黨和各民主黨派聯合發表宣言,“誓以全力擁護全國人民的正義要求,擁護全國人民在志願基礎上為著抗美援朝保家衛國的神聖任務而奮鬥。”4日至11日,全國自然科學聯合會、全國科普協會、社會科學研究會、全國婦聯、全國青聯等人民團體分別發表宣言,擁護中共中央和各民主黨派的聯合宣言,號召廣大群眾積極參加抗美援朝、保家衛國運動。 11月27日,全國政協與各民主黨派舉行聯席會議,於12月1日發出《關於各民主黨派、人民團體對慰勞中國人民志願軍和朝鮮人民軍運動的協議的通知》。 12月22日,中央人民政府內務部、人民革命軍事委員會總政治部聯合發出《關於開展新年擁政愛民擁軍優屬運動的指示》。 1951年2月16日,全國政協發出電文,號召把抗美援朝運動“進一步地普及和深入到每一農村、每一機關、每一學校、每一工廠、每一商店、每一街道和每一民族聚居的區域。”3月14日,抗美援朝總會發出通告,“努力普及深入抗美援朝的實際工作和宣傳教育工作,務使全國每一處每一人都受到這個愛國教育,都能積極參加這個愛國行動。”此後,抗美援朝運動進入了更加普及和深入發展的階段。

1951年1月14日,抗美援朝總會發出《關於慰勞中國人民志願軍朝鮮人民軍並救濟朝鮮難民的通知》。 15日,《人民日報》發表社論,號召全國人民踴躍參加愛國募捐運動。到5月30日,全國人民就捐款1186億餘元,捐獻慰問袋77萬多個,慰問品126萬多件。 4月初到5月中旬,由各民主黨派、各人民團體和各界群眾代表組成的中國人民赴朝慰問團分赴朝鮮各地,慰問了中國人民志願軍和朝鮮人民軍及群眾。

  1951年6月1日,抗美援朝總會發出通告,號召全國各界同胞捐獻飛機、大砲。此後中華全國總工會、全國婦聯、青年團中央、全國青年聯合會、中國紅十字會等人民團體紛紛發表宣言、通告,號召各界同胞積極捐獻。到9月25日為止,共捐獻飛機2481架,捐款入庫的達9970億元。

  1950年12月31日至1951年1月7日,志願軍發動了第三次戰役,殲敵1.9萬多人。 1月25日至4月21日,志願軍又發動第四次戰役,殲敵7.8萬人。 4月11日,“聯合國軍總司令”麥克阿瑟被撤職,由侵朝美軍第八軍軍長李奇微接任。 4月22日至6月10日,志願軍又取得第五次戰役的勝利,共殲敵8.2萬餘人。

1951年7月10日,聯合國軍方面和中朝方面在朝鮮開城首次舉行談判。美國在談判桌上進行政治訛詐,要求將軍事分界線劃在中朝軍隊控制的三八線以北地區。以後朝鮮戰場出現了談談打打的複雜局面。 8月18日,美軍集中8個師的兵力,發動了“夏季攻勢”,接著又於9月29日發動了秋季攻勢。與此同時,美國空軍實行所謂“絞殺戰”,對中朝人民軍隊後方和後方運輸線實行大規模的日夜輪番狂轟濫炸,企圖切斷中朝人民軍隊前線糧食彈藥的供給,迫使中朝方面接受其談判條件。經過中朝人民軍隊的英勇戰鬥,到10月下旬便粉碎了敵人的攻勢,共殲敵25萬人。

1952年初,美國侵略軍公然違背國際公約,在朝鮮北部和中國東北地區撒佈大量帶有鼠疫、霍亂、傷寒和其他傳染病的動物和昆蟲,企圖以所謂的“細菌戰”從根本上削弱中朝軍民的戰鬥力。 2月24日,抗美援朝總會主席郭沫若發表聲明,號召全國人民動員起來,堅決聲討並製止美軍撒佈細菌罪行。 3月8日,周恩來發表聲明,抗議美國政府使用細菌武器和侵犯中國領空。為了戰勝美國的細菌武器,中朝兩國人民緊急動員起來,開展防疫衛生運動,採取種種措施,動員一切可能的人力、物力、藥力撲滅帶菌毒蟲。美國的細菌戰激起了全世界人民的極大公憤,使美國完全陷於世界人民的聲討、審判的被告地位。 4月28日,“細菌將軍”李奇微下台,由美軍上將克拉克接任“聯合國軍總司令”。美國的“細菌戰”遭到失敗。

1952年6月23日,美國侵朝空軍大規模轟炸了中國境內的鴨綠江水電廠。 7月11日,美國空軍對北朝鮮和平城市平壤進行轟炸掃射。中國各地掀起了抗議聲討活動,揭露和抗議美國這一暴行。美國企圖阻撓中朝戰俘全部遣返,並對其俘獲的中朝人員施行極其野蠻的摧殘和迫害,引起了中朝人民的極大憤慨。 1952年2月至10月,《人民日報》多次發表社論和聲明,揭露和譴責美軍迫害戰俘的罪行。全國人民也積極掀起了抗議活動,要求全部釋放戰俘。

  為了挽回敗局和迫使中朝方面接受美國的談判條件,克拉克於1952年10月14日發動了上甘嶺戰役。美軍先後投入6萬多人的兵力,出動3千架飛機和170多輛坦克,動用18個砲兵營,進攻不到3.7平方公里的上甘嶺陣地。在44天的激戰中,美軍向上甘嶺發射了200萬發砲彈和5千枚炸彈,發動了900多次沖鋒。但是,志願軍戰士,守住了陣地。此戰役志願軍殲敵2.7萬人。 1953年5月中旬到6月中旬,中國人民志願軍配合停戰談判,先後發動兩次進攻性作戰,殲敵4萬餘人。 7月13日,中朝人民軍隊發起金城戰役,殲敵5萬餘人,收復土地178平方公里。

  美國在形勢更加不利的情況下,於1953年7月27日在板門店同中朝代表簽訂了《關於朝鮮軍事停戰的協定》。歷時3年零32天的朝鮮戰爭結束。中朝軍隊共殲敵百餘萬人,其中美軍39萬人,擊落擊傷敵機12200餘架,擊沉擊傷敵艦艇257艘,擊毀和繳獲敵軍各種作戰物資無數。至此,中國人民抗美援朝運動也勝利結束。

  朝鮮停戰後,中國人民志願軍又幫助朝鮮人民為戰後的恢復和建設作了大量的工作。 1958年10月,中國人民志願軍全部撤離朝鮮,返回祖國。[중공군 자료]


                                                              동북아시아 중국 동북3성과 북한, 러시아 극동지역, 일본(사진)





북한 전략 로켓군 배치도(미사일 사거리)는 다음과 같다

전방구역(남한전역 공격 목표)과 중앙구역(주일미군과 일본지역 공격목표), 후방구역(괌과 태평양 미군기지 공격 목표) 으로 나누어 배치 돼 오고 있다

북한  3개의 탄도 미사일이 태평양 괌에도 도달할 수 있다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 등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입니다. 중국에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는 조선족이 약192만명에서 약 200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위구르족(후이족=회족, 신장),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입니다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었습니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합니다

조선족이 만주국에서도 조선족 자치정부로 참여하여 상류층으로 생활했습니다



                                                             동북3성 다수민족 한족,만주족과 소수민족 조선족, 거란족, 몽골족 자치정부



-북한 핵무기 보유 이후 동북아 정세

동북아 정세는 다자간의 북한 핵무기 포기 정책이다

자유민주정부는 러시아와 일본, 몽골, 한국이며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는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과 주체연호(주체사상-김일성 김정일 헌법) 1인 종신직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이다

정치적, 안보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과 중국이 협조체제이며  민주국가인  러시아와 일본, 몽골, 한국이 협조체제이다

군사적으로는 중국 주도 러시아,중국, 북한이 공존하고 있다

정치적, 안보적으로 민주국가인  러시아와 일본, 몽골는 한국(남한) 주도 남북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며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모택동파(마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세력)는 북한 주도 남북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고 등소평파(실용주의, 수정주의)는 남한 주도 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러시아나 중국정부 내부  실용주의자는 남한내부 친북세력(마스-레닌주의 김일성노선 교조주의 세력)을 싫어하는 입장이다

대한민국 헌법.hwp

일본국 헌법.hwp

中華民國 憲法.hwp

러시아연방 헌법.hwp

몽골헌법.hwp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hwp

북한헌법.hwp


*조소 우호 협력 및 상호 원조 조약[朝蘇友好協力─相互援助條約]

1961년 7월 6일 북한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양국 간의 군사동맹조약.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특징은 유사시 군사적 자동개입을 규정한 양자동맹조약이라는 것이다. 김일성의 소련 방문 중 체결된 이 조약은 6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핵심 내용은 ‘체약 일방이 어떠한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지체 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소련 양국 간의 경제·문화·기술의 원조·제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당시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등 다자간 안보조약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는 양자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대국-소국 간의 군사동맹이 소국의 수도에서 협정이 체결되는 것에 반하여, 이 조약은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체결되었다.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에 통보하지 않고, 두 개의 조소, 조중 군사협정을 5일 간격으로 체결했다. 따라서 체결 당시부터 협정의 강제성이 의문시되었다

(1)역사적 배경

북한과 소련 간의 조약 체결은 1950년대 후반 치열해지는 사회주의 진영의 중소갈등과 중인전쟁, 그리고 한국의 5·16군사정변 및 한일관계 정상화 움직임,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 구상 등으로 북한을 둘러싼 안전보장 환경이 악화되면서 체결되었다. 그러나 동맹 체결 직후 중소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조소관계는 실질적으로 중단되었고, 허울뿐인 동맹으로 전락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김일성은 국내외적으로 소련, 흐루시초프, 현대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6111월부터 196410월까지 소련은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했다. 더욱이 소련은 중국, 북한과의 경제 원조를 중단했으며, 북한에 제공했던 차관을 황금으로 상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2)경과

이 조약은 10년간 효력을 가지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체약 일방이 기한 만료 1년 전에 조약 폐기에 관한 희망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자동으로 5년간 연장되도록 되어 있었다. 탈냉전 분위기와 더불어 1990년 한국과 소련의 국교정상화 이후 조약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19946월 김영삼 대통령 러시아 방문 시 옐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동 조약의 폐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199587일 러시아 동 조약을 연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북한에 통보하여, 1996910일 이후 효력 상실했다. 20002월 이바노프 외무장관의 평양 방문에서 조러 친선선린 협조조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북한은 20004, 러시아는 7월에 이를 비준했다. 새 조약에는 쟁점 조항인 자동군사개입 규정이 삭제되었으며, 경제·문화·기술 협력에 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3)의의와 평가

냉전 시기 북중우호조약과 더불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한 주요 군사동맹조약. 19617월 북중우호조약과 북소우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북소조약 체결 직후 북소관계의 악화와 더불어 1962-64년 북소관계에 따라서 허울뿐이 조약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냉전시기 북소동맹조약의 불완전하게 작동함으로써 북한의 안전보장이 불완전하게 되었다.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1961년 7월 11일에 북한과 중국 사이에 맺은 조약.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은 1961711일 베이징에서 체결됐다. 북한 김일성 주석과 당시 저우언라이(주은래) 중국 총리가 양국 전권 대표로 서명했다. 양국이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것을 전제로 어느 한쪽이 타국의 침략을 받아 전쟁에 들어갈 경우 양방은 의무적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 군사적 지원 등을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지난 1981년과 2001년에 2차례에 걸쳐 자동 연장됐고 앞으로 유효기한은 2021년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와 탄두 미사일 개발이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의무를 위배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내용

1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아시아와 세계 평화 그리고 양국 국민의 안전을 위해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2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모든 조치를 공동으로 맡으면서 체결국에 대한 특정 국가의 침략을 방지한다. 체결국 가운데 한 쪽이 몇몇 동맹국의 침략을 받을 경우 전쟁 상태로 바뀌는 즉시 군사적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

3조 어느 체결국도 다른 체결국과 맺은 동맹에 참가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에 대한 특별한 집단, 행동, 조치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4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양국 공통의 이해 관계가 있는 모든 중대한 국제 문제에 대해 서로 협의하기로 한다.

5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주권의 상호 존중, 내정 불간섭과 평등 호혜의 원칙, 우호-협력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양국간의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서 가능한 한 경제-기술 원조를 진행하며 양국간의 지속적인 경제, 문화, 과학, 기술 협력을 통해 발전시킨다.

6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조선의 통일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실현되는 것을 원하며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조선 인민의 이익 및 동아시아의 평화 옹호 목적과 일치하는 것을 인정한다.

7조 이 조약은 양국 의회가 비준하지 않으면 효력이 생기지 않으며 양국이 비준서를 교환한 날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비준서는 평양에서 교환하며 양국이 조약의 개정 또는 효력의 상실에 대해 합의하지 않는 이상 효력이 유지된다

 

핵 보유를 위한 북한의 시도는 자국과 지역의 안전에 충격을 줬고 중국의 국가안보 이익에도 심각한 피해를 줬기 때문에 이는 조약 위반 사안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조약은 침략을 단호히 반대한다고 명시했는데 북한이 고집대로 핵을 개발하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위배되는 미사일 발사시험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이는 조약을 체결했을 당시와 2001년 조약이 마지막으로 갱신됐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북한은 반드시 핵실험을 중단해야 하고 한미 양국도 북한을 겨냥한 군사적 위협을 멈춰야 하며 양측은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해 각자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간의 북중관계가 외부로 비치는 것보다 그리 끈끈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한중 수교 다음 해인 1993년 북한은 2000년 올림픽 유치 경쟁에서 중국이 아닌 호주를 지지했고, 1997년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대사관에 조전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즈화(沈志華) 화둥사범대 교수가 북중 혈맹관계 와해를 주장하며 조선(북한)은 잠재적 적국이고 한국은 가능한 친구라고 말한 강연록도 회자되고 있다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동상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붉은 별도 제거해야 합니다

날짜:

198964- 19911226

지역:

유럽 및 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유럽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종류:

시위 등 다양함

 

결과:

동구권의 몰락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평화적 정권 교체.

냉전의 종결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유혈 혁명이 됨

소련의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 몰락

1991년 인도 국민 회의가 신자유주의를 채택

러시아 연방이 탄생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유고슬라비아 해체 및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1989년 톈안먼 사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해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회의론 대두

유럽 통합의 진전

성별 선택 낙태로 동유럽의 성비 변화

동구권에 인터넷이 확산됨

동구권에서 소비자 운동이 대두함

예멘의 통일

발트 3국의 재독립

몽골, 아프가니스탄, 베냉, 예멘,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 공화국, 소말리아에서 공산주의 붕괴

북한의 고난의 행군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종결

미국의 문화가 동구권 국가에 전파됨

NATOEU에 동구권 국가 가입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의 시장 경제 도입

미국이 전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신세계 질서

소비에트 전후 충돌의 첫 발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국민의(民有,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聯邦共和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




북한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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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연방 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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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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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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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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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民國 憲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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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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