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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근평주석, 중러몽 수반 제5차 회담에 참석 본문

Guide Ear&Bird's Eye/동북아[극동] 지역

습근평주석, 중러몽 수반 제5차 회담에 참석

CIA bear 허관(許灌) 2019. 6. 16. 10:45


습근평(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14일, 비슈케크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칼트마 바툴가 몽골국 대통령과 공동으로 중러몽 3국 수반 제5차 회담을 진행했습니다. 3국 수반은 3측의 협력성과를 총화하고 협력 대계를 전면적으로 추진할데 대해 공동상의했습니다.    

습근평 주석은 중러몽 3국은 서로 이웃하고 있고 산과 물이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돕는 좋은 동반자라며 3측의 협력을 전개하는 것은 선천적인 지역우세와 두터운 전통을 기반으로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지난해 6월 청도에서 3국 수반 제4차 회담을 개최한 이래 3측은 밀접하게 소통하고 협조하여 3측의 협력은 점차 심층적인 발전을 가져오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습근평 주석은 올해 중국측은 러시아와 몽골국과 각기 수교 70주년을 경축하게 된다며 중러몽 3측의 협력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습근평 주석은 3측협력에 대해 3가지 건의를 제기했습니다. 하나는 전략적으로 3측의 협력을 인도하고 둘째는 중점협력으로 3측의 협력을 견인하며 셋째는 광범한 상해협력기구 기틀내에서 협조와 협동을 진행하는 입니다.  

습근평 주석은 몽골측이 자체의 우세를 발휘하고 상해협력기구 협력에 심층적으로 참여해 역내협력 기회를 더 많이 공유하며 더 유효하게 중러몽 3측의 협력을 추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측은 상호존중과 평등호혜의 기초에서 러중몽 3측관계 심화에 진력하고 있으며 유라시아 경제연맹과 "일대일로"창의 및 몽골국의 "초원의 길"계획의 접목을 강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3측은 교통운수 호연호통을 강화하고 공동무역을 확대하며 에너지와 금융 등 영역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툴가 대통령은 중국과 러시아와의 친선협력관계를 심화하는 것은 몽골국의 확고부동한 방침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몽골측은 "중러몽발전 3측협력 중기(中期) 로드맵"과 중러몽경제벨트의 건설 기틀내에서 3측의 협력에 진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러시아는 85개의 연방 구성체로 이루어진 연방 국가다. 연방 구성체 내 상당수 지역에는 비러시아계 민족들을 포함되어 있지만, 이러한 공화국에는 연방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에 대한 제약이 많아,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다. 현재 22개 공화국, 46개 주, 9개 지방, 1개 자치주, 4개 자치구, 3개 연방시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인구의 약 80%를 러시아인이 차지하고 있고, 160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후이족(회족, 신강),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이상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이다 

오족공화(五族共和)는 중화민국 성립 초기의 정치 슬로건이다. 이 원칙은 중국에 있는 5대 민족과 관련이 있다. 당시에 사용된 국기인 오색기(五色旗)에서 빨간색은 한족, 노란색은 만주족, 파란색 몽골족, 하얀색은 후이족(회족), 검정은 티베트족을 뜻한다. 여기서 회족은 무슬림으로, 위구르족을 포함한다. 청나라 때 신장 지역은 회강(回疆)이라고 불렀다. 오색기는 1928년 북양 정부가 무너지고 중국 국민당(한족)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사용되지 않고 있다.

중국은 통일된 다민족 국가이며 또한 세계적으로 인구가 제일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에는 13억 인구, 56개 민족이 있다.

 중국 민족에는 한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위글족, 묘족, 이족, 쫭족, 부이족, 조선족, 만족, 뚱족, 요족, 바이족, 투쟈족, 하니족, 까자흐족, 따이족, 리족, 리수족, 와족, 써족, 고산족, 라후족, 수이족, 둥샹족, 나시족, 징퍼족, 끼르끼즈족, 투족, 다고르족, 머로족, 챵족, 부랑족, 쌀라족, 모난족, 거로족, 시버족, 아창족, 프미족, 따쥐크족, 누족, 우즈베크족, 러시아족, 어윈커족, 더앙족, 보안족, 위구족, 징족, 따따르족, 두룽족, 오로죤족, 허저족, 먼바족, 뤄바족, 지노족이 망라된다. 이밖에 중국에는 아직 민족이 식별되지 않은 적은 인구가 있다.

1946년 1월 3일 중국의 국민정부는 외몽골(外蒙古)의 독립을 승인했다. 이는 현실을 수용한 것으로 외몽골 지역은 1921년 7월 11일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었다.

일본의 항복 선언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국민정부의 외교부장 왕스제(王世杰)와 소련의 외무장관 몰로토프 간에 ‘중소우호동맹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부속 협정으로 ‘외몽골 문제에 관한 각서’를 교환했다.

이 각서에서 중국의 국민정부는 일본 패망 후 외몽골의 주민이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시한다면 중국 정부는 외몽골의 독립을 승인하고 외몽골과 내몽골과의 경계선을 국경선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 대가로 소련의 영향력 하에 들어 가 있는 외몽골에 대한 양보를 의미했다. 여기에는 미국의 압력도 작용했다.

각서에 근거 1945년 10월 20일 외몽골에서 국민투표가 국민정부 관계자가 참여한 가운데 실시됐으며 선거결과를 바탕으로 독립이 선언됐다.

이어 1946년 1월 3일 몽골 인민공화국 부장(部長)회의, 대국민회의, 인민혁명당 중앙위원회 연석회의가 정식으로 몽골의 독립을 선포했다.

1949년 집권한 공산정부도 몽골의 독립을 인정했으며 내몽골 지역은 ‘네이멍구 (內蒙古)자치구가 되었다. 청조 멸망 후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한 소수민족 중 2차대전 후에도 독립을 유지한 곳은 몽골이 유일하다.

일본 패망 이후 채 5개월도 안 된 시점에 이루어진 몽골의 중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은 중국 인민들에게 장제스의 국민 정부가 일본을 대체한 새로운 외세 , 즉 소련과 미국에 자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일본 무조건 항복 선언 바로 하루전에 미국의 압력 하에 소련에 만주의 이권을 내어 준 것이라든가 중국의 걸음마 단계의산업계에 치명적인 대폭적인 시장 개방을 미국에 허용 한 것 등은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청나라 말기의 이홍장의 만청 정부와 동일시하는 비판과 선전 및 선동의 대한 대응 노리를 무기력 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이는 국공 내전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일반 민중과 엘리트계층 다수의 지지를 얻는데 토지 개혁과 함께 결정적 조건으로 작용했다.

국공내전 승리후 마오쩌둥의 공산 중국은 ' 또 다른 영국'으로 중국인들 사이에 우려감이 팽배햇던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고 또 만주에서의 러시아 제국주의 유산을 소련이 포기케 함으로써 장제스와는 달리 인민의 기대감을 배반하지 않았고 이는 공산 중국이 건국 초기의 불안한 상황을 극복하고 토대를 굳건히 하는데 기여했다



-1945년 중국이 와이멍구(外蒙古)로 부르는 몽골이 주민투표를 거쳐 독립을 선포했다.

칭기즈칸이 세운 원(元)이 1368년 붕괴한 뒤에도 몽골 민족은 몽골고원의 지배자의 위치를 지켰지만 17세기 청대(淸代)에 들어서서 중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청조 지배로부터의 탈피을 노리고 있던 몽골민족은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같은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는 티베트의 정치 체제를 본떠 라마교(敎)의 생불(生佛)로 간주되고 있던 종교 지도자을 황제로 옹립하고 자치독립을 선언했으나 제정(帝政) 러시아와 중국의 간섭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1921년의 인민혁명이 일어났는데 이는 청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성립된 중국정부와 반공산주의 백계(白系) 러시아의 웅겔룬 장군이 이끄는 백위군(白衛軍)에 대한 민족의 운명과 독립을 건 민족운동이었다.

소비에트 적군(赤軍)의 원조를 받은 몽골 인민혁명군은 1921년 5월 웅겔룬 군대를 격파하고 7월에는 고륜(庫倫 : 현재의 울란바토르)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하여 인민정부를 수립하였다.

1924년 11월 26일 몽골 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몽골인민공화국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소련마저도 1924년 5월 13일 ‘중소 현안해결 협정’을 통해 몽골 인민공화국이 통치하고 있는 외몽골이 중국 영토의 일부분임을 인정하였다.

1945년 2월 미, 영, 소 3국 수뇌는 얄타 회담에서 몽골(몽골인민공화국)의 현상유지에 합의했다. 이 해 8월 14일 중국 국민당 정부와 소련이 체결한 ‘중소우호 동맹조약’의 부속 규정에는 소련은 몽골(외몽골)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 완정(完整)성을 존중한다고 조항이 삽입됐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이 조약 체결 후 성명을 통해 와이멍구(외몽골) 주민들이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입증한다면 중국 정부는 와이멍구의 독립을 승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1945년 10월 20일 주민투표가 실시됐고 독립이 선언됐다.

당시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전후 공산당과의 관계 설정이라는 문제로 인해 와이멍구 문제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몽골이 독립을 선언한 바로 그날 마오쩌둥(毛澤東)은 주중 미 대사 P.J. 헐리(P. J. Hurley)와 전후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관계 설정에 관한 5개항의 합의를 이룩했다. 5개항의 합의는 다음과 같다.

1. 중국정부, 국민당, 공산당은 합작하고 군대를 통일적으로 보유하며 일본을 격멸하고 중국은 건설한다

2. 국민당 정부를 연합정부로 개조하고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 정책을 선포한다

3. 연합정부는 손중산(孫中山,손문 )주의를 받들어 백성이 다스리고, 백성이 소유하며, 백성이 향유하는 정부를 건립하고 각 항의 정책을 실행한다

4. 연합정부 및 연합군사위원회는 일체의 항일부대를 승인하고 이들 부대들은 이들 기구의 명령을 준수, 집행한다

5. 각 당파와 단체의 합법적 지위를 승인한다.


 

미국과 영국, 소련등 연합군은 소련측 연합군에 가담한 몽골국을 국가로 승인을 했다

중국 장개석정부는 1946년 1월 3일 공식적으로 몽골국을 국가로 승인을 했다

미국과 영국정부는 중국의 동북3성  만주국을 중국 땅으로 인정했다

소련은 만주국도 국가로 승인 해왔다

1933년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년 3월 3일)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년),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년 3월 23일, 법률상 1941년 4월 13일), 이탈리아(1937년 11월 29일), 스페인(1937년 12월 2일), 독일(1938년 5월 12일), 헝가리 (1939년 1월 9일)에 승인되었다.

흔히 바티칸 시국이 1934년 만주국과 외교 관계를 맺은 것으로 믿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바티칸 시국이 만주국을 승인했다는 영화 《마지막 황제》(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1987년 작품)를 참고한 잘못이다. 지린의 주교 가오더후이(高德惠, Auguste-Ernest-Désiré-Marie Gaspais)는 바티칸 시국의 외교 관계를 담당하는 국무성성(國務聖省)이 아닌 포교성에 의해서 만주국의 가톨릭 선교를 위한 바티칸의 임시 대표로 임명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년 6월 1일), 프랑스(1940년 7월 12일), 루마니아(1940년 12월 1일), 불가리아(1941년 5월 10일), 핀란드(1941년 7월 18일), 덴마크(1941년 8월),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년 8월 2일)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년 11월 30일), 타이(1941년 8월 5일),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  Měngjiāng Liánhé Zìzhì Zhèngfǔ) 또는 몽강국은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자치구 일대에 있던 나라이다. 몽강국은 당시 만주국 챠하 주와 수이유엔 주를 통치 범위로 했으며, 수도는 장자커우였다

내몽골 독립 운동가인 뎀치그돈로프(德穆楚克棟魯普, 덕왕)에 의해 1936년 5월 12일 몽골군 정부(蒙古軍政府)로써 수립되었고, 1937년 10월에 몽골연합자치정부(蒙古聯盟自治政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뒤에 1939년 9월 1일에 다시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로 개칭한다. 그러나 뎀치그돈로프(덕왕)는 일본 제국에 협력하던 인물로, 몽강국은 만주국의 영향 아래 있던 일본 괴뢰국이였다.

그 결과, 이 지역은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하였으며, 결국 덕왕은 만주국의 푸이처럼 단지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몽골군과 소련군의 합동작전인 8월의 폭풍 작전으로 멸망, 현재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지고 있다.

몽강연합자치정부는, 약간의 대포와 군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전차나 비행기는 단 한 대도 없었고 소총 등의 총류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마민족인 만큼 기병대가 많이 있었다

 





1931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8일까지 동북아 한반도(일본 식민지 조선총독부)와 만주(일본 자치 괴뢰정부 만주국)[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에서 관동군 사령부 지배 지역]지도

일본군-관동군사령부(태평양전쟁 전반기 지휘부-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 소련 해방군 점령]. 조선군사령부(태평양전쟁 후반기 지휘부-한반도 중부와 남부지역, 미국 해방군 점령]


만주국을 세운 일본 제국주의자의 꿈은 몽골제국이 금나라를 징검다리로 하여 남송을 멸망시켜 중국 전역을 차지 하였듯이 만주국을 디딤 발판으로 하여 중국 남부를 세력 기반으로 한 장제스의 중화민국을 무너뜨려 중국 전토를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기마군단의 몽골처럼 상무적이며 기동성이 뛰어난 일본도 거의 성공할 뻔 했다.


그러나 일본에게는 몽골제국이 처했던 세력 상황과는 전혀 딴판인 아주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광대한 해자(垓字)인 동시에 사통팔달 물의 초원인 태평양을 사이에 둔 거대한 해양세력이 뒤통수를 노려 보며 버티고 있었다.

비극의 발단 만주국의 설계자는 누구인가. 중국 입장에서 '외부의 적'은 일본 광동군 참모본부 장교들이었고 내부의 적은 '중국의 이완용' 정샤오쉬였다.

만주국을 사실상 통치한 이들은 일본 관동군과 일본 관료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로 전후 일본국 총리를 역임하게 되는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행정의 '덴노'였다

그렇다면 명목적으로 만주국의 최고지도자는 실질적으로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만주국 집정을 거쳐 만주국 황제를 역임하는 푸이는 허수아비이자 꼭두각시였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로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겉은 진짜나 속은 전혀 딴판'인 가게무샤였다.

푸이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일본 관동군 영관급 장교가 푸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고 사실상 '지시'했다. 이 관동군 장교는 '만주국의 다루가치'였다.

북한 김씨왕조의 3대 김정은이 8일 워싱턴에 지난 5일과 7일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특사를 통해 비핵화와 회담 의사를 전달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5월 안에 만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한반도 북한 핵위기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는 이러한 진전 상황에서 김정은은 설계자이며 집행자일까.

아니면 34세의 젊은 지도자는 단지 북한 실질적 집권 세력의 아바타나 가계무샤는 아닐까.

전자라면 실천하는데 '매우 매우' 험난하고 후자라면 '대단히 대단히' 위험하다.


1932년 3월9일 =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장춘(長春)에서 일본이 세운 괴뢰국‘만주국(滿洲國)’의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직책인 집정(執政)에 취임했다.

민국 당시 중국 최고의 시인이자 서예가로 평가받던 정샤오쉬(鄭孝胥)(1859∼1938)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정샤오쉬는 청말 철도국유화를 건의하였으며 후난포정사(湖南布政使)로 이를 강행,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직접적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이다.

그는 1924년 이후 톈진(天津)에서 푸이를 가르치는 어전교육에 종사하며 만주국 건국에 참여하였다.

정샤오쉬가 뛰어난 서예가였다는 점은 역시 글씨로 이름을 날렸던 한말의 민족 반역자 이완용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이완용은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립할 때 개화파에 속하엿다. 정동구락부의 일원으로 처음에는 친미파였다.

1895년 을미사변 후 1896년에 이루어진 아관파천에 참여하면서 친로파로 변신했다. 이완용은 독립협회에도 참여, 독립문의 글씨가 그가 쓴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는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늑약체결에 학부대신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1910년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으로서 일본이 한일합방 조약을 강제하는데 적극적으로 협조, 민족 반역자로 자신의 최종적인 역사적 위치를 자리매김했다.

이완용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완용은 이처럼 정샤오쉬의 완벽한 전철(前轍)이었다.

푸이는 수도 장춘을 신경(新京)으로 개칭했고 연호를‘대동(大同)’으로 하였다. 푸이는 다음 해인 1933년 만주국을‘만주제국’으로, 집정을‘황제’로 개칭한 뒤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양과는 달리 만주국의 실질적 권한은 일본 관동군이 장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