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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韓・韓日議員連盟が合同総会 徴用工訴訟などに憂慮 본문

-미국 언론-/일본 언론

日韓・韓日議員連盟が合同総会 徴用工訴訟などに憂慮

CIA Bear 허관(許灌) 2018. 12. 15. 20:21


14日、ソウルで開かれた日韓の議員連盟合同総会の閉会式で記念撮影する参加者(共同)

日韓韓日議員連盟合同総会14ソウル市内われ日韓パートナーシップ宣言20周年たる今年両国友好協力強化努力していくことなどをんだ共同声明採択した

 

 共同声明には韓国最高裁による徴用工訴訟での日本企業への賠償命令慰安婦問題をめぐる日韓合意づく和解やし財団解散する日本側憂慮韓国政府への適切対応要請まれた

 

また村山河野菅談話など侵略植民地支配する反省謝罪歴史認識重要性める韓国側日本側歴代政権立場継承していくことを再確認した総会では文在寅ムン・ジェイン大統領公式訪日来年時期実現するよう支援することでも合意した

 

 一方日韓議員連盟額賀福志郎会長代表団はこの韓国大統領府文大統領会談関係者によると韓国最高裁判決をめぐり日韓請求権協定適切措置るよう要請した額賀氏文氏個人請求権消滅していないいかに解決するか両政府っていきたいべた

 

[일한 , 한일 의원연맹 합동총회 징용공( 徴用工) 소송 등에 우려.

일한, 한일 의원연맹 합동총회가 12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파트너십 선언 20주년에 해당하는 올해를 계기로 양국의 우호 협력 증진에 노력할 것 등을 담은 공동 성명을 채택했다.

  

공동성명에는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소송에서 일본 기업의 배상 명령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합의 된 '화해, 치유 재단'의 해산에 대한 일본측의 깊은 우려 한국 정부에 대한 적절한 대응 요청이 포함 되었다.

  

또한 무라야마 · 고노간 담화 등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 역사 인식의 중요성을 요구하는 한국 측에 대해 일본 측은 역대 정권의 입장을 계승 것을 재확인했다 . 총회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식 방일이 내년 초에 실현하도록 지원하는 것도 합의했다.

  

한편, 한일 의원 연맹의 누카가 후쿠시로(額賀 福志郞) 회장 등 대표단은 이날 한국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 대법원 판결을 둘러싸고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청했고 누카가 후쿠시로(額賀 福志郞) 회장에게 문재인 대통령은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 어떻게 운동하는지 양국 정부에서 논의하겠다 "고 말했다.]


일제 치하에서의 징병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전시체제하에서 병력보충을 위해 한국인 청년들을 강제로 군대에 복무하도록 했다. 당초 일제는 한국인의 무장항쟁을 염려하여 한국인을 징병하지 못했으나,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 이래 침략전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대규모적인 병력보충이 필요해지자 한국인 청년에 대한 징병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일제는 지원병의 형태로 한국청년을 징병하기로 하고, 19382'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했다. 이에 한국청년들 중에는 주로 지원병제도를 성공시키기 위한 일본의 교묘한 술책과 전시하의 농촌 피폐에 못 견뎌 자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지원병 형식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곧 군대식 훈련을 시행하기 위해 나남·함흥·평양·대구 등에 육군지원자훈련소를 설치하여 강제적인 동원·훈련을 실시했다.

 

1941년에 발생한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해군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19437'해군특별지원령'을 공포, 같은 해 8월부터 시행하여 해군병지원자훈련소를 설립하고 강제적인 동원·훈련을 실시했다. 194310월에는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이 공포·시행되면서부터 '학도지원병'이라는 이름 아래 전문학교·대학 재학생들에 대한 강제징집이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8~43년에 23,681명의 지원병으로 동원되었다.

 

한편 19425월 일본 각의는 보다 강권적으로 한국인 청년들을 의무동원하기 위하여 지원병제가 아닌 징병제를 실시하고, 1944년부터 징집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시킬 것을 결의했다. 이에 총독부는 '징병제시행 준비위원회 규정'을 발표하고, 선전계발·호적정비·일어보급과 청년적령자의 연성 등의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선전공세가 강행되고 군복무에 필요한 언어적 예비훈련으로서 일어 강습회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중, 194210월 징병 적령자에 대한 일제 신고가 있게 되었다.

 

국민총력운동조선연맹의 '애국반'이 총동원되어 실시된 이 사업에서는 적령자의 96258,000여 명이 신고되었다. 아울러 일제는 징병령 시행 후 군복무에 필요한 자질의 단련을 목적으로 중등학교 이상에는 현역장교를 배속시켜 군사훈련을 하고 국민학교 졸업생은 청년훈련소, 이를 수료하지 못한 자는 청년특별훈련소에 입소시켰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19444월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한국인 청년들은 대거 전선의  총알받이로 내몰리게 되었다.

 

1944~45년 강제 징집된 한국인 청년의 수는 209,279명에 달했다. 이처럼 패전의 위기에 몰린 일제의 최후 발악 속에서 한국인 청년들은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희생을 강요당했다.국민개병제도

 - 대본영은 대부분의 기관이 참모본부 및 군령부에 속해있는 조직이었다. 대본영 회의는 천황과 참모총장, 군령부 총장, 참모 차장, 군령부 차장, 참모본부 제1부장(작전 부장), 군령부 제1부장, 육군 대신, 해군 대신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대본영 조직에는 내각총리대신과 외무 대신등 일본 정부측의 문관(文官)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본영과 일본 정부와의 의사 통일을 꾀하기 위해 대본영 정부연락회의가 설치되었다.

또한, 대본영은 전과(戰果) 홍보도 하고 있었는데, 전황의 악화에 수반해서 일본군이 계속 패주하자 진실을 전하지 않는, 이른바 대본영 발표를 하기도 한다

 태평양전쟁 때 대본영이 내각총리도 겸직했다[대본영이 내각을 장악하여 군인정치를 했다]

도조 히데키 내각총리(19411018~ 1944718. 육군대장-관동군 사령부),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총리(1944722~194547. 육군대장-조선군 사령부) 등으로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194547일 오키나와 함락 이후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내각총리 사임 이후 대본영 주도 군국주의 군인정치가 쇠퇴하고 문관 주도의 협상세력이 일본 내각을 장악해 나아가게 되었다

-한국인(조선인)의 징병제 명분은 2차대전에서 일본이 승리할때 일본정부의 조선(한국) 자치정부를 인정하겠다는 확약이었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정부가 수령한 보상금(무상2억불, 유상 상업차관3억불)



일제 치하에서의 징용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 체제에서 인력 확보를 위해 많은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841일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55일부터 조선에서 이를 실시하였다. 일본은 또한 1939년 국가총동원법에 기초하여 국민징용령을 제정하였으며, 한국인의 반발을 우려하여 지원형식의 노동력 징발을 추진하였다. 일본 본토에 조선인 징용 노무자가 파견 된 기간은 1944 9 월부터 1945 3 월까지 7 개월간이었다.

 

이외에 학교졸업자사용제한령, 종업자고입제한령, 종업자이동방지령 등을 만들어 노동자들이 마음대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바꾸지 못하도록 하였다. 1941126일에는 노무조정령을 제정하였는데, 이 법령은 일본이 필요한 노무를 확보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국가의 직접지배시책을 시행하여 징용제도로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노동력의 부족을 보충하였다. 이러한 강제 동원을 위해 마을 단위까지 총동원연맹을 만들었는데, 이 조직의 조선 연맹의 총재는 조선총독이었다. 1943년 당시 조선의 가구수는 4878,901호였고 이 총동원연맹에 소속된 사람은 4579,162명이었다. 이 조직을 통해 물자와 인적자원을 강제로 통제, 동원하였다.

 

1942년 일제는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를 창설하여 한국인 강제 동원의 초석을 다졌고, 1944년에는 국민징용령을 한국인에게도 확대 적용하여 강제적 징용을 실시하였다.

 

전쟁을 위한 노동자로 강제로 징용된 이들은 사할린 섬 등 일본의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거나 군속으로 차출되어 일본이 침략한 동남아와 남양 군도(미크로네시아) 지역의 군사 기지 건설이나 철도 공사에 동원되었다. 이중 상당수가 임금 없이 과중한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전쟁 중 또는 전후 전범으로 희생되었고, 사할린의 징용된 조선인들은 냉전의 시작으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편 전투력 약화를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 학생을 대상으로 징병을 실시하여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하였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한국 정부에 따르면 노동자·군인·군속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한국인 피해자는 1032,684명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 통계에는 후에 알려지게 된 종군 위안부 등이 포함되지 않아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은 794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도 징용보상책임문제가 한일 양국간 현안 중 하나이며,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제국 정부에서 그러한 일을 지시했다는 문서가 없음을 이유로 그러한 사실 자체를 부인해왔다.그러나 이후 보상받은 일제 징용 보상금 중 일부를 다른 목적으로 유용해 써서 논란의 여지가 되었다.강제징용 희생자들의 보상금으로 책정됐던 돈 중 229억원을 민주화 운동가들의 보상금으로 준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2차대전에 강제동원 돼 일본 여성들 모습(사진

군국주의 일본정부는 2차대전때  남녀 노소 국민 동원령을 내렸다


진주만 기습공격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에 의한 진주만 기습이 이루어졌다

일본군은 이날 총 354대의 함재기를 동원, 2차례의 파상공습을 감행했다. 제1차 공습비행대 183대는 새벽 5시 30분(이하 하와이 현지 시간)에 , 제2차 171대는 30분 뒤인 6시에 각각 일본군 함대로부터 출격했다.

당시 하와에는 임무를 수행중인 3척의 항공모함을 제외한 94척의 각종 함정이 정박 중이었고 장병들은 일요일을 맞아 대부분 외출 하였다.

또한 섬 내의 387대의 각종 군용 비행기도 비행장에 정렬되어 있었으며 조종사들 역시 대부분 외출 중이었다. 방공포대에도 일부 병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7시 30분에 미국 레이다 병이 여러 차례 대규모 비행단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 하였으나 아군의 비행기로 오인하는 바람에 방어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7시 45분에 공습을 시작한 1차 공습대는 8시 40분에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했으며 2차 공습은 8시 55분부터 시작됐다. 2차 공습과 함께 하와이에 접근해 있던 일본군의 잠수정들이 미군 함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2차에 걸친 공격은 9시 55분 모두 끝났다.

이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는 8척의 전함, 10척의 기타 대형함정, 20여척의 소형함정이 격침됐다. 비행기도 180대가 파괴됐다.

미군 사상자는 3,500명에 달했다. 이중 사망자는 2,000여 명이었다. 반면 일본 측 사망자는 100 여명으로 집계됐다.

항내와 섬내의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어 진주만은 6개월 동안 기능을 상실했다.

미국은 일본이 유럽에서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힘입어 프랑스 비시 정권을 압박,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 베트남의 해, 공군 기지를 확보하여 동남아로의 군사 진출을 도모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석유 수출 중단의 보복 조치를 가해 일본과의 전쟁을 예상하고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지만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함대에서 전폭기를 출동시켜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 함대의 핵심 전력인 항공모함들을 곧 있을 것으로 예상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 작전 운항시켜 아무런 손상 없이 보존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불과 6개월 뒤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 5일 ~ 6월 7일)에서 일본이 보다 우세한 함대 전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미국은 함대 전력을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어 일본 연합 함대를 대패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해전 뒤 정찰에 나섰던 진주만 기습의 입안자 야마모토 이소루쿠연합함대 사령관의 탑승 정찰기를 격추, 그를 사망케 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청일전쟁, 러일 전쟁의 패턴을 쫓아 기습 공격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에서는 최종 승리를 거두었으나 태평양 전쟁에서는 패배로 끝이 났다.



*쿠릴열도의 군사적 가치
쿠릴열도는 일본과 사할린 그리고 극동지역을 연결하는 교량적 교통완충지대이다
대륙 극동지역에서 일본 열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사할린과 쿠릴열도 북방 4섬을 점령해야 하고 일본이 극동과 만주지역 그리고 알래스카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쿠릴열도 북방 4섬과 사할린을 점령해야 한다
사할린과 쿠릴열도는 중국과 한반도 완충지대 만주와 극동지역을 누가 지배하는냐에 따라 그 지역의 지배자도 결정되어왔다
-쿠릴열도는 사할린, 극동과 만주지역 진출 군사적, 상업무역적 항구기지
-쿠릴열도는 사할린과 함께 아메리카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데 전초기지
쿠릴열도와 사할린은 북태평양지역으로 알래스카나 캐나다 북미등을 군사적이나 상업 무역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지역이다
-진주만기습(眞珠灣奇襲) 총지휘부 군사기지
진주만기습은 1941년 12월 7일 일본해군 기동부대가 하와이 오아후섬 진주만에 있는 미국 태평양함대기지를 기습공격한 사건이다
이때 일본은 교섭을 중단한다는 최후통첩을 미국에 하지도 않은 상태였으므로 그것은 일본의 속임수 공격이었다
미국의회는 그날 한 표를 제외한 만장일치로 대일선전포고를 가결하였다
일본은 1941년 초부터 태평양전쟁의 도화선이 된 이 기습계획을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연합함대 사령관 지휘로 수립하였으며 1941년 11월 26일 쿠릴열도 에토로후섬(擇捉島) 하토가쓰부만(單冠灣)에서 출발, 일본 해군의 항공기와 특수잠항정으로 기습공격을 하여 출항 중에 있던 항공모함을 제외한 미국 태평양 함대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일본열도의 혼란기에는 쿠릴열도는 중국의 지배세력이 지배자였고 일본열도의 통일국가 등장때는 일본정부 통치를 받아왔다 사할린, 쿠릴열도와 몽고,만주족의 친근감으로 중국내전의 유발되어왔다
한반도 북방지역은 해군력 강화와 해상권 장악으로 쿠릴열도와 사할린 상업 무역적 군사적 협력을 강화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반으로 북태평양과 알래스카. 카나다. 북미로 이어지는 무역항 개척에도 주력해야 하며 해오고 있다





소련-일본 중립 조약

소비에트 연방-일본 중립 조약 또는 일소중립조약(中立条約)은 일본 제국이 미국의 하와이를 공격할 때에 소비에트 연방이 중립을 지키자는 내용을 말한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항복한 후, 소비에트 연방이 포츠담 회담에서 일본 제국에게 선전 포고하고 88일에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함으로써 이 조약은 파기되었다.

 

소련과 일본간의 중요한 외교조약. 정책조정과 정보교환의 실패는 제2차세계대전 동안 추축국과 동맹국들사이에서 특징적인 것이었다. 1939823일 소련과 독일이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을 때,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외무장관 마쓰오카 요스케가 19413월에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아돌프 히틀러는 그에게 소련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 알려주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도쿄로의 귀국길에, 마쓰오카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1941413일 일소중립조약을 성립시켰다. 이 조약은 상대국의 영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과 각국이 제3국과 적대관계에 돌입할 경우에 중립을 보장했다. 이같은 합의는 심오한 결과를 초래했고, 19416,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일본의 중립을 가져왔던 것이다. 조약은 5년동안 유효한 것이었고, 상대방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경우, 5년 후 추가로 5년동안 자동연장될 것이었다.

 

 

1939년 이래, 일본은 소련과의 타협을 추진해 왔고, 이는 중국 정복을 위한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측이 먼저 19405, 6월에 불가침조약을 제안했고, 당시는 프랑스의 항복으로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로의 진출을 고민하던 때였고, 이를 위해서 소련의 중립이 중요했다.

 

 

일본과 소련의 협상은 19408월에 시작되었다. 협상과정에서, 소련은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고, 불가침조약 대신에 중립협정을 제안했고, 이는 서양열강과의 관계에 긴장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반면, 일본은 남방진출이라는 자신의 공공연한 야망을 드러내면서,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모델로 삼은 보다 구속력있는 조약을 제안했던 것이다. 일본측 안은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의 내용과 유사했고, 소련이 내몽고와 만주국을 포함하는 중국 북부의 3성에서 일본의 전통적 이해관계를 인정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일본의 세력권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 답례로, 일본은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이란)으로의 소련의 진출을 지지하는데 동의한다는 것이었다.

 

 

19414월의 일소중립조약은 남동 태평양으로의 일본의 진출과 미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 1941년 여름과 가을, 스탈린의 대일정책은 19416월 이전의 그의 독일에 대한 입장과 유사했다. 그는 극동의 소련군 장군들에게 만주와 몽고 국경에서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이 공격을 한다면, 소련의 태평양함대는 북쪽으로 후퇴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41년 가을 소련 침공을 심사숙고 했다. 특히 만주의 관동군 지휘부는 이를 지지했지만,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유럽열강의 일시적 쇠약이라는 권력의 공백상태를 이용하는, 남방진출을 선호했다. 일본은 노몬한사건이라는 소련과의 과거의 충돌 결과, 시베리아의 험악한 날씨 그리고 이 지역에서 석유와 고무라는 당시 일본이 매우 절실하게 필요로한 자원이 없다는 점 등을 고려,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1941년의 일소중립조약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에게 큰 도움을 제공했다. 만약 독일과 일본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협력했다면, 소련이 패배했을지도 모르고, 추축국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중립 덕분에, 소련의 극동지역은 소련의 서부전선에 1941년과 1944년 사이에 25만명의 병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조약은 또한 소련이 미국의 무기대여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일본도 이 조약을 통해 큰 이익을 보았다. 미국과의 전쟁 동안, 일본은 소련으로부터 4천만톤의 석탄, 14천만톤의 목재, 5천만톤의 철, 천만톤의 어류 그리고 시베리아와 소련 극동지방의 금을 공급받았다. 소련과의 무역이 미국과의 일본의 전쟁을 도왔던 것이다.

 

 

이후 소련은 1945,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파기했다. 19452월의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그의 서양 동맹국들에게 극동에서의 영토적 양보의 대가로,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고 2-3개월안에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동참할 것이라 약속했다. 유럽에서 승리를 거둔지 3달 후인, 194588, 소련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일본이 소련과 중립조약 체결이후 한반도 지역 조선군사령부나 만주지역 관동군 사령부 일부 병역들이  태평양지역으로 이동하였고 태평양전쟁 이후 한국인 등을 강제 징병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하였다. 이런 자료를 볼때 일본은 소련공격보다는 태평양전쟁(영국이나 프랑스등 식민지 점령 전쟁)을 몇 년간 준비했다는 의견이다


-일본 2차대전 총지휘부 대본영은 독일 히틀러 나찌즘처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으로 스탈린 일국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노선과 비슷하다

대본영(大本營): 태평양 전쟁 , 일본 천황 직속으로 최고 통수권 행사하던 지휘부(군사평의회 성격 최고 권력기구, 북한 국방위원회 성격)

대본영(大本營)은 전시(戰時) 중 또는 사변(事變) 중에 설치된 일본 제국 육군 및 해군의 최고 통수 기관이다. 일본 천황의 명령(봉칙 명령, 奉勅命令)을 대본영 명령(대본영 육군부 명령(大陸命), 대본영 해군부 명령(大海令))으로 발하는 최고 사령부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기관이다.



                                                                 쇼와 천황과의 대본영 회의 모습.(1943428일 아사히 신문 촬영)


대본영은 대부분의 기관이 참모본부 및 군령부에 속해있는 조직이었다. 대본영 회의는 천황과 참모총장, 군령부 총장, 참모 차장, 군령부 차장, 참모본부 제1부장(작전 부장), 군령부 제1부장, 육군 대신, 해군 대신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대본영 조직에는 내각총리대신과 외무 대신등 일본 정부측의 문관(文官)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본영과 일본 정부와의 의사 통일을 꾀하기 위해 대본영 정부연락회의가 설치되었다.

또한, 대본영은 전과(戰果) 홍보도 하고 있었는데, 전황의 악화에 수반해서 일본군이 계속 패주하자 진실을 전하지 않는, 이른바 대본영 발표를 하기도 한다

 태평양전쟁 때 대본영이 내각총리도 겸직했다[대본영이 내각을 장악하여 군인정치를 했다]

도조 히데키 내각총리(19411018~ 1944718. 육군대장-관동군 사령부),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총리(1944722~194547. 육군대장-조선군 사령부) 등으로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194547일 오키나와 함락 이후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내각총리 사임 이후 대본영 주도 군국주의 군인정치가 쇠퇴하고 문관 주도의 협상세력이 일본 내각을 장악해 나아가게 되었다

 


 






독도(獨島)는 머리소리함 종합 의견 판단으로  동한국해(동해),서일본해(서해)에 위치한 섬으로 울릉도 부속 섬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부르고 있는 동해(East Korea Sea)를 일본이 일본해(Sea of Japan)로 사용함으로 독도도 일본 영토 다케시마(竹島)로 국민들이 믿게 될 것이며, 일본이 일본해(Sea of Japan)를 서일본해(West Japan Sea)로 사용해야 자연스럽게 독도도 한국 영토(동한국해, East Korea Sea)로 인정할 것입니다



*롄윈강 [連雲港(연운항), Lianyungang] 이북-북해[북중국해]

북중국해를 한국 사람들은 서해(서한국해)나 황해로 부르고 있다

*롄윈강 [連雲港(연운항), Lianyungang] 이남-동해[동중국해]

동중국해를 한국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은 남해(남한국해, 남일본해)로 부르고 있다 일본 사람들도 일본 지도상 위치로 바다를 동일본해(동해), 서일본해(서해), 남일본해(남해), 북일본해(북해)로 부르고 있다

*남중국해(南中國海, South China Sea)는 태평양의 일부로 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 보르네오 섬, 필리핀으로 둘러싸인 바다를 말한다

중국은 남중국해(남해)로 부르고 있으며 베트남은 동베트남해(동해)로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