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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츠, 중앙외사공작위 판공실 주임 취임..."외교 실무 총괄" 본문

同一介中華(中國)/북경정부-中華人民共和國(中國)

양제츠, 중앙외사공작위 판공실 주임 취임..."외교 실무 총괄"

CIA Bear 허관(許灌) 2018. 6. 2. 07:45


방한 중인 양제츠(楊潔篪·67) 중국 당 정치국위원이 새로 신설한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에 취임, 외교 실무를 총괄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인민망(人民網)30일 외교부 발표를 인용해 당중앙에서 외교을 담당하는 양 정치국위원이 중앙외사공작위 판공실 주임 신분으로 한국을 방한했다고 전했다.

 

중앙외사공작위는 당 외교를 관장한 중앙외사공작영도소조를 격상한 조직으로 당중앙 대외연락부 뿐만 아니라 왕이(王毅)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이끄는 외교부를 지휘한다.

 

그간 양제츠는 외교 부총리로 유력시됐다가 당중앙에 그대로 남아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직속 하에 있는 중앙외사공작위 판공실 주임을 맡게 됐다.

 

양제츠는 작년 10월 제19차 당 대회 후 양제츠는 발표한 문장을 통해 "당 대외공작의 집중적인 통일 영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외교 면에서 미국을 중시, 그간 당 대회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통해 다층적인 체제를 만들었다.

 

우선 미국에 독자적인 연결 파이프를 가진 왕치산(王岐山) 전 정치국 상무위원을 국가부주석에 기용하고 정치국위원에 미국통 양제츠를 진입시켰다.

 

양제츠의 후임 국무위원에는 왕이 외교부장을 겸임토록 해서 실무 경험이 풍부한 3각 체제로 대미관계를 안정시키고 국제사회에서 영향력 확대를 기할 수 있는 진용을 짰다.

 

아직 공식 발표는 없지만 중앙외사공작위 위원장은 시진핑 국가주석, 부위원장 경우 왕치산 국가부주석이 맡았다고 한다.



*외사공작 위원회

'중앙 외사 공작위원회'는 중국의 외교 방향을 정하는사실상의 최종 결정 기구로 올해( 2018년 ) 3월 전국 이민대표대회(전인대) 회의 기간 중에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난5월 15일 시진핑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중앙 외사 공작위원회 주임 자격으로 1차 회의를 소집했다.

이 시점은 시진핑 국가 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 랴오닝 성 다렌 항에서 7일과 8일 양일간 회담을 가진 지 일주 뒤였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일 ( 미국 시간) 트위터를 통해 북미 정상회담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다고 공표한 지 사흘 후 였다. 

다롄 북중 정상회담은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급사로 김정은이 권좌에 오른 뒤 2018년 3월 말( 3월 25일~28일) 중국을 처음으로 방문하고 3월 26일 베이징에서 첫 북 중 정상회담을 가진 뒤 불과 1 개월 열 하루만에 이루어진 김정은과 시진핑 간의 두 번째 북중 정상회담이었다.

따라서 북미 정상회담과 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졌을것으로 추정되나 중국 공식 언론 매체는 일체 이에 관해 언급하지 않앗다.

'중앙 외사공작 위원회'는 새로 창설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비공식 기구인당중앙 외사 영도 소조를 확대 강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인대 기간에설치된 사실에 미루어 이 기구는 당과 정부에 같은 이름으로 설치된 것으로 짐작된다.

군사 부문의 최고 , 최종 의사 결정기구인 중앙 군사 위원회가 동일한 인적 구성과 조직 체걔인 동시에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당 중앙군사위와 국가 중앙 군사위로 당정에 모두 설치된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전인대 기간 홍콩 영자지 사우스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중국 공산당이 '외사 영도 소조'와 '당 중앙 대외연락부' 그리고 국무원 상무부의 당 조직을 통합하여 외교 정책 방향을 다루는 강력한 단일 조직을 만든다고 보도했다. 의회 격인 전인대 기간 중에 설치한다고해도 기본적으로 당이 주도 하여 만든 당 조직임을 분명히 했다.

전인대에 총리 선출과 감찰위 주임 선출 결과가 보도 되었으나 시진핑이 맡는다고 앞서 중화권 언론들이 보도한 주임과 위원 선임 명단이 중국 공식 언론 매체가 보도하지않은 것은 이 조직이 당과 정부기관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잇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 공산당의 당 우위 원칙과 비밀주의 관행이 여전히 견지되고 있기에 말끔하게 정리 보도되지 않고 산발적으로 그 구조와 역할 그리고 인적 구성 내용이 뜬금뜬금 공개되어왔다.

올해 3월 당 중앙 외사 공작위원회의 설립과 그 역할에 관한 보도가 중화권 언론을 통해 무성하게 보도되었으나 그 인적 구성이 공식적으로 공개된 것은 5월 15일 첫 회의가 열린 다음날 보도를 통해서 였다.

일단 정부 내에서의 외사공작 위우원회의 위상은 올해 전인대에서 신설된 국가 감찰위원회와 더불어 국무원과 별개의 독립적인 별도의 기구이다.

감찰 위원회는 당 중앙기율 검사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사정 업무를담당하는 기관이나 감찰위가 공산당원과 비공산당원을 망라한 모든 공직자를 대상으로 하는 반면 기율검사위는 그 대상이 공산당원들로 한정된다.

사정 대상은 감찰위가 더 크나 위상은 기율검사위가 더 높다. 공산국가의 당 우위 원칙에 따라 기율검사위 부서기가 감찰위의 수장인 주임을 맡아 기율위가 감찰위를 지휘, 통제하는 구조다.

① 외사 공작 위는 국가 주석을 주임으로 국무원 총리를 부주임으로 하고 있어 국무원 보다 위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감찰위 수장인 주임은 양샤오두(楊曉渡) 정치국 위원 겸 기율검사위 부서기가 맡아 국무원 아래다.

공산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의사 결정은 5년 마다 열리는 당 대회가 하고 당 대회이후는 매년 1년에 한 차례씩 개최되는 당 중앙위 전체회의(중전회)가, 그 사이에는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담당하는 구조다.

중국 공산당을 대표하는 당수격인 총서기가 포함된 공산 중국의 최고 결정권을 보유한 7인 상무위원으로 구성되는 정치국 상무위의 의사 결정을 보좌하기 위한 논의 기구로 외교와 제정, 경제등 중요 분야를 다루는 중앙 영도 소조를 여러 두고 있었는데 그 중 핵심 소조가 외교와 안보를 담당하는 외사 영도 소조였었다.

외사 영도 소조 다음으로 중요 소조가 재경 영도 소조이며 군사 분야는 중앙 군사위원회가 별도로 설치 되어 있다.

당 중앙 상무위 산하 비공식 기구인 외사 영도 소조를 당 대회 때가 아닌 전인대 기간 중에 확대 개편 , 공식화한 것은 경제 외교가 날로 중시되고 관련 인원과 기구가 당과 정부에 분산되어 통합 지도와 방향 결정에 차질을 주고 잇다는 판단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 동서 냉전 시기 형식적으로나마 국무원 외교부를 지도하는 위상을 지녔던 당 중앙 대외연락부가 소련 체제 해체와 동구 공산권이 붕괴한뒤 북한 전담 기구로 축소되어 명맥을 유지해 오다 북한측으로부터 조차 홀대 당하고 있는 위상 추락도 대외 연락부의 소멸과 흡수 통합의 한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2017년11월 중국 공산당 19대 후 북한 핵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시진핑 총서기 특사 신분으로 북한을 방문한 쑹타오(宋濤) 당중앙 대외연락부장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만나지도 못하고 귀국했었다.

외사 공작 위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주임>

시진핑 당총서기 겸 국가 주석

<부주임>

리커창 정치국 상무위원 겸 총리

< 판공실 주임>

양제츠 정치국 위원 전 외교 담당 국무위원, 앞서 외교 부장과 주미 대사 역임

< 위원>

왕치산 구가 부주석, 전 정치국 상무위원 겸 기율검사위 서기, 앞서 대미통상 외교 담당

왕이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 전 외교 부장, 앞서 주일 대사 역임

5월 16일 신화망에서는 외사 공작 위원회 첫 회의를 전하면서 왕이 외교부장을 거명하지 않앗는데 그는 당시 유럽을 방문 중이엇다.

양제츠 는 앞서 5월 5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외사 공작 위원회 판공실 주임 신분으로 전화 회담을 가진 것이 보도되면서 그가 외사 공작위의 일상 행정 업무와 실무를 맡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었다.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5월 15일 회의는 왕후닝 정치국 상무위원 겸 서기처 서기와 한정 상무위원 부총리도 참석하였는데 이들의 직함에 외사 공작위 위원 호칭이 붙여지지 않았다.

신화 통신에서 "1차회의는 중앙외사공작위 위원이 출석하고 유관 부서 영도인, 중앙과 국가기관 관련 부문 책임자가 배석한 가운데"라는표현이 나온 것을 보면 정치국 확대회의 처럼 정치국 정위원 후보 위원( 정치국 회의에 참석, 의견을 말할 순는 잇으나 표결 에 참여 할 수는 없다) 외사 공작위원회의 위원 외의 다수 관련 자들이 참가한 '확대 회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1987년 1월 후야오방 총서기의총서기직 사임을 결정한 회의는 정치국 위원 외에 당 원로와 중요 실력자들이 참여한 확대회의에서 결정된 바 있다.

또한 1966년 5월 16일 문화대혁명의 강령적 문건인 마오쩌둥의 5·16 통지'를 통과시킨 정치국 회의도 정치국 위원 외의 다수 실력자들이 참석한 확대회의로 열렸다.

따라서 외사 공작위원회의 첫 회의는 확대 회이 방식으로 열려 중국 지도부가 1987년 1월의 후야오방 실각을 불러일으킨1986년 말 중국 대학가를 휩쓸었던 학조(學潮) 사태,즉 대학생 반정부 시위 사태와 문화대혁명 발동 전야의 상황처럼 대단히 심각한 사안으로 다루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왕후닝은 장쩌민 , 후진타오 그리고 시진핑으로 이어진 3대쩨 총서기 밑에서 정책 연구실을 맡아온 경력으로 인해 '3대 브레인'라는 별명을 드디에 충분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통으로 대미 외교와 전략의 틀을 설계해온 것으로 알려져 왔으며 장쩌민 미국방문 시 '미국 스타일'의 정치 제스처와 퍼포먼스를 장쩌민이 연출토록 하여 공산 중국의 선전 방식이 아닌 홍보 방식을 활용,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한정 상무 부총리는 평창동계 올림픽 때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이이러한 면면을 살펴 볼 때 외사 공작위원회의 첫 회의는 '싱가포르 북미 정상 회담'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외사 공작 위원회의 사실상 전신인 외사 영도 소조는 총서기가 조장을 맡아왔다.

외사영도 소조가 외사 공작 위원회로 확대 강화되기 전에도 소조의 수장인 조장은 시진핑 총서기였다.

그러나 최고 권력의 실세와 명목 상의 제일인자가 다를 경우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당시 외사영도 소조 조장은 장쩌민 총서기가 아닌 리펑 총리였다. 당시 최고 실권자는 '평당원' 덩샤오핑전 중앙 군사위 주석이었고 1989년 6월 천안문 유혈 진압 후 총서기에 선출되고 같은 해 11월 군사위 주석 직도 인계를 받은 장쩌민은 여전히 리펑에 실권 면에서 밀린 처지였다.

당시 한중 수교의 최종 결단은 덩샤오핑이 내렸으나 한국 노태우 정부의 노 대통령과 대중 수교 핵심 라인과의 협상실무 최고 책임자는 당시 외사 영도 소조 조장 리펑 총리였던 것이다.

실권자와 명목 지도자가 다른 이원체제일 경우 중앙 영도 소조는 당의 최고위 의사 결정기구인 정치국을 압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뵤적인 예가 문화 대혁명기의 '문화혁명 소조'다.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은 류샤오치 당 부주석 겸 국가 주석과 가까운 실권파 펑전이 조장을 맡아왔던 ' 문혁 소조'를 해체하고 5월 28일에 새로운 문혁 소조를 구성했다.

이 개편된 문혁소조는 정치국 상무위에 속했으나 정치국을 패싱하여 마오쩌둥과 직결된 당시 공산 중국 권력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이자 집행 기구의 역할을 했다.

이 소조에는 훗날 4인방의 구성원인 장칭과 장춘차오가 들어 있었다.

이 문혁 소조의 조장은 마오의 비서엿던 천보다였으나 간판이었고 실세는 장칭과 장춘차오엿다.

기존의 외사영도 소조의조장을 맡았던 시진핑은 개편 강화한 외사 공작위의 수장인 주임 직책을 맡았다.

시진핑은 19대를 계기로 마오와 덩과 같은'지존'의 존재로 부상한 사실을 감안할 때 외사 공작위의 핵심 실세는 왕치산 국가 부주석으로 보인다.

문혁 소조에서 기획은 장춘차오가 선전은 장칭이 주도하는 등 역할 분담을 하였는데 외사 공작위원회에서는 왕치산이 양수겹장을 하고잇는 것으로 보인다.

왕치산은 1차 회의 10일 뒤인 5월 25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르부르크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반도의 안전 보장은 중국의 핵심이익'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전례없이 강도 높은 발언이다.

이는 대만을 '분리 할 수 없는 일부분'으로 , 또 티베트를 '분리할 수 없는 세력 판도에 속한다'라는 규정에 지근 거리까지 육박한 민감한 표현이다.

시진핑 1기에서 기율검사위 서기로서시진핑의아바타로 부패 척결 살생부의 작성자이자 집행자였던 왕치산은'시황제 시대'로 접어든 시진핑 2기에서는 외교 전략에 관한한 시진핑으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았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한편 외사 공작위의 판공실 주임을맡은 양재츠가 주목된다. 그는 주미대사, 외교 부장 그리고 외교 담당 국무위원을역임하면서 줄곧 외교 로얄로드를 걸었다. 하지만 양 주임은 대ㅚ적 임팩트가 강하지 않던 것도 사실이다.

부드러운 면모를보여왓던 양은 대미 외교가 가장 심각한 상황에서 중책을 떠맡았다.

양제츠는 조지 W 대통령 초기 미 정보 정찰기와 중국 공군기 충돌사건을 주미 대사로서 잘 처리하엿으며 9.11 테러사건 이후의 중미 밀월 시대를 여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외교부장과 외교담당 국무위원을 역임하면서민주당 측 인사들과도 폭넓은 관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이란 직책은 1989년 천안문유혈 진압의 1등공시니이었으며중앙 군사위 부주석으로 군부 실세인 양상쿤 사촌 동생 양바이빙이 맡았던 군사위 비서장 직첵과 같은 역할과 기능을 외사 공작위에서 할 것으로보인다.

양상쿤-양바이빙 형제는 덩샤오핑의배경과 인사 권한과 감독과 행정 실무를 확고하게 장악하엿기에1992년 10월 덩샤오핑의 결단으로 군부에서 밀려날때까지 '양가장'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 파워를 행사햇었다.

왕치산과 양제츠의 외사 공작위콤비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