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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 항일연군 통합과 제88독립 저격여단 본문
만주국(滿國, 1932년 3월 1일-1945년 8월 18일)[당시 지도]
1935년 2월 15일 중국 동북지역의 무장역량이 항일연군(抗日聯軍)으로 통합되었음이 선언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이 영도한 동북 지역(만주)의 무장세력으로 북한의 전 최고 지도자 김일성(金日成)이 참여한 것으로 인해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1931년 만주사변(9.18 사변) 후 중국 공산당은 인민들에게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항일 유격대와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의용군이 포함된 동북 인민혁명군을 조직했다. 이 항일연군은 가장 병력이 많았을 때의수는 5만 5,000명에 달했다고 중국 기록은 주장하고 있다.
‘1군’부터 ‘7군’까지 편제되었으며 양징위(楊靖宇), 왕더타이(王德泰), 자오상즈(趙尙志), 저우바오중(周保中), 샤윈제(夏雲傑), 그리고 리쉐푸(李學福)이 각각 군장(軍長), 즉 군사령관을 맡았다.
김일성은 초기에 최현(崔賢)과 함께 왕더타이 휘하의 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하였으며 1940년 사실상의 최고 사령관인 양징위가 일본군에 사살됐을 때는 그의 휘하에 있었다.
양징위 전사 뒤에도 김일성은 파르티잔 활동을 전개하다가 최현, 최용건과 김책 등과 함께 소련으로 건너갔다.
김일성은 이 시기를 '고난의행군'으로 지칭햇으며 그의 아들 김정일은 1990년대 말 수십 만 명이 굶어 죽은 대기근 시기를 ' ( 제2의) 고난의 행군'으로 명명했다.
현재 현재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은은 김일성의 손자다. 장성택 처형을 전후한 2013년 말부터 한동안 북한 지도부 2인자로 부상하기도 했던 최룡해는 최현의 아들이다. 그는 이후 일종의 숙청인 '혁명화 조치' 대상이 되기도 햇으나 최근 복권되어 지도부 일원으로 재기용됐다.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 등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입니다. 중국에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는 조선족이 약192만명에서 약 200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위구르족(후이족=회족, 신장),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입니다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었습니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합니다
조선족이 만주국에서도 조선족 자치정부로 참여하여 상류층으로 생활했습니다
동북3성 다수민족 한족,만주족과 소수민족 조선족, 거란족, 몽골족 자치정부
제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는 소련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한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의 1개이다
제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제88독립 저격여단은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이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은 동 여단 제 1 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의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와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의 제88독립 저격여단 사실은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이 부대를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의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는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의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에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 남은 자들도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활동의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의 편성은 동북 항일연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의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에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에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제88독립저격여단의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은 소련의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을 받은 적군의 계급을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의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부지휘 관직에 붉은 군대(소련군)의 장교가 임명 되었다. 병사는 적군의 군복을 착용했다.
1944 년 4 월 현재의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중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과 - 스 메르시
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제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제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제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각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각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년 9 월 ~ 1943 년 7 월 현재)은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정,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양.
제 88 여단의 병사는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그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의 주보중 1940 년 ~ 1943 년 사이에 총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제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제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은 1945년 10월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령 제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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