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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계의 중진 김종필 전 국무총리 별세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한국 정계의 중진 김종필 전 국무총리 별세

CIA Bear 허관(許灌) 2018. 6. 24. 18:34


한국 정계의 중진으로 일본과 한국이 1965년,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김종필 전 총리가 별세했습니다. 향년 92세였습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육군 출신으로,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정보기관의 수장을 거쳐 정계에 들어가 요직을 두루 역임했습니다.

일본 정계와도 긴밀한 연관이 있는 지일파의 한 사람으로 1962년, 당시 오히라 외상과 국교정상화 협상 결과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 규모를 결정한 이른바 '김, 오히라 메모'가 작성돼, 1965년 국교정상화로 이어졌습니다.

그후, 한일의원연맹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한국 국내에서도,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김'의 한 사람으로 정당을 이끄는 등, 정계의 중진으로 활약했습니다.


김종필 전 총리 별세에 대한 일본 정계의 반응

김종필 전 총리가 별세한 것과 관련해 일본의 정계에서도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아베 일본 수상은 "갑작스러운 부고에 깊은 슬픔을 감추기 어렵다"며, "김종필 전 총리는 일한 국교정상화에 직접 관여했으며, 오늘날의 일한관계의 초석을 다졌으며, 그후의 일한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공적을 남겼다"면서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습니다.

또, 김종필 전 총리와 오랫동안 교류해온 나카소네 전 수상은 "한국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중책을 맡았으며, 일한 양국의 우호와 발전을 위해서도 크게 진력했다. 국가 정치의 중추적 존재로 대외 협상 등을 맡아온 만큼, 경험과 깊은 견식을 갖추고 있었다."면서 "오랜 친구를 잃는 것은 참으로 슬프며, 그 우정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마음으로부터 명복을 빈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일본의 연립여당 공명당의 야마구치 대표는 기자들에게 "저도 여러번 만난 적이 있는데, 일본을 잘 이해하는 분이었다"며 "어려운 시대에도 일한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 공적에 감사하며, 마음으로부터 명복을 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선인들이 어렵게 이룩한 공적을 이어가 일한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 국제사회를 위해 공헌해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지금의 북조선 문제에 대해서도 이처럼 일한이 연대해 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극동과 동아시아  중국

"자유민주 일본정부[입헌군주국]와 한국정부[민주공화국], 몽골정부[독립 주권 공화국], 타이완(중화민국) 정부[민주공화국] 그리고 자유민주 성향 권위주의정부 러시아 푸틴정부[민주연방 법치국가]. 인민민주주의 독재의 사회주의국가 사회정부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김일성 김정일 세습군정 자주노선 사회주의 국가 사회정부  북한" 


保守政治崩壊の象徴 金鍾泌・元韓国首相死去 黒田勝弘・ソウル駐在客員論説委員

韓国の現代政治において保守本流と目されてきた金鍾泌(キム・ジョンピル)の死は前大統領、朴槿恵(パク・クネ)の没落と合わせ、韓国政治における保守崩壊と左翼全盛という現状を象徴している。「金鍾泌・朴槿恵の退場」は保守健在時代の終焉を意味し、文在寅(ムン・ジェイン)政権の登場で顕在化している「右から左への転換」という政治的潮流の大きな変化を物語るものだ。

 1960年代以降、韓国現代史は長期強権政治の下で近代化と高度発展を実現した朴正煕政権(61~79年)を高く評価する保守勢力と、それを独裁政治として反対した「民主化勢力」を自称する左翼勢力の激しいせめぎ合いだった。

 朴正煕の死から40年。娘の朴槿恵は文在寅・左翼政権下で投獄され、長く朴正煕の片腕であり保守本流だったはずの金鍾泌も、左翼全盛に何らなすすべなく世を去った。

 韓国の保守勢力は経済発展、対北安保強化、日米韓協力…など「朴正煕時代の遺産」を求心点に勢力を維持してきたが、今やその遺産を食いつぶしてしまった。現政権下で南北融和ムードが広がる中、保守派は新たな求心点が見つからないまま混迷は深まるばかりだ。

金鍾泌の人生は、朴正煕の死(79年)の前後で分かれる。61年、30代半ばの陸軍中佐として朴正煕の「軍事革命」に加わり、軍事政権の中枢で国家造りに取り組んだ。朴正煕の一大政治決断だった65年の日韓国交正常化では、日本の経済支援額が記された「金・大平メモ」で知られる舞台裏交渉の立役者になった。初代・中央情報部(KCIA)部長、首相などを歴任し朴正煕の後継者と目された。

 朴正煕が側近による暗殺事件で亡くなった後、野党・反政府勢力による民主化の嵐が吹き荒れ、金鍾泌は新しい保守党を結成し対抗した。この時、朴槿恵との間で対立感情が生まれる。時流に合わせ政治的生き残りを目指す金鍾泌に対し、朴槿恵は「父への背信」として不信を抱いた。

 後日、表面的には和解の場面もあったが、朴槿恵の金鍾泌に対する不信感は残り続けた。筆者は2人と個別に会った際、それぞれに「保守勢力のために仲直りしてはどうですか?」と聞いたことがあるが、いずれも苦笑いをするだけだった。

 彼は後に朴槿恵について「頑固で人の意見を聞かない」と批判している。2007年の大統領選予備選では朴槿恵の党内ライバルだった李明博(イ・ミョンバク)の方を支持した。

 

 朴槿恵の不信を買ったが、政治家としてはしたたかだった。1997年の大統領選では朴正煕の最大の“政敵”だった金大中(キム・デジュン)を支持して当選させ、首相になっている。しかしその時、かねての持論である権力分散のため議院内閣制への転換という改憲の約束を金大中から取り付けながら、約束は守られなかった。

 巷間、その老練さが魅力で「一度、大統領をやらせてみたい男」といわれ続けたが、結果的にはナンバー2的な存在に終わった。朴正煕亡き後、今まで自ら先頭に立って保守をまとめきれなかったことが、現在の保守混迷につながっているかもしれない。=敬称略(ソウル駐在客員論説委員 黒田勝弘)


                                                  大平正芳外相(右)と会談する韓国の金鍾泌中央情報部長=1962年、東京都内




운정(雲正)은 구름이 바르게 뜬 있는 화창한 날씨 즉 양지[陽地]를 생각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대통령이나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기본권보장,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1단계 자본주의 민주주의 혁명 추진(경제 기반으로 정치)

2단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기반 구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