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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미봉남정책 본문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중화민국처럼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일성은 다 이긴 한국전쟁을 미군의 참전으로 패배하여 침략에 실패한 이후, 통미봉남 정책을 추진해 왔다. 자체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개발로 미국과 직접 대화해 남조선을 고립시키고, 미국과 북미 평화협정을 맺어 주한미군을 철수시킨 뒤 한반도를 적화통일 한다는 전략이다.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베트남, 남베트남, 미국 사이에 평화협정인 파리 협정 (1973년)을 체결해, 남베트남의 미군이 철수했으며, 미군 철수 직후 바로 북베트남이 재침공 하여, 남베트남이 멸망하고 공산화 되었다. 김일성은 이 파리협정을 북미간에 체결하기를 원했다
1단계: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중지와 한미군사훈련 중지 그리고 아시아 태평양지역 미국측 군사연합 균열
2단계:북미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 북일수교
3단계:주한미군 철수와 중국 중심의 동북아지역 안보다자협정 체결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 등 친중국 좌파정부 수립(자국식 사회주의 정부 수립)[러시아 미사일 방어체계 S-400 구축]
4단계:중국측 중심의 아시아 태평양 군사안보기구 구성[중러 중심의 상하이 협력 기구]
동아시아 국가 중국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스탈린부대[민주사회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론 그룹(소련 공산당 내부 노동당 그룹)][사회주의 헌법]
북한 제4공화국 헌법은 스탈린주의 노선 주체사상과 선군사상 김일성 김정일 헌법이다 김정은은 스탈린주의자 모택동, 김일성 교조주의를 버리고 북미수교 세력 등소평처럼 수정주의자가 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다
1982년 등소평 헌법은 전체주의 권력이 집중한 마오(모택동) 시대의 반성에서 3선 금지(중임제 도입)를 했다 모택동을 독재자라고 표현하지만 등소평을 독재자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 중국에서는 국가주석 임기 3선 금지와 민주주의를 도입한 등소평부터 국제적으로 마오 무장단체를 제거했다
알바니아 호자는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들 등소평 전 주석 등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3개의 세계' 이론을 비난했다. 이듬해 중국은 알바니아와 맺고 있던 모든 경제관계 및 군사적 유대를 단절했다
덩샤오핑도 역시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함께 차우셰스쿠의 처형 비디오를 봤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처형 비디오를 보면서 한참만에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라고 물었고 공산당의 한 간부가 "반동분자들을 때려잡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라고 대답한다. 결국, 덩샤오핑은 자신이 직접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중국은 최고의 자본주의 시장으로 바뀌면서 경제성장을 하게 되었다.
스탈린주의자인 노동당 총서기이며 알바니아인민공화국 건국자 엔베르 호자
엔베르 호자(알바니아어: Enver Hoxha, 1908년 10월 16일 ~ 1985년 4월 11일)는 알바니아의 정치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에 맞서 알바니아 민족해방전선을 이끌었으며, 종전 뒤 사망(1985년)때까지 공산주의 정당인 알바니아 노동당의 총서기로 알바니아를 다스렸다. 그는 엄격한 스탈린주의에 의거하여 공산주의 국가 가운데도 유례없는 폐쇄 정치를 실시하여, 서방은 물론 구 소련·유고슬라비아·중국 등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차례차례 관계가 끊겨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소련에 대해서는 체코슬로바키아 · 헝가리 등지에 군을 투입하는 것을 보면서 국토 곳곳과 해안가에 전투벙커와 방공호를 설치하고 전 국민에게 무기를 지급하는 등, 적대시 하였다. 1967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무신론 국가를 선언하기도 하였다.
엔베르 호자는 중국 모택동이나 북한 김일성처럼 구소련에서는 그를 완고한 자국 사회주의(알바니아식 사회주의) 노선 교조주의자(敎條主義者), 개인숭배의 찬미자라 하여 압력을 가하였으나, 약소국인 알바니아의 자력갱생(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위한 영웅으로서 온 국민의 경애를 받았다.
[반대자들에게 즉결처분을 자행한 극단적인 스탈린주의자이다. 이슬람교도인 옷감 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호자는 코르처의 프랑스인 학교에서 공부했고 티라나의 미국인 기술학교에서도 공부했다고 한다. 1930년 그는 국비장학생으로 프랑스 몽펠리에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934~36년 브뤼셀 주재 알바니아 총영사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면서 그곳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936년 알바니아로 돌아온 그는 코르처에 있는 모교 교사가 되었다.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한 1939년 그는 새로 결성된 알바니아 파시스트당에 가입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뒤, 티라나에 담배 소매점을 열었는데 이 가게는 공산당 세포조직의 본부가 되었다.
1941년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한 뒤 그는 알바니아 공산당(나중에 노동당 또는 노동자당이라고 부름) 창립에 이바지했고, 1943년 공산당 레지스탕스 부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944~54년 알바니아 총리를 지냈고, 1946~53년 외무장관을 겸했다. 1954년부터 노동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알바니아는 유고슬라비아의 보호를 받는 공산공화국이 되었다. 이런 보호에 분개한 호자는 스탈린과 티토 사이의 적개심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결별했다. 1959년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알바니아를 방문할 때만 해도 알바니아는 소련에 충성을 보였지만 1960년부터 알바니아와 소련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해 1961년 12월에는 모든 접촉이 중단되었다. 반면에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과 알바니아의 유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호자가 생각하기에 중국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 것은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를 자극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동맹관계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977년 7월 7일 호자는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들 등소평 전 주석 등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3개의 세계' 이론을 비난했다. 이듬해 중국은 알바니아와 맺고 있던 모든 경제관계 및 군사적 유대를 단절했다]
알바니아식 사회주의 독재자 엔베르 호자 전대통령 기념관 모습
*호자주의는 1970년대 말 마오쩌둥주의 운동에서 독립한 반수정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종으로, 1978년 중국공산당과 알바니아 노동당 사이의 이념 대립의 산물이였다.
호자주의는 이오시프 스탈린, 그리고 스탈린 지배 아래 있는 소련이라는 국가에 엄격하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며, 다른 공산주의 단체를 모두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로 강렬히 비판한다.
미국,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를 비판하며, 엔베르 호자는 마지막 세개의 국가를 사회제국주의로 규정하여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규탄하며 그에 대한 대응으로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 탈퇴하였다. 호자주의는 국가에 사회주의를 안착시키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쓰는 것에 대한 권리를 강조하며, 국가 조건에 따라 독재도 합리화될 수 있다 하였다. 한편 호자는 티토주의를 "반마르크주의"라 평가하기도 하였다.
호자는 알바니아가 1956년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수하는 유일한 국가라 선언하였다. 알바니아인들은 마오쩌둥주의 신봉자 사이에서 그 이론을 널리 설파하였는데, 주로 라틴 아메리카 (인민해방군과 에콰도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 브라질 공산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1991년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이 몰락하며, 호자주의 정당들은 결합하여 1994년 국제 회의에 참여하여 통합과 갈등을 출판하였다
1991년 2월 20일 알바니아의 수도인 티라나에서 스탈린주의자인 노동당 총서기이며 알바니아인민공화국 건국자 엔베르 호자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시위대 모습
알바니아의 자유화 물결은 동유럽 다른 국가들보다 1년 늦게 찾아왔다. 엔베르 호자 집권 이후 벌인 폭압 정책은 알바니아를 동유럽 공산권 중에서도 매우 낙후된 경제 상황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1989년 당시 알바니아의 1인당 GDP는 겨우 723달러에 불과해 동유럽에서 가장 낮았다. 특히 호자의 무신론 국가 선포 등의 극단적인 종교 탄압 정책과 외국인과의 대화 및 외국 문물 수입 금지 등의 고립 정책은 알바니아를 매우 억압적이면서 동시에 유럽에서도 가장 크게 뒤떨어진 국가로 만들었다. 이같은 기조는 1985년 호자 사망 이후 집권한 라미즈 알리아(Ramiz Alia)에 의해 조금은 완화되었으나 기본적인 방향은 그대로였다. 이 같은 억압 및 고립 정책은 1989년 다른 동구권 공산 정권, 심지어 루마니아의 공산 정권까지 무너지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같은 해 슈코더르(Shkodra)에서 이 같은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긴 했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며 1990년에 들어서도 알리아를 위시한 집권 노동당은 다른 국가들의 개혁 상황에서도 기존 스탈린주의 체제를 유지 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다른 국가들의 소식이 음성적으로 알바니아 국내에 유통되기 시작했고 이 같은 동구권의 개방 소식을 알고 있는 국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져갔다.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해를 넘긴지 얼마 안된 1991년 2월 20일 수도 티라나에서 시민들이 엔베르 호자의 동상을 무너뜨리면서 절정에 달했다.
결국 알바니아 노동당(노동당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도 굴복하여 같은 해 3월 1923년 이후 68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 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결과 공산당이 승리하긴 하였으나 일당 독재를 유지할 수는 없었으며 이듬해 5월 다시 실시된 총선에서 공산당이 패배 하면서 동구 공산권 중에서도 최악의 폐쇄 정책을 펼친 알바니아 노동당은 정권을 잃고 만다. 이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 달리 알바니아는 극도의 사회 불안 및 궁핍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는 1997년 피라미드 사기 사건으로 국민의 대부분이 재산을 잃은 것에 대해 분노하여 일으킨 반정부 폭동으로 절정에 달했고 공산당에서 이름이 바뀐 사회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이후 알바니아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으며 현재는 견실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알바니아의 공산주의 붕괴는 1990년 12월 11일 시작된 소련 외 유럽 지역에서 일어난 마지막 공산주의 붕괴 사건이다. 알바니아 공산주의 정권의 붕괴는 1990년 초 알바니아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1990년 12월 초 알바니아의 수도인 티라나에서 학생 시위가 열리면서 확산되기 시작되었다. 1990년 12월 11일 알바니아 노동당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다당제를 허용하였으며, 다음 날 최대 야당인 알바니아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1991년 3월 열린 제헌의회 선거에서 노동당은 여전히 제1당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총파업과 도심의 저항 운동으로 비공산당을 포함한 '안정된 정부'가 수립되었다. 1992년 알바니아 총선에서는 경제 붕괴와 사회 불안으로 노동당이 대부분의 의석을 잃었으며 살리 베리샤가 이끄는 알바니아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알바니아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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