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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靑 사형 언도...‘증오 구현의 走狗’ 본문

同一介中華(中國)/북경정부-中華人民共和國(中國)

江靑 사형 언도...‘증오 구현의 走狗’

CIA Bear 허관(許灌) 2018. 1. 28. 20:03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 기간 4인방의 실질적 리더는 장춘차오였고 재판 기간의 독보적 주역은 장칭이었다.

3명의 남자는 마오쩌둥이라는 탈바가지가 떼어지자 '머리 잘린 삼손' 모양의 몰골이었다. 재판정에서 그들은 맥이 탁 풀인 모습인데다 추하고 비루했다.

장춘차오는 '살아있는 시체'였고, '문화대혁명의 붓'으로 불린 야오위안은 '판결문의 영혼 없는 대필자'였으며 '문혁의 얼굴마담' 왕훙원은 '비굴한 악역'으로 충실한 조연 및 엑스트라 역할을 해 재판정 방청객의 조소를 사며 즐거움을 제공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처인 장칭은 확신범의 자세를 전혀 굽히지 않았다.

"나는 마오 주석의 사냥개(走狗)였다. 마오 주석이 짖으라 하면 짖었고 물으라 하면 물었다."

이런 입장과 당당한 자세로 "4인방 4인방하는데 진정한 4인방은 오직 나뿐이다."

자신의 주장을 재판정에서 입증하려는, 비웃음과 헛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진술을 쏟아냈다.

장칭이 장춘차오와 함께 사형 언도를 받은 것은 재판정에서 여배우 출신 강칭이 혼신의 주역 연기를 펼친 것에 대한 재판부가 노력을 인정한 것일게다.

뮤지컬 형식의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주인공 올리버 트위스트를 지독하고 잔인하게 괴롭히는 악의 화신 여자 조역이 자신이 사모하는 사람에 대한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장칭은 사형집행이 면제된 가운데 병원에서 연금 상태로 치료받던 중에 목을 매 자살했다. 신병에 우울증이 겹친 것으로 보인다.

유서를 남겼는데 그 하나는 덩샤오핑에 대한 증오를 흠뿍 담았다. '증오 구현 4인방'의 진정한 리더로서 스스로 자리매김한 것에 걸맞았다.

다른 하나는 마오에 대한 지극한 연모의 글이었다. 그 글에서 증오의 모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한 남자에 대한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너무나도 선명한 야누스의 모습으로 장칭은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1981년= 중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4인방의 일원이며 마오쩌둥(毛澤東)의 미망인인 장칭(江靑)에 사형을 선고했다.

문화대혁명 기간(1966~1976)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던 장칭은 마오쩌둥이 사망한 뒤 1개월 뒤인 1976년 10월 6일 4인방 동료들과 함께 체포됐다.

연금 상태에 놓여 있던 이들에 대한 재판은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장악한지 만 2년을 한 달 남긴 시점인 1980년 11월 20일 시작됐다.

장칭 등 4인방을 포함 10명의 피고인에 대한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칭, 장춘차오 사형(집행연기 2년) 정치권리 박탈 종신

야오원위안 징역 20년 정치권리 박탈 5년

왕훙원 무기 징역 정치권리 박탈 종신

천보다 징역 18년 정치권리 박탈 5년

황융성 징역 18년 정치권리 박탈 6년

우파셴 징역 17년 정치권리 박탈 6년

리쭤펑 징역 17년 정치권리 박탈 5년

츄쭤후이 징역 16년 정치권리 박탈 5년

장텅자오 징역 18년 정치권리박탈 5년


장칭은 후에 감형되어 사형을 면했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이던 1991년 5월 14일 목을 매어 자살했다. 이때 나이는 77세였다. 

장춘차오도 감형되어 사형을 면했다. 장칭 자살 1년 뒤인 1992년 왕훙원이 간암으로 병사했으며 장춘차오는 2005년 4월에 죽었고 이해 12월 마지막으로 야오원위안이 동료의 뒤를 따랐다.



 4인방 체포



1976년 = 문화대혁명의 하수인이었던 4인방이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9월9일)한 지 채1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체포되며 실각했다. 이를 ‘베이징(北京) 10월 정변’으로 부른다.

마오의 처 장칭(江靑)은 스스로 "마오의 주구(走狗)"狗로 자처했고 왕훙원(王洪文)은 '마오의 후계자'로 한때나마 간주 되었으며 장춘차오(장춘교)는'문혁 집행의 총설계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야오원위안(姚文元)은 '문혁의 붓'으로 불렸다

화궈펑(華國鋒)과 예젠잉(葉劍英)은 이날 밤 긴급 정치국 회의를 가진 뒤 중앙정치국은 당과 인민의 의지를 집행하여 장칭(江靑), 장춘차오(張春橋), 왕훙원(王洪文), 야오원위안(姚文元) 및 베이징(北京)에 있는 이들 4인방의 핵심 분자들에 대한 격리 심사를 실행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이날 오후 중공중앙(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판공청은 화궈펑, 예젠잉과 왕둥싱(汪東興)의 지시에 따라 당일 20시에 중난하이(中南海) 회인당(懷仁堂)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개최한다고 통지했다.

통지는 상무위 회의에서 다룰 의제를

1. 마오쩌둥 선집 제 5권의 검토,

2. 마오쩌둥 기념당의 설계안과 중난하이에 있는 마오쩌둥 거주지의 보존 방안

이라고 밝혔다.

통지는 이와 함께 마오쩌둥의 원고 교정을 위해 야오원위안이 배석하도록 지시했다.

4인방 중 왕훙원과 장춘차오는 정치국 상무위원이었으나 장칭과 야오원위안은 정치국 위원이었다. 따라서 장칭과 야오원위안은 정치국 상무위에 참석할 수 없었다.

야오는 이와 같은 유인책에 따라 왕과 장과 함께 체포되었고 장칭은 자신의 숙소에서 별도로 연행되었다.

오후 8시께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이 잇달아 회의장에 도착하자 화궈펑은 이들 각자에게 중공중앙이 그들을 격리, 조사하기로 결정했다는 문건을 낭독하고 체포하였다.

장칭의 체포는 오후 8시 30분께 그녀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장칭의 체포 지시는 왕둥싱이 직접 내렸으며 체포 작전을 지휘한 인물은 당시 중앙판공청 부주임 겸 경위국장인 장야오츠(張耀祠)였다. 그는 사복차림으로, 여성 2 명을 포함한 호위관은 군복을 입은 채로 6일 오후 8시 30분께 중난하이(中南海)의 완즈랑(萬字廊) 301호의 장칭의 자택으로 가 소파에 앉아 실크 잠옷 차림으로 비디오를 보고 있던 그녀를 연행했다.

이 때 예젠잉의 경호원 출신인 자오칭(曹淸)이 장칭의 체포 작전의 요원으로 참여하였는데 그는 31년이 지난 2007년 10월 중앙 경위국장에 임명되었다. 중앙 경위국장은 중국 최고 지도자의 경호를 책임지는 직책이다.

이어 오후 9시 화궈펑과 예젠잉은 회인당에서 겅바오(耿飇)에게 부대를 이끌고 신화사, 중앙라디오 사업국(中央廣播事業局 ), 중앙TV(中央廣播電台), 베이징TV(北京電視台) 등 언론기관을 접수하도록 지시했다. 사인방은 당시 매스컴 부분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

현 총서기 겸 국가 주석 시진핑은 1979년 중앙 군사위 핵심 요직인 군사위 비서장을 맡고 있던 겅바오 밑에서 비서로 일한 바 있다..

오후 10시 중공중앙은 베이징에서 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4인방 분쇄 후의 당과 국가의 중대문제’를 토론하였다.

당시 출석한 정치국 위원 및 후보위원은 다음과 같다: 화궈펑, 예젠잉, 리센녠(李先念), 왕둥싱, 천시롄(陳錫聯), 쑤전화(蘇振華), 지덩쿠이(紀登奎), 우더(吳德), 니즈푸(倪志福), 천융구이(陳永貴), 우구이센(吳桂賢).

화궈펑과 예젠잉은 회의에서 4인방 분쇄의 경과와 그 의의를 밝히는 연설을 했으며 정치국 위원과 후보위원은 4인방 반당집단에 대한 처리에 대해 동의했다.

회의는 이어 베이징에 있지 않은 정치국 위원인 웨이궈칭(韋國淸), 쉬스요우(許世友), 리덩성(李德生), 사이푸딩(賽福鼎) 등에게도 보고를 했으며 이들은 중공중앙 정치국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선고법정의 4인방. 왼쪽부터 야오원위안, 장칭, 장춘차오, 왕훙원


1980년 =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이 린뱌오(林彪)와 장칭(江靑) 등 사인방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재판과정은 TV로 생중계되었다.


◆장칭의 모습. 그녀는 나는 마오 주석의 '주구(走狗)'였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창춘차오의 모습. 4인방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그는 아예 생을 포기한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