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雩南 이승만 전대통령 한자어 '跆拳道와 智仁勇' 본문

대한민국 전직대통령 자료

雩南 이승만 전대통령 한자어 '跆拳道와 智仁勇'

CIA bear 허관(許灌) 2017. 10. 6. 08:03

 

                                                                          청남대 대통령 기념관 자료

雩南 이승만(李承晩) 前대통령 한자어(서예) "跆拳道와 智仁勇"입니다

 

"태권도(跆拳道). 우남(雩南)"

우리나라 전통 무예를 바탕으로 한 운동

태권도는 고대 국가의 제천 행사에서 신체 단련의 하나로 행하던 무예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 시대에 들어와서는 택견, 수박(手搏)으로 불리며 무인들에 의하여 행해졌으며 고구려의 선배나 신라의 화랑은 대표적인 무술연마 집단이다. 당시 택견의 모습은 기록이나 고분 벽화 또는 불상 등에서 살펴볼 수 있으니 중국 퉁화 지안에 있는 무용총 벽화와 경주의 석굴암 금강역사상 및 분황사 석탑 인왕상 등이 대표적이다. 백제 역시 대좌평 지적이 일본에 초청되어 상박을 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전하는 것을 볼 때 택견 또는 수박을 널리 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려 때에도 택견은 무예로 널리 행하여졌다. 《고려사》에는 이의민이 수박희를 잘하여 승진되었다는 것과 여러 왕들이 수박희를 관람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보면 당시의 태권도가 이미 스포츠의 하나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택견이 무예뿐 아니라 스포츠로도 성행하였다.《태종실록》에 병조 의홍부에서 사람을 뽑을 때 수박희를 통해 이긴 자를 선발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공식적인 수박희 대회를 갖고 임금과 신하들이 관람을 하였다고도 한다. 또 임진왜란 때에는 수박희로 적과 싸우기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정조 임금 때에는 택견의 무예를 포함한 무예 교과서인 《무예도보통지》를 펴내어 태권도의 귀중한 사료로 남아 있다. <BR><BR>일제 강점기 때에는 광복군 등 항일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신체 단련으로 태권도를 하였으며, 해방 뒤 1961년 9월 16일 대한 태권도 협회가 창설되었다. 1963년 전주에서 개최된 44회 전국 체전에 공식 종목으로 참가하였으며, 이후 국가의 지원과 학교에서 체육의 하나로 널리 장려되며 1970년대에 들어서는 국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 태권도 보급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1973년에 서울에서 제1회 세계 태권도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듬해에는 아시아 태권도 선수권 대회도 개최하여 태권도의 국제화를 이루어냈다.

올림픽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 치러졌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우리나라는 종주국답게 그간 치러진 올림픽에서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5개를 획득하였다.

 

"지인용(智仁勇). 위해병용사일동(爲海兵勇士一同). 이승만(李承晩)"

지혜와 어짊과 용기를 아울러 이르는 말

 

天下之達道 五에 所以行之者 三이니 曰君臣也와 父子也와 夫婦也와 昆弟也와 朋友之交也五者는 天下之達道也요 智仁勇三者는 天下之達德也라 所以行之者는 一也니이다.

천하의 達道(공통된)가 다섯인데 이것을 행하는 것은 셋이니, 군신과 부자와 부부와 형제와 벗의 사귐 다섯 가지는 천하의 達道이고, 智 仁 勇 셋은 천하의 達德이니 행하는 바는 하나입니다.(*昆弟=兄弟)

達道者는 天下古今所共由之路니 卽書所謂五典이요 孟子所謂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 是也라 智는 所以知此也요 仁은 所以體此也요 勇은 所以强此也니 謂之達德者는 天下古今所同得之理也라 一은 則誠而已矣라 達道는 雖人所共由나 然이나 無是三德이면 則無以行之오 達德은 雖人所同得이나 然이나 一有不誠이면 則人欲이 間之하야 而德非其德矣니라 程子曰 所謂誠者는 止是誠實此三者니 三者之外에 更別無誠이니라

達道라는 것은 천하 고금에 함께 행하여야 할 길이니, 즉 書經에 이른바 五典이요, 孟子에 이른바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 이것이다. 智는 이것(達道)을 아는 것이요 仁은 이것을 체행하는 것이고 勇은 이것을 힘쓰는 것이다. 達德(달덕)이라 하는 것은 천하 고금에 함께 얻은 바의 이치이다. 달덕(達德)은 곧 誠일 뿐이다. 達道(달도)는 비록 사람이 함께 행하는 것이나 그러나 이 三德(삼덕)이 없으면 행할 수가 없고, 達德은 비록 사람이 함께 얻어진 바이나 그러나 하나라도 성실함이 없으면 사람 욕심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덕이 그 덕이 아니다. 程子(정자) 말씀하시길 “이른바 誠(성)이라는 것은 다만 이 세 가지를 성실히 하는 것이니, 세 가지 외에는 다시 다른 誠(성)이 없다.”[중용]

*오륜(五倫)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함)

부자유친(父子有親,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함)

부부유별(夫婦有別,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함)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함)

붕우유신(朋友有信,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함)

*삼덕(三德):智.仁.勇

 

子曰,“智者不惑,仁者不憂,勇者不懼。”:論語,第九篇二十九章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혜로운 자는 의혹하지 않고, 어진 자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어 근심하지 아니하고, 용맹스러운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논어 제9편 29장]

 

*智仁勇과 知仁勇

智仁勇, 知仁勇의 當否를 논하기는 어렵습니다.

부질없는 논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五常을‘仁義禮智信’이라 표기하고,‘仁義禮知信’이라 하지 않습니다.

五常에 따라 지어진 서울의 四大門(五方)의 이름이

東門 ‘興仁之門’, 西門 ‘敦義門’, 南門 ‘崇禮門’, 北門 ‘弘智門’, 中央 ‘普信閣’ 입니다.

五方色도 東(仁=靑), 西(義=白), 南(禮=朱), 北(智=玄), 中央(信=黃)이며,

五行 또한 東=木, 西=金, 南=火, 北=水, 中央=土 입니다.

그러므로 ‘智’는 北이고 水이며,

仁者樂山, 智者樂水이라 하므로 ‘智仁勇’이어야 할 것입니다.[물론 ‘知者樂水’로 된 문헌도 간혹 있습니다.]

知(. 지식-지식인,珥)는 Guide Ear라면 智(슬기. 지혜-책사, 전략가나 교수,目)는 Bird's Eye입니다[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한국 해병대

여수 10.19 사건의 결과에 따라 상륙전을 담당할 부대의 필요성을 검토하여 미국 해병대를 모방하여 1949년 4월 15일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에 위치한 덕산 비행장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다.

그들을 지휘할 최초의 해병 사령관은 신현준 중령, 해병 참모장은 김성은 통제부 교육부장이었다. 초기 핵심 장교들은 대부분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육군의 장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부대원은 해군 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병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8월 1일 해군에서 장교와 부사관을 증원받고, 해군 병 14기 중에서 440명을 해병대 병 2기로 특별모집받아‚ 2개 대대 규모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8월 15일 광복절 4주년 기념식에서 사열하면서 최초로 모습을 대외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신영철과 김행래에 의해 작사·작곡하고 이병걸이 편곡한 〈나가자 해병대〉가 해병참모장 김성은 대령을 위원장으로 한 군가제정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해병대의 군가로 제정되었다.(추후 "해병대가"로 변경되었다.)

8월 29일, 진주에 전개한 김성은의 대대가 4개월간 지리산 조선인민유격대를 토벌하고 같은 해, 12월 29일 제주도에 상륙하여 옮겨가 이듬해 1950년 7월까지 약 약 7개월 동안 제주읍과 모슬포를 근거지로 하고 공비를 토벌하였다

1950년 8월 17일 통영 상륙 작전에서 해병대 1개 중대는 조선인민군 대대 병력을 격파하고 통영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1950년 8월 23일 최초의 퓰리처상 여성 수상자인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 마거릿 히긴스 기자는 이 성과를 보도하는 《귀신잡는 해병》("Ghost-catching Marines")이라는 기사에서 "한국 해병대는 악마조차도 잡을 정도였다."("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고 썼고, 그 이후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같은해 9월 1일에 제1연대가 창설되었다. 제1연대는 9월 15일 미국 제1해병사단와 같이 미국 제10(X)군단에 편성되어 인천항에 상륙하였다. 9월 27일 서울로 진격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다음날 9월 28일 조선인민해방군의 잔여병력을 소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수도를 되찾았다. 이후, 전세가 기울어 국제 연합군이 혜산진까지 진격하자, 대한민국 해병대는 각각 원산과 함흥 지역에 상륙하여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10월 25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증원되어 한반도로 진입해오자, 각 지역에 있던 해병대는 일제히 철수하여 진해로 집결하였다. 12월 20일, 제5독립대대를 창설하였다.

1951년 6월 4일, 미국 제5해병연대가 도솔산을 탈환하는데 실패하자, 제1연대는 그들과 임무를 교대하여 중국 인민해방군 제5군단 예하 제12사단과 제32사단를 상대로 6월 20일까지 전투를 지속하여 2개 사단을 격파하였다. 제1연대는 "무적 해병" 칭호와 8월 19일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 8월 30일에는 김일성 고지에서 제3군단 예하 제1사단를 상대로 부터 9월 4일까지 4일간 공방전을 벌여 제924번 "김일성" 고지와 제1026번 "모택동" 고지를 탈환하였다. 전후, 미국 측에서는 이 전투를 단장의 능선 전투로 명명하였다.

1952년 제1연대와 제5독립대대가 합병하여 제1전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1953년 한국 전쟁이 휴전되자, 해병대는 조직의 정비를 시작하였다. 제1전투단은 경기도 파주군 아동면으로 이동하고 1954년 2월 1일 제1여단으로 증편한 뒤, 3월 14일 미국으로 귀환하는 미국 제1해병사단에게서 책임진술지역(TAOR)의 작전지휘권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955년 1월 제1상륙사단으로 증편되고, 3월 26일 사령부가 경상남도 부산시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남산 기슭로 옮겨졌다.

1959년 2월 26일, 제1사단은 제1연대를 차출하여 제1임시여단으로 증편한 뒤, 김포 반도의 경비를 맡기고 3월 12일 포항시로 이동하였다.

 

한국은 한반도 지역 동남서(東南西)쪽 바다로 된 국가로 해병대가 필요한 국가이다

해병대는 해군과 공군, 육군 혼성부대 모델로 미국 항공모함 제2전선부대로 지위와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해병대(海兵隊, Marine Corps)은 해상과 육상의 모두에서 전투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 주로 상륙 작전을 수행하는 군사 조직 또는 병과이다

상륙작전을 비롯한 전략적 기동이 중요한 현대전에서 그 역할이 증대되었다. 원칙적으로는 해군에 소속되어 상륙작전을 수행하는 군대이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해군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 해병대는 행정상으로만 해군에 소속된 독립적인 부대이다. 반면 영국 해군의 경우, 해병대가 해군에 소속되어 있다. 예외적으로 프랑스 해병대나 이탈리아 해병대의 라군나리 연대와 같이 해군이 아닌 육군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雩南(우남, 남녘의 무지개.해갈이)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27,538 $(29위) 선진국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건국, 한국전쟁과 폐허극복, 빈곤해방과 자유화, 개방화 그리고 민주화  제6공화국 등장으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법과 제도 도입으로 통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6공화국 대통령은 민족과 국가, 국민들을 위해서 대통령 개인의 욕심과 가족주의를 극복하고 통일과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선진국 법률 도입과 제도 개혁이 필요합니다[시행령으로는 제도개혁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좋은 선진국 제도 도입은 관련 법률이 있어야 합니다  일본이나 미국, 서유럽 국가들이 아직도 우리나라보다는 인권 관련법이나 행정부 제도, 검찰이나 사법부 독립성 관련법(제도), 선거제도(상원의원이나 비례대표 의원등 주민 직접선출)이 앞선 나라입니다.]

민주화는 좌파성향 국가사회주의와 구분 돼야 합니다 북한 김일성주의(북한 제2공화국 헌법)나 선군정치(북한 제3공화국 헌법)는 서구사회 생존권(개인의 사회권)보다는 극렬 민족주의 운동이나 군국주의, 우리식 사회주의(자립경제) 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입니다. 남북협력도 좋지만 경제적 삶의 개선을 바라는 북한 평민층 입장보다는  핵보유국이나 자주노선으로 권력유지만 급급하는 북한 상류층(특권층) 입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북한 핵무기나 핵탄두 미사일 포기정책은 남북협상이 아닌 북한 권력변경(노동당 내부 권력이동 수평적 권력교체나 반김정은 세력 권력장악 수직적 권력교체)으로 가능합니다

북한 민주화는 북한 평민층이 북한 권력주체로 변혁하는 것이며 권력의 소외계층이 아닙니다

북한 평민층이 북한 권력의 주도세력이 돼야 핵무기 포기나 남북한 통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북한은 국영 자본체제로 북한 주민은 승용차와 고급주택을 소유하고 반미이론과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특권층과 개인의 능력에 따라 유상교육 대학 출신 교육특혜 세대 상류층, 무상 의무교육 중등교육(중학교) 출신 평민층(근로계층), 무상 의무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영양실조나 식량난 취약계층 빈곤층으로 구분돼 있습니다 북한 주민 다수는 평민층과 빈곤층입니다 북한 빈곤층은 국제기구 식량원조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북한이 식량난과 기아상태 빈곤국에서 해방이 되기 위해서는 국영 자본체제(국가사회주의)에서 개혁개방민간경제로 전환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