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일본인 납치 실행범 신광수 북한 공식행사에 등장 본문
마지막 비전향 장기수 신광수(辛光洙.70)씨가 14년 10개월간의 긴 감옥생활을 마감하고1999년 12월 31일 오전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하는 모습(사진)
일본 당국이 자국인 납치사건 실행범으로 지목해 국제수배령을 내린 북한 공작원 신광수(87)가 최근 평양에서 열린 공식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라디오 프레스(RP)가 26일 보도했다.
공산권 전문 통신인 RP에 따르면 신광수는 북한 중앙TV가 지난 23일 방영한 관변 통일운동단체 결성 70주년을 기념하는 중앙보고대회를 촬영한 뉴스 영상에 등장했다.
신광수가 북한 공개 석상에 얼굴을 내민 것은 2008년 9월 이래 7년10개월 만이다.
그는 행사장 일반석에 나란히 앉은 송환 비전향 장기수 출신들 속에 끼어있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북한에 신광수의 신병을 인도하라고 요구해왔지만, 북한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신광수는 지무라 야스시(地村保志) 부부, 하라 다다아키(原敕晁)의 납치를 실행하는 것은 물론 요코다 메구미(橫田めぐみ)를 북한에 강제로 끌고 갔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그는 한국에 납파됐다가 간첩죄로 붙잡혀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말 가석방으로 출소했고 이듬해 남북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비전향장기수의 일원으로 북한에 송환됐다.
북한에 건너간 신광수는 영웅 대접을 받아왔다고 한다.
신광수는 일본에서 출생, 지난 48년 귀국한뒤 50년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의용군으로 입대한뒤 월북했다.
이후 북한 과학원 기계공업분야 연구원으로 재직, 정보요원으로 특채됐고 일본에서 활동하다 85년 서울로 잠입했다가 간첩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지난 88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신광수의 대일, 대남공작지도부는 통일혁명당(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광수의 아내와 딸, 손자, 손녀들은 현재 평양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광수 공작원의 활동 공백기 생활
신광수(辛光洙)는 북한 공작원이다. 신광수씨는 지촌보지(地村保志地村,지무라 야스시 60)와 그의 아내 부귀혜(富貴恵,후키에 60)씨,원칙조(原敕晁,하라 다다아키 79)씨 납치 한 혐의가 있다며 일본 수사 당국이 국제 수배중인 용의자이다.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일본 각지를 전전 공작활동을 진행하고 있던 신광수 용의자는 군마현에 잠복하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에 신광수 용의자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납치 문제를 조사하고 있다 "특정 실종자문제조사회 (特定失踪者問題調査会)'가 7 월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군마가 북한의 공작 활동 "중계"로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떠오른다
신광수 용의자 일본 태생과 한국전쟁에 참여
신광수 씨는 1985 년 2월 한국에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된 후 서울 지방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판결문에 따르면, 1929년 시즈오카 현(静岡県)에서 태어난 신광수 용의자는 전후 한반도에 건너와 한국 전쟁에 참가. 71 년 북한 공작원으로 선발된다.
1973년 7월 신광수 용의자는 이시카와 현(石川県)에서 밀입국. 공작원으로 고향인 일본 땅을 다시 밟았다. 그 다음은 일본 각지에서 협력자를 획득하고 공작활동을 진행한다. 그리고 북한 본국에서 납치 지령을 받고 80년 6월에 원칙조(原敕晁,하라 다다아키 79)씨를 북한으로 납북시켰다.
신광수 씨가 군마현(群馬県)에 잠복 한 것은 원칙조(原敕晁,하라 다다아키 79)씨 납치 사건에서 2년 후인 82년 11월. 처음에는 다카사키(高崎) 시내에 있는 파칭코 점의 직원으로 위장 취업. 매장 2층에 있는 직원 숙소로 거처를 정했다.
83년 5월에 북한으로 돌아 군마(群馬)에서 떨어진 그해 11월 다시 일본에 동일한 파칭코 점에 다시 취직을 하고, 이듬해에는 마에바(前橋)시에 있는 파칭코 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있던 시대에 신광수 용의자가 무엇을하고 있었는지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잠복 처를 군마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군마(群馬)의 움직임은 불명(不明)
조사위원회는 7월 24일 신광수 씨가 잠복하고 있던 타카 사키(高崎)시와 마에바시(前橋)시의 파칭코 점을 찾았다. 현재 마에바시시의 파칭코 점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타카 사키시의 파칭코 점은 슈퍼마켓이 있었다.
신광수 용의자는 군마현(群馬県)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한국에서의 판결문에서는 다른 많은 지역에있는 동안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오사카에 체류하던 시절에는 원칙조(原敕晁,하라 다다아키 79)씨 납치를 향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쿄에 있던 때 재일 조선인 협력자의 모금 활동을 진행하고, 한국의 군사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공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 쓰여져 있다.
하지만 군마현(群馬県)에 잠복하고 있던 시대에 신광수 용의자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잠복 처를 군마현(群馬県)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태평양측(太平洋側)과 니가타(新潟)를 잇는 '오마치(大町) 루트'의 존재
조사위원회 아라키 가즈히로(荒木和博) 대표는 "마에바와 고기의 파칭코 점에 신광수가 있었다는데, 아무 의미도 없는 리가 없다.이 근처에 뭔가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지적 군마현 지역 적인 특징에 주목한다.
군마현(群馬県)은 니가타 현(新潟県)에 접하고 있다. 니가타 현(新潟県)에서 요코타 메구미(横田 50, 납치 당시 13세)씨 외 5명의 정부 공인 납치 피해자가 북한에 끌려 있으며, 한때 북한과 일본을 연결하던 화객선(貨客船) '만경봉 호 '의 기항지가 있었다.
또한 특정 실종자를 놓고 니이가타(新潟県)와 태평양에 접한 '오마치(大町) 루트 '라고 불리는 경로의 존재가 지적되고 있다. 1976년 2월에 사이타마 현 가와구치시의 자택을 나온 채로 실종 후지타 스스무(藤田進 59, 실종 당시 19세) 씨 정보 , 2004년 조사위원회에 제보가 있었다.
정보를 제공 한 남성은 "후지타 씨의 감금 시설이었다 치바현에서 차로 (니가타 현) 이토까지 날랐다"고 말했다 한다. 치바현에서 도쿄도, 사이타마 현, 야마나시 현, 나가노 현을 거쳐 니가타 현에 빠지는 '오마치(大町) 루트 "에서 특정 실종자의 행방 불명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군마현이 '오마치(大町) 루트 '과는 다른, 태평양 측과 동해를 연결하는 루트가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아라키 대표는 "오마치 (大町) 루트와 다른 니가타에 빠지는 루트로 군마현에 납치이나 공작 활동의 거점이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보고 있다.
신광수 씨는 현재 86 세. 한국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후 사면으로 풀려 2000 년에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2008년 9월 북한 건국 60 주년 기념 열병식을 알리는 북한 중앙 방송 뉴스 영상에 비쳐있는 것이 확인되고 나서 다음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다.
최후의 비전향 장기수 신광수씨 출소
마지막 비전향 장기수 신광수(辛光洙.70)씨가 14년 10개월간의 긴 감옥생활을 마감하고1999년 12월 31일 오전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이날 다른 일반 사범 58명과 함께 출소한 신씨는 지난 특사때 먼저 풀려난 다른 장기수들과 광주.전남 양심수 후원회 및 각 재야단체 회원, 학생등 50여명의 환영을 받으며 상기된 표정으로 교도소 문을 나섰다.
신씨는 출소 소감을 묻는 질문에 "염려해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남은 여생을 남한에서 지내면서 북송되기만을 기다릴 것"이라고 짧게 말했다.
또 지난 8.15특사때 풀려나 이날 환영나온 이공순(66)씨는 "더이상 이땅에 장기수가 없게 됐다는게 무척 반가운일이며 이번 출소가 남북통일의 실마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간단한 환영식을 마친 신씨는 광주 5.18묘역을 들러 참배한후 서울로 떠났다.
신씨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만남의 집'에서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생활할 계획이다.
한편 신씨는 일본에서 출생, 지난 48년 귀국한뒤 50년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의용군으로 입대한뒤 월북했다.
이후 북한 과학원 기계공업분야 연구원으로 재직, 정보요원으로 특채됐고 일본에서 활동하다 85년 서울로 잠입했다가 간첩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지난 88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신씨의 아내와 딸, 손자, 손녀들은 현재 평양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北에 일본인 공작원 다수 존재"
과거 북한의 대남 공작기관인 노동당 '통일전선부'에 일본인이 다수 근무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산케이신문이 19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과거 북한에 납치됐다가 귀국한 지무라 야스시(地村保志.57)와 후키에(富貴惠.57) 부부의 증언을 통해 이런 사실이 드러났다고 전했다.
신문에 의하면 후키에씨는 경찰 조사에서 1997년∼1998년쯤 공작원 전용병원인 평양 근교의 '915병원'에 입원했을 때 여성 환자로부터 "통일전선부에 일본인 공작원이 많이 있으며, 무역관계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지무라 부부는 자신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던 북한 아주머니로부터도 "통일전선부에 일본인 부부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공작 활동을 하고 있으며, 외국도 왕래한다고 들었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1970년 일본 민항기인 '요도호'를 납치해 북한에 망명한 범인들은 북한에 건너온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무역회사를 운영했으며, 1980년대 후반까지 일본에 잠입하거나 동남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을 드나들며 활동했다.
1988년 5월 요도호 납치범과 처가 일본에서 체포된 이후 일본인 공작원의 해외 활동이 급감했다.
일본 경찰은 요도호 납치범과 별도로 일본인이 공작원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요도호 납치범들이 자신들과 사상이 같은 일본인을 모집해 북한으로 끌어들인 사례도 있는 만큼 이들 일본인이 통일전선부에 배치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요도호 납치범 외에 일본인 납북자가 공작원으로 이용된 사례가 직접 확인된 적은 없었다.
<통일혁명당> 중앙위원회는 1985년 7월 27일 당의 명칭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칭했고 일본에서는 1986년 8월 8일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조직 확대 개편 개명했다
한국(남한)에서는 1990년 1월 1일 전후 반미청년회(반미여성회)를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민혁당)으로 조직 확대 개편 개명했다
반제청년동맹(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새세대)
좌파 민족주의 책자 탐독과 모임결성->NLPDR과 김일성 책자 학습(주사파 모임)-->북한정부 대남공작부 의식화 기능기(뇌 세뇌기)로 검증과 간첩교육-->납치,월북-->반미무장단체 결성과 북한정부 대남 간첩활동.
북한정부 대남공작부는 뇌 세뇌기(의식화 기능기)로 남한 사람 납치대상을 "반미단체 간부(김일성주의자=주사파)"로 규정해오고 있다
북한정부 대남공작부가 반미단체 간부(김일성주의자=주사파)를 뇌 세뇌기로 검증을 할때 북한 김정은 정부를 찬양하고 김일성을 신격화, 우상화 할 수준이 돼야 납치, 월북 대상자로 선발한다[남한정부 내부 김일성주의 단체-통일혁명당과 민족민주혁명당(반미단체)]
-1990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설치(반미청년회 등 반미단체 통합)
반미청년회 구국의 소리(김일성주의)에서 한국민족민주전선 새세대(김정일주의=주체사상)로 지하신문 변경
1986년에는 강철서신 등에 '미제의 스파이 박헌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영환등 강철서신(반제동맹)-구국의 소리(반미청년회)-새세대(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족민주혁명당)
-1991년 12월 김정일 노동당 군사부위원장이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김정일 북한 권력 장악)
1984년 5월 18일 김정일 직접 쓴 논설《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1984) 발표했다
-김정일 우상화 벽보 사진이 북한 곳곳에 등장
-1992년 11월 미국 민주당 클린턴 후보 대통령 당선과 민주당 정부 등장
-1993년 3월 김영삼정부 출범과 핵무기 보유설, 북폭등장 그리고 남한 한민전 서울대표부 1995년 해방 50주년 남북통일 결정적 시기 공식화 (반미자주정부와 전쟁론)
-1994년 남북정상회담 추진과 분열[김대중-찬성파, 반미단체-반대파]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김일성 사망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등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김 주석이 “심장혈관과 동 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 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1998년 12월 17일 해군이 남해에서 격침시킨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에 상륙
남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 상륙한 사실은 민혁당 연루자인 하영옥 심재춘씨가 국정원에서 <1998년 12월 17일 북한 공작원 배모씨를 여수해안으로 안내했다>고 진술했고 지난 1999년 3월 17일 건져 올린 반잠수정에서 이 공작원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민혁당과 관련된 무장간첩사건
이선실 여간첩 사건(이선실은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출신)
1995년 10월 24일 부여침투 무장간첩 김동식 사건
1996년 9월 18일 강릉무장간첩 사건
1997년 10월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울산지역)
1998년 12월 17일 여수근해 반잠수함 격침사건
-반미 전쟁파 민혁당 와해와 김대중,김정일 남북정상회담(이선실 사망)
1998년 9월 5일 북한 제3공화국수립-세습제 좌익군정 헌법(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명목상 국가원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미야모도 아키라(宮本明)[이경우]는 누구인가?
일본인 납치에 사용한 북한 공작원 각종 기구(사진)
미야모도 아키라(宮本明)는 누구인가? 그는 제주출신으로서 본명은 이경우(李京雨)였다. 4·3폭동에 가담한 뒤 1949년경 일본으로 달아났다. 1964년에 처 양희현(66세)을 비롯한 가족을 북송시켰다. 그는 1970년경 일본에서 고즈미 겐조란 이름으로 활동한 북한 거물간첩 朴모에게 포섭되었다. 1985년 3월 일본경찰은 고즈미 겐조의 하부선(下部線)인 김석두(金錫斗)를 간첩혐의로 체포, 조사를 하다가 미야모도 아키라라는 또 다른 하선이 있는 것을 알아내고 그 아지트를 수색, 암호 문 등을 적발했다. 이때부터 안기부 대공수사 부서에서도 미야모도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미야모도는 제주도에 고명윤(高明允)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위장 등재된 사실도 밝혀냈다. 여권위조의 과정을 추적하던 중 북한간첩 조직이 드러났기 때문에 안기부에선 바레인의 리전시 인터 컨티넨탈 호텔에 묵고 있던 신이찌와 마유미를 북한 공작원으로 단정하였던 것이다.
제3장 음독-신문-자백(김현희 자서전)
위조여권 뒤에 북한 간첩
11월29일에 KAL858기가 미얀마 상공에서 실종된 이후 안기부의 전 조직에는 비상이 걸렸다. 안기부는 처음부터 공중폭파로 보고 정보망을 가동시켰다. 북한은 서울올림픽을 좌시하 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그 무렵에 여러 번 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수사의 정석대로 아부다비에서 내린 대한항공기 탑승자들을 체크하 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두 일본인의 이름이 떠올랐다. 바레인 입국카드에는 신이찌, 마유미라고 적혀 있었다. 안기부에서는 이 표기방법에 주의하게 되었다. 일본인이라면 하찌야 신이 찌와 하찌야 마유미라고 성명을 다 쓰든지, 하찌야란 성만 쓰는 게 정상인 데 이름만 쓴 것은 도무지 일본인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기부는 바레인과 아부다비의 공관 및 대한항공 지점과 협조하여 두 사람의 여권기재 사항을 파악하여 일본경찰에 조회하였다. 하찌야 신이찌란 사람은 일본에 살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마유미의 여권번호를 알아보니 그 번호의 사람은 남자였다. 즉 두 여권이 모두 위조로 밝혀진 것이다. 하찌야 신이찌는 71세의 실존인물 이었다. 그의 신원사항이 그대로 위조 여권에 적힌 이유를 일본경찰이 조사하였다. 진짜 신이찌는 지난 83년 8월에 미야모도 아키라(65)라는 사람으로부터 전자사업 확장을 위해 동남아 여행을 같이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신이찌는 여권발급에 필요한 서류와 인감을 미야모도에게 제공했다. 미야모도는 신이찌의 여권발급을 대행하면서 그 기재사항을 북한에 제공, 金勝一의 위조여권에 써먹은 것이었다.
미야모도 아키라(宮本明)는 누구인가? 그의 이름은 譴?한국과 일본의 공안기관 사이에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제주출신으로서 본명은 이경우(李京雨)였다. 4·3폭동에 가담한 뒤 1949년경 일본으로 달아났다. 1964년에 처 양희현(66세)을 비롯한 가족을 북송시켰다. 그는 1970년경 일본에서 고즈미 겐조란 이름으로 활동한 북한 거물간첩 朴모에게 포섭되었다. 1985년 3월 일본경찰은 고즈미 겐조의 하부선(下部線)인 김석두(金錫斗)를 간첩혐의로 체포, 조사를 하다가 미야모도 아키라라는 또 다른 하선이 있는 것을 알아내고 그 아지트를 수색, 암호 문 등을 적발했다. 이때부터 안기부 대공수사 부서에서도 미야모도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미야모도는 제주도에 고명윤(高明允)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위장 등재된 사실도 밝혀냈다. 여권위조의 과정을 추적하던 중 북한간첩 조직이 드러났기 때문에 안기부에선 바레인의 리전시 인터 컨티넨탈 호텔에 묵고 있던 신이찌와 마유미를 북한 공작원으로 단정하였던 것이다.
독약 앰플을 준비하고
11월 30일 밤 9시30분 바레인주재 한국대사관 서기관 金정기씨(44)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인터컨티넨탈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신이찌가 받았다. 『방문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김현희(金賢姬)의 진술에 의하면 김승일(金勝一), 즉 신이찌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는 척하고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하더란 것이다. 金정기 서기관이 들어오자 金勝一은 『내 딸인데 여행중에 피곤해서 누워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金賢姬는 일어나 간단한 목례를 한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金勝一과 金정기 서기관은 영어와 한자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金서기관은 『선생들이 타고 온 대한항공 858기가 버마 부근에서 추락하여 승객전원이 사망하였는데. 그 일 때문에 찾아왔다』고 했다. 金서기관이 돌아가자 金勝一은 『항공기폭파 수사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니 내일 일찍 떠나면 된다. 걱정 말고 자자』고 했다. 金勝一은 천하태평인지 그냥 옆 침대에서 곯아떨어져 코를 골면서 자더라고 한다. 金賢姬는 뜬 눈막?밤을 새우면서 金勝一이 세상 모르고 자는 것이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金勝一은 나이 70을 넘은 데다가 극도로 쇠약해 있었다. 시체를 한국으로 가져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 한 결과 키 1백71cm 에 몸무게는 45.95k에 불과했다. 위 수술과 담낭수술을 받은 흔적이 있었다. 특히 위의 거의 전부가 수술로 절제된 것이었다. 이 베테랑 공작원은 약을 갖고 다니며. 그의 마지막 봉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에 金賢姬가 화장을 하고 옷을 다 입어도 金勝一이 일어나지 않아 깨웠다. 金勝一은 독약 앰플을 든 말보로 담배 한갑을 金賢姬에게 주면서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라고 했다. 두 사람은 오전7시경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타고 30분 뒤 바레인공항에 도착했다. 로마행 항공권으로 출국수속을 마치고 출국신고 카드를 작성하여 출국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그 곳에서 대기중이던 일본대사관 직원(40세 가량)이 여권과 출국신고 카드의 제시를 요구했다. 두 사람은 이에 응하고 대합실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일본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바레인주재 일본대사관 직원이다. 하찌야 마유미의 여권이 위조로 판명되었으며 두 사람은 이대로 계속 여행할 수 없다. 일본대사관에 가서 일본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레인 경찰관 5명이 나타나 두 사람을 에워쌌다. 두 사람은 의자에 앉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모든게 끝장이다
오전9시쯤 김승일(金勝一)은 김현희(金賢姬)에게 귀속 말로 말했다고 한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 일본에 보내어지면 우리는 이래저래 고생 하다가 죽게 된다. 차라리 여기서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 金賢姬는 『그러면 신호해 주세요』라고 한 뒤 자살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金賢姬는 나중에 이때의 심정을 회고하기를 『김일성 수령님의 지시에 따라 혁명가로 값지게 죽는다고 생각하려 했으나 자꾸만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바레인 경찰관이 휴대품 검사와 몸수색을 받으라고 하면서 공안사무실로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 검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대합실 의자로 돌아와 경찰관의 감시를 받으면서 의자에 나란히 앉아 대기하였다. 金勝一은 세븐스타 담배 한 개비를 건네주었다. 金賢姬는 자신이 흡연자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독약 앰플을 깨물기가 쉽겠다고 판단하여 가방에서 가스라이터를 꺼내 이 담배 개비에 불을 붙여 물었다. 金勝一은 『나는 살만큼 살았기 때문에 괜찮지만 젊은 마유미상한테는 정말 미안하다』고 속삭이듯 말했다. 金賢姬는 이것이 자살지시인 줄 알고 행동에 옮기려는 순간 경찰관이 가방을 달라고 했다. 金賢姬는 재빨리 가방 속에서 독약 앰플이 든 말보로 담배갑을 꺼낸 뒤 가방만을 건네주었다.
그 옆에 서서 이를 지켜보던 아람 핫산이란 경찰관은 『그 담배도 달라』고 했다. 김현희(金賢姬)는 독약 앰플이 든 담배 한 개비만을 꺼낸 다음 말보로 담배 갑만 건네주었다. 핫산은 다시 『그 담배 개비도 달라』고 했다. 金賢姬는 김승일(金勝一)의 눈치를 보며 함께 앰플을 깨무는 타이밍을 맞추려고 주저하고 있는데 핫산은 金賢姬가 쥐고있던 담배 개비마저 빼앗았다. 金賢姬는 반사적으로 경찰관의 손에서 담배 개비를 낚아챘다. 담배 개비가 반쯤 부러졌다. 金이 독약앰플 부분이 은닉돼 있는 담배토막을 깨무는 순간 핫산이 덮쳤다. 완전히 깨물지는 못해 유리 앰플의 끝 부분만 깨어졌다. 청산액체는 기화되면서 金賢姬의 입속으로 들어갔고 金은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이때 무릎을 다쳤다. 金賢姬가 소동을 벌이는 사이에 金勝一 은 앰플을 와작와작 깨물어 담배 개비째 삼켜버렸다. 그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박사는 뒤에 金勝一을 부검하여 기도에 들어있는 담배필터와 독약앰플 파편을 끄집어내었다. 金勝一의 뇌척수에선 6.21ppm, 폐에선 5.0ppm의 청산염류가 검출되었다.
한 수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테러리스트에게 잡히면 자살하라고 시키는 나라는 세계에서 북한뿐이다. 다른 조직에서는 잡히면 떳떳히 테러의 이유를 밝히도록 하여 선전의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데 북한에서는 金日成부자에게 누가 될까 싶어 자살을 지령하고 있는 것이다』 1983년 4월 대구시내에서 검거된 북한직파 간첩 정해권(丁海權)은 붙잡힐 때 허리춤에서 독약 앰플을 꺼내 음독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는 이 후유증으로 복역 중 사망하였다. 1984년 9월 대구에서 음식점 종업원 2명을 살해한 남파무장 간첩은 옷깃에 숨겨두었던 독약 앰플을 꺼내 자살했다. 1985년 2월에 일본인으로 위장했다가 붙들린 신광수(辛光洙)는 옷깃에 앰플을 숨겨두고 있었다. 金賢姬가 생의 미련을 갖고 있어 金勝一이 자살하는 것을 보고 뒤늦게 앰플을 깨무는 척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안기부 수사관들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먼저 앰플을 깨문 것은 金賢姬였고. 분명히 죽으려고 깨문 것인데 경찰관이 덮쳐서 생명을 구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金勝一은 아주 냉정한 프로였다. 앰플을 깨물고도 확실히 죽기 위해 헉하고 들여 마셔 파편이 식도가 아닌 기도로 들어갔던 것이다. 金賢姬는 주범 金勝一 이 일본인 할아버지처럼 보이게 하는 일종의 액서서리였다.
바레인에 자료제시
국가안전기획부의 KAL858 실종사건 수사담당 과장 ㅎ씨는 두사람이 음독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무릎을 쳤다고 한다.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음독현장에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신이찌와 마유미가 사용했다는 독약 앰플은 ㅎ과장 팀에게는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2월2일 ㅎ과장은 한 동료와 함께 바레인 행 비행기에 올랐다. 신광수(辛光洙)사건의 자료에는 안기부가 압수한 辛의 소지품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독약 앰플도 있었다. 이 자료와 함께 미야모도 아키라에 대한 수사자료도 같이 가져갔다. 두 사람이 홍콩을 경유 바레인에 도착한 것은 현지시간으로 새벽이었다. 아침에 바레인 대사관에서 정(鄭)해융 대사가 주재하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ㅎ과장은 『신이찌와 마유미가 북괴공작원이란 증거를 갖고 왔다. 이번 폭파가 저들의 소행임을 입증하면 우리가 피해당사국으로서 신병을 인수하게 된다. 이런 방향으로 일하는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대사관측에서는 바레인 당국이 이 사건 처리에 있어서 미묘한 국제관계에 관해 신경을 잔뜩 쓰고 있다고 했다. 한국 측과의 접촉은 『대사하고만 만나겠다』는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3일 아침에 ㅎ과장은 정(鄭)대사의 승용차 뒷자리에 타고 바레인 범죄 수사국 사무실로 갔다. 鄭대사는 수사실무책임자인 영국인 핸더슨씨를 만나러 들어갔다. ㅎ과장은 『핸더슨씨에게 「한국에서 전문가가 한 분 왔는데. 이 사건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만나보지 않겠느냐」고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ㅎ과장은 주차장에서 20분쯤 기다렸다.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핸더슨씨는 6∼7명의 참모들을 배석시킨 채 ㅎ과장을 맞았다. 바레인의 각 부처 장관은 왕족이 맡고 있지만 그 밑의 실무책임자는 영국인들이었다. 60대의 고참 수사관 출신인 핸더슨씨도 그렇게 고용된 영국인이었다. ㅎ과장은 가져간 자료를 일일이 제시하면서 마유미와 신이찌가 북한공작원임을 설명해 나갔다. 북한의 대남 테러전략과 역사, 붙들린 간첩들이 자살했거나 자살을 기도한 사례와 그때 사용된 도구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자신 있나?
ㅎ과장은 30여년간 대간첩수사 부문에서 일해온 사람이다. 그는 『북한의 테러에 관한 한 안기부의 대공수사전문가들이 세계 최고의 노우하우를 갖고 있다』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보이기도 했었다. ㅎ과장은 신이찌와 마유미의 여권이 국가기관에 의해 위조된 것이라고 핸더슨씨에게 주장했다. 『이 정도의 정교한 위조는 사조직의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 최신 인쇄시 설을 갖추어야 하는 등 그 뒤에 굉장한 조직과 전문인력이 있는 그런 위조 여권이다. 더구나 여기에 기재된 내용은 북괴 간첩 미야모도 아키라가 실존 인물인 하찌야 신이찌에게 만들어준 여권의 그것과 일치한다』 ㅎ과장은 『두 사람의 비행기표도 이상하다. 베오그라드에서 로마로 바로 가면 될텐데 왜 복잡한 경로를 거쳐 들어가려 하고 있는가.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아시아 남쪽을 도는 항로를 잡아야 하는데 왜 거꾸로 돌고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핸더슨씨 측에서는 ㅎ과장의 설명을 듣기만 하였다.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고 한다. 핸더슨씨는 ㅎ과장의 설명이 대충 끝나자 『신이찌가 담배 개비의 독약 앰플을 깨물고 죽었다고 보느냐』고 했다. ㅎ과장은 『청산 알약은 먹기가 힘들다』면서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한 자살도구의 변천사를 쭈욱 설명한 뒤 신이찌가 깨문 담배 개비 속 앰플의 성분과 형태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핸더슨씨는 『그렇게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ㅎ과장은 『1백30퍼센트쯤 확신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 오라』면서 핸더슨씨는 회의실 같아 보이는 방으로 ㅎ과장을 데리고 갔다. 탁자 위에는 신이찌와 마유미의 소지품들이 놓여 있었다. ㅎ과장은 마유미가 깨문 담배 개비 속 앰플을 집어들고 『바로 이것이다』고 했다. 핸더슨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다. 신병처리문제를 검토하여 상부에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핸더슨씨가 두 사람의 신병을 한국에 넘겨주는 방향으로 건의할 것이라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핸더슨씨는 헤어질 때 ㅎ과장에게 『당신이 필요한 시간에 언제든지 연락하고 오면 만나주겠다』고 했다.
기내에서 흘린 눈물의 뜻
ㅎ과장이 바레인 당국의 협조를 받아 병상에 있는 김현희(金賢姬)를 만난 것은 12월 6일이었다. ㅎ과장은 金의 그런 위장술보다는 손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관상이 한 인간의 역정과 운명을 알려주는 것처럼 손, 특히 여자의 손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을 엿보게 한다. 金의 손은 결코 평탄한 삶의 궤적을 그려온 여자의 손이 아니었다. 고운 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칠고 못생긴 손도 아니었다. 단련된 손, 그러나 여자의 부드러움이 그 굳어진 각질 밑에 숨어 있는 듯한 손이었다고 한다. 87년 12월 15일 서울로 실려오는 대한항공 특별기 안에서 金賢姬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金이 자백을 시작한 뒤 수사관이 그때 흘린 눈물의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남조선 특무들에게 혹독한 신문을 당하고 개돼지 취급을 받은 뒤 죽을 생각을 하니 끔찍해서 울었습니다. 남조선 특무는 북한간첩을 잡으면 귀와 코를 자르고 눈을 빼는 등 몹쓸 고문을 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공작원으로 뽑혀 젊은 나이에 이렇게 인생을 끝내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공작원으로 선발돼 집을 떠나는 날. 어머님께의 표정도 떠올랐습니다』 이 단계에선 아직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없었다.
안기부 수사단에선 끌고 온 金을 신문실로 데리고 와 침대에 눕혔다. 신문실은 서너 짜리 큰 방. 한쪽에 목욕시설과 변기가 있었다. 신문실에는 탁자와 딱딱한 의자, 침대, 그리고 응접용 소파가 놓여 있었다. 창이 없었다. 金이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자 한 수사관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편히 쉬도록 해. 울긴 왜 울어…』 金은 바레인 공항에서 청산가스를 조금 들여 마신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 질 때 무릎을 다쳤었다. 이 상처는 12월15일에 김포에 도착할 때까지 낫지 않았다. 여자 수사관은 이 상처의 통증을 줄여주려고 찜질을 해주었다. 金賢姬는 『찜질을 해주는데 진심에서 우러난 자연스런 행동이라 미안하기도 하고 의외로 생각했었다』고 나중에 자신의 심경을 밝혔었다. 金賢姬가 자백을 하게 된 심리적 동기 중에는 수사관들에 대한 고마움과 신뢰감도 큰 몫을 차지했던 것 같다. 金을 다루는 데 있어서 맨 처음의 고민은 자해방지 마스크를 언제 제거하느냐였다. 이 마스크는 어린이들에게 물리는 고무젖꼭지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혀를 깨물지 않게 하려면 이것을 물려 입을 벌려놓으면 된다. 숨을 쉴 수 있게끔 구멍도 뚫려 있다. 이것을 떼 내버린 뒤 金이 자해행위를 하면 한국이 온통 고문조작의 누명을 뒤집어쓸 판이었다. 수사진의 입장에서는 『목을 거는 결정』이었다고 한다. 수사단에선 金이 서울에 도착한 그날 이 마스크를 떼버렸다.
일본경찰, 김정일 측근 강해룡 납치혐의로 수배
강해룡 북한정부 前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사진)
일본 경찰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측근인 강해룡 전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을 일본인 납치 혐의로 국제수배할 방침이다.
29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일본 경시청 공안부는 1980년 6월 미야자키에서 발생한 하라 다다아키(당시 43세) 납치 사건과 관련, 북한의 공작기관인 조선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의 당시 부부장인 강해룡이 주도한 것으로 결론 내리고 다음 달 중 국외 이송 목적 탈취 등의 혐의로 체포장을 발부해 국제수배하기로 했다.
강 전 부부장은 지금까지 일본이 납치 혐의로 수배한 북한인 가운데 최고위 인사로 일본 정부는 향후 외교 경로를 통해 북한 측에 강 전 부부장의 신병인도를 요구할 방침이다.
강 전 부부장은 사건 당시 차관급인 대외정보조사부의 2인자였고, 각료급인 부장도 지낸 김 국방위원장의 측근이다. 현재 나이는 80대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일본인 납치 사건으로 국제수배된 북한 공작원 등은 11명에서 12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경시청에 따르면 강 전 부부장은 하라 납치의 실행범인 북한 공작원 신광수(82)에게 일본인 남성을 납치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신광수는 이미 일본 경찰에 의해 ‘국외 이송 목적의 약취’ 혐의로 2006년 국제수배됐다. 강 전 부부장은 북한에 입국한 신광수에게 자금을 건네 일본과 한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지시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原さん拉致 金総書記側近を国際手配へ 警視庁公安部
昭和55年の原敕晁(ただあき)さん=当時(43)=の拉致事件で、警視庁公安部が、金正日総書記の当時の側近で北朝鮮工作機関・対外情報調査部の姜海龍(カンヘリョン)元副部長について、国外移送目的略取などの容疑で逮捕状を取り、国際手配することを検討していることが29日、捜査関係者の話で分かった。姜元副部長は、金総書記らから直接指示を受け、多くの日本人拉致を仕切った人物とみられており、後に対外情報調査部長にもなっている。
北朝鮮による拉致事件では北朝鮮工作員ら計11人が国際手配されているが、姜元副部長が手配されれば最高位の高官となる。警察当局は今後、外交ルートを通じて北朝鮮側に身柄引き渡しを求める方針だ。
警察当局によると、姜元副部長は、実行犯とされる北朝鮮工作員、辛光洙(シングァンス)容疑者(82)=国外移送目的略取容疑などで平成18年に国際手配=に日本人男性を拉致するよう指示。昭和55年6月、大阪市内の中華料理店で働いていた原さんを宮崎市の海岸で工作船に乗せるなど、拉致を実行させた疑いが持たれている。
姜元副部長は、北朝鮮で辛容疑者にスパイ活動を指示するなどしたうえで日本国内に送り込み、自身も57年に貿易代表団を偽装して来日。この際に辛容疑者から拉致について直接報告を受けたとみられている。
事件をめぐっては、1985(昭和60)年に辛容疑者が工作活動中に逮捕され、韓国当局の調べに対し「姜元副部長らの指示だった」と供述したとされる。辛容疑者の公判調書は翌86年に韓国・大法院で事実と認定された。
国内では、姜元副部長について事件への関与を裏付ける証拠の収集は難しいのが実情とみられるが、警視庁公安部では、韓国側で認められた公判調書などが、日本の公判などでも証拠として認められる可能性があると判断。逮捕状を取ることを検討している。
일본경찰 "소가(曾我)씨 납치현장 지휘자 김명숙 여성 공작원에 체포영장 북한에 거주 "
북한의 소가(曽我) 히토미씨(47)납치사건에서 국외이송목적납치와 국외이송 혐의로 북한의 여성 공작원, 통칭 김명숙 용의자에게 니이카다(新潟)현경은 2일 체포영장을 발급했다. 김 용의자는 북한에 있는 것으로 보여 외무성은 동일, 북경의 대사관을 통해서 북측에 신병의 인도를 요구했다. 또 경찰청은 국제형사경찰기구(ICPO)를 통해서 국제 수배했다. 일련의 일본인납치사건으로 실행범의 체포영장발급은 6명 째다.
조사에서는 김명숙 용의자는 1988년 8월 12일 저녁 3명의 공작원 남자에게 지시하여 니이카다현(新潟県) 真野町(현 佐渡市)의 자택 근처에서 曽我씨와 그 모친 미요시씨=당시(46)=를 납치, 가까운 해안에서 공작선에태워 북한으로 데려간 혐의다. 미요시씨의 행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는 40-50세 정도로 조선노동당 공작기관「대외정보조사부」에 소속.현재는 70-80세로 신장 약 150센치라고 한다.
소가(曽我)씨는 新潟県警 등 경찰당국에 대해 지금까지「뒤로부터 온 3인조 남자에게 납치되었다. 배 안에서 일본어를 말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발음은 일본인이 아닌 듯 했다」며 실행범 중에 여자가 있있음을 증언. 납치 후, 보자기에서 나와 행선지를 물었을 때, 「여자가『공부하러 가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말했다.
그 후 새로이 북한의 시설에서 수개월간 김명숙 용의자와 생활했다고 증언, 현경은 비슷한 얼굴 그림을 공표했다. 또 수사에서 김 용의자가 일본에 체재하고 있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도 판명. 범행 시는 실행 수일 전에 입국했다고 한다.
曽我씨는 납치직후보터 약2년 간 요코다(横田) 메구미씨=동(13)=와 같이 초대소에서 생활. 原敕晁씨=동(43)=등을 납치한 신광수 용의자가 교육계였다. 신광수 용의자는 대외정보조사부요원이었기 때문에 김명숙 용의자도 동부 소속이었을 의혹이 짙다.
경찰청의 漆間巌장관은 2일의 회견에서「북한이 6개국협의에 복귀하는 이상, 납치문제를 잊어버려서는 곤란하다. 日本은 잊지 않고 있다는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塩崎恭久관방장관은,「조속히 북한에 신병의 인도를 요구하겠다. 지금도 (타 납치사건에서의 용의자)인도를 요구하고 있으며, 한명이 늘은 형태로서 요구를 계속 하겠다」며, 금월 중에나 개최예정인 6개국협의에서도 용의자 인도를 압박할 방침을 분명히 했다.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 일본인 납치 북한 공작원 신광수. 김길욱등 국제수배
인터폴, 즉 국제형사경찰기구가 일본인들을 납치한 북한 공작원 두 명을 국제 수배자 명단에 올렸습니다. 이들은 지난 1980년 일본인 하라 다다아키를 납치한 혐의를 받고 있는데, 납치 주범인 신광수는 현재 북한에 살고 있습니다.
일본 경시청 공안부는 27일 일본인 납치범 신광수와 김길욱을 인터폴, 즉 국제형사경찰기구를 통해 국제 수배했다고 밝혔습니다. 일본경찰은 신광수와 김길욱에 대해 이번 주 체포영장을 이미 발부 받았습니다. 이어서 프랑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형사경찰기구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광수와 김길욱을 국제 수배자 명단에 올렸다는 게 일본 경시청의 설명입니다.
북한 공작원 신광수는 지난 1980년 일본 오사카에 사는 ‘하라 다다아키’씨를 북한으로 납치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 혐의에 따르면 당시 신광수는 김길욱과 또다른 재일 조선인과 공모해 하라씨에게 접근했습니다. 하라씨는 무역회사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을 믿고 신광수 일당을 따라 나섰다가 결국 북한으로 납치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신광수는 지난 1985년 남한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돼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2000년 남북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북한으로 인도됐습니다. 신 씨는 지무라 야스시 부부를 북한으로 납치하는데도 관여한 혐의로 지난 2월 국제수배됐습니다. 일본에서는 신 씨가 요코다 메구미를 납치하는데도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따라서 신 씨가 일본인 납치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고 북한측에 신 씨를 넘겨 달라고 요구해 놓은 상태입니다.
하라씨를 납치하는데 보조역할을 했던 김길욱 역시 지난 1985년 남한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됐는데, 당시 하라씨를 납치한 혐의를 인정한 뒤 옥살이를 하다 풀려났습니다. 김 씨는 현재 남한 제주도에 살고 있으며 재혼해서 두 명의 자식까지 두고 있습니다.
하라씨는 지난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를 만났을 때 북한이 납치했다고 시인한 일본인 열세 명 가운데 한 명입니다. 북한은 이들 가운데 다섯 명을 일본에 돌려보냈고 하라씨를 비롯한 나머지 여덟 명은 이미 숨졌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일본측은 이 여덟명 중에 몇몇은 아직도 북한에 살아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으며, 철저한 조사를 위해 납치범들을 넘겨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미국 언론- > 일본 언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韓国与党代表に親朴派の李氏 大統領の求心力に影響も (0) | 2016.08.10 |
---|---|
일본, 이르면 내달 위안부 재단에 108억원 출연 (0) | 2016.08.01 |
일본, 북한 무수단 발사 성공에 대응 요격능력 증강 (0) | 2016.07.11 |
日언론 "개헌파, 개헌발의가능한 '3분의 2' 확보" (0) | 2016.07.11 |
일본 참의원 선거 투표 개시…아베 개헌 발의 의석 확보 고비 (0) | 2016.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