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마오쩌둥의 ‘반우파 지시’ 본문

同一介中華(中國)/북경정부-中華人民共和國(中國)

마오쩌둥의 ‘반우파 지시’

CIA Bear 허관(許灌) 2016. 6. 12. 00:46

 

주룽지(朱鎔基) 전 중국 총리(1998 ~ 2003 재임)도 공산당원으로 반우파 투쟁 와중에서 숙청되어 20년 가까이 한직을 전전했다[좌파와 중간파 연합으로 우파세력 제거운동]

1957년 6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중공중앙)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직접 기초한 ‘반우파 지시’를 발표하였다.

이 문건의 제목은 ‘우파분자의 광분한 진공에 대해 반격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역량에 관한 지시(關于組織力量準備反擊右派分子的猖狂進攻的指示)‘였다.

마오쩌둥은 각급 조직 및 각급 교육기관에 대해 비공산 반동분자들은 물론 당원 및 공청단원 중에서도 동요분자와사상적 반역자들을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투쟁의 방법으로서 대자보를 이용할 것을 제시하였고 반동적 교수. 조교 및 학생 등 우파분자들이 일체의 독소를 표출하도록 유도한 뒤 좌파와 중간파로 하여금 이를 공격하라고 말했다.

이 지시를 계기로 중국 전역에서 반우파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비공산당원 외에 상당수의 공산당원이 숙청되었다.

주룽지(朱鎔基) 전 중국 총리(1998 ~ 2003 재임)도 공산당원으로 반우파 투쟁 와중에서 숙청되어 20년 가까이 한직을 전전했다.

마오쩌둥의 이 지시는 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해 기획된 ‘백화제방 백가쟁명’ 운동(쌍백운동)이 공산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비화된 데 대한 강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됐다.

쌍백운동은 마오가 지식인들의 활동을 적극화하기 위해 중국문화가 꽃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자유로운 언론활동을 본떠서 제창했다.

당시 중국은 건국 후의 사회주의 개조과정에서 후펑(胡風 :본명은 張光人) 비판 등 부르주아사상 비판 캠페인으로 인해 지식인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소련에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 있은 이후 헝가리에서는 반공의거가 발생하였다.

마오는 중국 지식인들이 이러한 공산권 자유화의 영향을 받아 반체제 세력화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쌍백운동을 제창했던 것이다. 억눌렸던 불만을 토로하게 하여 이를 소화함으로써 중국에서의 공산혁명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자는 것이었다.

1956년 5월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가 ‘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지식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호소했다. 당초 지식인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으나 1957년 5월 ‘언자무죄(言者無罪 :무엇을 말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는 방침에 고무, 일제히 발언하기 시작,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속출했다.

이들의 비판이 마오가 당초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체제전복적인 방향으로 급격하게 발전하자 마오의 반우파 투쟁 지시가 나오게 된 것이다.

마오의 반우파 투쟁 지시가 있은지 35년 뒤인 1992년 덩샤오핑은 남순강화( 1월 18일 ~ 2월 21일)를 통해 '"좌(左)'를 보다 경계해야 한다"는 마오와 정반대 노선의 발언이 나왓다. 남순 강화의 전체적 기조는 바로 이 발언이 함축한다.

 

소련에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 있은 이후 헝가리에서는 반공의거 발생

 

                                                                                          아이젠하워 부부와 함께한 흐루시초프 부부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 전당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막되었다. 당 대회 마지막 날인 2월 25일 당시 소련공산당 제1서기였던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비밀특별보고 회의에서 ‘개인숭배 및 그 결과’라는 제목의 스탈린 비판의 연설을 했다.

이 보고에서 흐루시초프는 3년 전인 1953년 3월 사망한 스탈린은 1930년대의 대숙청으로 많은 무고한 사람이 희생시켰고, 자기에 대한 개인숭배를 조장했으며 대독일전의 서전(緖戰)에서 소련에 큰 손해를 입게 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 비밀보고를 수개월 뒤 미국 국무부가 공표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 방문 중 농업부 장관 에즈라 태프트 벤슨과 미국 유엔 대사 헨리 캐벗 로지와 함께

▶ 중국은 ‘중소 이념분쟁’ 의 상대방인 흐루시초프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캐리커처는 중국 공산당 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역사상의 오늘(歷史上的今天)’에 실린 것이다.


폴란드·헝가리 등 동유럽제국에서는 반소폭동의 계기가 되었고 중국에서는 스탈린을 옹호하는 소리가 높아져 중·소 이념분쟁으로 발전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중소대립 구도를 이용, 독자노선을 추구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는 1973년 이후 ‘주체사상’으로 이론화하였다.

소련에서도 V.M.몰로토프·G.M.말렌코프 등이 1957년 6월 흐루시초프를 추방하려다 반당그룹으로 몰려 자신들이 도리어 축출됐다. 1961년 10월 제22차당대회에서는 스탈린의 유해를 레닌묘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으나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가 실각한 뒤 스탈린 비판이 잠잠해졌고, 1986년 2∼3월 제27차 당대회에서도 흐루시초프 비판과 함께(스탈린의) 이름을 거론치 않는 비판으로 정리됐다.

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공산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할 기회와 동서 양진영이 냉전에서 평화공존을 추구하게 하였다. 또 각국 공산주의자의 자주적 사고와 행동을 촉진시켰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스탈린과 흐루시초프

 

                                     소련에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 있은 이후 헝가리에서는 반공의거 발생

학생·노동자·시민은 공산당 독재와 공포 정치에 반대해 도나우 강변의 바므 광장에서 반(反)정부집회를 열었다.

복수정당제에 의한 총선거, 헝가리 주재 소련군의 철수, 표현과 사상의 자유, 정치범의 석방 등 16개 항목을 요구하며 억압적인 체제에 억눌려왔던 불만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시민들은 헝가리 국기에 동그란 구멍을 크게 뚫어 국기에 그려져 있던 국장을 떼어내고 건물 옥상 등에 걸려 있던 공산당의 상징인 붉은 별 등을 떼어내는 한편 도시 곳곳에 있던 스탈린 동상을 파괴하는 등 반정부 자세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저널리스트인 오베르소프스키도 다음날인 10월 24일 ‘이가샤그(진실)’라는 제목의 일간지를 발행해 봉기를 한층 고무시켰다. 그는 신문발행으로 나중에 사형이 언도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가 밤이 깊어 총살에 실패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처형이 연기됐는데, 그날 니키타 흐루쇼프 소비에트 연방 수상이 봉기 관련자의 사형에 대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항의서한을 읽고는 카다르 야노시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당 제1서기에게 적당히 처리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살아났다.

정세는 시민의 개혁 요구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10월 24일 개혁파 인사 임레 너지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너지는 정치범 석방, 비밀경찰 폐지, 소련군의 부다페스트 철수를 발표하고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와 중립화를 선언했다.

소련은 이 움직임을 ‘소련 간섭권으로부터의 이탈’로 판단하고 11월 4일 헝가리에 탱크 1,000대와 병사 15만 명을 투입해 너지 정권을 힘으로 무너뜨렸다. 그 후 다시금 친소 정권이 세워지고 혁명군 지휘관이던 너지와 팔 말레테르 등은 1958년 부다페스트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한편, 이러한 봉기로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이 헝가리를 떠나 팀의 실력이 나빠졌다.

 

                                                                                           1989년까지의 동유럽내 공산권 국가

*러시아혁명의 주역을 맡은 볼세비킨(볼쉐비끼)는 1918년 제7차 당대회에서 그의 명칭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러시아공산당으로 바꾸워고 네프(신경제정책)을 채택할 무렵에는 60만이 넘는 당원을 가지고 있엇다
그러나 지도적인 당원은 다음의 셋 그룹으로 나눠져 레닌이 그것을 통괄하고 있었다

첫째그룹은 트로쯔키(뜨로쯔키)에 의해서 대표되는 좌파로서 이들은 세계혁명이 없이는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러시아공산당은 국외의 혁명운동을 지원함과 동시에 국내에 있어서도 강력하게 사회주의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네프(NEP,신경제정책)의 채용을 반대했다 지노비예프나 까메네프등도 기본적으로 트르쯔키 정책을 지지하였다
"네프(NEP, 신경제정책)은 소련이 1921년부터 레닌과 스탈린이 실시한 경제정책이다 1921년이전의 전시(戰時)공산주의와 비교하여 신경제정책이라고도 한다 소련공산당과 정부는 위기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제정책의 극적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전시공산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던 식량할당 징발제가 폐지되고 식량현물세가 도입되었다 납세 뒤의 잉여곡물처분은 당초 시도되었던 조직적 상품교환의 실패 후 농민의 자유에 맡겨졌고 현물세도 차츰 화폐납입으로 대치되었다 그 결과 도시와 농촌의 관계에서 상품경제가 지배하게 되었고 소상품 생산자인 농민의 물질적 관심이 촉진되었다 한편 국영공업은 트러스트로 재편성되어서 상업계산제롤 옮겨졌으며 또한 일부 기업은 다시 사유화되어 중소규모의 사영 상공업 경영이 합법화 되었다 1925-1926년에는 공업생산 가운데 사적 부문의 비중이 27.1%까지 달했으나 이때에도 대공업. 은행. 운수. 외국무역. 터지등 관제고시(관제고시)라고 일컬어지던 중요한 경제영역은 국가가 장악하고 있었다 1923년의 협상가격차 공황의 극복, 다음해 화폐개혁의 성공등을 거쳐서 경제부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 뜻에서 신경제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신경제정책은 레닌 스탈린 그리고 부하린등이 지지했으며 좌파세력인 트로쯔키등은 반대했다 제2차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소련도 강제적 농업집단화. 국유화정책등의 극단적 공산주의 국가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으로 내다볼 수 있는 자료이다."

 

둘번째 그룹은 부하린에 의하여 지도되는 우파이다
이들 역시 러시아라는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는 생각치 않으나 당면한 세계혁명의 시기가 없는 이상 현실과 타협하면서 네프(신경제정책)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하린노선이 우파민족주의 경제이론 입장이다
소비가 투자라는 케이즌경제학 입장에서 자국 경제발전이 없는 한 국가발전이 있을 수 없으며 외세종속화 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소비가 투자라는 입장이어야 국내 경제가 고도소비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며 자국경제규모로도 잘 살아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공황을 예방할 수 있다
부하린과 스탈린은 이런 입장에서 좌파그룹 트로쯔키 계열의 공산주의 경제이론 집단농장과 무산몰수, 무산분배정책을 견제하고 제거하는데 공동 노력했다

셋째는 스탈린이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의 지지자이다
이들은 원대한 소련은 인구도 많고 자원도 풍부하기 때문에 가령 세계혁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일국에서도 사회주의가 건설 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네프(신경제정책)를 지지했다 세계 무산혁명과 강제적 농업집단농장 그리고 국유화정책을 지지하고 네프(신경제정책)을 반대한 좌파 트로쯔키노선과 상반된 우파 노선이었다

스탈린은 1924년말 "10월혁명과 러시아공산당의 전술"이라는 논문에서 트로쯔키에 반론하는 형태로서 이 견해를 처음으로 밝혔다 이 무렵 그는 그의 저서 "레닌주의의 기초"를 내놓기도 하였다
레닌은 1921년말부터 중병에 걸려 공직생활에서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듬해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당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지노비예프, 까메네프와 더불어 삼두정치를 꿈꾸며 트로쯔키에 대신하여 레닌의 후계자의 지위를 노리게 시작하였다
레닌은 처(妻)에게 구술하여 기록케 한 유서에서 스탈린은 너무나 거칠고 난폭해서 서기장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당원은 그를 지위에서 제거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그 보다도 관용이 있고 충성심이 있고 정중하고 동지에 대하여 배려가 두터운 다른 사람을 임명할 것을 제안한다고 하였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사망했으나 그 유서는 당시의 중앙위원에게만 알린채 끝내 공표되지 않았다 이것이 처음으로 공표된 것은 1956년 2월 제20차 당 대회에서의 "흐루시초프"의 비밀보고서에서였다

"스탈린의 권력을 장악한 과정은 우선 부하린과 손을 잡고 트로쯔키등의 좌파그룹을 내쫓은 다음 그는 우파마저 탄압하는 일종의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때 그는 서기장의 지위를 이용하여 당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반대파는 당의 노선에 따르지 않는 분파주의자라고 매도하였다"
결국 트로쯔키는 1929년에는 소련으로 추방되었고 1940년 망명 중인 멕시코에서 암살되었다
한편 스탈린과 삼두정체를 꾸몄던 좌파의 지노비예프와 까메네프도 우파의 부하린과 더불어 1936년에 숙청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곡물조달의 위기를 맞아 부하린. 즈이꼬프. 또스끼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면적 농업집단화 즉 위로부터 혁명을 단행하였다
이와병행하여 제1차 제2차 5개년게획(1928년, 1937년)도 추진하였고 대숙청의 선풍이 가장 격하게 휘몰아쳤던 1936년말에는 1924년의 헌법에 대신하여 이른바 스탈린헌법을 제정하였다
이제는 농업의 집단화와 공업화의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스탈린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하여 새로운 헌법으로써 소련의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내외에 과시하려고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스탈린헌법의 제정에 이어서 1938년에는 스탈린노선의 절대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소연방공산당소사(蘇聯邦共産黨小史)가 펀찬 발행되었고 그 속의 "변증법적 및 사적 유물론"은 스탈린이 직접 집필하였다


독일과 전쟁 전후(1941년 5월)에는 스탈린은 인민위원회의 의장(수상) 이어 국가방위회의 의장, 국방인민위원등을 맡아 전쟁을 지도하였다
그가 연합국 지도자들과 함께 테헤란(1943년). 알타회담(1945년). 포츠담(1945년)등지에서 회동하여 전쟁수행 및 전후의 처리문제를 협의하였다

 

                                       일소중립조약에 서명하는 일본제국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 지켜보는 스탈린, 몰로토프(뒷줄 가운데)

1941년 4월 13일 스탈린은 일본의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1945년 5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로부터 연합군에 가담해 줄것을 요청받았다. 그는 바로 소련 붉은 군대를 연해주에 파견하여 일본군과 교전하게 했다. 8월 10일 일본이 패전과 동시에 항복을 선언하였다. 그해 10월 서방에서는 소련의 참여기간이 짧은 것과 소련이 기여한 것이 미약하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스탈린 역시 소련군 3천여 명이 부상당하거나 전사한 점을 들어 소련 역시 종전에 기여했다며 항변하였다


 

 

 

 

 

 

 

*극동지역과 동북아 지역 각국 GDP
"미국 1인당 GDP 56,421$(5위).일본 1인당 GDP 38,215$(22위).한국 1인당 GDP 36,601$ (29위).러시아 1인당 GDP 24,067$(53위).중국 1인당 GDP 13,801$ (75위), 몽골 1인당 GDP 5,403$(121위), 북한 1인당 GDP 2,400 $(2014년도,채무불이행 국가-국영자본체제)"

Capitalism  Anti Communism! Democracy Anti Totalitarianism(Dictatorship)!
After the capitalist democracy revolution, liberalism(Civil liberties) and Socialist(social rights, Right to life) coexist (respect) is a free society.  -Freedom Society[Democratization government]"
*Three principles of capitalism:Private property, pursuit of profit, Principle of free market competition Etc
*Three principles of Democracy: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Etc[民主主義 三代原則:民有、民治、民享]

 

*주룽지(주용기, 중국어 간체: 朱镕基, 정체: 朱鎔基, 병음: Zhū Róngjì, 1928년 10월 1일 -)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제9대 국무원총리(재직:1998년 3월 - 2003년 3월)이다.

후난 성 창사 출신이며 본관은 당파 주씨(棠坡朱氏)인데, 선조에 관하여 명나라의 개조 주원장(朱元璋)의 제14대손이라는 설도 있다. 5세 때에 부모가 모두 사망하고 장학금을 얻어 고학하였다. 후난성의 재원으로 1947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국립 칭화 대학 전기과 전기제조과정에 입학하였으며 입학 후 주쯔칭의 영향으로 중국민주동맹 관련 서클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1951년 대학 졸업 후 동북지역 계획생산처로 배치되었다.

1952년 국가계획위 전기관리부문 소속으로 일했지만 1957년의 반우파운동에서 1958년 우파로 강한 비판을 받은 뒤 국가계획위 소속은 유지했지만 당적은 박탈되었다. 계획위 소속 전문학교에서 교사로 강등된 뒤 1969년에는 하방(下放)되었고 집단농장에서 개조를 받았다. 1975년 베이징의 석유공업부 전기공정원으로 일했다.

1978년 덩샤오핑에 의해 당적회복 조치를 받아 복당 처리된 뒤에 국가경제위원회에 배임되었다. 1982년 9월 제12회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이 되었고 1984년에는 칭화 대학교 경제관리학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1987년 상하이 시위원회 부서기, 1988년 상하이 시장을 맡아 푸둥(浦東)지역 발전을 주도하였고 톈안먼 사태 때는 베이징에서 옮겨온 시위를 자신의 민주화 운동 경험을 토대로 텔레비전의 열정적이고 이지적인 연설을 통해 무마시키며 상하이 시정을 안정적으로 유도했다.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당총서기로 베이징에 전출한 장쩌민의 후임으로 상하이시 위원회 서기를 맡은 뒤로도 외자 도입과 공무원 부패의 단속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덩샤오핑에 의해 1991년 국무원 부총리(부수상)에, 1992년에는 중앙위원으로부터 3단 도약하여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1993년에는 중국인민은행 총재를 겸임, 당시 중국내 문제가 되었던 인플레이션에 효율적으로 대응했다는 평을 받았다. 1998년 3월부터 2003년 3월까지 장쩌민 국가주석을 보좌하고 5년에 걸쳐 국무원 총리에 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