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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민군 주축이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연단.. 본문
북한 인민군 주축이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연단..
CIA Bear 허관(許灌) 2015. 2. 20. 20:57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 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부대) 등이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 인민군은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연단이 장악했다 전쟁과정과 그 이후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남부군)이 숙청되거나 제거 되었다 아직도 북한에서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출신 김일성, 김책, 강건등 다수가 우상화나 신격화 각종 동상이나 학교, 지방명칭 등으로 건립, 지정 돼 있다
북한에서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연단출신 집안이 북한 특권층(상류층)으로 알려지고 있다
1.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1)해방 전 소련에서의 김일성그룹
1930년대 만주에서 조ㆍ중 유격대(동북항일연군)에 의한 반일 무장투쟁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의 유격대 토벌 작전은 한층 강화되었다.
일본군의 드높은 공세에 조ㆍ중 유격대의 역량은 감소를 거듭하였는데, 1938년 3만여 명에 이르던 항일연군 병력은 1940년에 이르러서는 1,4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동북항일연군은 일찍부터 물적 원조를 받아온 이웃 형제 국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2)소련으로의 이동
1939년부터 동북항일연군은 소련령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제2방면군을 이끌고 있던 김일성 부대는 일제의 토벌작전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을 거쳐 1940년 10월 23일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소련으로 들어갔다. 소련에 들어온 전체 조선인 유격대원 수는 200명 내외였다.
동북항군연군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1940년 겨울부터 하바롭스크 근방 비야츠코예 나 아무르(Вятское-на-Амур) 마을에 A야영(일명 북야영)과 보로실로프(현 우수리스크) 근처에 B야영(일명 남야영)을 설치하였다. A야영에는 중국인 주보중이 지휘하는 제2로군과, 제3로군이 들어갔으며, B야영은 제1로군 제2, 3방면군과 제2로군 일부 병력들로 채워졌다.
동북항일연군 지도부는 부대를 정돈하고 장비가 보충되면 다시 만주로 돌아갈 것을 예정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소련과 일본은 상호간에 영토적 순수성과 불가침성을 강조한 중립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군 당국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항일연군이 동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시적으로 중지하도록 하였다.
항일연군 대원들은 두 야영에서 일련의 교육과정과 전투준비 훈련을 거쳤고, 일부 대원들은 소련군 정찰기관의 지시에 따라 이미 국경지역에서의 정찰활동을 하였다. 소련군 지휘부는 항일연군 출신들의 간부 훈련에 각별한 신경을 썼는데, 빨치산 대원 가운데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들이 선발되어 하바롭스크 보병학교에서 단기과정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김일성과 그 외 간부급 대원들은 이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마치고 모두 소련군 장교로 임관되었다.
(3)88독립보병여단의 결성
1941년 6월 중순 소련 정부는 항일연군이 주축이 된 여단 창설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고, 이듬해 7월 21일 A야영이 소재한 비야츠코예 나 아무르 마을에서 극동전선군 산하 88독립보병여단이 창설되었다. 88여단 창설의 주된 배경은 조ㆍ중빨치산들이 만주 주둔 일본군의 동향을 탐지해내는데 적합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단은 러시아인, 중국인, 조선인, 모르드바인 등을 15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되었다[국제여단은 붉은 군대(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세력) 소련축으로 대독, 대일참전 연합부대] . 오늘날 북한에서는 88여단을 국제연합군으로 부르고 있고, 반면 중국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의 연장선의 의미를 부여하여 동북항일연군교도려로 칭하고 있다.
88여단은 극동전선군 군사회의에 의해 직접 지도를 받았고 참모부 정찰부가 관할하였지만, 주보중이 이끄는 88여단 지휘부는 중국 공산당적을 유지하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보장 받았다. 88여단의 편제는 참모부, 정치부, 후방부, 군 검찰부, 4개의 보병대대, 통신중대, 포병중대로 이루어졌다.
88여단 전체 규모는 시기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이는 러시아 군인들이 증강되거나 감소되기 때문이기도 한데 전체적으로 최저 900명에서 최고 1500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조선인은 100명 정도였다. 나머지 조선인들은 다른 소련군 부대로 차출되거나 집단농장(콜호즈) 등에 배치되었다.
제1대대는 항일연군 1로군 출신 조선인들을 기본 단위로 구성되었으며, 김일성은 대위 계급을 달고 대대장으로 배치되었다. 여기에는 최현, 김광협, 강건 등 그의 부하들도 포함되었다. 88여단 부대대장 급으로는 소련군 장교들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조ㆍ중 대원들에 대해 주로 군사교육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았다.
88여단의 조선과 중국인 대원들은 중국공산당적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소련군제에 편입되어 소련군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련 역시 반일 전선을 유지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소련과 조ㆍ중 유격대 간의 이해관계는 일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88여단의 활동과 김일성의 입지
88여단 대원들은 대열연습, 총검술, 폭탄 투척, 수영, 실탄사격, 스키훈련, 야외훈련(추위를 견디는 능력 배양) 등 체계적인 전투ㆍ기술훈련을 받았다. 또한 소련측이 제공한 프로그램에 따라 정치사상교육이 실시되었는데, 여기에는 반일 교육과 소련공산당사를 비롯한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건설성과 등에 관한 정치학습이 포함되었다
김일성은 상부의 지시를 받아 훈련 및 교육임무를 집행하였고 이밖에도 조선해방에 관한 토론과 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훈련 이외에 운동과 고기잡이 등으로 여가를 즐기기도 하였다.
소ㆍ만 국경에서의 정찰 임무는 88여단 활동의 주된 목적이었다. 소련군 당국은 1942년 8월에 이미 군사작전의 개시와 더불어 88여단의 활용 계획을 확정하였다. 88여단의 최종 과업으로는 조ㆍ중 지역 주민들로 소규모 빨치산 부대들을 창설하고 그 활동을 지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조ㆍ중 유격대 출신들의 만주 파견 활동은 1941년 초부터 300명 내외의 대원들이 참가하였다. 조선인 가운데는 강건, 안길, 박덕산, 최현 등이 자신의 소부대를 이끌고 각종 공작을 지휘하였다.
김일성 자신도 여단 창설 이전인 1941년 4월 동남만 일대에 남아 있던 소부대들과 연계를 맺고자 밀영을 떠났다가 활동을 마치고 8월에 기지로 돌아왔으며, 9월 중순경에는 재차 소부대를 이끌고 만주와 국내로 나갔다. 그는 1943년 7월 중순에도 지하공작을 위해 만주로 진출하였다.
김일성의 회고록에 따르면, 소련군의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위한 나진, 웅기, 청진 등 북조선 항구에 대한 상륙작전 계획은 오백룡 부대가 수집한 자료에 기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8여단 조선인 대원들은 정찰활동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으며, 그들 가운데는 김혁철, 손태춘, 김학송, 김홍수, 지봉손 등이 목숨을 잃었다.
만주에 흩어져서 활동한 조선인 빨치산 지도자들이 88여단으로 합류하면서 이들 사이의 지위와 역할이 자연스럽게 해결을 보게 되었다. 김일성은 선배 빨치산인 최용건이나 김책 등과의 관계에서 별다른 무리 없이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김일성이 조선인 가운데 최고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조선인 주력 부대를 이끌었다는 점, 조선 국내에 보다 널리 알려진 점, 소련과 중국 지도부의 신망이 다른 이들보다 두터웠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서 일제 시기 김일성 부대의 활동을 객관적이고 총체적으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1940년 대 전반 소련 체류에 대한 평가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부대가 1930년대 초부터 조선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기치하에 대일 항전을 지속했고, 이데올로기를 떠나 그 목표에 상당한 일관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 (출처 : 한겨레신문)
*김일성등 좌파계열 항일부대 경로
중국 공산당 입당(만주지역 조선인 공산당)-->조선혁명군(북한:조선인민혁명군, 조선혁명당-김두봉과 김규식)[국민당과 공산당 하부 동북항일연합군]--> 의용군(중국 인민해방군 원조부대 김두봉 등), 국제여단(연합군. 대독, 대일참전부대 김일성 등)-->중국 화북지역과 만주지역 점령(조선 의용군), 극동과 만주, 이북 점령(국제여단)--->만주지역(동북3성, 중국인민해방군 임표부대 주둔), 극동(赤軍=붉은 군대), 이북(赤軍=붉은 군대와 조선인 국제여단)
-국제여단 주축으로 북한 인민군 창설과 권력장악 그리고 소련군 원조로 각종 군사학교 설치(김일성, 김책, 강건대학교 등)
-1차 세계대전(레닌, 전쟁 중립선언과 공산주의 세력 전쟁 불개입선언)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독일-소련 불가침조약과 동서유럽(동서폴란드) 군사적 점령
[국가사회주의와 군국주의 이론: 독일 노동자의 당 히틀러의 나찌즘, 소련 공산당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이론]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 일본간에 삼국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 소련침공
-1941년 7월 소련과 영국, 반독일전선 구축 그리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반독일전쟁 참여(중국인등 아시아 출신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대독전쟁 참여)
-일본의 소련과 외몽골 침공
1938년 7월 29일, 일본의 소련 침공으로 하산 호 전투가 발생하였다. 전투는 거의 소련군의 승리였으나, 일본군은 무승부로 판단하고 1939년 5월 11일에는 강제로 할힌골 전투를 일으키며 몽골 영내로 진군했다. 초기에는 몽골로의 침공이 성공했으나, 붉은 군대에 의해 관동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충돌들은 소련이 중국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해 소련 정부를 회유하고 대신 남쪽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파벌들이 태평양과 미국 방면으로의 진출을 설득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7일(아시아 시간으로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과 영국의 식민지를 기습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4월 12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해리 S. 트루먼가 대통령직은 승계받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4월 28일에 이탈리아 파르타잔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틀 후, 히틀러는 자살하고, 대제독 칼 되니츠가 총리를 승계받았다.
독일군은 이탈리아에서 4월 29일에 항복했다. 독일의 항복문서는 5월 7일 랭스에서 서명되었고, 5월 8일(모스크바 시간으로 5월 9일)에 베를린에 비준되었다 독일 중앙집단군은 5월 11일 프라하 공세까지 저항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군은 1945년 4월 말까지 필리핀에서 필리핀 전투과 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한다. 1945년 1월 루존 상륙과 3월에는 마닐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루존에서 계속되었으며, 민다나오 섬을 비롯한 필리핀의 다른 섬들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저항했다.
1945년 5월, 호주군은 보르네오 전투를 시작하며 섬을 점령했다. 영국, 미국, 중국은 북부 버마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5월 23일에는 영국군이 양곤을 점령했다 중국은 1945년 4월 6일부터 6월 7일까지 서후난 전투로 반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일본 본토로의 진격을 시작하여, 3월에는 이오 섬을 점령하고, 6월 말에는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미군의 폭격기는 일본 본토 공습을 시작하고, 미군 잠수함은 봉쇄 조치를 시작했다.
7월 11일에는, 연합군의 지도자가 포츠담 회담을 했다. 그들은 독일에서 이전 회담의 협정을 확인하고, 특히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강조하며 "일본에 대한 대안은 신속하고 완전한 파괴"라고 발표했다. 이 회담 중에 영국은 선거를 시작하고,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포츠담 협정을 무시하며,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다. 두 폭탄이 터진 사이, 소련군은 얄타 회담의 조건에 따라 8월 폭풍 작전으로 만주로 진격하며 관동군을 항복시킨다. 그리고, 소련군은 만주와 청진 등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다. 또한, 소련군은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일본의 항복문서는 1945년 9월 2일 미군 전함 USS 미주리 (BB-63)에 서명되며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2.조선의용군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의 한커우(漢口)에서 결성한 조선민족혁명당(金元鳳)·조선민족해방동맹(金星淑)·조선혁명자연맹(柳子明)·조선혁명청년연맹(崔昌益) 등 중국본토에서 활약하던 좌파 4당의 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군사조직이다.
(1)연원 및 변천
조선의용대의 대장은 김원봉이었다. 처음에는 제1구대(朴孝三)와 제2구대(李益星)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1940년 5월 3개 지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는 후난성(湖南省)과 후베이성(湖北省)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한편, 조선의용대 본부는 구이린(桂林)·치장(綦江)을 거쳐 충칭(重慶)으로 옮겨 1940년 11월 4일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을 결정하였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충칭에 남고 모두 허난성(河南省)뤄양(洛陽)으로 집결해 1941년 3월황하의 맹진(孟津)나루를 건너 화북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10일린현(林縣)에서 신악(申岳)·윤세주(尹世胄)·박효삼(朴孝三)·김창만(金昌滿) 등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였다. 지대장에 박효삼, 제1대장에 이익성, 제2대장에 김세광(金世光), 제3대장에 왕자인(王子仁)이 임명되었다.
그 뒤 화북지대는 타이항산(太行山)일대에서 후자좡(胡家庄)전투(1941.12.12.)·싱타이(邢台)전투(1941.12.26.)·T청(偏城)전투(1942.5.28.)를 치렀다. T청전투 무렵인 1942년 5월충칭에 있던 조선의용대 본부가 임시정부의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자 화북지대는 본부없는 지대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2년 7월 10일 타이항산 중인 허베이성(河北省) 셰현(涉縣)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국민혁명군 제8로군에 있던 무정(武亭)을 사령관으로 맞았다. 그 해 8월 15일 때마침 충칭에 있던 김두봉(金枓奉)이 옌안(延安)을 거쳐 타이항산으로 왔으므로 그를 맞아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조선의용군은 그의 당군이 되었다.
1943년 6월 일본군의 침공을 받아 제8로군과 함께 이른바 ‘반소탕전’을 전개하며 타이항산 속 곳곳에서 항전하며 용명을 떨쳤다.
그때 중국공산당에서 조선의용군의 옌안 이동을 결정하였다. 많지도 않은 인력을 타이항산전투에서 소모하기 보다는 전쟁 후에 조선 통치의 요인으로 보호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에 유익하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의용군은 1943년 12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옌안 이동을 완료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옌안 교외의 뤄자핑(羅家坪) 마을에 주둔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관은 무정이었지만 그는 제8로군의 포병사령부의 책임을 맡아 있었기 때문에, 뤄자핑에 있는 조선항일군정학교가 사령부의 구실을 하였다. 군정학교는 김두봉이 교장이었고 부교장은 박일우(朴一禹), 학도대장은 박효삼이었다. 그 밑에 4개 구대가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뤄자핑에 있는 병력 외에 산둥성(山東省)에 이익성, 산시성(山西省)에 김세광, 동북(만주)지방에 이상조(李相朝)가 이끄는 선견대(先遣隊)가 별도로 있었다. 그들은 전선에서 일본군에 종군한 조선인 병사들을 초모해 조선의용군의 병력을 증강하며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의 병력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병력 150명 정도 외에 제8로군에 종군한 10명 내외, 1940년 최창익·허정숙(許貞淑)과 함께 조선의용대가 구이린에 있을 때 미리 온 18명, 그리고 김태준(金台俊)·김사량(金史良)처럼 망명해온 인사, 그리고 각처에서 새로 초모한 인원을 300명 정도로 보면 모두 합쳐 약 500명을 헤아린다.
(2)기능과 역할
조선의용대의 활동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전지공작이었다. 전지공작은 일본군 점령지구에 잠입하거나 전선에 접근해 활동하는 초모활동·선전활동·정보활동 등을 말한다. 옌안에 있을 때는 전방에 파견된 선견대가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둘째는 교육활동이었다. 교육은 군사교육과 사상교육으로 나뉜다. 뤄자핑에 있던 조선항일군정학교가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셋째는 생산활동이었다. 제8로군 지역은 토지가 척박해 생활물자가 궁핍했으므로 ‘自力動手 豊衣足食(자력동수 풍의족식)’이라는 모택동(毛澤東)의 구호 아래 군인들이 밭을 일구어 농산물을 자급 자족하였다. 조선의용군도 그에 발맞추어 밭을 갈아 일을 하였다.
옌안지방의 주민은 야오둥(窯洞)이라는 토굴 속에서 생활하는데, 뤄자핑에 가면 지금도 조선의용군이 살던 굴집이 남아 있고 군정학교의 옛터와 의용군이 일군 밭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제8로군의 동북(東北) 정진군이 편성되어 만주로 갈 때 그 해 9월 15일 함께 옌안을 떠났다.
그 뒤 일부는 북한으로 들어 가다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당하였다. 북한으로 들어간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한빈(韓斌) 등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해 활동하였다. 이들이 북한정계의 연안파라는 정치그룹이다. 그들은 김창만·허정숙 등 몇명 외는 모두 숙청당하였다.
만주에 남아 있던 병력은 그 곳에서 동포들을 모병해 부대를 증강하고 중국의 공산혁명전쟁에 참가했고 1950년 6·25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조선의용군(중국)
3.남부군[남부군단 , 조선인민유격대남부군단]
6.25전쟁 전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이현상이 지휘하던 좌익 빨치산 부대.
이현상은 1949년부터 지리산지구에서 인민유격대 제2병단을 편성하여 활동하였으며, 6.25전쟁시에는 광범한 지역에 걸쳐 협동작전을 벌였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지리산지구로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50년 11월에는 후평리에서 남반부인민유격대로 재편한 다음 남하하였다. 같은 해 12월 제천지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개편한 후 덕유산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현상은 남부군단 총사령관의 직함으로 1951년 7월 중순부터 남한일대의 유격부대들을 총지휘하였다. 이들은 주로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한국군 백야전전투사령부 등의 토벌작전에 의해 대부분 토벌되었다.
(1)설립목적
이현상은 1950년 11월 중순 유격대를 지휘하여 강원 후평리로 후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이승엽 등과 남한지역의 당사업과 유격투쟁에 관한 문제를 토의했다. 이승엽은 6개 도당(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에 대한 지도권한을 여운철에게 위임했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 지도를 맡겼다. 이현상은 후평리에 집결된 유격대로 남반부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다시 지리산을 향했다. 이때 편성된 인민유격대는 유리사단(4백명), 혁명지대(60명), 인민여단(1백50명)과 사령부 및 기타 직속부대(1백50명) 등 약 8백 명의 병력이었다.
(2)연원 및 변천
남반부인민유격대는 중공군 참전으로 19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침투했다. 12월말에는 충북 단양을 거쳐 문경경찰서를 습격한 후 그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현상은 제천지구로 이동하여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다시 개편했다. 이 남부군단은 1951년 2월초에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들어갔다.
덕유산에 들어간 남부군단 총사령관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1951년 7월 중순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의 6개 도당회의를 열기도 했다. 이후 남한일대의 유격투쟁은 이현상이 총지휘하게 되었다. 남부군단 예하에는 제1전구(전북의 북부지구와 충남)와 제2전구(전북의 남부지구)가 있었다. 제1전구에는 충남 빨치산 5백 70명을 68사단으로, 전북북부지방 빨치산 7백 명을 45사단으로 각각 개편했다. 제2전구는 전북 남부에 있는 각 유격대를 46사단, 53사단으로 개편했다. 직속부대로는 81사단, 92사단, 602사단이 있었다. 이들은 지리산에도 병기수리소를 설치하여 하루에 1천발의 탄환을 만들었으며 병원시설도 있을 만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951년 7월부터 노동당은 남한지역에서 제2전선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각 지대유격대 체제로부터 당 사업을 주로 하는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3)기능과 역할
남부군단 예하의 지리산 빨치산은 남부군의 직속부대인 제81, 제92사단과 경남도당 사단인 제57사단, 그리고 전북도당 사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여순 10.19사건 당시 반란군 출신 중 생존해 있던 인원과 북한군 전투부대의 낙오병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비교적 전투경험이 많은 병력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과 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식량약탈, 지서습격, 차량기습,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 등을 자행하였으며, 이들의 행동은 전후방 한국군 전투력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4)현황
한국군은 남부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2개 사단 규모의 토벌부대를 편성하여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군단급 ‘백야전전투사령부’ 창설을 명령하였다. 토벌작전이 개시되자, 기동타격부대는 지리산을 남북으로 양분하여 북쪽은 제8사단이, 남쪽은 수도사단이 담당하여 공비 주력을 타격하였고 저지부대는 빨치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백야사 예하 부대들은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일대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대부분 토벌하였고, 핵심지도자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포획하였다. 백야사의 전과는 작전기간 동안 사살 포로 투항 등을 포함하여 1만 6천여 명에 달했고 노획무기도 3천여 정을 상회하였다
(5)의의와 평가
6.25전쟁 기간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단은 지리산, 덕유산 일대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전체 전선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과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한국군이 빨치산 토벌작전을 위해 군단급 규모의 부대를 전선에서 이동시키게 하여 한국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6)남로당 계열-조선공산당(마스-레닌주의, 소련위성국 인정파), 신민당(신민주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또는 모택동 인민민주주의), 인민당(인민민주주의)등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은 남북협상보다는 당군이론 무장봉기와 전쟁통일 세력 강경파 공산주의 세력이며 신민당이나 인민당은 남북협상과 중국정부 중시론 인민회의정부론 온건파 사회민주주의 세력(과거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부나 주도인사)이다
조선공산당은 한반도지역이 소련연방 편입을 인정하는 세력이며 신민당이나 인민당은 미소중립 자주독립국을 표방했다
소련 친위대는 조선공산당과 소비에트연방(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연단(소련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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