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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동(周禮洞)은 두리마을(두레마을)을 의미합니다 본문

Guide Ear&Bird's Eye3/머리소리함 31년 경력자 허관(許灌)

주례동(周禮洞)은 두리마을(두레마을)을 의미합니다

CIA bear 허관(許灌) 2009. 6. 25. 15:46

주례동(周禮洞)은 '주례(周禮)'라는 말의 어원은 '두리'로 파악되고 있다. '두'와 '주' 가 같은 음이며 '리'가 '례'로 적힌 예도 있다. '두리?도리'는 지명이 되어 불리우는 경우 대개 '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周-두루 주, 禮-예절 례)


몇 가지 예를 들면 충청도의 주현(周?), 주성산(周城山), 강원도의 주진(周津), 전라도의 주로치(周路峙), 함경도의 주원(周原) 등이 그것이다.

또한『삼국사기』김유신전에는 일작 두솔(兜率)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두리, 두루‥'에서 온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두레'는 한 마을의 농사를 힘을 합하여 이른바 '품앗이'를 하고 농악을 중심으로 결속하며 농촌사회의 공동체를 이루는 단체였으며 이 '두레'가 한자로 표기된 것이 '주례'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동래부지(1740)』에 보면, 사천면 상단(上端) 주례리(周禮里)라 하여 부의 남쪽 30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례동의 위치가 동평현의 현치(?治)가 있던 곳에서 서쪽으로 나오다 낙동강변으로 도는 곳에 있으므로 해서 이런 마을이름이 붙었다고 하고, 또 낙동강변에 있기 때문에 변(邊) 즉 가(邊)라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할 수 있다.


1978년 11월 시조례에 의해 주례1,2동으로 분동, 1992년 아파트의 신축 등으로 인한 인구증가로 주례1동은 주례1,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레(두리)

두레는 조선 후기 이앙법이 전개되면서 보편적인 농민생활풍습으로 정착되었으며 농민문화의 풍물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두레싸움·두레밥·두레기·두레놀이·풍습 같은 농민생활풍습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두레는 소농경영(小農經營)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조직되었으므로 공동노동으로서의 진취성과 농민들의 자주적 성격이 매우 강한 긍정적인 조직이었으며, 두레의 상부상조 전통은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자리잡았다.[두리는 "두레"의 방언(경남)]

 

*주례(周禮)

〈주관 周官〉이라고도 한다. 나머지 2권은 〈의례 儀禮〉·〈예기 禮記〉이다. 예부터 주공(周公:BC 12세기)의 저술로 간주되어왔으나 현대 학자들은 이 책이 BC 300년경에 무명의 이상주의자가 휘찬(彙撰)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수세기 동안 〈주례〉는 〈예기〉와 합쳐져 6경에 포함되었다.
〈주례〉는 유가 사상뿐만 아니라 법가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 천관(天官)에서 통치 일반을, 지관(地官)에서 교육을, 춘관(春官)에서 사회적·종교적 제도를, 하관(夏官)에서 군사를, 추관(秋官)에서 법무를, 동관(冬官)에서 인구·영토·농업을 다루었다. 12세기에 오래전에 유실된 〈악경 樂經〉 대신 6경에 포함되면서 특별한 평가를 받았다. 〈주례〉가 한국에 전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삼국시대에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주례〉는 고려시대에 주요 유교경전의 하나로서 국가 교육기관의 공식과목으로 채택되어, 1109년(예종 4) 국자감(國子監)에 설치된 7재(七齋) 중의 하나인 구인재(求仁齋)에서 전강(專講)되었다. 〈주례〉가 불교와 도교에 맞서는 유학의 윤리와 경세사상을 담고 있는 까닭에, 고려 말기에 성리학이 발흥하면서 성리학자들 사이에 〈주례〉를 중시하는 경향이 일어났다. 조선왕조 개창에 핵심적 역할을 한 정도전(鄭道傳)은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에서 〈주례〉의 6관제도(六官制度)를 기본 모델로 하여 조선왕조의 통치규범을 제시했다. 그뒤 〈주례〉는 세종 때 16책으로 간행되어 일반에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새로운 사상에 대한 모색이 활발해지면서 몇몇 학자에 의해 〈주례〉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윤휴(尹)는 〈주례〉를 연구하여 〈주례설 周禮說〉을 지었으며, 정약용(丁若鏞)은 〈주례〉에서 국가 기구의 원형과 어린도법(魚鱗圖法)의 연원을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