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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대만) 독립파, 마잉주(마영구) 총통 항의 시위 본문

同一介中華(中國)/북경정부-中華人民共和國(中國)

타이완(대만) 독립파, 마잉주(마영구) 총통 항의 시위

CIA Bear 허관(許灌) 2009. 5. 18. 10:23

 

 타이완의 친 독립 시위자들은 17일 마잉주 총통의 관저 바깥에서 마잉주 총통의 중국 포용정책에 항의하는 밤샘 시위를 벌였습니다.  

타이완 수도 타이페이에서 이 날 수만 여명의 시위자들이 마잉주 총통의 관저까지 행진했으며, 일부는 밤을 새워 남아있을 예정입니다.     

이번 시위를 주도한 민진당은 60만 명이 가두 행진에 동참했다고 밝혔으나 당국은 10만 명 미만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경찰 4천명이 가두 시위 중 파견됐습니다. 

시위대는 마 총통의 중국과의 긴장을 줄이려는 조치는 타이완의 자치를 위태롭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분단 상태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대만의 영유, 통치를 강화하는 한편, 중국 대륙에서 난처한 입장에 몰리고 있었다. 1946년부터 격화하기 시작한 국공 내전에서 처음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우세했지만 해를 거듭할 때마다 중공군이 우위인 입장을 차지하게 되었다. 1949년 4월이 되면서 중화민국 정부의 수도인 남경이 중공군에게 점령당하고, 10월에는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한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하였다.

중공군에게 온전히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대만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을 결정해, 남아있는 중화민국군의 병력이나 국가, 개인의 재산등을 속속 대만에 옮기기 시작해, 12월에는 중앙 정부 기구도 대만으로 이전해 타이베이 시를 임시 수도로 삼았다.

이러한 중화민국 정부의 움직임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당초 대만으로 군사적 침공을 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었지만,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병력이 한반도로 이동하면서, 1955년에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장제스(蔣介石)는 수 차례 미국에 중국 대륙 공격을 제안했지만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 이후, 대만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화민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어, 중국 대륙과 대만은 서로 다른 정권에 의해 분열 통치가 되고 있다. 양국은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자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였으나, '하나의 중국' 원칙에는 양국이 모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 상황

장징궈(蔣經國) 총통의 집권 이후 중화민국은 사실상 무력에 의한 대륙 수복을 포기하고, 대륙과의 협력을 통한 평화 통일로 통일 정책을 변경하였다.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은 대만과 중국은 각각 별개의 국가라는 '일국일변론(一國一邊論)'을 내세워 사실상 '하나의 중국' 원칙을 폐기하였다. 급진 대만 독립 성향의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의 집권 이래로 대만 독립 문제가 주요 정치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2008년에 취임한 마잉주(馬英九) 총통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하지만 통일과 독립 중 어느 것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도 무력 통일 위주의 통일 정책에서 탈피, 평화 통일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력에 의한 통일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통일 정책과는 차이가 있다. 2005년에 중국 공산당은 '반분열국가법'을 제정, 무력 동원 가능성을 명문화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대만에 대한 무력 사용 자제를 요구하고 있으나, 중국 공산당은 '양안 문제는 중국 내정의 문제'라며 타국의 개입을 일체 거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