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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무솔리니(국가사회주의자) 본문

유럽연합(EU)

히틀러와 무솔리니(국가사회주의자)

CIA bear 허관(許灌) 2009. 4. 29. 17:48

                                                                                   1937년、히틀러와 무솔리니(사진)

국가사회주의자 히틀러와 무솔리니이다 오직 히틀러의 <독일국가사회주의 노동당>만이 빵과 일자리를 줄 수 있다 따뜻한 집과 귀여운 아이들 그리고 가족들이 편안하고 배부르게 먹으며 살 수 있는 <천년제국> 건설은 오늘날 독일에 사고 있는 게르만의 소망이며 지상명령이다  프랑스 놈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러시아의 백정놈을 모조리 몰아낸 다음 <선민 게르만=하늘의 자손>이 살아갈 터전을 확장해야 한다  이탈리아군의 대원수였던 무솔리니는 독일군 하사관 복장을 한채 처형당했다

 

 1.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독일어: Adolf Hitler, 오스트리아,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독일정치가로, 나치총통(대통령 겸 총리)이었다.

뛰어난 웅변술의 소유자였던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유 체제 하의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상황 속에서 베르사유조약의 군사 관련 제한 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확장, 실업 극복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실업대책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슐라이허 내각에서 수립한 계획이었고, 히틀러는 그 열매를 따먹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후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및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전쟁중 그의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강제수용소가스실에서 학살당했으며 바로 그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외 나치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로는 집시, 장애인도 있는데, 집시들은 나치의 강제수용으로, 장애인들은 의사들과 결탁한 조직적인 안락사로 학살당했다. 이러한 나치의 범죄는 집시와 유대인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준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고,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 포위 아래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지하 벙커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물면서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  그러나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 자살을 했다는 증언도 있으며 소련에 의해 독약 자살로 판단되는 등 여전히 의문거리이다.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이미 알로이스에게는 알로이스 2세라는 장남과 안젤라라는 딸이 둘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 낳은 클라라의 아들 둘과 딸 한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일에 열중해있던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될까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 되고 결국 아돌프와 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 되던 해 당시 14세 였던 그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1)유년시절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적 '아디'라고 불렸으며 1895년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 피슐람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우들과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매우 우수한 학생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점차 아버지 알로이스와 마찰이 잦아졌으며 그 중 특히 진학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히틀러 평전에 따르면 히틀러는 자아가 강하고 학업 성적은 전혀 우수하지 못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사진은 그의 자기 중심적인 자세를 잘 보여준다.

13세 때 오스트리아 에서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그의 아버지는 아돌프 역시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돌프는 당시 웅장한 건물을 스케치를 하는데 매료되어 있었으며 인문계 학교로 진학해 미대에 가길 원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에게 관대했던 어머니 클라라와는 달리 엄한 꾸중과 화가나면 손찌검도 마다않는 그의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그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꿈을 짓밟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으로 학업에 매우 불성실해졌다. 끝내 화가의 꿈을 접지 못한 그가 좋아하는 일이라곤 그저 린츠의 건물을 스케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의 저서 '나의 투쟁(독일어: Mein Kampf 마인 캄프)'에서 그는 자신이 반유대주의, 독일 민족주의에 입각한 레오폴드 푓슈라는 역사 선생님의 수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며 비교적 주위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마치 역사에 관해서 만큼은 조예가 깊은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경우가 종종 있으나, 나의 투쟁(Mein Kampf)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선전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견해가 통설이며 실제로 역사 시험에서도 낙제를 면치 못할 수준의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자신의 독일 민족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부풀려진 점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03년 1월에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13세였던 아돌프는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식 내내 펑펑 울 정도로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더욱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성적은 바닥을 기게 되었다. 그는 자취나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으며 주말에는 어머니가 계신 집에 돌아왔다. 후에 그는 린츠의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고 스테이르라는 곳에 있는 작은 학교로 전학한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16세 되던 해 병으로 1년간 학교를 쉬게 된 것을 계기로 그 학교를 자퇴했다. 병이 완쾌된 것을 기념하여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길옆에서 누워자던 아돌프 히틀러는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깨워 겨우 일어나게 되고 이에 크게 느낀바가 있어 이후 죽을 때까지 금주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클라라는 유방암으로 고통받다가 1907년 사망했다.

 

 (2)청년시절

아돌프는 그가 18세 되던 해인 1907년 10월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그곳에서 고아들을 위한 약간의 보조금을 받고 이어 빈의 미술학교에 두 번 지원했지만 두 번 모두 학교측으로부터 입학을 거절당한다. 하지만 교수가 히틀러의 건축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보고 건축가가 되라고 조언을 해준다. 그래서 히틀러는 건축가가 되기 위한 꿈을 가지고 건물 스케치와 여러가지의 도안을 완성한다. 그렇지만 건축가가 되기위해선 높은 학력이 필요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21살 되던 해에는 받았던 보조금마저 끊기게 된다. 대신 아주머니로부터 약간의 돈을 물려받게 되는데 이마저 곧 바닥이 나게 되고 이후 그는 몇 년 동안 엽서에 담긴 그림들을 그대로 다시 그려 상인에게 되파는 일개 그림장이 신세가 된다. 당시 그는 여전히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시설에 살고 있었고 매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며 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종종 리하르트 바그너게르만 민족신화에 관련된 오페라를 감상하였다.

히틀러가 활발한 반유대주의자가 된 것은 빈에 있을 때부터였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가 자랐던 오스트리아의 기독교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빈에는 그리스도교의 한 종파인 동방정교회 신도를 포함한 큰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 빈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히틀러는 정치 평론가 란츠 폰 리벤펠스나 정치가 카를 뤼거, 비엔, 게오르히 리터 폰 쇠너러의 영향을 받아 후에 그의 정치관념의 밑바탕이 되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배웠다. 결국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는 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영향을 끼쳤다

(3)화가로서의 히틀러

히틀러는 비엔나 콩쿨 대신 린츠 실업학교로 진학하면서 화가로서의 그의 생활이 단절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1913)'등의 다수의 명작들을 남겼다. 현재 히틀러의 작품 중 한 점이 한화로 1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에 경매 낙찰되기도 했는데 그의 그림은 화가로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독재자였기 때문에 히틀러가 그린 그림들은 그림으로서의 작품성보다 화가의 인물적 특징이 훨씬 이슈가 되었다

(4)독일 제국으로

 그는 1913년바이에른 주의 뮌헨으로 갔다

ㄱ.제1차 세계 대전

뮌헨으로 간 지 얼마 안 되어 오스트리아로부터 체포 영장을 들고 온 수사관들이 히틀러를 찾았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군 징집을 거부하고 독일로 도망간 것이다. 히틀러는 이때 몸이 허약하여 도저히 군복무를 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면제 판정을 받았지만, 히틀러는 슬라브족과 유태인으로 혼탁한 오스트리아군에서 군복무를 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그에게 오스트리아는 조국이 아니었고, 그의 조국은 순수 독일인들로 구성된 독일 제국이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징집을 거부한 것도 그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선포되었다. 뮌헨 오데온 광장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장교 앞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 히틀러가 우연히 촬영되었다. 히틀러는 즉시 바이에른 16 보병연대 입대를 자원했다. 그에게 마음의 진정한 조국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ㄴ.군복무 시절

상병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패배의 충격으로 인한 히스테리성 실명에서 회복되자, 뮌헨의 제4군 사령부로 복귀해 활발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9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싹트고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 중 하나를 조사하라는 군 정보부의 명령을 받았다

ㄷ.나치당에 입당하여 지도자로

그러나 히틀러는 오히려 1919년 9월 독일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라는 극우 정당에 당원증 제555번을 받으며 입당했다. 히틀러는 곧 당내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고 지도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0년 초,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0년 2월 24일, 뮌헨의 커다란 맥주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 모인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히틀러는 그의 동지들이 추구하고 있는 운동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짧게 나치당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독일어 약자로 NSDAP)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민주공화제의 타도와 독재정치의 강행, 베르사유 조약의 타파,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 그리고 백화점과 국제 자본 공격 등을 포함한 25개 조항의 당 강령을 발표했다.

베니토 무솔리니파시스트당로마 진군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으며 부상당하였다.

그 사건으로 란츠베르크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정복할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비록 수감 생활은 6개월로 끝났으나 당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다. 히틀러는 흩어진 당원들을 다시 모으고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당의 재건은 쉽지 않았다. 독일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극좌와 극우 정당들은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실직자 수가 6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정당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나치스는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단독 집권을 요구했다. 1932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1340만 표(36.8 %)까지 득표하였으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원래는 장군)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 %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는 33.1 %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사회주의를 싫어하는 자본가나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5)독재자가 되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계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약칭은 총통)’이라 칭하였다.

ㄱ.나치스의 집권

전권위임법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했고 제3제국이 시작되었다. 지방 의회가 해산되고 사민당은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각종 단체와 조합들이 나치당의 하부조직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나치 조직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하면서 1934년 6월 30일 장검의 밤 나치 돌격대 지휘관 에른스트 룀을 제거, 이후 일어난 바르톨로메오의 밤 권력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비밀을 알고있는 슐라이허 장군의 제거를 통해 오래된 청구서를 모두 해결하였다.

그후 독일 국방군은 나치 당원에 융합되었고, 이러한 권력 인수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ㄴ.지구수도

히틀러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아심에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전 세계를 정복하면 전세계의 수도에 해당되는 도시를 계획했다. 히틀러의 패망으로 이 계획은 김칫국을 마신 꼴이 되었으나 굉장히 치밀하고 크게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르라는 건축가를 고용하여 1938년에 세계수도'게르마니아'를 오늘날 베를린에 해당되는 지역에 계획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슈페르는 나치제국의 2인자적 지위를 누린 파시즘 건축가였다. 히틀러와 나치제국의 영화를 과장하기 위한 도시와 건축을 짓는 일에 몰두한 그의 건축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파쇼에 대한 광신이었으며, 그런 건축은 극도로 인간을 왜소하게 하고 마비시키며 파멸케 하는 힘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게르마니아를 조성하기 위해 슈페르는 오랜 역사의 문화적 흔적들을 깡그리 지우며 무려 7km에 달하는 직선도로를 내고 그 도로의 끝에 300m가 넘고 18만 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돔의 국민대회당(Grosse Halle)을 세웠다. 그러나 비뚤어진 민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슈페르와 히틀러의 광신적 신전을 위한 이 허망한 도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공사가 중단됨은 물론 전대미문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6)제2차 세계대전과 죽음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했다. 이는 스탈린이 히틀러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폴란드를 히틀러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의 군사조약이 있었으나 소련의 도움없이는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기자들에게 '앉은뱅이 전쟁' 이라고 불리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은 너무 늦었으며 미국은 국내 여론 때문에 고립주의를 천명하며 직접 개입을 삼가하고 있었다. 공습 및 기계화 부대의 신속한 기동력이 결합한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법으로 독일은 벨기에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프랑스마저 항복하였다. 1940년 말까지 히틀러는 서부 유럽과 북부 유럽 전체(중립국인 에스파냐, 포르투갈, 스위스, 스웨덴은 제외)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영국에 우세한 공군을 쏟아 부어 폭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게는 패배하였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왕국그리스 왕국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연합군의 마지막 보루인 영국에 공습을 퍼부어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배틀 오브 브리튼이 실패했음에도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고, 10월에는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스키 작전에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에 밀린 이탈리아가 영국군에 항복,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항복을 하게 되고 독일군은 천왕성 작전으로 인한 소련군의 반격에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에게 패하고 치타델 작전의 대표적인 공격으로 대표되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전략적으로 패배하고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독일 본토까지 밀어내고 베를린을 점령함으로 곧이어 제2차세계대전의 끝이 났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소련의 매서운 겨울앞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 12월 7일 일본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전쟁은 전기를 맞게 되었다. 나흘 후 히틀러는 미국선전 포고를 했다.

그 후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괴멸, 북아프리카 전선의 상실, 암살 미수로 인한 히틀러의 정신 이상 등이 초래한 전선의 혼란, 미국의 참전으로 전열이 더욱 두터워진 연합군의 진공으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는다. 1945년 4월 30일 절망한 히틀러는 벙커에서 음독 자살하게 된다

 -히틀러의 독일 민족과 現存權 연설문(1937년 10월 6일 독일국회 연설자료) 그리고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당

 http://blog.daum.net/007nis/9014058

 

 

 2.무솔리니 [Mussolini, Benito Amilcare Andrea]

별칭은 Il Duce(이탈리아어로 '지도자'라는 뜻).

1883. 7. 29 이탈리아 프레다피오~1945. 4. 28 동고 근처.

유럽 최초의 파시스트 지도자로서 이탈리아를 세계대전 속으로 끌어들여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인물이다

 

 (1)초기 생애

베니토 무솔리니는 1883년 7월 프레다피오에서 대장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무솔리니는 자신의 비천한 출생을 내세우며 '인민의 아들'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국방경비대 중위의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대장간일 틈틈이 사회주의계 언론에 참여하기도 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므로 그의 주장만큼 비천한 배경은 아니었다. 그의 가족들은 낡은 팔라초 2층에 마련된 비좁은 방 2칸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선술집 논쟁으로 소일했던 아버지는 그나마의 수입을 첩에게 탕진하기가 일쑤였으므로 가족의 끼니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반항적이고 다루기 힘들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아이였다. 그는 학교에서는 난폭했고 집에 들어와서는 변덕스러웠다. 마을학교의 교사들은 이러한 학생을 감당하지 못하여 파엔차에 있는 엄격한 살레지오회 수도원학교에 보냈으나, 동료학생을 주머니칼로 찌르고 체벌을 가하려던 수사에게 덤벼드는 등 말썽은 계속되었다. 포를림포폴리의 조수에카르두치 학교에 편입한 무솔리니는 또다시 동급생을 공격함으로써 정학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명석했던 무솔리니는 어려움 없이 졸업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고 교사자격증을 취득, 얼마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이내 교사직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강인한 턱과 꿰뚫어보는 듯한 검은 눈을 가진 작고 창백한 19세의 무솔리니는 카를 마르크스가 새겨진 니켈메달만을 간직한 채 이탈리아를 떠나 스위스로 갔다. 청년 무솔리니는 이후 몇 달 동안 이일저일을 전전하면서 간신히 연명해갔다.

이무렵 무솔리니의 기묘한 매력과 특출한 말재주는 뭇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일관성 있는 자신의 사상체계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칸트·스피노자·크로포트킨·니체·헤겔·카우츠키·소렐에 심취했던 그는 비범한 인성과 당당한 풍모를 지닌 미래의 혁명가로서 동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후 저널리스트이자 대중연설가로서 명성을 쌓은 무솔리니는 노동조합의 선전운동에 관여해 파업을 주동하고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폭력의 사용을 옹호했으며 거듭 복수의 날이 다가올 것임을 역설했다. 1904년 로마의 일간지들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귀국사실을 일제히 보도했다.

 귀국 후 얼마동안 무솔리니의 동정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후 우디네 북쪽 베네치아알프스 지역에서 다시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나 그것은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듯이 '도덕적인 타락의 연속'이었다. 쓸모없는 허송세월에 염증을 느낀 무솔리니는 노동조합운동과 저널리즘 그리고 급진주의 정치노선으로 다시 복귀했으며 체포와 투옥의 나날이 이어졌다. 1909년 자유의 몸이 된 무솔리니는 16세의 라첼레 구이디와 사랑에 빠졌고 포를리의 비좁은 아파트에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얼마 후 그들은 결혼했는데, 라첼레는 무솔리니 아버지의 정부의 둘째 딸이었다. 결혼 직후 무솔리니는 통산 5번째의 구금생활을 맞이하지만 그무렵 가장 촉망되는 동시에 가장 위험스러운 청년 사회주의자로서 부각되기 시작한다. 수많은 사회주의 일간지의 논객이었던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계급투쟁 La Lotta di Classe〉지를 창간,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마침내 1912년 사회당 기관지 〈전진! Avanti!〉의 편집장으로 위촉되었다. 무솔리니는 〈전진!〉의 발행부수를 2배 이상 끌어올리면서 반군국주의·반제국주의 논조를 통해 이탈리아의 제1차 세계대전 개입을 강력히 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곧이어 무솔리니의 심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의 혼란이 사회혁명을 촉발시킬 여건을 조성해주기도 한다는 마르크스의 언명에 마음이 흔들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전주의자를 자처했던 태도를 바꾸어 대뜸 전쟁개입을 옹호하는 논설과 연설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패배할 경우 유럽의 자유주의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 변명의 요지였다. 무솔리니는 〈전진!〉의 편집장직을 사퇴했고 사회당은 그의 당적을 박탈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한 출판업자의 재정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인민 Il Popolo d'Italia〉지의 편집을 담당하게 된 무솔리니는 이제 분명하고 뚜렷한 어조로 새로운 철학을 천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후 이탈리아 민족은 단지 이탈리아 민족일 뿐이다. 철과 철이 만나고 우리의 가슴 속에서는 한 가지 외침이 터져 나온다. 이탈리아 만세!" 파시즘의 탄생을 알리는 첫닭이 울고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장으로 달려나갔다.

 

 (2)권력쟁취

베르살리에리(Bersaglieri:저격대)에 복무하던 중 부상을 입은 무솔리니는 확고한 반사회주의자이자 운명론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찍이 1918년 2월 그는 구체제의 악폐들을 완전히 청산해낼 수 있는 단호하고 정력적인 독재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3개월 후 볼로냐의 대중집회에서 자신이 그러한 지도자가 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이듬해 밀라노에서는 무솔리니의 야심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조직의 핵심부가 편성되었다. 피아차산세폴크로의 조직사무실에는 공화주의자·무정부주의자·생디칼리스트·사회주의혁명가·퇴역군인을 망라한 200여 명의 인사들이 새로운 정치세력의 구축을 위해 몰려들었고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의 릭토르(권력의 상징인 파시네[fascinae]를 들고 집정관의 앞길을 비키게 함)와 같은 결속력으로 뭉친 전위대라는 의미에서 이 세력을 '전투 파쇼'(Fasci di Combattimento)라고 이름 붙였다.
대중집회에서 무솔리니는 로마냐 무정부주의자들의 검은 셔츠를 일색으로 차려입은 수많은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검은 셔츠단). 당당한 그의 체격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으며 스타카토로 반복되는 웅변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태도는 연극조로 과장되어 있었고 생각은 모순투성이였으며 인용은 정확하지 못했고 악의에 찬 공격들은 방향이 어긋나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음에도 그가 구사하는 단어들에는 생동감이 넘쳐 흘렀고 은유들은 감탄스러울 만큼 적절한 것이었으며 반복되는 열정적인 제스처는 집회장을 메운 군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1922년 여름 드디어 무솔리니의 야망을 충족시켜줄 호기가 찾아들었다. 이탈리아 국민 전체가 우려하고 있었던 사회당의 총파업이 개시된 것이다. 무솔리니는 정부당국이 파업을 저지하지 않을 경우 파시스트가 직접 총파업의 분쇄에 나설 것임을 선언했다. 그는 나폴리에 모인 동조자들 앞에서 "우리에게 권력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로마로 진군해 직접 정권을 인수받을 것이다"라고 공표했고 격앙된 군중들은 일제히 "로마! 로마!"를 외치며 그의 열변에 호응을 보냈다. 청중들은 당장 로마로 행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늦게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간부들과 회동, 4일 내에 행동대를 로마에 입성시켜 콰드룸비리(Quadrumviri:4개 정당의 지도자 단체)의 병력에 합류시킬 것을 결정했다. 무솔리니는 타협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국왕이 서면 소환장을 발하기 전에는 왕국으로 나아갈 생각도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파시스트 동조자들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로마로의 대규모 행군을 시작했다. '로마 진군'은 선전기관에서 보도한 것만큼 질서정연하지는 않았지만 내각을 총사퇴로 이끌기 위한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파시즘이라는 대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조각위촉전문을 띄워보냈다.

(3)독재

최연소 이탈리아 총리(1922. 10. 31)로서 무솔리니가 가졌던 자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놀랍고도 갑작스러운 성공 이면에는 정치·경제 제반여건의 혜택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 자신의 인성이나 타고난 재능, 날카로운 상황판단과 선동가로서의 탁월한 자질 또한 그의 성공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파시즘의 지도자를 떠나서 이탈리아 전인민의 수장으로 부각되기를 원했던 무솔리니는 광범위한 비파시스트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했고, 중앙집권의 의사 또한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그 한해 동안 그는 완전한 독재권력을 창출해냈고 파시스트 당원들이 의회를 장악할 수 있도록 새로운 선거법(Legge Acerbo)을 통과시켰다. 1924년 의심할 여지없는 선거부정이 자행되는 가운데 무솔리니의 1인 독재체제는 확고한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무솔리니의 권위주의 통치방식은 이탈리아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끊임없는 파업과 소요 속에서 시달려온 국민들은 파시즘의 현란한 선전기술과 중세풍의 의장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경제가 안정궤도에 오르고 조국이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독재정치에 복종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무솔리니는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다줄 인물로 인식되었다. 기대한 바와 같이 질서가 회복되고 근로조건의 개선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공공사업계획들이 착수되기 시작하자 '일 두체'(Il Duce)는 전인민의 신뢰를 한몸에 받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언론들은 무솔리니를 천재나 초인으로 격찬했다. 짧은 시간에 그가 이룩해놓은 업적들은 마치 기적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분열과 혼란에 휩싸인 조국을 변혁시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산업가와 지주들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은 채 일련의 사회개혁과 공공사업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1929년 2월 무솔리니는 교황청과 '라테란 조약'을 체결, 60년에 걸친 교회와 정부의 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권력의 오만, 진정한 국가이익에 대한 몰이해, 제국에 대한 환상과 같은 것들이 팽창주의적 야심으로 이어지지만 않았더라도 무솔리니는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외정복의 야심은 먼저 아비시니아 고원으로 눈길을 돌렸고 10개월간에 걸친 준비와 풍설·위협 그리고 망설임 끝에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침공이 감행되었다. 유럽 제국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이미 일이 진행되어버린 이상 사태를 뒤집어놓을 다른 방책이란 있을 수 없었다. 국제연맹은 제재조치의 하나로 금수품목록을 작성했지만 유럽 전쟁을 유발시킬지도 모를 석유 등의 주요자원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언젠가 무솔리니는 "만약 연맹이 이탈리아의 석유수입에 제재를 가했더라면 파시스트 군대는 아마도 1주일 내에 아비시니아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라고 실토한 바 있었다. 곤혹스런 문제는 더이상 제기되지 않았고 1936년 5월 9일 밤 일 두체는 피아차베네치아 광장에 운집한 40만의 군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환희에 찬 성명을 발표했다.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된 지 14년이 되는 오늘 마침내 위대한 새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이탈리아는 제국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독일의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아프리카 원정을 적극 고무했고 이탈리아는 새로운 동맹세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로마와 베를린을 축으로 '강철동맹'이 체결되고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잔인한 동반관계는 그들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갔다

 

(4)제2차 세계대전

무솔리니는 조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평화유지가 절실히 요구되므로 맹목적으로 독일과 보조를 같이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독일과의 제휴가 손쉽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며 중립을 지킬 경우 이미 확보하고 있는 기득권까지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무솔리니의 사위로 외무장관이었던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은 팔라초베네치아에서의 결말이 나지 않는 오랜 토론과정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처음에 전쟁가입을 반대했던 무솔리니는 명예가 대전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는 종잡을 수 없는 뒷말을 내뱉었다. 총리는 승승장구하는 히틀러의 군대를 침통함과 놀라움 속에서 지켜보았고 새로운 승전보가 전해질 때마다 전의를 굳혀갔으나 독일군이 고삐를 좀 늦추거나 불의의 반격에라도 직면해 어느 정도 숨쉴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독일이 서부전선을 격파하고 프랑스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임에 따라 총리는 더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 정부는 대연합국 선전포고를 발령했고 이것은 큰 실수로 판명된다.
전쟁은 처음부터 이탈리아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군이 최소한의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굴복하고 말았고 히틀러와 회동한 무솔리니는 치아노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의 의견개진이 상담 정도의 가치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몹시 침울해졌다. 무솔리니는 추축국 동맹의 2류 지도자에 불과한 자신의 위상을 받아들여야 했다. 히틀러와 마주할 때마다 이탈리아군의 무력한 패배는 그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고 한마디 대꾸도 못한 채 과거의 승리와 미래의 계획에 관한 나치 총통의 장황한 연설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더욱이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기밀의 누설을 경계한 히틀러가 구체적인 계획들에 대한 언급을 전혀 회피한 채 기정사실만을 거론했던 점이었다. 독일군이 루마니아와 소련에서 기습작전을 전개했을 때 무솔리니는 아무런 사전연락을 받지 못했다. 이탈리아 군대가 한마디 통고도 없이 알바니아를 거쳐 그리스를 침공한 것은 히틀러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앙갚음을 하려는 무솔리니의 무모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공세는 치욕적인 참패로 끝을 맺었고 독일군은 마지못해 수렁에 빠진 무솔리니를 구출해야 했다. 히틀러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무솔리니를 위해 병력손실을 감당해야 했고 이제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붕괴 가능성에 대비해 사전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 상륙에 성공했다.
이탈리아 내 제반 정치세력들은 대책수립에 부심하고 있었다. 7월 24일 개전 이후 소집되지 않고 있던 '파시스트 대평의회'가 개최되었고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무솔리니의 총리직을 박탈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투표결과에 개의치 않고 지지자들의 항명사태를 믿으려 하지 않았던 무솔리니는 다음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무실에 모습을 나타냈으나 그날 오후 국왕을 접견하고 빌라 사보이아를 나서려는 순간 출동한 왕실근위대에 체포되고 만다. 무솔리니는 포차 섬에 이어 사르데냐 해역의 외딴 도서로 그리고 종국에는 아브루치 산맥 그란사소디탈리아의 한 호텔로 유폐되었지만 산기슭에 글라이더를 띄워보낸 독일 특공대의 도움을 받아 뮌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무솔리니는 독일에게 이탈리아 전지역의 점령·통치를 용인하는 대신, 북부에 새로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고 치아노를 비롯한 대평의회 반역자들을 처단하자는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살로에 세워진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SI)은 그러나 독일군 사령부의 배후조종을 받는 괴뢰정권에 불과했고 각료 한 사람이 회고했듯이 총리는 다가올 종말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환상을 꿈꾸며 역사와 그 속에서의 자신의 역할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연합군의 북진이 가속화하자 파르티잔 지도자들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처단을 결의했다. 무솔리니는 장남(둘째 아들은 전사)을 비롯한 여러 측근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산악지대에서 최후의 유격전을 펼치기 위해 바텔리나로 향했지만 총리의 추종세력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군 사병으로 변장, 인스부르크로 퇴각하는 트럭 행렬에 몸을 숨긴 무솔리니는 국경 부근에서 파르티잔에게 발각되어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하기를 고집했던 정부 클라레타 페타치와 함께 사살되었다.(1945년 4월27일 무솔리니는 코모근처의 한 호숫가 마을에서 빨치산에게 포로로 잡혀서 그의 애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총살당하게 됩니다.총살후 그의 시체는 밀라노로 옮겨지고 밀라노 로레터 광장의 한 주유소에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리게 됩니다.그의 인척과 경호원들 또한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