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반미전선의 한계 "박헌영의 미제간첩 처형과 임표 반란사건" 본문
북한 지도부내 김일성. 박헌영. 김두봉등 셋 사람의 노선상의 투쟁이 북한정부 통일방법상의 논쟁이다 김일성은 소련군 극동사령부 휘하부대 88특별여단(정찰특수부대) 대대장출신으로 남과 북 통일방법상 입장에서 무력통일 NLPDR 전면전을 주장했으며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위원장 출신으로 인민무장혁명과 서울점령론을 주장했다그리고 독립동맹과 신민당 출신으로 김두봉은 남북협상론을 제안했다
*아래 사진 설명: 소련군정 및 북로당 간부들 앞줄 우로부터 허가이. 김일성. 소련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령. 김두봉. 소련군 정치국장 이그나치포 대좌. 김책 뒷줄 우로부터 주영하. 박일만. 최창익등(북로당과 남침세력)
1.NLPDR과 전면전론자---김일성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과 전면론이란 김일성은 전쟁(무력)으로 부산과 제주도까지 점령해야 한다는 입장이 전면전론자들의 입장이다 -소련군 극동사령부, 만주지역과 사할린 그리고 일본열도 북방섬 일부 점령 -소련군 극동사령부, 한반도 38도선 이북 북한지역 점령(20만 소련군 북한지역 배치) -중국 공산화 그리고 소련군 극동사령부, 조선의용대 등 중국 공산화 참여 -1950년 전후 조선의용대와 소련군사령부 한인 출신 북한 인민군 창설에 참여 -만주 동북 3성 임표군대 김일성 남침 지원과 만주국 일본 관동군 탱크 지원 -1950년 6월 25일 김구 선생 1주기 그 날 남침 감행 독일 외무성 외교문서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소련지도부는 1949년에 한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김일성주석은 북한이 먼저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받아 남침을 감행하면 미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1950년 1월 소련의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은 김일성주석의 남침 지원 요청을 승인한다고 통보했다 두 지도자는 그해 4월 10일부터 25일 사이에 세 차례 회담을 가졌다 스탈린은 만약 미국이 병력을 개입시킨다면 소련은 북한을 직접 지원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김일성주석은 어쩔 수 없이 2005년 5월 13일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 모택동(마오쩌둥)에게 남침계획을 설명했다 모택동(마오쩌둥)은 만약 미국 군대가 개입하면 중국이 군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김일성 주석은 그러나 소련(소련군 극동사령부)의 지원을 바랐을 뿐 중국이 나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김일성 주석은 일본 관동군 무기와 북한의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1)한반도 공산화 이후 일본 공산화 시도도 가능했는가 논쟁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일본열도 공격을 시도했는가 논쟁--소련은 2차대전때 사할린과 일본 북방섬 일부를 점령했다 (2)1950년대 한국전쟁 당시 일본 사회당 정부는 북한정부를 지지했는가 논쟁 (3)미국 독자로 한국전쟁 개입을 했다면 북한 김일성부대 승리 할수 있었다는 자료 입장 그리고 유엔과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 남한정부 승리했다는 입장 (4)전면전 자료 ㄱ.낙동강 전선까지 점령한 부대는 만주지역 조선의용대와 소련군 극동사령부 조선인 출신 부대 간부들이었다 이들이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부지역에서 빨치산투쟁을 주도한 인물들이다(빨치산 부대 지휘관은 대부분이 북한 인민군 출신이었다) ㄴ.미국등 유엔군의 투입으로 북한출신 인민군이 당황했다 ㄷ.전쟁 이후에도 공중과 해상은 미국이나 영국등 연합군이 장악함으로 육지에서 인민군 승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본 공산화에 대한 위기로 일본 전체 국민들의 항거도 대단했다 ㄹ.급진적 무상몰수 무상분배 공동토지경작방식 토지개혁과 신계급 등장 중농계급 토지를 몰수하거나 공동 분배 방식으로 전환함으로 소자본과 중농등 자산계급(토지 소유자)들의 항거가 심했고 이승만정부 권력기관 면단위 행정기관을 해체하고 인민위원회 권력등장 과정에 인민재판으로 무고한 주민들의 처형이 많아지면서 주민 항거가 일어났다 -북한정부의 약탈경제 전쟁방식(범죄) 전쟁물자를 어음이나 조세등의 명목으로 빼앗아서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 이 전쟁방식은 미국등 연합군과 정반대 모델이다 미국등은 옥수수 가루나 밀가루등을 주민들에게 지원해주었고 전쟁물자를 자국이나 연합국에서 원조로 수행하지만 약탈전쟁 물자조달방식 인민전쟁은 현지 주민들에게는 큰 호응이 없었다
*린뱌오사건(林彪事件, 임표사건) 린뱌오사건은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공산주의 친소 임표진영과 실용주의 친미 친서방 주은래 진영의 투쟁에서 미국과 중국수교 그룹인 실용주의자 주은래진영의 승리로 내다보고 있다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88특별여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모태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였다. 소련은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의 충돌을 대비하고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자국군에 편입하고 88여단이라고 칭했다. 소련군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동북항일연군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련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조선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극동사령부 소련군 88여단에 소속돼 3대대 중 1개 대대를 지휘하는 대대장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 김정숙도 항일 빨치산 출신이면서 극동사령부 소련군 88여단 군인출신이었다 극동사령부 88여단은 한국인. 만주인(여진족). 중국인들으로 구성된 사할린. 일본열도 그리고 만주. 한반도등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기 위하여 조직화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중심의 반일연합전선 군대조직이었다 2005년 3월 저녁 북한주재 러시아대사관 방문과 러시아전쟁 60돌 기념메달 받아
2.남로당 독자적 무장혁명과 서울점령론---박헌영 노선 --김일성(북한출신, 북로당)과 박헌영(남한출신, 남로당)의 사상투쟁--
박헌영은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위원장, 북한 외무성 부수상 출신답게 남한 민중 스스로 무장혁명과 투쟁을 촉구했다 그리고 남침방법론상에서도 개성과 서울을 점령한 후 이승만정부와 협상을 주도하면서 명분을 축적하면서 남한 민중 스스로 무장혁명을 일으킬 것을 주장했다 (1)노동당내부 남로당 계열 주도권 장악논리 (2)남한혁명은 남한 민중 스스로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논리--남한운동권 독자론 입장--남로당 당원에 의하여 남한 혁명 추진 주장 (3)서울점령한 후 이승만정부와 협상을 중시했으며 남한 민중 스스로 투쟁 촉구 (4)한국전쟁 당시 박헌영 노선 논리 북한 인민군이 남침을 할때 지하 남로당이 무장혁명으로 면.군. 시등 행정기관 장악하라 통지 그리고 유엔군이 한국전쟁 개입 이후에는 빨치산 투쟁을 촉구했으며 독자적인 빨치산부대가 아닌 인민군에 가담하라는 지시 (5)한국전쟁 이후 박헌영 노선 논리--전쟁패전은 김일성 극좌모험주의로 책임 허가이.박헌영등의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 지지와 이승엽등은 강동정치학원 중심으로 무장혁명 투쟁을 주도하다가 미국 간첩으로 제거 처형됨 (6)1955년 12월 5일 반당. 종파분자. 간첩방조. 정부전복음모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됨---미국간첩과 남한정부 스파이로 처형 (ㄴ)남한 간첩행위
*5차 당 중앙위 전원회의와 박헌영. 이승엽 재판 자료 5차 당 중앙위 전원회의가 끝난 후부터 이 회의의 문헌토의사업을 전당적으로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핵심인물 12명이 반국가,반혁명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이어서 박헌영도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승엽 등 12명에 대한 재판은 전쟁이 끝난 1953년 8월 3~6일까지 최고재판소 특별군사법정에서 4일간 열렸고 윤순달(15US)과 이원조(12년)를 제외한 10명 전원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이로부터 2년 4개월이 지난 1955년 12월에 열렸다. 재판 결과 박헌영에게도 사형이 언도되었다. 박헌영,이승엽 사건의 주요 피고인들은 아래와 같다. ■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 피고인들 •박헌영(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내각 부수상) •이승엽(당 비서 겸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 •조일명(문화선전성 부상) •임화(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 •박승원(당 연락부 부부장) •이강국(무역성 조선일반제품 수입상사 사장) •배철(당 연락부 부장) •윤순달(당 연락부 부부장) •이원조(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백형복(전 남한 치안국 중앙분실장) •조용복(인민검열위원회 상급 검열위원장) •맹종호(인민유격대 10조 대장) •설정식(인민군 총정치국 정치위원) 이들의 죄목은 간첩행위, 남한 내 민주 세력의 파괴행위, 북한 정권 전복 음모 등 세 가지였다. “박헌영은 일제시대부터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연결돼 미국의 간첩이 되었고, 1925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됐다가 공산당 지도자들을 밀고해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미군정과 연결돼 남로당의 혁명역량을 파괴했고, 한국전쟁 시기 남로당 계열을 사주하여 공화국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였다. 이승엽 역시 해방 후 미군의 고용간첩이 되어 남로당의 기밀들을 넘겨주어 남한의 민주역량을 파괴했고 북한에 들어온 뒤에도 그러한 행위를 계속하다가, 남로당 계열의 불평분자들을 끌어모아 금강정치학원을 중심으로 무력을 확대하면서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북한에서 박헌영,이승엽 사건 당시 직접 검열사업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노동당 고위간부 출신인 신경완은 한 월간지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박헌영은 나름대로 야심과 속셈이 있었다. 그는 야망에 차 있던 남조선 해방이 물거품처럼 사라지자 전쟁 패배의 요인을 김일성의 지휘 잘못으로 몰아붙여 일격에 김일성을 권좌에서 축출할 꿍심을 품고 있었다. 박헌영은 따라서 미군과 한국군이 또다시 밀고 북상해 오면 1950년 10월처럼 밀려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때 김일성에게 일격을 가해 당권과 정권을 탈취하리라 꿈꾸며 자기 속셈을 차리는 일을 암암리에 진행했다. 박헌영 일파는 김일성에게 인민군 재진격시 배후에 침투해서 배후에 침투해서 유격투쟁할 수 있는 유격대를 조직한닫고 속이고 자기 일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북으로 밀려들어온 남로당원들로 유격부대를 조직하여 평양 주변의 중화와 상원에 제1지대,제3지대,제7지대,제11지대를 구성하여 집중 배치하고 10지대는 황해도 연백군에 배치했다. 그리고 남조선 혁명간부(공작원,유격대)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김일성과 한판 싸울 때 필요한 돌격대를 육성하는 금강학원이란 것을 김일성계의 이목에서 멀리 떨어진 황해도 서흥의 깊은 산골에 설치하고 돌격대를 육성했다. 박헌영은 한국전쟁 전에 김일성에게 남한에 20만 명에 달하는 정예 남로당원이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인민군대가 밀고 내려가기만 하면 도처에서 폭동을 일으켜 인민군대와 합세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단 며칠 만에 전국을 해방시키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렇지만 남로당원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전쟁은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종결되고 말았다. 전쟁이 종결되면서 남로당은 괴멸했고, 박헌영은 돌아갈 곳도 지지기반도 상실했다. 때문에 박헌영은 적당한 시기에 김일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공화국 전복 음모’를 계획했다는 것이다.
3.김두봉의 남북대화와 남북협상론 김두봉은 원래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김두봉은 부산기장(부산 김해) 출신으로 연희전문과 한글학회 출신 학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한 인물로 김구 김규식등과도 친분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 신민당을 창당했으며 북한정부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고 여운형.김구. 김규식등 남북협상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남북전쟁보다는 외교적으로 협상적으로 남북통일을 해야 한다는 입장 인물이었다 그러나 남한사회에서 여운형.김구. 김규식등 친중국 인사들이 제거되고 남북협상론자 입지가 약화됨으로 실제로 실권자가 아닌 명목상 지도자로 전락하였고 김일성 우상화 신격화 작업으로 아무런 평가없이 쓸쓸하게 죽었다 -김규식(한국독립당)과 김두봉(조선독립동맹)의 회담으로 광복군 창설 -광복이후 서울에 왔다가 평양으로 입북 -남북 신민당 창당 -여운형과 남북협상 -김구.김규식과 남북협상 -김구선생 사망 1주 기념 그 날 남침(6월 25일)
|
*남과 북이 전쟁통일이 아닌 평화통일 되기 위해서는 반미, 반공 극단주의 국가사회주의과 공산주의, 독재주의(전체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 통일이 가능합니다
남과 북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민주정부로 나아가야 합니다 러시아는 구소련 공산정부를 타도하고 등장한 자유민주정부이고 중국 호금도정부는 공산정부를 수평적 권력교체로 등장한 사회정부입니다 북한정부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인정해야 합니다
*북한사회
-북한정부는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이 소유하며 개인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이 국가나 협농장등에게 토지를 50년기간 이내로 임대 받을 수 있으며 건물이나 주택등은 개인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상속도 가능하다 토지이외는 모든 자원이나 산업 전반적으로 개인의 소유와 상속을 인정하고 있다 북한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개인 소유재산이 아파트와 자동차등이다 북한이 아직도 공산주의 체제를 버려지 못하여 개인 재산을 약탈하는 국유화에 대한 우려가 많아 북한 주민 개인 금고 지하자금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외국인 권리와 보호흘 천명함으로 주정부 토대를 마련하며 중국인(한족)이나 만주족등 회유정책이나 투자 유인
-17세이상인 자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며 대학부터는 유상교육이다
-주민들에게 시위. 파업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결혼의 자유 보장(애정권을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확대하여 국가가 보호한다)
-북한정부의 참심제, 배심제 재판제도
참심제는 베심제와는 구별되나 그 기능이 유사하다 참심제란 참심원(參審員)이 법관과 함께 합의체를구성하여 제판하는 제도를 의미한(참심원이란 구긴의 선거에 의하여 선출함) 참심제는 법관과 함께 재판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법관과 독립하여 판정을 내리는 배삼과 구별된다 참심제는 독일 구 법원(區 法院)이나 신의주특별행정구 법원 그리고 남한 해난심판법에 의한 해난심판에 참심제를 규정하고 있다
배심제란 법률전문가가 아닌 국민 중에서 선출된 배심원(陪審員)이 심판을 하거나 기소(起訴)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배심에는 심리배심과 기소배심의 두 가지가 있다 심리배심(心理陪審-小陪審)에는 심판 또는 심리를 말한다 공판배심이나 심판배심이라고 한다 기소배심(起訴陪審-大陪審)은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배심을 말한다
배심제는 사법과정의 민주성을 확보하고 검찰의 인권침해나 무고(無告)사건등을 방지하고 법무부와 사법부의 관료화, 부패화를 막는데 기여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법부 독립을 보장하고 권력의 시녀에서 독립할 수 있다 배심제는 일본과 미국, 영국등 모든 선진국에서 실행되고 있다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포유류 화석 효고현에서 발견돼 (0) | 2008.06.12 |
---|---|
로모노소프대학 출신이며 우즈벡공화국 타슈겐트주 당비서 허가이(許哥而) (0) | 2008.06.01 |
부시대통령과 올메르트 총리 이스라엘 마사다 요새 방문 사진 (0) | 2008.05.16 |
호지명-조국 베트남을 벗 삼아 살아기 때문에 그의 2세가 없는 혁명가 일생 (0) | 2008.05.05 |
진시황제 무덤 사진 자료 (0) | 2008.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