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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지명-조국 베트남을 벗 삼아 살아기 때문에 그의 2세가 없는 혁명가 일생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호지명-조국 베트남을 벗 삼아 살아기 때문에 그의 2세가 없는 혁명가 일생

CIA Bear 허관(許灌) 2008. 5. 5. 08:36

호치민(胡志明)은 어릴때부터 유교적 소양을 익혔다
그의 정신적 성장의 초기 모델은 유교적 지식인 쉽게 말하면 청렴 강직한 선비였다
30여년 동안 베트남 민족운동의 최고지도자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가장 영향력 있는 유교적 민족주의 사회주의자로 꼽힌다
"그는 그의 시체를 화장하기를 권유했으며 왕조이나 개인 우상화를 거부했다 그는 조국 베트남을 벗 삼아 살아기 때문에 그의 2세가 없는 혁명가로 일생을 살았다" 호치민(胡志明)은 공산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아닌 민족주의자었다

1.초기생애

민족해방 최고 지도자이자 베트남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 호치민(Ho Chi Minh 1890-1969)
호치민의 본명은 구엔 타트 탄(Nguyen That Thanh)이며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민중봉기가 한창일 때 구엔왕조(阮氏王朝) 잡안의 하급관리 출신 유학자의 지방 가난한 학자인 구엔 신 후이의 아들로 태어나 킴리엔 (게안省)이라는 마을에서 자랐다. 어린시절을 비참하게 보냈지만 14~18세에 휴에 있는 문법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뒤에 판티에트에서 교사로 지냈고 이어 사이공에 있는 기술훈련원 견습생이 되었다.

 

 

2.외국 여행과 공산주의 신조의 성숙

1911년 그는 바(Ba)라는 가명으로 프랑스 증기선의 요리사 자리를 얻어 3년 이상을 선원으로 지내면서 아프리카의 여러 항구와 보스턴이나 뉴욕 등 미국의 도시를 여행했다. 1915~17년 런던에서 생활한 다음 제1차 세계대전 중반에 프랑스로 옮겨 그곳에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火夫)로 일했다. 1917~23년 프랑스에서 지내는 6년 동안 그는 구엔 아이 쿡('애국자 구엔')이라는 이름으로 적극적인 사회주의 활동을 폈다. 그곳에 사는 베트남인들을 조직화했고, 1919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모인 강대국 대표들 앞으로 8개 조항의 탄원서를 보냈다. 탄원서에서 호치민은 프랑스 식민정권이 인도차이나와 식민지 국민들에게 통치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줄 것을 요구했다. 평화회의 중재자들로부터 아무런 반응도 얻어내지 못했지만 이 일로 인해 그는 정치의식이 있는 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다. 다음해 러시아 공산혁명의 성공과 레닌의 반제국주의 정책에 자극을 받아 1920년 12월에 사회당을 탈당하고 프랑스 공산당에 가담했다. 그후 자신이 발간하는 잡지 〈파리아 Le Paria〉('추방자')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의 해악을 고발했다.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노동자 계층의 많은 지도자들과 사귀었는데, 그곳에서 수년 간 투쟁활동을 벌이고나서 1923년말 모스크바로 갔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은 뒤 그는 〈프라우다 Pravda〉지에 레닌에 대한 감동적인 고별사를 실었다. 그뒤 그해 6월 17일부터 7월 8일까지 열린 제5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적극 참여했다. 이때 그는 프랑스 공산당이 식민주의 정책을 좀더 맹렬히 반대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대회에 제출한 그의 성명서 본문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압박받는 농민들(산업 노동자들과 대치되는 계층)의 혁명적 역할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신념이 최초로 공식 표명되었기 때문이다.
1924년 12월 호치민은 리 투이(Ly Thuy)라는 가명으로 공산주의의 요새인 광저우[廣州]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베트남 민족주의운동의 첫 간부 요원들을 모집하여 베트남 혁명청년협회를 조직했다. 이 협회는 탄 니엔(Thanh Nien)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협회의 회원들 거의 모두가 정치적 신념 때문에 인도차이나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로서 조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에 대항하는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모인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광저우가 인도차이나 민족주의의 첫 본거지가 되었다. 중국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장제스[蔣介石]가 1927년 4월 광저우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하자 호치민은 다시 소련으로 피신했다가 1928년 브뤼셀과 파리를 거쳐 시암(지금의 태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동남아시아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표로 2년 동안 지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중국 남부에 남아 있었다.

 


 

3.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

베트남 혁명청년협회의 단원들은 1929년 5월 홍콩에 모여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하노이나 휴, 사이공 같은 베트남 시에 있는 사람들은 적극적인 조직활동을 펴기 시작했으나 호치민의 부관들 가운데 몇 사람은 지도자의 부재 속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이때 호치민은 모스크바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다. 1930년 2월 3일 호치민은 시암에서 돌아온 후 공산당 창당을 주관했다. 처음에는 베트남 공산당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1930년 10월 이후 호치민은 소련의 충고를 받아들여 인도차이나 공산당(PCI)이라는 이름을 수용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국제적으로 더 폭넓게 인정받았고 베트남 공산당이라는 이전 이름에 내포된 소시민계급 민족주의의 인상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국면에서 볼 때 호치민은 주도적인 역할보다는 오히려 혁명활동의 조직을 생각하면서 여러 파당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중재하는 일을 더 많이 한 사람이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그의 신중함,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분별력, 모스크바를 멀리하지 않으려는 배려, 그리고 베트남 공산주의자들 가운데서 이미 이룩한 그의 영향력 등을 엿볼 수 있다.
PCI는 베트남의 폭력적인 반란운동과 동시에 발족되었다. 프랑스의 탄압은 잔인했다. 호치민 자신도 부재중에 혁명분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였다. 그는 처음에는 홍콩으로 피신했다가 그곳 프랑스 경찰이 도망범 인도에 대한 승인을 영국 정부로부터 받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상하이[上海]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30년 홍콩으로 건너가 국내 좌익조직을 결집하여 베트남 공산당<뒤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하였다 이듬해 홍콩에서 영국 관헌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이때 사망설이 나돌아 모스크바에서는 장례식까지 치러졌으나 1933년 석방되었다 )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7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호치민은 PCI의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는 호치민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정책인 인민전선(Popular Front:파시즘에 대항하는 비공산당 좌파와의 동맹)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36년 인도차이나의 공산당원들은 이 전략에 맞추어 자신들의 반식민주의 입장을 누그러뜨리고 '반파시즘 식민주의자들'과의 협력을 고려했다.
같은 해에 프랑스 총리인 레옹 블룸(Léon Blum)의 인민전선 정부는 인도차이나에 있는 좌파 세력들이 좀더 자유롭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호치민은 1930년에 받은 사형선고 때문에 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갈 수 없었다. 1937년 블룸의 인민전선 정부가 무너지자 인도차이나에 대한 탄압이 되살아났다. 1938년에 이르러 인민전선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4.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국가의 탄생
1938년에 호치민은 중국으로 돌아가 옌안[延安]에서 마오쩌둥[毛澤東]과 2개월 정도 같이 지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했을 때 호치민과 그의 부하인 보 구엔 지아프, 팜 반 동은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상을 진척시킬 계획을 꾸몄다. 이무렵부터 그는 호치민('깨우치는 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3인조·5인조 동지들이 1941년 1월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들어가 5월에 베트민이라는 조직을 구성했다. 이 단체의 결성으로 베트남 고유의 민족주의가 다시 강조되었다. 이 새 기구는 중국에서 장제스 정부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공산주의자인 호치민을 믿지 않았고 그를 체포해 버렸다. 따라서 호치민은 중국에서 18개월 동안 구금을 당했다. 이 기간에 그는 〈감옥으로부터의 비망록 Notebook from Prison〉이라는 유명한 책을 집필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한문 단시 모음으로 우울한 단상, 금욕적인 사고, 혁명을 주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동료들이 중국 남부의 최고 사령관인 장 파쿠에이와의 타협을 통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에 반대하고 장 파쿠에이의 권익을 지지하겠다는 조건에 동의해 그의 석방을 얻어냈다.
1945년에 베트남 혁명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길을 연 2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첫째,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를 완전히 점령한 뒤 모든 프랑스 관리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다. 둘째, 6개월 후에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은 이로 인해 철저히 패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써 베트남 독립동맹과 호치민의 가장 강력한 두 적이 무너진 것이다. 호치민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개월이 못 되어 그는 미국 군대와 접촉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OSS:미국의 첩보기관)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베트남 독립동맹의 게릴라들이 중국 남부 산지에서 적과 싸웠다. 그와 동시에 보 구엔 지아프의 요원들로 구성된 특별 기습부대가 호치민의 지휘를 받으며 1945년 봄에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후인 8월 19일에 그들은 하노이에 들어갔다. 마침내 9월 2일 바딘 광장에 구름같이 모여든 수많은 군중 앞에서 호치민은 묘하게도 미국의 독립선언을 연상시키는 말을 사용하여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되었음을 공표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 하였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불가침의 권리들과 생명·자유·행복을 주었다……!"

 



그러나 베트남 독립동맹의 장애물이 모두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연합군의 협정조항에 따르면 중국의 장제스 군대가 일본군을 대신하여 16°선 북쪽을 장악하도록 되어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당시 드골 장군의 영도하에 해방된 프랑스가 독립 베트남이라는 기정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베트남의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려 든 점이다. 10월 6일 자크 르클레르 장군이 사이공에 내린 뒤 2~3일이 지나자 중무장한 기갑사단이 도착했다. 3개월도 안 되어 그는 남베트남을 장악했다. 호치민은 계속 싸워야 할지 협상을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결국 협상하기로 결정했으나 언젠가는 싸워야 할 것에 대한 대비는 철저히 했다.
호치민의 전략은 프랑스 군대로 하여금 북쪽에 있는 중국 군대를 퇴각시키게 하고 나서 독립의 승인, 르클레르 군대의 철수, 베트남의 재통일을 보증할 프랑스와의 협약을 맺는 데 주력하자는 것이었다. 1945년 10월말에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군대가 독립에 대한 대화를 거절하자 호치민과 프랑스 군대 양측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3월이 되어서야 교착상태가 풀렸다. 호치민 편에서는 프랑스군에 제시한 요구에 대해 보다 폭넓은 지지기반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베트남 독립동맹 이외의 당들도 새로운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쪽에서는 중국 군대의 철수를 얻어내기 위해 외교사절단을 중국에 보냈다. 이런 조처가 취해지고 나서 르클레르 군대 일부도 북쪽 하이퐁에서 물러났다. 중국 군대의 철수가 확정된 뒤 호치민은 3월 6일에 프랑스군과의 협정에 조인했다. 협정조항에 따르면 베트남은 '자치정부·군대·재원(財源)을 가진 자유국'으로 인정되었으나 계속해서 파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행사하는 프랑스 연방에 통합되어 있었다. 12일 후 르클레르가 얼마 안 되는 군대를 이끌고 하노이로 들어갔고 군대는 제한구역에서만 활동하게 되었다.

 


 

5.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양측의 극단주의자들은 그 협정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호치민은 일련의 회의(1946. 6~9)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고 프랑스 정부와 2차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하이퐁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1946. 11. 20~23)로 깨지고 말았다. 이때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군대 사이에 충돌이 있은 후 프랑스 순양함이 하이퐁에 포격을 가했다. 거의 6,000명에 가까운 베트남인이 죽는 바람에 우호적인 화해에 대한 기대도 무너졌다. 병든 몸에 환멸을 느낀 호치민으로서도 좀더 호전적으로 보복하자고 나서는 추종자들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12월 19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몇 개월 후 북베트남의 한쪽 구석에 피신해 있던 호치민은 다시 파리와 접촉해보려고 했으나 파리에서 제시한 조건은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948년 프랑스군은 1945년 8월에 혁명을 지지하여 사임했던 전(前) 안남인(베트남인) 황제 바오 다이를 다시 제자리에 앉혀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조건은 2년 전 호치민에게 제안했던 것보다는 유리했다. 이때 프랑스가 이런 조건을 낸 것은 베트남의 전통 지배계층을 지지하여 베트민을 약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지압의 지휘를 받는 베트민 군대가 게릴라 전법과 테러 행위를 동원해 프랑스군과 바오 다이의 군대를 봉쇄해버렸기 때문이다. 1953년말 대부분의 베트남 지방이 베트민에게 장악되었고 좀더 큰 도시들도 사실상 포위상태에 있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결정적으로 패하게 되자 협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디엔비엔푸 전투)

 

 

6.제네바 협정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4년 5월부터 7월 21일까지 8개국 대표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 대표들과 함께 제네바에 모였다. 이때 베트남 대표는 2개 대표단, 즉 호치민 지지자들로 구성된 대표단과 바오 다이 지지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8개국 대표들은 베트남이 따르기로 되어 있는 1가지 협정을 체결하고서 회의를 끝냈다. 그 협정의 내용은 1956년에 실시하기로 예정된 선거 전까지는 베트남을 17°선의 경계로 나누었다가 선거 후에는 베트남인들이 통일된 정부를 세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제네바 협상에서 호치민이 행사한 역할을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를 대신하여 충실한 친구인 팜 반 동이 대표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국토의 분할이라는 조건과 자기들이 전쟁중에 정복했던 것보다 작은 영토를 통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베트남 독립동맹이 보여준 온건함은 일찍이 1946년 프랑스와의 협정에 조인했던 호치민이 세운 모범을 따르는 것이었다. 융통성 있는 이런 태도는 실상은 소련과 중국의 압력을 의식한 데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베트남 독립동맹이 모든 면에서 성과를 올린 것은 아니다. 베트남의 재통일을 보장할 수 있었던 선거가 미국과, 그당시 실제적인 기반 위에 세워진 남베트남에 의해 무기한 연기되자 하노이 쪽이 실패하고 만 것이다.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이 장악한 북베트남은 남쪽의 광대한 농업지역과는 단절된, 자원이 빈약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영토가 더 넓은 동맹국들인 중국과 소련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호치민의 통치는 탄압적이고 철저히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55~56년 농업개혁은 무지에서 나온 만행·탄압과 함께 시행되었다. 북베트남인들에게 '호 아저씨'로 알려졌듯이 호치민은 마음만 먹으면 대단한 인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45~46년에 행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전의 혁명활동들을 돋보이게 했던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했다. 이 늙은 정치가는 외교분야에서는 그래도 나은 행운을 누렸다. 그는 강대한 공산주의 두 동맹국 사이에서 능숙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모스크바와 베이징[北京](1955), 뉴델리와 자카르타(1958)를 오갔다. 심지어 1960년 모스크바를 여행할 때는 동맹국 사이에 중재자 역할까지 했다. 호치민은 경력으로나 선호도로나 소련과의 관계가 긴밀했지만 아시아 혁명 당시 중국이 맡았던 초기 역할을 잊지 않았다. 한편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모스크바와의 관계를 활용하는 일에 몰두하며 무엇보다도 베트남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는 두 공산주의 강대국 사이에서 노련하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결과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그는 양쪽으로부터 똑같은 양의 원조를 받았다.
1959년경부터 북베트남은 다시 전쟁에 개입했고 남 베트남에서도 고 딘 디엠 정권에 대한 게릴라(베트콩으로 알려짐)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1959년,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건설이 통일운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라오동(노동자의 당)의 입장표명이 있었으며, 그후 호치민은 정계의 제1선에서는 물러났지만 계속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6년 7월 17일 호치민은 북베트남인의 표어가 된, 다음의 메시지를 보냈다.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독립과 해방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또한 1967년 2월 15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의 친서에 대해 그는 "우리는 폭격의 위협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미국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혁명정신을 고무시키며 항전하다가 1969년 9월 3일 심장병으로 죽었다
8월18일 호찌민은 비서 부끼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주석관저,10평짜리 목조주택의 계단을 올라갔다. 마지막 걸음이었다.8월24일, 호찌민의 방은 병실로 변했다. 당의 정치위원들과 군사지도자들이 병문안을 왔다.5평도 채 안 되는 호찌민의 방안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가장 무더운 8월이었고 에어컨은 없었다. 비서 부끼는 호찌민의 머리맡에 앉아 계속 부채질을 했다. 호찌민은 손을 움직일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먹고 마시려 했다. 간호사 오안이 시중드는 것도 사양했다. 대신 다른 것을 부탁했다. “노래나 하나 불러줘.” 호찌민이라고 외롭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단 한 점의 혈육도 없었다. 라디오 소리만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호찌민은 라디오를 계속 켜두라고 했다. 최후의 순간은 다가오고, 호찌민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호찌민이 겨우 잠깐 잠이 든 것을 보고 비서 부끼는 라디오를 끈 다음 그도 잠깐 눈을 붙일 요량으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그 때 뒤에서 힘겹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끼 어이.(부끼야)” 놀라 몸을 돌렸을 때 호찌민은 라디오를 다시 켜라고 손짓했다. “아저씨, 왜요? 오랜만에 눈을 붙이시기에 쉬시라고 껐는데요.” 호찌민은 손을 저었다. “그래도 사람소리가 들려야지…….” 9월2일 오전 9시45분, 호찌민은 숨을 거뒀다.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던 비서 부끼와 보응우옌잡 장군이 그 곁에서 울고 있었다. 호찌민은 이미 임종과정을 찍지 말고 화장하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창밖에서 몰래 호찌민의 최후를 찍고 있었던 군대영화사 팜꾸옥빈의 촬영팀은 호찌민이 눈을 감은 뒤에야 방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소령으로 예편한 팜꾸옥빈은 호찌민이 자리에 누운 순간부터 임종하는 때까지 전 과정을 비밀리에 촬영했다는 사실을 집으로 찾아간 필자에게 밝혔다. 호찌민의 시신은 영구 보존처리되었고 그 장면도 모두 기록됐다. 장례절차까지 담은 이 필름은 최고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편집하지 않은 원본 그대로 비밀리에 보관되어 있다.
호치민은 어릴때부터 유교적 소양을 익혔다
그의 정신적 성장의 초기 모델은 유교적 지식인 쉽게 말하면 청렴 강직한 선비였다
30여년 동안 베트남 민족운동의 최고지도자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가장 영향력 있는 유고적 민족주의 사회주의자로 꼽힌다
"그는 그의 시체를 화장하기를 권유했으며 왕조이나 개인 우상화를 거부했다 그는 조국 베트남을 벗 삼아 살아기 때문에 그의 2세가 없는 혁명가로 일생을 살았다"
 
"호찌민이 눈을 감은 뒤 베트남에는 사흘 밤낮으로 비가 내렸다. 베트남 전역에서 울음소리와 눈물이 이어졌다. 남부 정권의 수도 사이공에서도 모든 상가가 철시했다. 장례기간 동안 베트남 전역에서 절도사건을 비롯한 불미스러운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남부의 대통령 우옌반티우조차 정중한 조의를 표해야 했다. 그토록 호찌민을 헐뜯었던 미국 언론들도 애도를 표시했다. 뉴욕타임스는 호찌민을 표지인물로 세우고 장문의 조사를 내보냈다.‘지금 살아있는 민족주의자 가운데 그만큼 불굴의 정신으로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 버티고 서 있었던 사람은 없다.’고. 그런 호찌민이 죽어서 남긴 것은 10평 남짓한 목조주택 한 채와 몇 권의 책이 전부였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살다가 무엇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호찌민, '호아저씨’라는 애칭으로...

 

*호치민(胡志明)---빛을 가져오는 자 또는 깨우치는 자

 


 

 

 

호치민과 후세인은 다른 인물이다
그리고 베트남전쟁과 이라크 전쟁도 다른 차원의 전쟁이다
호치민은 어릴때부터 유학을 신봉하면서 친중국 민족주의 사회주의자로서 그는 죽음에 임할때도 화장을 원했고 그에게는 자식(2세)이 없었다
그러나 후세인은 아랍민족주의 낫세르 사상에 물들어 이집트 카이로대학과 바그다드 무스탄 시리아대학을 졸업한 후 1957년 바트당(사회당)에 가입하여 1959년 카림 카셈의 암살기도 혐의, 1964년 알프레드정권 전복 음모등을 주도했고 1968년 군부와 손을 잡고 군사혁명에 성공한 후 1979년 이라크 대통령에 취임한 하였다 후세인은 1980년 아랍민족주의를 부정하고 샤트 알 아랍 수로(水路)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란 공격에 나서 8년 동안 이라크 이란전쟁을 치렀고 1990년 쿠웨이트를 무력침공 하였다
호치민은 민족해방 최고 지도자이자 베트남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이라면 후세인은 소련군부와 연합으로 아랍지역 침략자 패권주의를 주도한 인물이다
베트남전쟁은 베트남 지역에 개입한 프랑스, 미국등과 베트민 호치민군 사이의 민족해방전쟁이라면 이라크 전쟁은 아랍 침략자 후세인을 제거하는 평화전쟁이다
이라크 후세인을 지지하는 나라는 없다..
베트남정부도 베트남민주공화국 친중국세력이 1980년대 물러난 후 친소정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건국하여 베트남 중국 국경전쟁, 라오스. 캄보디아등지 침략함으로 패권주의 노선을 걸게 되었다 그 후 베트남도 경제적 악화와 빈곤으로 내전 위기로 나아갈 수 있었고 지금은 미국과 수교로 공산주의 경제보다는 시장경제도입과 자본주의 경제원칙에서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사상은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공산주의와 국가사회주의는 21세기 세계 발전의 해악이며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민주정부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릅니다 국가 패권주의를 차단하고 견제하기 위해서는 유엔과 각 지역단위 통합이 시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