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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전투 본문
1.김좌진 장군<金佐鎭:1889(고종 26)~1930>
김좌진<金佐鎭:1889(고종 26)~1930.>장군은 만주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해외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했다
(3) 민족유일당운동
1926년 10월 북경에서 결성된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韓國獨立唯一黨北京促成會), 1927년 4월의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진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進會) 등의 영향으로 만주에서도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28년 5월 전민족유일당촉성회의(全民族唯一黨促成會議)가 그것이다. 그러나 개회된 촉성회의가 단체 본위를 주장하는 협의회파와 개인 본위를 주장하는 촉성회파로 나누어지자, 김좌진은 촉성회파인 참의부 주류파 및 정의부 탈퇴자와 협력하여 1928년 12월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혁신의회를 통해 좌우합작으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신민부 지역인 중동선(中東線) 일대를 기반으로 1929년 여름에 자치조직인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여 주석에 취임했다. 1930년 1월 24일 영안현(寧安縣) 산시역(山市驛)에 있는 자택 앞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에게 암살당했다.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좌진 장군묘
Tomb of General Kim JwaJin
지정별 : 기념물 제 73호 소유 : 충남 보령시
지정 면월일 : 1989년 12월 29일 규모 : 25.344 m2
위치 : 충남 보령시 청소면 시대 : 1950
잘 관리 되어 있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옛날 사찰이나 큰 건물에는 이런식의 대문이 있지요..
이집의 정확한 용도는 모르지만 여기 지어놓은거 보니까...예전에 관리 사택 이었던거 같아요..
집의 뒤편 입니다..굴뚝이 있어요..
찢어진 창호지 사이로 사진을 찍어 보았어요....옷걸이가 보이길레..ㅎㅎ
왼쪽은 소나무이고 오른 쪽은 큰 느티나무 입니다...
장군의 묘가 두개가 있는데...앞의 묘가 장군 것이고 뒤의 묘는 부인 것인가요..? 설명은 없더 라구요..
소나무가 아주 멎드러지게 자라고 있어요...
독립군 장군...참으로 멎진 이름입니다..초등학교때 교과서에서도 배웠던거 기억나는데..
나오는 길에 시골에 아주 이쁜 집을 지었더라구요...그래서 한번 찍어 보았습니다..
2.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1)개요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일제가 1920년부터 계획한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토계획과 작전 그 자체를 무위로 만들었다.
(2)일본군의 진공과 독립군의 작전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 선발 보병 1개 중대는 매복사실을 모른 채 하루 전에 독립군이 행군한 길을 따라 백운평에 진입했다. 일본군 전위부대의 전병력이 공지 안에 들어서고 선두가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 보(步) 앞에 도달했을 때인 오전 9시에 독립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독립군이 은폐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응사하던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은 교전한 지 20여 분 만에 전멸했다. 뒤이어 도착한 야마다[山田] 토벌연대 본대는 전위부대의 전멸에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는 늘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로 1부대를 편성해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측면을 우회공격하려 했으나 절벽 위에서 조준 사격하는 독립군에 의해 막대한 희생을 치른 뒤 패주했다. 일본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해 매복한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정면과 측면을 산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지만 완전히 엄폐되어 있는 독립군의 반격에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일본군 토벌연대 본대는 자기편의 시체를 쌓아 은폐물을 만든 뒤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1,200~1,300명의 전사자만 더 내고 숙영지로 패주했다. 북로군정서군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해서 22일 새벽 2시 30분에 이도구(二道溝)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했다.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작전,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룩된 것이었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 선발 보병 1개 중대는 매복사실을 모른 채 하루 전에 독립군이 행군한 길을 따라 백운평에 진입했다. 일본군 전위부대의 전병력이 공지 안에 들어서고 선두가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 보(步) 앞에 도달했을 때인 오전 9시에 독립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독립군이 은폐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응사하던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은 교전한 지 20여 분 만에 전멸했다. 뒤이어 도착한 야마다[山田] 토벌연대 본대는 전위부대의 전멸에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는 늘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로 1부대를 편성해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측면을 우회공격하려 했으나 절벽 위에서 조준 사격하는 독립군에 의해 막대한 희생을 치른 뒤 패주했다. 일본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해 매복한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정면과 측면을 산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지만 완전히 엄폐되어 있는 독립군의 반격에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일본군 토벌연대 본대는 자기편의 시체를 쌓아 은폐물을 만든 뒤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1,200~1,300명의 전사자만 더 내고 숙영지로 패주했다. 북로군정서군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해서 22일 새벽 2시 30분에 이도구(二道溝)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했다.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작전,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룩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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