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전투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전투

CIA Bear 허관(許灌) 2008. 4. 5. 15:31

1.김좌진 장군<金佐鎭:1889(고종 26)~1930>

김좌진<金佐鎭:1889(고종 26)~1930.>장군은 만주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해외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했다

(1) 김좌진장군의 출신 및 계몽운동

본관은 안동.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아버지는 형규(衡奎)이다. 부유한 명문 출신으로 15세 때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지부를 조직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기호흥학회에 참여하는 한편 1909년 한성순보 이사를 역임하고,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조직했다. 서북학회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하여 교감을 역임했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했다. 1911년 군자금 모금혐의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2) 항일투쟁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1919년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했다. 같은해 8월 종래의 정의단이 임전태세의 군정부(軍政府) 조직으로 개편되자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2월 군정부가 명칭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했을 때,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했다. 이어 왕칭 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 산골짜기에 단기속성사관학교를 세우고 사관양성과 무기입수에 노력했다. 1920년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장백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10월 20~23일까지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나중소(羅仲昭)·박영희(朴英熙)·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일본군 3,0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뒤 북쪽으로 이동하여 헤이룽 강[黑龍江] 부근에 도착, 여기에 집결한 10여 개의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로 취임했다. 대한독립군단은 이듬해 일본군의 보복작전을 피해 대부분 병력을 러시아 자유시로 집결시켰다. 김좌진은 자유시로 가다 북간도에 되돌아와,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을 양성하여 정규군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했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재정비했다. 1927년 12월 석두하자(石頭河子) 총회 뒤 신민부가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로 분열되자, 전쟁을 주장하는 군정파의 우두머리로서 민정파와 대립했다.

 

(3) 민족유일당운동

1926년 10월 북경에서 결성된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韓國獨立唯一黨北京促成會), 1927년 4월의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진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進會) 등의 영향으로 만주에서도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28년 5월 전민족유일당촉성회의(全民族唯一黨促成會議)가 그것이다. 그러나 개회된 촉성회의가 단체 본위를 주장하는 협의회파와 개인 본위를 주장하는 촉성회파로 나누어지자, 김좌진은 촉성회파인 참의부 주류파 및 정의부 탈퇴자와 협력하여 1928년 12월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혁신의회를 통해 좌우합작으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신민부 지역인 중동선(中東線) 일대를 기반으로 1929년 여름에 자치조직인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여 주석에 취임했다. 1930년 1월 24일 영안현(寧安縣) 산시역(山市驛)에 있는 자택 앞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에게 암살당했다.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좌진 장군묘

Tomb of General Kim JwaJin

 

지정별 : 기념물 제 73호                    소유 : 충남 보령시

지정 면월일 : 1989년 12월 29일         규모 : 25.344  m2

위치 : 충남 보령시 청소면                 시대 : 1950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잘 관리 되어 있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옛날 사찰이나 큰 건물에는 이런식의 대문이 있지요..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집의 정확한 용도는 모르지만 여기 지어놓은거 보니까...예전에 관리 사택 이었던거 같아요..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집의 뒤편 입니다..굴뚝이 있어요..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찢어진 창호지 사이로 사진을 찍어 보았어요....옷걸이가 보이길레..ㅎㅎ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왼쪽은 소나무이고 오른 쪽은 큰 느티나무 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장군의 묘가 두개가 있는데...앞의 묘가 장군 것이고 뒤의 묘는 부인 것인가요..?  설명은 없더 라구요..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소나무가 아주 멎드러지게 자라고 있어요...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독립군 장군...참으로 멎진 이름입니다..초등학교때 교과서에서도 배웠던거 기억나는데..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나오는 길에 시골에 아주 이쁜 집을 지었더라구요...그래서 한번 찍어 보았습니다..


2.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1)개요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일제가 1920년부터 계획한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토계획과 작전 그 자체를 무위로 만들었다.
(2)일본군의 진공과 독립군의 작전

1920년 10월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부대는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에 있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용정(龍井)·대굴구(大屈溝)·국자가(局子街)·두도구(頭道溝) 지역으로 진군해왔다. 독립군은 처음에는 화력과 병력의 열세를 고려하여 피전책(避戰策)을 택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토벌과정에서 한국인 촌락을 불사르고 동포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일본군과 대항해 싸우기로 결정했다. 일본군이 북로군정서군을 뒤쫓아 청산리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자,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과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부대를 2개 제대로 나누었다. 제1제대는 김좌진이 지휘하는 본대로서 비교적 훈련이 부족한 사병들로 편성하여 사방정자(四方頂子)의 산기슭에 배치했다. 제2제대는 후위대(後衛隊)로서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의 지휘하에 백운평 바로 위쪽 골짜기 길목에 잠복했다. 북로군정서군이 매복한 지역은 지형지물이 잘 발달되어 있어 적을 기습하기에 적당한 지형이었다. 북로군정서군은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해 주변 마을의 노인들에게 "독립군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사기가 떨어져 허둥지둥 도망갔다"는 등의 허위정보를 퍼뜨리게 한 후, 주위의 천연적 엄폐물을 이용해 철저히 위장했다.
(3)전투의 전개과정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 선발 보병 1개 중대는 매복사실을 모른 채 하루 전에 독립군이 행군한 길을 따라 백운평에 진입했다. 일본군 전위부대의 전병력이 공지 안에 들어서고 선두가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 보(步) 앞에 도달했을 때인 오전 9시에 독립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독립군이 은폐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응사하던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은 교전한 지 20여 분 만에 전멸했다. 뒤이어 도착한 야마다[山田] 토벌연대 본대는 전위부대의 전멸에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는 늘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로 1부대를 편성해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측면을 우회공격하려 했으나 절벽 위에서 조준 사격하는 독립군에 의해 막대한 희생을 치른 뒤 패주했다. 일본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해 매복한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정면과 측면을 산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지만 완전히 엄폐되어 있는 독립군의 반격에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일본군 토벌연대 본대는 자기편의 시체를 쌓아 은폐물을 만든 뒤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1,200~1,300명의 전사자만 더 내고 숙영지로 패주했다. 북로군정서군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해서 22일 새벽 2시 30분에 이도구(二道溝)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했다.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작전,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룩된 것이었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 선발 보병 1개 중대는 매복사실을 모른 채 하루 전에 독립군이 행군한 길을 따라 백운평에 진입했다. 일본군 전위부대의 전병력이 공지 안에 들어서고 선두가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 보(步) 앞에 도달했을 때인 오전 9시에 독립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독립군이 은폐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응사하던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은 교전한 지 20여 분 만에 전멸했다. 뒤이어 도착한 야마다[山田] 토벌연대 본대는 전위부대의 전멸에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는 늘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로 1부대를 편성해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측면을 우회공격하려 했으나 절벽 위에서 조준 사격하는 독립군에 의해 막대한 희생을 치른 뒤 패주했다. 일본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해 매복한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정면과 측면을 산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지만 완전히 엄폐되어 있는 독립군의 반격에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일본군 토벌연대 본대는 자기편의 시체를 쌓아 은폐물을 만든 뒤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1,200~1,300명의 전사자만 더 내고 숙영지로 패주했다. 북로군정서군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해서 22일 새벽 2시 30분에 이도구(二道溝)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했다.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작전,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룩된 것이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