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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가 유학자 김창숙 선생 "의성 김씨이면서 영남 유림 영도자"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항일운동가 유학자 김창숙 선생 "의성 김씨이면서 영남 유림 영도자"

CIA Bear 허관(許灌) 2008. 3. 30. 16:48

김창숙선생[1879(고종 16)~1962]은 유학자이면서 교육자로서 항일운동가입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 허가재실에 은거했습니다 그때 저의 할아버지 대암 허길중선생등 허가 어르신들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1.개요
임시정부의 주요인물로 8·15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이다.
그림:Kim ChangSuk Statue 03.jpg

2.출신 및 한말의 활동
김창숙 /김창숙
선생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翁). 한때 김우(金愚)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훗날 왜경에 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으로 하체가 부자유스러워지자 남들이 벽옹(앉은뱅이 노인)이라 불렀는데 선생도 따라서 스스로를 벽옹이라 하였다.
선생은 조선조 선조 때의 학자이며 명신(名臣)인 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김우옹 선생의 13대 증손으로 부(父)호림(護林), 모(母)인동(仁同) 장(張) 씨의 1남4녀중 1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호림(頀林)이다. 당시 유학자로서 이름이 높던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種錫)·이승희(李承熙)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 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 請斬五賊疏〉를 올렸다. 1908년 대한협회가 설립되자 고향인 성주에 지부를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했다. 1909년에는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했다. 같은 해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주장 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규탄하는 글을 중추원에 보냈다.
 

3.일제강점기의 항일투쟁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한동안 칩거하며 유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다져졌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137명의 연명으로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국내의 향교에 배포하고, 이를 갖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김규식을 통해 파리 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했다. 이 사건으로 곽종석 등 수백 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제1차유림단사건'이다. 같은 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교통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이때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의 파쟁을 조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쑨원[孫文]을 비롯하여 이문치(李文治)·임복성(林福成) 등 중국국민당의 여러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한국독립후원회','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망명한 한국청년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여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받도록 주선했다. 한편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1920년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사민일보 四民日報〉를 발간하여 그중 일부를 국내로 우송했으며, 신채호(申采浩)를 도와 베이징[北京]에서 잡지 〈천고 天鼓〉를 발행했다. 1921년 이승만이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하자, 이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신채호 등과 연명으로 발표했다. 그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24년 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교섭, 만주와 몽고 접경지의 황무지를 조차·개간하여 한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8월 국내에 잠입, 모금활동을 폈으나 기대한 성과는 올리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모금활동으로 600여 명의 유림계 인사가 일경에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제2차유림단사건'이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과 청년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여 친일파와 일제의 통치기관을 박멸하기로 결정하고, 나석주(羅錫疇)로 하여금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게 했다. 1927년 상하이[上海] 공공조계(公共租界)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일본영사관원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4년 9월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한 뒤에도 일제의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꼿꼿이 유지했다. 1945년 건국동맹(建國同盟)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어 왜관경찰서에 다시금 구금되었으나, 일제패망으로 석방되었다.
4.해방 후의 활동
해방 이후 일반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활동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인민공화국 반대와 임시정부 지지, 신탁통치 반대 등 우익 정객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문제에 대해서는 한민당 및 이승만 계열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다. 비상국민회의 8인 특별위원을 거쳐 1946년 2월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부수립을 위한 모체가 아니고 미군정의 자문기관일 뿐이라 하여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이 해 봄 해방 이후 난립한 유림단체의 통합에 힘써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를 결성했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일제 때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어 친일파 유림이 득세했던 성균관을 정비하는 등 유림의 재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했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隣會)의 토지재산을 기부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그해 9월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았다. 학교설립 후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1948년 김구·김규식(金圭植) 등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8월 단독정부가 수립된 뒤로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51년 이승만에게 하야경고문을 냈다가 투옥되었으며, 이듬해 부산 정치파동 때 이시영(李始榮)·조병옥(趙炳玉)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여 이승만정권과 투쟁했다. 1953년 2월 전국의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1955년 재단분규로 사임한 뒤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62년 죽었다. 그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심산만초〉·〈벽옹만초〉 등이 있으며, 〈벽옹칠십삼년회상기〉 초고를 197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여 〈심산유고 心山遺稿〉로 간행했다.





연보


  1879년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에서 출생. 본관 의성(義城), 호 심산, 별호 벽옹

  1905년 이승희와 함께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함

  1908년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고 구습 타파·계급 철폐 등 애국 계몽운동 전개

  1909년 일진회를 성토하는 건의서를 중구완과 신문에 낸 사건으로 체포됨

  1910년 전국단연동맹 성주대표로 활약

  1919년 3·1 독립선언 직후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곽종석·김복한 등 영남, 충청유림 137인이 서명한 독립체제서를 휴대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 (제 1차 유림단사건)

  1920년 중국정부 요인과 접촉하여 '중한 호조회'를 결성하여 한·중 양민족의 연대와 공동투쟁을 도모. 북경에서 박은식과 사민일보·신채호와 '천고' 발간

  1927년 유림단사건 이후 거처를 중국으로 옮겨 국민회의와 임정 의별단에 참여하던 중 상해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14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 옥중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옴. 이 시기에 심산선생은 일제의 변호사를 거부

  1944년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의 남한대표로 추대, 이로 말미암아 다시 투옥, 옥중에서 해방을맞이함 해방후 민중당 당수로 추대되었으나 거절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치아래 좌,우익의 분열 대립을 초월한 민족의 대동단결을 촉구

  1945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을 반대,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이승만의 반민족적 행위에 일침을 가하고, 김규식과 견해차이를 보임으로써 정치에 깊은 관여를 하지 않고 유림의 재조직과 성균관대학의 재설립에 주력함.

  1946년 성균관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 이후 분단이 가시화되자, 단정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7거두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자주적인 통일정부수립에 헌신의 노력을 기울임.

  1951년 [이승만 하야 경고문]발표

  1952년 국제 구락부사건으로 두번의 옥고를 치름

  1957년 자유당정권의 압력으로 본교등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함. 이후에도 선생은 보안법개악 반대투쟁과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지도함.

  1962년 5월 10일 84세로 타계


 

의열단고문-김창숙(金 昌 淑)선생체포내력

 

 

 

- 의열단(義烈 團)원인 나석주(羅 錫 疇)지사는 황해도-재령(裁 寧)에서 태어 낳았다. 그러니까 가족을 데리고 만주-간도로 건너가, 독립투쟁을 하려고 결심했기 땜이었다. 그런 다음에 우리나라사람들 손으로  간도-나자구(羅 子 溝)지역에다 건립한 무관학교를 종업하고 청년장교가 되었을 때에 나이가 23살이었다.


 

그때가 1912년이었는데, 그 뒤로부터 본격적으로 독립무장비밀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중국-하남성(河 南 省)-한단(邯鄲)에 있는 섬서(陝 西)육군-제1부-군사강습소-군관학교를 졸업하고선, 한땐 중국군-장교로 근무하였다.


그 무렵에 중군을 나와 우리-독립비밀무장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러나 우리-독립군은 가난하여 독립자금이 아주 빈약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상해에 있는 일본상인들이 공공연하게 커다란 도박장을 벌여 놓고선 대대적으로 도박을 정보가 나석주-지사에게 입수되었다. 이에 따라 그 도박장을 습격할 계획을 세워, 예하 비밀운동요원들에게 약간에 훈련을 시킨 다음에, 곧장 야밤을 틈타  일본상인들 도박장을 순식간에 덮쳐 도장에 있는, 수많은 금전을 모조리 털어냈다.


이러한 나석주-지사는 상해임시정부에 경호원으로 발탁되어 근무하다가 의열단에 감창숙(金 昌 淑)선생을 만나, 의열단에 가맹했다. 이러함은 그 전에 잘 아는 유자명(柳 子 明)-독립투사로부터 소개를 받았다.


그 뒤로 국내에 있는 일본제국에 대재벌이 운영하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해버리자는 협의가 의원단-전원회의에서 있었는데, 이때에 나석주-지사가 적극적으로 앞장을 섰다.


그러니까는【서기 1926.7.29날에 천진에서, 의열단장인 약산(若山)김원봉(金元鳳/27세)~의열단고문인 심산(心山)김창숙(金昌淑/49)~나석주(39)~박관해(朴觀海/28)~박승철(朴承喆/28)~배중세(裵重世/31)~유우근(유우근)~이병태(李丙泰/27)~이승춘(李承春/28)~이종암(李鐘巖/31)~이지영(李志永=化翼/연령?)~정세호(鄭世鎬/25)~한봉인(韓鳳仁/28)~황봉근(黃鳳根/32)~황의춘(黃義春/30)지사들과 그 외에 다른 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열린 협의회의였다. 이 협의회에 단재(丹)신채호(申采浩/48)-선생이 강력제인 폭탄-2개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석주-지사만이【1926.12.26날 오후1시】쯤, 중국-상선을 타고 대련을 거처 인천으로 무사히 상륙하는데 있어 ‘딱’ 1사람이 성공했다.


바로 3날이나 앞선 25날에 일본제국에 대정(大正)이 죽어서 국상이라며 며칠 동안 야단법석을 떤 때이었다.【12.28.오후2시】부터, 나석주-지사 혼자서,  식산은행과 바로 옆에 있는 동양척식회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 일본제국이 조선을 침략하여 총독식민통치를 한 이래, 최대에 대사건이 백주에 벌어졌다. 식산은행과 동척화사에 폭탄을 던진 대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비호같이 달려가, 일본순사와 함께 7명을 저격하여 쓸어 트리였다.


이처럼 황금정(남대문)-2정목에서 피비린 나는 전투를 버리고선 나석주-지사는..... 왜놈-개들에게 잡혀서 시달리다가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3방에 권총으로 스스로 자결했었다. 나석주-지사가 사용한 강력폭탄은 소련제이며, 66발에 총알과 10발-삽탄식인 권총이 스페인-제로 밝혀지자, 일제총독부는 깜짝 놀랐었다.


근데, 이 대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일제는 만주지역에다가 비밀형사들과 밀정들을 ‘벌써’ 쫙 깔아놓았다.


나석주-사건과 관련된 김창숙-선생은 독립군기지를 마련키 위해 유림단체를 조직한 장본인으로서, 유명한 독립투쟁지도자에 한 분이신데, 일찍부터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국외로 망명하던 가운데, 독립결사대-비밀단체인 의열단-고문으로 활략하면서부터, 항구적인 독립운동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유림단체를 조직한 두에, 둔전-제(屯田 制)를 만들고, 또한 독립군대를 양성시키고자, 그때에 만주를 장악하고 있던, 만주독립지도자인 중국인 풍옥상(馮 玉 祥)을 찾아가 협력을 구한 끝에, 허락을 얻어(1925)냈었다.


이에 힘을 얻어, 20만원을 설정한 독립자금-모금운동을 하다가 일제헌병들이 유림단원들을 검속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장 북경으로 탈출했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독립자금을 모금하던 유림동지들은 모두 검거되었다.  이 사건을 2유림사건이라고 했다.


김창숙선생은 독립군대양병계획이 완전히 무너지자, 먼저 모금한 독립자금일부를 의열단에 제공하여, 일제에 보복계획을 세운 게, 바로 나석주-의사가 대대적으로 벌린 일제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해버린 사건이었다.


일제는 혈안이 되었다. 국내외에 수사망을 총동원하여, 나석주의사와 관련된 조선인들을 모두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27.2달에 상해에 주재해 있는【..영국-조계에 있는 공제의원(公 濟 醫院)에서, 영국경찰이 김창숙-선생이 비밀거처하고 있는 곳을 알아내어, 일본경찰이 체포하도 협력했다.】 


40여해나 일제식민지에 저항해온 우리-독립운동사에서【영국은 언제나 일제에 협력하여,  항일독립운동에 막대한 피해를 준 나라】였다.


상해에 주재해 있는 【영국-조계에서 체포된 김상숙-선생은 국내로 압송되어 두해가 지나도록 예심을 거쳐, 14해라는 선고를 받고 감옥생활】을 하시였다. 45.8.18이 된 뒤에도, 민족자주화와 민주화를 위해 마지막까지 분투하시다가, 1962.5.10날에 중앙의료원에서 84세로 별세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