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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88특별여단) 본문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모태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였다. 소련은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의 충돌을 대비하고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자국군에 편입하고 88여단이라고 칭했다. 소련군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동북항일연군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련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조선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극동사령부 소련군 88여단에 소속돼 3대대 중 1개 대대를 지휘하는 대대장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 김정숙도 항일 빨치산 출신이면서 극동사령부 소련군 88여단 군인출신이었다 극동사령부 88여단은 한국인. 만주인(여진족). 중국인들으로 구성된 사할린. 일본열도 그리고 만주. 한반도등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기 위하여 조직화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중심의 반일연합전선 군대조직이었다
2005년 3월 저녁 북한주재 러시아대사관 방문과 러시아전쟁 60돌 기념메달 받아
러시아 2차대전 승전 기념메달, 왜 각국 정상 중 김정일만 받았을까? 정답: 김일성을 소련군 참전용사로 규정 아들에 수여
제2차세계대전 승전기념 메달은 지난해 3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제작됐다 러시아와 당시 동맹국 국민 중 생존한 참전용사 및 그 후손이 수여 대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여기에 포함된 것은 아버지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2차대전 참전용사>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일성주석은 한인과 중국인, 만주인(여진족)으로 구성된 극동의 소련군 88특별여단의 제1교도영(대대)장이었다 88여단은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했으나 일본이 갑자기 항복하는 바람에 정작 참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88여단 인사들은 광복 후 북한에 25만명 소련군과 함께 진주해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88여단 출신의 중국인 생존자 27명과 몇몇 북한인사들도 이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메달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구리로 만들어진 지름 32mm의 이 메달에는 승리라는 단어와 <1941-1945>이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다 10만여 개가 제작됐으며 제작 단가는 20달러(한국 돈 약 2만원)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임춘추
임춘추(林春秋, 1912년 3월 8일 ~ 1988년 4월 27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만주 지린성에서 출생하여 독학으로 의술을 익힌 뒤 약방을 열었다. 1930년 초반부터 유격대의 군의관으로서 김일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동북항일연군과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을 거친 "혁명 1세대"이다.
광복후 연변에서 연변대학을 세우는 등 자치주 설립을 위한 활동을 했고, 이후 조선로동당 평안도당 제2비서, 강원도당 위원장을 거쳐서 1950년 12월 6·25전쟁 당시 후퇴작전을 계획적으로 조직하지 못하고 도망쳤다는 이유로 비판받고 당에서 운영하는 학교 교원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1955년 조선노동당 연락부 부부장으로 다시 기용된 뒤 1957년부터 1962년까지 주(주
')" onmouseout=Chartip_off()>駐)알바니아 및 불가리아 대사를 지냈다. 1983년에 국가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1970년대 초반 김정일의 후계 구도가 확립될 때 혁명 1세대 중 김일, 오진우 등과 더불어 김정일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 회고록 《항일 무장투쟁 시기를 회상하며》(1959), 장편 소설 《청년전위》가 있다. 임춘추의 회고록에는 남호두회의(1936) 등 북조선에서 높게 평가하는 김일성의 항일 활동에 대한 내용이 대거 나온다. 김일성과 같은 나이로서 줄곧 함께 활동한데다 김정숙과는 일찍부터 같은 지역에서 잘 알고 지냈기 때문에, 북조선에서 김일성과 김정숙 부부의 항일 투쟁 경력을 증언해줄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김책 (金策)
1903. 6 함북 학성(지금의 김책시)~1951. 1 평양. 북한의 전(前) 부수상 겸 산업상.
빈농인 가족이 중국 동북 옌지[延吉] 지방에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으며 지주 집 목동으로 생활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군사위원회 위원 및 전선사령관으로 참전했다가, 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30일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그의 업적을 기려 그의 이름을 도시·기업소(공장)·학교에 붙여 김책시, 김책공업대학 등으로 명했고, 1968년 9월 공화국 창건 20돌을 맞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칭호 및 국가훈장 제1급을 수여했으며 김책시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서철 (徐哲 1907∼1992)
광복 후 입북, 김일성과 함께 갑산파 주동인물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으며, 1947년 강동정치학원의 군사부원장으로 있으면서 1948년 여순반란사건과 대구 6연대반란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6·25 이후 중국주재임시대리대사, 월맹주재대사를 지냈고, 1958년 인민군총정치국장(중장)이 되면서 권부(權府)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1962년 이후 최고인민위원회 제3~5기 대의원, 대외문화연락협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체코슬로바키아주재대사, 노동당정치위원 겸 비서를 역임하였다.
1973년 노동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으로서 노동당정치위원, 중앙인민위원직을 맡았으며, 1977년 인민군총정치국장(대장)을 지냈다. 1980년 노동당중앙위원·정치국위원, 노동당중앙위 검열위원장으로 재기용되었다. 1986년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해방 전 소련에서의 김일성그룹
1930년대 만주에서 조ㆍ중 유격대(동북항일연군)에 의한 반일 무장투쟁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의 유격대 토벌 작전은 한층 강화되었다.
일본군의 드높은 공세에 조ㆍ중 유격대의 역량은 감소를 거듭하였는데, 1938년 3만여 명에 이르던 항일연군 병력은 1940년에 이르러서는 1,4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동북항일연군은 일찍부터 물적 원조를 받아온 이웃 형제 국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으로의 이동
1939년부터 동북항일연군은 소련령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제2방면군을 이끌고 있던 김일성 부대는 일제의 토벌작전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을 거쳐 1940년 10월 23일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소련으로 들어갔다. 소련에 들어온 전체 조선인 유격대원 수는 200명 내외였다.
동북항군연군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1940년 겨울부터 하바롭스크 근방 비야츠코예 나 아무르(Вятское-на-Амур) 마을에 A야영(일명 북야영)과 보로실로프(현 우수리스크) 근처에 B야영(일명 남야영)을 설치하였다. A야영에는 중국인 주보중이 지휘하는 제2로군과, 제3로군이 들어갔으며, B야영은 제1로군 제2, 3방면군과 제2로군 일부 병력들로 채워졌다.
동북항일연군 지도부는 부대를 정돈하고 장비가 보충되면 다시 만주로 돌아갈 것을 예정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소련과 일본은 상호간에 영토적 순수성과 불가침성을 강조한 중립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군 당국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항일연군이 동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시적으로 중지하도록 하였다.
항일연군 대원들은 두 야영에서 일련의 교육과정과 전투준비 훈련을 거쳤고, 일부 대원들은 소련군 정찰기관의 지시에 따라 이미 국경지역에서의 정찰활동을 하였다. 소련군 지휘부는 항일연군 출신들의 간부 훈련에 각별한 신경을 썼는데, 빨치산 대원 가운데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들이 선발되어 하바롭스크 보병학교에서 단기과정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김일성과 그 외 간부급 대원들은 이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마치고 모두 소련군 장교로 임관되었다.
88독립보병여단의 결성
1941년 6월 중순 소련 정부는 항일연군이 주축이 된 여단 창설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고, 이듬해 7월 21일 A야영이 소재한 비야츠코예 나 아무르 마을에서 극동전선군 산하 88독립보병여단이 창설되었다. 88여단 창설의 주된 배경은 조ㆍ중빨치산들이 만주 주둔 일본군의 동향을 탐지해내는데 적합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단은 러시아인, 중국인, 조선인, 모르드바인 등을 15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되었다[국제여단은 붉은 군대(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세력) 소련축으로 대독, 대일참전 연합부대] . 오늘날 북한에서는 88여단을 국제연합군으로 부르고 있고, 반면 중국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의 연장선의 의미를 부여하여 동북항일연군교도려로 칭하고 있다.
88여단은 극동전선군 군사회의에 의해 직접 지도를 받았고 참모부 정찰부가 관할하였지만, 주보중이 이끄는 88여단 지휘부는 중국 공산당적을 유지하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보장 받았다. 88여단의 편제는 참모부, 정치부, 후방부, 군 검찰부, 4개의 보병대대, 통신중대, 포병중대로 이루어졌다.
88여단 전체 규모는 시기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이는 러시아 군인들이 증강되거나 감소되기 때문이기도 한데 전체적으로 최저 900명에서 최고 1500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조선인은 100명 정도였다. 나머지 조선인들은 다른 소련군 부대로 차출되거나 집단농장(콜호즈) 등에 배치되었다.
제1대대는 항일연군 1로군 출신 조선인들을 기본 단위로 구성되었으며, 김일성은 대위 계급을 달고 대대장으로 배치되었다. 여기에는 최현, 김광협, 강건 등 그의 부하들도 포함되었다. 88여단 부대대장 급으로는 소련군 장교들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조ㆍ중 대원들에 대해 주로 군사교육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았다.
88여단의 조선과 중국인 대원들은 중국공산당적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소련군제에 편입되어 소련군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련 역시 반일 전선을 유지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소련과 조ㆍ중 유격대 간의 이해관계는 일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88여단의 활동과 김일성의 입지
88여단 대원들은 대열연습, 총검술, 폭탄 투척, 수영, 실탄사격, 스키훈련, 야외훈련(추위를 견디는 능력 배양) 등 체계적인 전투ㆍ기술훈련을 받았다. 또한 소련측이 제공한 프로그램에 따라 정치사상교육이 실시되었는데, 여기에는 반일 교육과 소련공산당사를 비롯한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건설성과 등에 관한 정치학습이 포함되었다
김일성은 상부의 지시를 받아 훈련 및 교육임무를 집행하였고 이밖에도 조선해방에 관한 토론과 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훈련 이외에 운동과 고기잡이 등으로 여가를 즐기기도 하였다.
소ㆍ만 국경에서의 정찰 임무는 88여단 활동의 주된 목적이었다. 소련군 당국은 1942년 8월에 이미 군사작전의 개시와 더불어 88여단의 활용 계획을 확정하였다. 88여단의 최종 과업으로는 조ㆍ중 지역 주민들로 소규모 빨치산 부대들을 창설하고 그 활동을 지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조ㆍ중 유격대 출신들의 만주 파견 활동은 1941년 초부터 300명 내외의 대원들이 참가하였다. 조선인 가운데는 강건, 안길, 박덕산, 최현 등이 자신의 소부대를 이끌고 각종 공작을 지휘하였다.
김일성 자신도 여단 창설 이전인 1941년 4월 동남만 일대에 남아 있던 소부대들과 연계를 맺고자 밀영을 떠났다가 활동을 마치고 8월에 기지로 돌아왔으며, 9월 중순경에는 재차 소부대를 이끌고 만주와 국내로 나갔다. 그는 1943년 7월 중순에도 지하공작을 위해 만주로 진출하였다.
김일성의 회고록에 따르면, 소련군의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위한 나진, 웅기, 청진 등 북조선 항구에 대한 상륙작전 계획은 오백룡 부대가 수집한 자료에 기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8여단 조선인 대원들은 정찰활동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으며, 그들 가운데는 김혁철, 손태춘, 김학송, 김홍수, 지봉손 등이 목숨을 잃었다.
만주에 흩어져서 활동한 조선인 빨치산 지도자들이 88여단으로 합류하면서 이들 사이의 지위와 역할이 자연스럽게 해결을 보게 되었다. 김일성은 선배 빨치산인 최용건이나 김책 등과의 관계에서 별다른 무리 없이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김일성이 조선인 가운데 최고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조선인 주력 부대를 이끌었다는 점, 조선 국내에 보다 널리 알려진 점, 소련과 중국 지도부의 신망이 다른 이들보다 두터웠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서 일제 시기 김일성 부대의 활동을 객관적이고 총체적으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1940년 대 전반 소련 체류에 대한 평가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부대가 1930년대 초부터 조선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기치하에 대일 항전을 지속했고, 이데올로기를 떠나 그 목표에 상당한 일관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 (출처 : 한겨레신문)
*김일성등 좌파계열 항일부대 경로
중국 공산당 입당(만주지역 조선인 공산당)-->조선혁명군(북한:조선인민혁명군, 조선혁명당-김두봉과 김규식)[국민당과 공산당 하부 동북항일연합군]--> 의용군(중국 인민해방군 원조부대 김두봉 등), 국제여단(연합군. 대독, 대일참전부대 김일성 등)-->중국 화북지역과 만주지역 점령(조선 의용군), 극동과 만주, 이북 점령(국제여단)--->만주지역(동북3성, 중국인민해방군 임표부대 주둔), 극동(赤軍=붉은 군대), 이북(赤軍=붉은 군대와 조선인 국제여단)
-국제여단 주축으로 북한 인민군 창설과 권력장악 그리고 소련군 원조로 각종 군사학교 설치(김일성, 김책, 강건대학교 등)
-1차 세계대전(레닌, 전쟁 중립선언과 공산주의 세력 전쟁 불개입선언)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독일-소련 불가침조약과 동서유럽(동서폴란드) 군사적 점령
[국가사회주의와 군국주의 이론: 독일 노동자의 당 히틀러의 나찌즘, 소련 공산당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이론]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 일본간에 삼국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 소련침공
-1941년 7월 소련과 영국, 반독일전선 구축 그리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반독일전쟁 참여(중국인등 아시아 출신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대독전쟁 참여)
-일본의 소련과 외몽골 침공
1938년 7월 29일, 일본의 소련 침공으로 하산 호 전투가 발생하였다. 전투는 거의 소련군의 승리였으나, 일본군은 무승부로 판단하고 1939년 5월 11일에는 강제로 할힌골 전투를 일으키며 몽골 영내로 진군했다. 초기에는 몽골로의 침공이 성공했으나, 붉은 군대에 의해 관동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충돌들은 소련이 중국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해 소련 정부를 회유하고 대신 남쪽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파벌들이 태평양과 미국 방면으로의 진출을 설득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7일(아시아 시간으로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과 영국의 식민지를 기습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4월 12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해리 S. 트루먼가 대통령직은 승계받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4월 28일에 이탈리아 파르타잔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틀 후, 히틀러는 자살하고, 대제독 칼 되니츠가 총리를 승계받았다.
독일군은 이탈리아에서 4월 29일에 항복했다. 독일의 항복문서는 5월 7일 랭스에서 서명되었고, 5월 8일(모스크바 시간으로 5월 9일)에 베를린에 비준되었다 독일 중앙집단군은 5월 11일 프라하 공세까지 저항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군은 1945년 4월 말까지 필리핀에서 필리핀 전투과 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한다. 1945년 1월 루존 상륙과 3월에는 마닐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루존에서 계속되었으며, 민다나오 섬을 비롯한 필리핀의 다른 섬들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저항했다.
1945년 5월, 호주군은 보르네오 전투를 시작하며 섬을 점령했다. 영국, 미국, 중국은 북부 버마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5월 23일에는 영국군이 양곤을 점령했다 중국은 1945년 4월 6일부터 6월 7일까지 서후난 전투로 반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일본 본토로의 진격을 시작하여, 3월에는 이오 섬을 점령하고, 6월 말에는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미군의 폭격기는 일본 본토 공습을 시작하고, 미군 잠수함은 봉쇄 조치를 시작했다.
7월 11일에는, 연합군의 지도자가 포츠담 회담을 했다. 그들은 독일에서 이전 회담의 협정을 확인하고, 특히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강조하며 "일본에 대한 대안은 신속하고 완전한 파괴"라고 발표했다. 이 회담 중에 영국은 선거를 시작하고,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포츠담 협정을 무시하며,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다. 두 폭탄이 터진 사이, 소련군은 얄타 회담의 조건에 따라 8월 폭풍 작전으로 만주로 진격하며 관동군을 항복시킨다. 그리고, 소련군은 만주와 청진 등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다. 또한, 소련군은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일본의 항복문서는 1945년 9월 2일 미군 전함 USS 미주리 (BB-63)에 서명되며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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