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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제3의 탈북자, 일본인 처 - 5회 본문

Guide Ear&Bird's Eye/일본

[특별 기획] 제3의 탈북자, 일본인 처 - 5회

CIA Bear 허관(許灌) 2007. 11. 25. 00:30

1.제3의 탈북자, 일본인 처-1회

지난 1959년 시작된 재일 조총련의 북송 사업으로 북한으로 갔던 재일동포의 일본인 아내들이 이제는 백발이 돼 잇따라 북한을 탈출하고 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북한에서의 끔찍했던 생활고에 이어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들의 사연을 중국과 일본 현지취재를 통해 연속 기획으로 방송해 드립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현재 중국주재 일본대사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올해 80살의 탈북 일본인 처, 세끼도 에쯔꼬 씨의 사연을 전해드립니다. 세끼도 씨는 지난 9월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지내다 최근 베이징주재 일본대사관에 귀국을 신청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보도에 서지현 기자입니다.  

세끼도 에쯔코 씨
세끼도 에쯔코 씨

1960년 10월, '북조선'으로 향하는 제41차 귀국선에 몸을 실을 때만 해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북한에서 '리열자'라는 이름으로 47년을 살아온 일본인, 세끼도 아쯔꼬 씨. 올 해 80살의 백 발이 성성한 그 녀에게는 지금 반 세기만에 일본, 내 나라 내 땅을 다시 밟고 싶다는 단 한 가지 소망 뿐입니다. 

지금, 꼭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묘부터 가야되죠... (울음)"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것, 나를 낳아준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고 47년 전 북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은 것은 단지 그 이유 뿐이었습니다.

“내가 가만히 갔어요, 조선에. 어머니, 동생한테 말하면 못 보내줬단 말이에요. 말 하면 집에서 못 보내줍니다. 나쁜 여자지요.”

나쁜 여자이자, 당찬 여자였습니다. 그 날 조국을 등졌던 그녀는 15살 때부터 5년 간 조국, 일본을 위해 태평양 전쟁에 간호병으로 참전했던 군인이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일본에 돌아온 스무 살, 전쟁에 참전했던 더러운 여자라고 결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데 가면 좋은 일 했는데, 군관들이나 군대 높은 사람을 아니까 몸이 다쳤는가 생각하고... 그런 것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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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끼도 아쯔꼬 씨가 일본어로 쓴 탈북을 원한다는 내용의 서한

스물일곱살이나 많은 대만 국적의 무역상에 팔려가다시피 결혼해 아들 셋을 낳고 살던 어느 해였습니다. 조선 남자 '리재철', 그를 만난 것은...

조총련의 북송 사업으로 북한으로 돌아간 그를 좇아 전 남편과 사이에 낳은 아들 셋을 데리고 배에 올랐습니다.

못 온답니다. 그 사람은 조선 사람인데 먼저 갔는데, 우리 일본 사람 조선에 보낼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조선총련이. 일본 정부가 스위스 적십자를 소개해줬습니다. (그랬더니) 41차 귀국선으로 귀국하라고.”

리재철, 북한 땅에서 다시 만난 그는 김책제강소에서 권투를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북조선에서의 삶은 그러나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없었어요. 배급 주고... 나도 김책제강소에서 일했습니다."

몸보다는 데려간 아들을 의붓자식이라고 미워하는 남편 탓에  마음 고생이 더욱 심했습니다.

“72년도에 이혼했습니다. 아들을 계속 미워해서, 데려간 아들 미워해서...그래서 계속 이혼해주세요, 이혼해주세요 제기했는데, 일본 사람은 이혼 못한다고 해서, 계속 이혼 못했습니다. 그런데 72년도에 이혼해줬습니다.”

북조선의 아낙으로 그렇게 수십 년을 홀로 자식들을 키우며, 숨죽이고 살았습니다. 조국, 일본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의붓 아버지에게 한 평생 사랑받지 못하고, 조선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채 '조선인'으로 살아온 큰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였습니다.  

세끼도 에쯔꼬 씨
세끼도 에쯔꼬 씨

“못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도 다 있고 한데 어떻게 오겠습니까. 훈장도 있고... 얘 아버지가 5월 달에 사망하고.... 결심을 했단 말이에요. 얘 아버지가 효자지요... (우는 소리) 죽는 걸... 못 봤단 말입니다. 죽었단 말입니다.”

돌아가야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동무들이 많아요, 일본 사람도 그 때는 많고, 김책엔 많았댔어요 여자들이. 남편 따라서 다 온. 그 사람들 다 죽는 사람도 많고... 많이 돌아가셨습니다.”

함께 왔던 일본인 동무들이 하나, 둘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제는 죽기 전에, 조국 땅을 밟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겨서라도 말입니다.

“야, 내도 죽는 가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 물이 와서, 막 심장이 뛰고 야... 건넜어요. 처음에 들어갔는데 신발이 다 나가고 없어...”

기차를 타고, 어둠 속에 산 길을 걷고, 또 걸어 도착한 이 곳, 또 다른 남의 나라 중국. 그러나 일본으로 금세 갈 수 없습니다. 복잡한 외교관계로 중국의 일본대사관에서 일본으로 돌아가기까지에는 앞으로 몇 개월이 더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탈북 이후 베이징 일본대사관의 보호를 받기 전까지 지난 두 달 간 중국 공안에 붙잡히면 어쩌나, 무엇보다 함께 탈북한 손자까지 붙잡혀 북송되면 어쩌나, 잠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세끼도 에쯔코 씨
세끼도 에쯔코 씨
총살 받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얘 아버지가 나한테 잘해줬는데, 조선에서 낳아서 조선 교육을 받고 조선에서 많이 받고... 나는 오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같이 가서 할머니 가는 것 보고 오겠다'고 그래서 같이 온 건데...”

손자 역시 붙잡힐 걱정에, 할머니 건강 걱정에 하루 하루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손자: “나오면 빨리 간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못가게 되니까 지금 할머니 심리상태가 아주 나쁜 상태라는 거죠. 불안해 하고, 어제도 할머니가 몇 번 졸도했거든요. 어떻게 하던지 하루라도 빨리 지금 가야하는데...” 

하지만 복잡한 외교적 절차로 일본대사관을 통해 언제쯤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직 기약이 없습니다. 일본에 있는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는 말에, 세끼도 에쯔꼬 씨는 목이 먼저 메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 뭐…”

그 때,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 때 그 배를 타지 않았더라면...

태어난 곳, 일본 땅으로 하루 빨리 돌아가 생전에 불효한 어머니 묘에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다는 80살 노파의 작은 소망이 이뤄지기까지 이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이 보내드리는 연속 기획보도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내일은 그 두번째 순서로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해 일본에 정착한 사이토 히로코 씨와 우에다 즈타에 씨가 고국 일본을 떠났던 이유와 다시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북한에서의 생활상 등을 전해드립니다.

 

2.제3의 탈북자, 일본인 처-2회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북한에서의 끔찍했던 생활고에 이어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들의 사연을 중국과 일본 현지취재를 통해 연속기획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어제, 현재 중국에 머물고 있는 탈북 일본인 처의 사연을 전해드린 데 이어 오늘은 그 두번째 순서로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해 일본에 정착한 사이토 히로코 씨와 우에다 즈타에 씨가 고국 일본을 떠났던 이유와 다시 북한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북한에서의 생활상 등을 전해드립니다. 서지현 기자의 보도입니다.

김박순과 전옥춘.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이름이 돼 버렸습니다.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해 일본에 정착한 사이토 히로코 씨와 우에다 즈타에 씨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해 일본에 정착한 사이토 히로코 씨와 우에다 즈타에 씨
40여 년 간 불려온 '내 이름'인데, 이제 일본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김박순과 전옥춘이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이토 히로코와 우에다 즈타에. 두 사람이 어머니, 아버지가 주신 진짜 '내 이름'을 되찾기까지는 꼬박 4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이토 히로코: “조선에 가면 잘 살고 그런 소리 많이 듣고 남편 가니까, 3년 있으면 여기 온다는 소리도 듣고 그러니까 3년쯤은 기다릴 수 있겠고...”

사이토 히로코 씨가 일본을 떠나던 해, 풋풋한 스무 살이었습니다.

조총련은 조선은 '지상락원'이라며, 3년만 지나면 일본에 돌아올 수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조선은 교육도 의료도 무료다', '어떤 차별도 없다', '누구나 동등하게 살 수 있다'는 선전에 일본에서 갖은 수모와 차별, 빈곤에 시달리던 조선인들과 그들을 사랑했던 일본인 아내들은 미련 없이 배에 올랐습니다.

조총련의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북한과 일본 정부가 체결한 협정에 따라 1959년 12월14일, 9백75명의 재일동포를 태우고 청진항을 향해 출항한 '제1차 귀국선' 이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 1984년까지 모두 1백86 차례에 걸쳐 9만3천 여 명의 재일 조선인과 그들의 일본인 아내들이 일본을 떠났습니다.

당시 재일 조선인들을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던 일본 정부 역시 이들의 강제추방을 계획하고 있다가 조총련의 이같은 북송사업을 대대적으로 지원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씨는 부모와의 연은 끊어도, 자식과의 연은 도저히 끊을 수 없었기에 조선인 남편을 따라 귀국선에 올랐다고 47년 전을 회고합니다.

우에다 즈타에: “세 살짜리 아이 하나 데리고 갔는데 그 아이만 없으면 안 갔죠. 그런데 나도 조그만할 때 아버지 없이 살았으니 어쨌든 새끼 보고 가야 된다고... 형제 부모는 다 반대했어요.”

1960년 6월, 제25차 귀국선에서 북한 청진항에 발걸음을 내딪는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그 후로 40여 년이었습니다.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해 일본에 정착한 우에다 즈타에 씨
우에다 즈타에 씨

우에다 즈타에: “배에서 내릴 때, 그 때 보고서... 아휴 이거 고생하러 왔구나 생각이... 사람들 입고 온 옷 보고... 이게 무슨 지상락원이라고 그런 나라라고 해서 갔는데, 이게 무슨 나라야. 이거 우리 고생하러 왔구나... 아이들은 위에만 입고..”

북조선에서의 40여 년. 두 사람 모두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이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아... 제일 힘든 것은... 먹을 거요. 배급 주는 게 2, 3년? 그 다음에부터는 전혀...  70년 그 때까지는...”

사이토 히로코: “이제야 배급은 하나도 안 주죠. 아예 없어요. 올 때도 안주고, 그 전에도 안줬어요. 별로 일이라는 건 없고... 야메 장사를 하고 살았어요.”

조국 일본 땅에서라면 겪지 않았을 배고픔, 굶어 죽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뭐 아들이 죽는 것 많아요. 길가에서 하루에 몇 명씩 보는지 몰라요.”

특히나 마음을 나눴던 같은 처지의 일본 사람들이 굶어 죽어 무덤도 없이 내동댕이 쳐지는 것을 보면서 1960년, 그 해, 그 배를 탔던 일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정말 못 보겠어요. 먹을 것 없고, 봐주는 사람 없고, 조선에서는요. 자기가 자기 벌어서 먹어야 먹고, 자기가 벌지 못하면 못 먹고 굶어죽어야 돼요.”

그러나 마음먹기만 수 년, 일본 땅을 실제로 다시 밟기까지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갈 수 있으면 나도 가고 싶다고 매일이다시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때 '98년도에 국경까지 왔다가 너무 비가 와서 못가고, 2년 후에 또 한 번 왔다가 또 못 가고, 3번만에 성공해서... 가다가 붙잡히면 죽어야겠다는 각오로. 일본에까지 땅 밟으면 죽어도 원이 없다는 생각으로 왔죠. 산으로 넘어왔댔어요.  산으로 넘어 하룻밤 눈 속에 걸었댔어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조국 일본. 그러나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감고 있습니다.

이미 돌아온 자신들은 괜찮다고 해도, 아직 북한에 남아 굶주리고 있는 다른 일본인들의 딱한 처지를 생각하면 한 숨만 나옵니다. 

우에다 즈타에: “지금도 거기 남아있는 일본 사람 나이 많잖아요. 아프신 분도 계시고요. 일본 사람이 우리 살던 부락에 6명 있었어요.내가 올 때 둘이 남아있었어요.”

일본 정부가 그토록 애를 쓰는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에게 관심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이들의 생각입니다.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해 일본에 정착한 사이토 히로코 씨
사이토 히로코 씨

우에다 즈타에, 사이토 히로코: “랍치 사례, 그 사람들만 많이 신경 쓰고 있죠. 그걸 해결하자면 북조선에 있는 귀국자들이, 일본 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일본에 와서, 그럼 그 안에서 메구미라는 여자를 아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사람 통해서 아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를(일본인 처를) 빨리 도와주고, 북조선에 있는 사람들을 하루라도 빨리 일본에 오게끔 해야 한 사람이라도 들어오게끔... 안타깝단 말입니다.”

40여 년 전 그 배를 탔다는 이유만으로, 조선 남자를 사랑해 그를 따라 갔다는 이유만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가슴에 응어리를 품은 채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사이토 히로코: “이제 안 죽고 남아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일본에 와서 부모 형제를 만나기를... 우리도 이렇게 힘쓰고 있는데...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고조 나이 다 잡순 사람이 많으니까... 그리고 왔다 갔다 하면서 일본에 가고 싶은 사람 오고, 조선에 자식 보러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못하냔 말입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이 보내 드리는 특집기획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내일은 그 세번째 순서로 사이토 히로코 씨와 우에다 즈타에 씨가 일본에 정착한 이후에도 언어와 사회 적응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정을 전해드립니다. 

 

 

 

 

 

 

3.제3의 탈북자, 일본인 처-3회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특집기획으로 한반도 분단의 또다른 희생자인 일본인 탈북자들의 얘기를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오늘은 그 세번째 순서로 북한에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한 사이토 히로코 씨와 우에다 즈타에 씨가 일본에 정착한 이후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정을 전해드립니다. 이들은 40여년 전과 너무도 달라진 일본사회에 적응하는 데 있어 언어 문제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비롯해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함께 탈북한 자식들 역시 어머니의 나라에서 이방인으로서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서지현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해 일본에 정착한 우에다 즈타에 씨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해 일본에 정착한 우에다 즈타에 씨
지난 2003년 탈북해 94살의 어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우에다 즈타에 씨는 '반가움'이란 감정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43년 간의 타향살이는, 그렇게 나를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뜨거움마저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42년 떨어져 살았으니 진짜 내 어머닌가 생각되고, 반갑다, 속으로 정말 반갑구나 하는 생각은... 살아계시구나 생각 뿐이지, 정말 반갑다는 생각은 깊이 없었어요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20년을 살고, 북한에서 40년을 살다 예순 살에 일본으로 돌아온 사이토 히로코 씨. 히로코 씨는 일본 땅을 다시 밟은 그 순간에야 자신이 일본에서보다 북한에서 곱절을 더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이토 히로코: “뭐이랄까 깜짝 놀랐죠. 나 있을 때보다 너무 달라지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라지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운, 40여 년만의 고국은 그야말로 별천지였습니다.  

우에타 즈타에: “일본에 가면 그게 다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도 없었어요. 다 달라지고, 거기 집이 있었는데 그게 어디인지도 모르고, 다 새로 집을 지으니까... 못 찾겠어요. 100% 달라졌는데 하나도 모르겠는데.”

지리 뿐만이 아니라 총리가 누군지, 도로체계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외국어 표기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머릿 속이 그저 하얗기만 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사이토 히로코: “테레비도 중앙보도 밖에 못보잖아요. 뉴스라는 거 하나도 모르죠. 일본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고 왔거든. 다른 거 뉴스라는 건 모릅니다. 딱 조선 안에서 좋은 소리만 듣고...”

우에다 즈타에 씨는 요즘도 일본어보다 조선말이 먼저 나와 곤란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팍 조선말이 나올 때가 있어요. 어쨌든 팍팍팍 나온다고. 수퍼 맥주 사러 갔는데 일본말로 해야 하는데 병 맥주 오데 있나, 세 번 말을 했다고요... 아, 내가 이제 조선 말을 했구나, 부끄러워 돌아서 나오기도 하고요...”

일본 말을 쓰지 않은 지 40년. 일본어를 손으로 쓰는 것은 잘 하지 못합니다.

함께 탈북한 자식들의 어려움은 더 했습니다. 처음 와보는 낯선 어머니의 나라에 정착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해 일본에 정착한 사이토 히로코 씨와 우에다 즈타에 씨
사이토 히로코 씨와 우에다 즈타에 씨
사이토 히로코: (자식들이) 말을 못하니까... 이제는 일해요... 식당에서...   

우에다 즈타에: 자식들이 일본말이라곤 하나도 모르잖아요. 딸이 와서 조선에서 보지 못하는 것 보니까 수퍼라도 데리고 가면 너무 놀라서, '어머니 이거 뭐이가,' '이거 뭐이가'... 놀라서, 너무도.

이럴 줄 알았다면, 일본말이라도 좀 가르쳐 줄 걸, 때늦은 후회였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손님들이 오면요, 일본말 배워줄 걸 그랬구나 생각이 났는데, 자식한테 못배워주고, 지금 열두 살 되는 손자는 일본말을 북한에서 배워줬는데 내가 배워준 것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다 알고 있어요."

북한에서 낳아 함께 탈북한 자식들은 일본 국적이 없습니다. '외국인 등록증' 역시 일본에 5년 이상 거주해야 발급되기 때문에 그 전에는 무국적자로 취업 등에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내 나라' 일본이 자식들에게는 아직 '남의 나라'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도 말이나 지리, 이런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해결이 되는 문제들입니다. 다시, 익숙해지면 될 일들입니다.

더 힘든 것은 마음입니다. 40년을 살아온 북조선에서는 나누는 삶이 있었습니다.

사이토 히로코: “조선 사람은 인정이 있어요. 서로 도와주고 했는데, 많이는 도와는 못줘도 하나 있으면 나눠먹고.”

지금은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습니다. 핏 속으로는 일본 사람인데, 심장 속으로는 북조선 사람이 다 되어버린 것일까요.

우에다 즈타에: “조선에서는 암만 없이 살아도 인정이라도 많아요. 일본에 오니까 사람이 차다는 것... 아파트 살아도 옆에 사람 살아있는지도 몰라요. 아침에 마주칠 때 있잖아요. 인사해도 받지도 않아요. 일본 사람들 우리 있을 땐 그렇지 않았는데 없이 살아도 조선 사람들이 정말 인정이 있어요. 먹을 게 없어서 그렇지 사람들 관계는 조선이 나아요."

굳이 북조선에서 왔다고, 이웃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이토 히로코: “나는 와서 8월에 와서 10월 달에 일했거든요. 그 때는 조선에서 왔다 안 하고, 중국에서 귀국해 왔다, 이렇게 해서...”

사이토 히로코 씨는 반찬 장사를 하고, 우에다 즈타에 씨는 정부에서 노인들에게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탈북자에 대한 정부지원금은 전혀 없습니다.

이런 물질적인 어려움도, 사실 견딜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처럼 적어도 이 곳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고통 받지는 않으니까요.

아직도,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은 바로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 때문입니다.

우에다 즈타에: “손자가 12살인데 먹지 못하고... 일본에 와서 뭐라도 조금 먹으면, 음식이라도 좋은 거 먹으면 그거 목이 메여서, 생각이 나서 정말 못 먹겠어요. (울음) 손자들이 불쌍해서...”

현재까지 일본으로 돌아온 이들 재일동포와 일본인 처, 그 자식들은 1백7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올해 들어서만 20 여 명이 중국과 제 3국을 거쳐 힘들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북한에서 살다 왔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 걱정에, 이제는 새롭게 시작된 또 다른 그리움에 목이 멥니다.

한 평생 북한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등지고 온 일본의 가족들을 그토록 보고 싶어하며 애태웠는데, 이제 일본에 돌아와 북조선의 산하와 없이 살아도 마음을 나누고 살았던 따뜻함, 그리고 또 다시 등지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 하게 된 것입니다.

우에다 즈타에, 사이토 히로코: “(남아있는 가족들) 왔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되서 안타까워 죽겠어요. 가족들이 같이 살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니... 어쨌든 왔다 갔다 하겠끔 그거 바라보고 있어요.”

'미국의 소리' 방송이 중국과 일본 현지취재로 전해드리는 연속보도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내일은 그 네번 째 순서로, 탈북 재일동포와 일본인 처들을 수 년 째 도와온 일본 내 시민단체와 학계 관계자들의 견해를 전해드립니다.

 

4.제3의 탈북자, 일본인 처-4회

'미국의 소리' 방송이 중국과 일본 현지 취재로 전해드리는 특집기획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오늘은 그 네번째 순서로, 탈북 일본인 처들을 수년 째 도와온 일본 내 시민단체와 학계 관계자들의 견해를 전해드립니다. 이들은 탈북 일본인이 잇따르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납북자 뿐 아니라 자진해 북한에 갔던 일본 내 한국인들과 일본인 처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며, 체계적인 탈북자 지원 시스템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서지현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959년 시작된 재일 조총련의 북송사업으로 북한으로 갔던 일본 내 한국인들과 그들의 일본인 아내, 자식들이 최근 잇따라 탈북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이들의 안전과 귀국 이후 생활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지원 요구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운영해 온 일본 오사카 경제대의 야마다 후미야키 교수는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1960년대 자진해 북한으로 떠났던 이들은 북한의 실상에 대해 전혀 모르고 갔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도움을 줘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야마다 교수는 일본 정부가 탈북 일본인들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이들이 자신의 의지로 북한에 갔으므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야마다 교수는 그러나 당시 북한 당국과 조총련은 북한에 가면 안전한 생활이 보장되고, 교육과 의료시설을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대대적으로 거짓 선전했기 때문에, 이를 믿고 북한으로 갔던 일본인들도 일종의 납치 피해자이며, 일본 정부는 이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야마다 교수는 현재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며, 일본 정부가 북한을 탈출한 일본 내 한국인들과 그들의 일본인 처들을 지원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반드시 법원에서 증명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야마다 교수는 또 중국으로 탈북한 귀국자와 일본인 처들에 대해 먼저 주중 일본대사관과 일본 당국은 이들이 중국에서 안전하게 일본까지 돌아올 수 있도록 끝까지 보호해줘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습니다. 

민단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중앙본부

야마다 교수는 아울러 일본 정부는 이미 일본에 돌아온 탈북 일본인 처들의 북한 내 남은 가족들에 대한 안전보장을 북한 정부 측에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탈북한 재일 조선인들과 일본인 처들은 북한에 남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으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중앙본부' 탈북자 지원센터에서 지난 4년 간 탈북 일본인 처와 한국인들을 도와온 김철삼 부국장은 일본 도쿄에서 가진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사람으로도, 일본 사람으로도 살지 못하는 귀국 탈북여성들의 생활상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습니다.

김철삼 부국장: “본인이 열심히 하는데 일본 사회 자체에 적응할 수 없어서 힘든 상태를 보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가족들이 북한에 남아 있어 심리적으로 역시 힘든 상태입니다. 원래 친척들이 여기 있기는 있는데 만날 수 없는 상태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탈북 과정에서 받은 엄청난 정신적, 신체적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지 않은 것도 큰 우려사안이라고, 김 부국장은 밝혔습니다.  

북한에서 식량 부족 등의 생활고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데다 탈북 이후 중국에서도 공안에 붙잡히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일본에 도착한 이후에도 적응하는 데 있어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는다는 설명입니다.

변화된 일본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탈북자들이 겪는 첫번째 어려움입니다.   

야마다 후미야키 교수
김철삼 부국장

김철삼 부국장: “돈 문제도 있고, 생활 방식이 다릅니다. 북한과 일본은. 일본인 처는 옛날에 일본에 살았는데 지금 현재 40년만에 돌아와 일본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사회 자체가.”

특히, 일상에서 겪는 소소한 어려움들을 극복하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김철삼 부국장: “은행에 와서 ATM 기계 시스템도 전혀 모르고, 교통 버스, 지하철 표 사는 방법도 모르고, 두번째, 취직 문제, 또 가타가나 외래어가 많아서 뭐가 뭔지 모르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일본 사회에서 단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탈북 일본인 처의 자식들은 일본어와 함께 사회 적응에 더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전혀 몰라 자칫하면 사회 부적응자가 되기 쉽상이라고, 김 부국장은 지적했습니다.

특히 일본인들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더 큰 부담입니다.

김철삼 부국장: “일본 사람들의 북한에 대한 이미지는 납치, 미사일, 핵 문제, 나쁜 이미지만 있습니다. 100%. 100%죠. (북한은) 일본 사람의 적이죠, 완전히. 그래서 힘들어요. 일본 사회에서 탈북자들이 살아가는 게 더 어려운 상태입니다.”

결국 일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그래도 말이라도 통하는 한국으로 되돌아 가는 탈북자들도 있다고, 김 부국장은 전했습니다.  

김철삼 부국장: “일본 사회에서 납치 문제 때문에 북한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서 큰 소리로 '제가 북한에서 왔습니다', 그렇게 소개할 수 없습니다. 두 명 정도 한국에 간 사람도 있습니다. 일본말 힘드니까.”

김 부국장은 가장 우선적으로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체계 마련을 촉구했습니다.

김철삼 부국장: “2년 전 북한인권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지원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본 국회에서 납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탈북자 문제는 관심이 거의 없습니다. 일본에 계시는 탈북자는 한국의 탈북자와 완전히 다릅니다. 한국 같은 경우는 완전히 법도 있고, 시설도 있고 완전 시스템이 있죠. 일본에는 없습니다. 일반적인 북한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습니다.”

현재 민단 탈북자지원센터는 단체 기부금만으로 일본으로 돌아온 탈북자들을 조금씩 돕고 있지만, 이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기부금이 부족해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국의 소리' 방송이 중국과 일본 현지 취재로 전해드리는 연속 보도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내일은 5회, 마지막 순서로 일본 외무성의 사이가 후미코 북한 인권특사와의 대담을 통해 탈북 일본인 처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과 향후 탈북자 정책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5.제3의 탈북자, 일본인 처-5회

'미국의 소리' 방송이 중국과 일본 현지취재로 전해드리고 있는 특별기획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오늘은 그 마지막 순서로 일본 외무성의 사이가 후미코 인권특사와의 대담을 통해 탈북 일본인 처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과 앞으로의 탈북자 정책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사이가 특사는 1960년 대 북한에 자진해 입국했던 일본인 처와 그 자식들은 무려 7천 여명에 달하며, 일본 정부는 납북자 뿐 아니라 이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서지현 기자의 보도입니다.    

일본 외무성의 사이가 후미코 인권특사
일본 외무성의 사이가 후미코 인권특사
일본 외무성의 사이가 후미코 인권특사는 일본 정부는 최근 잇따라 북한을 탈출하고 있는 재일 한국인의 일본인 처 등 탈북 일본인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북한 인권결의안의 유엔 표결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사이가 특사는 지난 21일 '미국의 소리' 방송과 뉴욕의 유엔주재 일본대표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는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일본 국적의 탈북자들을 기꺼이 도울 것이라며, 일본 정부가 자국민을 돕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이가 후미코 특사는 1966년 일본 외무성에 들어간 이래 유엔대표부에서 참사관, 공사, 대사 등으로 일하다 지난 2005년 노르웨이주재 대사 재직 중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와 인권 문제 협상을 주로 담당하는 인권특사로  임명됐었습니다.

사이가 특사는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는 지난 1960년대 이후 9만3천여명의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 처, 자식들 등이 '북한은 지상락원'이라는 북한 당국의 선전에 속아 북한으로 간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가운데 7천여 명은 일본인 처와 그 자식들로, 이들은 현재 북한에서의 비참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잇따라 탈출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1백여 명이 일본으로 돌아온 것으로 일본 정부는 집계하고 있다고, 사이가 특사는  밝혔습니다.

사이가 특사는 일본 정부와 베이징주재 일본대사관은 북한을 탈출해 일본에 돌아온 탈북자들의 행방과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면서, 특히 최근에는 탈북자 지원 시민단체나 다른 탈북자들을 통해 이같은 정보를 더 많이 얻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외무성의 사이가 후미코 인권특사

사이가 특사는 탈북 일본인 처들이 일본 정부가 납북자 문제에 비해 자신들에게 신경을 덜 쓰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하는 데 대해 이는 맞는 말이 아니라며, 일본 정부는 북한에 자진해서 간 일본인 처들에 대해서도 매우 우려하고 있으며, 이는 재외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로서 당연한 것 아니겠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현재 북한과 외교관계가 없기 때문에 북한에 몇 명의 일본인 처들이 살아있고, 또 이들 가운데 몇 명이 탈출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서, 북한 사회의 폐쇄성으로 이런 정보를 알기 매우 힘들다며 납북자 문제의 심각성도 함께 강조했습니다.

외국인 납치는 그 자체로도 인권에 반하는 것이고, 국제법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사이가 특사는 납북자 가운데 현재까지 일본으로 5명이 돌아왔는데, 이는 정부가 밝혀낸 명단이며, 시민단체들은 비밀리에 입국한 이들이 더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사이가 특사는 탈북자 문제와 북한의 인권 관련 사안은 현재 일본 정부가 매우 우려하고 있는 민감한 문제라며,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납북자와 자진 입북자를 차별하는 게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사이가 특사는 일본 정부는 일본인 처와 그 자식들이 귀국 후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면서, 일본의 '북한인권법'을 소개했습니다.

2년 전 의원입법으로 제정된 '북한인권법'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탈북 일본인들을 도와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다는 설명입니다.

일본 정부의 북한인권법 제6조 2항은 '일본 정부가 탈북자의 보호와 지원에 관해 시책을 강구하도록 노력한다'고만 명시돼 있어, 유명무실한 법규라고 시민단체들은 지적해왔습니다.

한편, 사이가 특사는 탈북 일본인 처를 포함한 탈북자들의 수가 늘어나는 데 대해, 우선은 북한 당국의 인권에 대한 전향적인 자세 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일본 외무성의 사이가 후미코 인권특사
사이가 특사는 유엔 총회 제3위원회가 북한 인권결의안을 올해 세 번째로 통과시킨 것은 국제사회가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한 우려를 거듭 전한 것인데, 북한이 이를 즉각 거부했다며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유엔이 밝힌 북한의 인권상황은 북한이 세계식량계획, WFP나 세계아동기금, UNICEF 등 국제기구에 순조롭게 협력하는 최근 진전상황도 포함하는 등 유엔 특별보고서의 정확한 분석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사이가 특사는 강조했습니다. 

사이가 특사는 북한 당국이 태도를 바꿔 자국민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정확한 식량 배분 등 국제사회의 우려를 속히 받아들이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지난 1959년 시작된 재일 조총련의 북송 사업으로 북한으로 갔던 재일동포의 일본인 아내들이 잇따라 북한을 탈출하고 있으며, 이들이 북한에서의 끔찍했던 생활고에 이어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정, 또 일본 당국의 이에 대한 입장 등을 다섯 차례에 걸쳐 전해드렸습니다. 중국과 일본 현지 취재로 지난 일주일 간 전해드린 특별기획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이 것으로 마칩니다. (미국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