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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신한일어업 협정이 체결되었다. 우리나라 영토인 독도가 갑자기 한일중간수역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했고, 독도를 지켜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독도유인화추진운동본부”가 만들어지고, 이때부터 추진된 운동이 독도로 본적 옮기기였다.
하지만 정작 본적을 옮겼으나 독도는 독도의 지명이 들어간 주소가 없었다.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67번지”가 독도의 공식 지명이었다. 이때부터는 독도의 고유행정지번을 만들기 위한 조례 제정 운동에 앞장섰고, 울릉군 의회를 설득하여 독도의 각 섬마다 지번을 만들어 내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현재 박계동 의원의 본적은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20번지이며, 서울에서 재경 독도향우회가 꾸려져 있고, 당당히 향우회원으로 등록되어 독도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4.부정부패야, 게 섰거라---양도성예금증서(CD) 실명화 입법안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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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 과정에서 불법선거 자금으로 100억원의 양도성 예금증서(CD)를 받은 사실이 밝혀졌고,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불법대선자금으로 양도성 예금 증서가 뇌물로 제공되면서 관련자들이 구속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 최소단위의 CD로 발행되며, 현재 시중에는 50조원이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정작 이를 실명화하는 법안의 입안에는 지극히 소극적이며 오히려 불법 자금을 묵인하면서 투명성 확보를 저해하는데 동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금융실명제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법안을 입안, 양도성 예금 증서나, 무기명 특정 채권이 부정부패의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투명한 금융 거래를 유도하여 국민 경제 발전에 기여하도록 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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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투옥과 수배의 시간, 22년만의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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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4학년이 되던 1975년은 긴급조치9호가 발표되던 해였다. 졸업을 앞두고, 전국학생연맹 사건으로 첫 구속 수감되고 난 이후, 불의에 대항한 항쟁을 계속해 왔다. 3차례의 구속과 4년반 동안의 수감 생활, 10여 차례의 구금, 가택연금 등의 반독재 투쟁이 이어졌으며, 이는 현실 정치에 입문하던 1991년까지 이어졌다. 1980년에 복학이 이루어졌으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다시 구속되어 학업을 마칠 수 없었다. 결국1993년 복학을 하게 되었고, 나머지 한 학기 수업을 듣는 대신 90년대 학번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것으로 최장집 교수님과 논의하고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1993년 졸업식장에는 아내와 딸이 나와 22년만의 졸업을 축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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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라디오 시사 프로진행---긴장의 연속, 생방송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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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 했고, 택시도 몰아봤으니 택시기사들이 많이 듣는 시사프로 진행자로서의 자격이 갖춰진 셈이었다. 짧은 동안이었지만 새벽 6시 30분부터 9시까지 2시간 30분 동안 한치의 실수도 용납해선 안되는 생방송을 진행하면서 팽팽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게다가 거의 매일 칼럼을 발표해야 했기 때문에 날마다 신문을 점검하고, 주제를 정하고, 방송용 원고를 작성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고되고 힘들었지만 색다른 경험이었고, 많은 전문가들을 방송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보람된 시간이었다. 방송을 진행하고 한 달 째 되었을 때 택시를 같이 했던 금구상운 동료들에게 불교방송 101,9MHz를 많이 들어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그분들이 가장 적극적 청취자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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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수배 중에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다----하늘이 주신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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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는 가장 어려운 시절에 만났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로 수배되었고, 영주의 나환자 병원인 다미안 병원, 대구 시립희망원이나 김해의 루카촌 등을 전전하며 수배 생활의 불안과 어려움을 견뎌내고 있었다. 밀항을 해 해외에서 한국을 실상을 알릴 것을 결심하고 실행 준비를 하고 있던 와중에 친구 아내의 소개로 운명처럼 아내를 만났다. 수배자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었고, 기꺼이 동조자가 되어 주었다.
1983년 출소 직후 5월 21일 결혼식을 올렸는데, 함세웅 신부의 주례사는 결국 시국 강연회장을 방불케 했다. 결혼 이후에도 수배와 구류, 가택연금이라는 팍팍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숱한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지만 잘 견뎌왔고, 지금까지 그랬듯이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부부로 살아갈 것이다. 아내는 “한국여성의전화”에서 공동 대표로 활동해 오면서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 8.망국적 수도 이전 위헌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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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국회에 들어와서 국민들의 관심은 수도 이전에 쏠려있었다. 현 정부의 정략적 공약인 수도 이전은 천문학적인 혈세가 들어가는 망국적 정책이었다. 박계동 의원은 서울 시민과 학계 및 제 단체들과 함께 망국적 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해 왔다. 2004년 9월 수도이전반대국민운동 본부를 결성하고 전국적 투쟁 활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헌법 재판소에서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내 서울 시민의 수도와 대한민국 수도를 지켜냈다.
아직도 현 정부는 망국적 수도 이전의 망령을 버리지 못하고 분할 이전을 획책하고 있다. 수도 이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투쟁이며, 반드시 막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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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한준수 前연기군수의 관권부정선거 양심선언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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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후배로부터 귀한 제보가 접수되었다. 연기 군수인 아버님이 관에서 주도한 선거에 불만을 품고, 증거 자료와 함께 부정을 밝히시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내용이었다. 군사정부 시절이라 그대로 묻혀 버리거나, 충분히 역공이라는 공작이 가능한 상황이라 주도면밀하게 준비의 전과정에 함께했다. 1차, 2차, 3차에 걸친 증거물 제시와, 기자회견으로 이어지자 정부는 관에 의해 저질러진 부정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사건은 관주도의 선거 부정을 차단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중립내각 구성을 끌어내기도 했다.
10.한나라당 창당멤버로, 이회창 前총재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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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이회창 후보와 DJ의 국민회의와 분리된 민주당의 조순 후보간에 합당을 하면서 한나라당이 창당된다. 이 합당 과정에 제정구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인사들이 창당 멤버로 참여했고, 박계동 의원 역시 창당 멤버에 합류했다. 97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이회창 후보의 “새물결 유세단”에 합류, 이회창 총재와 함께 전국을 다녔고, 2002년 대선에서는 이회창 후보의 정치 특보로 시민사회와 연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회창 후보와는 감사원장 시절, 14대 국회의원이었던 박의원이 율곡비리 관련 논의와 조언을 구하면서 여러 차례 만났고, 이회창 감사원장의 강직함에 이끌려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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