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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수교관련 과거 미 적성국 수교과정 관심 : 미국-베트남 수교과정과 배경 (외교안보연구원 배긍찬 교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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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수교관련 과거 미 적성국 수교과정 관심 : 미국-베트남 수교과정과 배경 (외교안보연구원 배긍찬 교수)

CIA bear 허관(許灌) 2007. 3. 11. 12:59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급진전 되면서 양국이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수교를 맺을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이 과거 중국, 베트남 등 적성국가와 수교를 맺던 전례를 따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 두 차례에 걸쳐서 베트남과 중국의 미국과의 수교당시 배경과 과정을 살펴봅니다. 오늘은 베트남과 미국의 수교편으로 서울에서 이장균기자가 남한 외교안보연구원 배긍찬 교수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이 미국과 수교한 과정을 보면 두 나라의 개혁개방에 미국의 호응이 맞물렸던 점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교안보연구원 배긍찬 교수는 베트남이 종전 후 전후 경제재건을 위해 미국과의 수교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배긍찬 교수 : 당시 베트남의 내부적인 문제는 전쟁 재건, 전후 재건이었거든요, 돈이 필요하니까 결국 돈을 외부로부터 끌어 오려면 미국과 수교를 하고 미국과 수교를 해야 일본으로부터 돈을 들여올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했고..

베트남은 1975년 통일 이후 2년 후인 77년부터 미국과 수교교섭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78년 베트남이 크메르 루즈 정권을 정복하고 캄보디아에 괴뢰정권을 세우자 교섭이 깨졌습니다.

배긍찬 교수 : 결정적으로 미국, 일본과 수교가 안됐던 이유는 79년에 전격 캄보디아에 침공을 한다구요, 그래서 20만 군대를 상주시키게 된다구요 캄보디아에.. 그러면서 캄보디아 사태가 79년부터 89년까지 10년 가까이 점령통치를 하잖아요..

그런 와중에서 베트남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본따 86년 이른바 도이모이라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때 베트남은 자금이 필요했고 미국의 수교의 전제조건 제시에 적극 호응하게 됩니다. 미국이 제시한 조건 가운데 가장 큰 조건은 미군유해를 회수하는 일이었습니다.

배긍찬 교수 : 협상의 가장 핵심이 뭐였냐 하면 MIA (Missing In Action), 월남전 당시의 실종자, 미국 사람들이 의회를 통해서 여러 가지 청원을 많이 하는데 그 중의 가장 많은 게 뭐냐면 월남전 당시의 미군 전사자 유해를 못 찾았던 문제가 상당히 있었거든요, 미국 사람들은 전쟁에서 죽으면 반드시 유품이나 유골은 회수해 가는 철저한 원칙이 있잖아요..

결국 베트남은 캄보디아 주둔 20만 병력유지비의 부담으로 인해 군대를 철수 시키고 개혁정책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배긍찬 교수 : 내부적으로도 사회주의 중앙집권적인 사회경제로는 한계에 왔다.. 그래서 86년부터 도이모이라는 개혁정책을 실시하고 그리고 80년대 후반부터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종식이 되는거 아니에요 그때.. 그러면서 베트남이 미국뿐 아니라 주변 동남아국가들과 다시 수교를 하고 굉장히 현실주의적인 외교정책을 취하게 되거든요..

이어 베트남은 미국의 클린턴행정부와의 수교를 위해 전폭적으로 협조하게 됩니다.

배긍찬 교수 : 클린턴 행정부에 들어와서 수교협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어요, 그때 베트남이 적극적으로 협조했어요, 미국을 만족시킬 정도로 그러니까 미국측에서 더 이상 깨치부릴 여지가 없을 정도로 아주 그 자기네들 나름대로 최대한의 성의를 가지고 미국이 요구한 것을 다 들어 준거죠, 그래서 미국이 원하는 데로 가서 땅 파라고 하면 땅 파고.. 유골 묻혀있는 곳을 찾은 거니까..

배긍찬 교수는 북한의 경우 이미 미국 클린턴 행정부 시절 베트남처럼 미국과의 수교기회가 있었지만 무산됐다며 그러나 베트남과 북한의 경우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배긍찬 교수 : 북한 입장은요, 그때 입장보다 지금 입장이 더 나아진거 같아요, 그 때는 사실 핵을 동결하는 수준에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하려고 했던거고 지금은 그때와 상당히 상황이 다른 게 그때 보다 훨씬 더 많은 핵물질을 보유하고 있고 핵실험까지 했고.. 핵무기 보유를 사실상 인정받고 협상을 하는거 아녜요... 베트남의 경우는 핵무기가 없고 이미 베트남은 시장경제체제로의 복귀가 약속돼 있었고 그 다음에 미국-베트남과의 문제는 MIA, 실종자 문제였단 말예요 성의만 보이면 되는 거였거든요..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북한정부의 서바이벌(생존) 자체가 걸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정된 코스로 적절하게 잘 쉽게 갈거라고 속단하는 것은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서울-이장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