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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그리고 풀이지 않은 사인(死人) 의혹 독살설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스탈린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그리고 풀이지 않은 사인(死人) 의혹 독살설
CIA Bear 허관(許灌) 2006. 9. 27. 21:211.스탈린의 성장과정
요셉 비쌀리오노비치 스탈린(본래의 姓은 주가시치빌)은 1872년 12월 21일 가난한 제화공이자 술주정뱅이인 비싸리온 이바노비치 빌리와 그의 아내 에까쩨나의 넷째 아들로 그루지아 지방의 구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스탈린은 앞서 태아난 셋 아이는 모두 산후(産後: 아리를 낳은 직후)에 죽었다
스탈린이 태어난 1879년은 제정러시아로서는 많이 낳고 많이 죽은 해였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블레하노프와 나로드니끼(인민주의자)는 마침내 분열하였고 황제는 자객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아울러 동궁(冬宮:추운 궁=러시아 왕궁)을 파괴하려던 혁명당의 음모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또 이해에 마르크스는 62세, 엥겔스는 60세, 레닌은 10세였다
스탈린은 태어날때부터 두가지 신체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왼쪽 두째와 셋째 발가락이 서로 붙었고 왼쪽팔이 조금 짧았다 체격은 약간 여위고 긴 편이었으며 눈은 아사인 같아서 외모상으로나 성격상 볼때는 순수한 혈통 아시아인계통 그루지아인이었다
그루지아인의 천성은 솔직하고 명랑하고 온화하며 외무는 단정한 편이었으나 스탈린은 어릴때부터 제정러시아인(슬라브족 러시아인)에 대한 식민지 국가 그루지아인(아시아계통)의 독립투쟁정신과 그루지아 말 보존을 위한 천부적인 민족성이 있어서며 술주정뱅이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독립적인 기질이 있었다
"제정러시아인들이 그루지아 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며 우리들을 식민지 국가 노예가 되기를 가르쳤으며 러시아말과 글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민족과 가족, 친족, 그루지아인이 있다 우리의 적은 제정러시아왕국이다 술이 식민지 국가의 약이며 불만 해소용이다 스탈린은 어릴때부터 조국해방전사가 되기를 원했는 것 같다"
그는 7세때 천연두를 앓았다
이러한 신체상의 결함으로 인한 친구들의 희롱과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난폭한 성격은 결국 어린 스탈린으로 하여금 완고하고 참을성 있고 우직한 성격을 만들어 놓았고 신학교를 선택하게 하여 성직자로 나아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게 하였고 스탈린은 신학교부터 죽음을 두워하지 않는 혁명가로서 조직가이면서 선전부 요원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남한사회 책자에서는 스탈린을 나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스탈린은 그루지아 출신으로 소련 최고지도자로 성장한 천재적인 선전정책을 내다볼 수 잇는 조직가였다 그는 그의 집필로 모든 소련정부 정책을 입안했고 그것을 그대로 조직화하여 세력화하여 소련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그루지아 출신 답게 제2차대전 파시즘. 나찌즘.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를 분쇄한 사회주의 승리로 이끈 인내와 우직함이 뛰어난 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1880년 9월 그는 운좋게 구리교회가 운영하는 4년제 국민학교에 들어가 6년만이 1894년에 졸업하였다 그가 입학한 2년 후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나 그는 결코 슬퍼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국민학교시절의 스탈린은 기억력이 좋고 공부를 잘했고 학교규칙을 잘 지켰다고 한다
당시의 스탈린은 학교였던 <이리마시빌러>가 회고한 바에 의하면 스탈린은 항시 묵묵했고 자기 주관과 고집을 꺾을 줄을 몰랐고 어떤 놀이에서도 우두머리를 자청했고 비록 자연을 좋아했지만 동물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져본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어릴때부터 닭나 양등을 손으로 죽어서 요리로 먹어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동물에 대한 연민의 정보다는 식량으로 바라보았다 스탈린은 문(文)보다는 무(武)를 숭상했다
그러나 스탈린도 동물이나 식물등을 존중했으며 사랑했다
<이리마시빌는 사회민주주의자 멘쎄비끼로서 독일 망명시 스탈린전집을 출간하였다>
<이리마시빌>는 <나는 그가 우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의 친구에게 어떠한 좋은 일이 있건 슬픈 일이 있건 그는 언제나 싸늘하게 웃을 뿐이었다>고 스탈린을 회상하고 있다
스탈린은 1894년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규범학생인 관계로 선생의 도움을 얻어 학비면제와 더불어 의복과 숙식마저 제공하는 뜨빌리씨의 러시아정교계열의 중학교(일종의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수도승 훈련(성직자)를 목적으로 한 이 신학교는 중세기적 교육방법으로 학생들을 엄격하게 다루었다 성서와 기도로 일관된 학교생활은 결국 학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복종하도록 하는 훈련에 집약되었다
이밖에도 제정러시아화의 실현을 위하여 학교는 그루지아어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이 신학교는 황제의 노예를 만들어내는 기관이 아닌 그루지아 지식분자들의 혁명사상의 근원지가 되어 버렸다
학생들로 하여금 혁명사상으로 심취하게 한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러시아화에 반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이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그루지아의 문화는 결코 러시아보다는 뒤떨어진 것이 아니었고 독립을 잃은 그루지아인들은 일찍부터 제정러시아의 통치에 부단히 반항하여 왔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그루지아 민족주의 운동가와 투쟁가를 배출했었다
이러한 신학교 안팎의 환경 속에서 스탈린은 처음에는 품행과 학업이 모두 우수하였으나 나중에 와서는 점차 사회적인 분위기에 동화(同化)되었다
그는 이때 무신론을 비롯한 많은 혁명 서적을 탐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2.스탈린의 사회민주주의 혁명 활동
스탈린이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그룹과 직접 관계를 맺었던 것은 1898년 8월이었다 즉 <멘세비킨=메싸메.닷시>라는 사회민주주의 그룹에 가입하여 비밀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이 기간동안 그의 비밀활동에 관한 보고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기민성과 교활성을 갖춘 그의 개성(個性)에서 추리한다면 그는 능히 자신의 대내외적 활동을 은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부들의 눈에는 언제나 좋지 않은 학생으로 비쳤다 신학교내부 불법적인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였다 그는 같은 학우들에게 불온서적을 읽어주거나 신부들과 충돌도 잦았다
1899년 5월 마침내 그는 강제로 퇴학당하고 지하로 들어가 당시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겪어야 했던 직업혁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에서 스탈린의 인물됨은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스탈린전집 작가 이리마시 빌리의 회고록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스탈린 그는 오직 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만을 친한 벗으로 삼았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난폭하게 화를 내거나 악의적으로 소조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가 거느리는 무리들이 그의 영도하에 복종한 이유는 그들이 그의 권력 밑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직 정신력이 결핍되어 있고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그의 친한 벗이 되었던 것이다 누가 그의 말을 반박하려고 하거나 그에게 뭔가 해명하려고 하면 그는 즉각 상대방을 적으로 취급하였다 그는 항상 도발적인 이간수단을 써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투쟁하도록 선동하고는 자기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는 추호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반대하거나 찬성했던 주장을 역으로 이를 찬성하거나 반대하기도 했다 그가 중요시 한 것은 오직 승리뿐이었다 그의 모든 주장은 민족성이나 인류애, 객관적 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개인의 헤게모니 투쟁을 위한 의지와 무자비한 야심에 의해 빚어진 자연적인 결과였다 그는 하나 하나의 사물에 대하여 오직 그 사물자체의 소극적이고 파괴적인 면만을 보았다 그는 이상을 위한 투쟁의 동기나 성격을 믿지 않았다"
신학교에서 추방된 스탈린은 한때 뜨빌리씨 기상 <관측소>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지하에 잠적 1901년 러시아 사회민주당 <뜨빌리씨> 위원회의 멤버가 되었다
1902년에는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고 그 후 여섯 차례의 유형(流刑)과 다섯번의 도주가 있었다
이른바 제1차 러시아혁명(1905-1907년)을 포함하여 1910년경까지 주로 뜨빌리씨. 바뚱. 바꾸등지에서 활동하였고 강경한 볼세비킨(불쉐비끼)로서 당파투쟁을 열심히 펴나갔다
<무정부주의냐 아니면 사회민주주의냐?>(1906년-1907년)는 당시의 이론투쟁의 산물이다
"동지들! 무정부주의자는 제정 러시아왕조이 무너지고 난 후 어떤 정부가 수립돼야 하는가에 대한 대안이나 정책이 없습니다 오직 극단적 투쟁만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무정부주의자는 공산주의자와 국제주의자들의 책동입니다 그들은 오직 국가없는 사회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다릅니다 노동자 농민 자산계급 그리고 민족주의자들이 모여서 위원회를 창립하여 그 토대로 각(各) 민족끼리 연합정부인 연방공화국을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짜르정부 붕괴 후 러시아정부는 러시아민족만이 아닌 모든 민족과 종족이 모여서 연합정부 소비에트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입니다 계급없는 노동자. 농민. 농노. 자산계급. 지식인 학생등의 정부로..지금부터는 짜르정부가 아닙니다."
1912년 브라하협의회 이후 볼세비킨(볼쉐비끼) 당의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어 당의 신문 프라우다의 편집부에서 근무하였다 이 무렵부터 스탈린(강철의 사나이)이라는 조직명(組職名)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스탈린의 가명은 수십개이다
<다비드> <니제라게> <치지겐프> <베살리빌리> <뚜뚜니안쯔> <이바노비치>등등이다
볼세비킨 당의 중앙위 프라우다 편집부가 소베에트 정부기관(KGB)설립의 선구자가 되었다 KGB는 진보적 지식인. 노동자. 농민 그리고 학생등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연합체 전위대에서 설립된 사회주의 공화국 권력유지기관이다
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도 볼세비킨 프라우다의 편집부를 모델로 구국의 소리(구국전선)을 설립하여 대남공작을 추진해왔다
꾸라꾸브에서 레닌을 만나 그의 권유로 쓴 논문이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1913년)"이며 그 논문에서 겐바 스탈린이라고 필명을 적었다
1913년부터 줄곧 유형지(流刑地)에 있다가 1917년 2월혁명으로 레닌그라드(베뜨로그라드)로 돌아왔다
이때 비교적 협조적인 노선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레닌 귀국 후에는 완전히 레닌의 편에 섰다 1913년 5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 되었고 제6차 당대회에서는 레닌, 지노비예프의 부재(不在)로 당 중앙위원회의 보고를 떠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후부터는 당활동의 눈부신 주역으로 부상된 트로쯔키(뜨로즈끼)의 그늘에서 맴돌았다
"소련이나 중국, 북한 모든 사회주의 지역에서도 주민들은 공산주의 노선보다는 사회주의 노선을 바라지만 당을 장악하고 있는 지도부는 항시 공산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레닌이나 트로쯔키등도 사회주의 노선을 걸어가야 하는데도 공산주의 노선을 선택했고 스탈린은 사회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나중에 스탈린은 승리하였으며 러시아 다민족끼리 투쟁을 해소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극좌노선 트로쯔키를 제거하기 위하여 우파 부하린등과 연합했다."
3.스탈린의 정치형태
1917년의 10월혁명 후 스탈린은 소비에트정부의 민족문제 인민위원(1917년부터 1923년까지), 노동 국방회의 위원, 노농감찰인민위원(1919년부터 1922년까지)이 되었고 외국간섭군과 내란시기에는 남부방면군. 서부방면군의 혁명군사회의 위원으로 근무하였다
"서방 독점. 판매자본가와 지주들은 소련 노농혁명을 두려워했고 짜르정부를 지원했지만 그들은 패배했다."
스탈린은 내란 후의 시기에는 레닌의 신임을 얻어 당 중앙위원회 서기장(1922년)이 되었다
레닌의 사망(1922년) 전후로 해서 스탈린은 제13차 당 협의회 및 제13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 가메내프등과 주류파를 이루었고 트로쯔키(뜨로쯔키)파의 반대를 저지하고 더우기 레닌의 장례에서 당을 대표하여 이른바 "원대한 서약"이라는 추도문을 읽음으로써 레닌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여기서 무수한 정적들을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하게 된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러시아혁명의 주역을 맡은 볼세비킨(볼쉐비끼)는 1918년 제7차 당대회에서 그의 명칭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러시아공산당으로 바꾸워고 네프(신경제정책)을 채택할 무렵에는 60만이 넘는 당원을 가지고 있엇다
그러나 지도적인 당원은 다음의 셋 그룹으로 나눠져 레닌이 그것을 통괄하고 있었다
첫째그룹은 트로쯔키(뜨로쯔키)에 의해서 대표되는 좌파로서 이들은 세계혁명이 없이는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러시아공산당은 국외의 혁명운동을 지원함과 동시에 국내에 있어서도 강력하게 사회주의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네프(NEP,신경제정책)의 채용을 반대했다 지노비예프나 까메네프등도 기본적으로 트르쯔키 정책을 지지하였다
"네프(NEP, 신경제정책)은 소련이 1921년부터 레닌과 스탈린이 실시한 경제정책이다 1921년이전의 전시(戰時)공산주의와 비교하여 신경제정책이라고도 한다 소련공산당과 정부는 위기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제정책의 극적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전시공산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던 식량할당 징발제가 폐지되고 식량현물세가 도입되었다 납세 뒤의 잉여곡물처분은 당초 시도되었던 조직적 상품교환의 실패 후 농민의 자유에 맡겨졌고 현물세도 차츰 화폐납입으로 대치되었다 그 결과 도시와 농촌의 관계에서 상품경제가 지배하게 되었고 소상품 생산자인 농민의 물질적 관심이 촉진되었다 한편 국영공업은 트러스트로 재편성되어서 상업계산제롤 옮겨졌으며 또한 일부 기업은 다시 사유화되어 중소규모의 사영 상공업 경영이 합법화 되었다 1925-1926년에는 공업생산 가운데 사적 부문의 비중이 27.1%까지 달했으나 이때에도 대공업. 은행. 운수. 외국무역. 터지등 관제고시(관제고시)라고 일컬어지던 중요한 경제영역은 국가가 장악하고 있었다 1923년의 협상가격차 공황의 극복, 다음해 화폐개혁의 성공등을 거쳐서 경제부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 뜻에서 신경제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신경제정책은 레닌 스탈린 그리고 부하린등이 지지했으며 좌파세력인 트로쯔키등은 반대했다 제2차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소련도 강제적 농업집단화. 국유화정책등의 극단적 공산주의 국가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으로 내다볼 수 있는 자료이다."
둘번째 그룹은 부하린에 의하여 지도되는 우파이다
이들 역시 러시아라는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는 생각치 않으나 당면한 세계혁명의 시기가 없는 이상 현실과 타협하면서 네프(신경제정책)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하린노선이 우파민족주의 경제이론 입장이다
소비가 투자라는 케이즌경제학 입장에서 자국 경제발전이 없는 한 국가발전이 있을 수 없으며 외세종속화 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소비가 투자라는 입장이어야 국내 경제가 고도소비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며 자국경제규모로도 잘 살아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공화을 예방할 수 있다
부하린과 스탈린은 이런 입장에서 좌파그룹 트로쯔키 계열의 공산주의 경제이론 집단농장과 무산몰수, 무산분배정책을 견제하고 제거하는데 공동 노력했다
셋째는 스탈린이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의 지지자이다
이들은 원대한 소련은 인구도 많고 자원도 풍부하기 때문에 가령 세계혁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일국에서도 사회주의가 건설 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네프(신경제정책)를 지지했다 세계 무산혁명과 강제적 농업집단농장 그리고 국유화정책을 지지하고 네프(신경제정책)을 반대한 좌파 트로쯔키노선과 상반된 우파 노선이었다
스탈린은 1924년말 "10월혁명과 러시아공산당의 전술"이라는 논문에서 트로쯔키에 반론하는 형태로서 이 견해를 처음으로 밝혔다 이 무렵 그는 그의 저서 "레닌주의의 기초"를 내놓기도 하였다
레닌은 1921년말부터 중병에 걸려 공직생활에서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듬해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당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지노비예프, 까메네프와 더불어 삼두정치를 꿈꾸며 트로쯔키에 대신하여 레닌의 후계자의 지위를 노리게 시작하였다
레닌은 처(妻)에게 구술하여 기록케 한 유서에서 스탈린은 너무나 거칠고 난폭해서 서기장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당원은 그를 지위에서 제거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그 보다도 관용이 있고 충성심이 있고 정중하고 동지에 대하여 배려가 두터운 다른 사람을 임명할 것을 제안한다고 하였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사망했으나 그 유서는 당시의 중앙위원에게만 알린채 끝내 공표되지 않았다 이것이 처음으로 공표된 것은 1956년 2월 제20차 당 대회에서의 "흐루시초프"의 비밀보고서에서였다
"스탈린의 권력을 장악한 과정은 우선 부하린과 손을 잡고 트로쯔키등의 좌파그룹을 내쫓은 다음 그는 우파마저 탄압하는 일종의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때 그는 서기장의 지위를 이용하여 당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반대파는 당의 노선에 따르지 않는 분파주의자라고 매도하였다"
결국 트로쯔키는 1929년에는 소련으로 추방되었고 1940년 망명 중인 멕시코에서 암살되었다
한편 스탈린과 삼두정체를 꾸몄던 좌파의 지노비예프와 까메네프도 우파의 부하린과 더불어 1936년에 숙청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곡물조달의 위기를 맞아 부하린. 즈이꼬프. 또스끼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면적 농업집단화 즉 위로부터 혁명을 단행하였다
이와병행하여 제1차 제2차 5개년게획(1928년, 1937년)도 추진하였고 대숙청의 선풍이 가장 격하게 휘몰아쳤던 1936년말에는 1924년의 헌법에 대신하여 이른바 스탈린헌법을 제정하였다
이제는 농업의 집단화와 공업화의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스탈린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하여 새로운 헌법으로써 소련의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내외에 과시하려고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스탈린헌법의 제정에 이어서 1938년에는 스탈린노선의 절대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소연방공산당소사(蘇聯邦共産黨小史)가 펀찬 발행되었고 그 속의 "변증법적 및 사적 유물론"은 스탈린이 직접 집필하였다
독일과 전쟁 전후(1941년 5월)에는 스탈린은 인민위원회의 의장(수상) 이어 국가방위회의 의장, 국방인민위원등을 맡아 전쟁을 지도하였다
그가 연합국 지도자들과 함께 테헤란(1943년). 알타회담(1945년). 포츠담(1945년)등지에서 회동하여 전쟁수행 및 전후의 처리문제를 협의하였다
전후에 발표된 논문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는 언어의 본질을 논하고 그의 계급성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그의 최후의 저작인 "소연방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제문제"는 현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기본적 경제법칙을 논한 것이다
4.스탈린의 죽음--풀리지 않는 사인(死人) 의혹 독살설
1953년 2월 28일 밤 스탈린과 그의 최측근 라브렌티 베리아, 니키타 흐루시초프, 나콜라이 불가닌,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평상시와 같은 일정을 가졌다 이들은 크렘린궁에서 영화 한편을 본 뒤 모스크바에서 10분거리에 있는 스탈린의 시골 집으로 옮겨 만찬을 즐겼다
다음날 새벽 손님들은 각자 모스크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후에 생긴 일은 스탈린처럼 보안에 비정상적인 정도로 집착하는 사람으로서는 예외적인 일로 그는 경비원들에게 물러가 있고 깨우지 말라고 명령했다
당시 경비병 중 한 사람인 로자체프는 이날 물러가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스탈린 본인이 아니라 선임 경비원인 흐루스탈레프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는 스탈린이 평소 경비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자고 있는가?"하고 물었다고 전했다
"우리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예요 그래서 자도 좋다는 명령을 받자 우리는 물론 기뻐서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자러 갔지요"
경비병들은 다음날 아침 늦게까지 자고 스탈린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정오가 지난 13시나 돼도 14시가 돼도 스탈린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비병들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감히 그의 방에 들어갈 염두를 내지 못했다 스탈린이 직접 시키지 않은 한 누구도 그를 방해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저녁 18시 30분 스탈린의 방에 불빛이 비치자 경비병들은 약간 안심했다
그러나 시계가 22시가 알리자 이들은 겁에 질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로자체프에게 들어가 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달려가서 "스탈린 동지" 어쩐 일이십니까?" 물었지요 글쎄, 그는 침대에 오줌을 싼 채 누워서 "즈즈"하는 알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어요. 그의 회중시계와 프라우다 신문 한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시계는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지요 그 시간이 바로 일이 벌어진 시간이었나 봅니다]
경비병들은 곧장 전날 밤 스탈린과 함께 술을 마신 정치국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들은 꾸물거리며 의료진을 부르고 느릿 느릿 움직였다
스탈린은 3월 5일 밤 9시 50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후 열린 1956년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스탈린의 생존시 그의 개인 숭배와 정치적 오류를 비판했다
영국 BBC 인터넷은 3월 24일 지금까지도 뇌출혈로 인한 자연사인지 암살인지 의혹이 풀이지 않고 있는 스탈린 사망 당시 정황을 러시아학자 예두아르트 라진스키의 연구를 토대로 추적한 자료에 의하면 "흐루스탈레프가 국가보안국(KGB) 국장인 베리아의 명령을 받아 스탈린에게 독물주사를 놓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스탈린이 독살된 이유는 무엇일까?
라진스키의 주장은 당시 스탈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스탈린의 3차대전 계획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스탈린이 "공산주의 유럽을 건설할 기회가 왔다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베리와 흐루시초프, 말렌코프등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경제기반이 전혀 없는 소련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소련은 보통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독일군 침공으로 파괴되고 지원이라고는 핵무기 뿐인 극빈국이었다"는 것이다
라진스키는 스탈린이 그래서 반유대주의 운동으로 미국을 도발해 미국의 반응을 보이기를 기다렸다고 주장했다 베리아는 스탈린이 3월 5일을 기해 모스크바의 유대인 이주작전을 시작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늘 그렇듯 음모론은 증폭된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모스크바 시 전역에 유대인들을 실어나르기 위한 버스들이 주차돼 있는 것을 보았고 카자흐스탄에 이주민을 수용하기 위한 헛간이 세워진 것을 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사경을 헤메는 며칠 동안 소련국민들은 그의 임박한 죽음을 둘러싸고 비통해 하는 사람들과 남몰래 희망의 미소를 띄는 사람들로 갈라졌다
"세계전쟁을 획책하는 어느 혁명가나 지도자는 반드시 죽는다 :) 말씀..."
요셉 비쌀리오노비치 스탈린(본래의 姓은 주가시치빌)은 1872년 12월 21일 가난한 제화공이자 술주정뱅이인 비싸리온 이바노비치 빌리와 그의 아내 에까쩨나의 넷째 아들로 그루지아 지방의 구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스탈린은 앞서 태아난 셋 아이는 모두 산후(産後: 아리를 낳은 직후)에 죽었다
스탈린이 태어난 1879년은 제정러시아로서는 많이 낳고 많이 죽은 해였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블레하노프와 나로드니끼(인민주의자)는 마침내 분열하였고 황제는 자객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아울러 동궁(冬宮:추운 궁=러시아 왕궁)을 파괴하려던 혁명당의 음모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또 이해에 마르크스는 62세, 엥겔스는 60세, 레닌은 10세였다
스탈린은 태어날때부터 두가지 신체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왼쪽 두째와 셋째 발가락이 서로 붙었고 왼쪽팔이 조금 짧았다 체격은 약간 여위고 긴 편이었으며 눈은 아사인 같아서 외모상으로나 성격상 볼때는 순수한 혈통 아시아인계통 그루지아인이었다
그루지아인의 천성은 솔직하고 명랑하고 온화하며 외무는 단정한 편이었으나 스탈린은 어릴때부터 제정러시아인(슬라브족 러시아인)에 대한 식민지 국가 그루지아인(아시아계통)의 독립투쟁정신과 그루지아 말 보존을 위한 천부적인 민족성이 있어서며 술주정뱅이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독립적인 기질이 있었다
"제정러시아인들이 그루지아 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며 우리들을 식민지 국가 노예가 되기를 가르쳤으며 러시아말과 글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민족과 가족, 친족, 그루지아인이 있다 우리의 적은 제정러시아왕국이다 술이 식민지 국가의 약이며 불만 해소용이다 스탈린은 어릴때부터 조국해방전사가 되기를 원했는 것 같다"
그는 7세때 천연두를 앓았다
이러한 신체상의 결함으로 인한 친구들의 희롱과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난폭한 성격은 결국 어린 스탈린으로 하여금 완고하고 참을성 있고 우직한 성격을 만들어 놓았고 신학교를 선택하게 하여 성직자로 나아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게 하였고 스탈린은 신학교부터 죽음을 두워하지 않는 혁명가로서 조직가이면서 선전부 요원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남한사회 책자에서는 스탈린을 나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스탈린은 그루지아 출신으로 소련 최고지도자로 성장한 천재적인 선전정책을 내다볼 수 잇는 조직가였다 그는 그의 집필로 모든 소련정부 정책을 입안했고 그것을 그대로 조직화하여 세력화하여 소련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그루지아 출신 답게 제2차대전 파시즘. 나찌즘.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를 분쇄한 사회주의 승리로 이끈 인내와 우직함이 뛰어난 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1880년 9월 그는 운좋게 구리교회가 운영하는 4년제 국민학교에 들어가 6년만이 1894년에 졸업하였다 그가 입학한 2년 후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나 그는 결코 슬퍼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국민학교시절의 스탈린은 기억력이 좋고 공부를 잘했고 학교규칙을 잘 지켰다고 한다
당시의 스탈린은 학교였던 <이리마시빌러>가 회고한 바에 의하면 스탈린은 항시 묵묵했고 자기 주관과 고집을 꺾을 줄을 몰랐고 어떤 놀이에서도 우두머리를 자청했고 비록 자연을 좋아했지만 동물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져본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어릴때부터 닭나 양등을 손으로 죽어서 요리로 먹어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동물에 대한 연민의 정보다는 식량으로 바라보았다 스탈린은 문(文)보다는 무(武)를 숭상했다
그러나 스탈린도 동물이나 식물등을 존중했으며 사랑했다
<이리마시빌는 사회민주주의자 멘쎄비끼로서 독일 망명시 스탈린전집을 출간하였다>
<이리마시빌>는 <나는 그가 우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의 친구에게 어떠한 좋은 일이 있건 슬픈 일이 있건 그는 언제나 싸늘하게 웃을 뿐이었다>고 스탈린을 회상하고 있다
스탈린은 1894년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규범학생인 관계로 선생의 도움을 얻어 학비면제와 더불어 의복과 숙식마저 제공하는 뜨빌리씨의 러시아정교계열의 중학교(일종의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수도승 훈련(성직자)를 목적으로 한 이 신학교는 중세기적 교육방법으로 학생들을 엄격하게 다루었다 성서와 기도로 일관된 학교생활은 결국 학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복종하도록 하는 훈련에 집약되었다
이밖에도 제정러시아화의 실현을 위하여 학교는 그루지아어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이 신학교는 황제의 노예를 만들어내는 기관이 아닌 그루지아 지식분자들의 혁명사상의 근원지가 되어 버렸다
학생들로 하여금 혁명사상으로 심취하게 한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러시아화에 반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이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그루지아의 문화는 결코 러시아보다는 뒤떨어진 것이 아니었고 독립을 잃은 그루지아인들은 일찍부터 제정러시아의 통치에 부단히 반항하여 왔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그루지아 민족주의 운동가와 투쟁가를 배출했었다
이러한 신학교 안팎의 환경 속에서 스탈린은 처음에는 품행과 학업이 모두 우수하였으나 나중에 와서는 점차 사회적인 분위기에 동화(同化)되었다
그는 이때 무신론을 비롯한 많은 혁명 서적을 탐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2.스탈린의 사회민주주의 혁명 활동
스탈린이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그룹과 직접 관계를 맺었던 것은 1898년 8월이었다 즉 <멘세비킨=메싸메.닷시>라는 사회민주주의 그룹에 가입하여 비밀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이 기간동안 그의 비밀활동에 관한 보고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기민성과 교활성을 갖춘 그의 개성(個性)에서 추리한다면 그는 능히 자신의 대내외적 활동을 은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부들의 눈에는 언제나 좋지 않은 학생으로 비쳤다 신학교내부 불법적인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였다 그는 같은 학우들에게 불온서적을 읽어주거나 신부들과 충돌도 잦았다
1899년 5월 마침내 그는 강제로 퇴학당하고 지하로 들어가 당시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겪어야 했던 직업혁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에서 스탈린의 인물됨은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스탈린전집 작가 이리마시 빌리의 회고록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스탈린 그는 오직 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만을 친한 벗으로 삼았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난폭하게 화를 내거나 악의적으로 소조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가 거느리는 무리들이 그의 영도하에 복종한 이유는 그들이 그의 권력 밑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직 정신력이 결핍되어 있고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그의 친한 벗이 되었던 것이다 누가 그의 말을 반박하려고 하거나 그에게 뭔가 해명하려고 하면 그는 즉각 상대방을 적으로 취급하였다 그는 항상 도발적인 이간수단을 써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투쟁하도록 선동하고는 자기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는 추호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반대하거나 찬성했던 주장을 역으로 이를 찬성하거나 반대하기도 했다 그가 중요시 한 것은 오직 승리뿐이었다 그의 모든 주장은 민족성이나 인류애, 객관적 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개인의 헤게모니 투쟁을 위한 의지와 무자비한 야심에 의해 빚어진 자연적인 결과였다 그는 하나 하나의 사물에 대하여 오직 그 사물자체의 소극적이고 파괴적인 면만을 보았다 그는 이상을 위한 투쟁의 동기나 성격을 믿지 않았다"
신학교에서 추방된 스탈린은 한때 뜨빌리씨 기상 <관측소>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지하에 잠적 1901년 러시아 사회민주당 <뜨빌리씨> 위원회의 멤버가 되었다
1902년에는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고 그 후 여섯 차례의 유형(流刑)과 다섯번의 도주가 있었다
이른바 제1차 러시아혁명(1905-1907년)을 포함하여 1910년경까지 주로 뜨빌리씨. 바뚱. 바꾸등지에서 활동하였고 강경한 볼세비킨(불쉐비끼)로서 당파투쟁을 열심히 펴나갔다
<무정부주의냐 아니면 사회민주주의냐?>(1906년-1907년)는 당시의 이론투쟁의 산물이다
"동지들! 무정부주의자는 제정 러시아왕조이 무너지고 난 후 어떤 정부가 수립돼야 하는가에 대한 대안이나 정책이 없습니다 오직 극단적 투쟁만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무정부주의자는 공산주의자와 국제주의자들의 책동입니다 그들은 오직 국가없는 사회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다릅니다 노동자 농민 자산계급 그리고 민족주의자들이 모여서 위원회를 창립하여 그 토대로 각(各) 민족끼리 연합정부인 연방공화국을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짜르정부 붕괴 후 러시아정부는 러시아민족만이 아닌 모든 민족과 종족이 모여서 연합정부 소비에트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입니다 계급없는 노동자. 농민. 농노. 자산계급. 지식인 학생등의 정부로..지금부터는 짜르정부가 아닙니다."
1912년 브라하협의회 이후 볼세비킨(볼쉐비끼) 당의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어 당의 신문 프라우다의 편집부에서 근무하였다 이 무렵부터 스탈린(강철의 사나이)이라는 조직명(組職名)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스탈린의 가명은 수십개이다
<다비드> <니제라게> <치지겐프> <베살리빌리> <뚜뚜니안쯔> <이바노비치>등등이다
볼세비킨 당의 중앙위 프라우다 편집부가 소베에트 정부기관(KGB)설립의 선구자가 되었다 KGB는 진보적 지식인. 노동자. 농민 그리고 학생등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연합체 전위대에서 설립된 사회주의 공화국 권력유지기관이다
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도 볼세비킨 프라우다의 편집부를 모델로 구국의 소리(구국전선)을 설립하여 대남공작을 추진해왔다
꾸라꾸브에서 레닌을 만나 그의 권유로 쓴 논문이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1913년)"이며 그 논문에서 겐바 스탈린이라고 필명을 적었다
1913년부터 줄곧 유형지(流刑地)에 있다가 1917년 2월혁명으로 레닌그라드(베뜨로그라드)로 돌아왔다
이때 비교적 협조적인 노선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레닌 귀국 후에는 완전히 레닌의 편에 섰다 1913년 5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 되었고 제6차 당대회에서는 레닌, 지노비예프의 부재(不在)로 당 중앙위원회의 보고를 떠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후부터는 당활동의 눈부신 주역으로 부상된 트로쯔키(뜨로즈끼)의 그늘에서 맴돌았다
"소련이나 중국, 북한 모든 사회주의 지역에서도 주민들은 공산주의 노선보다는 사회주의 노선을 바라지만 당을 장악하고 있는 지도부는 항시 공산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레닌이나 트로쯔키등도 사회주의 노선을 걸어가야 하는데도 공산주의 노선을 선택했고 스탈린은 사회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나중에 스탈린은 승리하였으며 러시아 다민족끼리 투쟁을 해소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극좌노선 트로쯔키를 제거하기 위하여 우파 부하린등과 연합했다."
3.스탈린의 정치형태
1917년의 10월혁명 후 스탈린은 소비에트정부의 민족문제 인민위원(1917년부터 1923년까지), 노동 국방회의 위원, 노농감찰인민위원(1919년부터 1922년까지)이 되었고 외국간섭군과 내란시기에는 남부방면군. 서부방면군의 혁명군사회의 위원으로 근무하였다
"서방 독점. 판매자본가와 지주들은 소련 노농혁명을 두려워했고 짜르정부를 지원했지만 그들은 패배했다."
스탈린은 내란 후의 시기에는 레닌의 신임을 얻어 당 중앙위원회 서기장(1922년)이 되었다
레닌의 사망(1922년) 전후로 해서 스탈린은 제13차 당 협의회 및 제13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 가메내프등과 주류파를 이루었고 트로쯔키(뜨로쯔키)파의 반대를 저지하고 더우기 레닌의 장례에서 당을 대표하여 이른바 "원대한 서약"이라는 추도문을 읽음으로써 레닌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여기서 무수한 정적들을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하게 된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러시아혁명의 주역을 맡은 볼세비킨(볼쉐비끼)는 1918년 제7차 당대회에서 그의 명칭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러시아공산당으로 바꾸워고 네프(신경제정책)을 채택할 무렵에는 60만이 넘는 당원을 가지고 있엇다
그러나 지도적인 당원은 다음의 셋 그룹으로 나눠져 레닌이 그것을 통괄하고 있었다
첫째그룹은 트로쯔키(뜨로쯔키)에 의해서 대표되는 좌파로서 이들은 세계혁명이 없이는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러시아공산당은 국외의 혁명운동을 지원함과 동시에 국내에 있어서도 강력하게 사회주의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네프(NEP,신경제정책)의 채용을 반대했다 지노비예프나 까메네프등도 기본적으로 트르쯔키 정책을 지지하였다
"네프(NEP, 신경제정책)은 소련이 1921년부터 레닌과 스탈린이 실시한 경제정책이다 1921년이전의 전시(戰時)공산주의와 비교하여 신경제정책이라고도 한다 소련공산당과 정부는 위기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제정책의 극적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전시공산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던 식량할당 징발제가 폐지되고 식량현물세가 도입되었다 납세 뒤의 잉여곡물처분은 당초 시도되었던 조직적 상품교환의 실패 후 농민의 자유에 맡겨졌고 현물세도 차츰 화폐납입으로 대치되었다 그 결과 도시와 농촌의 관계에서 상품경제가 지배하게 되었고 소상품 생산자인 농민의 물질적 관심이 촉진되었다 한편 국영공업은 트러스트로 재편성되어서 상업계산제롤 옮겨졌으며 또한 일부 기업은 다시 사유화되어 중소규모의 사영 상공업 경영이 합법화 되었다 1925-1926년에는 공업생산 가운데 사적 부문의 비중이 27.1%까지 달했으나 이때에도 대공업. 은행. 운수. 외국무역. 터지등 관제고시(관제고시)라고 일컬어지던 중요한 경제영역은 국가가 장악하고 있었다 1923년의 협상가격차 공황의 극복, 다음해 화폐개혁의 성공등을 거쳐서 경제부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 뜻에서 신경제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신경제정책은 레닌 스탈린 그리고 부하린등이 지지했으며 좌파세력인 트로쯔키등은 반대했다 제2차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소련도 강제적 농업집단화. 국유화정책등의 극단적 공산주의 국가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으로 내다볼 수 있는 자료이다."
둘번째 그룹은 부하린에 의하여 지도되는 우파이다
이들 역시 러시아라는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는 생각치 않으나 당면한 세계혁명의 시기가 없는 이상 현실과 타협하면서 네프(신경제정책)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하린노선이 우파민족주의 경제이론 입장이다
소비가 투자라는 케이즌경제학 입장에서 자국 경제발전이 없는 한 국가발전이 있을 수 없으며 외세종속화 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소비가 투자라는 입장이어야 국내 경제가 고도소비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며 자국경제규모로도 잘 살아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공화을 예방할 수 있다
부하린과 스탈린은 이런 입장에서 좌파그룹 트로쯔키 계열의 공산주의 경제이론 집단농장과 무산몰수, 무산분배정책을 견제하고 제거하는데 공동 노력했다
셋째는 스탈린이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의 지지자이다
이들은 원대한 소련은 인구도 많고 자원도 풍부하기 때문에 가령 세계혁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일국에서도 사회주의가 건설 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네프(신경제정책)를 지지했다 세계 무산혁명과 강제적 농업집단농장 그리고 국유화정책을 지지하고 네프(신경제정책)을 반대한 좌파 트로쯔키노선과 상반된 우파 노선이었다
스탈린은 1924년말 "10월혁명과 러시아공산당의 전술"이라는 논문에서 트로쯔키에 반론하는 형태로서 이 견해를 처음으로 밝혔다 이 무렵 그는 그의 저서 "레닌주의의 기초"를 내놓기도 하였다
레닌은 1921년말부터 중병에 걸려 공직생활에서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듬해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당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지노비예프, 까메네프와 더불어 삼두정치를 꿈꾸며 트로쯔키에 대신하여 레닌의 후계자의 지위를 노리게 시작하였다
레닌은 처(妻)에게 구술하여 기록케 한 유서에서 스탈린은 너무나 거칠고 난폭해서 서기장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당원은 그를 지위에서 제거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그 보다도 관용이 있고 충성심이 있고 정중하고 동지에 대하여 배려가 두터운 다른 사람을 임명할 것을 제안한다고 하였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사망했으나 그 유서는 당시의 중앙위원에게만 알린채 끝내 공표되지 않았다 이것이 처음으로 공표된 것은 1956년 2월 제20차 당 대회에서의 "흐루시초프"의 비밀보고서에서였다
"스탈린의 권력을 장악한 과정은 우선 부하린과 손을 잡고 트로쯔키등의 좌파그룹을 내쫓은 다음 그는 우파마저 탄압하는 일종의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때 그는 서기장의 지위를 이용하여 당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반대파는 당의 노선에 따르지 않는 분파주의자라고 매도하였다"
결국 트로쯔키는 1929년에는 소련으로 추방되었고 1940년 망명 중인 멕시코에서 암살되었다
한편 스탈린과 삼두정체를 꾸몄던 좌파의 지노비예프와 까메네프도 우파의 부하린과 더불어 1936년에 숙청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곡물조달의 위기를 맞아 부하린. 즈이꼬프. 또스끼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면적 농업집단화 즉 위로부터 혁명을 단행하였다
이와병행하여 제1차 제2차 5개년게획(1928년, 1937년)도 추진하였고 대숙청의 선풍이 가장 격하게 휘몰아쳤던 1936년말에는 1924년의 헌법에 대신하여 이른바 스탈린헌법을 제정하였다
이제는 농업의 집단화와 공업화의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스탈린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하여 새로운 헌법으로써 소련의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내외에 과시하려고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스탈린헌법의 제정에 이어서 1938년에는 스탈린노선의 절대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소연방공산당소사(蘇聯邦共産黨小史)가 펀찬 발행되었고 그 속의 "변증법적 및 사적 유물론"은 스탈린이 직접 집필하였다
독일과 전쟁 전후(1941년 5월)에는 스탈린은 인민위원회의 의장(수상) 이어 국가방위회의 의장, 국방인민위원등을 맡아 전쟁을 지도하였다
그가 연합국 지도자들과 함께 테헤란(1943년). 알타회담(1945년). 포츠담(1945년)등지에서 회동하여 전쟁수행 및 전후의 처리문제를 협의하였다
전후에 발표된 논문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는 언어의 본질을 논하고 그의 계급성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그의 최후의 저작인 "소연방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제문제"는 현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기본적 경제법칙을 논한 것이다
4.스탈린의 죽음--풀리지 않는 사인(死人) 의혹 독살설
1953년 2월 28일 밤 스탈린과 그의 최측근 라브렌티 베리아, 니키타 흐루시초프, 나콜라이 불가닌,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평상시와 같은 일정을 가졌다 이들은 크렘린궁에서 영화 한편을 본 뒤 모스크바에서 10분거리에 있는 스탈린의 시골 집으로 옮겨 만찬을 즐겼다
다음날 새벽 손님들은 각자 모스크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후에 생긴 일은 스탈린처럼 보안에 비정상적인 정도로 집착하는 사람으로서는 예외적인 일로 그는 경비원들에게 물러가 있고 깨우지 말라고 명령했다
당시 경비병 중 한 사람인 로자체프는 이날 물러가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스탈린 본인이 아니라 선임 경비원인 흐루스탈레프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는 스탈린이 평소 경비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자고 있는가?"하고 물었다고 전했다
"우리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예요 그래서 자도 좋다는 명령을 받자 우리는 물론 기뻐서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자러 갔지요"
경비병들은 다음날 아침 늦게까지 자고 스탈린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정오가 지난 13시나 돼도 14시가 돼도 스탈린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비병들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감히 그의 방에 들어갈 염두를 내지 못했다 스탈린이 직접 시키지 않은 한 누구도 그를 방해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저녁 18시 30분 스탈린의 방에 불빛이 비치자 경비병들은 약간 안심했다
그러나 시계가 22시가 알리자 이들은 겁에 질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로자체프에게 들어가 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달려가서 "스탈린 동지" 어쩐 일이십니까?" 물었지요 글쎄, 그는 침대에 오줌을 싼 채 누워서 "즈즈"하는 알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어요. 그의 회중시계와 프라우다 신문 한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시계는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지요 그 시간이 바로 일이 벌어진 시간이었나 봅니다]
경비병들은 곧장 전날 밤 스탈린과 함께 술을 마신 정치국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들은 꾸물거리며 의료진을 부르고 느릿 느릿 움직였다
스탈린은 3월 5일 밤 9시 50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후 열린 1956년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스탈린의 생존시 그의 개인 숭배와 정치적 오류를 비판했다
영국 BBC 인터넷은 3월 24일 지금까지도 뇌출혈로 인한 자연사인지 암살인지 의혹이 풀이지 않고 있는 스탈린 사망 당시 정황을 러시아학자 예두아르트 라진스키의 연구를 토대로 추적한 자료에 의하면 "흐루스탈레프가 국가보안국(KGB) 국장인 베리아의 명령을 받아 스탈린에게 독물주사를 놓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스탈린이 독살된 이유는 무엇일까?
라진스키의 주장은 당시 스탈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스탈린의 3차대전 계획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스탈린이 "공산주의 유럽을 건설할 기회가 왔다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베리와 흐루시초프, 말렌코프등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경제기반이 전혀 없는 소련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소련은 보통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독일군 침공으로 파괴되고 지원이라고는 핵무기 뿐인 극빈국이었다"는 것이다
라진스키는 스탈린이 그래서 반유대주의 운동으로 미국을 도발해 미국의 반응을 보이기를 기다렸다고 주장했다 베리아는 스탈린이 3월 5일을 기해 모스크바의 유대인 이주작전을 시작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늘 그렇듯 음모론은 증폭된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모스크바 시 전역에 유대인들을 실어나르기 위한 버스들이 주차돼 있는 것을 보았고 카자흐스탄에 이주민을 수용하기 위한 헛간이 세워진 것을 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사경을 헤메는 며칠 동안 소련국민들은 그의 임박한 죽음을 둘러싸고 비통해 하는 사람들과 남몰래 희망의 미소를 띄는 사람들로 갈라졌다
"세계전쟁을 획책하는 어느 혁명가나 지도자는 반드시 죽는다 :) 말씀..."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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