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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타: 나폴레옹과 미란으로! 미란으로! 연설문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타: 나폴레옹과 미란으로! 미란으로! 연설문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27. 09:47Presidence Republique http://www.elysee.fr
1.나폴레옹 일대기
프랑스 제1제정의 황제, 본명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baparte)
(1)성장
코르시카섬은 14세기 이래 이탈리아의 제노바령이었는데 18세기 초기부터 주민들이 독립운동을 시작하였고 18세기 중엽부터는 p.파올리가 주도하였다
보나파르트가(家)는 16세기에 코르시카로 이주하여 서부 아야초의 소(小) 귀족 지주가 된 뒤, 나폴레옹의 아버지 샤를 보나파르트는 레티치아 라모리노와 결혼하여 파올리의 민족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제노바가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양도하였기 때문에 섬 사람들은 프랑스군에게 저항하다가 1768년에 패배하였다 이듬해 8월 15일 샤를의 차남으로 나폴레옹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에 귀순했으므로 1779년 국왕의 급비(給費)를 받아 나폴레옹을 본토의 브리엔 군사학교에 보냈고 1784년에는 파리사관학교로 진학시켰다
(2)프랑스 혁명
1789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코르시카에서 국민병(國民兵)으로 활약했는데 독립파인 파올리와 대립하게 되자 1793년 마르세유로 이주했으며 거기서 그는 편협한 애향심을 버리고 <혁명 프랑스>에 운명을 맡겼다
열강이 혁명에 대하여 공세를 취하자 영국. 에스파냐 함대가 폐쇄 중인 툴롱항을 포격하여 해방시켰고 그후 여단장이 되었으며 다시 왕당파의 방데미에르의 반란을 진압, 진정시켰다
1793년 3월 조세핀과 결혼하고 27세인 그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 군대는 원래 이탈리아에서의 오스트리아군 견제를 목적으로 편성된 것으로 장비와 규율이 엉망이었으나 1년간 연속된 전투 끝에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1797년 캄포포르미오조약을 맺고 치잘피나공화국을 창설함으로써 프랑스 국경 밖의 프랑스 땅을 확보하였다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인하여 그때까지 방어적이었던 혁명전쟁은 침략전쟁으로 변질되었다
총재정부(總裁政府) 부내(部內)에서도 대영(對英)전략으로 인도항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이집트원정이 고려되고 있었고 이 작전도 나폴레옹에게 맡겨졌다
그는 1798년 5월에 툴롱을 출발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고 <피라미드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프랑스 함대는 아부키르만에서 영국 함대에 의하여 괴멸되었다 총재정부는 부르죠아 세력과 보수새력에게 협공을 당해 정치적 안정성이 흔들리자 총재 시에예스 등은 정체(政體)변혁을 위하여 같은 해 11월 나폴레옹과 결탁하여 의회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프랑스혁명기는 끝이 나게 되었다
(3)제1 집정(執政)에서 황제로
1799년의 헌법 제정단계 때부터 그는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혁명의 사회적 성과를 보증하는 사회 안정을 지키기 위하여 강력한 정부를 염원하였다
입법기관은 4원(四院)으로 분할되었고 제1집정의 행정권이 강하여 그는 그 전체적 권력으로써 재정(財政) 확립을 위하여 프랑스은행을 설립하고 행정. 사법제도를 개혁하였으며 경찰력을 강화하였고 1800년에 민법전(民法典) 즉 나폴레옹법전 편찬을 시작하여 1804년 마쳤다
1800년 그는 또 곧 오스트리아군에 대해서 제2 이탈리아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로마교황과의 종교협약을 성립시켰다 이어 1802년 영국과 아미앵조약을 맺음으로써 종신집정이 되었고 스위스 및 독일 제후(제후)에게까지 지배의 손을 뻗치고 국내에서는 왕당파를 탄압, 1804년 5월 황제로 추대된 뒤 이탈리아 왕을 겸했으며 그해 12월 노트르담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이 제1 제정(帝政)의 시작이다
(4)유럽정복
대륙의 여러 나라는 혁명의 영향, 프랑스의 경제진출을 막기 위하여 나폴레옹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 군대는 아직 봉건적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혁명이 창출한 근대적인 대국민군(大國民軍)에게 당해낼 수는 없었다
영국은 대륙시장을 자국의 국민산업을 위하여 확보하는 점에서 유럽 여러 나라와 대프랑스동맹을 맺어야만 할 위치에 있었다
아미앵조약이 영국에 의하여 파기되고 1805년 제3 대프랑스대동맹이 성립되자, 그는 대영전략으로서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계획, 불로뉴를 중심으로 <대륙군(大陸軍)>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이 출동했으므로, 울름회전(會戰)에서 이를 격파하기는 했으나 트라팔가해전에서 프랑스함대는 영국의 넬슨에게 격파되어 결국 그 상륙작전은 좌절되었다
한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황제의 양군은 합류하려고 서둘렀으므로 나폴레옹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빈을 점령하고, 곧 아우스테를리츠의 <삼제회전(三帝會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또 독일에 대해서도 1806년에 16개의 영방(領邦)을 라인동맹으로 결성함으로써 신성 로마제국을 해체시켰다 이 조치에 의해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대하여 공격적이 되었으며 제4대 프랑스대동맹의 계기를 만들었다 나폴레옹군은 동맹군을 여러 차례 격파한 뒤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러시아군을 추격해서 폴란드로 침입, 바르샤바대공국을 설립시키고 나서 1807년 러시아와 틸지트조약을 맺었다 그 전에 그는 대륙봉쇄를 호령하는 베를린칙령을 발포하였다
그것은 영국의 산업제품 및 식민지 산물을 수입하는 대륙시장을 폐쇄할 목적으로 발포된 것으로 대영(對英) 전략의 최후수단이었다 그 뒤 그의 군사적. 정치적 과제는 이 대륙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는데, 대륙봉쇄는 본래 영국을 기점(起點)으로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경제유통을 프랑스제국으로부터 동쪽으로 흐르는 흐름으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었다 봉쇄정책을 저버린 포르투갈에 대한 원정은 우선 에스파냐 점령, 그 뒤로는 에스파냐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고 1809년 제5대 프랑스대동맹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로 원정을 하였으며 몇 차례의 큰 전쟁을 한 뒤 강화(講和)를 하였다
(5)몰락
1806년에서 10년까지 프랑스 제국은 전성기를 맞아 국내외적으로 경제성장과 판도(版圖) 확장이 이어졌다
나폴레옹도 전후가 되면서 몸이 비대해져 청년기의 예리함을 상실하였다
궁정은 옛 제도의 화려함을 띠게 되었고 귀족제도가 되살아났으며 추종자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는 정복지에 가족이나 혈연관계가 있는 부장(部將)을 원수(元首)로 파견해 놓았다
이른바 가족체제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나라는 프랑스와 동맹국 관계에 있는 나라였는데, 그 중에서도 러시아는 1810년말부터 반(反)프랑스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국내 경제의 불황을 이유로 출병을 연기하고 있었으나 결국 1812년 6월 러시아원정 길을 떠났다
동맹국군을 합친 50만 병력으로 그 해 9월 모스크바에 도달했으나 러시아의 초토작전에 대응하지도 못한 채 1812년 10월 무렵 퇴각을 시작하여 원정은 참담한 결과로 끝이 났다
1813년 에스파냐. 러시아, 특히 프로이센에서는 나폴레옹 독재에 대한 민족의식에 눈을 떠, 국내개혁에 몰두하게 되었고, 제6대 프랑스대동맹이 민족해방을 위해서 결성되었다
독일은 라이프치히에서의 해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814년 1월 동맹군은 프랑스로 침입하여 파리를 함락시키고 그 해 4월에 나폴레옹을 퇴위시켜 엘바섬으로 유배하였다
그 후 부르봉왕조 루이 18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혁명에 의해서 획득한 것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한 부르죠와와 농민들은 1815년 3월 엘바섬에 탈출,귀국한 나폴레옹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빈회의에 참가 중이던 여러 나라는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하여 군대를 출동시켰고 같은 해 6월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게 패배함으로써 백일 천하가 되었으며 나폴레옹은 남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나폴레옹 유물특별기획전(나폴레옹 & 조세핀)
http://www.yonhanaro.com/napoleon/about/napoleon.asp
-나폴레옹 생애 자료
http://my-cgi.netian.com/~witch88/
http://my.netian.com/~onairlee/frame1.htm
-기마는 몽골 칭기스칸, 대포 프랑스의 나폴레옹이며 군함은 영국, 전차는 독일의 히틀러었다
그리고 항공기와 핵무기는 미국이며 인간 두뇌와 사상은 중국인이었다
-나폴레옹은 국민군대와 대포로 유럽 지역을 통합화 하려고 시도했으며 히틀러는 전차와 잠수함 그리고 국가사회주의 군대로 유럽지역을 통합화 하려고 시도했다
2.미란으로! 미란으로! 연설문
-1796년 5월 16일 미란으로 진격을 개시하기 전(前) 진두에 나타난 나폴레옹이 병사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연설-
병사들이여!
우리는 아페난 산 마루에서 바람 같이 몰아쳐 내려와 우리의 길을 막는 자들을 넘어 트렸다
이제 오리자(汚利者)의 학정으로부터 벗어난 피에르몽지방엔 평화와 밝은 빛이 깃들고 그 곳 주민들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이제 미란은 우리의 것이다
보라!
저 롬바르디 들에서 바람이 펄펄 휘날리고 있는 청(靑). 백(白). 홍(紅)의 깃발을!
마르마공이나 모래나 공주의 그 정치적 운명도 우리 손아귀에 들어 있다
한때 우리를 위협하던 적병도 벌써 우리 발 밑에 굴복 하였다
포오 강이여!
처시이와강이여!
한때는 이탈리아의 견고한 요새(要塞)라던 것들이 이제는 우리의 진격 앞에 헛된 하나의 돌무더귀가 되고 말았다
병사들이여!
우리의 고국을 생각해 보라!
우리의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자 동포들은 미칠듯이 기쁨과 공포에 쌓일 것이 아니겠는가
부모 처자들은 또 얼마나 우리 행운을 기뻐할 것인가!
얼마나 사랑스런 마음으로 우리를 아들이나 남편이나 아버지라 부를 것인가 또 얼마나 큰 영광에 싸여 있을 것인가
진실로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할 일은 태산 같다
프랑스 사람들은 싸움에 이길 줄은 알아도 그 승리를 이용할 줄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다
이제 제군은 다시 무기를 잡아야 할 것이다
활동없는 안식 다시 무기를 잡고 전진하자
그리하여 적군을 무찌르고 새로운 월계관을 얻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내란을 조종하는 자가 누구냐?
우리 함선에 불을 질렸던 자가 누구냐?
그 자를 전률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가자 때는 왔다
복수의 채칙을 들 때는 드디어 왔다
그러나 어진 백성들에게는 공포심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디서나 인민의 친구가 아니겠는가
쥬리타의 신전을 새로히 이룩하여 그 신전을 꾸민 영웅의 모습을 세우고 오랫동안 노예의 쇠사슬을 매여 있는 로마사람들을 일으켜 깨우쳐줌은 진실로 우리 승리의 열매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 기원(紀元)을 비롯하는 것이며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세대를 찾이한 제군의 영광은 길이 빛나는 생명안에 살 것이다
자유로운 프랑스 사람들은 이로써 온 세계의 존경을 받으며 영화로운 평화를 유럽에 주어 지난 6년 동안 유럽이 바친 희생에 보답할 것이다
이제야 말로 제군은 조국으로 돌아가면 그대들을 <저 사람은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하였던 군인이다> 모두들 높여 줄 것이다
미란으로! 미란으로!
-兒城(성의 주인,기업주, 만석꾼), 兒成(성마리아=천주교, 희망=태생=새 생명)-
1.나폴레옹 일대기
프랑스 제1제정의 황제, 본명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baparte)
(1)성장
코르시카섬은 14세기 이래 이탈리아의 제노바령이었는데 18세기 초기부터 주민들이 독립운동을 시작하였고 18세기 중엽부터는 p.파올리가 주도하였다
보나파르트가(家)는 16세기에 코르시카로 이주하여 서부 아야초의 소(小) 귀족 지주가 된 뒤, 나폴레옹의 아버지 샤를 보나파르트는 레티치아 라모리노와 결혼하여 파올리의 민족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제노바가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양도하였기 때문에 섬 사람들은 프랑스군에게 저항하다가 1768년에 패배하였다 이듬해 8월 15일 샤를의 차남으로 나폴레옹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에 귀순했으므로 1779년 국왕의 급비(給費)를 받아 나폴레옹을 본토의 브리엔 군사학교에 보냈고 1784년에는 파리사관학교로 진학시켰다
(2)프랑스 혁명
1789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코르시카에서 국민병(國民兵)으로 활약했는데 독립파인 파올리와 대립하게 되자 1793년 마르세유로 이주했으며 거기서 그는 편협한 애향심을 버리고 <혁명 프랑스>에 운명을 맡겼다
열강이 혁명에 대하여 공세를 취하자 영국. 에스파냐 함대가 폐쇄 중인 툴롱항을 포격하여 해방시켰고 그후 여단장이 되었으며 다시 왕당파의 방데미에르의 반란을 진압, 진정시켰다
1793년 3월 조세핀과 결혼하고 27세인 그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 군대는 원래 이탈리아에서의 오스트리아군 견제를 목적으로 편성된 것으로 장비와 규율이 엉망이었으나 1년간 연속된 전투 끝에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1797년 캄포포르미오조약을 맺고 치잘피나공화국을 창설함으로써 프랑스 국경 밖의 프랑스 땅을 확보하였다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인하여 그때까지 방어적이었던 혁명전쟁은 침략전쟁으로 변질되었다
총재정부(總裁政府) 부내(部內)에서도 대영(對英)전략으로 인도항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이집트원정이 고려되고 있었고 이 작전도 나폴레옹에게 맡겨졌다
그는 1798년 5월에 툴롱을 출발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고 <피라미드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프랑스 함대는 아부키르만에서 영국 함대에 의하여 괴멸되었다 총재정부는 부르죠아 세력과 보수새력에게 협공을 당해 정치적 안정성이 흔들리자 총재 시에예스 등은 정체(政體)변혁을 위하여 같은 해 11월 나폴레옹과 결탁하여 의회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프랑스혁명기는 끝이 나게 되었다
(3)제1 집정(執政)에서 황제로
1799년의 헌법 제정단계 때부터 그는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혁명의 사회적 성과를 보증하는 사회 안정을 지키기 위하여 강력한 정부를 염원하였다
입법기관은 4원(四院)으로 분할되었고 제1집정의 행정권이 강하여 그는 그 전체적 권력으로써 재정(財政) 확립을 위하여 프랑스은행을 설립하고 행정. 사법제도를 개혁하였으며 경찰력을 강화하였고 1800년에 민법전(民法典) 즉 나폴레옹법전 편찬을 시작하여 1804년 마쳤다
1800년 그는 또 곧 오스트리아군에 대해서 제2 이탈리아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로마교황과의 종교협약을 성립시켰다 이어 1802년 영국과 아미앵조약을 맺음으로써 종신집정이 되었고 스위스 및 독일 제후(제후)에게까지 지배의 손을 뻗치고 국내에서는 왕당파를 탄압, 1804년 5월 황제로 추대된 뒤 이탈리아 왕을 겸했으며 그해 12월 노트르담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이 제1 제정(帝政)의 시작이다
(4)유럽정복
대륙의 여러 나라는 혁명의 영향, 프랑스의 경제진출을 막기 위하여 나폴레옹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 군대는 아직 봉건적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혁명이 창출한 근대적인 대국민군(大國民軍)에게 당해낼 수는 없었다
영국은 대륙시장을 자국의 국민산업을 위하여 확보하는 점에서 유럽 여러 나라와 대프랑스동맹을 맺어야만 할 위치에 있었다
아미앵조약이 영국에 의하여 파기되고 1805년 제3 대프랑스대동맹이 성립되자, 그는 대영전략으로서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계획, 불로뉴를 중심으로 <대륙군(大陸軍)>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이 출동했으므로, 울름회전(會戰)에서 이를 격파하기는 했으나 트라팔가해전에서 프랑스함대는 영국의 넬슨에게 격파되어 결국 그 상륙작전은 좌절되었다
한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황제의 양군은 합류하려고 서둘렀으므로 나폴레옹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빈을 점령하고, 곧 아우스테를리츠의 <삼제회전(三帝會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또 독일에 대해서도 1806년에 16개의 영방(領邦)을 라인동맹으로 결성함으로써 신성 로마제국을 해체시켰다 이 조치에 의해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대하여 공격적이 되었으며 제4대 프랑스대동맹의 계기를 만들었다 나폴레옹군은 동맹군을 여러 차례 격파한 뒤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러시아군을 추격해서 폴란드로 침입, 바르샤바대공국을 설립시키고 나서 1807년 러시아와 틸지트조약을 맺었다 그 전에 그는 대륙봉쇄를 호령하는 베를린칙령을 발포하였다
그것은 영국의 산업제품 및 식민지 산물을 수입하는 대륙시장을 폐쇄할 목적으로 발포된 것으로 대영(對英) 전략의 최후수단이었다 그 뒤 그의 군사적. 정치적 과제는 이 대륙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는데, 대륙봉쇄는 본래 영국을 기점(起點)으로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경제유통을 프랑스제국으로부터 동쪽으로 흐르는 흐름으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었다 봉쇄정책을 저버린 포르투갈에 대한 원정은 우선 에스파냐 점령, 그 뒤로는 에스파냐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고 1809년 제5대 프랑스대동맹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로 원정을 하였으며 몇 차례의 큰 전쟁을 한 뒤 강화(講和)를 하였다
(5)몰락
1806년에서 10년까지 프랑스 제국은 전성기를 맞아 국내외적으로 경제성장과 판도(版圖) 확장이 이어졌다
나폴레옹도 전후가 되면서 몸이 비대해져 청년기의 예리함을 상실하였다
궁정은 옛 제도의 화려함을 띠게 되었고 귀족제도가 되살아났으며 추종자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는 정복지에 가족이나 혈연관계가 있는 부장(部將)을 원수(元首)로 파견해 놓았다
이른바 가족체제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나라는 프랑스와 동맹국 관계에 있는 나라였는데, 그 중에서도 러시아는 1810년말부터 반(反)프랑스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국내 경제의 불황을 이유로 출병을 연기하고 있었으나 결국 1812년 6월 러시아원정 길을 떠났다
동맹국군을 합친 50만 병력으로 그 해 9월 모스크바에 도달했으나 러시아의 초토작전에 대응하지도 못한 채 1812년 10월 무렵 퇴각을 시작하여 원정은 참담한 결과로 끝이 났다
1813년 에스파냐. 러시아, 특히 프로이센에서는 나폴레옹 독재에 대한 민족의식에 눈을 떠, 국내개혁에 몰두하게 되었고, 제6대 프랑스대동맹이 민족해방을 위해서 결성되었다
독일은 라이프치히에서의 해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814년 1월 동맹군은 프랑스로 침입하여 파리를 함락시키고 그 해 4월에 나폴레옹을 퇴위시켜 엘바섬으로 유배하였다
그 후 부르봉왕조 루이 18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혁명에 의해서 획득한 것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한 부르죠와와 농민들은 1815년 3월 엘바섬에 탈출,귀국한 나폴레옹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빈회의에 참가 중이던 여러 나라는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하여 군대를 출동시켰고 같은 해 6월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게 패배함으로써 백일 천하가 되었으며 나폴레옹은 남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나폴레옹 유물특별기획전(나폴레옹 & 조세핀)
http://www.yonhanaro.com/napoleon/about/napoleon.asp
-나폴레옹 생애 자료
http://my-cgi.netian.com/~witch88/
http://my.netian.com/~onairlee/frame1.htm
-기마는 몽골 칭기스칸, 대포 프랑스의 나폴레옹이며 군함은 영국, 전차는 독일의 히틀러었다
그리고 항공기와 핵무기는 미국이며 인간 두뇌와 사상은 중국인이었다
-나폴레옹은 국민군대와 대포로 유럽 지역을 통합화 하려고 시도했으며 히틀러는 전차와 잠수함 그리고 국가사회주의 군대로 유럽지역을 통합화 하려고 시도했다
2.미란으로! 미란으로! 연설문
-1796년 5월 16일 미란으로 진격을 개시하기 전(前) 진두에 나타난 나폴레옹이 병사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연설-
병사들이여!
우리는 아페난 산 마루에서 바람 같이 몰아쳐 내려와 우리의 길을 막는 자들을 넘어 트렸다
이제 오리자(汚利者)의 학정으로부터 벗어난 피에르몽지방엔 평화와 밝은 빛이 깃들고 그 곳 주민들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이제 미란은 우리의 것이다
보라!
저 롬바르디 들에서 바람이 펄펄 휘날리고 있는 청(靑). 백(白). 홍(紅)의 깃발을!
마르마공이나 모래나 공주의 그 정치적 운명도 우리 손아귀에 들어 있다
한때 우리를 위협하던 적병도 벌써 우리 발 밑에 굴복 하였다
포오 강이여!
처시이와강이여!
한때는 이탈리아의 견고한 요새(要塞)라던 것들이 이제는 우리의 진격 앞에 헛된 하나의 돌무더귀가 되고 말았다
병사들이여!
우리의 고국을 생각해 보라!
우리의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자 동포들은 미칠듯이 기쁨과 공포에 쌓일 것이 아니겠는가
부모 처자들은 또 얼마나 우리 행운을 기뻐할 것인가!
얼마나 사랑스런 마음으로 우리를 아들이나 남편이나 아버지라 부를 것인가 또 얼마나 큰 영광에 싸여 있을 것인가
진실로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할 일은 태산 같다
프랑스 사람들은 싸움에 이길 줄은 알아도 그 승리를 이용할 줄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다
이제 제군은 다시 무기를 잡아야 할 것이다
활동없는 안식 다시 무기를 잡고 전진하자
그리하여 적군을 무찌르고 새로운 월계관을 얻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내란을 조종하는 자가 누구냐?
우리 함선에 불을 질렸던 자가 누구냐?
그 자를 전률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가자 때는 왔다
복수의 채칙을 들 때는 드디어 왔다
그러나 어진 백성들에게는 공포심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디서나 인민의 친구가 아니겠는가
쥬리타의 신전을 새로히 이룩하여 그 신전을 꾸민 영웅의 모습을 세우고 오랫동안 노예의 쇠사슬을 매여 있는 로마사람들을 일으켜 깨우쳐줌은 진실로 우리 승리의 열매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 기원(紀元)을 비롯하는 것이며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세대를 찾이한 제군의 영광은 길이 빛나는 생명안에 살 것이다
자유로운 프랑스 사람들은 이로써 온 세계의 존경을 받으며 영화로운 평화를 유럽에 주어 지난 6년 동안 유럽이 바친 희생에 보답할 것이다
이제야 말로 제군은 조국으로 돌아가면 그대들을 <저 사람은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하였던 군인이다> 모두들 높여 줄 것이다
미란으로! 미란으로!
-兒城(성의 주인,기업주, 만석꾼), 兒成(성마리아=천주교, 희망=태생=새 생명)-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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