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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남공작부(통일전선부. 대외연락부. 작전부, 36호실)와 대남정치학원 주요 자료 본문

Guide Ear&Bird's Eye/테러단체,간첩등 수집.조사연구

북한 대남공작부(통일전선부. 대외연락부. 작전부, 36호실)와 대남정치학원 주요 자료

CIA Bear 허관(許灌) 2006. 9. 17. 17:59
 
1.북한 대남공작부

목표는 `남조선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통일`

북한이 남한혁명을 위해 비밀리에 행하는 활동을 대남공작이라 한다. 즉 간첩남파 및 공조세력 포섭, 대남 정보수집, 대남심리전, 군사정찰, 납치테러, 국내 반정부세력지원 등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포함하며 북한의 모든 대남공작은 1974년부터 김정일의 직접지시를 받고 있다.

현재 북한이 운영하고 있는 대남전문공작부서로는 당 중앙위원회 산하 크게 ‘통일전선부’(통전부), ‘대외연락부’, ‘작전부’, ‘36호실’등 4개의 공작부서와 인민군 총참모부 산하 ‘정찰국’, ‘국가안전보위부’ 등이 있다. 현재 이들 대남 공작부는 각자 독립성을 유지한 채 독자적인 대남사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중요 공작사안에 대해서는 각 부서에서 특급 공작요원을 차출하여 특별팀을 구성한다.

 

북한 공작기관의 목표는 ‘남조선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통일을 완수하는 것 이다. 일례로 북한의 통전부는 “북조선은 1945년 공산화와 더불어 식민지배와 모순된 자본주의의 질곡에서 일거에 벗어났으나, 남조선은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이러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미군을 축출하고 남조선 해방과 혁명 그리고 북한식 사회주의 통일을 동시에 이루는 길”이라고 밝히고 있다.


(1)통일전선부(통전부)

조선로동당 4개 대남부서 가운데 ‘수석’은 통전부로서 북한이 추진하는 대남공작의 기본 골격을 만드는 곳이다. 통전부는 1977년 김일성의 직접교시에 따라 신설됐다. 통전부는 선전, 대남방송, 삐라배포, 해외교포들의 포섭 및 남한 내 친북조직 관리 등 공개적인 선전*선동공작을 펼친다. 이 부서는 직할부서로 직접침투과, 남북회담과, 해외담당과, 대남심리전 및 정보자료를 분석하는 조국통일연구원 등이 있으며 다른 공작부서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공개적으로 활동한다는 점이다.


외곽단체로는 최근 4*15 총선과 관련해 `反 한나라당 투쟁 지침`을 내려 국내친북세력을 지도하고 있는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을 비롯해 8*15대회를 주도하는 범민련과 범청학련,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통협),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등은 모두 통전부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다.


한편 대부분의 통전부 소속 대남공작 요원들은 공개적인 행사나 회담 때 주로 가명(假名)과 가직위(假職位)를 쓴다. 남북대화나 교류 등으로 낯익은 전금진(본명 전금철), 안병수(본명 안경호), 이종혁, 94년 3월 남북실무접촉에서 서울불바다 발언으로 유명해진 박영수(사망) 등 대남전위기구 간부들의 실제 소속직책과 직급도 통전부의 부부장 급이다.

현재 통전부의 최고 책임자는 임동옥(林東玉) 제1부부장이며 전임자는 노동당 대남당담 비서인 김용순(金容淳)이였다. 김용순은 지난해 10월 26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ㄱ.임동욱(林東玉)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ㄱ)이름:임동옥(林東玉)
(ㄴ)출생일:1935년(70세)
(ㄷ)출생지:황해남도(한국전쟁 이전 남한 출신)
(ㄹ)직책: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ㅁ)학력
김일성고급당학교
(ㅂ)경력
1972년 11월 남북적십자회담(4차. 6차) 수행기자 임춘길 가명으로 활동함
1975년 중앙당 국제부 근무
1978년 통일전선부 대남사업 종사
1979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현직)
1980년 2월 정무원 국장
1985년 5월 노동당 비서국 근무
1985년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
1988년 3월 당 중앙위 후보위원(현직)
1990년 남북고위급 회담 수행원
1990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10기 대의원(현직)
1990년 8월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심의위원회 위원
1993년 11월 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현직)
1994년 김일성 국가장의원회 위원
1995년 오진우 국가장의원회 위원
2001년 6월 당 중앙위 제1부부장
2002년 4월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2005년 6월 15일 통일대축전 북한대표단 단장
-임동옥(林東玉)은 정통 공산주의자로 알려져 왔으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 대남부서 통일전선부에서 근무하면서 성장해온 대남공작원 출신이다 그는 북한 대남공작기관 통일전선부 산하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을 운영해오고 있는 대남정책과 북한정부 통일전술 정책을 추진하는 실질적 책임자이다

ㄴ.북한정부 통일전선부 임동옥(林東玉) 제1부부장 주요 자료
(ㄱ)2004 노 927 가 국가보안법위반(반국가단체의 구성등) 송두율 사건 재판 자료
http://freesong.jinbo.net/kr/affair/sentence02.html
자신이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겸 주체사상연구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1991년 5월경 당시 통일전선부 부부장이던 임동옥으로부터 피고인에게 주체사상교육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송교수는 남한에서도 영향력이 크고 독일에서 다년간 조직사업을 하다보니 독일에 와 잇는 남한 유학생들이 다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위(김일성. 김정일을 가리키는 듯함)에서 크게 쓸 생각이고 송교수에게 주체사상을 교육시켜야 하는데 통일전선부 산하에는 유능한 학자가 없고 그 쪽 부서에 주체사상전문가가 많으니 그들을 동원해서 주체사상을 교육시켜주십시오"라는 취지의 말을 들었고 자신이 이를 승낙하고 당시 주체사상연구소에 근무하고 잇던 이성갑등의 교수들을 피고인에게 보냈으며 그 무렵 다시 위 임동옥으로부터 "송교수를 김철수로 부르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함(황장엽선생 참고인 증언)
(ㄴ)남한 조선로동당 사건 수사결과(1992년 10월)
a.북한 권력서열 22위이며 당 당정치국 후보위원인 이선실(한민전 부위원장)이 최근 10년간 서울에 잠복, 장관급 거물간첩 임모(林某, 임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등 북한 직파간첩 10여명을 지휘하여 남한내 북한공작지도부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을 90년 1월 구축하고
대남간첩 장관급 총지휘자는 임동옥으로 1980년부터 1990년까지는 나이는 60대였으며 2000년부터는 나이는 70대였다(임동옥과 임동욱 동일 인물)
b.1988년 12월경 국내에서 간행된 "사회와 사상"월간 잡지로 통한 대남공작--송두율. 김낙중등의 간첩사건
(a)송두율과 접촉 대남(對南) 북한정부 고위인사--임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b)김낙중과 접촉 대남(對南) 북한정부 고위인사--임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김낙중 공작지도부- 임모(60대). 최모(30대, 최정남 공작원). 이모(30대). 이모(20대)등
(c)남북당국간 대화와 통일전선술를 주관하는 대남 분야에서는 임동옥 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등이 들어 있다
당국 문건은 "30년 평북출신"으로 알려졌던 임동옥은 "35년 황해남도"로 바로 잡는등 확인된 정보를 반영하고 있다
http://www.joongangcanada.com/onnuribbs_content.asp?id=19280
임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 1930년생 평북 출신설(75세), 1935년생 황해남도 출신설(70세), 1940년 함경북도 출신설(65세)으로 김일성종합대학교. 김일성고급당학교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김일성고급당학교출신으로 그도 대남출신으로 파악됨으로 황해남도 남한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d)2003년 대남비서였던 김용순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임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은 실질적인 대남총책을 맡아왔다
2005년 6월 17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 노동당 총비서 겸 국방위원장과 정동영 통일부장관 면담때 남측 수행원 2명과 북측 통일전선부 임동옥 제1부부장이 배석한 주요 장면등을 공개했다


(2)대외연락부(구 사회문화부)

통전부가 북한의 통일방안을 만드는 ‘두뇌’라면 대외연락부는 통전부가 만드는 통일방안을 실행하는 ‘수족’이다. 특히 대외연락부는 남한 내 친북 조직을 유지,확대하고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침투하는 간첩을 관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대남사업을 관장한 후 대외연락부는 남한지역을 관장하던 10개 지역 담당과를 4개 지역과로 통폐합하고 그 대신에 4개의 남조선 지도층 고위윈사 포섭당담과를 신설했다.


대표적인 이 부서 공작원으로는 남한출신으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오른 거물간첩 정경희를 비롯하여, 92년까지 지하당인 남조선로동당을 만들어 김낙중(현 민족통일학회 고문)등과 관리하다 북한으로 도주해 지난 2000년 사망한 이선실, 95년 10월 24일 부여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검거된 ‘부여간첩’ 김동식, 15대 대선직전 적발 체포된 ‘울산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자살), 98년 12월까지 반국가단체인 민혁당을 지도하다 여수앞바다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돌아가다 해군 광명함의 포격을 받아 반잠수정이 격침됨으로써 사망한 대외연락부 5과장윤택림등이 모두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이었다.

현재 대외연락부는 전 통전부 제1부부장이었던 김일성의 외오촌 조카 강주일(姜周一*본명 강관주康寬周)이 총괄하고 있다. 강주일은 김정일의 ‘수족’으로 불릴 정도로 김정일과 밀착관계이며 조총련과 평양을 연결하는 채널이자, 조총련에서 김정일에게 전달되는 성금을 관리하고 있다.

 

ㄱ.대외연락부
대외연락부는 대남공작부서 중 하나이다 대외연락부 강주일(강관주) 부장이 취임한 이후 과거의 사회문화부를 확대 개편하여 대남전술공작의 주요부서이다


대외연락부 주요임무는 간첩(공작원)남파, 공작원 밀봉교육, 한국내 고정간첩 관리, 한국내 지하당 구축, 한국내 불온사상 및 민심교란등 다양하다 특히 대외연락부는 통일전선부 주축으로 형성된 통일전선조직과 연락을 하는 것이 주 목적이다 대외연락부는 남한내 노동당조직을 유지, 확대하고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침투하는 간첩을 관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대남공작부서는 대남사업 당담 비서 산하에 통일전선부(통일전선구축),대외정보조사부(35호실,통일전선 구축 조직 조사와 자료. 수집.분석. 판단등),대외연락부(35호실 분석자료 바탕으로 간첩선 구축 즉 연락선이나 점조직망 구축),작전부(대외연락부 파견과 복귀등 안내원)등으로 구성돼 있다.
김일성 시기에는 대외연락부 산하에 서울, 경기, 강원,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 제주등 10개지역 담당과를 설치하고 대남공작을 전개했으며 김정일이 대남 사업을 관장한 후 10개지역 담당과를 4개지역과로 축소통폐합하고 그 대신에 4개의 남조선 지도층 고위인사 포섭담당과를 신설했다.
아울러 1976년 3월 15일 대남공작전술을 강화하기 위한 연구기관으로서 315연구소를 산하에 신설했다.


ㄴ.대외연락부 주요 책임자
(ㄱ)정경희( 1987년까지 대외연락부 부장 출신)
남한출신으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 위원까지 올랐다가 은퇴한 거물 여간첩 정경희가 부장으로 있던 부서도 대외연락부였다
a.이름--정경희(사망)
b.출생일과 출생지---1928년생이며 남한출신
c.직책--전 당 중앙위 연락부장
d.학력--금강정치학원과 당 중앙당 학교, 송도정치경제대학 수료
--이선실과 정경희등은 대남공작원 교육원 금강정치학원 출신--
e.경력
1960년 함남도당 선전부 지도원. 도당 교육부 부부장
1967년 당 중앙위 연락부 과장
1970년 11월 당 중앙위 연락부장
1973년 당 중앙위 문화부 부부장
1975년 5월 당 중앙위 연락부장
1980년 10월 당 중앙위 위원과 당 중앙위 정치국 후보위원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제7-8기 대의원
1996년 6월 사망
(ㄴ)강관주(강주일,현직 대외연락부 부장)
전(前)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강주일(본명 강관주)이 대외연락부장으로 발탁되면서 통일전선부가 관할하던 재일 조총련 관리 업무도 대외연락부에서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강주일은 사회문화부를 개편 확대하여 대외연락부로 개편했으며 대남공작부서 대외 연락 업무등을 취급하고 있다.
a.이름--강주일(본명 강관주)
b.출생일와 출생지--1930년 7월 5일생이며 남한 출신
c.학력--김일성종합대학교 졸업
d.주요 경력
1975년 5월 대외문화연락 위원회 국장
1990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10기 대의원
1990년 8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1994년 7월 당 통일전선부 제1부 부장
1997년 1월 당 대외연락부 부장
1998년 7월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대의원
1999년 12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2001년 3월 당 비서국 통일전선부 제1부 부장
e.주요동정
강주일(본명 강관주) 대외연락부장은 대일교섭이나 활동 그리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활동등이 뚜렷하다 일본통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7년 5월 최고인민회의 대표 단원 자격으로 일본 방문
1983년 3월 평양 학생 소년 예술단 고문 자격으로 일본방문
1990년 9월 평양예술단 일본 공연시 동행
1991년 9월 보천보 경음악단 단장으로 일본 방문
1992년 5월 만성간염 치료차 방일, 도리노몽 병원 입원
1997년 7월 조총련 업무지도차 일본 요코하마 방문

ㄷ.대외연락부 주요 대남공작 활동
대외연락부(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으로는 1992년 10월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2개월 앞 두고 터져나온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의 주역인 여간첩 이선실, 신세대 공작원으로 불리는 무장간첩 김동식(95년 10월, 충남 부여서 체포), 15대 대선직전 적발 체포된 부부 간첩 최정남, 강연정등이 있다
(ㄱ)한국민족민주전선과 대외연락부 관계
한국민족민주전선은 통일전선부 지하조직이며 북한정부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정찰 요원이다 대외연락부는 통일전선 조직 한국민족민주전선을 각 단위별로 연락으로 장악하고 있다
통일전선부가 남한정부의 통일부라면 대외연락부는 반미통일구국전선을 배후에서 총지휘하는 단체이다
a.이선실과 중부노동당(한민전 서울대표부내 중부지역당)
b.김동식과 삼민투위 관련자 조직사업(한민전 서울대표부내 반제그룹조직화)
c.최정남과 영남위(한민전 서울대표부내 영남지역 주체사상파 조직화)
d.민혁당 사건---반미청년회와 북한노동당 연합 추진(김영환씨 입북과 김일성과 면담)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남한재야세력 중 친북세력(주체사상파나 반미인민전쟁론자) 구심체가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로 표현하며 그 세력들을 북한노동당과 연락선이 바로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이라는 뜻이다
통일전선부는 대외적으로 통일전선 구축으로 오픈화(합법화)하고 있다 친북 통일관련 단체들이 바로 통일전선부 산하 남북 외곽단체들이다
(ㄴ)대외연락부 활동 요원들의 주요 경력 특징
a.정경희나 이선실 모두 남한 출신이라는데 특징적이다
b.금강학원 출신 대부분이다(이선실이나 정경희 모두 금강학원 출신이다)
c.대외연락부 공작원들은 남한 친북세력과 연계 도중에 체포나 검거 되었다
d.통일혁명당이나 민혁당 모두 대외연락부 공작원 활동 주 무대로 알려져왔다(대외연락부 공작원을 남로당 정치고문단으로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다)

ㄹ.대외연락부 산하 315연구소
315연구소는 대남공작전술등 강화하기 위한 연구전담기구로서 1976년 3월 15일 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 산하에 설립됐다

315연구소에는 (1)공작전술연구조 (2)공작경험연구조 (3)공작기술연구조 (4)풍습연구조등 두고 침투 후 합법 신분획득과 대상자 포섭방법, 대공수사관의 수사망으로부터 도피 및 신분위장방법, 한국내의 각종 파벌 형성과정의 실태(정치공작조),국군와해 공작전술과 쿠데타. 파벌 싸움 유도 공작 연구개발 그리고 각국의 쿠데타 사례연구 개발등의 과제로 연구하고 있다.

315연구소에서는 위장자수, 위장귀순, 위장망명등의 사유와 남한 도착 후 정부 환영행사때의 강연문안 작성, 기자회견 및 기타 신문사항에 대한 답변문등을 연구 개발하여 예행연습과 검열등을 실시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정부수사기관에서 북한에 관한 신문을 받을때 수사관의 부당한 대우에 대하여 책상을 뒤집어 엎거나 수사관을 폭행하거나 또는 신소 제의등의 항의 투쟁을 전개하도록 교육 훈련을 실시하고 있기도 한다



(3)작전부

전 인민군 참모장 오극렬(吳克烈)이 지휘하는 작전부는평양의 모란봉구역 전승동 노동당 3호청사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남 및 대외공작부서로서 남한과 제3국에 비합법적으로 침투하는 공작요원을 일정한 장소까지 안내하는 임무와 요인암살 및 납치, 군사정찰 폭파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특히 북한 간첩들을 두 가지로 분류할 때 전투원과 공작원으로 나누는데 이중 전투원은 바로 노동당 작전부 요원을 지칭한다.

작전부는 간첩을 비무장지대(DMZ)나 해안선을 통해 우리나라도 직접 침투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여러 공작기구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다고 할수 있다.

지난 97년 작전부 소속의 두 명의 북한 공작원은 김정일의 처조카인 귀순자 이한영(李韓永)씨를 피살했다. 특히 지난 98년 6월 속초 앞바다에서 발견된 북한 잠수정, 그리고 같은 해 7월 12일 동해시 해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북한 공작원은 모두 작전부 소속인 것으로 밝혀졌다.

평양의 3호청사 근처에 있는 414연락소는 노동당 작전부의 실무적인 지휘본부이다. 이 414 연락소에는 국외에 있는 북한 간첩에게 지령을 보내는 통신시설을 비롯하여 각종 독극물의 제조소 등 간첩활동에 대한 지원시설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414 연락소에는 지원임무를 맡은 약 1000명의 인원이 소속되어 있다.

(4)35호실(舊 대외정보조사부)

평양시 창광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35호실은 과거 대외정보조사부의 후신으로서 각종 테러 및 대남·해외정보를 수집하고 해외인사를 포섭·매수해 한국 내 투입시키는 등 대남우회침투활동을 주로 한다. 해외간첩공작, 국제·대남테러공작 등도 이 부서의 주요 임무로서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지역과 베를린, 파리 등 주요도시에도 공작거점을 두고 있다.

35호실은 주로 제3국을 경유해 침투하는 간첩을 관리하고 있다. 87년 대한항공기 858기 공중폭파사건, 최은희*신상옥 부부 납치사건 등이 대표적인 35호실 작품이었으며 교수간첩 무함마드 깐수(본명 정수일*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도 35호실 소속이었다. 특히 잠비아주재 대사관 소속 정보원으로 활동하다 귀순한 차성근씨도 35호실로 소속의 공작원이었다.

전 모스크바주재 대사관 출신으로 대외정보조사부 시절 부장이었던 권희경(權熙京)이 물러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현재 35호실의 책임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2.대남공작의 전위부서 인민군 총참모부 소속 정찰국자료(미얀마 아웅산 테러와 강릉 잠수함사태등)

(1)대남공작의 전위부서 인민군 총참모부 산하 정찰국
http://www.hani.co.kr/h21/data/L980629/1p6k6t03.html

북한군 내에서 대남 공작업부를 담당하는 부서는 총참모부(남한의 합동참모본부에 해당) 산하 정찰국이다 군 정찰국 외에는 노동당의 사회문화부(대남선전부:통일혁명당 편집국 청맥과 반미청년회 구국의 소리. 한국민족민주전선 구국전선 편집국 등), 작전부, 대외 정보조사부, 통일전선부(한국민족민주전선 즉 통일혁명당이나 반미청년회등 조직) 등에서도 대남 공작을 담당한다

정찰국은 한국군의 군사첩보 수집과 무장공비 양성 및 남파, 요인 납치.암살등 게릴라 활동, 중요 국가시설물 파괴등을 주된 임무로 설정해놓고 있다는 게 우리 군 당국의 설명이다 정찰국에는 907군부대, 448군부대, 남포해상특수부대, 경보교도 지도국, 특수 8군단, 정찰국 직속 저격여단, 정찰대, 군단 및 사단 경보병 부대등이 소속돼 있다 1983년 발생한 미얀마(버마) 랑군 폭탄테러사건도 정찰국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찰국은 전방 5개 군단에 각각 500-600명 규모의 정찰대대를 운용하고 있으며 해군에도 1개 정찰대대를 보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함경남도 낙원에 22전대를 두고 있는 것을 비롯해 동해안에 2곳, 서해안에 1곳의 해상 침투기지를 운용하고 있으며 평남 평원엔 육상 침투기지 1곳(평남 평원)도 운용 중이라고 북한군 출신 탈북자들은 밝혔다


인민군 정찰국은 군사시설 정찰 및 정보수집, 암살, 폭파, 비정규전부대 침투등 군사적 성격에 무게를 둔 침투임무를 주로하며 에하에 게릴라부대, 정찰부대, 해상처, 지원부등 4개 부서를 두고 있다

지난 1996년 9월 강릉 해안에서 발각된 잠수함이 바로 22전대 소속이라고 당시 생포된 이광수씨는 진술했다
"22전대는 한국군의 첩보수집 및 정찰을 주 임무로 1995년 7월에 구성됐는데 전대장(대좌-남한의 대령급)이하 110여명의 대원 전원이 장교인 것으로 알려졌다 3개 편대로 구성된 22전대의 1,2편대에 각각 상어급 잠수함(330t) 2 척씩이, 3편대에 유고급 잠수정(90t) 1정이 배치돼 있다"고 이광수씨는 밝혔다

정찰국의 책임자는 김대식 상장으로 북한군 내에선 드물게 김일성종합대학교 경제학부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인민군 하전사(남한-하사나 중사)로 근무하던 1960년대 초 김정일과 비슷한 시기에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다닌 뒤 군에 다시 돌아가 정찰국에서만 20여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그는 일종의 장군 양성학교인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거쳐 소장에 임명된 뒤 1989년 장성우 후임으로 정찰국장에 임명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대식은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이 실패로 끝난 이후 경질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그해 12월 김정일의 김일성종합대학 시찰과 1997년 초 만경대학원 방문 때 수행함으로써 건재를 과시했다

(2)인민군 총참모부 소속 정찰국이 자행한 국지전과 테러 주요 자료
ㄱ.테러---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테러-----장성우 소장
ㄴ.국지전(사태)--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사태------김대식 소장

 


3.祖國平和統一委員會(조국평화통일위원회)

1961년 5월 13일 발족한 북한의 주요한 통일관련 사회단체.

약칭은 '조평통'이라 한다. 조평통은 조선노동당의 통제 아래 북한의 사회주의 역량과 남한 각계각층의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결합하여 국가의 자주적 통일의 실현을 위해 정당·사회단체들과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하여 조직된 사회단체이다. 1961년 5월 9일 김일성을 발기인으로, 33명의 준비위원과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하여 조직되었으며, 같은 해 5월 13일에 정식 발족되었다. 1명의 위원장과 6명의 부위원장, 23명의 상무위원회 위원, 77명의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관지로 〈조국통일〉이라는 신문을 주 2회 발행하고 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 소속이 바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반미전선입장에서 남한 각종 반미단체나 친북단체를 총 망라하여 통일전선연합구축을 유도하여 반미 반제 공산주의 투쟁을 부추기고 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핵심조직이 바로 한국민족민주전선(반제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이고 반제민족민주전선 조직원에 의하여 친북활동단체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지시 통제 감독하고 있다

 

4.대남정치학원----강동정치학원과 금강정치학원

(1)남로당과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
ㄱ.강동정치학원 형성과정
(ㄱ)강동정치학원이란
강동정치학원은 남로당 군사정치학교로서 1947년 9월 평남 강동군에 월북한 남로당 간부들을 집결시켜 설치한 대남공작원 및 유격전문요원 양성소이다
북한 노동당은 1947년 8월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을 불법화하자 남로당의 지하당을 제건과 지하활동에로 주력하고 대거 월북한 남로당원들을 강동정치학원에 수용하여 대남공작원훈련과 유격전위주의 군사훈련 후 남파시켜 남로당의 유격투쟁을 지원하였다 1949년 기지를 신안주로 이전하였다가 1950년 6.25전쟁발발과 동시에 폐쇄되었다
대표적인 강동정치학원 출신으로는 남한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본명:이상현)이 있다 1953년 9월 지리산 산청군 생비량 빗점골에서 사살된 남한 빨치산 총책임자 이현상(본명:이상현)은 1928년 조선공산당에 입당, 1948년 남로당 군사정치학교인 강동정치학원에서 3개월간 교육을 받은 뒤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지도하다가 1951년 5월 남한 5도 도당위원장회의를 주재 남한 빨치산 총책임자가 된 후 1953년 9월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의 야간 매복조에 의하여 사살되었다
이외 서양철학자 1세대에 속하는 박치우도 강동정치학원의 정치부원장이 되었다가 뒤에 빨치산 부대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강동정치학원 출신들은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으로 한국전쟁 이후에는 박헌영.이승엽등의 김일성 타도 군사혁명 모의등에 참여하여 실패한 후 대부분이 처형되었다
a.박헌영 계열이며 남한 출신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다
b.강동정치학원은 남파공작원 교육원이다
c.강동정치학원은 1960년이전 남로당 박헌영계열 숙청이전 대남공작원 교육기관이다
d.강동정치학원은 유격활동 기관이다
e.강동정치학원은 조국전선 모체이다
(ㄴ)강동정치학원 주요 인물
a.남부군 총사령관--이상현(가명:이현상)
b.강동정치학원 주도로 김일성 제거 군사혁명 주동자---이승엽

ㄴ.강동정치학원 목적---반미인민전쟁론과 인민민주주의 혁명론(NLPDR)--박헌영계열
강동정치학원은 소련 극동사령부 김일성부대가 아닌 남한출신 조산공산당 계열로 박헌영계열이며 그들의 이론도 김일성노선처럼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NLPDR)이론이었다 한국전쟁때 지리산이나 태백산맥등지에서 반미 민족해방 투쟁과 인민민민주주의 혁명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과 박헌영 헤게모니 투쟁에서 박헌영을 지지함으로 소련군 지원을 받고 있는 김일성부대에게 제거되었다 북한정부에서는 한국전쟁 패배 책임과 미국의 스파이로 몰아 강동정치학원 출신 대부분을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강동정치학원 출신 대부분은 남한에서는 공산주의 빨치산 투쟁가로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패배 책임과 미국 스파이로 지칭되어 남북에서 재야로 남아 있다

ㄷ.한국전쟁 이후 강동정치학원 동향
(ㄱ)박헌영과 이승엽등의 주도로 군사혁명 모의 그리고 미국 스파이로 처형
--북한 현대사 남로당 박헌영 미국스파이로 재판과정과 처형과정 서술(참고)--

(ㄴ)박헌영등 남로당 출신 제거된 후 강동정치학원 폐쇄

(2)칠보산연락사무소와 금강정치학원(今剛政治學院)
ㄱ.금강정치학원 형성과정
(ㄱ)금강정치학원이란
금강정치학원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출신들로 운영된 노동당 대남교육기관이다 금강정치학원이 바로 칠보산연락 사무소로 보면 올바른다
대남군사교육원이며 대남 교육원 강동정치학원이 폐쇄된 이후 등장한 교육원이 바로 금강정치학원이다
a.금강정치학원은 김일성계열이며 남한출신이다
b.1960년 4.19혁명 전후 칭립된 정치학원이다
c.금강정치학원은 대남공작원 교육원이다
d.금강정치학원이 유격활동이나 반정부 투쟁 기관이다
e.금강정치학원이 한국민족민주전선(반미청년회) 모체이다

(ㄴ)칠보산연락사무소와 금강정치학원
칠보산연락사무소 정치교육원이 바로 금강정치학원이다
칠보산연락사무소는 평양시 흥부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대남 흑색방송인 구국의 소리방송과 민중의 메아리 방송(1989년 6월 중단)을 주관하고 있다
칠보산연락사무소 산하에 3개국을 두고 150-200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1국은 조직국으로 음악부, 편집부등이 있으며 평양에 있는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지원하고 편집부는 기관신문 <구국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 기관지>과 기관잡지 <청맥:통일혁명당 기관지>을 발행한다
칠보산연락 사무소는 한때 1986년 당시 당 중앙위원회 비서 김중린이 소장을 맡은 바 있으며 실권자는 1972년부터 1985년의 남북적십자회담이나 고향방문단 상호방문 때 6차례에 걸쳐 수행기자로 위장하여 서울을 방문했던 김동수로 밝혀졌다

a.통일혁명당(통련당 사건:청맥 기관지)--김종태 간첩
통일혁명당 검거 열쇠--청맥 잡지
통일혁명당(統一革命黨)사건은 다음과 같다
김종태(金鍾泰)는 북한정부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미화 7만 달러와 한화 2,250만원)을 받고 남파 된 거물간첩이었다 그는 운수업으로 위장하여 통일혁명당(북한노동당의 남한지하당)을 조직하고 전(前)남로당원이나 혁신적 지식인. 학생. 청년등을 대량 포섭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 정부전복을 기도하려 하다가 일망타진 되었다
이 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된 자는 158명이었으며 그 중에는 문화인. 종교인. 학생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73명이 송치(23명은 불구속)되었는데, 김종태는 1969년 7월 10일 사형이 집행되고 이문규(李文奎)등 4명은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들 일당을 검거하면서 무장공작선 1척, 고무보트 1척,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무반동총 1정 및 실탄 140발, 12.7mm 고사총(高射銃) 1정, 레이더 1대와 라디오 수신기 6대, 미화 3만여달러와 한화 73만원등을 압수하였다 통일혁명당 미화소설로는 애국시대 상.중.하 3권의 소설책이 있다(통일혁명당은 남한 최초의 김일성주의 정당으로 알려져 있다)

b.한국민족민주전선(민혁당 사건: 구국전선 기관지)--이선실 여간첩
민혁당 검거 열쇠---구국전선 기관지(강철서신-->구국의 소리-->새세대-->여명-->아리랑-->백두산)

민혁당 사건은 반미청년회(강철서신과 구국의 소리)와 한국민족민주전선(구국의 소리와 새세대. 여명등) 조직원 검거 전체를 하나로 규정하여 사건화 한 것이다 민혁당 지도부 김영환씨 자수와 검거로 일단락 되어지만 아직도 한민전 잔당 지하조직원들의 활동을 하고 있다
민혁당 지도부 검거 과정에 중부노동당 사건과 영남위 그리고 김동식 . 최정남 간첩 검거, 강릉.여수잠수함 격침 검거등을 성과도 있었지만 한민전 부위원장이며 북한 노동당 중앙위 이선실 여간첩을 체포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민혁당 검거로 한총련 친북 월북조도 사실상 와해 되었다
민혁당은 통일혁명당을 모델로 조직화한 남한 김일성 주체형 정당이다

ㄴ.금강정치학원 목적--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NLPDR)--김일성계열
김일성은 대남정책팀이며 군사기관인 박헌영의 강동정치학원이 남로당 숙청으로 제거되고 남한내 친북세력이 일거에 제거되자 이런 공백으 메우기 위하여 등장한 기구가 김일성 친위세력으로 조직한 금강정치학원이다
금강정치학원이 박헌영처럼 남한내 친북세력 중심세력이 되었고 그들의 이론도 과거 남로당처럼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NLPDR)이론이 주목적이었다

ㄷ.민혁당 제거 이후 금강정치학원 동향
(ㄱ)민혁당 제거이후 한민전 조직 와해 위기
(ㄴ)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위원회 등장으로 대남세력 위축과 대북세력 급성장.
(ㄷ)중립적 우경화 푸틴정부 등장으로 공산주의 김정일 정부 위기

 

5.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 통일혁명당)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제민족민주전선>은 1968년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란 구호를 웨치며 <통일혁명당>이란 이름으로 남녁 민중들에게 첫 얼굴을 보이였다

이 단체에서는 미국이 우리나라에서 군사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하고 하루 빨리 미군이 철수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룰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반제민족민주전선>에서는 <구국의 소리방송>(통일혁명당 목소리 방송)을 운영하면서 남녘에서 활동하고 있는 진보적 단체와 평화단체들의 활동 소식을 이북 인민들에게 널리 선전하였다

<반제민족민주전선>에서는 <구국전선>과 <통일전선>이라는 두 기관지들을 발행하고 있으며 <통일전선>은 지난 2002년 2월 16일부터 발행되고 있다

정녕 <반제민족민주전선>은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하여 몸을 바쳐 싸운 애국단체이며 오늘날에도 통일을 위한 길에 열심히 투쟁하고 있다

<반제민족민주전선>에서는 지난 1998년부터 인터네트 봉사를 하고 있으며 <반제민족민주전선>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을 전자문서와 조선문워드프로세서 파일로 내려 받을 수 있으며 다매체 영상물과 기관지 <구국전선>(1998년부터 2003년까지)의 기사들을 인터네트에서 볼 수 있다

<반제민족민주전선>에서는 서울본부와 일본본부가 있으며, 아시아대륙과 구라파대륙, 아프리카 대륙에서 8개가 운영되고 있다

<반제민족민주전선>은 지난 2005년 3월 29일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에서 <반제민족민주전선>으로 이름을 바꾸였으며 올해로 37돐을 맞는다
http://aindf.dyndns.org
-----반제민족민주전선과 구국전선 선언문---

(1)반제민족민주전선이란
ㄱ.반제민족민주전선 노선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반미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론
1단계---반미민족해방전선=반미인민전선=무장투쟁과 전쟁 그리고 통일전선구축
2단계---인민민주주의 혁명=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수립--공산주의 국가수립
ㄴ.반제민족민주전선 역사
한국전쟁 전후 북로당 중심의 김일성계열 조국전선(조국통일위원회)--->통일혁명당---->반미청년회---->한국민족민주전선(1990년 1. 1)--->반제민족민주전선(2005.3.29)

(2)반제민족민주전선 계보---반미청년회 계보(NLPDR---김일성.김정일주의자)

(3)활동지역
일본지역 조총련과 남한지역 친북단체(전국연합 주축으로 범민련. 범청련. 한총련.농민단체나 노동단체등) 그리고 유럽이나 남미. 동남아. 아프리카 지역에서 NLPDR 반미단체나 공산주의자 그룹등

(4)활동자금
북한정부 지원으로 각종 사업으로 자금모금으로 활동(숙박이나 주류. 술집. 서점. 인터넷상으로 쇼핑몰이. 주식.매춘. 노동조합 회비. 마약거래나 무기거래등으로 자금활동:주점과 서점 그리고 조합회비로 모금함)


(5)주요 투쟁
ㄱ.유언비어 살포나 북한정부 선전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 홍보나 선전
ㄴ.미국이나 우파 건물이나 인사 피습이나 파괴
ㄷ.남북전쟁이나 미국과 전쟁 때 무장혁명 학습이나 무장 게릴라활동 연습
ㄹ.잠수함등으로 남북군사활동과 남한지역에서 모의 입북이나 잠수함 입항 연습--군사고문단 활동
ㅁ.사이버전쟁 연습과 침투방법 교육

(6)반제민족민주전선 계보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위장단체 명칭이다

http://ndf-sk.dyndns.org

*SK-South Korea

북한정부 대남공작부서는 대남사업담당 비서 산하에 통일전선부(사회문화부=통일전선구축-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외 정보조사부(35호실, 통일전선 구축 점조직 조사와 자료 수집 분석 판단등), 대외연락부(35호실 분석 자료 바탕으로 간첩선 구축 즉 연락선이나 점조직망 구축), 작전부(대외연락부 파견과 복귀등 안내원-간첩선)등으로 구성돼 있다

김일성 집권 시기에는 대외연락부 산하에 서울, 경기,강원,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 제주등 10개 지역 담당과를 설치하고 대남공작을 전개했으며 김정일 집권시기에는 대남사업을 관장한 후 10개지역 담당과를 4개 지역과로 축소 통폐합하고 그 대신에 4개의 남한(남조선) 지도층 고위인사 포섭담당과를 신설했다 아울러 1976년 3월 15일 대남공작전술을 강화하기 위한 연구기관으로써 315연구소를 산하에 신설했다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은 북한 대남사업부서 중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언더(반합법단체)통일전선부(사회문화부) 조직이며 북한정부 대내외정책을 추진하는 정찰요원들이다

대외연락부는 통일전선부(사회문화부)조직 한국민족민주전선을 각 단위별로 점조직으로 연락으로 장악하고 있다 한국민족민주전선은 NLPDR 합법단체 전국연합이나 통일연대, 한국총학생회연합(한총련)등에 침투하여 점조직으로 합법단체 장악하고 있으며 한국민족민주전선이 남한내 반미 인민전쟁과 인민민주주의 혁명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ㄱ.통일혁명당과 한국민족민주전선

통일혁명당은 북한 김일성정부가 4.19혁명이 일어나자 대남 통일전선 조직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구성하여 대남 평화공세과 연합전선 구축 공세를 강화하게 됐다 그때 남파 간첩 김송무를 남파시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등을 포섭 월북시켜 간첩교육을 시킨 뒤 1964년 3월 통일혁명당을 결성하였으나 1968년 7월 김종태(통일혁명당 총책 겸 서울시 책임자), 이문규(조국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민족해방전선 책임자)등 통일혁명당 관련자 검거 체포와 통일혁명당 기관지 청맥 보급로 제거등으로 조직 와해되었다

북한정부는 <통일혁명당> 당 명칭을 1985년 7월 27일부터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변경해 사용해오고 있다 일본지역에서 1986년 8월 8일부터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명칭을 변경하여 사용해왔다

남한지역에서는 1985년 7월 27일 이후 <통일혁명당> 명칭이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공식 변경하지 않고 한국민족민주전선 위장단체 <반제청년동맹> <반미청년회>로 사용해오다가 1990년 1월경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로 공식 사용해왔다

2003년도부터 노무현정부의 한민전 세력 제거작업로 공식 명칭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를 사용하지 않고 2005년 1월경부터 과거처럼 위장단체 <반제민족민주전선>으로 사용해오고 있다

(ㄱ)통일혁명당 간첩사건---울진. 삼척 무장간첩 사건 연계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등은 대남간첩 김송무의 지시에 따라 모두 월북해 북한 노동당에 입당해 노동당 당원이 되었으며 이들은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 위원회(위위장-김종태) 산하에 김질락이 중심이 된 민족해방전선과 이문규가 중심이 된 조국해방전선을 두었으며 전라남북도(책임자-최영도), 부산, 경상북도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또한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 준비위원회 기관지인 <청맥>을 발간 당시 지식인 사이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통련당과 북한정부 연계로 남한내부 준(準)군사조직 친북 NLPDR 반군(反軍)세력을 건설하다가 발견되어 제거됨

(ㄴ)한국민족민주전선 간첩 사건---북한 반잠수함이나 잠수함을 간첩 운반선으로 이용한 점

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새세대.여명.아리랑. 백두산. 백두넷등)--->반제민족민주전선(승리)

a.1992년 10월 중부지역당 사건(이선실 한민전 부위원장과 접촉으로 당 건설, 강원 경기 중부지역 한민전 관련자 접촉)

-이선실(李善實) 여간첩 사건(이선실은 한민전 부위원장 출신)

b.1995년 10월 24일 부여침투 무장간첩 김동식 사건( 삼민투위-반제청년동맹 관련자 접촉)

c.1996년 9월 18일 강릉무장 간첩사건

d.1997년 10월 최정남 강연정 부부 간첩사건(울산지역 한민전 관련자 접촉-영남위 사건)

e.1998년 12월 17일 여수근해 반잠수함 사건(민혁당 관련자와 접촉)

f.1999년 9월 14일 김영환등 민혁당 간첩사건(한민전 서울대표부 지칭)

--->한민전과 북한정부 연계로 남한내부 준(準)군사조직 친북 NLPDR 반군(反軍)세력을 건설 하다가 발견되어 제거됨



ㄴ.남한지역에서 한국민족민주전선 계보 명칭

통일혁명당--->반제청년동맹--->반미청년회---->한국민족민주전선---->반제민족민주전선

ㄷ.반제민족민주전선 특징

(ㄱ)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단체
반제민족민주전선(한민전)은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세력들의 NLPDR 모임단체이며 그 중에서도 김일성 김정일주의자 모임단체이다 반제민족민주전선은 주체사상파로 김일성 김정일 세력들이다
-반미민족해방 인민민전쟁론과 인민민주주의 혁명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남과 북 군사적 충돌을 획책하고 있는 인민전쟁신봉자들이다
-북미수교 반대와 핵무기 보유 추진 그리고 항미론자로 구(舊)소련과 중국 정부의 항미론자 세력과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반미 반일 반영 반프랑스적 군사연대조직으로 파악)

(ㄴ)주체사상파--김일성 김정일주의자
주체사상연구소(통일학연구소) 운영
(ㄷ)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조선민주인민공화국을 인정하는 세력---대한민국 정부입장에서 볼때 반제민족민주전선(한민전)을 간첩단체으로 규정함
(ㄹ)반미국제테러단체--준군사조직 모델
(ㅁ)밀입북이나 월북조직
(ㅂ)잠수함이나 반잠수함으로 월북하여 간첩교육을 받고 남한에 침투하여 간첩활동
(ㅅ)북미수교 반대와 북한정부 핵무기 보유 정당성 옹호
북미수교가 되었을 때는 북한정부에게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제거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반제민족민주전선(한민전) 조직원은 반미계열 월북자나 국방위(인민무력부) 소속 극렬 반미투쟁가 유가족 소년소녀 만경대 단원 로 구성되어 있는 항미론자들이다

ㄷ.한국민족민주전선과 반제민족민주전선 사이트

(ㄱ)한국민족민주전선 사이트(국정원 차단하고 있음)
http://ndfsk.dyndns.org

(ㄴ)반제민족민주전선 사이트(파악과 차단 중)
http://ndf-sk.dyndns.org
SK-South Korea

6.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이선실(李善實) 대남공작원

(1)주요 경력
ㄱ.중앙당 금강학교 출신---정치공작원 학교
박헌영 이승엽등의 빨치산 정치학원 강동정치학원과 비슷한 성격
ㄴ.79년 당 통일전선부 부부장(통일혁명당 전위대)
최고인민회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집행 행정기관으로 통일전선부를 두고 있다
ㄷ.80년 1월 당 정치국 후보 위원
ㄹ.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제7.8.9.10대
ㅁ.91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한민전은 1990년 1월 반미청년회를 해체하고 등장한 단체이다
ㅂ.94년 7월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ㅅ.2000년 8월 사망
민혁당(한민전 서울지부) 지도부 자수와 검거 그리고 잠수함 격침

(2)이선실 주요 동정
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 기념 연회에 당 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참석

(3)한민전 추적과 이선실등 대남 공작원 생포과정
1990년 말 한민전 새세대가 미국정부 요원에게 발견되어 한민전 추적 과정에 이선실과 대남 공작원 그리고 한민전 지도부, 잠수함 일방타진 되었음...
추적 열쇠고리<한민전 90년 최초 1월호 새세대 지하신문 자료>
반제동맹(강철서신: 김영환씨 편지 글)--->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새세대--여명--아리랑--백두산등)


*조총련(朝總聯)과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 주요 자료

1.조총련(朝總聯,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은 재일본 한국인 가운데 북한을 지지하는 친북 재일교포단체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조선민주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NLPDR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단체 조총련을 결성하여 반미 반일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운동으로 궁극적으로 대남적화통일과 일본 국왕제도를 부정하고 일본 공산화에 주력하고 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10월 15일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 약칭:朝聯)이 결성되었으나 김천해(金天海)를 중심으로 친북단체로 기울어졌다 조련(朝聯)이 김천해의 공산주의 노선에 따라 일본 공산당의 지도 아래 과격한 불법투쟁을 벌이자 일본정부는 폭력단체라는 이유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1950년 4월 2일 잔류조직이 모여 조선인단체협의회를 결성했는데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조국통일전선실행위원회로 고쳤다

1951년 1월 9일 이를 토대로 재일조선민주전선(在日朝鮮民主戰線, 약창:民戰)을 결성, 폭력투쟁노선을 이어갔다

1954년 8월 30일 북한의 남일(南日)이 한덕수(韓德銖)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 1955년 5월 25일 한덕수를 의장으로  북한 직속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조총련은 명목상 최고의결기관으로 전체대회가 3년마다 소집되기는 하지만 사실상 한덕수 1인 체제로 운영되어 오다가 2001년 2월 21일 한덕수 의장 사망이후 현재 의장은 서만술, 책임부의장은 허종만, 부의장은 박재로. 권순희. 오형진. 남승우. 양수종. 이기석. 고덕우등 7명이다 북한이 해외 공민조직이라고 주장하는 조총련의 역할은 통일 운동이라는 대남공작과 애국사업으로 불리는 대북경제지원 사업으로 나뉜다 여기서 대남공작을 총괄하고 있는 인물은 현직 조총련 의장 서만술이며 애국사업 책임자는 허종만이다 

행동강령에는 제일동포의 거주. 재산. 직업. 언론출판등의 권익을 옹호하고 자유를 옹호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북한노동당 일본지부나 다름없다 기본활동 목적은 일본의 좌익세력과 연계하여 일본에 남한 침략기지를 구축하는 것이고 한반도는 물론 전(全)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국 공산화 와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의 혁명)을 위한 혁명 전초기지의 역할도 맡고 있다 특히 조총련내부 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학습조(學習組)를 설치하여 충성심을 강화하고 김일성 주체사상 강좌와 통일전선 사업에 집중하여 대남적화통일을 꾀하고 있으며 1974년 4월 1일  통일사업부를 설치하고 대남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통일사업부의 임무는 민단조직의 와해. 대남적화공작 수행. 반미 반일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 인민민주주의 혁명 투쟁(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위장평화공세에 의한 통일전선전략의 효과적 수행등에 있다

 

과거의 조총련은 중앙위 산하에 48개 지방본부와 200개 지부, 18개 산하단체와 23개 사업체를 거느린 거대한 조직이었고 조총련계 학교는 한때 유치원, 초.중등학교, 대학교등 300여곳이나 되었으며 북한정부의 유혹적인 정책 말에 따라 1959년 재일 조선인 동포 10만명이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남한)의 경제성장과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그리고 국제적 지위 향상으로  조총련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다

일본 전체국민의 0.6%, 50만명이상이 재일 한국인으로 그 중에서 대한민국 국적 민단(民團) 동포가 40만명이고  10만명이 조선의 국적이다 2005년 5월 25일 창립 50주년을 맞은 조총련의 모습은 초라했다 4만 6,000여명에 이르던 조선학교 학생 수는 1만명 아래로 떨어졌고 굵직한 자금줄인 조선은행의 각 지역 조합은 파산하거나 강제합병 되고 있다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는 이들이 매년 1만여명에 이른다 한때 일본사회에서 민족혼의 상징하던 조총련 여학생들의 치마저고리는 김정일의 일본인 납치 시인 이후 일본인들에게 찢기고 오물을 뒤집어쓰는 등 폭력의 대상이 돼버렸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조총련 50주년을 맞아 보낸 메시지에서 북한의 핵개발 포기와 일본인 납치 문제가 조속히 해결돼야 북일(北日) 국교 정상화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한때 조총련에서 활동했던 교포는 총련도 결국 조국인 북한체제의 운명과 같은 길을 걷게 될것이라고 말했다    

 

조총련도 21세기 고도소비사회에서 변화돼야 할 시기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에서 진보진영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것이 올바른다 반미. 반일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NLPDR)노선 국가사회주의 침략이론을 버리고  일본 국왕제를 인정한 후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통합 사회로 나아가는 재일 한국인 동포들이 되기를 바란다 

*대학-- 조선대학교:1956년 6월 8일 설립과 운영

*신문(기관자)--조선신보:1945년 10월 26일 창간

 *방송(통신사)--조선통신사 

*가극단--금간산 가극단

(1)한덕수(韓德銖)

ㄱ.출생-1907년생(生)

ㄴ.출신-경북 경산(慶山)

ㄷ.학력--일본대(日本大) 전문부 중퇴

ㄹ.경력

1927년 7월 도일(度日-일본으로 이주) 

1945년 일본공산당 가입

1945년 가나가와현(懸) 본부 공산당 위원장

1949년 9월 조국전선 중앙위원

1951년 1월 재일조선민주전선(民戰) 중앙위원

1955년 5월 조총련 수석의장

1957년 4월 조선대학 학장

1958년 조총련 중앙상임위 의장

1959년 재일 조선인 10만명 북송 주도

1967년 11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

1972년 12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1976년 4월 노력영웅칭호

1977년 12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6기 대의원

1982년 4월 김일성훈장 서훈

1986년 11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1989년 9월 조총련 의장 유임

1990년 4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9기 대의원

1990년 8월 조국통일상 수상

1992년 5월 조총련 의장 8선(8選) 유임   

1994년 4월 26일 신병 치료차 입북(入北- 북한 방문)

1994년 4월 28일 김일성과 함께 회견

1994년 6월 7일 김일성과 면담

1994년 7월 9일 김일성 조문

1994년 7월 20일 김일성 중앙추도대회 참석

1994년 10월 10일 일본 귀국 앞서 김정일에게 충성하는 편지와 <김정일 장군님께 드리는 노래>등 2곡의 노랫말 전달

1994년 10월 16일 김일성 사망 1백일에 즈음 만수대 김일성 동상에 헌화

1994년 10월 19일 단군릉 참관

1994년 10월 22일 박성철 부주석. 김용순 당 대남 비서  전송 속에 일본으로 귀환

1994년 11월 15일 일본 사회당 서기장 구보 와타루와 일본 정치인들의 방북 문제 논의

1995년 2월 조총련 중앙위 제16기 4차회의서 김정일의 연내 당중앙 총비서 및 국가 주석직 취임시사

1995년 4월 15일 김일성 83회 생일 기념 중앙대회서 김정일에의 충성다짐(조선문화 회관)

1995년 5월 24일 조총련 결성 40주 기념 중앙대회 참석

1995년 6월 15일 조총련 제16기 5차회의 확대회의 개최 <김일성충성세력화> 다짐

1995년 7월 5일 김일성 사망 1주기행사 참석차 북한 방문

1995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2주기 중앙 추모대회 진행

1995년 7월 9일 김일성 사망 1주기 추모연회 참석

1995년 7월 14일 김일성 사망 1주기 조총련 추모단 인솔 <한덕수경공업대학> 참관

1995년 9월 8일 북한정권 수립 47주 중앙보고대회 참석

1995년 9월 17일 제17차 조총련 전체대회서 의장에 재선

1995년 9월 25일 조총련 제1부의장 이진규(李珍珪) 장례식 참석

1995년 10월 26일 조선신보 창간 50주 기념식서 대김정일(對金正日) 충성보도활동 촉구

1995년 12월 27일 김정일 새해선물 전달식 참석

1996년 1월 30일 <문예.체육일꾼모임> 개최  그리고 에술,체육 통한 조직확대 역설

1996년 2월 15일 김정일 54회 생일 맞아 대김정일(對金正日) 충성 다짐하는 "글" 전달 

1996년 2월 15일  김정일 54회 생일 기념 재일본조선인 중앙대회 개최 대(對) 김정일 충성 및 대북지원 사업 강화 다짐

1996년 6월 8일 조선대학교 창립 40주 기념보고 축사 통해 조선대학생의 <김정일의 전사화> 다짐  

1996년 6월 18일 조총련발간 대중잡지 <이어>창간축하모임 참석  

1996년 6월 23일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진행

1996년 10월 5일 증등교육실시 50주 중앙대회 참석 

1997년 1월 22일 90회 생일 맞아 김일성 훈장 서훈

1997년 5월 8일 김일성. 김정일의 교육원조비 송금 40주기념 중앙감사대회 참석

1997년 5월 17일 조총련 금강산 가극단 새회관 준공식 참석

1997년 5월 29일 김정일장군의 노래보급을 위한 총련 일꾼들의 모임 참석

1997년 6월 27일 진행된 <조선신보> 복간 45주년 기념 모임 참석 연설

1997년 7월 6일 김일성 3주기 재일 조총련 추모대표단 한덕수단장 인솔, 평양도착

1997년 7월 8일 김정일 예방과 환담 그리고 김일성 3주기 맞아 조의(弔意)

1999년 1월 1일 김정일에 신년축하문 보냄

2001년 2월 21일 오후 8시 20분 94세 나이로 사망

 

 

(2)허종만

ㄱ.출신--경남 고성

ㄴ.경력

1959년 조총련 도쿄도(東京都) 본부위원장

1986년 9월 조총련 중앙위원회 부의장

1993년  7월 조총련 중앙상임위원회 책임부의장(신설)

1994년 2월 28일 평양서 김정일과 친선담화

1994년 7월 17일 김일성 조문, 김정일에 충성다짐

1995년 3월 20일 김정일이 조총련 예술단에 베푼 목란관연회에 당비서 김기남 김용순과 함께 참석

1995년 5월 24일 조총련 결성 40주 기념 제일 조선사회과학자 <학술보도회> 연설 통해 학자들이 김정일 사상 실현 기여 강조

1995년 12월 27일 김정일 새해선물 전달식서 대(對) 김정일 충성 및 <95년의 조직강화의 해> 강조

1996년 6월 27일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 지지 일본위원회" 결성 20주 기념 모임 참석

1996년 10월 조총련 청년상공회 중앙간사회 제1기 2차 확대회의 연설 통해 대북 합영. 합작 사업 주력 강조(대북투자회)

1997년 7월 8일 김일성 3주기 재일 조총련 중앙추모대회 참석(동경 조선문화회관)

2005년  조총련 결성 50주 기념 행사때 김영남  축하 메세지 낭독

-->허종만은 대북 투자와 대북 경제송금을 주도했으며 조총련 학습조 실질적 책임자로 알려지고 있다

 -http://zine.media.daum.net/mega/h21/200506/03/hani21/v9251826.html

 

 

2001년부터 조총련을 이끌고 있는 서만술의장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조총련 조직국장과 사무총국장등 핵심라인을 거친 한덕수의 직계, 한덕수 의장 사망 후 조총련 안팎에선 대북 송금 사업을주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임이 두터운 허종만 책임부의장의 승인을 예상했으나 결과는 서만술의장의 낙점이었다

위축된 조총련의 조직을 추스르려면 성품이 부드럽고 인화에 강점이 있는 서만술의장이 적임이라고 북당국이 판단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學習組)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이 지난 2002년 북일정상회담 직전에 해산했던 비공식 조직 "힉습조"를 부활시켜 재편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조총련이 이번에 학습조를 부활시켜는 것은 자금조달과 조직강화, 그리고 대일(對日), 태평양연안 공작을 강화하려는 목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學習朝)란

ㄱ.일본 재판부에 제출된 조총련 내부 자료에 따르면 학습조는 "위대한 김일성 원수가 조직하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가 지도하는 재일조선인 김일성 김정일주의자의 혁명조직"이며 활동임무는 조국을 엄호방위하고 일본에서 주체혁명 위업을 이루는데 적극적으로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ㄴ.조총련은 학습조를 설치하여 충성심을 강화하고 김일성 김정일 주체사상 강좌와 통일전선사업에 집중하여 대남적화통일을 꾀하고 있으며 1974년 4월 1일 학습조 조직 기반으로 통일사업부를 설치하고 대남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통일사업부(학습조-통일혁명당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의 임무는 민단조직의 와해, 대남적화공작 수행, 위장평화공세에 의한 통일전선 저력의 효과적 수행, 동북아지역의 북한정부 연락선 구축(잠수함 기지구축), 무기구입과 밀매 추진, 반합법적 또는 비합법적. 합법적 기업등을 운영하면서 자금확보등에 주도하고 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 활동 자료

ㄱ.조총련 학습조는 동북아 지역 북한정부 간첩망과 반미구국전선 조직  

ㄴ.조총련 학습조는 북한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직

조총련 소속 공작요원 소위 "학습조" 3,000명 및 재일(在日) "한통련", 재미(在美) "한청련", 해외 "범민련"등  친북전위 조직 16,500명등 대남공작에 활용

ㄷ.북한 불법 수출에는 총련의 비공개조직인 "학습조"가 주도적으로 관여했다고 공안당국의 조사를 인용해 보도 또한 16일 다산케이(産經)신문은 세이신기업이 미사일 추진 연료완성에 필요한 제트 밀을 판매한 곳은 사실상 북한 인민무력부라고 보도했다

ㄹ. 조총련 학습조는 북한과 북한 노동당에 충성을 맹세하는 재일 조선인계의 신용조합에 강한 영향력 행사

반합법적 비합법적 합법적 기업 운영과 자금확보

ㅁ.1998년 한 재일동표가 조긴 아이치(朝銀 愛知)를 상대로 이 지점 부의장이 홍령한 자신의 예금 약 17억 5천만엔을 반환해달라고 청구 재판 자료

-재판 과정에 원고측은 "학습조"라는 조직이 조긴 아이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리고 이 재판 판결문을 보면 "피고(조긴 아이치)의 간부는 전부 학습조원에서 등용되었다 조긴 아이치는 금융기관으로서 본래의 업무 이외에 조총련의 활동자금이나 북한에 돈을 보내는 특수임무를 행하고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 재판에서 원고인 재일동포 기업가는 "나의 예금은 북한에 대한 송금이나 한국의 유학생 조직, 일본내 친북계 국회의원의 정치자금에 쓰였다"고 말했다 

ㅂ.1999년 여름 일본 자민당 외교부회에서 공안관계자는 학습조에 관하여 "전국에 약 1000개 조직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ㅅ.전(前) 일본 공안조사청 조사 제2부장 스가누마 고코(管沼光弘)씨는 2001년 11월 15일자 슈칸 분(週刊 文春)에 북한이 그 동안 은밀히 제3세계에 무기를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라는 돈세탁 장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ㅇ.김정일은 1999년 4월 20일 조총련 제1 부의장 서만술에게 "외유내강(外柔內剛) 방식으로 조총련을 재건하라"라고 지시했다

"외유(外柔)" 는 조총련이  우경화하지 않았느냐는 오해를 살정도로 취직센터와 노인 복지정책등 다양한 정책을 펴서 동포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방지하라는 것이었다 "내강(內剛)"은 학습조(조선노동당 일본조직-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에서 철저하게 김정일 숭배사상을 고취하라는 것이었다

ㅈ.일본근해 괴선박 격침사건--테러요원 침투를 위한 대일(對日) 한민전 공작선과 필로폰을 밀무역하는 북한 선박이었을 가능성 제기

마약과 현금등 막대한 규모의 현물을 싣고 있었다

ㅎ.북한은 2001년 7월 일본으로부터 중고어선 49척을 밀수입한 사실이 있다 

 

조총련도 대한민국과 일본 국왕제도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노선과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노선 김일성 김정일주의를 버리고 서구사회 진보진영처럼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것이 올바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