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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타:쿠바공화국 국가개요와 스페인계 쿠바혁명 최고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본문
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타:쿠바공화국 국가개요와 스페인계 쿠바혁명 최고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5. 10:15Cubadaily Homepage(쿠바 데일리의 홈페이지)
http://www.cubadaily.com
World News NetWork
http://www.wn.com/s/sitemap/index.html
1.쿠바공화국 국가 개요(槪要)
쿠바는 중앙아메리카 서인제도의 공화국이다
정식명칭은 쿠바공화국
쿠바섬은 동쪽 끝 마이시곶에서 서쪽 끝 산 안토니오곶까지 길이 1,300Km이고 남북 길이 70--200Km인 동서로 긴 섬이다 동쪽으로 원드워드해협, 서쪽으로 유카탄해협, 북쪽으로 플로리다해협, 북동쪽으로 올드바하마해협과 접한다
국토의 4분의 1이 산지이고 나머지는 100m이하의 낮고 기름진 평야와 구릉지가 발달하여 대규모 기계화 농업이 적합하다
쿠바공화국 면적은 11만 860평방 km이고 인구는 1,122만 6,000명이다 아메리카대륙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로서 <카리브해에 떠 있는 붉은 섬>으로 비유되며 자연적 위치 때문에 동서 양대세력이 충돌하는 국제정치의 요충지가 되어 왔다 쿠바공화국 수도는 아바나이다
(1)위치----중미. 카리브해상 서부
(2)면적----110,860평방 Km
(3)국경----29km
(4)해안선---3,735km
(5)영해----12해리(경제수역 200해리, 77년 2월 26일)
(6)인구----1,126,000명(2003년)
(7)수도--이바나(Havana)
(8) 공용어---스페인어
(9)문맹률---6%
(10)종족 구성
뮬라토(51%, 흑인과 백인 혼혈아). 스페인계 백인(37%). 흑인(11%). 중국인(1%)
쿠바공화국 종족은 스페인계 백인, 흑인, 혼혈인(스페인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뮬라토), 인디언의 4인종으로 나눈다
스페인 정복전에는 인디언(타이노족)이 약 11만 2,000명에 달했으나 스페인의 점령이후 토벌과 금광에서의 혹사등으로 인디언들은 거의 사려져 현재는 절멸(絶滅) 하였다
인디언들을 대신할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로부터 팔려온 흑인노예들이 현재의 쿠바 흑인의 선조이다 1900년 초 대규모의 스페인계 백인 이민들이 정착하여 현재의 백인이 되었다
인구의 절반정도를 차지하는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메스티조(뮬라토) 인종인 쿠바의 정치, 경제, 문화를 주도한다는 점이 특색이다
피델 카스트로도 스페인계 아버지 백인과 가정부 리나 루스 곤살레스 뮬라토계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의 형 백인 두명과 뮬라토계 5명 사상아로 그의 형제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스페인 백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11)언어
ㄱ.공용어--스페인어<에스파니아어>
ㄴ.스페인어를 사용하며 주로 사용되는 외국어는 러시아어와 영어이다
(12)종교
피델 카스트로 집권이전에는 로마 카톨릭 85%를 차지했으며 쿠바 공산당 피델 카스트로 집권이후에는 국민의 대부분이 가톨릭교도나 종교활동에 규제가 따른다
공식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지만 여전히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다
1960년대 초 교회와 국가의 갈등으로 많은 성직자들이 추방되거나 해외로 망명했으나 1980년대 이후 화해기에 접어들어 1991년 10월 개최된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및 기타 종교 신앙인들도 공산당원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13)독립---1902년 5월 20일 스페인에서 독립
(14)헌법---1976년 2년 24일 현행헌법 제정 그리고 1992년 7월 12일 부분 개정
(15)정체--공화제
(16)정부형태---공산당 1당 독재
(17)국가원수와 실권자---피델 카스트로
(18)대의기구---단원제(정원:609명, 임기 5년)
(19)정당--공산당 유일정당제
(20)정부성향---공산주의
(21)UN가입---1945년 10월 24일
(22)비동맹가입---1973년 9월 5일
(23)GDP와 1인당 GDP
ㄱ.GDP----265억불(2002년)
ㄴ.1인당 GDP---2,161달러(2002년)
쿠바공화국도 공산주의 경제 한계로 1인당 국민소득이 증가되지 못하고 있으며 남미국가에서 퇴보되고 있다 사회주의 경제는 고도소비사회 이전에는 급성장이 가능하지만 고도소비사회 진입단계에서는 자본주의 3대 원칙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시장경쟁원리등을 인정하고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돼야 급성장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
(24)화폐 단위---쿠바
1달러=1,000쿠바<2001년 11월 기준>
(25)무역(2002년도 기준)
ㄱ.수출----14억불(원당. 니켈. 담배. 커피. 과실등)
기후조건상 식물종류가 다양하고 삼림이 무성하며 토양이 비옥한 곳에서는 사탕 수수, 커피, 쌀 농사등이 주로 행해지고 있다
ㄴ.수입---42억불(원자재, 전자제품, 전기용품등)
(26)국방비----3억 9,000만불(1999년)
(27)군사력(2001년)
ㄱ.육군----58,000명
ㄴ.해군----3,000명
ㄷ.공군----10,000명
(28)쿠바공화국과 북한
쿠바와 북한은 91년 3월 군사협정조약을 체결하고 무역. 경제. 과학. 항공. 보건등 많은 분야에서 교류협력을 하고 있다 쿠바에는 반미인민전쟁론자 모임단체이며 반미단체 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사무소)를 두고 있다
ㄱ.박가협
http://user.chollian.net/-imint/dict/nb.html
한민전 전(前) 쿠바대표부 박광기 대표 1996년 11월 26일 김일성 종합대학교 개교 50주념 기념 보고...한민전 쿠바대표부 실상을 볼 수 있는 자료
ㄴ.통일을 위하여
http://kcm.co.kr/kcm/data/ch9706.html
북한이 1978년 11월 이후부터 한민전(통일혁명당)을 일본.쿠바. 시리아. 평양. 베트남. 마다카스칼등 대표부를 설치해왔다..
(29)한국과 쿠바
한국과는 1949년 7월 수교하였으나 1961년 카스트로 정권이후 단교하였다
한국 교민의 첫 진출은 1905년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한 사람들이 1921년 쿠바로 이주하면서부터였다 6.25동란때 북한을 규탄하고 미주국가와 단합하여 한국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였다
1959년 카스트로 집권 이후 한국과의 문화 교류. 통상관게는 단절되었으나 최근 쿠바측에서 국제회의나 국제경기의 참여를 허용하고 있다
1997년 11월 한국과 쿠바 상의간 협력의정서를 체결하였다
2.쿠바 역사
<쿠바나칸>은 1492년 C. 콜럼비스의 첫 항해 중 발견되었고 1511년부터 1511년까지 에스파니아(스페인)에서 파견된 군인 D.벨라스케스에게 정복당하여 이후 1898년까지 에스파니아(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식민지 시대 초기 시보네족. 타이노족등 원주민 인디언들은 사금채취와 농장에서의 혹사, 1528년 에스파니아(스페인)에 대한 반란, 1530년 악성전염병 유행 등으로 그 수가 크게 감소 하였다 그러다가 1531년 이후에는 인디언(인디오)의 절멸로 식민지 경제 상태가 악화되었고 지금의 수도인 아바나만이 에스파니아(스페인)와 대륙식민지를 연결하는 통상거점으로 발전하였다
16세기초부터 에스파니아(스페인)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수입, 사탕수수와 담배를 재배하였는데 19세기까지 수입된 노예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17--18세기 여러 차례 노예반란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고 특히 17세기에는 경쟁관계에 있는 유럽 나라들의 공격으로 식민지배에 어려움이 많았다
19세기초 라틴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 독립전쟁의 영향을 받아 1812년 대규모 흑인반란이 일어났다 이후 1865년 노예무역이 끝나고 1886년 노예가 폐지되었다
1868년 C.M 데 세스페데스가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1878년까지 1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기간동안 공화정권이 수립되었으나 1878년 정치개혁과 노예해방을 약속한 산흔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노예해방은 이루어졌으나 기타 조약이 이행되지 않자 1895년 쿠바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J. 마르티가 결성한 쿠바혁명당을 중심으로 제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고 1898년 아바나항의 미국선박 메인호에서 원인 모를 폭파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이 에스파니아(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미국-에스파니아(스페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4개월말에 미국이 승리하였고 파리평화조약의 성립으로 쿠바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이후 3년간 미군정이 실시 되었고 혁명군사정부는 해체되었다
1901년 미국의 내정간섭과 군사기지 설치를 인정하는 플랫수정조항이 헌법에 추가되고 관타나모만등에 미군기지가 설치 되어 실질적으로 미국지배 아래 놓였다
이듬해 미군정이 끝나고 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T.E 팔마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경제적으로 미국자본이 유입되면서 제당산업이 급속히 발전하였으나 에스파니아 식민지 통치를 극복하지 못했고 스페인계 백인 중심의 국민 경제는 향상되지 않았고 정치적 부패가 심화 되어 1906년--1917년까지 3차례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24년 G. 마차도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바티스타 군부와 국민 대중에 의해 무너졌고 그 결과 1934년 미국은 플랫수정조항을 파기 하였다
이에 따라 F. 바티스타가 최고 실력자가 되어 1934년부터 1944년까지 집권을 하였고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1959년까지 정권을 장악하였다
마차도와 바티스타정부는 친미정부로 미국의 지지를 받아 군대의 힘과 암살등의 방법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1953년 바티스타정권의 압정에 대해 <7.26운동>으로 불리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의 원점이 되었고 이후 스페인정부와 유럽사회주의자. 소련공산당 지원으로 카스트로는 E.C 게바라와 함께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1958년 반(反)바티스타 통일전선이 결성되었고 이듬해 1월 혁명에 성공 카스트로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2월 총리에 취임한 카스트로는 농지개혁법으로 미국계 설탕. 석유회사를 접수하자 미국은 1961년 1월 국교를 단절하였고 1962년 미주기구(OAS)에서 쿠바를 제명시키는 등 봉쇄정책을 펴나갔다
이로써 쿠바는 아메리카대륙에서 고립화 되었고 10월 쿠바위기로까지 발전하였다
1963년 제2차 농지개혁이 실시되었고 1965년 10월 쿠바공산당이 창당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소련. 동유럽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모택동이나 김일성노선처럼 독자적 사회주의 건설(주체정부 쿠바 유일정당 공산당)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경제위기와 국제적 고립화가 깊어져서 1970년대에는 자주독립노선을 현실노선으로 수정하여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였다
1972년 코메콘
1975년 12월 아바나에서 열린 제1회 쿠바공산당대회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헌법이 상정되어 이듬해 공포 되었으며 카스트로는 최고권력기구인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97년 개최된 쿠바공산당 제5차 전당대회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후임으로 동생 라울 카스트로를 승인하였고 2002년 6월 사회주의 체제 불변 개헌안이 의회를 통과 하였다
쿠바 카스트로 정부도 북한 김일성 김정일 주체정부와 유사하다
(1)미국과 스페인전쟁 그리고 쿠바 혁명가며 시인 마르티(Jose Marty, 1853--1895)
ㄱ.미국과 스페인 전쟁
에스파니아(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쿠바의 독립전쟁에 1898년 미국이 개입하여 일어난 미국과 에스파니아(스페인) 사이의 전쟁 즉 미서전쟁이라고도 한다
1895년 2월 쿠바에서 J.J. 마르티의 지도 이래 제2차 독립전쟁이 시작된 이후 혁명군이 섬의 동쪽 반 정도를 탈환하고 1897년 가을 혁명정부를 수립하자 에스파니아는 대군을 파견하여 잔혹한 진압작전을 폈다
한편 마찬가지로 에스파니아령(스페인령) 필리핀에서도 독립의 기운이 고양되어 1896년 8월 독립혁명이 발발, 그 뒤 한때 좌절되었다가 1898년에 들어서 재연되고 있었다
그대 미국은 쿠바에 약 5,000만 달러에 달하는 투자와 연간 1억달러를 넘는 무역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또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시장과 중앙 아메리카 지협 운하지역으로 가는 통로를 장악하는 카리브해의 요충지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하였다
쿠바동란은 이러한 미국의 이해를 위협하는 것이었고 또 에스파니아(스페인)군의 잔학행위에 분개하는 <자유쿠바>에 동정하는 미국 여론은 혁명군을 원조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에 대해 미국의 매킨리정부는 혁명군을 승인하지 않고 에스파니아(스페인)정부가 스스로 섬의 평화를 회복할 것을 기대하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으나 1898년 초 이 기대가 좌절되자 미국의 일방적인 개입에 의한 해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같은 해 2월 에스파니아 대사 데 로메의 모욕적 서간사건과 미국이 쿠바에 투자한 5000만 달러를 지키기 위해 파견된 전함 메인호의 격침으로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발발하자 이것을 이용한 미국내 <황색신문>의 선동과 세론의 고조 및 정제계 주류의 전쟁 지지로의 전환등이 정부의 결의를 굳히게 했다
4월 11일 매킨리 대통령은 의회에 개전 교서를 보내고 쿠바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간섭하는 의도임을 밝혔다
의회는 격론 끝에 평화를 회복한 뒤 쿠바를 독립시킨다는 조건하에 이것을 승인하여 4월 25일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최초의 전투는 18795년 5월 1일 필리핀전선에서 G. 듀이 제독이 이끄는 아시아함대에 의한 마닐라만 급습과 에스파니아 함대를 격파하였다 듀이는 E.아기날도 휘하의 필리핀혁명군과 연합으로 마닐라를 포위하고 나중에 도착한 지상군이 8월 13일 마닐라에 입성했다
그러나 아기날도 필리핀혁명군은 승리하지 못하고 마닐라로부터 말로로스로 퇴각했다
한편 카리브해 전선에서는 쿠바의 산티이고 공략이 주목표가 되어 6월말 미국 육군 1만 6000명이 쿠바혁명군 원조를 받아 상륙하고 해군도 산티아고항 탈출을 시도하던 에스파니아(스페인)함대를 격파했다
최후로 미군과 쿠바혁명군은 산티아고를 공격하고 7월 16일 이를 함락시켰으나 쿠바혁명군은 항복조약의 조인 참가를 거부당했다
이렇게 해서 전투는 4개월만에 끝나고 8월 12일 휴전이 협정되었으며 곧 이어 파리회의가 개최되었다
필리핀과 쿠바 대표를 배제한 상태에서 12월 10일 미국과 에스파니아 사이에서 맺어진 강화조약은 에스파니아정부가 쿠바를 포기하고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등을 미국에 할양하고 미국은 에스파니아정부에게 2000만 달러를 지불키로 했다
그 결과 미국은 일대 식민지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미국정부는 봉건주의적 후진국 쿠바(1902년 5월 20일 스페인에서 독립)와 필리핀(1907년 자치권부여.1929년 필리핀 연방정부등장. 191년 태평양전쟁 일본 점령. 1945년 미국정부 필리핀 재탈환. 1946년 7월 4일 필리핀 독립국가 성립)등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독립국가로 승인함으로 그들의 국가들이 경제적 후진성과 문화적 후진성으로 사회주의국가나 군사독재정부가 등장하게 되었다
민주주의 정치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고도소비사회 진입으로 가능하다
ㄴ.쿠바혁명가이며 시인 마르티
마르티는 쿠바 시인이다
그는 16세 때 조국 독립운동에 관계하여 투옥하고 에스파니아(스페인)로 추방되었다
1878년 귀국,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79년 다시 에스파니아(스페인)로 추방되어 프랑스에 망명 하였다
이어서 뉴욕에서 쿠바혁명당을 창립하여 미국 도움으로쿠바혁명을 지도했다
1895년 쿠바에 귀환했으나 에스파니아군(스페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라틴 아메리카 근대파의 선구 시인으로 문예 평론. 전기. 설화집도 냈다
시집에 <이즈마엘릴로, Ismaelillo> <자유시, 1913> 등이 있다
(2)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y Zaldivar 1901-1973)
바티스타는 쿠바 정치가로 오리엔텐 출신이고 군인출신으로 독재적인 탄압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혁명으로 추방되었다
1933년의 혁명 당시 육군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혁명정권에 합류하여 참모총장으로 승진, 군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 후 혁명을 배반하고 미국의 쿠바지배에 협력하여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대통령으로 있었다 1952년 3월의 쿠데타로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반(反)바티스타 투쟁이 높아져서 1959년 정권에서 쫒겨났다
(3)쿠바혁명과 스페인계 쿠바혁명 최고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ㄱ.쿠바혁명
쿠바혁명은 미국정부와 스페인정부 싸움으로 보는 분도 있다
미국정부 지원으로 수립된 바티스타정부와 스페인계 백인 출신 카스트로정부 싸움은 과거 식민지전쟁 미국과 에스파니아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1959년 F. 카스트로의 주도로 쿠바에서 일어난 혁명.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바티스타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다
쿠바는 오랫동안 에스파니아 식민지로 있었고 미국-에스파니아 전쟁 후 1902년 독립한 뒤에는 관타나모등에 미군기지가 설치되는 등 미국의 실질적 지배 아래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미국 자본의 유입으로 대미(對美)종속적 사탕 모노컬처(단일작물생산) 경제가 되었다
제당업은 발전하고 생산량도 늘었으나 대부분 토지는 미국인과 쿠바인 대지주들에게 집중되어 민중의 궁핍한 생활은 더욱 악화 되었다 독재정권의 정치부패도 심해져 20세기 초 여러 차례 민중반란이 일어났으나 미국의 군사개입으로 모두 진압되었다
1933년 쿠데타로 마차도정권을 무너뜨리고 군부실력자가 된 F.바티스타는 1952년 다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사동맹을 맺고 반대세력을 탄압하면서 독재정권을 유지하였다
쿠바혁명은 바티스타정권 타도를 위하여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가 이끈 무장청년들이 산티아고의 몬카다병영을 습격한데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나 카스트로는 1955년까지 투옥되었다
그 뒤 그는 멕시코로 건너가 그 곳에서 혁명조직 <7월 26일 운동>을 결성하였다
1956년 말 체 게바라와 함께 배를 타고 쿠바 동부에 상륙한 카스트로는 시에라마에스트라산맥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시작하여 새로운 혁명전쟁을 전개 하였다
카스트로는 모택동의 중국혁명처럼 농민을 투쟁에 참가시킴과 동시에 1958년 반(反)바티스타정부 통일전선을 조직하였고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 축출에 성공하여 혁명을 달성하였다 게릴라전과 농촌지역에 혁명의 기초를 둔 쿠바혁명은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쿠바혁명이 처음부터 사회주의 혁명을 한 것은 아니며 최초의 정부도 여러 계급이 모인 온건ㄱ세력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959년 카스트로의 총리 취임 이후 사회개혁을 위하여 1959년 5월 제1차 농지개혁법이 실시되어 대지주의 토지가 몰수되면서 온건파가 혁명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사회주의 정부의 특징은 1단계 민족주의 우파와 연합 2단계는 사회주의 정부 수립 그리고 지도자 중심의 권력제도 수립으로 나아가고 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일당독재정부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위원회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 올바른다 1단계 사유재산과 영리추구 자유시장경쟁원리등 부여 2단계 자유민주주의 선거 보장과 소비가 투자라는 경제원칙 중시>
카스트로 정부의 소련산 석유정제 방침을 거부한 미국계 정부회사 접수, 이에 대응한 쿠바설탕 수입할당 삭감, 쿠바내 미국인 자산 및 외국인 기업의 전면 국유화, 1961년 1월 미국과의 국교단절등이 이어졌다
또한 소련식 기업혁신과 농지개혁을 시행하면서 점차 사회주의가 정착되기 시작하였고 1961년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선언>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ㄴ.스페인계 쿠바혁명 최고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1959년부터 쿠바를 통치했으며 중남미 공산주의 혁명 상징이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형제이다
카스트로는 쿠바 등단에 있는 오리엔테주의 마야리 시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앙헬 카스트로 이 아르히스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출신으로 이주민(스페인계)으로 전처 소생의 두 아이를 포함하여 모두 7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첫번째 아내와의 결혼생활 중에 가정부였던 리나 루스 곤살레스와 성 관계하여 5명의 사생아를 낳았는데 이 5명 사생아 가운데 둘째가 피델 카스트로이며 막내가 라울 카스트로이다
스페인 태생(스페인계) 피델 카스트로 아버지 앙헬 카스트로는 오랫동안 유나이티드푸르트의 지배를 받아 온 빈곤한 지역 마야리에서 사탕수수와 곡물을 경작하여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유복했다
(ㄱ)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혁명 최고지도자이고 오르엔테주 비란 출생이며 스페인계이다
1945년 하바나대학 법학부 입학, 법률공부를 하며 학생운동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어 대학 안팎의 정치투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 트루히요 독재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원정대에 참여하였으며 1949년 대학 졸업 후 하바나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정치범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힘썼다
1952년 3월 F.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모든 반대파를 탄압하는 독재정치가 시작되자 이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1953년 7월 26일 오리엔테주 시 산티아고 데 쿠바에 있는 몬카다병영을 습격하였고 이때부터 혁명가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습격작전이 실패하고 체포, 재판에 회부되자 <역사는 나를 무죄라고 할 것>이라는 유명한 자기변론을 하였다
은사로 석방된 뒤 멕시코로 건너가 <7월 26일 운동>을 결성하였다
1956년말 다시 쿠바를 침공, 뛰어난 지도력으로 2년에 걸친 게릴라전을 벌였으며 1959년 1월 마침내 바티스타정권을 타도하고 혁명을 성공시켰다<피델 카스트로는 스페인계로 유럽사회주의 지원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그해 2월 총리에 취임, 탁월한 지도력과 통솔력으로 혁명 후의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국가원수인 국가평의회 의장 . 각료평의회 총리. 쿠바 공산당 제1서기. 혁명군 총사령관등을 겸임하고 있으며 국민으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으며 최고지도자의 지위에 있다 또한 활발한 대외정책으로 제3세계에서도 지도적 존재가 되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의 고령 그리고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2인자로 지위와 역할 권력 독점,21세기의 공산주의 독재정치, 스페인계 피델 카스트로정부의 유럽백인 37% 지배층에 대한 몰라토 51%과 흑인 11%등의 하층민들의 저항 등 공산당정부도 붕괴 위기로 나아가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 공산당정부가 조기에 붕괴 타도되기 위해서는 유럽각국 사회주의자나 스페인국가등이 공산당 일당독재정부 피델 카스트로를 지원해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쿠바공화국 반군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위원회가 쿠바공산당 일당독재정부를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으로 타도한 후 모든 쿠바시민들에게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시장경쟁원리등을 보장해주어야 하며 동시에 민주주의 정치를 실현해주어야 한다
(ㄴ)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 Ruz. 나이 73세, 1931년--)
라울 카스트로는 쿠바 정치가이며 오리엔테주 비란 출생이다
피델 카스트로 동생이다
그는 하바나대학에서 공부한 뒤 형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반(反) 바티스타 독재투쟁에 가담하여 게릴라전의 지도자로 우수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쿠바혁명 후 1959년 10월 혁명군사령관에 취임 군부를 장악하였다
국가평의회 제1부의장과 각료평의회 제1부수상, 쿠바공산당 제2서기를 겸하여 형에 이어 2인자 자리에 있다
피델에 비하여 카리스마는 떨어지지만 지도력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라울 카스트로가 피델 카스트로 후계자로 자리잡아 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공존세상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조치를 해야 할 것이다
ㄷ.게바라
게바라는 쿠바혁명 지도자이며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출생이다
그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1953년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과테말라 혁명에 참가 하였다
1954년 멕시코로 망명하여 당시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며 쿠바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전복시킬 준비를 하고 있던 쿠바인 카스트로 형제를 만났다
그는 카스트로의 군대에 합류해 1956년 쿠바 국내로 진입, 게릴라전을 펼치며 카스트로의 가장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959년 바티스타정권을 무너뜨린 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쿠바의 시민이 되어 국가농업개혁연구소의 산업부장, 쿠바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 하였다
1965년 4월 <쿠바에서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작별 편지를 남기고 쿠바의 전사들과 함께 콩고로 가 내전에 참전하고 있는 루움바 부대의 조직을 도왔다
1966년 볼리비아로 잠입해 산타크루스 지역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 통솔하던 중 1967년 10월 정부군에 체포되어 총살 당했다
중남미 혁명운동의 상징적 존재이며 이론을 겸비한 직업적 혁명가이다
저서로 <게릴라전 1960> <쿠바혁명전쟁 회고록 1963> <쿠바에서의 인간과 사회주의 1965>등이 있다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 집권 이래 처음 이뤄진 권력이양은 비록 일시적이긴 해도 쿠바 정부와 공산당의 장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카스트로 집권 이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
는 상황입니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좌)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 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1일자 쿠바 국영텔레비전 발표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전례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영텔레비전 방송의 이 발표는 라울 카스트로가 임시로 쿠바공화국 국가정부위원회 의장직을 수행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발표는 피델 카스트로가 수술을 받은 뒤 동생인 라울에게 일시적으로 권력을 넘겼다고 전했습니다. 지난 1959년 카스트로가 집권한 이래 이같은 권력이양이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공산혁명으로 고국을 떠난 미국 마이애미의 쿠바인들은 이 발표에 환호했습니다.
쿠바인들은 쿠바 만세를 외치면서 쿠바가 자유롭고 번성하는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전세계가 이번 사태를 반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이애미에 사는 쿠바인 망명자들과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일을 카스트로의 철권
통치의 끝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워싱턴에 소재한 독립적인 연구기관인 미주대화기구의 댄 에릭슨씨는 현재 쿠바의 권력층은 피델 카스트로에서 라울 카스트로 및 다른 공산당 간부들로의 필연적인 권력이양을 관리하기 위한 조심스런 작업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라울은 형인 피델 카스트로보다 5살이 적은 75세입니다. 그는 쿠바군의 장성이며, 국가위원회와 각료위원회에서 각각 제1 부의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라울은 쿠바 혁명 초기부터 이같은 직위에서 카스트로의 오른팔 역할을 하면서 후계자로 성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자금을 대는 프리덤하우스의 쿠바민주화계획 담당자인 하비에르 우트세트씨는 카스트로 형제가 여러 면에서 매우 다르다고 말합니다.
우트세트씨는 피델 카스트로의 경우 47년에 걸친 집권기간 중 많은 충격적인 일과 갑작스런 변화가 있었다면서 반면 동생인 라울은 좀더 합리적이고 예측가능하며 적어도 경제면에서는 더 합리적으로 쿠바를 이끌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트세트씨 등 일부 전문가들은 라울이 공산당이 여전히 집권하면서도 경제는 자본주의의 일부 속성을 도입한 중국과 같은 개혁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가령 경제는 국가에 의한 중앙계획 보다는 시장의 힘에 따라 운영하리라는 것입니다.
라울은 열정적인 혁명가인 형과 달리 형과 자신이 이룬 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갈 행정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소재 랜드연구소의 에드워드 곤잘레스씨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라울이 이끄는 쿠바가 대체로 현상유지를 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곤잘레스씨는 라울이 이끄는 쿠바는 카스트로를 승계하면서도 여러 지도자들이 권력을 나누게 될 것이라면서 이들은 현상유지를 위해 매우 강력하고 효율적인 보
안장치를 둘 것이라고 말합니다. 곤잘레스씨는 이들은 군의 지지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라울 카스트로
쿠바의 강력한 보안대는 오랫동안 반체제 인사들을 박해하고 투옥해 왔습니다. 워싱턴의 비정부기구인 자유쿠바센터 대표 프랭크 칼손씨는 라울 카스트로의 과거를 볼 때 그의 권력이 국가폭력을 통해 유지될 것 같아 우려된다고 말합니다.
칼손씨는 라울은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도록 지시한 살인자라면서 라울이 이끄는 쿠바가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해 쿠바에 유혈사태가 일어날 위험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칼손씨 등 전문가들은 카스트로 형제에 의한 억압의 한 사례로 발레라 계획을 지적합니다. 발레라 계획은 쿠바 반체제인사들이 시작한 운동으로 쿠바 법률에 개인의 기본권과 자유를 포함시키고 국가가 이를 존중해야 할지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요구하면서 2만5천여명이 서명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이에 맞서 반체제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한 뒤 쿠바인들이 공산당 정부를 영구적으로 유지하도록 하는 방안을 투표로 확정했습니다. 프리덤하우스의 하비에르 우트세트씨는 반체제인사들이 좌절을 겪긴 했어도 라울 카스트로의 공산당 정부는 계속 체제반대 운동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트세트씨는 쿠바의 반정부 운동은 현재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정부가 설치한 많은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폭넓고 대중적인 운동을 실질적으로 선도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단계에 이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트세트씨는 미국은 카스트로나 쿠바 공산당과 대화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유럽연합과 같은 다른 민주국가들과 기구들의 노력은 라울 카스트로에게 쿠바를 개혁하도록 압박하거나 부추기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현재 미국은 쿠바 반체제인사들과 협력을 계속하면서 그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백악관의 한 위원회는 최근 이같은 활동에 8천만 달러를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인 망명자들은 때가 되면 현금을 들고 개입해 쿠바의 경제와 새 정부가 앞으로 전진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날으리라!! 고넹이 http://goeun.egloos.com**
--언젠가 날으리라!! by 고넹이--
--체 게바라 사진과 자료--
카스트로정부는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 이익을 위하여 반제국주의 및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고 소련의 대리국가나 중국의 대리국가로서 아프리카, 중남미지역에서 사회주의 게릴라 단체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정부 반란군에게 훈련시키고 있다
쿠바군은 쿠바전체 인구 11%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명목으로 1975년 앙골라 전쟁, 1977년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전쟁에 참전했다
쿠바 카스트로정부는 소련군사쿠데타 실패와 소련해체 이후 독자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쿠바 카스트로 유일 공산당 독재정부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무너져 가고 있다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공존 열린 세상으로!
***D-13영화<1962년 쿠바사태 실화바탕 영화, 로저 도날드슨 감독>***
http://d-13.cinelove.com
--->1950년말에는 사회주의 혁명이 영웅으로 칭송되었고 그 운동이 미국까지 진격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이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으며 세계 각국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공존 열린 세상 복지국가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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