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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국제 공산주의 세력 소련.중국.북한등 3개국 축의 침략으로 국제 자본주의 세력 유엔16개국 참전 방어전쟁(사진) 본문

Guide Ear&Bird's Eye/한국전쟁과 유엔군 16개국 자료 발굴

한국전쟁--국제 공산주의 세력 소련.중국.북한등 3개국 축의 침략으로 국제 자본주의 세력 유엔16개국 참전 방어전쟁(사진)

CIA bear 허관(許灌) 2006. 6. 25. 13:11

유엔(UN)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를 추구한다 개인의 사유재산과 영리추구, 자유시장경쟁원리등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세력과 개인의 자유와 인권, 행복추구, 사회적 생존권을 무시하는 전체주의, 국가사회주의, 독재주의 체제를 거부한다

공산주의 반대 자본주의! 독재주의 반대 민주주의!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로...

 

1.국제 공산주의 세력 소련. 중국. 북한등의 남침전쟁 사진

--소련은 2차대전 연합군과 유엔창설의 주도적 국가로써 한국전쟁 당시에도 중립적 입장을 표방하면서 북한군을 지원했으며 중국인민군은 조선의용대를 지원하여 국가적 전쟁동원력으로 한국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전하여 분단 배후세력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정부는 한국정부도 적이 아닌 아군으로 규정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실용주의 등소평정부 이후부터이다 --  

(1)소련군정 및 북로당 간부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북로당은 1945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 밀 열성자 대회>에서 채택한 <정치노선과 조직강화에 관한 결정서>에 의거, 창설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모체로 하고 있다
같은 해 8월 29일 중국 옌안(延安)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조선독립동맹을 중심으로 지식층, 소시민층을 망라하고 있던 조선신민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였다 합당선언에서 북조선 노동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대중적 정당을 세울 필요에 의해서 결성되었다고 밝혔다
강령으로 민주주의적 조선자주독립국가 건설, 일본인. 민족반역자. 지주의 토지몰수와 토지없는 농민에게 무상분배, 일본인 및 민족반역자 소유의 공장. 광산. 철도. 운수.통신기관등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실시, 여자들에게 남자와 동등한 임금지급등을 내걸었다 북조선노동당 위원장에 김두봉(부산출신이며 조선의용대 독립동맹주석 출신), 부위원장에 김일성(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 허가이(모스크바대학출신이며 소련공산당 간부 출신)가 선출되었다
북로당은 1948년 8월 정권수립을 위해 남조선노동당과 <연합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정권수립(1948년 9월 9일)이후인 1949년 6월 30일과 7월 1일 평양에서 비공개로 열린 남북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1국1당 원칙에 따라 현재의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ㄱ.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과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소련군 연해주관구 제25군단 사령부 정치위원과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니콜라이 레베데프(Nikolai G Lebedebv)
(ㄱ)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ㄴ)소련군정은 극동사령부 예하 제1전선 군사령부 T.F 스티코프 상장 지시를 받았다
-평양주둔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 대장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

(ㄷ)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대일선전포고전에 한반도 침투조와 선발대를 투입했고 1945년 8월 9일부터 북한지역에 파견된 첩보대 조선인 박창우등과 조선인 소련군 극동정찰국 대원이었다
북한 김일성이가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이며 북한잠입 활동때는가명 김영환으로 사용했다
(ㄹ)중국내전과 한국전쟁때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만주국을 점령한 후 임표에게 일본군 무기를 인계했으며 임표을 동북 3성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북한지역을 점령한 후 김일성에게 총사령관을 임명했으며 한국전쟁때는 임표등의 동북3성 소련군이나 구일본군 탱크나 무기와 조선의용대 지원으로 남침을 추진했다
E.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사진 인물)---김일성(김영환). 김책등
ㄱ.연안파---조선의용대(모택동부대)<사진인물,김두봉. 최창익>
(ㄱ)정치조직 독립동맹(주석 김두봉. 부주석 최창익)과 군사조직 조선의용대(총사령관 무정)
(ㄴ)주석 김두봉(부산 동래 출신). 부주석 최창익(허정숙의 남편)
(ㄷ)김무정(무정)----함북 경성출신이며 중앙고보 중퇴 그리고 북방군관학교 포병과 졸업, 한국전쟁때 팽덕회등 중국 인민군사령관과 친교,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까지 진격 그리고 후퇴 중에는 평양방위사령관으로 재직 중 패전으로 해임. 51년 47세로 죽음..
(ㄹ)한국전쟁 주도는 해군이나 공군등을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주도했으며 탱크나 포병등은 중국 팔로군(중국인민군) 출신 조선의용대 출신이 주도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민주국을 점령한 후 중국인민군에게 일본 관동군 무기를 인계하여 중국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했으며 중국내전에서 모택동부대가 승리하자 동북3성 총사령관 임표등을 한국전쟁 참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국전쟁을 추진했다 한국전쟁 남침 주력부대는 조선의용대었다

*김일성은 중국 동북항일연군 제1 팔로군 제6사장을 역임했으며 소련군 88특별여단 대위로 제4대대장을 역임했다 그래서는 김일성은 중국 모택동과 소련정부 스탈린 전폭적 지원으로 북한권력을 장악했다  
ㄷ.소련파----소련군 대일참전 정찰국 출신(사진인물, 김일성. 김책)과 소련공산당 출신(사진 인물, 허가이)
(ㄱ)소련지역에서 소련공산당이나 소련정부에 참여한 인사들
(ㄴ)분류
*소련군 정찰국이나 대일참전부대---김일성. 김책등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
*기술자---공군이나 해군등 기술진이나 북한정부 행정요원으로 귀순
*당과 행정. 외교관료---허가이등
허가이는 소련정치담당 고문으로 노동당 조직부장으로 남로당과 북로당 합당을 총지휘했으며 허가이는 남로당 박헌영 보증인으로 한국전쟁이후 남로당 패전 책임과 박헌영등과 무장봉기 시도를 하다가 미국의 간첩으로 박헌영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而正 朴憲永과 許可而)

-한국전쟁 추진세력이 김일성계열(소련군 극동사령부)이냐 반제반파시즘 국제공산당(허가이. 박헌영)계열이냐 중국의용대(중국인민군, 김두봉.최창익.무정등)계열이냐 논쟁 부분

일반적 의견으로는 중국 공산당과 인민군(의용대)등이 내전전쟁에서 승리하자 그 위세로 동북3성 임표등의 주도로 김일성을 지원했다는 설(說)이다 (동북3성 조선의용대 한인 군인과 무기 탱크나 포병주력으로 남침)

 ㄹ.조선공산당-----북조선공산당 출신(사진인물,주영하)
주영하등은 김용범이나 현준혁등과 다르게 김일성을 지원했다

(2)조선의용대와 중국인민군 참전 자료

조선의용대(북한인민군 창설 주력부대, 무정등)--->중국 공산화 이후 중국 동북3성 책임자 임표등의 북한정부에 탱크나 야포지원 그리고 북한군의 남침---->중국인민군 한국전쟁 참전과 국가적 전쟁동원력 발동 그리고 1.4후퇴 이후 서울까지 중국인민군 진격


 

봄볕 즐기는 중국 인민군 포로

 

 

 

 

 

 

 

 

 

 

 

 

 

 

 

 

 

 

 

 

 

 

 

 

 

 

 

 

 

 

 

 

2.국제 자본주의 세력 유엔 16개국 참전  방어전쟁 사진

--유엔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주요 국가 영국이나 미국등이 주도적으로 지위와 역할을 해왔다--- 

 



▲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2004 NARA



▲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2004 박도



▲ 1950. 9. 16. 인천에 상륙한 후 시가지를 활보하는 유엔군들ⓒ2004 NARA



▲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2004 NARA


 




▲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2004 NARA



▲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2004 NARA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 군복을 얻어 입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마음씨 좋은 미군 아저씨를 만나면
미국으로 입양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유엔군 사령부 연혁


 

1950년 6월 25일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정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야포와 자동화기의 굉음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침략군은 이내 38선을 넘어 반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 경찰군을 밀어내며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 후 유엔은 북한군의 침략 저지를 위한 회원국의 단결과 원조를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안을 통해 미합중국을 결의안 내용의 실행과 한국 내 유엔군 작전 지휘를 담당할 집행국가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산세력이 자유국가를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당시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 공군 및 해군을 투입하고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유엔 사령부 총 사령본부를 설치하였다.

유엔의 호소

한편, 유엔은 모든 회원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항전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기타 원조 제공을 촉구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미 보병 24사단 21 보병연대가 유엔 지상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로 명명된 이들은 일본 내 주둔지로부터 공수된 병력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미 양국의 군대는 우세한 전력의 북한군을 상대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 사령부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수적으로나 장비 측면에서 열세인 가운데 유엔의 다른 회원국이 약속한 지원을 기다리며 조금씩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9일, 영국 제 27여단이 부산에 도착, 한국군 및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엔 사령부에 합류하였으며 곧 대구 서쪽의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가 자국 병력을 파병하였고, 남아프리카 연합은 공군병력을, 덴마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은 의무부대를 지원하였고, 당시 비회원국이던 이탈리아는 병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유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다

3년 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연합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유엔 사령부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침략행위 저지를 위한 유엔의 의지를 확인시켰다.

한국 땅의 혹서기와 혹한기를 견뎌내면서 영국, 이디오피아, 한국, 태국, 터키, 미국 등을 비롯한 연합국 출신의 젊은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현대 전쟁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능선, 장진호, 함흥, 단장의 능선, 화천호, 철의 삼각지, 펀치볼, 부산 등은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들이다. 연합군의 용맹스런 장병들이 흘린 피는 불모고지의 흙먼지와 한강과 임진강의 흐르는 강물도 붉게 물들였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총성은 멈췄다.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전투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록 전투는 끝났으나 군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2,000미터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자유의 대가

부산항 부근에 위치한 당곡 평야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빛 바랜 터키와 이스라엘의 '초승달과 별'과 '다윗의 별' 문양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33,629 명의 미군과 수많은 한국 병사들, 717명의 터키 병사들, 그리고 1,109 명의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산화해 간 흔적인 것이다. 이 곳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12 개국 병사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하다.

휴전협정과 함께 유엔 사령부 회원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후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은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 연합군의 병력은 932,964 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 - 590,911

콜롬비아 - 1,068

미 합중국 - 302,483

벨기에 - 900

영국 - 14,198

남아프리카 - 826

캐나다 - 6,146

네덜란드 - 819

터키 - 5,455

룩셈부르크 - 44

호주 - 2,282

필리핀 - 1,496

뉴질랜드 - 1,389

태국 - 1,294

이디오피아 - 1,271

그리스 - 1,263

프랑스 - 1,119

*유엔묘지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6.25참전 유엔군 전사자 묘지--
부산광역시 남구(南區) 대연동(大淵洞)에 있는 6.25참전 유엔군 전사자의 묘지이다
1951년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설립안이 채택되어 참전 16개국 1만 1,000명이 안장되었는데 유해를 본국으로 이장하기도 하여 11개국 2,300여구가 남아 있다
1955년 이후 UN에서 관리해 오다가 1974년부터 이곳에 유해를 남기고 있는 참전국과 한국이 공동관리하고 있다
참전국 국민에게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내외국인이 방문, 참배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3호이다

-6.25전쟁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아름다운 여인 마릴린 먼로 여배우 모습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로(자유권과 생존권 존중사회)

러시아 푸틴정부는 자유민주정부이고 중국 호금도정부는 사회정부입니다 그리고 북한 김정일정부는 공산정부입니다

북한도 선진국들처럼 자유민주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