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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北, 美에 감시 비행하지 말도록 경고 (영문 첨부) 본문

CIA.FBI(귀가 빙빙 도는 뇌 감청기)

北, 美에 감시 비행하지 말도록 경고 (영문 첨부)

CIA bear 허관(許灌) 2006. 6. 12. 07:15
北, 美에 감시 비행하지 말도록 경고 (영문 첨부)

06/11/2006

북한은, 미국이 정찰기를 이용해 북한을 감시하고 있다며, 또다시 미국의 감시 비행이 있을 경우, 미국에 보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북한 공군사령부는,지난 6일과 8일, 그리고 11일에 외국 정찰기가 북한영해 상공을 지나갔다고 밝혔다고, 북한 관영 중앙통신이 11일, 보도했습니다. 북한공군은, 이같은 감시 비행은 “선제공격을 부르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정부는 이같은 북한측의 주장에 대해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않고 있습니다. 지난 1969년에는 북한이 미국 정찰기를 격추시켜, 탑승했던 31 명의 미군이 모두 숨진 바 있습니다.

(영문)

North Korea says the United States has been conducting aerial spy missions against it. Pyongyang warns it will punish the U.S. if more take place.

In a statement broadcast by the government-run Korean Central News Agency today (Sunday), the North Korean Air Force Command says a foreign reconnaissance plane (RC-135) flew over its territorial waters last Tuesday, Thursday and Saturday.

The air force says the alleged spying missions are - in the words of the command - "openly crying out for a pre-emptive attack."

Washington has yet to comment on the accusation, or say whether such flights took place.

North Korea shot down a U.S. spy plane in 1969, killing all 31 Americans aboard. (미국의 소리)

 

*정찰기[偵察機, reconnaissance plane]

공중에서 각종의 정찰·수색·사격의 관측 등을 주목적으로 항행하는 군용기의 총칭.

정찰기는 공중사진, 레이더, 레이더 사진 등을 이용해 적의 이동상태·집결·활동·병력, 우군 폭격기의 폭격효과, 항행하는 비행기, 함선의 위치나 수량 등과 같은 군사적인 정보는 물론, 산업시설·교통·지형 등 각종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한다. 정찰기가 등장하게 된 시기는 군용기가 실용화될 당시부터인데, 오늘날에는 전시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유용하게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기종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찰기의 종류에는 전술정찰기, 전략정찰기, 초계기, 공중 레이더 경계기, 군사용 기상관측기 등이 있다. 전술정찰기는 가장 초기에 등장한 정찰기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정찰기는 모두 이 기종에 해당되며, 제1선 전투에 필요한 적정 탐지를 주임무로 한다. 이 정찰기는 전투기의 장비를 변경한 것이 많다. 최근에 개발된 전술정찰기로는 미국의 RF-4C와 러시아 연방의 YAK-26 망그로브 등이 있는데, RF-4C는 F-4C 팬텀기의 성능에 비행경로의 양측 지형을 레이더 화면으로 포착해서 필름에 수록하는 측방감시 레이더와 야간정찰용의 적외선탐지장치 및 파노라마식 카메라를 장치했으며, YAK-26 망그로브도 비슷한 성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략정찰기는 대개 전략폭격기의 장비를 변경하여 만들었으며, 적 본토의 깊숙한 후방에 위치하고 있는 표적을 정찰하는 데에 주로 사용된다. 최신의 전략정찰기로는 2만4,000m 이상의 고도를, 시속 마하 3 이상의 속도로 비행하면서 1시간에 26만㎢ 면적의 지역을 사진촬영할 수 있는 미국의 SR-71 등이 있다. 초계기는 대잠수함 수색과 공격을 주임무로 하며, 공중 레이더 경계기는 공중에 체공하면서 적기 또는 미사일 등의 내습을 조기에 탐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정찰기는 단순히 사진기에만 의존했던 과거와는 달리, 고도로 정밀한 광학기계 및 전자장치 등을 이용한 뛰어난 정보 수집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찰기의 특징으로는 무장의 장착이 적고, 항속(航續) 시간이 길며, 적기의 공격으로부터 도주하기 위해 고속비행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상 촬영시에 일정 고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안정성이 높다는 것 등이다.

 

미국 정찰기가 북한을 날아다니다 격추되는 경우가 있었다던데
 
1969년 4월 15일에 미국 해군의 정찰기 EC-121이 청진 동남쪽 해상에서 북한의 지대공 미사일을 맞고 격추된 적이 있었습니다...
탑승자 31명 전원이 사망했죠...
그리고 1981년 8월 26일에는 SR71(혹은 RC135라는 설도 있지만 SR71쪽이 유력합니다)가 휴전선 서부전선 상공에서 북한의 SAM2 미사일에 요격당했지만 추락하지는 않았습니다...

 

미 EC-121정찰기 피격

1·21사태와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등 북한의 일련의 도발로 한반도에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 아래 한·미 연합군은 강력한 대북 경고 차원에서 실전을 방불케 한 대규모 공수(空輸) 공격훈련(포커스 레티나)을 전개했다. 그러나 미군의 막강한 전력을 과시한 지 한 달도 채 안돼 `하늘의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졌다.

미 해군 EC-121 정찰기가 1969년 4월15일 오후 2시쯤 청진 남동쪽 152㎞ 상공에서 북한 미그기 2대에 피격돼 추락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워닝 스타(warning star·경고의 별)라는 애칭을 가진 이 정찰기는 승무원 31명을 태우고 이날 오전 7시 정찰임무를 띠고 일본 아스키 해군기지를 이륙한 지 7시간 만에 사고지점에서 연락이 끊겼다.

북한은 이 사건 발생 후 평양방송을 통해 북한 영공을 침범한 미군 정찰기 1대를 추격, 격추했다고 발표했다. 미 국방부는 이에 맞서 “EC-121기는 북한 영공을 침범하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이 항공기는 항상 공해 상공에 있었기 때문에 북한은 이를 위협하거나 방해할 권리가 없으며 더구나 격추행위는 말도 안된다”고 반격했다.

EC-121 정찰기 피격 사건은 출범한 지 넉 달 밖에 안된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 첫 번째 외교적 시련을 안겨주었다. 닉슨 대통령은 사건 당일 헨리 키신저 안보담당 보좌관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깨어나 국가안보회의를 소집, 대응책을 협의했다. 당시 미 의회 내에서는 핵무기 사용을 포함,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우리 정부 또한 1년 전에 나포된 미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호의 승무원 80여 명이 귀환한 지 넉 달 만에 터진 `하늘의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한 미국의 대응 방안과 사건 처리과정을 예의 주시했다.

나포 사건과 달리 정찰기 피격 사건의 경우 승무원 31명의 생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무엇인가 터질 듯한 긴박한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판문점에서 공산 측 요청으로 제290차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열린 군사정전위 회의가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자 닉슨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과 주한미군 수호를 위해 정찰비행을 재개하고 무장엄호를 명령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런 조처는 도발에 대한 중간조처이고 미국의 최종태도는 미국의 항의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달려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은 이어 EC-121기 피격 뒤에 편성한 71기동함대를 증강, 동해의 정찰비행 보호임무를 맡김으로써 강력한 무력시위를 벌였다.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주축으로 40척의 함정으로 편성된 71기동함대는 동해에 진입, 원산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닉슨 대통령은 이같은 무력시위 경고조처를 취한 후 북한이 또다시 미군 정찰기를 공격할 경우 아무 경고 없이 철저한 보복조처를 명령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실제로 EC-121기 사건 후 닉슨 대통령은 북한을 즉각 응징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했다.

당시 미국의 유력지 뉴욕 타임스는 닉슨 대통령이 북한의 군사목표 두 곳을 선정, 이를 강타할 계획을 세우는 한편 미국 국민들에게 북한에 대한 보복조처를 설명하는 연설문까지 준비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응징조처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신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닉슨과 그의 참모들이 북한을 보복 공습하는 것이 미국 국민으로 하여금 베트남전을 확전으로 이끈 1964년의 통킹 만 사건 이후 월맹에 가해진 보복공습과 동일시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취소했다고 분석했다.

그로부터 석 달쯤 후에 닉슨 대통령은 미국의 대(對)아시아 외교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예고하는 괌 독트린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미국이 다시는 아시아 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였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