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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 김용순 사망과 김정일 체제의 미래

CIA Bear 허관(許灌) 2006. 4. 9. 15:49
[秘話] 金容淳 사망과 金正日 체제의 미래
 
● 한국을 대혼란으로 몰아넣은 對南공작의 지휘자
● 1994년 金日成 사망 후 金正日 옹립에 결정적 역할
● 활달하고 수완 좋고 金正日의 여동생과 친해
● 黃長燁 제거 꾀하던 중 탈출 사건 발생
● 제주도 工作을 주목해야


李 明 山 북한 전문가

金容淳은 어떤 사람이었나
<金容淳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
 북한 중앙방송은 지난 10월27일, 조선노동당 對南담당비서 金容淳(김용순)이 10월26일 오전 5시에 향년 69세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지난 6월16일 발생한 교통사고로 장기간 입원해 있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북한 노동당 對南담당비서로 모든 對南 활동과 전략을 총지휘했으며, 5개의 對南공작기구를 통솔했을 뿐만 아니라 그중의 가장 중요한 통일전선부의 부장을 겸직했고 亞太평화위원회 위원장의 자리에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그가 북한의 권력서열 30위에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金日成 사망 후 金正日의 최측근자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1934년에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한 金容淳은 김일성大 법학부 국제관계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大에 유학했다. 1961년 1월에 강원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1969년 6월에는 원산市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1970년에는 駐이집트 대사로 임명되어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에는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1974년에는 민주법률가협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80년 10월 노동당 6차 전당대회에서 중앙당 국제부 부부장이 되었다. 1984년 2월, 당의 국제부 요원들도 외교일꾼이므로 사교춤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간부들과 춤판을 벌였다가 黨 조직부의 비판을 받고 해임되었다. 1년 6개월간 평남 덕천 탄광에서 「혁명화 교양」이란 명목으로 중노동을 하다가 金日成의 딸 김경희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나 1985년 8월에 黨 국제부에 복직했다. 1988년 12월에는 당 국제부 부장으로 승진했다. 1990년 5월에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발탁되고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되었다.
 
  1990년 9월에는 日北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에서 조선노동당과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의 3당 공동선언을 이끌어 낸 북한 측 주역을 했으며, 1992년 1월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아놀드 캔터 국무부 차관과 美北 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1992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이 되었고, 1992년 12월에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면서 1991년 5월에 許錟(허담)이 사망해 공석으로 있던 노동당 對南담당비서가 되었다. 1993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94년 6월에는 金泳三·金日成 남북 頂上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으로 남한의 통일부총리 李洪九(이홍구)와 만났다.
 
 
  黃長燁, 金容淳과의 갈등 중 脫北
 
  金容淳은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술 잘 마시는 사교적 인물이며 성격도 원만하고 친절하여 대인관계에서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 私생활에서는 金正日과 손발이 척척 맞는 패거리였고, 기쁨조 파티에는 거의 빠지는 일이 없는 단골손님이었다. 金正日과 술자리를 같이하는 사람들 중에 음주의 최강자를 뽑으라면 張性澤(장성택), 金容淳, 계응태, 김기남 등이 있으나 춤과 노래에는 아무도 金容淳을 따를 자가 없었다.
 
  공무에서도 金正日의 비위를 아주 말 맞추는 金容淳을 간부들 사이에서는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그를 「아첨꾼」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黃長燁(황장엽)과 金容淳은 11세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둘 다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이며, 黨의 국제담당비서와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직을 지내 일종의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학자풍의 黃長燁은 金容淳을 버릇없고 건방진 사람으로 취급했고, 金容淳은 黃長燁을 거만하고 융통성 없는 늙은이로 생각했다. 金容淳은 체질적으로 바람기가 있으며 숱한 염문을 퍼뜨린 사람이다. 金正日의 여동생 김경희와 남편 張性澤 사이에 오랫동안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이혼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金容淳은 김경희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지냈으며 그 사실을 알게 된 黃長燁은 金日成에게 고하여 金容淳을 질책하고 근신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黃長燁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金容淳과 김경희는 黃長燁에게 애를 먹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워낙 깔끔하고 빈틈이 없는 黃長燁에게는 걸고 넘어질 약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4년 7월8일 金日成이 사망하자 黃長燁은 자기를 신임하던 金日成이 없는 북한은 공허했고 金正日의 통치 스타일과 북한의 비참한 현실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외감을 느낀 黃長燁은 주체사상 창달과 전파에 전념하기로 하고 노력하던 중 모스크바 주체사상 강연회에 가서 심혈을 기울인 토론과 강연에서 많은 교수, 학자, 학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위대한 주체사상 학자로 추앙을 받았다.
 
  이 사실을 파악한 金容淳은 김경희와 합세하여 金正日에게 黃長燁을 거세할 것을 건의하였다. 金正日은 『주체사상은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가 제창한 철학이며 통치이론이지 어째서 黃長燁의 학설이 될 수 있는가. 黃長燁은 일개 학자로서 우리 아버지의 철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위대한 수령을 모독했으며 그분의 명예를 가로챈 반역자이다』면서 黃長燁을 비난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숙청하기 위해 더 결정적인 약점을 노리고 있을 때 黃長燁은 위기감을 느껴 남한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1997년 2월12일 그 결심을 결행하였다.
 
 
  金正日, 후계자가 된 뒤 간부들 숙청
 
  지구상에서 가장 권력투쟁이 치열한 곳은 北韓이다. 소련의 앞잡이인 가짜 金日成이 북한에 들어와 진짜 金日成 노릇을 하기 위해 그의 항일투쟁사를 허위날조하고 자기의 1人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연안파·소련파·갑산파 등을 反黨종파로 몰아 숙청했다. 그 아들 金正日도 권력 세습에 반대하는 수많은 간부들을 죽이고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고 숙청했다. 金正日은 1974년 2월 黨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黨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고 金日成의 후계자로 黨의 공식 인정을 받은 후에도 항상 불안해했으며, 자기 앞에 「넘어야 할 큰 산」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늘 경계하며 살았다.
 
  그중에 세습반대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 간 고급간부들은 1975년 9월 정치국 후보위원 유장식, 1977년 10월 부주석 김동규, 1982년 1월 국가보위부 부장 김병하와 부총리 김경연, 1986년 2월 부총리 홍성룡, 1988년 12월 내각총리 이근모 등이며, 아버지 金日成의 두터운 신임과 특별한 보호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위협적인 존재는 제일 먼저 이복동생인 김평일이었으며 그 다음은 南一과 오진우 등이었다.
 
  金正日은 공식 후계자가 되고부터 「당 중앙」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북한 노동당의 全權을 장악했고 金日成은 외국의 국가원수나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정도의 업무에만 표면에 나타났다.
 
  이때부터 호위사령부가 개편되고 제1총국은 金日成 담당 호위업무를, 제2총국은 金正日 담당 호위업무를 취급했는데 제2총국 대원들은 복장, 급식 등 모든 대우가 제1총국 대원들보다 월등하게 좋았으며 밖에 나가서 제1총국 대원들은 제2총국 대원들에게 얻어맞고 다녔다고 한다.
 
  그 후로 金正日은 金日成이 사망할 때까지 金日成의 집무실이나 사저의 전화를 도청했고 金日成의 동정을 일일이 파악하고 간섭했으며, 그 도가 지나쳐서 한때는 金日成이 아들에게 권력세습한 것을 후회한 일도 있다고 한다.
 
 
  金容淳이 「金正日 반대」 바람 차단에 공로
 
  1994년 7월25일 평양에서 열기로 예정된 남북 頂上회담을 金正日과 군부가 반대했고 南北통일은 오로지 전쟁이나 혁명적 방법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해, 金日成은 북한의 어려운 경제를 살리기 위해 남한과의 경제교류를 역점으로 하는 협상전략을 짜고 있었다고 한다.
 
  金日成은 그가 평소에 인민들에게 약속한 대로 1995년에는 최소한 통일의 기틀을 다지는 해로 정하고 서울을 답방하여 「남조선 인민들이 위대한 金日成 동지를 환영하는」 환상 속에 젖어 있었다. 자기의 협상전략을 아들 金正日과 군부에 설득하고 金泳三 대통령과의 대담을 성공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향산(묘향산) 휴양소에서 黨과 국가 주요 간부들과 여러 날 동안 밤낮으로 토의하다가 과로로 1994년 7월8일 목욕탕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평양에 즉시 연락해 헬리콥터 두 대로 의료진이 출동했으나 그때 마침 바람이 세게 불고 기상이 험악해 도착이 상당히 지연되었고 金日成은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남한에서 일부 전문가들이 그 당시의 상황을 분석하여 父子간에 남북 頂上회담에 대한 합의가 없이 金日成이 일방적으로 강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들이 기술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전혀 근거 없는 소리다.
 
  그때 휴양소에 같이 있었던 후처 김성애와 비엔나에 있는 딸 김경진의 국제전화를 모 기관에서 포착했는데, 평양과 유럽 각지와의 국제전화는 평양-모스크바 간은 통신위성으로 중계되고, 모스크바로부터 다른 나라까지는 유선으로 중계된다. 통화 내용을 분석하면 위에서 언급한 사실 외에 다른 의혹을 제기할 아무 단서가 없다.
 
  金日成 사망 후 金正日이 평소에 예견했던 대로 이복동생 김평일이 「넘어야 할 산」으로 접근했다. 黨 정치국 일부에서는 후계자로 성격이 표독하고 오만불손한 金正日보다는 인간성도 원만하고 외모도 준수한 김평일을 옹립하자는 주장이 있었고, 특히 중앙당에서 金正日 거부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자 그런 바람을 적극적으로 차단한 사람이 金容淳이다. 金正日은 당황하여 재빨리 군부와 손을 잡고 黨의 세력을 제압할 만한 先軍정치의 구도를 시작했다. 金日成 사망 후 金正日과 金容淳이 밀착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金正日, 교통사고로 南一 부총리 암살
 
  1954년生인 이복동생 김평일은 아버지를 닮아서 미남이고 준수하며 성품도 원만하고 숙부 金英柱(김영주)를 비롯하여 혁명 1세대 원로들의 호감을 샀으며 심심치 않게 권력후계자로 거론되었다. 그들은 김평일을 보면 金日成의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다고 아주 좋아했다.
 
  김평일이 평양 남산고급중학교(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의 성적은 같은 학교 출신인 형 金正日보다 도덕, 일반 학과, 예술, 체육 등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높았다. 그래서 그 학교 졸업생들과 교사들은 언제나 김평일을 金正日보다 높이 평가하고 金日成 후계자로 믿고 있었다.
 
  이 사실을 감지한 金正日은 남산학교의 모든 학사기록을 소멸하기 위해 하수인을 시켜서 그 학교를 폭파한 일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다. 金正日이 후계자로 黨의 공식 인정을 받은 이후에도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 김평일, 김영일, 김경진을 「곁가지」라고 하며 철저히 고립시키고 국내에서의 권력기반 구축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 늘 해외로 내몰았다.
 
  김평일은 현재 駐폴란드 대사로 있으면서 숨을 죽이고 보이지 않는 많은 눈의 감시를 받으며 살고 있다. 金正日의 살생부 첫 페이지에는 南一과 오진우도 끼어 있었다. 南一은 金日成보다 두 살 아래인 1914년생으로 타슈켄트 사범대를 나와 소련군 장교로 임관되고 1942년에는 육군 대위가 되었다.
 
  1945년에 스탈린의 밀명을 받고 金日成을 돕기 위해 평양에 왔다. 건국 초기에 외무상을 지냈고 1953년 휴전협정에서 인민군 대장으로 북한 측을 대표하여 휴전협정에 조인한 사람이다. 그는 그 후 黨 정치국 위원, 부수상 등 요직을 거쳐 1972년에는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도 金正日의 권력승계를 강력히 반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으나 그가 소련의 시민권자인 이중 국적 때문에 모스크바를 인식하여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1976년 3월 초 南一 부총리가 평남 안주에 있는 석유화학공장 건설을 시찰하기 위하여 갔을 때 그 시골 비포장도로 좁은 길에 공장건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대형 트럭이 갑자기 나타나 南一이 탄 승용차를 받아 南一이 卽死(즉사), 1976년 3월7일 노동신문에 「남일 부총리 뜻밖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짧은 기사를 남기고 金正日의 살생부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졌다.
 
  이 사건 바로 직후 金正日은 당시 절대추종자의 한 사람인 인민군 총정치국장 이용무 대장에게 지시하여 인민무력부 총참모장 오진우를 감시하며 비리를 적발하여 『南一과 같은 운명을 맞게 하자』고 했다. 金正日이 오진우를 특별히 경계한 이유는 그가 아버지 金日成의 신임을 받는 혁명 1세대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며, 자신을 늘 어린애 취급했기 때문에 항상 자기 앞에 「거대한 장애물」로 여겼다.
 
  더욱 그를 불안하게 한 것은 오진우가 김성애와 그녀의 동생 김성갑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그를 김평일의 강력한 배경으로 생각한 것이다.
 
 
  오진우 제거를 위해 여러 차례 압박
 
  金正日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존중해야 하므로 혁명 1세대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어 고민했다. 1976년 5월 오진우가 인민무력부장으로 승진하자 金正日은 이용무를 앞세워 오진우 압박공작을 서둘렀다.
 
  이용무는 총정치국장의 권한으로 全軍의 막사와 사무실에 金日成 사진 바로 옆에 金正日의 사진을 걸게 하였고, 金正日 관계 출판물을 대대적으로 보급해 全軍이 학습하게 했다. 그 功(공)으로 이용무는 1974년 6월에 당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기고만장한 이용무가 군부 내에서 월권 행동을 많이 하자 오진우의 진언으로 金日成이 그를 해직했다. 바로 후에 金正日은 또 박충국을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밀어 넣었다. 박충국은 金正日과 張性澤의 술친구였다. 박충국은 오진우 집무실에 도청장치를 했다가 발각되어 해직되었으나 곧 쿠바 특명전권대사로 나갔다.
 
  오진우와의 싸움은 만만치 않았다. 1976년 6월 黨 정치위원회에서 혁명 1세대들이 金正日의 정책을 공개비판했고 黨의 질서와 규율을 파괴하고 자신들을 일선에서 퇴진시키려는 그의 공략을 비판했다. 이때 비판을 주도한 김동규는 결국 정치범 수용소에 갔고, 金正日은 자기의 권력기반 구축작업을 계속했다.
 
  그는 자기를 추종하는 젊은 세대에서 60만 명을 새로 입당시켰다. 그는 1979년에 오진우의 동의 없이 48세의 젊은 오극렬을 인민군 총참모장의 자리에 앉혔다. 오극렬은 金正日의 만경대 혁명유자녀학원 동기이며 혁명 2세대를 대표하는 군인이다. 그는 공군 출신으로 소련 공군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영어·러시아어·중국어에 능하며 탁월한 군사이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매사를 상관인 오진우보다 金正日에게 먼저 보고했다. 그래서 金正日과 오진우 사이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오진우 교통사고로 장기간 외국에서 치료
 
  金正日은 오진우와의 싸움에서 전략을 바꿨다. 『머지 않아 오극렬이 오진우를 밀어내고 인민무력부장이 될 것』이란 풍문을 군부 내에 유포시켜 오진우로 하여금 극도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퇴근해 집에 와 보니까 부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마당에 전에 없던 차 두 대를 보여 주었다. 광택이 번쩍번쩍 나는 미제 포드와 독일제 벤츠 450이었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 후에 金正日은 오진우에게 호화주택을 지어 주었고 기쁨조 비밀파티에 꼬박꼬박 초대했다. 이렇게 해서 오진우는 「어린 목동이 고삐를 끌고 가는 한 마리의 늙은 소」가 됐다. 기쁨조 파티에서는 오진우가 가장 나이 많은 손님이며 여러 사람이 권하는 술에 항상 만취하여 집에 돌아갔다.
 
  1987년 봄, 밤늦게까지 비밀파티에서 술을 마셔 만취한 오진우가 직접 차를 몰고 집에 가다가 가로등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새벽에 그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옮겼으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두개골이 깨지고 여러 대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국내에서 치료가 가능한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서 金日成은 자기 전용기로 오진우를 마취상태로 모스크바에 보냈다. 모스크바에서는 東獨으로 보내어 수개월간 치료 끝에 그를 회복시켰다.
 
  만취한 71세의 노인에게 차를 직접 운전하게 하고 밤길에 경호원도 없이 집에 보냈다는 일은 이해가 안 된다. 이 교통사고의 저변에 그를 해치기 위한 고의성이 있었는지는 따질 길이 없으며 그때의 사정을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86년부터 金正日은 자기 측근들에게 별도로 벤츠 280형 한 대씩을 지급하였다. 차의 번호판은 일률적으로 동일하였다. 자기 생일을 의미하는 216-9999, 후에 216-5555로 바뀌었다. 그러나 꼭 지켜야 하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金正日이 사적으로 모이라고 부를 때는 반드시 이 차를 이용할 것, 그리고 이 차는 반드시 본인이 직접 운전할 것이며 다른 사람은 아무도 태우지 말 것 등이다. 아마도 그들의 난잡하고 방종한 사생활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오진우가 없는 동안 金正日은 오극렬에게 인민무력부장과 총정치국장 직무대행을 하게 하였다. 이 짧은 기간에 오극렬의 리더십이 인민군內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작전 지휘관들의 사기가 충천하였으며 모두 그가 계속해서 인민무력부장이 되기를 원했다. 그의 주장은 군대는 전투지휘관이 지휘해야지 정치군관이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재기불능으로 믿었던 오진우가 목발을 짚고 평양에 돌아왔을 때 인민군 내부의 상황이 많이 변해 있음을 발견하고 오극렬의 실책을 金日成에게 보고했다. 그는 黨의 권위와 정책을 무시하고 정치군관들의 활동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金正日의 의도와는 달리 오진우가 다시 인민무력부장의 자리에 복귀하고 오극렬은 한직인 민방위사령관으로 좌천됐다.
 
 
  승진인사로 군부 장악과 對南공작 강화
 
  1991년 12월24일 金正日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되고, 1992년 4월21일에 원수 계급을 받아 그는 명실 공히 군부를 완전 장악하게 된다. 金正日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지 4개월 만인 1992년 4월에 그는 창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장성급 승진 인사를 단행했다. 차수 오진우를 원수로, 최광을 포함한 8명이 대장에서 차수로, 상장에서 대장으로 16명, 중장에서 상장으로 96명, 대좌에서 소장으로 524명이나 진급했다.
 
  金正日은 만경대 구역에 거대한 장성급전용 병원을 건설했고 국경일에는 장성들을 대동강 구역 능라 초대소에 초청하여 대연회를 베풀었으며, 군단장급 이상 군 간부들에게는 金日成의 이름이 새겨진 은색 「백두산 권총」과 고급 혁대 등을 주고 무력통일을 위한 軍의 단결과 金正日에 대한 충성을 맹세케 했다.
 
  그는 아버지를 의식해 혁명 1세대 오진우가 1995년 2월25일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상징적으로 인민무력부장의 직위에 두고 그 외의 군부 실세는 모두 金正日 심복으로 포진했다. 공군 사령관 조명록, 해군 사령관 김일철, 인민무력부 부부장 이병욱, 총정치국 부국장 이봉원 등이 대표적인 예다. 후에 김일철은 인민무력상이 되고 조명록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총정치국장이 된다. 金日成 사망 후에 金正日은 先軍정치로 자기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고 자기와 軍 지도부와의 관계를 옹벽으로 둘러싼 운명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그는 조국통일의 주력은 역시 군대라고 생각하고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할 뿐 아니라 그와 병행해서 對南공작을 강화해 남한內 혁명역량(좌익 親北세력)을 구축하고 때가 오면 자기가 통일대통령이 된다는 꿈을 누누이 軍 지휘관들 앞에서 피력했다. 그래서 그는 군부를 장악한 다음에 對南공작 활동을 본격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2년 12월에 그동안 공석으로 있던 노동당 對南사업담당비서에 金容淳을 발탁했다. 중앙당 산하에는 4개의 방대한 對南공작기구가 있으며 金容淳은 담당비서일 뿐만 아니라 그중에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통일전선부(약칭 통전부)를 직접 지휘했다.
 
  金正日은 對南공작을 위해 39호실의 비자금 중에서 막대한 돈을 풀고 남한 내부와 해외교포들을 포섭하여 공작금을 주고 親北활동과 反美운동을 전개하도록 통일전선부의 기본 활동지침을 직접 지시한 바도 있다. 남한에서 소위 해외 민주인사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는 일본이나 유럽에서 평양에서 파송된 통일전선부 간부들과 수시로 은밀히 만나 공작지령과 공작금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의 對南공작기구의 편성과 활동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인민무력성 정찰국=군사정보 수집 분석. 남한 후방교란을 위한 非정규전 작전지휘통제. 서해 교전과 같은 제한목적의 작전. 미군·한국군·일본 자위대를 상대로 하는 통신첩보 수집분석(아래 4개 기구는 노동당 산하에 있음).
 
  ▲35호실=전에는 대외정보 조사부로 불렀음. 對南 및 국제정세 정보수집. 아웅산 폭파와 대한항공 858기 폭파와 같은 테러공작. 요인 암살·납치 공작 담당.
 
  ▲작전부=노동당 산하의 모든 對南공작기구의 공작원과 간첩들의 교육훈련. 金正日 정치군사대학 운영 및 對南공작 전투원 양성(金賢姬도 이곳에서 교육받음). 동해안 침투 잠수함 등 공작 장비 제작 및 각종 기술지원. 남파 공작원들과의 무전교신과 공작지령.
 
  ▲대외연락부=전에는 사회문화부라고 불렀음. 對南공작원 파송 및 지하당 구축(이선실, 김낙중 간첩사건도 이에 속함)과 함께 남한의 정계, 언론계, 노동단체, 예술단체, 학생단체, 교육기관, 교수, 학자들 사이에 침투하여 치밀하게 親北·反美·反戰평화 활동을 전개하며 배후에서 조종한다.
 
  ▲통일전선부=약칭 통전부, 북한의 모든 對南 선전, 적십자 회담, 남북 이산가족문제, 체육관계, 경제교류, 금강산 관광문제, 남북 고위급 회담, 장관급 회담, 심지어는 2000년 6월 남북 頂上회담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남북 교류와 회담은 통전부의 전략과 기획에 따라 진행된다.
 
  고려연방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남한에 간첩을 파송하고 국내 모든 분야와 해외교포 사회에 침투하여 親北·反美 세력을 확보하고 공작방향을 제시하며 자금을 지원한다. 공개된 소속기관으로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범민련 등이 있으며 對南공작차원에서 사회민주당, 천도교 청우당, 조선기독교인연맹, 조선불교도연맹 같은 유령단체를 운영한다.
 
  금강산 관광사업에서 버는 돈이나 한국과 국제 종교단체에서 선교 목적으로 북한에 제공하는 돈은 모두 통전부가 흡수하여 對南공작비로 사용한다.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訪北하는 교포들이 北에 있는 가족들에게 주고 온 돈은 전액 黨이 압수하고 통전부가 對南공작비로 사용한다.
 
 
  金容淳, 對南공작에 「큰 업적」 남겨
 
  金容淳의 교통사고가 「남일型」 교통사고인지 「오진우型」 교통사고인지 아직은 미지수다. 여하간 金容淳은 金日成 死後, 金正日을 가장 잘 보필한 사람 중의 하나다. 그의 재임기간 북한의 對南공작은 건국 이래 최고로 활발했으며 성공적이었다.
 
  그가 1998년에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을 성사시키는 데 주역을 했으며, 2000년 6월 남북 頂上회담 때 유일하게 金正日을 배석했다고 해서 그가 남북 화해와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공로가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여 그의 죽음에 조의를 표명한 사람들이 몇이 있었으나 그는 대한민국을 파괴하는 데 功이 큰 사람이다.
 
  金容淳의 지휘下에서 북한의 對南공작이 활발했던 것에 반하여 그 기간에 한국정부의 반공태세는 건국 이래 의도적으로 가장 허술했으며 과거에는 숨어서 親北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표면에 나와 공개적으로 활개를 치고 있다.
 
  저들은 통전부의 對南공작 지침 그대로 활동하고 있다. 북한의 對南공작기구들은 자금이나 과학기술 면에서 뒤떨어지지만 지하조직 구축과 세뇌공작, 허위 선전선동, 인간 첩보 수집은 세계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다.
 
  국가관이 뚜렷하지 못하며 무지하고 판단력이 없는 사람들은 저들의 선전공세에 넘어가기 아주 쉽다. 저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참으로 듣기에 좋다. 민주, 인권, 평화, 양심, 진보, 개혁, 화합.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의 개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과 전혀 다르다.
 
  저들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는 엄청난 모순이 내포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自由민주주의 체제와 풍요로운 우리 경제의 모태인 市場경제 체제를 파괴하기 위한 독소들이 숨어 있다. 저들이 부르짖는 구호들을 북한에 쏟아 부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나 저들은 북한의 부패, 독재, 지옥 같은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이 없다.
 
  盧泰愚 前 대통령이 UN 총회에서 「북한은 선의의 동반자」라고 했을 때, 그리고 金泳三 前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민족은 이념에 우선한다』고 했을 때 아찔했다. 그러다가 金大中 정권 동안에 대한민국은 완전히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한 북한 통일전선부의 전략에 춤을 같이 추는 나라가 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깊이 뿌리를 내린 북한 간첩과 親北세력이 약 500만 명이라고 한다.
 
  2000년 6월 남북 頂上회담에서 채택한 공동선언문 중에 「민족 대단결」은 우리 7000만 민족의 대단결이 아니라 북한 金正日 독재집단과 남한의 親北세력과의 대단결이다. 지금도 저들이 反美시위를 할 때에는 반드시 6·15 선언 이행을 촉구하는 구호가 따라다닌다. 우리나라가 이 정도까지 파괴된 배후에는 金容淳이 지휘한 북한 통일전선부의 맹렬한 활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이 알아야 한다.
 
 
  金容淳, 왜 제주도에 다녀갔을까
 
  제주도는 지금 우리나라 영토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安保취약 지역이다. 1945년 광복 후 한국에서 최초로 左翼 폭동이 일어난 곳이 제주도다. UN 감시下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실시한 1948년 5월10일 총선을 방해하려고 金日成 지령과 남로당 합작으로 제주도 좌익세력을 동원하여 4ㆍ3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 후 북한은 끊임없이 남한에서의 사회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폭동, 반란, 민중봉기 같은 것을 획책하였고 麗水·順天 반란사건, 지리산 공비활동 등으로 우리 사회를 괴롭혔다.
 
  그중에서도 북한의 무장공비가 직접 투입한 사건으로 1960년대 全北지역에 침투했던 283군부대 무장 게릴라, 1968년 1월21일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던 특공대(일명 김신조 부대)와 그해 11월2일 울진·삼척에 침투해 강원도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였던 124군부대의 끔찍한 만행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거니와 북한은 기회만 있으면 민중봉기 아니면 무력에 의한 남한 전복을 꿈꾸고 있었다.
 
  1970~1980년대에는 17공수여단을 남한 후방에 투입하는 게릴라 작전을 계획하고 남한에서 서울, 마산, 광주 등 동시다발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행동 개시할 만전의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남한에서의 민중봉기가 불발로 끝나고 좌익세력의 작전태세가 미비하여 포기한 일이 있었다.
 
  지금 남한에서는 정계·언론계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親北·좌익들이 공개적으로 설치는 시대가 되었지만 북한은 지금도 무력남침의 칼을 계속 갈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은 저들의 후방 교란 게릴라 작전이다. 이와 같은 작전을 계획하고 지휘하는 곳은 인민무력성 총참모부 정찰국이다.
 
  위에 언급한 17공수여단은 후에 특수 8군단으로 개편됐고 현재 평양 북방에서 맹훈련 중에 있다. 저들은 남한에 남북적화통일을 위한 「결정적 사태」가 조성되면 남한 후방에 투입되어 게릴라 작전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돼 있다. 부대원들은 남한 국군의 복장과 계급장을 달고 있고 국군의 편제무기를 가지고 훈련하고 있다. 그런데 저들의 작전지역에 제주도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다.
 
  2000년 9월에 북한의 對南공작 총책인 金容淳과 인민무력상 김일철이 제주도에 다녀갔으며 다음해 5월에 네 척의 북한 商船들이 유유하게 제주도 북쪽 우리 영해를 통과했는데도 한국 정부나 우리 해군은 아무런 대응조치도 없이 어물쩍하고 있었으며, 2002년 6월29일 서해교전이 발생했는데 이 일련의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래도 심상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金容淳과 김일철이 제주도 현지답사를 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 후의 사건들은 우리 국군의 대응태세와 속도를 시험했고 남한 국민의 반응을 탐색한 것이 틀림이 없다고 느꼈다. 그뿐인가 우리 국회는 4·3 사건 진상규명과 진압작전 중에 희생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금까지 주자는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盧武鉉 대통령은 지난 10월31일 정부 차원에서 제주도민들에게 공식사과하면서 4·3 사건의 진압에 관하여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 『냉전과 민족분단이 몰고 온 비극』이라는 표현을 썼고 좌익세력에 의한 민족의 피해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었다. 그는 또 제주도를 행정, 경제, 조세 면에서 특별자치구역으로 만들겠다는 자기의 구상을 발표했다. 행정적으로 독립시킨 다음에 국가안보 차원에서는 제주도를 어떻게 할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북한의 對南공작, 제주도, 現 정부의 안보정책, 어떤 수학공식이나 화학방정식으로 풀어야 답이 나올지 좀더 연구해 보아야 할 문제다. 과거에 숱한 북한 간첩들이 제주도를 통해 남한에 침투했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金正日, 최후까지 對南 전략 변화없을 듯
 
  원래 敵의 작전이나 전략에 대해서 전망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며 글로 발표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내가 敵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지 敵이 알게 되면』 敵이 작전을 바꾸기 때문이다. 金容淳이 사망했다고 해서 북한의 對南공작과 전략에 변화가 올 것 같지는 않다. 누가 그 후임이 되건 상관없다. 통전부內에는 유능한 실무자들이 너무 많다.
 
  우선 표면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 예를 들어 남북 총리급 회담 때 北측 연형묵을 수행했던 안병수(본명 안경호)는 박사학위 보유자로, 남북 대화와 협상에서 북한 측 베테랑이며 2000년 6월 남북 頂上회담 때 두뇌역할을 한 송호경도 외교관 생활을 거쳐 국제 감각에 뛰어난 북한內 최고 엘리트 중의 하나다.
 
  現 국제정세下에서 북한이 직면한 시급한 문제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對南공작에서는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할 여력이 없다. 核문제는 金正日이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으나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며, 체제보장을 전제로 요구하지만 金正日의 체제보장은 미국이 응해 준다고 해서 되고 안 되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核문제가 아니더라도 지금 全세계가 북한의 인권, 종교자유, 기아 문제 때문에 여론이 비등하기 때문에 미국뿐 아니라 국제적인 압박은 날이 갈수록 가중될 것이다.
 
  美 의회가 탈북자들에게 난민지위를 인정하는 법안을 곧 통과시킬 것이며, 여러 NGO 단체들의 북한의 인권 문제와 종교자유 문제를 겨냥한 대공세가 예상되는데 그때 북한 내부에 엄청난 혼란이 조성될 것이며 金正日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가고 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까지 金正日의 對南공작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며 남한內 親北세력 확장에 주력하고 反美反戰 운동을 확산하며 남한 정부와의 대화 채널을 유지하여 경제적 실리를 계속 추구할 것이다. 남한의 경제협력은 金正日이 권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상상도 못 한 남한의 발전 목격
 
  얼마 전 북한의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과 金正日의 매제 張性澤을 포함한 14명의 경제 시찰단이 남한의 경제실태와 중요 산업시설을 보고 갔다.
 
  그들은 『머리가 핑핑 돕니다』할 정도로 상상도 못 했던 남한의 발전을 목격했다. 북한은 현재 金正日과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고, 對南공작과 전쟁을 통한 한반도 통일의 꿈을 아직도 꾸고 있다. 黨과 내각의 테크노크라트들은 경제제도의 혁신과 개방을 통한 活路를 신봉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모기 목소리에 불과하며 그 목소리가 크면 1990년대 중반 무역부 부부장 김용문처럼 체제 도전자로 몰려 처형당한다.
 
  북한에서 두드러진 경제개방주의자로 전직 부총리 김달현이 있었으나 장기간 공직에서 사라졌다가 얼마 전에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많은 북한 전문가들이 『북한은 곧 경제문제와 체제문제 때문에 망한다. 참다참다 못해 인민봉기나 군부의 쿠데타 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망하기 전에 최후의 발악으로 對南 무력도발을 할지도 모른다』고 공통된 말을 하지만, 『북한이 언제쯤 망하느냐』, 『경제가 그렇게 나쁜데 과연 對南 군사도발을 할 능력이 있느냐』고 질문하면 아무도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