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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일성 전(前)주석의 전처(前妻) 김정숙과 후처(後妻) 김성애 주요 자료(사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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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일성 전(前)주석의 전처(前妻) 김정숙과 후처(後妻) 김성애 주요 자료(사진)

CIA Bear 허관(許灌) 2006. 4. 9. 15:28

1.김일성 전(前) 주석의 전처(前妻) 김정숙(金貞淑)

-김일성 김정숙 부부와 그의 아들 김정일 사진-

 

김정숙은 1917년 12월 24일 함북 회령 출신으로 김일성보다 5년 연하의 여성으로 김일성과 유사한 배경을 가진 빨치산이었다 그녀는 어렸을때 부친을 찾으러 어머니와 함께 만주(滿州)로 들어갔다가 모친 사망 후 고아가 되었으며 1935년 16세때 빨치산부대에 입대하여 밥 짓고 빨래하는 일을 주로 맡아했다 일설에 따르면 김일성과 같이 활동했던 빨치산대원이 김정숙과 맺어지도록 김일성의 <등을 떼밀었다>는 얘기도 있다.

김정숙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명사수로서 김일성의 생명을 구해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글을 전혀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자였고 여성다운 부드러움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북항일연합군의 무력투쟁이 내리막길을 걸던 1940년 말경 김일성과 김정숙은 결혼했고 다음해 3월쯤 김일성을 따라 소련으로 도피, 소련군 훈련소 생활(소련군사학교 훈련 수료)과 소련군 극동사령부 88여단에 가입했다 김정숙의 인생변화는 소련군사학교 훈련과정 수료이다 소련군사학교 출신들이 한인부대(韓人部隊)로 소련군 극동사령부 휘하부대로 사할린, 일본북방 섬 일부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 38도선 이북지역을 점령하는 특수부대 지위와 역할을 했다.

 1942년 2월 16일 하바로프스크 바트코스예 마을에서 쌍둥이 아들 유라(김정일)와 딸 슈라를 낳았다 유아시절 김정일은 어머니의 정상적인 보살핌을 받을 수가 없었다 소련 영내에 있던 기혼여성 빨치산들은 아이들을 탁아소에 맡기도록 되어 있었다 때문에 김정일은 태어난지 40여일만에 탁아소에 맡겨졌다고 한다 김정숙은 군사훈련 중 탁아소에 젖을 먹으러 가곤 했다 그러나 당시 김정숙은 젖이 잘 나오지 않아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던 다른 여인이 대신 김정일에게 젖을 물려주곤 했다고 전해진다 슈라는 3-4세때 김일성 전(前) 주석이 소련군 극동사령부 88여단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하바로프스크 바트코예 마을 우물에 빠져 죽었다.

 아직도 그 곳에 슈라의 무덤이 있다.

 김일성과 김정숙은 극동사령부 예하 제1전선 군사령부 상장 스티코프 상장 휘하 소련군 25만명과 함께 북한으로 입성했으며 그 군대에 의하여 소련군정이 실시되었다.

김정숙은 해방 후 평양에서 장녀 김경희를 낳았다 그녀는 북한에 남아 있는 유일한 누이 동생이며 정성택이라는 당 간부와 결혼하여 김정일을 보좌하고 있다.

김정숙은 김정일 나이 여덟살때 1949년 9월 22일 네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모자가 함께 사망했다 

(1)1917년 12월 24일생(김일성과 5년 연하)---사망

(2)출생지: 함북 회령

(3)학력--무학(無學)과 소련군사학교 졸업

(4)가족관계--김일성과 사이 1남 2녀 출생 그리고 1녀 사망

 -김정일(金正日,김유라):북한 군 통수권자 최고사령관 국방위원장

 -김슈라(딸--사망)

 -김경희(金敬姬, 딸):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그리고 당 경공업부장

(5)경력

-1935년 16세때 동북항일연합군(소련군극동사령부 휘하 부대) 빨치산 취사병으로 활동

-1940년 말경 김일성과 결혼 -1941년 3월경 소련군사학교 수료와 소련군극동사령부 88특별여단 가입 활동

-1945년 8월 15일 전후 소련군 25만명과 함께 북한지역 점령군으로 입북(入北)

-1949년 9월 22일 네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모자 함께 사망.

-소련정보기관(Cheka 체카,KGB)은 노동자. 농민. 진보적 지식인. 학생등 공산주의 운동가 위주로 창설했으며 나중에는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가 중심으로 조직화했다 체카(Cheka)는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 사회주의자들 중에 소련공산당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한 사람들로 구성된 소련공산당 전위대이다 이들은 초기에는 공산당 지령에 따라 공장 파업이나 사보타주의 그리고 선전전, 무장봉기등을 주도했으며 나중에는 민족해방 인민전쟁(NLPDR)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공산당 정부 수립이후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농민파업이나 노동자 투쟁을 억압하고 제거하는데 앞장 서며 그리고 지주와 자본가 그리고 외세들과 투쟁을 했다 김일성과 김정숙은 소련공산당 지시를 받은 만주지역 조선 공산당 출신으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하면서 빨치산투쟁을 하다가 1940년대 소련군 극동사령부 소련군사학교 교육훈련 수료으로 소련군이 되었고 그 이후 2차대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한반도에 소련군과 함께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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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김정숙, 김정일의 가족사진

 

 

정장차림의 김정숙 사진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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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텔레비전은 9일 연속편집물 '수령결사옹위로 빛나는 친위전사의 한생' 프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이자 김일성주석의 부인인 김정숙을 소개하면서 정장차림의 모습을 방영했다. 김정숙의 정장차림 사진은 처음 공개된 것이다.

/북한/조선중앙TV촬영/2005.4.9(서울=연합뉴스)

 

북한이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공개한 미공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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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김일성 주석 서거 10주년을 맞아 김일성 주적의 업적을 홍보하려고 자체 제작한 `내나라'(www.kcckp.net) 사이트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가족사진이 게시돼 있다. 사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사진 왼쪽)이 3~4세일때 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어머니 김정숙 여사가 함께 찍은 모습.//민족뉴스부 기사 참조/ 2004.7.20 (서울=연합뉴스)

 

<김일성 "후계자 기초 김정숙이 쌓아">


(서울=연합뉴스) 함보현 기자 = "김정일 동무를 후계자로 키워낸 기초는 김정숙이 쌓아 놓은 것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 김정숙의 출생 88돌(12.24)을 기념한 '정론'에서 고(故) 김일성 주석의 이 같은 발언을 소개했다.

정론에 의하면 김 주석은 생전 "동무들은 내가 김정일 동무를 후계자로 키워냈다고 하지만 사실 그 기초는 김정숙이 쌓아놓은 것"이라며 "그가 혁명 앞에 남긴 가장 큰 공로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김정숙(1917-1949)은 함경북도 회령시 오산덕에서 태어나 1931년 9월 반(半)군사조직인 소년선봉대에 입대, 항일투쟁에 가담한 뒤 1935년 9월 안투(安圖)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했다.

이후 1937년 1월 공산당에 입당하고 이듬해부터 김 주석의 지하공작 임무를 수행했으며 김정일 위원장이 7세 때인 1949년 사망했다.(조선대백과사전.1996)

정론도 "최고사령관(김 위원장) 동지가 사랑하는 어머님과 함께 계신 나날은 불과 일곱 해밖에 되지 않는다"며 "(김정숙은) 한 생에 비기면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짧은 나날에 장군님을 수령님의 혁명 위업의 믿음직한 계승자로 키우기 위해 바쳤다"고 강조했다.

정론은 시종일관 김정숙을 '조국의 어머니'로 칭하면서 그의 항일투쟁과 사격술을 소개, "이런 위대한 어머니가 아니고서야 어찌 눈보라 지동(지진)치는 천고의 밀림 속에서, 총 폭탄 튀는 전장에서 하늘땅이 태를 쳐도 끄떡없는 영장의 담력과 기상을 지닌 백두산의 아들로 우리 장군님을 키우실 수 있었으랴"라고 주장했다.

정론은 이어 "백두의 천출명장으로 우리 장군님을 받들어 올리는 것은 김정숙 어머님의 제일 염원이었다"며 "(김정숙은) 세상을 떠나기 3시간 전에도 아드님(김 위원장)의 손을 꼭 잡고 수령님의 혁명위업을 끝까지 계승.완성해나가야 한다는 당부를 남겼다"고 전했다.

한편 북한은 김정숙을 김 주석, 김 위원장과 함께 '백두산 3대장군'으로 부르고 있다.

hanarmdri@yna.co.kr

(끝)
"김정숙은 전설적 명사수"<북 신문>

(서울=연합뉴스) 정준영 기자ㅣ자 자= "탄알이 몇 발 없어졌는가를 보고 적이 얼마나 소멸됐는가를 확인했다는 얘기도 있다."
북한 신문이 김일성 주석의 부인인 김정숙의 전설적 사격술을 놓고 한 말이다.
20일 북한 내각기관지인 민주조선 최근호(12.3)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자기 부인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인 김정숙(1917-1949)을 최고 명사수로 꼽았다.
김 주석은 1952년 4월 3일 사격장에서 잇따라 명중탄을 날린 뒤 "장군님의 사격술은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것"이라며 박수를 치던 수행원들에게 "사격할 때마다 김정숙 동무를 생각합니다. 아마 사격에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
실제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도 김정숙은 1944년 `조선인민혁명군' 사격대회에 출전해 당당히 우승, 소형권총을 상으로 받았다고 나와 있다.
그의 사격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18살이던 1935년 9월 18일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면서부터. 김정숙은 이날 총 한 자루를 받고 "이 총 한 자루를 백 자루로 알고 잡으며 이 총알 한 발을 백 발로 알고 원수를 쏠 것"이라고 다짐했다는 것.
민주조선은 "입대 후 첫 전투인 처창즈 유격구 방위전투 때 다리를 건너오는 적 장교를 단방에 쏘아눕혀 전세를 급변시키고 내도산 전투에서는 쏘면 쏘는 대로 적을 거꾸러뜨렸다"고 주장했다.
또 "무송현성 전투 때는 `싸창'(모젤권총)으로 순식간에 십여명의 적병을 쓰러뜨렸고 홍두산 전투 때는 김정숙 동지의 탄띠에서 탄알이 몇 발 없어졌는가를 보고 적들이 얼마나 소멸됐는가를 확인했다는 얘기도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훈련중에 날아든 장끼를 다른 대원들이 못 맞추자 스키를 타고 추격하면서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족족 날아가던 꿩이 돌처럼 떨어졌다는 얘기도 소개됐다.
민주조선은 "그는 위대한 수령님을 보위하는 친위전사로서 언제나 만점밖에 모르신 명실공히 전설적 명사수였다"고 말했다.
prince@yonhapnews.co.kr
(끝)

 

여성주의 시선으로 감상하기
 김정일 어머니 김정숙 이미지
구원
 
그림1. <1940년 대사하치기전투에서 김일성을 목숨으로 보위하는 김정숙>
▲ 그림1. <1940년 대사하치기전투에서 김일성을 목숨으로 보위하는 김정숙>

오늘부터 몇 번의 연재를 통하여 북한 사회에서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 시각이미지를 통하여 어떻게 표상되고 현할 수 있는지, 이 표상된 이미지를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감상해 보고 싶다. 특별히 김정숙를 소재로한 미술작품술 그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김정숙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의 어머니이다. 김정숙의 이미지에 주목한 것은 북한에서 그녀가 최고의 이상적 여성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에서는 ‘김정숙 따라 배우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며, 북한의  초등학교 및 중등학교에서는 김정숙의 일대기가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김정숙의 이미지를 통해, 북한한한한에서 이상적인 여성상이 어떠한 문화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전개되어온 것인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김정숙 이미지의 대두와 전개

김정숙의 이미지는, 김일성의 두 번째 부인 김성애 이미지의 몰락과 거의 동시에 등장한다. 북한은 1960년대부터 제3세계 지도자들의 북한방문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런데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 제3세계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국가 지도자들과 달리 부인과 함께 방문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김성애는 김일성의 부인으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 김성애는 ‘김일성 수상의 부인’으로 표기되었다. 1971년에 김성애가 여성동맹 중앙위원장이 되자, <로동신문>에 그녀의 동정이 실리기 시작하였다. 호칭도 ‘부인’에서 ‘김성애동지’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김성애의 권력은 김정일이 1974년 후계자로 공인되면서 급격히 변화한다. 1974년 3월부터 언론에 김성애의 동정이 보도되지 않게 되었다. 보도가 되는 경우라도 ‘김성애’라는 이름을 잃고 다시 ‘부인’으로서 언급되었다. 김성애가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는 시기는 김정숙 이미지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또한 이 시기는 그의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장악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김정숙은 1917년 12월 24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7살 때인 1935년 9월 항일유격대에 가입하여, 18살 때인 1936년부터 김일성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녀는 항일유격투쟁의 와중이었던 1940년 23살의 나이로 김일성과 결혼하고, 2년 뒤 1942년 김정일을 낳았으며, 한국전쟁 직전이었던 1949년 9월 22일 31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김정숙의 생애는 항일무장투쟁과 조국해방이라는 한국사의 격동기에 위치하였다.

그림2. <신파지구 조국광복회조직 책임자들의
회의를 지도하는 김정숙>

김정일의 위상은 1967년 5월에 열렸던 당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급격히 상승한다. 이 회의 이후 김정일은 선전 선동의 주요 수단인 문학예술 부문과 출판 보도 부문에 대해 지도하기 시작했다. 1969년부터 문학예술인들은 김정일을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부르기 시작한다. 1970년 9월, 김정일이 당 문학예술부 부부장에 임명된 무렵부터 미술계에서는 김정숙을 소재로 한 작품이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놀랍게도 김정숙은 ‘김일성의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혁명투사 김정숙’으로서 등장하고 있다.

1974년 2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서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였다. 공교롭게도 김정숙에 대한 미술작품, 가요 등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대회에서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공식적인 지위를 획득하는데, ‘김정숙 따라 배우기’ 운동이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펼쳐지는 것도 이 때부터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김정숙이 31살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녀의 이미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상적 여성으로서의 상징이 더욱 더 뚜렷해져왔음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김정숙의 영향력이 오랜시간 지속적으로, 그리고 조금씩 더 증폭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던 김일성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녀의 아들, 김정일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김정일에 의한 김정숙 이미지는 그러나, 시기에 따라 조금씩 상이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김일성시대 김정숙 이미지(1967~1994년) : 김일성의 친위전사

김정숙의 이미지는, 김정숙과 최고권력자와의 관계에서 규정되었다. 김일성시대 김정숙 이미지는, 목숨을 바쳐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전사의 이미지가 강하였다.

이 시기 김정숙은, 혁명투사뿐만 아니라 여성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어린이들의 교육활동에 힘쓴 교육자로서도 강조되었다. 그러나 김정일 어머니로서 김정숙의 이미지는 그리 강조되지 않았다. 가장 강조된 이미지는 목숨을 바쳐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전사의 이미지였다.

1980년대 북한에서 ‘혁명의 어머니 김정숙동지 따라 배우기’ 운동을 통해 여성에게 요구하는 덕목은 첫째,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 둘째, 혁명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과 혁명가적 자세, 셋째, 공산주의적 덕성(혁명적 동지애, 혁명적 의리, 겸손함과 소박성), 넷째, 군중들을 혁명투쟁에 참여하게 하는 사업방법이었다.

주목할 것은 ‘김정숙 따라 배우기’의 으뜸가는 목적이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 함양이라는 것이다.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언급되는 김정숙 일화가 1940년의 ‘대사하치기 전투’이다(그림1). 이 전투는 김정숙이 일본군의 포위와 저격으로부터 몸을 바쳐 김일성을 보위하였다고 해서 유명한 전투이다.

그림3 <1939년 청봉 밀영에서 김일성의 혁명사상을
옹호하기 위하여 견결히 투쟁하는 김정숙>

한편 김정숙이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지하공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일화도 많이 언급되곤 하였다(그림2). 뿐만 아니라 김정숙은 정치사상적으로도 김일성의 충실한 전사였음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1939년 청봉 밀영(hidden camp)의 빨치산 부대 내에서 김일성의 노선을 따르지 않은 사람에 맞서 사상투쟁을 벌려 승리하는 과정도 강조되었다(그림3).

김정숙의 이미지에 있어서 김일성에 대한 충성은, 여성의 남성에 대한 충성으로 등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성차별적 해석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충성이 특별히 여성에게만 강조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성차별적 해석의 한계는 분명하다고 본다.

오히려, 김정숙의 이미지에 있어서 성적 내포는 김일성에 대해 충실한 김정숙의 이미지보다는, 김일성에 대해 충성을 하기 위해 다른 동료들과 동등하게 활동하는 전사로서의 이미지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이러한 김정숙의 이미지는 매우 흥미롭다. 김정숙은 남성과 똑같이 총을 들고 싸우고, 지하 공작을 수행하며, 남성과 논쟁하여 승리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김정숙 이미지에서 김일성과의 관계만 제거하면 남녀가 평등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김정숙은 항일혁명투사였으며, 여성해방운동의 지도자였다. 해방 후 여성들의 정치조직인 여성동맹을 발전시키는 사업과 잡지 <조선여성>의 창간 등 여성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김정숙은 조국의 해방과 여성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조직과 국가의 지도자에게 헌신하였다. 이러한 김정숙의 일생은 문화예술의 다양한 장르에서 창작소재로 이용되었고 그녀의 지도자에 대한 헌신성은 중점적으로 부각되었다.

김정숙은 김일성이 자신의 남편이 아닌 조국의 지도자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마찬가지로 ‘김정숙 따라 배우기’ 운동의 목표는 김정숙을 본받아 자신의 남편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 아니라, 김정숙을 본받아 조국의 지도자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다. (특히 1990년 이후에는 김정숙이 목숨을 받처 김일성의 육체와 사상을 지켜냈듯이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교육하고 있다.)

김정숙이 태어난 회령에는 ‘김정숙동지 혁명사적관(Museum of revolutionary historic site of Kim, Jongsuk)’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981년 8월에 김정숙의 이름을 딴 김정숙군(Kim, Jong Suk county)이 만들어 진 곳은 그녀가 태어난 회령이 아니라 그녀가 혁명활동을 벌이던 함경남도 신파군이었다. 이것은 북한에서 김정숙이 자연인으로서의 김정숙, 여성 김정숙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혁명가로서 김정숙이라는 이미지에 보다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상징하고 있어 흥미롭다. 

다음 시간에는 김정일시대 김정숙 이미지가 시각미술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김일성 死前, 死後 이상적인 여성 이미지의 변화는 어떠한 문화, 정치적 함의를 포함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김정숙 장례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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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북한 기록영화를 통해 방영된 김정숙 장례행렬 사진/북한/조선중앙TV촬영/2005.3.4 (서울=연합뉴스)

 

김정숙 장례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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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3월 1일 기록영화를 통해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의 장례식 사진을 방영했다. 천으로 덮힌 것이 김정숙의 관/북한/조선중앙TV촬영/2005.3.4 (서울=연합뉴스)

 

 
기본사항  
  성명   김정숙 金正淑 (별세)
  영문명   KIM,JUNG-SOOK
  생년월일   1917 (음력)
  출생지   함북
  성별  
경력  
  1932/07 -   공산주의청년동맹 가입
  1935/09 -   조선인민혁명군 입대
  1937/01 -   공산당 입당
    김정일 생모 (북한)

 

 

 

 

2.김일성 전(前) 주석의 후처(後妻) 김성애(金聖愛)

 김성애는 1924년 평남 강서군에서 농사꾼의 장녀로 태어났으며 중학교를 마치고 6.25 한국전쟁 직전 인민군에 입대하여 특무상사로 김일성 집무실 서기로 일했다 그때 1949년 첫번째 부인인 김정숙을 사별한 북한 김일성 수상을 만났다.

 젊은 시절 김성애는 얼굴이 예쁜 편이었고 머리도 좋은 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무렵 김성애는 김일성의 아이를 가진 적이 있다고 한다 이를 소리 안나게 해결해준 사람이 당시 부수상 박정애였다 박정애는 김성애를 달래 고향에 내려가 쉬도록 해준 다음 생활비를 보내 주었다 그러나 김성애는 전쟁이 끝나자 그 길로 김일성의 관저로 찾아가 보따리를 풀었다 김성애는 전처에게서 난 김정일과 김경희에게 잘 대해주었다고 한다 김성애가 상황파악에 능했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 관저에는 김일성의 장모가 되는 김성애의 어머니 고영칠도 같이 살았다 공식적으로는 김성애가 1949년 첫번째 부인인 김정숙을 사별한 김일성과 1963년경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은 김성애에게서 딸 하나, 아들 둘을 얻었다 바로 경진. 평일. 영일이다 장모 고영칠씨가 후덕한 성품이어서 김정일과 이복형제들을 어린 시절을 친형제처럼 잘 지냈다.

<청소년 시절 김정일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 평일에게 특유의 농담을 곧잘 했다 자기보다 덩치가 커서 가끔 "어이 평일이 형"하고 부르곤 했다>고 한다 김평일은 178cm 키에 80kg으로 김정일에 비해 체격이 큰 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74년 후계자를 김정일로 공인된 후 평일. 영일. 경진등을 <곁가지>로 분류하고 이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곁가지>의 발달은 김성애였다 1969년 김성애가 중앙여성동맹위원장에 오르면서 그녀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김성애는 김일성이 현지 지도차 나가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김일성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 그러다 나중에 여맹 사무실에 붙어 있던 김정숙의 사진을 모두 떼어내고 자신의 사진을 붙이기까지 했다.

그녀의 사회적 활동은 비교적 분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 주석이 외국을 방문하거나 국내에서 외국대표단을 영접할때 김성애가 김일성주석과 동행하는 경우에도 북한의 언론들은 그녀의 동정에 대해서는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이는 북한의 후계자인 김정일의 생모이자 김일성의 첫 부인인 김정숙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권부에서 <원가지-적자> <곁가지-서자>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거론된 것은 1980년대부터다 김정일이라는 이름도 1980년 10월, 정일(正一)에서 정일(正日)로 바꿨다 어머니 김정숙의 정(正)과 아버지 김일성의 일(日)자를 합성해서 직접 만든 이름이다 이는 김정일 자신이 김일성의 유일한 적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의 이복 동생들은 모두 한 일(一)자를 쓰고 있다.

(1)출생일:1924생(김일성과 12년 연하)--생존

(2)출생지: 평남 강서군

(3)학력--중학교 졸업

(3)가족관계--김일성과 사이에는 2남 1녀 출생

-김평일(金平一, 아들):북한 주폴란드 대사(1977년 김일성종합대학교 졸업)

-김영일(아들)

-김경진(딸)

 (4)경력

1965.년 11월 여성동맹 부위원장

1970년 11월 당 중앙위원(현직)

 1971년 10월 여성동맹 위원장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9기 대의원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

1994년 7월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1998년 4월 여성동맹 위원장 해임 그리고 여성동맹위원장 천연옥 임명

 (5)주요동정

1975년 5월 김일성을 수행하여 루마니아. 알제리. 모리타니아. 불가리아등 방문

1994년 6월 김일성의 <시아누크 부부> <카터부부>의 면담시 배석

1994년 7월 김일성 추도대회(김일성광장) 참석

1997년 7월 김일성 사망 3주기 중앙추모대회 참석

김평일(金平一, 1954년 -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 폴란드대사이다. 김일성김성애의 아들로, 김정일의 이복남동생이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다.

김일성의 경호를 맡고 있었다. 후계자라고 주목받고 있었지만 김정일의 질투를 샀기 때문에, 1989년부터 유럽 연합의 대사로서 지냈고, 현재는 폴란드 대사를 맡고 있다

폴란드 주재 북한대사 김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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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 국제조직인 조선우호협회(Korean Friendship Association)사이트에 게재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이복동생 김평일 사진.

협회 폴란드 지부 관계자가 2004년 2월 북한대사관에서 진행된 김정일국방위원장 탄생 기념행사에 참석해 함께 찍었다./북한/2005.7.10 (서울=연합뉴스)

 

김평일(金平日)

 

 


  o 현 직
- 폴란드 주재 대사
o 출 생
1954. 평양
o 가족관계
김정일의 이복동생(모 김성애)
o 주요경력
1970. 남산고등중학교 졸업
1977. 8 김일성종합대학(정치경제학부) 졸업
1977. 인민무력부 군관
1978-81.8 김일성군사종합대학교
1981-83 주 유고대사관 무관
1984-88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대좌)
1988.8-9 헝가리 주재 대사(1988.9 한․헝가리 수교로 소환)
1988.12-93.12 불가리아 주재 대사
1994. 3 핀란드 주재 대사
1998. 1 폴란드 주재 대사


o주요활동

 

 

출처 : 아시아연방론
글쓴이 : CIA bear 허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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