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조총련(朝總聯)과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 주요 자료 본문

Guide Ear&Bird's Eye/일본

조총련(朝總聯)과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 주요 자료

CIA bear 허관(許灌) 2005. 6. 10. 13:05

1.조총련(朝總聯,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은 재일본 한국인 가운데 북한을 지지하는 친북 재일교포단체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조선민주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NLPDR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단체 조총련을 결성하여 반미 반일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운동으로 궁극적으로 대남적화통일과 일본 국왕제도를 부정하고 일본 공산화에 주력하고 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10월 15일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 약칭:朝聯)이 결성되었으나 김천해(金天海)를 중심으로 친북단체로 기울어졌다 조련(朝聯)이 김천해의 공산주의 노선에 따라 일본 공산당의 지도 아래 과격한 불법투쟁을 벌이자 일본정부는 폭력단체라는 이유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1950년 4월 2일 잔류조직이 모여 조선인단체협의회를 결성했는데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조국통일전선실행위원회로 고쳤다

1951년 1월 9일 이를 토대로 재일조선민주전선(在日朝鮮民主戰線, 약창:民戰)을 결성, 폭력투쟁노선을 이어갔다

1954년 8월 30일 북한의 남일(南日)이 한덕수(韓德銖)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 1955년 5월 25일 한덕수를 의장으로  북한 직속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조총련은 명목상 최고의결기관으로 전체대회가 3년마다 소집되기는 하지만 사실상 한덕수 1인 체제로 운영되어 오다가 2001년 2월 21일 한덕수 의장 사망이후 현재 의장은 서만술, 책임부의장은 허종만, 부의장은 박재로. 권순희. 오형진. 남승우. 양수종. 이기석. 고덕우등 7명이다 북한이 해외 공민조직이라고 주장하는 조총련의 역할은 통일 운동이라는 대남공작과 애국사업으로 불리는 대북경제지원 사업으로 나뉜다 여기서 대남공작을 총괄하고 있는 인물은 현직 조총련 의장 서만술이며 애국사업 책임자는 허종만이다 

행동강령에는 제일동포의 거주. 재산. 직업. 언론출판등의 권익을 옹호하고 자유를 옹호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북한노동당 일본지부나 다름없다 기본활동 목적은 일본의 좌익세력과 연계하여 일본에 남한 침략기지를 구축하는 것이고 한반도는 물론 전(全)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국 공산화 와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의 혁명)을 위한 혁명 전초기지의 역할도 맡고 있다 특히 조총련내부 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학습조(學習組)를 설치하여 충성심을 강화하고 김일성 주체사상 강좌와 통일전선 사업에 집중하여 대남적화통일을 꾀하고 있으며 1974년 4월 1일  통일사업부를 설치하고 대남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통일사업부의 임무는 민단조직의 와해. 대남적화공작 수행. 반미 반일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 인민민주주의 혁명 투쟁(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위장평화공세에 의한 통일전선전략의 효과적 수행등에 있다

 

과거의 조총련은 중앙위 산하에 48개 지방본부와 200개 지부, 18개 산하단체와 23개 사업체를 거느린 거대한 조직이었고 조총련계 학교는 한때 유치원, 초.중등학교, 대학교등 300여곳이나 되었으며 북한정부의 유혹적인 정책 말에 따라 1959년 재일 조선인 동포 10만명이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남한)의 경제성장과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그리고 국제적 지위 향상으로  조총련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다

일본 전체국민의 0.6%, 50만명이상이 재일 한국인으로 그 중에서 대한민국 국적 민단(民團) 동포가 40만명이고  10만명이 조선의 국적이다 2005년 5월 25일 창립 50주년을 맞은 조총련의 모습은 초라했다 4만 6,000여명에 이르던 조선학교 학생 수는 1만명 아래로 떨어졌고 굵직한 자금줄인 조선은행의 각 지역 조합은 파산하거나 강제합병 되고 있다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는 이들이 매년 1만여명에 이른다 한때 일본사회에서 민족혼의 상징하던 조총련 여학생들의 치마저고리는 김정일의 일본인 납치 시인 이후 일본인들에게 찢기고 오물을 뒤집어쓰는 등 폭력의 대상이 돼버렸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조총련 50주년을 맞아 보낸 메시지에서 북한의 핵개발 포기와 일본인 납치 문제가 조속히 해결돼야 북일(北日) 국교 정상화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한때 조총련에서 활동했던 교포는 총련도 결국 조국인 북한체제의 운명과 같은 길을 걷게 될것이라고 말했다    

 

조총련도 21세기 고도소비사회에서 변화돼야 할 시기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에서 진보진영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것이 올바른다 반미. 반일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NLPDR)노선 국가사회주의 침략이론을 버리고  일본 국왕제를 인정한 후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통합 사회로 나아가는 재일 한국인 동포들이 되기를 바란다 

*대학-- 조선대학교:1956년 6월 8일 설립과 운영

*신문(기관자)--조선신보:1945년 10월 26일 창간

 *방송(통신사)--조선통신사 

*가극단--금간산 가극단

(1)한덕수(韓德銖)

ㄱ.출생-1907년생(生)

ㄴ.출신-경북 경산(慶山)

ㄷ.학력--일본대(日本大) 전문부 중퇴

ㄹ.경력

1927년 7월 도일(度日-일본으로 이주) 

1945년 일본공산당 가입

1945년 가나가와현(懸) 본부 공산당 위원장

1949년 9월 조국전선 중앙위원

1951년 1월 재일조선민주전선(民戰) 중앙위원

1955년 5월 조총련 수석의장

1957년 4월 조선대학 학장

1958년 조총련 중앙상임위 의장

1959년 재일 조선인 10만명 북송 주도

1967년 11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

1972년 12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1976년 4월 노력영웅칭호

1977년 12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6기 대의원

1982년 4월 김일성훈장 서훈

1986년 11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1989년 9월 조총련 의장 유임

1990년 4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9기 대의원

1990년 8월 조국통일상 수상

1992년 5월 조총련 의장 8선(8選) 유임   

1994년 4월 26일 신병 치료차 입북(入北- 북한 방문)

1994년 4월 28일 김일성과 함께 회견

1994년 6월 7일 김일성과 면담

1994년 7월 9일 김일성 조문

1994년 7월 20일 김일성 중앙추도대회 참석

1994년 10월 10일 일본 귀국 앞서 김정일에게 충성하는 편지와 <김정일 장군님께 드리는 노래>등 2곡의 노랫말 전달

1994년 10월 16일 김일성 사망 1백일에 즈음 만수대 김일성 동상에 헌화

1994년 10월 19일 단군릉 참관

1994년 10월 22일 박성철 부주석. 김용순 당 대남 비서  전송 속에 일본으로 귀환

1994년 11월 15일 일본 사회당 서기장 구보 와타루와 일본 정치인들의 방북 문제 논의

1995년 2월 조총련 중앙위 제16기 4차회의서 김정일의 연내 당중앙 총비서 및 국가 주석직 취임시사

1995년 4월 15일 김일성 83회 생일 기념 중앙대회서 김정일에의 충성다짐(조선문화 회관)

1995년 5월 24일 조총련 결성 40주 기념 중앙대회 참석

1995년 6월 15일 조총련 제16기 5차회의 확대회의 개최 <김일성충성세력화> 다짐

1995년 7월 5일 김일성 사망 1주기행사 참석차 북한 방문

1995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2주기 중앙 추모대회 진행

1995년 7월 9일 김일성 사망 1주기 추모연회 참석

1995년 7월 14일 김일성 사망 1주기 조총련 추모단 인솔 <한덕수경공업대학> 참관

1995년 9월 8일 북한정권 수립 47주 중앙보고대회 참석

1995년 9월 17일 제17차 조총련 전체대회서 의장에 재선

1995년 9월 25일 조총련 제1부의장 이진규(李珍珪) 장례식 참석

1995년 10월 26일 조선신보 창간 50주 기념식서 대김정일(對金正日) 충성보도활동 촉구

1995년 12월 27일 김정일 새해선물 전달식 참석

1996년 1월 30일 <문예.체육일꾼모임> 개최  그리고 에술,체육 통한 조직확대 역설

1996년 2월 15일 김정일 54회 생일 맞아 대김정일(對金正日) 충성 다짐하는 "글" 전달 

1996년 2월 15일  김정일 54회 생일 기념 재일본조선인 중앙대회 개최 대(對) 김정일 충성 및 대북지원 사업 강화 다짐

1996년 6월 8일 조선대학교 창립 40주 기념보고 축사 통해 조선대학생의 <김정일의 전사화> 다짐  

1996년 6월 18일 조총련발간 대중잡지 <이어>창간축하모임 참석  

1996년 6월 23일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진행

1996년 10월 5일 증등교육실시 50주 중앙대회 참석 

1997년 1월 22일 90회 생일 맞아 김일성 훈장 서훈

1997년 5월 8일 김일성. 김정일의 교육원조비 송금 40주기념 중앙감사대회 참석

1997년 5월 17일 조총련 금강산 가극단 새회관 준공식 참석

1997년 5월 29일 김정일장군의 노래보급을 위한 총련 일꾼들의 모임 참석

1997년 6월 27일 진행된 <조선신보> 복간 45주년 기념 모임 참석 연설

1997년 7월 6일 김일성 3주기 재일 조총련 추모대표단 한덕수단장 인솔, 평양도착

1997년 7월 8일 김정일 예방과 환담 그리고 김일성 3주기 맞아 조의(弔意)

1999년 1월 1일 김정일에 신년축하문 보냄

2001년 2월 21일 오후 8시 20분 94세 나이로 사망

 

 

(2)허종만

ㄱ.출신--경남 고성

ㄴ.경력

1959년 조총련 도쿄도(東京都) 본부위원장

1986년 9월 조총련 중앙위원회 부의장

1993년  7월 조총련 중앙상임위원회 책임부의장(신설)

1994년 2월 28일 평양서 김정일과 친선담화

1994년 7월 17일 김일성 조문, 김정일에 충성다짐

1995년 3월 20일 김정일이 조총련 예술단에 베푼 목란관연회에 당비서 김기남 김용순과 함께 참석

1995년 5월 24일 조총련 결성 40주 기념 제일 조선사회과학자 <학술보도회> 연설 통해 학자들이 김정일 사상 실현 기여 강조

1995년 12월 27일 김정일 새해선물 전달식서 대(對) 김정일 충성 및 <95년의 조직강화의 해> 강조

1996년 6월 27일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 지지 일본위원회" 결성 20주 기념 모임 참석

1996년 10월 조총련 청년상공회 중앙간사회 제1기 2차 확대회의 연설 통해 대북 합영. 합작 사업 주력 강조(대북투자회)

1997년 7월 8일 김일성 3주기 재일 조총련 중앙추모대회 참석(동경 조선문화회관)

2005년  조총련 결성 50주 기념 행사때 김영남  축하 메세지 낭독

-->허종만은 대북 투자와 대북 경제송금을 주도했으며 조총련 학습조 실질적 책임자로 알려지고 있다

 -http://zine.media.daum.net/mega/h21/200506/03/hani21/v9251826.html

 

 

2001년부터 조총련을 이끌고 있는 서만술의장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조총련 조직국장과 사무총국장등 핵심라인을 거친 한덕수의 직계, 한덕수 의장 사망 후 조총련 안팎에선 대북 송금 사업을주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임이 두터운 허종만 책임부의장의 승인을 예상했으나 결과는 서만술의장의 낙점이었다

위축된 조총련의 조직을 추스르려면 성품이 부드럽고 인화에 강점이 있는 서만술의장이 적임이라고 북당국이 판단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學習組)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이 지난 2002년 북일정상회담 직전에 해산했던 비공식 조직 "힉습조"를 부활시켜 재편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조총련이 이번에 학습조를 부활시켜는 것은 자금조달과 조직강화, 그리고 대일(對日), 태평양연안 공작을 강화하려는 목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學習朝)란

ㄱ.일본 재판부에 제출된 조총련 내부 자료에 따르면 학습조는 "위대한 김일성 원수가 조직하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가 지도하는 재일조선인 김일성 김정일주의자의 혁명조직"이며 활동임무는 조국을 엄호방위하고 일본에서 주체혁명 위업을 이루는데 적극적으로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ㄴ.조총련은 학습조를 설치하여 충성심을 강화하고 김일성 김정일 주체사상 강좌와 통일전선사업에 집중하여 대남적화통일을 꾀하고 있으며 1974년 4월 1일 학습조 조직 기반으로 통일사업부를 설치하고 대남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통일사업부(학습조-통일혁명당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의 임무는 민단조직의 와해, 대남적화공작 수행, 위장평화공세에 의한 통일전선 저력의 효과적 수행, 동북아지역의 북한정부 연락선 구축(잠수함 기지구축), 무기구입과 밀매 추진, 반합법적 또는 비합법적. 합법적 기업등을 운영하면서 자금확보등에 주도하고 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 활동 자료

ㄱ.조총련 학습조는 동북아 지역 북한정부 간첩망과 반미구국전선 조직  

ㄴ.조총련 학습조는 북한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직

조총련 소속 공작요원 소위 "학습조" 3,000명 및 재일(在日) "한통련", 재미(在美) "한청련", 해외 "범민련"등  친북전위 조직 16,500명등 대남공작에 활용

ㄷ.북한 불법 수출에는 총련의 비공개조직인 "학습조"가 주도적으로 관여했다고 공안당국의 조사를 인용해 보도 또한 16일 다산케이(産經)신문은 세이신기업이 미사일 추진 연료완성에 필요한 제트 밀을 판매한 곳은 사실상 북한 인민무력부라고 보도했다

ㄹ. 조총련 학습조는 북한과 북한 노동당에 충성을 맹세하는 재일 조선인계의 신용조합에 강한 영향력 행사

반합법적 비합법적 합법적 기업 운영과 자금확보

ㅁ.1998년 한 재일동표가 조긴 아이치(朝銀 愛知)를 상대로 이 지점 부의장이 횡령한 자신의 예금 약 17억 5천만엔을 반환해달라고 청구 재판 자료

-재판 과정에 원고측은 "학습조"라는 조직이 조긴 아이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리고 이 재판 판결문을 보면 "피고(조긴 아이치)의 간부는 전부 학습조원에서 등용되었다 조긴 아이치는 금융기관으로서 본래의 업무 이외에 조총련의 활동자금이나 북한에 돈을 보내는 특수임무를 행하고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 재판에서 원고인 재일동포 기업가는 "나의 예금은 북한에 대한 송금이나 한국의 유학생 조직, 일본내 친북계 국회의원의 정치자금에 쓰였다"고 말했다 

ㅂ.1999년 여름 일본 자민당 외교부회에서 공안관계자는 학습조에 관하여 "전국에 약 1000개 조직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ㅅ.전(前) 일본 공안조사청 조사 제2부장 스가누마 고코(管沼光弘)씨는 2001년 11월 15일자 슈칸 분(週刊 文春)에 북한이 그 동안 은밀히 제3세계에 무기를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라는 돈세탁 장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ㅇ.김정일은 1999년 4월 20일 조총련 제1 부의장 서만술에게 "외유내강(外柔內剛) 방식으로 조총련을 재건하라"라고 지시했다

"외유(外柔)" 는 조총련이  우경화하지 않았느냐는 오해를 살정도로 취직센터와 노인 복지정책등 다양한 정책을 펴서 동포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방지하라는 것이었다 "내강(內剛)"은 학습조(조선노동당 일본조직-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에서 철저하게 김정일 숭배사상을 고취하라는 것이었다

ㅈ.일본근해 괴선박 격침사건--테러요원 침투를 위한 대일(對日) 한민전 공작선과 필로폰을 밀무역하는 북한 선박이었을 가능성 제기

마약과 현금등 막대한 규모의 현물을 싣고 있었다

ㅎ.북한은 2001년 7월 일본으로부터 중고어선 49척을 밀수입한 사실이 있다 

 

조총련도 대한민국과 일본 국왕제도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노선과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노선 김일성 김정일주의를 버리고 서구사회 진보진영처럼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것이 올바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