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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 선거 완패 한궈위, 소환투표로 시장직 파면 본문
지난 1월 대만 총통 선거에서 야당인 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민진당 소속 차이잉원 총통에게 완패했던 친중 성향의 한궈위(62) 가오슝 시장이 주민소환투표로 시장직을 잃게 됐다. 대만에서 선출직 공직자가 탄핵 또는 소환투표를 거쳐 파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7일 가오슝선거관리위원회 집계 결과, 전날 실시된 한 시장 소환투표는 229만여명의 유권자 가운데 42.14%가 참여해 찬성 93만9090표, 반대 2만5051표로 가결됐다. 한 시장 소환 찬성표는 2018년 11월 실시된 지방선거 당시 한 시장의 득표수(89만2545표)를 4만여표나 넘어섰다.
앞서 대만에선 2006년 민진당 출신 천수이볜 전 총통 탄핵을 비롯해 모두 13차례 선출직 공직자에 대한 탄핵 또는 주민소환투표가 이뤄졌지만, 가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만 ‘공직인원 선거 파면법’은 유권자의 25%가 투표에 참여해, 과반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1990년대 입법원 의원을 지내긴 했지만 한 시장은 2018년 지방선거 이전까지만 해도 정치적으로 무명에 가까웠다. 하지만 가오슝 시장 도전과 함께 그의 서민적인 행보가 친중 성향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일약 전국구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특히 한 시장의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국민당이 당시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단번에 국민당의 차기 주자 반열에 올랐다.
문제는 지방선거 당시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타이베이로 옮겨가지 않도록 만들 것”이라고 호언했던 그가 시장 당선 이후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점이다. 취임 직후부터 총통 선거 출마를 저울질하기 위해 타이베이를 오가던 그가 지난해 6월께 총통 선거 출마를 공식화하자, 지역 시민사회는 소환투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난 1월 선거에서 국민당은 가오슝에서 총통은 물론 입법의원 선거까지 민진당에 완패했다.
대만에서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반중 정서’도 친중 행보를 보여온 한 시장의 소환투표 가결에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다. 왕쿵이 대만 중국문화대 교수(정치학)는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에 “한 시장이 당선될 때 얻은 표보다 소환투표 찬성표가 더 많이 나올 것이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이는 ‘대만 독립’ 성향이 강한 가오슝 유권자들이 한 시장에 대한 불신임을 넘어 대만에 군사·외교적 압박을 강화하는 중국에 대한 거부감을 명확히 보여준 것”이라고 짚었다
inhwan@hani.co.kr
總統應於就職時宣誓,誓詞如左:
「余謹以至誠,向全國人民宣誓,余必遵守憲法,盡忠職務,增進人民福利,保衛國家,無負國民付託。如違誓言,願受國家嚴厲之制裁。謹誓。」 中華民國 憲法 第48條
[총통은 취임시에 반드시 선서를 해야하며, 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인민의 복리를 증진하고,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신임에 부응할 것이며, 이를 어긴다면 국가 앞에 마땅히 벌을 받을 것임을 전국의 인민 앞에 엄숙히 진실로 선서합니다." 중화민국 헌법 제48조]
"同一介中華(中國).
中華民國(中國), 中華人民共和國(中國).
中華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中華民國之主權屬於國民全體.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獨栽主義(全體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後,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民主國家)"
*資本主義 三代原則(經濟):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
*民主主義 三代原則(政治):民有、民治、民享之民主政府[民主國家]
-中國 建國者 中山 孫文 先生-
*中華民國 憲法(중화민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57658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1982년 12월 등소평 헌법과 2018년 3월 습근평헌법 같은 점, 다른 점
1.1982년 12월 등소평 헌법과 2018년 3월 습근평헌법 같은 점-인민민주주의 독재 사회주의 국가론(자국식 사회주의 국가이론)[인민의회 정부론]
PDR(인민 민주주의 혁명)은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 이론이다
순수내각책임제 형태 정부이론으로 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권력주체)로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 할 수 있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1)민선의회에 권력이 집중
(2).집행부(내각, 행정부)는 의회에 예속 종속됨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
권력이 의회에 집중 돼 있고 내각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있다. 공산주의 국가나 자국 사회주의 헌법 국가들은 공산당이나 노동당, 사회당의 1당 독재 국가체제로 당 총서기나 당 총비서가 내각 수상이나 국가주석이다
인민의회 정부론에서 국가수반(국가대표)은 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대통령)이다 국가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의례적 상징적 인물이고 실질적 권한은 수상이 해오고 있다
중국은 국가주석이 국가수반(국가대표)이고 군사위원장이 군 통수권자이며 총리(수상)는 행정부 수반이다. 등소평 헌법은 국가주석은 공산당 대표(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아닌 중국 전체 인민의 대표자(국가대표자)로서 국가주석 임기는 5년 중임제이고 총리는 의원 임기와 동일하다 군사위원장 임기는 제한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등소평 헌법은 형식상 국가를 대표하는 주석 밑에 국가권력이 유지하는 형태로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했다
습근평 헌법은 공산당의 일당 독재정부로 수평적으로 국가주석이나 군사위원장, 수상의 임기제한을 하지 않았다
인민 민주주의 독재형태를 공산당 독재로 이해하고 있다
실용주의 중국헌법은 공산당 국가가 아닌 중국 전체 인민의 정부이다
인민해방군은 공산당 당군으로 공산당 총서기가 군사위원장이 돼야 한다는 이론이 습근평 이론이며 인민해방군은 중국 전체 인민의 군대로 공산당 총서기가 아닌 다른 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등소평 이론이다 그리고 1982년 등소평 헌법은 권력이 집중한 마오 시대의 반성에서 국가주석 3선 금지를 했다 그래야 민주주의 원칙과 인민 전체 경제환경이 나아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등소평 헌법은 실용주의 노선 수정주의자라면 습근평 헌법은 마스-레닌 공산주의 노선 교조주의자이다
2.1982년 12월 등소평 헌법과 2018년 3월 습근평헌법 다른 점
(1)1982년 12월 등소평 헌법 공산당 령도 철폐와 국가주석 임기제한
제1조 ①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공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의 사회주의국가이다.
②사회주의 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제도이다. 어떠한 조직 또는 개인도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것을 금지한다.
제79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부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선거한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는 만 45세의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부주석으로 피선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부주석의 매회 임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매회 임기와 같고, 연임은 2회를 초과 할 수 없다[1982년 등소평 헌법-권력이 집중한 마오 시대의 반성에서 3선 금지]
(2)2018년 3월 습근평헌법 공산당 령도 규정와 국가주석 임기제한 철폐(연임 가능)
제1조 중화인민공화국은 로동계급이 령도하고 로농동맹에 기반을 둔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사회주의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본제도이다. 중국공산당의 령도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 어떤 조직 또는 개인이든지 사회주의제도를 파괴하지 못한다.
제79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부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선거한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 만 45세 이상의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부주석으로 선거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부주석의 매기 임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매기 임기와 같다[국가주석과 부주석 임기 제한 철폐]
中国共産党、台湾の国民党新主席に祝電出さず
台湾の野党・中国国民党の新主席に江啓臣氏が7日選出されたことに対し、中国側は政府の担当部門が報道官名義の報道文を発表するにとどめた。過去には中国共産党の総書記(国家主席)が祝電を送る慣例があり、極めて異例の対応。江氏が「一つの中国」に基づく「1992年コンセンサス(合意)」の見直しに言及したことへの不快感の表明とみられる。
中国で対台湾政策を主管する国務院(政府)台湾事務弁公室は7日夜の報道文で祝意を示さず、選挙結果に「留意している」とするにとどめた。中台は不可分とする「92年合意」を堅持し、「台湾独立」に反対するよう江氏に求めた。
台湾メディアによると、中国共産党は李登輝時代の1988年以降、国民党の主席選出時に祝電を送ってきた。同党によると7日中に祝電は届かず、8日付の自由時報は「国共の関係に異変か」と報じた。
国民党主席への祝電をめぐっては前任の呉敦義氏が選出された2017年、習近平総書記(国家主席)が呉氏の二人称に敬語表現を用いなかったことが注目された。呉氏は92年合意の堅持を主張する一方、台湾側の解釈を強調していた。
[대만 야당인 국민당의 새 주석에 장치천(江啓臣, 강계신)씨가 7일 선출된 데 대해 중국측은 정부의 담당부서 대변인 명의의 보도문을 발표하기에 그쳤다. 과거에는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 (국가 주석)이 축전을 보내 관례가 매우 이례적인 대응이다. 장치천(江啓臣, 강계신) 국민당 주석이 "하나의 중국"에 따른 "1992년 컨센서스(합의)“의 재검토를 언급한 것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으로 풀이 된다.
중국의 대대만 정책(対台湾政策)을 주관하는 국무원(정부) 대만 사무 판공실은 7일 밤 보도문에 축하의 뜻을 나타내지 않고, 선거 결과에 ‘유의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쳤다.
양안은 불가분(不可分)으로 삼는 '92년 합의(92年合意)'를 견지하고 '대만 독립'에 반대하라고 장치천(江啓臣, 강계신) 국민당 주석에게 촉구했다.
대만 언론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은 리덩후이 시대(李登輝時, 이등휘 시대)의 1988년 이후 국민당 주석 선출때에 축전을 보내왔다. 국민당에 따르면 7일 동안 축전은 닿지 않았고 8일자 자유시보는 ‘국공관계에 이변?’이라고 보도했다.
국민당 주석에 축전 둘러싸고 전임(前任) 우돈이(呉敦義, 오돈의) 전(前) 국민당 주석이 선출된 2017년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국가주석)이 우돈이(呉敦義, 오돈의) 전(前) 국민당 주석의 인칭(人称)에 경어(敬語) 표현을 사용 않았던 것이 주목되었다. 우돈이(呉敦義, 오돈의) 전(前) 국민당 주석은 ‘92년 합의’의 견지를 주장하는 한편, 대만측의 해석을 강조했다]
타이완 야당 주석에 장치천 씨 선출
타이완에서 중국에 유화적인 입장인 제1야당 국민당의 주석에 48세의 중진 의원이 선출돼, 타이완에서 중국에 대한 경계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친중' 이미지를 불식하고 당을 재건할 수 있을지가 과제입니다.
타이완의 제1야당인 국민당은 지난 1월의 총통선거에서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에 패배해 당대표격인 주석이 사임하고 지난 7일 당원을 대상으로 차기 주석을 결정하는 선거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의원에 해당하는 입법위원인 장치천 씨가 68%의 득표율로 당의 전 부주석인 하오룽빈 씨를 이겨 장치천 씨가 주석으로 선출됐습니다.
장치천 씨는 국제정치 연구자를 거쳐 입법위원이 된 3선 의원으로 당내에서는 국제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7일 밤 기자회견한 장치천 씨는 "국민당의 개혁을 이룰 자신감이 있다"며 "당 전체가 협력해 국민당을 반드시 바꿀 수 있다"고 포부를 나타냈습니다.
장치천 씨는 이번 선거에서 "타이완 주민들은 중국 공산당 당국에 의구심을 갖게 돼 관계를 재정립할 시기가 왔다"며 중국에 대한 태도를 재고하도록 촉구했습니다.
대만 제1야당 국민당 주석 48세 장치천 선출
대만 제1야당 국민당의 새 주석에 48세 장치천(江啓臣) 입법위원이 당선했다고 중앙통신 등이 8일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장치천 입법위원은 전날 타이베이에서 열린 국민당 신임주석 선거에서 하오룽빈(郝龍斌) 전 부주석을 제치고 선임됐다.
1월 총통선거와 입법위원 선거에서 국민당 대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우둔이(吳敦義) 전 주석의 후임을 뽑는 이번 투표에서 장치천은 8만4860표(득표율 68.8%)를 얻어 3만8483표(득표율 31.2%)에 그친 하오룽빈을 더블스코어 이상 압도적 차이로 물리쳤다.
장치천 신임 당주석은 1972년생으로 정치대학 외교학과 졸업 후 미국에 유학해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장치천은 마잉주(馬英九) 총통 정부 때 행정원 신문국장을 맡았고 2012년부터 3기 연속 입법위원에 당선했다.
하오룽빈은 입법위원을 역임한 당 원로로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정부 때 환경부장을 지냈고 2006~2014년 타이베이 시장, 2014년 이래 부주석으로 일했다.
장치천 신임 주석은 지난달 '92합의(共識)'에 관해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신뢰를 잃었다"며 당내에서 논의를 거쳐 수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주석 당선 후 담화에서 대중정책에는 언급하지 않은 채 "당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고 언명했다.
중국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대변인은 국민당 주석으로 장치천이 선출된 것을 환영하고 "장 주석의 지도아래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간 이미 존재하는 정치적 기초를 소중히 지켜달라"고 논평했다.
하지만 중국은 관례적으로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보내던 축전을 이번에는 생략했다.
대중융화 일변도로 나선 국민당의 대선과 총선 참패를 감안해 '친중색'을 불식하려는 속셈이 있다는 지적과 함께 장치천이 '92합의'를 개정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을 견제하려는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台湾・国民党、7日に主席補選 親中イメージ払拭が課題
台湾の野党、中国国民党の主席補選は7日、行われる。1月の総統選敗北で引責辞任した呉敦義(ご・とんぎ)氏の後任を選ぶ選挙で、ベテランと中堅の一騎打ち。いずれも総統選の敗因となった「親中色」の払拭を打ち出し若年層の支持の薄さに危機感を示すものの、主張に大差はなく決め手に欠ける。どちらが勝っても対中方針の調整が大きな課題となる。
立候補しているのは前副主席の●(=赤におおざと)龍斌(かく・りゅうひん)氏(67)と立法委員(国会議員に相当)の江啓臣(こう・けいしん)氏(47)。●(=赤におおざと)氏は台北市長も務めたベテランで、日中戦争に参加し参謀総長や行政院長(首相)を務めた●(=赤におおざと)柏村(かく・はくそん)氏(100)の長男。江氏は国際政治学者から立法委員に転じ現在3期目だ。大手テレビ局TVBSが4日に公表した世論調査で、国民党支持者の支持率は江氏38%、●(=赤におおざと)氏33%で江氏がわずかにリードしている。
●(=赤におおざと)氏は2月、台湾当局が公称する「中華民国」を中国当局が「承認」しないのであれば、中台交流の「終了を検討してもよい」と強気の対中姿勢を示した。また、「国民党はブローカー文化を打ち切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も述べ、中台の経済交流の仲介役として個人的な利益を追求する党内の風潮を批判した。
江氏も、馬英九前政権が中台関係改善の秘策とした「1992年コンセンサス(合意)」は「時代遅れで柔軟性を欠き、民衆の信頼を失っている」として、対中方針の変更を訴えた。ただ、両者ともどう変更するかは「党内で意見を集約する」と述べるだけで具体性を欠く。中国の習近平国家主席が統一圧力を強める中、中国側と新たな合意を得る見通しが立たないためだ。
このため、2月12日の討論会では、●(=赤におおざと)氏が若手の育成を、江氏が世代交代と集団指導体制への移行を訴えるなど、無難な議論に終始した。●(=赤におおざと)氏は退役軍人など伝統的な組織票を固める一方、江氏は立法委員らの支持を集めている。補選は7日、約34万人の党員投票で行われる。
[대만 야당 중국 국민당 주석 보선(補選)은 7일 열린다.
1월 총통 선거 패배로 사임한 우돈이(呉敦義, 오돈의)씨의 후임을 선택 선거에서 베테랑과 중견 맞대결이다
모두 총통선거의 패인이 된 “친중색(親中色)” 불식을 내세워 젊은층의 지지의 저조에 위기감을 나타내지만 주장에 큰 차이가 없으며 관건(關鍵, 어떤 일의 성패나 추이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나 요인)이 부족하다. 어느 쪽이 이겨도 대중국 정책의 조정이 큰 과제가 된다.
국민당 주석에 입후보 한 분은 국민당 前 부주석의 하오룽빈(龍斌, 룡빈. 67세) 입법위원(국회의원)이고, 장치천(江啓臣· 강계신, 47세)은 타이베이 시장도 지낸 베테랑으로 중일전쟁에 참가해 참모총장과 행정원장을 지낸 柏村씨(100)의 장남이다 장치천(江啓臣· 강계신, 47세)은국제정치학자에서 입법위원(국회의원) 당선 된 이후 현재 3선 의원이다
주요 방송사 TVBS가 4일 발표한 여론 조사에서 국민당 지지자의 지지율은 장치천(江啓臣· 강계신, 47세)씨는 38%이고 하오룽빈(龍斌, 룡빈. 67세)씨는 33 %에서 장치천(江啓臣· 강계신, 47세)씨가 약간 앞서고 있다.
하오룽빈(龍斌, 룡빈. 67세) 씨는 2월 대만 당국이 공칭하는 '중화민국'을 중국 당국이 "승인"하지 않는다면, 양안 교류의 "종료를 검토하고 있다"고 강경한 대중국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는 또한 "국민당은 브로커(중개인) 문화를 중단해야 한다"고 언급, 양안 경제 교류의 매개체(중개역)로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당내의 풍조를 비판했다.
장치천(江啓臣· 강계신, 47세)씨도 마잉주 전 정권(馬英九前政権)이 양안 관계 개선의 비책(秘策)으로 한 '1992년 합의'는 '구식으로 유연성이 부족하고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다‘며 대중 정책(対中方針)의 변경을 호소했다.
다만, 양자 모두 어떻게 변경하는지는 "당내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언급 하지만 구체성이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習近平国家主席)이 통일 압력을 강화하는 가운데 중국 측과 새로운 합의를 얻을 전망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2월 12일 토론회에서 하오룽빈(龍斌, 룡빈. 67세)씨는 젊은이들 육성을 내걸었고. 장치천(江啓臣· 강계신, 47세)씨는 세대교체와 집단 지도체제로의 전환을 호소하는 등 무난한 토론으로 일관했다.
하오룽빈(龍斌, 룡빈. 67세)씨는 퇴역 군인 등 전통적인 조직표를 다지는 한편, 장치천(江啓臣· 강계신, 47세)씨는 입법 위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보선은 3월 7일, 약 34만명의 당원 투표에서 열린다.]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미합중국은 공화당 출신 링컨정부의 노예폐지와 민주정부 수립 이래 민주공화국(민주국가) 형태 연방국가이다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본래 공화당은 미국식 자본주의(실용주의)와 공화 연방제를 우선시 했고 민주당은 미국식 민주주의(주, 자치정부와 의회정치)를 우선시 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공산주의 반대는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링컨의 민주국가 수립)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생존권=사회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에서는 개인의 생존권을 우선시 하는 중도 진보성향인 민주당과 개인의 자유권을 우선시 하는 중도 보수 성향인 공화당 등 두 정당이 선거정치의 중심을 이룬다.
각 정당은 폭 넓은 유권자층의 지지와 정치적으로 광범위한 이해관계자들을 모색하므로 양 정당은 일반적으로 중도적인 정책을 표방한다. 양 정당의 유권자층은 비교적 독립적인 유권자층으로 서로 중복된다.[미국 민주당은 민주국가 입장에서 자유민주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로 공존하고 있으며 미국 공화당은 민주공화제 연방국가 입장에서 자본주의자(실용주의자), 애국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자(서민 민주주의자)로 종존하고 있다]
오늘날 중도 진보냐 종도 보수냐는 정책개발에 달려 있다
평민층 지지하는 성향 정책은 진보이며 중산층 지지하는 성향 정책은 보수이다
1. 미국의 공화당
공화당(共和黨, Republican Party)은 민주당과 함께 미국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이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정치만평가 토머스 네스트가 자신의 정치만평에서 민주당을 당나귀로, 공화당을 코끼리로 표현한 이래 코끼리가 당의 상징이 되었다.
1950년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이래 1994년까지 40여년 동안 미국 의회에서 소수당으로 있었다. 1994년 중간 선거에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켰는데 이를 ‘깅그리치 혁명’이라고 부른다. 뉴트 깅그리치가 이끌었던 공화당은 40년 만에 미국 의회의 다수를 장악하는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2006년에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게 다시 역전되었다. 2010년에 치러진 중간 선거에서 티파티 운동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민주당을 누르고 미국 하원 제1정당이 되었다.
(1) 공화당의 노선
보수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우파 정당이다. 따라서 수년 동안 공화당원들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을 강력히 반대해왔으나 결국 찬성을 표명한 이후에는 다소 덜 보수적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연방 상원의원이 이끈 보수주의 개혁 운동 이후 더욱 강경하고 보수적인 성격을 갖게 되고 미국 민주당과의 정치적 대립이 더욱 격화 되었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티파티 운동이 공화당 하원선거 경선에 대거 참여하면서 더욱 보수적으로 이동하였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연방 정부의 축소, 사회 보수주의, 친 재벌 정책 등의 강경적 보수 노선을 이어가고 있다.
공화의 이념 주류는 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사회보수주의이고 비주류는 중도주의, 재정보수주의, 자유지상주의, 우익대중주의, 신보수주의, 고보수주의 등이다
정치성향은 중도우파에서 우익이다[중도 보수에서 보수이다]
(2) 공화당의 역사
공화당의 전신은 현재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토머스 제퍼슨이 이끈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친(親)앤드루 잭슨파와 반(反)앤드루 잭슨파로 분열되었다. 이후에 1828년,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반잭슨파는 연방주의자, 남부 민주공화당원, 보수주의자들을 결집하여 휘그당을 창당하였다. 휘그당은 민주당과 양대 정당으로 거듭났으나, 밀러드 필모어 이후 대통령 당선자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공화당은 1854년 캔자스 네브래스카 법이 입법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예제 찬성론자와 노예제 반대론자들 간의 타협으로 여겨지던 1820년 미주리 타협과 1850년 타협이 무효화 되어버림으로써 일어난 정치적 파국과, 이것이 일으킨 민주당과 휘그당의 분열로 창당된 반노예제를 기치로 건 정당이었다. 이런 정당이 2세기를 거치면서 보수 가치를 내건 정당으로 발달한 데에는 1896년부터 1932년까지 진행되었던 미국의 진보운동의 영향이 컸다. 이 진보운동 기간동안 공화당은 보수 정당으로 거듭났고, 민주당은 진보(리버럴)정당으로 노선이 옮겨 갔다. 이후 대공황이 오고, 뉴딜정책을 기점으로 다소 진보주의으로 옮겨갔으나 1960년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연방 상원의원이 이끈 보수주의 개혁 운동을 겪으면서 다시 강경적 보수주의로 이동하였다.
공화당은 1854년 3월 20일 휘그당과 자유토지당이 통합하여 창당한 정당이다
a.자유토지당(Free Soil Party)은 1848년에서 1852년 사이에 존속했던 미국의 정당이다. 마틴 밴 뷰런 전(前) 미국 대통령의 주도로 창당되었으며, 주로 뉴욕 일대에서 세력의 기반을 형성했다. 휘그당과 민주당의 옛 노예제 반대론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자유토지당의 주요 정책은 서부 개척지에 대한 노예제 확산의 반대였으며, 노예로부터 해방된 자유민들이 자유롭게 토지를 영유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노예제보다 더 나은 방법이라 주장하였다. 자유토지당은 1854년에 공화당으로 흡수되었다
-노예제 반대
-서민 민주주의
b.휘그당(Whig Party)은 1833년에서 1860년까지 존재했던 미국의 정당이다. 앤드루 잭슨의 정책에 반대하여 조직되었다. 왕정에 반대하는 영국 휘그당과 정치적으로 유사하다. 이 정당은 노예제와 노예제도를 둘러싼 남북의 날카로운 정치적 대립의 와중에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다가 결국 해산되었다. 미국 역사에서 1833~54년에 활동한 주요 정당이다
국가 발전 계획을 지지했지만, 점점 높아지는 지역 감정의 물결 속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휘그당이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1834년이었다.
존 퀸시 애덤스의 국민공화당은 1828, 18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잔당(미국 민주당)의 잭슨에게 참패를 당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이 두 파는 민주공화당의 분열로 생겼음). 그러나 잭슨이 제2미국은행과 싸우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연방법거부에 정면으로 대항하자 반대파들이 결집할 기회가 생겼다. 헨리 클레이는 재정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및 남부 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모아 여전히 보호관세나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국내 개량사업의 추진 같은 국민 공화당의 정책이 타당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제휴시켰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휘그당에는 1830년대 중엽에 사라진 반(反)프리메이슨당 출신의 반프리메이슨 운동가들도 합류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을 '앤드루 왕'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독재적인 행정에 반대하여 느슨한 제휴관계를 맺고 있던 집단들이 휘그당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휘그당이라는 이름은 왕의 특권에 반대하는 영국 정당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휘그당은 오로지 잭슨과 그의 정책에 대한 공통된 혐오(그리고 나중에는 공직에 대한 갈망)만으로 뭉친 휘그당은 결정적인 선거 공약을 하나도 개발하지 못했다. 1836년에 휘그당은 각각 동부와 남부 및 서부를 대표하는 3명(대니얼 웹스터, 휴 L. 화이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대통령 후보를 내세워 각 지역에 호소하는 한편, 표를 분산시켜 하원에서 결선 투표를 하려는 전략을 세웠지만 실패했다.
1840년에는 지역적인 접근 방식을 버리고 전쟁 영웅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해리슨은 '통나무집' 이미지를 앞세운 유세에서 지지자들의 지속적인 선거 운동을 바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1840년에 휘그당은 백악관과 의회를 장악한 뒤 미국의 가장 유력한 정당이 될 준비를 갖추고 헨리 클레이의 국가주의적 계획안을 법제화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해리슨은 취임한 지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죽었고, 그의 후임자인 부통령 존 타일러는 미국은행 재설립을 비롯한 휘그당의 주요입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존 타일러는 당을 탈당하였다.
1844년에 휘그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클레이는 국민들에게 퍼져 있던 팽창주의의 인기를 과소평가하고 텍사스 병합에 반대했기 때문에 선거에서 제임스 포크에게 패배했다. 1840년대말에 이르자 '양심적인'(노예제에 반대하는) 휘그당원과 '면화'(노예제에 찬성하는) 휘그당원이라는 파벌이 나타나면서 휘그당의 결속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 색인 : 면화 휘그당원). 1848년에 휘그당은 다시 전쟁영웅인 재커리 테일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노예제에 대한 남북 갈등에서 헨리 클레이가 제안하고 밀러드 필모어(1850년에 테일러가 죽자 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승계)가 서명하여 입법화된 '1850년의 타협'은 양심적인 휘그당원들을 당에서 완전히 소외시켰다.
휘그당은 다시 전직 장군에게 관심을 돌려 1852년에 윈필드 스콧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북부와 남부가 노예문제를 둘러싸고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에 '미국 헌법과 연방에 대한 변함없는 애착'이라는 휘그당의 슬로건은 더이상 전국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남부의 많은 휘그당원들은 주권(州權)을 주장하는 민주당(주권 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으며, 스콧이 얻은 선거인은 고작 42명뿐이었다. 1854년까지 대다수의 북부 휘그당원들은 새로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합류했다. 당이 존속하는 동안 휘그당을 계속 지지한 지역은 남부의 주 가운데 연방 탈퇴보다는 타협을 택한 경계주들뿐이었고, 휘그당을 계속 지지한 계층은 지역 갈등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기를 거부한 보수주의자들뿐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휘그당원들은 대부분 1850년대 후반에 국수주의적인 노우 낫씽당(不知黨)에 들어갔고, 1860년에 정당들이 남북으로 분열 된 뒤에는 입헌연방당을 지원했다.
-경제적 민족주의
-사회보수주의
-보호 무역
-산업화
2. 미국의 민주당
민주당(民主黨, Democratic Party)은 공화당과 함께 미국의 양대 정당이다. 2009년 1월 21일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행정부)의 지도 아래 상원에서 최소 58석, 하원 257석으로 입법부에서 다수당(2007년 당시 기준)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주지사도 28곳으로 모두 과반 이상을 점하고 있었으나, 2010년 중간 선거에서 여당 사상 최악으로 참패하여 주지사는 20명, 상원 의석은 53명, 하원 의석은 193명으로 줄었다. 2019년 현재 상원 의석은 45명(원내에서는 무소속 2명과의 연합으로 47석) 하원 의석은 235석이며 당의 상징은 당나귀이다.
(1) 민주당의 노선
평균적으로 중도좌익적 사회자유주의 입장을 취하는 정당이다.
미국 민주당은 빅텐트 정당이기 때문에 중도우파 성향의 온건 보수 정치인부터 사회주의 좌익 성향인 정치인들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주류는 주로 사회자유주의(리버럴)이다.
수 십 년 동안 민주당원들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을 찬성해왔으며, 공화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주의적·민주주의적으로 여겨진다. 뉴딜정책 이후 공화당 내에서도 진보적인 인사가 증가하여 양당의 이념적 차이가 줄었다. 그러나 1960년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연방 상원의원이 이끈 보수주의 개혁 운동으로 공화당이 강경한 보수주의로 성향이 바뀌면서 미국 공화당과의 정치적 대립이 더욱 격화 되었다. 일례로 빌 클린턴은 재벌들의 세금을 인상했고, 로널드 레이건은 재벌들의 세금을 인하했다. 유권자들에 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양당 간에 뚜렷한 차이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50%로 의견이 양분된 반면 2004년에는 양당의 정책이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한 비율이 76%가 되어 1972년의 46%에 비해 크게 늘었다. 1930년대 이후로 민주당은 연방 정부의 확대, 사회자유주의, 친 서민 정책 등의 유연한 진보주의 노선을 이어갔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미국 친기업 성향이나 친기득권 성향을 많이 보여서 많은 미국 백인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중산층에게 불만이 쌓였다는 논란이 짙었다. 동성애, 임신 중절 찬성 등, 보수주의적인 공화당에 비해 상당히 진보주의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민주당의 이념 주류는 현대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이고 비주류는 중도주의, 보수주의, 좌익대중주의, 진보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이다
정치성향은 중도 좌우파에서 좌익이다[중도 보수,진보에서 진보이다]
분파
사회자유주의 분파
다수 분파이다. 대부분의 당원들은 민주당 주류의 사회자유주의적 철학을 따른다.
진보주의 분파
대표적인 인물로 엘리자베스 워런, 키스 엘리슨, 데니스 쿠시니치가 있다.
보수주의 분파
조 맨친, 지미 카터와 존 F. 케네디가 있다. 오늘날 청견민주에 의해 표현된다.
중도주의 분파
보통은 신민주연합에 의해 대표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빌 클린턴, 전 위원장 데비 와셔만 슐츠가 있다.
민주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분파
규모가 크지 않고 극소수파에 속했으나, 2016년 대선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가 잠시 활동하며 지지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2) 민주당의 역사
미국이 건국하는 무렵인 1790년대에 반연방파 토머스 제퍼슨이 창당한 공화주의자당(Republican Party)이 당의 전신이다. 당명은 점차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으로 바뀌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던 제퍼슨 공화파는 친 앤드루 잭슨파와 반 앤드루 잭슨파로 분열되었다. 이후 1828년 대통령에 당선된 앤드루 잭슨 이후, 반 잭슨파는 민주공화당을 대거 탈당하여 과거 연방주의당 지지자, 민주공화당내 보수주의자, 반잭슨파를 결집해 지금의 공화당의 전신인 휘그당을 창당하였고, 친잭슨파는 당에 잔류해 당명을 지금의 당명으로 바꾸었다.
1801년부터 집권했으며 남북전쟁 발발 직전인 1860년, 북부 민주당원을 중심으로 한 북부 민주당과, 남부 민주당원을 중심으로 한 남부 민주당으로 분열되었다. 전체적으로 민주당이 분열되어서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반노예주의를 표방한 공화당 소속 연방하원의원인 에이브러햄 링컨에 패배하였다. 이후 내전이 일어나자 당은 내홍을 겪으며, 이후 공화당에 비해 약세를 보인다. 그러나 대공황을 계기로 20년간 민주당이 연속 집권하였다.
1932년 대공황 와중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통해 공황을 극복코자 했고, 강력한 복지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로 1920-1950년대에는 미국내 소득 격차가 크게 줄었다. 부유층의 소득이 감소하고, 중산층의 실질 소득이 증가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이러한 변화는 정치적인 변화에 큰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뉴딜정책이후 부유층의 세금은 급증하였고, 소득세 상한은 1950년대 중반에 91퍼센트에 달했다. 기업 이익에 대한 평균 연방세는 1929년에는 14퍼센트였으나, 1955년에는 45퍼센트에 달했다. 상속세 상한은 77퍼센트에 달했다. 1929년에 국부의 20퍼센트를 소유했던 상위 0.1퍼센트는 1950년대에는 10퍼센트 정도를 소유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공화당에 진보적인 정치인이 늘어나 대화합이 가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노동력의 부족으로 임금이 상승하였고, 높은 임금은 전후에도 지속되었다. 민주당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전후호황으로 미국의 경제는 발전하였다. 1960년대가 되자 미국에서는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연방 상원의원이 이끈 보수주의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그가 주도한 보수주의 개혁 운동은 도시 소요사태를 이용해 진보주의자들을 논리로 공격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종차별을 옹호하였으며 공화당 내의 진보적인 인사를 축출하였다. 그 결과 공화당은 매우 강경하고 보수적으로 되고, 민주당과 공화당은 더욱 대립이 격화되었다.
대공황 이후 민주당은 대개 의회의 다수당이었다. 민주당은 1994년 이래 의회에서 소수당이 되었으나, 2006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상원과 하원에서 공화당을 제치고 모두 다수당이 되었으나 2008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집권 이후 실시된 중간선거에서 집권당으로서 사상 최대의 패배를 당하면서 하원 다수당 지위를 공화당에게 넘겨주게 되고 상원 다수당 지위를 가까스로 유지하게 된다.
(3)미국 공화당과 미국 민주당 노선
세계 국가들 중에서 가장 민주화. 자유화. 개방화된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사회와 세계각국 정당 구조를 연구하다가 보면 미국 공화당과 미국 민주당 노선이 일반적으로 일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a.미국 공화당 노선---자본주의 혁명론(반공산주의)
(a)자본주의 3대월칙--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
모든 개인에게 사유재산 인정
모든 개인에게 영리추구(이윤추구) 부여
모든 개인에게 자유시장경쟁원리(자유경쟁) 부여
(b)사회적 시장경제주의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원칙으로 하고 그기에 사회적 정의 통제적인 경제제도를 가미하는 형태이며 궁극적으로 자유무역, 자유시장원칙이다
(c)농지소작제도나 노예제 그리고 신분제 금지--자유주의 지향
(d).소비자의 보호
(e)노동자 농민 그리고 약한 자 여성. 아동. 노인등 국가적 보호--생존권 중시
민주적 제도를 일시 보류하더라도 경제적 평등과 빈곤에서 해방..
신분제와 노예제도 철폐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고도의 소비사회로 지향
b.미국 민주당 노선---민주주의 혁명론(반전체주의 반독재주의)
(a)민주적 기본질서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그때 그때의 다수의 의사와 자유.평등에 의한 국민의 자기결정을 토대로 법치국가적 통치질서이다
전체주의나 국가사회주의. 독재정부 그리고 강제노역제등을 부정한다
(b)법치주의와 사법부 독립
(c)국민주권주의---대한민국 주권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다
(d)복수정당제도 및 의회민주제 보장
(e)기본권 보장주의
(f)국제평화주의
(g)주정부와 지방자치제 실시
c.미국 공화당 노선과 미국 민주당 노선 주요 정책
(a)미국 공화당 노선 주요 정책
ㄱ.노예제나 귀족신분제도 폐지---모든 인간에게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 부여
ㄴ.공산주의 공동생산 공동분배 제도 철폐와 자유.평등.행복추구권등 자유무역주의 표방
모든 인간에게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 부여
(ㄱ)소비자의 보호나 권리보장
(ㄴ)국가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획경제 철폐
국가나 어떠한 제3자 힘 있는자도 개인의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을 침해할 수 없다
(ㄷ)연좌제 폐지--만민(萬民)은 평등하다
(ㄹ)재산권 보장--재산권 행사의 의무(재산권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
(ㅁ)주거, 직업선택의 자유 보장
ㄷ.봉건주의 토지신분제도 폐지나 철폐운동
모든 인간들에게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 보장.
(ㄱ)농지소작제도 금지
(ㄴ)지주제도 폐지
ㄹ.연방제나 연합정부 구성 지지-->유엔이나 세계단일공화국 수립 지지
ㅁ.일부다체제도 폐지나 철폐--모든 여성에게도 사유재산.영리추구.자유경쟁등 부여
ㅂ.자유. 평등. 행복추구권 --자유권과 행복추구권 보장주의자
ㅅ.기본이념--자유주의
--보수적 온건주의자나 보수주의자--
(b)미국 민주당 노선 주요 정책
ㄱ.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그때 그때의 다수의사와 자유 평등에 의한 국민의 자기 결정의 토대로 하는 법치주의..
ㄴ.반전체주의--저항권 인정
ㄷ,반독재주의--저항권 인정
ㄹ.주와 지방자치제 실시요구
ㅁ.복수정당제 요구
ㅂ.사회권이나 생존권 보장주의자
ㅅ.언론출판의 자유 보장
ㅇ.기본사상---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연합)
--진보적 온건주의자나 진보주의자--
d.미국 공화당과 미국 민주당 위대한 대통령들
(a)미국 공화당 대통령
ㄱ.미국 초대 조오지 와신톤 전대통령---미합중국은 위대한 것이다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대영제국으 밑에 있다가 독립된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대통령이며 미합중국에서의 국부로 영원한 자본주의 독립 혁명의 선구자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하여금 크신 열매을 맺게 할 지어다 그리하여 우리정부는 인권을 보호하는 성벽이 되게 될 지어다>
ㄴ.아브라함 링컨 전대통령--자유의 전사여! 영광있으라!
미국의 남북전쟁 <케 티스버크>전투에서 전몰한 장병 위령제를 맞아 1863년 11월 7일 당시의 북군 통솔자요 대통령인 <링컨> 전대통령은 일장의 연설을 하였는데 내용이 간결하지만 의미심장 하다하여 오늘날 크게 친송받고 있다
<오늘의 전란은 정의와 공도를 내용으로 하는 자유국가가 압제와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이를 영원히 지속할 수 있는냐에 대해서 처참한 철화의 시련을 받고 있습니다.. 중략.. 위기에 빠진 자유정치, 인민의 정치는 그들의 숭고한 순국에 의하여 이루어 질 것입니다>
ㄷ.부시(Bush)대통령----자유의 작전
아프가니스탄 주민과 이라크 주민들에게 압제와 전제정치를 청산하고 자유가 있는 국가를 부여할 것입니다
(b)미국 민주당 대통령
ㄱ.후랭크린 D 루우즈벨트 전대통령---네가지 자유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한지 1년만에 당시 미국대통령이였던 후랭크린 D 루우즈벨트님은 1941년 1월 6일 미국 제77회 의회에 출석하여 이번 전쟁은 단연코 민주주의 쪽의 승리로 돌아오게 하지않으면 안된다고 갈파 하였는데 그 연설은 그 뒤 <네가지의 자유>로 불리워지고 있다.
<자유라는 것은 첫째로 전세계에 걸친 언론의 자유 둘째 종교의 자유 셋째 결핍(缺乏)의 자유로부터의 자유 즉 모든 국가에 대해서 그 국민의 건전한 평화생활을 보장하는 각국간으 경제적 양해 (빈곤에서 해방과 국가나 유엔등이 생존적 경제적의 보장자유) 넷째 공포로부터의 자유 즉 세계 어느 곳에서나 한 나라가 그 이웃나라에 대해서 실제로 침략하지 못하도록 완전한 군비축소의 자유>
ㄴ.죤 F 케네디 전대통령---인류의 자유를 위하여
1961년 미국 민주당 출신의 케네디님이 공화당의 닉슨님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마사추세스주 부르크린 출생 하바드 대학교, 노틀담 대학교를 졸업하고 법학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1947년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1953년에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제2차대전 중 해군에 종군하여 명예전상장을 받았다
저서에는 용감산 사람들과 평화의 전략등이 있다
<인류의 자유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도 압제 전제정치도 아닙니다 보수인 양식과 우리 행동의 최후 역사와 더불어 우리들은 신의 축복과 가호가 있기를 바라지만 그 지구상에서의 신의 섭리는 진실로 우리들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짐을 자인하고 우리들이 자랑하는 이 땅을 이끌고 앞으로 전진합시다>
ㄷ.클린턴전대통령---작은 행정부와 인류 평화의 자유..
e.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공통적인 주요정책
(a)행복추구권
ㄱ.생명권
ㄴ.신체훼손금지권
ㄷ.인격권
ㄹ.휴식권
ㅁ.수면권
ㅂ.애정권--결혼의 자유를 국가가 보장(주택이나 직업등 국가가 장기적으로 알선 보장)
ㅅ.스포츠권--3S권(섹스. 스포츠. 스크린등 자유부여)
개인 누구나 섹스나 스포츠, 스크린등을 향유할 수 있다
ㅇ.건강권
(b)인간의 존엄성 보장
ㄱ.집단추방 집단학살 금지
ㄴ.고문제도 페지
ㄷ.노예제도 폐지--자본주의 입장을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은 공화당 입장 흑인해방운동이라면 인권적 입장에서는 민주주의 입장이다
ㄹ.인신매매, 인간실험 금지
ㅁ.마약 복용이나 강제노동 금지
ㅅ.잔인하고 가혹한 형벌이나 화학적 물리적 무기 사용 금지
ㅂ.인간을 최저한 생존까지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빠뜨리는 것도 금지---인간에게 최소한 의식주 해결을 국가가 보장(영양실조나 기아등 유엔이나 국가적 구호활동 부여)
ㅇ.사형제도 폐지와 범죄없는 세상으로 천명
고통이 없는 상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권리부여
-우파 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이론[民營資本體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일본국 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 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미합중국 헌법[민주국가 헌법]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http://blog.daum.net/007nis/15876066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전문
http://blog.daum.net/007nis/15871495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로부터 해방법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독일 통일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048
*군국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전문과 평화주의 입헌군주제 일본국 헌법 전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4623
*러시아 연방 헌법[Конститу́ция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72
*中華民國 憲法(중화민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57658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http://blog.daum.net/007nis/15875575
*몽골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1736
-좌파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이론[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라오스 그리고 쿠바 등 5개국에 불과하다.[노동계급의 노농동맹(공산당) 령도(領導, 지도) 인민의회정부론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많은 분들은 노동자 국가를 지향ㄹ하고 있는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 나찌즘을 극우라고 표현하지만 좌익 파시즘으로 표현하고도 있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년 3월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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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베트남 헌법(2013년 개정)[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헌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http://blog.daum.net/007nis/15876070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제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제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제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
1957년 10월 15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중공중앙)이 ‘우파분자 분류 표준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였다.[모택동주의 노선 중국 공산당이 분류한 자본주의민주주의 세력(수정주의자) 우파와 극우세력 동향]
이에 따른 우파는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 제도를 반대하는 자 .
2) 무산계급의 독재와 민주집중제를 반대하는 자 .
3) 공산당의 국가 정치생활 중의 영도적 지위를 반대하는 자 .
4) 사회주의와 공산당을 반대함으로써 인민의 단결을 분열시키려는 자 .
5)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공산당을 반대하는 소집단을 조직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 일부 분야 혹은 일부 계층 단위에서의 공산당의 영도를 뒤엎으려는 자 공산당과 인민정부를 반대하는 소란을 선동하는 자.
6) 앞에서 규정한 우파분자의 범죄활동을 지지하고, 관계를 맺으며 또 통신하여 혁명조직의 기밀을 보고하는 자.
통지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극우분자로 분류했다.
1) 우파활동 중의 야심가, 지도분자, 주모분자와 핵심 분자.
2)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강령성 의견을 제출하고 이 같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고취한 자.
3) 사회주의 반대활동에 특별히 악랄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한 분자.
4)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반공산당, 반 인민 활동을 전개해 왔으며 최근의 우파활동 전개 시에 적극적으로 반동활동을 한 자.
중공중앙의 이 통지는 반우파 투쟁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건국 후사회주의 개조과정에서 후펑(胡風본명은 장광런張光人) 비판 등의 부르주아사상 비판 캠페인으로 위축되어 있었던 지식인의 활동을 적극화시키기 위해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운동을 제창했다.
중국문화가 꽃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자유로운 언론활동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마오쩌둥(毛澤東)이 명명했고, 1956년 5월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가 '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지식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호소했다.
당초 지식인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으나 1957년 5월 '언자무죄(言者無罪 : 무엇을 말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는 방침에 고무, 일제히 발언하기 시작,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속출했다.
마오의 생각은 이 운동을 통해 이왕의 사회주의 건설을 정당화하고 강화하자는 것이었으나 순식간에 체제를 부정하는 단계로까지 치닫자 자신이 고무한 이들의 발언을 "'우파' 분자에 의한 반당·반사회주의적 '독초'"라고 매도하고, 같은 해 6월 '반우파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모순을 비판했던 공산당원들 다수가 반우파 분자로 몰려 숙청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였다. 29세이던 1957년 당적박탈과 강등 조치를 당한 주룽지는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이 ‘우파분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5년 동안 노동개조를 받기도 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사망한 2년 뒤인 1978년 당적을 회복하고 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실 주임에 임명되면서 ‘개혁 총리’로서의 미래를 예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일본 공산당 "2단계 민주연합정부론과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
http://blog.daum.net/007nis/15875883
일본 공산당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당의 기본 방침으로 한다
일본 공산당은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으로 우선 대미 종속과 대기업의 지배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로 한다
1단계로는 반미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로는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다
1단계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
2004년 1월 제 2 차 당대회 개정 강령에서 일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社會主義 革命)이 아니며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과 민주연합정부(民主聯合政府)'의 목표로 내세웠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으로부터 일본 국민(日本 國民)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에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이라고 평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에서 일본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으로의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현재 일본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다음의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였다
ㄱ.국가의 독립 · 안보 · 외교 분야(分野)
대미 종속을 타파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日米安全保障条約)의 폐기(廃棄)와 비동맹(非同盟)· 중립(中立)의 일본을 실현한다. 미국과 대등 평등(対等平等)
의 우호 조약(友好条約)을 맺는다 등등
ㄴ.헌법(憲法)과 민주주의(民主主義) 분야(分野)
(ㄱ)헌법 전문을 포함한 모든 내용을 지키고, 특히 평화적 민주적 조항(平和的民主的諸条項)의 완전한 이행을 목표로 한다.
(ㄴ)의회 민주주의의 체제 반대 당을 포함한 복수 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이 집권하는 정권 교대(政権交代)는 당연히 견지한다.
(ㄷ)18세 선거권을 실현한다.
(ㄹ)일본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억압하는 모든 시도를 제거한다. 남녀평등(男女平等)의 권리(權利)를 모든 분야에서 옹호하고 지킨다.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고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에 철저를 도모한다. 등등
ㄷ.경제적 민주주의(経済的民主主義)의 분야(分野)
(ㄱ)장시간 노동과 일방적 해고 규제를 포함해 유럽 주요 자본주의 국가와 국제조약 등의 도달점도 근거로 '규칙 있는 경제사회'를 실현한다.
(ㄴ)대기업(독점 자본)에 대한 다양한 민주적 규제(民主的規制)와 군축(軍縮), 불필요한 공공 사업의 중지, 대기업 · 재벌 우대 세제의 재검토를 재원으로 한 사회보장의 충실 등등.
이상(以上)의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에 의해 일본은 미국의 사실상의 종속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진정한 주권을 회복하고, 국내적으로도 국민이 처음으로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 또한 일본은 군사적 긴장의 근원임을 멈추고 평화의 견고한 초석으로 바뀐다.
이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에 대한 입장 1961년 강령에서는 ""일본의 당면한 혁명은 미국 제국주의와 일본의 독점 자본의 지배, 두 적(敵)에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 인민민주주의 혁명(人民 民主主義 革命)이다"라고 되어 있고, 1994년의 강령까지 거의 동일한 표현을 했다
2004년 강령 개정 당시에는 '다수자 혁명'이나 '의회의 다수를 얻어 혁명의 노선'이라는 설명이 이루어졌다
민주주의 혁명의 과정: 통일전선에 근거한 민주연합정부(民主連合政府) 구상(構想)
일본 공산당은 ‘일본 공산당(日本共産党)과 통일전선(統一戦線)의 세력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회에서 안정된 과반수를 차지한다면 통일전선(統一戰線)의 정부(政府) 즉 민주연합(民主聯合) 정부(政府)를 만들 수 있다’는 입장으로 단독 정권(単独政権)이 아닌 통일전선(統一戦線)에 기반한 연합정권(連合政権)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회를 명실상부한 최고기관으로 하는 의회제 민주주의 체제(議会制民主主義 体制)
, 반대당(反対党)을 포함한 복수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연합이 정권을 담당하는 정권교대제(政権交代制, 정권교체)는 당연히 견지한다.
이 '통일전선(統一戦線)'은 역사적으로 1945년의 강령에서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의 결집에 의한 인민전선(人民戰線)의 결성’과 ‘올바른 실천적 목표 아래 협동할 수 있는 모든 단체 및 세력과 통일전선(統一戰線)의 결성한다’고 되어 있다
1947년의 강령에서는 ‘광범위한 민주전선’으로 1961년부터 2004년까지 강령에서는 '민족 민주 통일전선(民族民主統一戦線, NLPDR)'으로 표현 되었다
이 '민족민주통일전선 정부(民族民主統一戦線政府)'는 '혁명정부(革命政府)'로 전환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2004년 강령 개정에서는 이 규정은 삭제 되었다.
2단계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일본 공산당은 즉각 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의 합의를 전제로 국회의 안정된 과반수를 얻어 사회주의를 위한 권력을 만들고 다음의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사회주의 국가)을 목표로 하고 있다.
ㄱ.자본주의를 극복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社會)로의 진전(進展)을 도모(圖謀)
ㄴ.주요 생산 수단의 소유, 관리, 운영을 사회의 손에 옮기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의 사회화(社会化)
ㄷ.민주주의와 자유의 성과(成果),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 있는 성과(成果)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발전시킨다
ㄹ.사상 신앙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를 엄격하게 지킨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상 신조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는 엄격하게 보장된다."며 일당 독재(一党独裁制)와 지도 정당제(指導政党制)는 채택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또한 소련형 사회주의(連型社会主義)의 관료주의·전제(専制)의 잘못은 반복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언"에 더 자세히 설명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이념적인 내용이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헌법(憲法), 정부(政府), 군비(軍備), 의회(議会), 사유 재산제(私有財産制)의 범위 등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일본 공산당은 이러한 미래 세대가 창조적으로 해결 과제이며, 지금부터 고정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면 착취와 억압을 모르는 미래 세대는 "원칙적으로 일체의 강제가 없는 국가 권력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는 사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도 없고 억압도 전쟁도 없는 진정한 평등 자유로운 인간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 사회“에 대한 전망이 열린다고 한다.
또한 이 ‘사회주의적 변혁'은 1961년 강령에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표현이었다는 것으로, 1994년에 ’사회주의적 변혁‘이라는 표현으로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의 낮은 단계이다‘라고 하는 두 단계 발전론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정설이었으나 마르크스, 엥겔스 자신은 그런 구별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두 단계 발전론을 그만두고 2004년 강령 개정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라는 표현으로 변경되었다 .
"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中華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中華民國之主權屬於國民全體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獨栽主義(全體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後,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自由社會[民主國家]-"
*資本主義 三代原則(經濟):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
*民主主義 三代原則(政治):民有、民治、民享之政府
시진핑 정부의 약점
-국가주석 3선 연임 철폐와 모택동정부 처럼 1인 종신직 독재권력 등장 우려[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운동 확산 우려]
-공산당 령도 헌법 추가로 국가주석, 군사위원장, 총리등 모든 권력기구 공산당 장악[개혁개방정책 후퇴와 자국 사회주의 국가 등장 그리고 중국정부 중심으로 신공산주의 운동으로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운동 세계 흐름 역행]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운동이 소수 민족의 독립운동으로 확대 우려
-국가주석 3선 연임 철폐와 모택동정부 처럼 1인 종신직 독재권력 등장 이후부터 우파 민족주의 진영에서도 타이완이나 홍콩 등지의 독립운동 원조 확대 우려[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과 중화국가연합 구성, 자본주의민주주의 독립국 주도로 국가연합 구성]
-시진핑 독재정부 퇴진과 공산당 일당독재체제 해체 그리고 자유선거 입장어세 중국 통일국가 구성
시진핑 독재정부 붕괴작전=>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운동=>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민주국가) 중심의 중화국가연합 구성 참여 추진[타이완, 홍콩등지 독립국 선포와 중화국가연합 수립 추진]=>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과 중화국가연합 구성(중화연방공화국 선포)[하나의 중국 중심으로 독립국가 승인]
-중화인민공화국 사회주의 국가에서 중화국가연합(중화연방공화국) 민주국가로 체제전환 추진
1933년 11월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이 처음으로 건국되었으나 3개월 만에 소멸되었고, 1944년 다시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에 병합되었고, 1955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되었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위구르족(후이족=회족, 신장),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이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 일함 토티 전 베이징중앙민족대 교수가 최근 노벨 인권상으로 불리는 마틴 에널스 인권상을 수상했습니다. 신장 위구르족 출신인 토티 교수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을 비난하다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입니다. 위구르족은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중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추진하면서 역사적으로 중국 정부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어왔습니다
“위구르족의 기원”
위구르족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으로 현재 중국의 서북쪽에 위치한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주로 거주하고 있습니다.
위구르족의 조상은 알타이계 유목민족인 가오처족인데요, 가오처라는 이름은 천막을 옮기기 위해 소가 끄는 수레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가오처족은 이후 돌궐제국과 수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세력이 약해졌고, 일시적으로 당나라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궐제국이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744년 오르콘 위구르 제국을 건설하면서 카스피 해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국가 건설 뒤에 유목민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정착 농경사회로 탈바꿈하면서 군사력이 약해져 840년 또 다른 투르크계 민족인 키르키즈에 의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들의 나라를 갖지 못한 위구르족”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면서 위구르인은 원 거주지인 몽골지방에서 중국 북서부와 동투르키스탄으로 대이주를 시작합니다.
이때 현지의 인도 유럽어 계통 백인들과의 결합이 이루어지면서 현재 투르크계 위구르족의 민족적 특성이 완성되었는데요.
특히 불교를 믿고 있던 대부분의 위구르족은 다른 투르크계와 마찬가지로 11세기경부터 이슬람교를 믿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뚜렷한 민족적 특성을 지켜온 위구르족이지만 이후에도 여러 작은 나라들이 난립하면서 제대로 된 강한 국가를 갖지 못했는데요.
1759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건륭제에 의해 침략 당하면서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20세기 초에 잠시 독립을 선언한 일이 있습니다만, 18세기 중반 이후 위구르족은 계속 중국의 일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위구르족의 전통 음악을 듣고 계신데요, 음악만 들어봐도 중국보다는 인도나 터키 쪽과 문화적으로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위구르족은 민족, 사회, 종교적으로 중국의 한족이나 지배계층인 만주족과는 너무 달라 지금까지도 저항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청나라가 지배하는 동안에만 42차례의 반란과 봉기가 있었고, 결국 1949년 중국 공산당에 병합돼 다시 중국의 자치구로 전락한 이후로도 분리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저항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경제, 무역의 요충지 - 신장 자치구”
현재 위구르족이 거주하는 신장 지역은 고대 중국인들이 서역이라고 부르던 이른바 비단길, 즉 실크로드가 지나던 지역으로 무역의 요지로서 그 중요성이 높았는데요.
이뿐만 아니라 소금이나 탄산수, 금, 옥, 석탄 등의 생산지로 유명해 경제적으로 그 가치가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신장이 위치한 중앙아시아 지역이 석유와 가스 매장량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관련 산업이 호황을 이루고 있는데요.
이곳에서 추출된 석유와 가스는 동서 송유관을 통해 상하이와 직접 연결되고 있고, 지역 경제의 60% 정도를 관련 산업이 담당하고 있을 정도 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 지역을 영향권에 두기 위한 각 나라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원래 이 지역에 살던 위구르인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자신들의 독립된 나라를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위구르와 독립운동”
위구르족은 현재 중국의 지배가 흔들릴 경우, 가장 먼저 독립운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민족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위구르족의 자치구인 신장은 한족들을 정착시켜 위구르족의 독립의지를 희석시키려는 중국의 이주 정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요, 그 결과 현재 신장의 인구 구성은 위구르인과 한족이 각각 절반씩 거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의 대규모 독립시위가 발생할 때마다 강경하게 진압하고 있는데요, 2009년 7월에 발생한 시위 때는 무려 1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위구르족의 독립투쟁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과 결합하는 형태를 띠고 있는데요.
특히 2014년 3월에는 중국 윈난성 쿤밍역에서 위구르족 무장단체에 의한 칼부림 사건이 발생하면서 29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72명의 사상자가 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 당국은 위구르족의 이슬람교 활동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요.
중국 당국이 위구르족의 이슬람 신성 의식인 라마단 참여를 금지시켰다는 내용의 VOA 보도 들어보셨는데요. 중국은 이 일로 주변 이슬람 국가와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1912년부터 1950년까지 현재의 티베트 자치구(우창 지방과 서부 캄 지방)는 달라이 라마가 수장으로 있는 티베트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후이족(회족, 신강),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이다
[일지] 티베트...20세기 이후 1904년 8월 3일 = 티베트 불교 최대 종파의 수장이며 티베트의 제1인자인 달라이 라마 13세 영국군이 침공하자 몽골을 거쳐 중국 청나라로 망명. 티베트(西藏)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티베트 고원의 지역으로, 토착 티베트인들의 고향이다. 평균 고도는 약 4,900m이며, 지구상의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티베트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 산이다. 행정 구역 상 티베트의 서부와 중부는 티베트 자치구(시짱 자치구), 동부는 쓰촨 성과 칭하이 성 등의 민족자치주로 나뉜다. 1.개요 티베트는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나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고원에 둘러싸여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히말라야 산맥의 북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평균 고도가 4900m가 넘어,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진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지역이다 |
2.티베트 신화
티베트 신화는 진화론과 과거 티베트 지역의 상당부분이 바다였음을 알고 있었던 듯한, 신비로운 성격을 띠고 있다
"먼 옛날 이 설역 고원은 바다였다. 바람이 일고 파도가 치니 거품이 일어나고 이 거품들이 쌓이고 쌓이자 육지를 형성하였다 …(중략)… 시간이 또 흘러 남해 바닷가 보따낙가산 관음보살은 변종으로 나타난 원숭이를 보고 그를 대륙으로 보내어 살게 했다. 원숭이는 불도를 지키며 얄룽 계곡의 한 동굴에 살게 되었는데, 수컷 원숭이는 '투' 였고, 암컷 원숭이는 '초' 였다. … 그 후 나찰녀와 원숭이 사이에서 서로 다른 성격과 외모를 가진 여섯 자식을 낳았다. 그 후손들은 점차 털이 줄고 꼬리가 짧아지면서 일어나 사람처럼 변하였고, 결국 사람이 되었다."
3.티베트 역사
(1)선사시대
1만여 년 전부터 티베트 지역에서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다. 고대 티베트 미얀마어군은 티베트인들은 유목 생활을 하고. 티베트인들은 약 500년경에 미얀마와 분리되었다.
철기시대의 구릉지 마을과 매장지가 티베트 고원에서 발굴되었는데, 티베트의 고대 문서를 따라 샹슝(象雄 Zhang Zhung)문화로 명명되었다. 이들은 뵌(Bön) 지역 문화의 기원으로 알려졌다..
(2)티베트 왕조(토번)
티베트의 기록된 역사는 7세기초에 남리루쩬(囊日論贊)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음이 확인된다(중국 사서로 보면, 「신당서」엔 4세기 첸뽀(贊普, 토번 왕을 이르는 명칭) 라토토리넨쩬(拉托托日年贊)이 '줘떠투두' 로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2세기에 티베트에 여러 국가가 등장하였으나 티베트 최초의 통일 국가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왕국으로서 다스린 송첸캄포(松贊干布, 581 ~ 649년)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663년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티베트 왕조를 열었고 당 태종의 조카인 문성공주(文成公主, 625~680)와 네팔의 공주인 브리쿠티 데비와 혼인하였다. 티베트의 군대는 663년 ~ 672년에는 동북방의 칭하이와 간쑤 지방의 토욕혼 왕국을 점령하였다.
670년 ~ 692년에는 당과 대비천 전투(669년)를 통해 타림 분지와 인접한 신장과 카슈가르시를 점령하고, 승풍령 전투(678년)에 승리해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나 692년 중국 왕조 당나라의 장수 왕효걸이 이끄는 군대에 서역을 빼앗겼다. 당은 이 기세를 몰아 토번을 압박하고자 했으나 토번 최고의 명장으로 일컬어지는 가르친링(대비천, 승풍령 전투 승리시의 지휘관)에 의해 소라한산에서 패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아랍, 동부 투르크와 동맹을 맺었다. 747년에는 당나라의 장군인 고선지의 원정으로 중앙아시아에 대한 티베트의 영향력이 약해졌다. 750년까지 티베트인들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거의 대부분 잃었다. 고선지는 751년 탈라스 강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와 칼룩스의 연합군에 패하였고, 중국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줄어들고 티베트의 세력이 회복되었다. 티베트는 북부 인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고, 763년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가 혼란한 것을 틈타 당시의 첸뽀 치쏭데쩬(赤松德贊)이 다짜뤼공(達札樂宮)을 동정원수로 임명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을 잠시 점령하기도 하였다
821년 또는 822년에는 티베트와 중국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두 나라의 국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양국 언어로 기록된 이 조약은 라싸의 조캉사원 앞의 돌기둥에 새겨져 있다. 티베트는 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왕국을 유지했다. 이 시기의 티베트는 토번(吐蕃)이라 불렸고, 티베트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3세기 동안 9대의 왕이 다스렸다
(3)몽골과 청나라
이후 티베트는 13 ~ 14세기에는 원나라의 간접적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1750년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팽창 정책으로 보호령이 되었다.
(4)티베트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티베트의 13대 달라이 라마는 중화민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중화민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1913년 몽골과 양측이 독립 국가로 국제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으로 몽장 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몽골에는 러시아, 티베트에는 영국이 무기, 차관을 제공하는 등 외부의 지원이 있었으나, 영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당시의 제국주의 열강 속에서 몽골과 티베트를 독립국으로서 인정하는 나라는 없었다.
독립 이후 중화민국의 역대정권과 군사적인 긴장상태가 유지되었으며, 티베트 달라이 라마 정부의 실효적 지배 영역 내에서는 어떠한 중국의 기관도 설치가 승인되지 않았다. 1918년과 1930년에는 티베트 영내로 침입한 중국 군대를 격퇴하는 등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향유했다. 그러나, 1940년 달라이 라마 14세의 즉위식에 참석한 중화민국은 행정원몽장위원회을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의식 후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1948년에 강제로 퇴거되기까지 '중화민국 행정원 몽장위원회 주 티베트 대표처'라는 이름으로 라사에 계속 머물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고, 영국령 인도로부터 이주해 온 영국군에 의해 갼세, 라싸와 카무 지방 각지에 통신기지가 건설되었다. 이 기지들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무력 점령할때까지 영국군의 무선기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5)중국의 지배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의 역대정권은 독립국으로서 존재한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였으나, 북경정권의 시대에는 군벌의 혼전, 남경국민정부 시대에는 대일전쟁으로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에 대하여 압력은 행사하였으나 본격적인 군사적 침략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게되면서 중국은 티베트와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발표한다.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티베트의 평화적인 해방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 1951년 5월 23일 티베트와 십칠조협의를 체결하여 강제 합병하였다. 이로써 티베트는 최초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많은 티베트인들이 정치적인 이유 또는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인에 대한 고문과 학살로써 티베트를 지배하였고, 1960년대에는 중국 전역을 강타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3,700개나 되던 사찰은 13개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었다.
이후 시짱자치구(서장자치구, 西藏自治區)가 설립되어 티베트인의 자치를 허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한족이 통치를 유지하였다. 티베트의 중국 귀속 이후로 망명을 떠난 티베트인들의 일부는 동화정책에 따라 티베트로 돌아와서 살고 있다. 한족의 이민을 실시하여 한족의 인구 비율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최근 중국 정부는 포탈라 궁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행하였고, 2005년에는 티베트로 연결되는 철도가 완공되었다.
(6)1959년 티베트 봉기
1959년 티베트 봉기는 1959년 3월 10일 중국공산당의 강압적인 티베트 통치에 반발한 티베트인에 의하여 일어난 반중국, 반공산주의 봉기이다. 봉기가 일어난 날인 3월 10일은 매년 티베트 망명 정부 등 티베트 독립 운동 단체들이 티베트 민족 봉기 기념일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고 있다
1959년 티베트의 캄 지방과 암도 지방에서 티베트인에 의한 무장 반란이 시작되어 티베트 동부 지역에 인민해방군이 증파되었다. 티베트에 진주한 인민해방군은 티베트의 마을이나 사원에 대해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인민해방군 사령관은 티베트 게릴라 부대를 굴복 시키기 위해, 포탈라 궁과 달라이 라마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한편 3월 1일 라사 교외에 있는 인민해방군 사령부에서 달라이 라마에게 연극 관람을 제안하였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그 제안을 미뤘지만, 최종적으로는 3월 10일에 연극을 관람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9일 약속 하루 전 인민해방군 장교들이 전통에는 어긋나는 것이지만 달라이 라마가 연극관람을 할때 무장 경비대를 동행시키지 않는 조건과 포탈라 궁에서 인민해방군 주둔지로 이동할 때에 어떠한 공식적인 의식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이 요구가 라사에 있는 티베트 사람들에게도 퍼져 중공 당국이 달라이 라마 14세의 납치를 꾀하고 있다고 생각한 티베트 사람에게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0일에 티베트인 약 30만 명이 인민해방군 측이 달라이 라마를 포탈라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궁전을 둘러쌌다. 3월 12일에는 라사에 모인 항의자들이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라사의 큰 길에는 바리케이트가 만들어지고 티베트독립군과 인민해방군은 충돌에 대비해 각각 라사 내외에 거점을 요새화하기 시작하였다.
3월 15일 상황이 악화되자 달라이 라마 의 피난 준비가 시작 되었는데 3월 17일에 달라이 라마의 궁전 근처에 인민해방군이 발사한 2발의 포탄이 명중해, 이것이 그의 인도 망명행과 망명정부 수립의 방아쇠를 당기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가 라사를 탈출하고 난 뒤인 3월 19일에는 라사의 주요 사원에 대한 포격을 포함한 전투가 시작했다. 티베트군은 인민해방군에 비해 숫자와 무장이 빈약해, 이 전투는 이틀만에 종료되었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추정치에 의하면 1959년 봉기때 티베트인 약 86,000명이 인민해방군에 의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 주장에 반대 하고 있다.
라사의 주요 사원과 절은 중국군의 폭격에 의해서 심한 손상을 입었고 약탈, 파괴되었다. 그리고 라사에 남은 달라이 라마 14세의 무장경비원과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티베트인들은 무장 해제가 되어 공개처형이 되었다.
(7)2008년 티베트 소요 사태
2008년 3월 10일 1959년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티베트 승려(수도승) 600여명의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로 시작되어 2008년 3월 14일 티베트 독립운동 시위대가 중국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었고, 중국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사태가 격화되었다.
2008년 티베트 소요 사태는 1959년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이 되는 2008년 3월 10일 티베트 승려(수도승) 등 600여 명이 중화인민공화국 중앙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로 시작하여 3월 15일쯤 라사 도심 라모기아 사원 인근에서 몇명의 티베트 반정부 시위대가 중화인민공화국 공안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었다.
그 후 불어나기 시작한 시위대는 도로변에 있는 건물과 경찰 차량, 정부 청사 등에 투석과 방화 등을 감행했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행인들을 공격하며 도시의 치안은 큰 혼란에 빠졌다.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가 발표한 시위대로 인한 공식 사망자 수는 13명(3월 17일 현재)이었으나, 인도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는 시위 과정에서 8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3월 15일 밤, 인민해방군이 탱크와 장갑차로 라사 시내에 진입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당국은 공안 2000여명을 투입해 최루탄을 쏘며 강제 해산했고 60여명을 연행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당국은 지난 며칠간 소수의 승려들이 라사에서 어느 정도의 소요를 일으켰으며 지방 정부와 사원의 노력으로 상황이 안정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2008년 8월 8일에 개최된 베이징 올림픽까지 위협하는 이번 소요 사태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는 질서 회복을 위해 '인민 전쟁'을 선언하는 한편 티베트 망명정부 실질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지지 세력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런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의 대응에 대하여 인권 단체들은 이번 시위가 1989년 대대적인 중앙정부에 대한 항거 이후 가장 큰 규모라고 전했다.[2]
한편,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가 라사 일원에 계엄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계엄상태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로 인해 외국인 관광객들은 라사로 들어갈 수 없었으나 현재는 외국 기자는 물론 관광객까지 라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4.지리와 생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티베트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네팔과의 국경에는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 수도(중심지)는 라싸(Lhasa, 拉薩)이다.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특성 때문에 희귀한 동식물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한족의 유입에 따른 지역 경제의 성장으로 티베트 특유의 환경은 위협받고 있다. 티베트의 70%는 초원이어서 주요 산업으로는 농업이 차지하고 있다. 면적은 122만8400㎢이며 인구는 274만명이다.
5.기후
고산 기후의 특징을 띠고 있다.
6.주민
대체로 티베트인이 거주하고 있으나, 동화정책으로 인하여 한족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7.종교
종교는 티베트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존중되는 문화의 한부분이다. 티베트의 주요 종교는 불교이다. 17세기 포르투갈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티베트를 서구 사람들에게 알렸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로부터 전래되어 7세기에 국교의 자리로 차지하였다. 이 불교가 티베트의 특유의 문화인 티베트 불교로 발전한다. 티베트 불교는 바하라야나(Varjrayana)의 독특한 형식을 따른다. 티베트의 불교는 티베트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몽골, 네팔, 부탄, 라다크 등의 국가들에서도 행해진다. 티베트인들은 부처의 가르침에 아주 작은 의문조차 품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통치 이후 열렬한 종교 활동에 의문을 품은 중국 정부에 의해 불교는 정치화되었다.
8.언어
티베트인들이 쓰는 언어는 티베트 문자로 되어 있는 티베트어이다. 티베트 문자는 부탄의 공용어인 종카어에서도 사용된다. 티베트어는 티베트 고원과 부탄에서도 사용되고, 종카어의 일부와 인도 북부의 시킴 지역에서도 사용된다.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시노-티베트어족(Sino-Tibetan)의 티베트 미얀마어군에 분류된다. 티베트말에는 다양한 방언이 있으며,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티베트와 다른 히말라야의 언어들은 종종 불분명하다. 티베트어의 다양한 방언을 고려하면, 티베트어족은 티베트 고원에 걸쳐 약 6백만 명이 사용하며, 약 15만 명의 망명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티베트 문자는 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에 기원한다.
9.음식.
티베트는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식물이 별로 자라지 않아 주로 야크를 이용하는데, 특히 야크의 젖으로는 우유, 치즈 등을 만들 수 있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후이족(회족, 신강),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이다
"同一介中華(中國).
中華民國(中國), 中華人民共和國(中國).
中華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中華民國之主權屬於國民全體.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獨栽主義(全體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後,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民主國家)"
*資本主義 三代原則(經濟):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
*民主主義 三代原則(政治):民有、民治、民享之民主政府[民主國家]
-中國 建國者 中山 孫文 先生-
*中華民國 憲法(중화민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57658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1982년 12월 등소평 헌법과 2018년 3월 습근평헌법 같은 점, 다른 점
1.1982년 12월 등소평 헌법과 2018년 3월 습근평헌법 같은 점-인민민주주의 독재 사회주의 국가론(자국식 사회주의 국가이론)[인민의회 정부론]
PDR(인민 민주주의 혁명)은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 이론이다
순수내각책임제 형태 정부이론으로 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권력주체)로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 할 수 있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1)민선의회에 권력이 집중
(2).집행부(내각, 행정부)는 의회에 예속 종속됨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
권력이 의회에 집중 돼 있고 내각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있다. 공산주의 국가나 자국 사회주의 헌법 국가들은 공산당이나 노동당, 사회당의 1당 독재 국가체제로 당 총서기나 당 총비서가 내각 수상이나 국가주석이다
인민의회 정부론에서 국가수반(국가대표)은 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대통령)이다 국가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의례적 상징적 인물이고 실질적 권한은 수상이 해오고 있다
중국은 국가주석이 국가수반(국가대표)이고 군사위원장이 군 통수권자이며 총리(수상)는 행정부 수반이다. 등소평 헌법은 국가주석은 공산당 대표(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아닌 중국 전체 인민의 대표자(국가대표자)로서 국가주석 임기는 5년 중임제이고 총리는 의원 임기와 동일하다 군사위원장 임기는 제한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등소평 헌법은 형식상 국가를 대표하는 주석 밑에 국가권력이 유지하는 형태로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했다
습근평 헌법은 공산당의 일당 독재정부로 수평적으로 국가주석이나 군사위원장, 수상의 임기제한을 하지 않았다
인민 민주주의 독재형태를 공산당 독재로 이해하고 있다
실용주의 중국헌법은 공산당 국가가 아닌 중국 전체 인민의 정부이다
인민해방군은 공산당 당군으로 공산당 총서기가 군사위원장이 돼야 한다는 이론이 습근평 이론이며 인민해방군은 중국 전체 인민의 군대로 공산당 총서기가 아닌 다른 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등소평 이론이다 그리고 1982년 등소평 헌법은 권력이 집중한 마오 시대의 반성에서 국가주석 3선 금지를 했다 그래야 민주주의 원칙과 인민 전체 경제환경이 나아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등소평 헌법은 실용주의 노선 수정주의자라면 습근평 헌법은 마스-레닌 공산주의 노선 교조주의자이다
2.1982년 12월 등소평 헌법과 2018년 3월 습근평헌법 다른 점
(1)1982년 12월 등소평 헌법 공산당 령도 철폐와 국가주석 임기제한
제1조 ①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공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의 사회주의국가이다.
②사회주의 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제도이다. 어떠한 조직 또는 개인도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것을 금지한다.
제79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부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선거한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는 만 45세의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부주석으로 피선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부주석의 매회 임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매회 임기와 같고, 연임은 2회를 초과 할 수 없다[1982년 등소평 헌법-권력이 집중한 마오 시대의 반성에서 3선 금지]
(2)2018년 3월 습근평헌법 공산당 령도 규정와 국가주석 임기제한 철폐(연임 가능)
제1조 중화인민공화국은 로동계급이 령도하고 로농동맹에 기반을 둔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사회주의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본제도이다. 중국공산당의 령도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 어떤 조직 또는 개인이든지 사회주의제도를 파괴하지 못한다.
제79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부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선거한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 만 45세 이상의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부주석으로 선거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부주석의 매기 임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매기 임기와 같다[국가주석과 부주석 임기 제한 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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