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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김정은 신변 이상설에 “출처 모르겠다” 반복 본문

同一介中華(中國)/북경정부-中華人民共和國(中國)

중국, 김정은 신변 이상설에 “출처 모르겠다” 반복

CIA Bear 허관(許灌) 2020. 5. 1. 12:25

                                                   가오펑 중국 상무부 대변인.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변 이상설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북한의 최대 우방국인 중국 당국은 매우 신중한 입장만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관영매체들도 김 위원장의 신변 관련 보도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 상무부의 가오펑 대변인은 30일 북한이 이번주 베이징에 경제사절단을 파견할 예정이라는 언론 보도와 관련해 “아는 것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가오 대변인은 이날 언론 브리핑에서 관련 보도에 대한 확인 요청에, 양국이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북한 경제사절단에 대해선 모른다며 부인했습니다.

그러면서, 언론이 사실에 입각한 책임 있는 보도를 해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앞서 ‘로이터’ 통신은 28일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북한이 이번주 중국에 경제사절단을 파견해 식량과 무역 문제 등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앞서 중국 외교부는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 고위 간부가 의료진이 포함된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는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녹취 :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 "I want to say that I don't know the source of the information. I have nothing to offer in terms of the detailed question you asked."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 대표단의 북한 방문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응이나 김정은 위원장의 건강 이상설과 관련이 있느냐는 질문에, 관련 보도의 출처를 모르겠다며 제공할 소식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처럼 중국 정부는 김정은 위원장의 신변 이상설이 불거진 이후 대부분의 북한 관련 논평에서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김 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을 제기했던 지난 21일 미 `CNN’ 방송의 보도 이후 현재까지 관련 질문에 ‘출처를 모르겠다’는 답변을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미국과 한국이 김 위원장의 신변 이상설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일부 고위 당국자들을 통해 ‘특이동향이 없다’는 등의 평가를 전하는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기류는 중국 주요 매체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관영매체인 중국 ‘CCTV’, ‘인민일보’, ‘신화통신’ 등은 김정은 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언론들에 따르면 중국 관영매체들은 미국과 한국, 일본 등의 매체들이 김 위원장의 신변에 대해 본격적인 의문을 제기한 이후에도 북한 관영매체를 인용한 간략한 ‘동정 보도’만 하고 있습니다.

다만 중국 사회연결망 서비스인 ‘웨이보’ 등에서만 김 위원장 신변과 관련된 ‘소문’들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은 중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하자 지난 1월 말부터 국경을 전면 봉쇄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중국 외교부는 27일 코로나바이러스 관련 진단 장비를 북한에 제공했다고 밝혔습니다.

VOA 뉴스 박형주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공식 후계자는 당(의회)과 내각, 군에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의회(당)는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면서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와 내각은 김재룡(내각총리), 김일성 집안은 김경희, 김평일(주체연호, 김일성 직계가족) 등이 있다

북한 인민군 실권자 추대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동의가 필요하다

북한은 반일, 반미성향 사회주의 정부로 친중국 친러시아 인물이 북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북한 권력은 김정일주의자(김정일 세력) 보다는 김일성주의자(김일성 세력)들이 권력 독점을 해오고 있다 북한 제2공화국 때부터 주체사상과 주체연호를 사용해오고 있다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인민회의 정부(민주집중제)가 되기 위해서는 북한 제1공화국 헌법을 따라가야 한다 북한 권력이 제1공화국 수준이 될때 남북 정치협력으로 합의 통일로 나아갈 수 있다

북한 제3공화국 헌법으로는 남북협력이 불가능하고 쓸모없는 협력이다

러시아나 중국정부는 동북항일연군(만주파) 출신 가족을 옹호하고 있다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3공화국 헌법)-

 

북한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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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 인물 저우바오중(周保中, 주보중)-붉은 군대 예하부대 각 민족 빨치산(공산당 무장단체) 부대

194310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제88독립저격여단(국제여단, 각 민족 빨치산 부대) 대원 사진. 1열 좌로부터바탈린( N. S. Batalin, 巴达林, 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 중국), 왕일지(王一知, 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중국), 김일성(金日成, 1영장, 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1904~?)2장광적(张光迪, 중국), 풍중운(冯仲云, 중국), 왕효명(王效明, 중국), 왕명귀(王明贵, 중국), 팽시로(彭施鲁, 중국)3양청해(杨清海, 중국), 서철(徐哲, 조선), 강신태(姜信泰, 강건, 조선), 김광협(金光侠, 조선), 수장청(隋长青, 중국)4: 안길(安吉, 조선), 박덕산(朴德山, 조선), 최용진(崔勇进, 조선), 도우봉(陶雨峰, 중국), 김경석(金京石, 조선)[사진: 소련 제88국제여단 소속원 - 중국 길림성 도서관]

 

 

주보중(周保中, 1902- 196422)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중국 남서부 윈난성(雲南省, 운남성)에 사는 소수민족 바이족(白族, 백족) 출신이다 건국 전에 김일성, 최용건 등 조선인의 항일 빨치산도 소속한 동북 항일련군(東北抗日聯軍)의 제2군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고 동북항일련군(東北抗日聯軍)이 적군(赤軍, 소련군)의 제88 독립저격여단(88独立狙撃旅団)으로 조직 개편할 때 제88 독립저격여단(88独立狙撃旅団)의 여단장이 되었고 소련군 제88독립저격여단의 만주침공 이후 소련군의 장춘위수부사령관(長春衛戍副司令官)이 된다. 국공 내전에서 동북 인민해방군의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윈난성 인민정부 부주석,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 등을 역임한다.

 

주보중(周保中)1902년 윈난성(雲南省, 운남성) 다리시(大理市,대리시)에서 태어났다.

1917 15세의 나이에 호법운동(護法運動,에 참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윈난성(雲南省, 운남성) 육군강무당(陸軍講武堂)에서 수학(修學)했다.

1926년부터 북벌(北伐)에 참가했고 국민 혁명군 제6(国民革命軍第6)으로 활동했다.

19277월에 우한시(武漢市, 무한시)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2712월 후난성(湖南省, 호남성), 저장성(浙江省, 절강성),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등으로 수송과 연락 임무에 종사했다. 국민혁명군(国民革命軍) 6군의 제18사단의 부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1928년 소련 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에 유학했다.

 

1931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귀국하여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만주지역의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 등으로 김일성과 최용건등의 조선인과 협력하여 항일 게릴라를 조직 하였고, 1935년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면 제2군 군장(2軍軍長)에 취임하였고, 1937년 연군 개편시(聯軍改編時)에 제3로군장(3路軍軍長)이 되었다

길림성 동부(吉林省東部)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소탕작전에 의해 큰 타격을 받게 되면서 1940년에 소련의 극동 지방에 탈출하여 소련군의 산하 제88독립 저격여단(88独立狙撃旅団)의 여단장(중령)이 되었다. 김일성은 대대장(대위)이었다.

 

19458월 소련군의 만주침공과 함께 만주로 돌아와 소련군 장춘 위수 부사령관((長春衛戍副司令官)에 임명된다 같은 해 9월 이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동북인민자위군(東北人民自衛軍)으로 개칭되고, 총사령관에 임명 되었다

1031일 이전 항일련군(抗日聯軍)과 토착 무장조직을 규합하여 새로운 동북 인민자치군(東北人民自治軍)이 편성되면서 임표 총사령관에서 주보중 부총참모장에 임명 되었다.

 

1946114일 동북인민자치군(東北人民自治軍)이 동북민주련군(東北民主連軍)으로 개칭되면서 임표 사령원(司令員)에서 주보중 부사령원(副司令員)에 임명 되었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이 시작되면서 1946년부터 1948년 국공내전에서 중국 동북부 장춘시 해방 전투에서 활약했고. 194810월 제2차 장춘시 해방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19481월에 민주련군(民主連軍)이 동북 인민해방군(東北人民解放軍)으로 개칭 된 뒤 11월 제4야전군(第四野戦軍)으로 개편되면서 주보중 부사령원을 해임 되었다

 

1949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19502월부터 윈난성 인민정부 부주석(雲南省人民政府副主席), 서남 군정위원회 정법위원회 주임 겸 민정부장(西南軍政委員会政法委員会主任 兼 民政部長) 등을 역임했다.

195110월부터 19575월까지 운남대학 교장(雲南大学校長)을 역임했고 또한 19538 월부터 195410월까지 서남정법학원 원장 겸 당 위원회 위원장(西南政法学院院長兼党委員会書記)을 역임했다

1954929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의 결정에 따라 국방위원회 위원에 임명 되었고, 1955년에는 일급팔일훈장(一級八一勲章), 일급독립자유훈장(一級独立自由勲章)을 수여 되었다.

1956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대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선출 되었다. 19569월 중국 공산당 제8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에 선출 되었고, 1959428일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민족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됨과 동시에 동 회의의 결정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재임 되었고 196422일 베이징시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

 

북한 노동신문에서도 칭찬되고 있는 북중 관계의 상징이자 김일성의 친밀한 상관이고 소련에 소개한 은인이기도 한 주보중과 그의 일족은 광물 자원과 예술과 무기 거래 등 외화 획득에 중요한 사업으로 다양한 편의를 도모하고 북한 경제의 버팀목이 되어 있는 것이 해외 언론에 보도 되고 있다

 

1946년 8월 길림성 연길 주보중 장군

주보중 장군이 착용한 비옷

*호법운동(護法運動

1917년에 중국의 북양 군벌 돤치루이에 반대하여, 남방의 혁명 세력이 일으킨 운동. 돤치루이가 정권을 장악하여 안후이파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자, 쑨원 등 남방의 혁명 세력이 옛 국회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일으켰다

 

*주보중 약력

 

1902년 운남성 대리시에서 태어났다.

191715세의 나이에 호법 운동에 참가했다.

1922~ 1924년까지 운남육군강무학당에서 수학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제6군에서 활동, 북벌에 참가했다.

19277월 우한시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12월 국민혁명군 제6군 제18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하여 호남성, 절강성, 하북성 등에서 수송 및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28년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레닌학교에 유학했다.

19319월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만주 요녕성 등에서 항일 게릴라 조직을 결성했다.

1935년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면서 제2군 군단장에 취임했다.

1937년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되면서 제3로군 군장에 취임하여 길림성 동부의 산악 지대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 일본 관동군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 때문에 1940년 소련 연해주로 피신했다. 그리고 소련군 산하 제88독립저격여단의 여단장(중령)이 되었다.

1945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과 함께 만주로 돌아가 소련군 장춘위수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59월 동북항일연군이 동북인민자위군으로 개칭되면서 총사령에 임명되었고, 1031일 동북항일연군과 토착 무장조직들이 규합하여 동북인민자치군이 편성되자 총사령 린뱌오 밑에서 부총참모장을 역임했다.

1946114일 동북인민자치군이 동북민주연군으로 개편되자 린뱌오 사령원 밑에서 부사령원을 역임했다.

1946~ 1948년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중국 동북부의 장춘시 전투에서 활약했고, 194810월 제2차 장춘시 해방 전투에도 참가했다.

19481월 동북민주연군이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된 후, 11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되면서 부사령원에서 해임되었다.

1949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19502월부터 운남성인민정부 부주석, 서남군정위원회 정법위원회 주임 겸 민정부장을 역임했다.

195110~ 19575월까지 운남대학 교장을 역임했다.

19538~ 195410월까지 서남정법학원 원장 겸 당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54929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의 결정에 따라 국방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55년 일급팔일훈장 및 자유독립훈장이 수여되었다.

1956년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69월 중국공산당 제8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고, 1959428일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민족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및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재임되었다.

196422일 베이징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 빨치산 조직(소련군의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성격)으로 지금까지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당계의 조선인, 중국인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문호를 넓혀 우파 항일 무장단체를 받아 들여 1936년부터 개편되어 갔다.

주보중이나 김일성 등 중국인과 조선인의 유명한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소속으로 나중에 소련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조직으로 개편하여 그 구성원 중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의 중추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다)

 

1.성립

1930년대 초반에서 만주국(満州国, 193231일 건국일)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조선인, 중국인의 항일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편성되어 있었지만, 조선인 대원 400명 이상이 친일 스파이로 의심 받고 숙청된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 등으로 탈출도 잇따라 조직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편,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統一人民戦線)의 결성을 호소되면서 중국 공산당도 8월 테제를 발표하고 제2차 국공합작(2次国共合作)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만주에서도 항일 반만(抗日反満)” 구호로 내세우면서, 국민당 계열의 독립 무장단체를 포함한 모든 단체와 합작하여 흡수를 목표로 정책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미 1934년경부터 국민당계열의 마적(馬賊, 말 타고 다니는 소수 무장단원의 군벌)이나 의용군(義勇軍)도 공산당의 지도하에 정리하려고 시도했던 것이지만, 토착 무장단체는 주로 부농(富農), 부호(富豪)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해 공산주의 색깔(노동자 계급 령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을 싫어하여 국가자본주의(국가사회주의) 일만측(日満側, 일본과 만주국)에 돌아는 경우가 많았다. 최대한 공산주의 색깔을 엷게 하여(통일전선 구축) 존속하고 있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소규모 마적과 독립 무장단체를 흡수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되어 갔다.

 

그러나 통화성(通化省)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계열의 최대의 항일 무장단체 왕봉각(王鳳閣)

의 반만항일군(大刀会, 대도회)과 만주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조선인 민족주의자 무장단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우파는 공투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집단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큰 세력이 될 수 없었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제1. 2군이 남만주, 4. 5. 7. 8. 10군이 동만주, 3. 6. 9. 11군이 북만주로 확장했다

1936년 우선 남만주군(南満)이 제1로군(第一路軍)이 되고, 이것이 두고 두고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주력부대인 것으로 계속되어 나가게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간도는 민생단 사건이 꼬리를 이어 내분이 계속되고 좀처럼 재편은 부진했지만 1937년에는 동만주군 제2로군(東満軍 第二路軍)이 되었고, 1939년 북만주군 제3로군(北満軍 第三路軍) 것으로, 일단의 재편을 하게 되었다[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제1군으로부터 제11군까지 존재했으며, 1, 2군이 남만주에서, 4, 5, 7, 8, 10군이 동만주, 3, 6, 9, 11군이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후에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으로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으로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2. 편성

편성 당시의 제1로군(1路軍)의 인원은 중국 공산당측 자료 "中共延辺党組織活動年代記(중공연초당조직활동연대기)“ ”동북항일연군투쟁사(東北抗日聯軍闘争史)“ 6,000여명 추측되고 일본측의 만주공산 비적의 연구(満州共産匪研究)“에 따르면 1,630명 정도에서 상당한 차이가있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아래의 인물은 사사키 하루타카(木春隆) "한국전쟁 이전의 한국 독립운동 연구와 강재언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라했다.

서대숙 "김일성 사상과 정치 체제가 자세 하지만, 동북인민혁명군 시대(東北人民革命軍時代)에 전사 한 인물이 실리는 등 착오가 보여 자료로 피했다.

해방 이후 최현(崔賢),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강건(姜健), 최용진(崔勇進). 김일(金一), 이영호(李永鎬)은 살아남아 나중에 북한의 요직을 차지한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으며 제88독립저격여단을 소련군으로 지칭하고 있다]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부총사령 왕덕태 [副総司令-王徳泰]

정치위원 위증민[政治委員魏拯民]

 

1로군 군단장 양정우[ 第一軍 軍長-楊靖宇]

1사단 사단장 정빈[第一師 師長-程斌]

· 3여단 정치부 주임 이질수[3 政治部主任-李鉄秀]

4여단 단장 수상태 [4 団長-隋祥太]

6여단 단장 유인봉[6 団長-劉仁鳳]

2사단 사단장 조국안[第二師 師長-曹国安]

8여단[8]

3사단 사단장 왕인재[第三師 師長-王仁斎]

5여단[5]

7여단[7]

 

2로군 군단장 왕덕태[第二軍 軍長-王徳泰]

정치주임 오성륜(),이청()[政治主任-呉成崙. 季青]

4사단 사단장 안봉학[第四師 師長-安鳳学]

1여단 단장 최현[1 団長-崔賢]

2여단[2]

3여단[3]

5사단 사단장 진한장[第五師 師長-陳翰章]

4여단[4]

5여단[5]

6여단[6]

6사단 사단장 김일성[第六師 師長-金日成]

7여단 단장 김주현[7 団長-金周賢]

8여단 정치위원 박덕산(김일)[8 政治委員朴徳山金一]

9여단[9]

10여단[10]

 

독립여단 여단장 방진성[独立旅 旅長-方振声]

1여단 단장 최춘국[1 団長-崔春国]

2여단[2]

 

교도여단[教導団]

 

2로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주보중[第二路軍 総司令兼政治委員-周保中]

  참모장 최용건(최석천)[参謀長-崔庸健崔石泉]

4군 군단장 이연평[第四軍 軍長-李延平]

부군단당 왕광우[副軍長-王光宇]

1사단 사단장 관서범[第一師 師長-関書範]

1여단[1]

2여단[2]

3여단[3]

2사단[第二師]

2사단 정치위원 도정비[第二師 政治委員-陶浄非]

4사단 정치위원 김광협[4 政治委員-金光侠]

5여단 정치위원 박동화[5 政治委員-朴東和]

6여단[6]

3사단 사단장 이문빈[第三師 師長-李文彬]

8여단[8]

9여단 정치위원 강신태(강건)[9 政治委員姜信泰姜健]

 

7군 군단장 이학복[第七軍 軍長-李学福]

군단장 대리 최석천(최용건), 경낙정[軍長代理-崔石泉,景楽亭]

정치주임 정로암, 포림(政治部主任-鄭魯岩,鮑林)

1사단 사단장 왕여기[第一師 師長-王汝起]

  정치부 주임 팽시노[政治部主任-彭施魯]

1여단 여단장 최용진[第一団団長-崔勇進]

2사단 사단장 유기창[第二師 師長-鄒其昌]

7여단 정치위원 이영호[第七団政治委員-李永鎬]

3사단 사단장 경낙정,운학영, 수장청[第三師 師長-景楽亭,雲鶴英隋長青

 

8군 군단장 사문동[第八軍 軍長-謝文東]

10군 군단장 왕악신[第十軍 軍長-汪雅臣]

구국군[救国軍]

의용군[義勇軍]

 

3로군 총사령관 장수전(이조린)[第三路軍 総司令-張寿籛李兆麟]

참모장 허형식[参謀長-許亨植]

정치위원 빙중운, 김책[政治委員-馮仲雲, 金策]

3군 군단장 허형식[第三軍 軍長-許亨植]

6군 군단장 장수전[第六軍 軍長張寿籛]

7군 군단장 이화당[第九軍 軍長李華堂]

11군 군단장 기치중[第十一軍 軍長祁致中]

정치부 주임 김정국[政治部主任金正国]

 

1932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만주국 지도]

3.활동 상황

(1)1일로군 제1(一路軍第一軍)의 서쪽정벌

1936년 남만주에서 제1일로군(第一路軍)이 성립한 당시 중국 공산당은 소위 장정(長征) 한창이었지만, "항일동정(抗日東征)“ 깃발을 들고 산서성(山西省)에서 하북성(河北省)에 진출하여 동쪽으로 향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일로군 1(第一路軍第一軍)의 첫 번째 활동은 이에 잇따라 움직을 하여 서쪽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1차 서쪽 정벌은 제1사단(第一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66월 하순, 번시(本渓,본계-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동부의 중공업도시)와 안동성 봉성현(安東省鳳城県)의 경계에 있는 화상 모자산(和尚帽子山)을 출발하여 요양(遼陽)에서 남만주 철도와 요하(遼河)를 넘어 요서(遼西)에서 열하(熱河)로 나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수암현(岫岩縣)의 산악 지대에서 만주국군(満州国軍)에 포위되어 뚫고 탈출했지만, 다수의 도망자,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2차의 서쪽정벌은 제3사단(第三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전원이 기마대(騎馬隊)가 되어 결행(決行) 하게 되었고, 193611월 하순 싱징현(흥경현,興京県) 경계에서 기마로 출발하여 만주국군(満州国軍)의 추격을 받으면서 청원(清原)에서 철령(鉄嶺)을 넘어 요하(遼河)유역에 도달 하였다

그러나 따뜻한 겨울을 위한 요하(遼河)가 결빙(氷結, 물 따위가 얼어붙음) 되지 않고, 한달의 행군으로 피폐 결국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400명의 대원이 백 수십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3사단(第三師)의 대원 수가 400명이었다고 한다면, 6개사단(6個師) 모든 동일 숫자라고 하는 단순 계산으로 제1일로군 전체(第一路軍全体)2400명 정도가 6000여명으로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었다고 알 수 있다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로군 제1(一路軍第一軍)은 서쪽 정벌에 실패하면서도 또한 팔로군(八路軍)과의 연계를 지향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목적으로 제3사단(第三師)의 생존을 중심으로 청원(清原), 서풍(西豊), 개원(開原) 일대로 활동을 계속하였고 별동대가 심양(瀋陽), 무순(撫順) 일대에 진출하는 등 소모(消耗)를 거듭했다.

 

(2)김일성 부대에 의한 보천보 습격

한편, 1936년 제1로군의 제2(第一路軍 第二軍)은 장백지구(長白地区)에 근거지를 만들려고했다. 4사단 사단장(第四師 師長) 안봉학(安鳳学)체포되어 투항하였고 제2군 군단장(第二軍軍長) 왕덕태(王徳泰)이가 만주국군에 포위되어 전사하는 등 상당한 희생하면서 우선 김일성이가 사단장을 맡고 있는 제6사단(第六師)의 근거지 개척에 성공하여 1937년에는 제1로군(一路軍)의 제1군 제2사단(第一軍第二師)과 제2군 제4사단(第二軍 第四師)이 장백(長白)에 근거지를 옮기고 있었다.

 

원래 1932년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시작한 것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반석현위원회(中国共産党満州省委磐石県委)이었지만, 그 당시부터 고참 조선인 멤버에 오성륜(呉成崙) [全光, 전광]], 이상준(李相俊)[이동광(李東光)]이가 있었다.

오성륜(呉成崙) 2(第二軍)의 정치주임이었고 이상준(李相俊)도 제2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들은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의 반성에 따라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의 지지를 얻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호소하기 위하여 재만주지역 조선인 조국광복회(祖国光復会)를 조직하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백(長白) 침공은 이에 따른 것으로 제6사단(第六師)의 지지기반 구축 공작을 시작하고 그 일환으로 압록강 유역의 조선반도 내부 함경남도 (현재 양강도) 갑산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금철(朴金喆), 박달(朴達) 등 공산주의 단체 (후에 조선 노동당 갑산파)와 연락을 하게 되었다.

 

19376월 제6사단(第六師)은 압록강을 건너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甲山郡普天面保田里)[보천보(普天堡)]의 습격(보천보 전투)에 성공했지만, 이것은 갑산그룹 안내와 참가해서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조선뿐만 아니라 조선반도를 단속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일본측에서도 공비[共産党匪賊(공산당 비적)]으로 거물시 되는 것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 하는데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이 전년(前年) 6사단(第六師)의 장백(長白, 백두산) 근거지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수 십명 규모의 소대 김일성 부대를 자칭 무송(撫松)과 장백(長白)에 출몰하여 약탈을 반복 만주군 수비대와 충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한이 해()에 들어서는 갑산 그룹의 활동도 활발해 지고 조선인 부호(朝鮮人富豪)에서 금품을 갈취 등의 사건도 있었다. 또한, 최현를 단장으로하는 제4사단 제1여단(第四師第一団)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무산(茂山)에 진입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미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을 전년(前年) 조선반도의 신문은 김일성 부대의 동향을 전했다. 1936911일자 매일신보는 "혜산 건너 편에 출몰하는 적단(賊団, 도적 단체)150 - 160명으로, 3분의 1이 만주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이고 ... 관헌과 같은 복장으로 소련식 중국식의 소권총, 강한 기병2(軽機二丁), 대포1(大砲一門)을 가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계(東北抗日聯軍系)에서 장백현(長白県) 방면에 파견된 이 부대의 수령(首領) 김일성이라고 한다. 이들은 15-20 명씩 소대 약탈반을 꾸어 조선인 부락에서 식량을 약탈하였다"와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정보를 싣고 있다. 참고로 뒤를이었다 경성일보 기사에서는 "비수(匪首, 도덕의 두목) 김일성 일당이 있고, 6사단(第六師)'김일성 부대'를 자칭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19375, 최현 부대(崔賢部隊)가 무산(茂山)에서 남하(南下) 하여 혜산 경찰서 관내(恵山署関内),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 상흥경수(上興慶水) 부락 고뢰조재목작업소(高瀬組材木作業所,)을 습격했다

금품 많은 것을 약탈 한 후, 주 임무인 일본인 1, 조선인 5, 중국인 30명을 납치해 강유역으로 도망친 후 몸값을 요구했다.

그에 이은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이다. 보천보 300호 남짓의 마을에서 일본인 26, 중국인 2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다. 그래서 무차별 적으로 금품을 강탈하고 동사무소 나 소방 회관, 우체국, 초등학교 등에 방화하고 도망한 것은 충격을 받은 단속측 조선총독부는 김일성과 최현에 거액의 상금을 걸고 수배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크게 보도했다. 이 신문의 논조는 그들을 비적(匪賊)으로 비난하고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동정(同情)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관헌 (조선 총독부)에 의한 검열을 위해 항일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곤란이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중국 공산당과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소련의 원조도 얻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물자 보급을 위해 종종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의 구별없이 금품강탈이나 몸값 목적의 유괴 등 폭력적인 약탈 행위도 했다. 또한 몸값 목적 외에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주민을 납치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어 넣어 인원 충당하고 있었다. 물자와 인력의 공급 수단에 있어서는 비적(匪賊)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보천보전투 양강도는 중국 장백산과 한국 백두산으로 접경을 두고 있으며 두만강, 압록강이 양국으로 접경하고 있다

(3)혜산사건과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

김일성부대의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에서 추격한 혜산경찰서의 경찰부대는 매복을 받아 32 명 중 7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상에 급히 함흥 보병 제74연대 김인욱(金仁旭) 소좌(소령)이 혜산 수비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이 혜산 수비대가 경찰부대와 협력하여 최현 부대와 합류하고 있는 김일성 부대를 급습하여 타격을 주었다. 이는 김일성 부대가 다시 국경을 넘어 조선에 침공하는 것은 없어졌지만, 갑산 그룹의 활동은 운흥면(雲興面) 금광을 습격하여 사금(砂金)을 강탈 하였다. 도적단이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는 삐라를 뿌리고 있던 것으로부터, 동조(同調) 갑산 그룹의 존재가 드러나고, 갑산측에서 162, 장백현에서 59명이 검거됐다. 혜산사건의 시작이다 .박금철도 이 때 검거 되었다.

혜산사건(恵山事件) 1차 검거의 자백도 이듬해 1938년에는 박달을 포함한 279명이 검거 돼 만주국 주재 조선인 조국광복회(在満韓人祖国光復会)와 거기에 기담한 갑산그룹이 괴멸했다.

한편, 1938년 초에 제1로군(第一路軍) 주력군은 주로 집안현(輯安県)의 삼림 지대에 있었다. 중국인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와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은 팔로군과 연락을 고집해 여러 번 서쪽 정벌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 중에 제1사단(第一師)의 사단장 정빈(程斌)과 그의 부대가 일만토벌부대(日満討伐部隊)에 투항했다. 일만측(日満側)은 투항자를 처형하지 않고 상금이나 직장을 보장하는 귀순 전략을 취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한 것이다. 따라서 서쪽 정벌은 중지(中止)가 다음과 같이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이 이루어졌다.

인원의 숫자는 강재언(姜在彦)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른다.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 정치위원 위증민, 군수처장 오성륜, 총서령부경위여 여장 방진성 (500 )[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政治委員魏拯民 軍需処長呉成崙 総司令部警衛旅 旅長方振声 (500]

1방면군 지휘 조아범(250)[第一方面軍 指揮曹亜范 (250]

2방면군 지휘 김일성(350)[第二方面軍 指揮金日成 (350]

3방면군 지휘 진한장(300여명)[第三方面軍 指揮陳翰章 (300人余)]

이 중 제2방면군(第二方面軍), 3방면군(第三方面軍)은 기존 제2로군(第二路軍)의 활동 범위로 되어 있던 동만주의 화룡(和竜), 안도(安図), 연길(延吉), 왕청(汪清), 혼춘(琿春) 등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 이 활동 구역으로 통합 되었다.

 

(4)1로군(第一路軍)의 괴멸

중일전쟁이 발발했던 1937년 소련은 만주국, 조선과 접하는 국경을 경계하여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조선인) 모두 친일세력으로 간주하고,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렇게 한 것은스탈린의 대숙청에 처음부터 관계 당국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에 있었다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 겐리후 류시코후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위태로워 것을 헤아려 19386월 연해주에서 국경선을 넘어 만주국로 망명했다. 류시코후는 혼춘( 琿春)헌병대에 연행 된 후 도쿄의 참모 본부에 보내 망명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망명 사건에서만 아침의 국경은 극도로 긴장하여 소련군과 일본군 수비대가 충돌하는 장고봉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이듬해 1939년 노몬한 사건이 일어나 일단 휴전은 되었지만, 일본측의 경계가 높아져 관동군에 의해 만주 국내 항일세력에 대한 철저한 단속이 시작 되었다. 2 독립수비대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에 만주국군(満州国軍) 7개여단, 경찰대 30개 대대가 배속되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하여 대적 하게 되었다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작전은 군, 경찰, 행정기관, 민간조직의 연락을 긴밀히하여 그물망을 잘게 치고 게릴라 활동을 봉쇄 민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 일반 주민에게 토벌대와 게릴라 부대가 교대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신변안전을 위해 쌍방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토벌대가 게릴라 부대를 몰아 약탈과 납치 위협을 완전히 봉쇄하여 치안을 유지한다면 게릴라 부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적극적으로 토벌대에 협력하게 된다. 결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사람이 없는 삼림 지대에 몰려 식량과 의류의 확보도 곤란해 질 것이다

 

토벌대 중에서도 가장 유능하게 움직인 것은 정빈(程斌) 등 투항한 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구성하고 있는 경찰부대였다. 그들의 활약으로 제1로군(第一路軍)은 점차 멀리 분산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40년 초에는 경위여장(警衛旅長) 방진성(方振声) 체포되어 처형, 투항들도 잇 따랐다. 그 투항자 때문에 총사령관 양정우의 동정(動静)이 알려져 단신 행동을 강요 될 때까지 되었다. 양정우는 몽강현(濛江縣)[현재는 양정우을 따서 정우현으로 개명 됨]에서 산 일에 들어간 주민과 접촉하여 통보돼 투항을 거부 사살 되었다. 토벌대는 최후의 절개에 흠모하여 불교행사를 영위하고 영혼을 달랬다.

 

양정우 사후, 1로군(第一路軍) 지도자로 추대된 위증민(魏拯民)은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주력 부대를 북상시키기 위해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남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그 직후 지휘관 조아범(曹亜范)이가 대원에 의하여 살해 되었고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내분에 의해 해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김일성이가 이끄는 제2 방면군(第二方面軍)100 ~ 300명 정도의 집단 활동을 유지하고 습격, 약탈, 납치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19403월에는 안도현(安図県) 대마록구(大馬鹿溝) 산림 경찰대(森林警察隊)를 습격하여 사상자 각 2명의 피해를 주고 금품 23천엔을 약탈하고 대충 약 140명을 납치했다. 이틀 뒤 피랍자 중 25(일본인 1, 조선족 13, 만주족 9, 백계 러시아인 2)을 석방. 나머지 납치 인질 70여명과 함께 도망을 계속했기 때문에 만주 경찰과 마에다군단(前田隊)의 쫓는 곳이 되었지만, 2 방면군(第二方面軍)의 매복으로 마에다대(前田隊) 140명 중 일본측 문서 전사자 수 58, 전상자 27, 실종자 9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주고 건재함 인상을 남겼다.

 

이 가을에서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활동은 다시 활발해지면서 제2 방면군을 주요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김일성 부대도 소수 부대에 분산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의식(衣食)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제1로군 중추의 위증민도 연락이 취하지 못하고 김일성을 포함한 수십명은 8월에서 10월경에 자신의 판단으로 소련령으로 도망쳤다. 소련 측과의 연락도 없이 갑자기 입소였기 때문에 김일성은 억류 돼 한때 투옥 되었다.

 

3 방면군(第三方面軍)1939년 제2로군 제5(第二路軍第五軍)과 대규모 공동 작전에서 한때 안도현 대사하진(安図県大沙河鎮)을 점령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해 겨울부터 군 단위(軍単位)의 활동은 불가능하므로, 전사, 전상(戦傷), 도망, 투항자가 이어 괴멸 상태가 되었다. 1940년말 지휘관의 진한장은 추격에 의하여 전사한다.

그러나 활동을 계속 되어 김일성 부대 입소 이후 소수 인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소련에 입국했다. 13여단(十三団)을 이끌던 최현도 그 안에 포함돼 있다.

 

1로군 총사령부(第一路軍総司令部)도 괴멸 상태였지만, 194011월경에는 군의관 처장 서철(徐哲)도 경위대 살아남은 몇 명을 데려 입소했다. 만주에 남은 제1로군 수뇌부에 관해서는 19411월에 오성륜(呉成崙) 투항 귀순. 3월 질병에 시달리고 고립되어 있던 위증민이 토벌대에서 발견되어 전사 혹은 병몰 후 발견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제1로군의 만주에서의 활동은 거의 끝났다.

 

1939年秋魏拯民左二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指戰員在一起

(5)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과 소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원래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재편 된 것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있었지만, 소련의 극동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한 대응은 상황에 따라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1로군(第一路軍)의 활동 범위는 소련 국경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원래 지원을 받을 수도 적었지만 국경 근처의 동만주나 북만주에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 밀접하게 소련과 염려 했다.

 

국경선이 긴장하고 있던 1938년 말에는 개편 이전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제65(第六軍五師)가 일본군에 쫓겨 부대마다 월경했지만 사단장(師長)이 체포 될 뿐만 아니라 전원이 신장성(新疆省)으로 보내졌다.

 

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은 함께 대규모 내분을 안고 있었지만, 그 조정(調整)에 지도력을 발휘하고 양군 통해의 중심이 되어 있던 것은 제2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 겸 정치 위원 주보중(周保中)이었다. 1940년의 1월 그가 중심이 되어 소련 극동당국과 1차 하바롭스크 회의를 받고 중국 공산당 중앙과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황 소련 극동당 조직과 극동 방면 군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임시 지도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합의가 성립했다.

 

194011월 주보중과 참모장 최용건은 사전에 소련측의 연락을 받고 부대마다 입소하고 살아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다른 대원도 그 뒤를 이었다. 투옥되어 있던 김일성의 신원을 보증한 것은 주보 중이다.

 

3로군(第三路軍)은 총사령관 이조린(李兆麟) 등의 간부는 입소했지만, 소련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고, 참모장의 허형식(許亨植)의 지휘 아래 부대의 절반이 북만주에 남아 싸움 계속했다

.허형식(許亨植)1942년 경안현 청봉령(慶安県青峰嶺)에서 장렬한 전사를 이루었다. 일단 입소했던 정치 위원의 김책은 허형식(許亨植)의 의지를 이어 1943년 연말까지 입소를 거부하고, 봉산현(鳳山県)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1941년의 시점에서 제1로군에서 입소한 인원은 88명 정도 제2로군에서 110명 정도로, 200여명이 소련령에 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동북항일연군 김일성 (뒷줄 중앙)

1939년 김일성(앞줄 좌로부터 네번째)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지휘부 전투지휘자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

[金日成前左四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部指戰員攝於1939金日成於1932年春到安圖創建游擊隊先後擔任汪清反日游擊大隊政委東北人民革命軍第二軍獨立師第三團政委第二軍第三團政委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三師後改為第六師師長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

 

東北抗日聯軍第第一路軍女戰士左三為金貞淑

 

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警衛旅部分指戰員攝於1939年夏

 

3.그 후

소련에 망명한 구성원은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88독립저격여단)에 편입 되었다. 이 여단은 소련군에 흡수된 형태였지만, 소련 사람을 섞으면서 그 구성원이나 직책 등 주보중이 여단장되는 등 대체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중국 공산당은 이 여단을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이라고도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대원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분리 된 소련군 정보국 직속되어 만주국에 침투해 공작에 종사했다. 위험한 임무에 종사한 그들이었지만, 숙청과 일본군의 스파이로 간주 형을 받은 사람도 있다.

 

또한 김일성은 스스로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에 편입 된 것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출판)"로 인정하지만 소련군과는 연계된 것만으로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88독립저격여단)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조선반도의 해방군이 되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 대원은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38 도선 이북의 조선)에 돌려 보내 북한 인민위원회와 조선 공산당 (이후 조선 로동당) 및 조선 인민군의 요직에 올랐다.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만주파 (파르티잔파, 빨치산파)라는 파벌이 되어 남로당파 (남조선 노동당 출신), 연안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중국에서 귀국 한 자, 조선의용군) 소련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파견 된 자. 소련군 출신이나 행정,기술관료 출신), 갑산파(보천보 전투 등으로 동북항일연군과 공동 투쟁 한 자)을 잇따라 숙청하고 북한 권력을 독점했다. 조선 로동당에서 정적을 제거하고 구축한 만주파는 1967년에 당의 지도 이념으로 유일사상 체계를 채택하고 이후 북한은 주체 사상에 기초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걸어 가게 된다.

 

김일성은 만주국(만주지역 조선족 자치정부) 조선 공산당 활동가에서 소련군 예하 각 민족 빨치산부대로 그리고 2차대전 때는 소련측(좌파진영) 연합군 조선인(한국인) 부대로 활동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보다는 철저한 마스-레닌주의 노선 공산주의자이며 스탈린 추종세력이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스탈린을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후에 그는 바트당(아랍 사회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 공산당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이론 비슷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 자본체제) 이론이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과 소련 공산노동당 그룹이 있다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이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라면 공산노동당 그룹이 교조주의자들이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사회주의 공화국(사회주의 국가) 세력은 국가자본주의 일본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할 때 민족해방과 왕권신수설 전체주의 군주, 지주계급이나 매판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혁명 체제 사회주의 국가 승리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개인 우상화, 신격화로 1인 장기집권으로 왕권신수설에 도취되고 있다

 

만주국을 승인한 국가

중국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역, 교통, 통신을 위해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3년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33)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323, 법률상 1941413), 이탈리아(19371129), 스페인(1937122), 독일(1938512), 헝가리 (193919)에 승인되었다.

 

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61), 프랑스(1940712), 루마니아(1940121), 불가리아(1941510), 핀란드(1941718), 덴마크(19418),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82)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1130), 태국(194185),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만주국 인구와 오족협화

만주인(한족·만주족·한민족) 30,190,00097.8%

일본인 590,7601.9%

타인종(러시아인·몽골인 등) 98,4310.3%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이후 만주지역 항일운동은 만주국 협화회(의회) 조선족 협화회(만주국 의회 조선족 의원, 조선족 자치조직)를 파악해야 잘 이해할 수 있다

만주국 협회(만주국 의회)는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일족(야마토 민족의 연합정부 오족협화를 의미한다

만주국은 강덕제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야마토 민족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관동군이 주도하였다.

김일성(김성주)은 만주국 건국 이후 남만주나 동만주 지역에서 반일이나 반만주국(반만국)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의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헌병 보조원[만주군 통역 ]으로 생활했다

만주국과 조선총독부는 다른 성격이다

만주국은 자치를 보장된 위성국가이며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직할지역이다

만주국 협화회에 가담한 조선족 자치조직이 만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가 조선족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종일전쟁 때 중화민국 지원국과 일본제국 괴뢰국

중화민국 지원국:

미국 (1941-)

소련 (1937-1941, 1944-)

영국 (1942-)

나치 독일 (1933-41)

공동 교전국

몽골 몽골 인민공화국 (1945)

비시 프랑스 비시 프랑스 (1940)

 

일본제국 괴뢰국가:

만주국 (1932-)

몽강연합자치정부 (1936-)

왕징웨이 정권 (1940-)

둥방공자치정부 (-1938)

중화민국 임시정부 (-1940)

중화민국 유신정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기조가 일어나자, 당시 만주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인민전선론'이 대두됐다

조국광복회 간부들은 대부분이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로 채워졌으며, 군사활동뿐 아니라 국내 정치활동에도 주력,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자·천도교·지주까지 참가시켰다[조국 광복회와 보천보 전투]

북한 공산주의자 김일성, 김책, 강건 등 은 만주지역에서 만주국 조선 공산당 항일 운동이 소련정부의 대일정책에 따라 움직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이 중일전쟁때 중화민국 지원국일때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활동이 대단했고 소련이 공식적으로 만주국을 승인할 시기에는 1941년 부터는 만주국 내부에서 공산당 활동이 침체되었고 협력자들이 등장했다 1944년 경부터 소련이 연합군으로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주도할때는 만주국 내부 공산당 세력들이 반만주국 반일 투쟁 활동과 만주국 점령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제1전선 구축 소련군 주도, 제2전선 구축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공산주의자 주축으로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만주국 오족협화] 소련 제1극동전선군 88독립 저격여단 연합으로 추진 되었다

 

193777일 중일전쟁과 소련의 만주국 승인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 등을 정리될 때 정확하게 만주지역 조선족 좌파(소련 원조 공산당)나 우파(중국 장개석정부) 항일운동을 재정리할 수 있다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 등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입니다. 중국에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는 조선족이 약192만명에서 약 200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위구르족(후이족=회족, 신장),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입니다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었습니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합니다

조선족이 만주국에서도 조선족 자치정부로 참여하여 상류층으로 생활했습니다

 

 

동북3성 다수민족 한족,만주족과 소수민족 조선족, 거란족, 몽골족 자치정부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1943, 소비에트 유격대.

 

파르티잔(러시아어: партизан, 영어: partisan)은 무장한 전사로서 정규부대의 정식부대원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파르티잔을 음차한 빨치산이라는 단어로도 부른다. 제복이나 계급장 등도 없기 때문에 인식 내지 판별이 어렵다. 파르티잔 전투는 거의 예외 없이 침략군 내지 정복군, 점령군, 식민주의자 등에 대한 방어 전쟁을 수행한다. 또한 내전이나 기타 국가 내부의 분쟁에서도 볼 수 있다. 파르티잔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국민의 해방 요구에 응하여 전투 등을 수행한다. [소련군 2극동전선군 제88독립저격여단이 각 민족 지역 빨치산부대이다]

단체

-소련 유격대

-조선인민유격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빨치산파

 

유사 단어

-시민군

-의병

-레지스탕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점령한 것은 19414월이었지만, 그 해 6월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된 뒤에야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원들이 파르티잔 분대를 조직화하여 추축국의 점령에 대한 민중 봉기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19419월까지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걸친 넓은 지역이 파르티잔과 체트니크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이 두 운동단체가 주로 체트니크의 도발로 이내 내전에 휘말렸으며, 194111월 독일군이 두 저항군 세력을 세르비아에서 모두 축출했다. 그 후 2년 동안 파르티잔은 독일군을 상대로 군사적으로 힘든 싸움을 벌였는데 체트니크가 기반을 잃은 반면 파르티잔은 수적으로 세력이 불어났다.

 

이것은 침략 추축군에 대한 통일된 저항정책으로 모든 인종의 유고슬라비아인을 흡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체트니크들은 세르비아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기본적으로 독일군과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1943년말까지 연합군이 보기에 파르티잔은 독일군에게 맹렬히 저항하는 반면 체트니크는 상당수가 사실상 독일군과 협력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연합군측의 정부들은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티토를 유고슬라비아 저항군의 지도자로 인정했다. 그때부터 영국과 미국의 무기와 장비가 파르티잔에게 계속 증량·공급되어 파르티잔들의 병력이 증강되었다.

 

1943년말까지 파르티잔이 약 30만 병력으로 늘어나 독일군 20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었다. 파르티잔은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7차례 유도하여 다수의 적군이 다른 연합군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1944년 여름에는 파르티잔이 유고슬라비아의 산악지방을 대부분 장악했으며, 10월에는 소련 적군(赤軍)의 베오그라드 해방전에 파르티잔 부대가 참가했다. 대전중에 파르티잔은 2차례의 정치회담(194211월의 비하치 회담과 194311월의 자즈체 회담)을 개최하여 그들이 해방시킨 지역들 내에 지방과 연방의 임시정부들을 수립했다. 파르티잔이 장악한 이 지방정부망은 공산당이 전후에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1945년까지 티토의 공산당은 정치적·군사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대전중 파르티잔 사이에 형성된 티토에 대한 충성심과 국민적인 감정이 1948년 티토가 스탈린의 정치적 공격에 저항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 파르티잔의 발음이 전와되어 빨치산이 되었다.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1개이다

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 여단 1 대대장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 88독립 저격여단 사실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부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남은 자들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활동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 편성 동북 항일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88독립저격여단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 소련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받은 적군 계급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지휘 관직 붉은 군대(소련군) 장교 임명 되었다. 병사 적군 군복 착용했다.

 

1944 4 현재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 - 스 메르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9 ~ 1943 7 현재)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
88 여단 병사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 주보 1940 ~ 1943 사이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 1945 10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이 사진은 김일성이 토벌군에 쫓기다가 소련으로 도주했을 당시 오케얀스카야에서 좌로부터 김철호(최현의 부인), 리영숙(안영의 부인), 김정숙(김일성의 부인), 황순희(류경수의 부인 조선혁명박물관장)의 모습이다.

 

1941년 동북항일연군 전투지휘자들이 소련 남부 야영 훈련장에서 촬영한 사진

[在南野營整訓的部分東北抗日聯軍指戰員攝於1941

前右金日成

一排右李英淑第七軍戰士)、右三金貞淑第二軍戰士)、右四黃順姬第二軍戰士)、右五金哲鎬第二軍戰士)。

二排右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

三排右一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三排右一柴世榮右二季青。]

 

제88 독립저격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青, 중국인), 최현(崔贤), 안길(安吉)

88독립 저격여단 소부대 활동시기 촬영한 사진[在小部隊活動時期的合影]

金日成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營長

季青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四營政治副營長

崔賢曾任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一師後改為第四師第一團團長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三團團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第一連連長

安吉曾任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四團政委第三方面軍參謀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政治副營長

 

동북항일연군 지도여단의 일부[東北抗日聯軍教導旅部分乾部]

일렬(一列)심태산(沈泰山)최명석(崔明錫)김경석(金京石)서철(徐哲)장광적(張光迪)

두렬(二列)바슈코비츠(瓦什科維茨,와십과유자)최춘국(崔春國)강신태(姜信泰)양청민(楊清海)도우봉(陶雨峰)주암봉(周岩峰)

삼렬(三列)장석창(張錫昌)유철석(劉鐵石)범덕림(范德林)고만유(高萬有)교수귀(喬樹貴)유안래(劉雁來)진덕산(陳德山) [19457月的合影(19457월 촬영)]

 

19475, 왕효명. 팽시로, 왕일지 등 동북항일연군 관계자는 조선인 출신 동북항일연군 인사를 조선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만났습니다

[19475王效明彭施魯王一知分另受有關部門委派先後赴朝鮮平壤圖為他們與原東北抗日聯軍的朝鮮戰友在朝鮮人民軍總司令部合影留念]

앞열(前排)김일(金一)주위(周偉)왕일지(王一知)왕효명(王效明)안길(安吉)팽시로(彭施魯)

가운데열(中排)이영호(李永鎬)최광(崔光)김광협(金光俠)심태산(沈泰山)최춘국(崔春國)유창권(柳昌權)이을설(李乙雪)

뒷열(後排)박우섭(樸禹燮)김려중(金麗重)최용진(崔勇進)강상호(姜尚鎬)유경주(柳京珠)오진우(吳振宇)김창봉(金昌鳳)오백룡(吳伯龍)전문섭(全文燮).

 

 

 

 

 

소련군을 환영하는 김두봉 북한 초대 국가수반과 북한지역 지도부들

 

 

 

 

만주 전략공세작전

만주 전략공세작전(러시아어: Манчжур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만츠주르스카야 스트라테기체스카야 나스투파텔나야 오페라치야[*]) 또는 줄여서 만주 전역(러시아어: битва за Маньчжурию), 다른 명칭으로 소련의 만주 침공은 194589일 소비에트 연방이 일본 제국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침공해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 제국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앞당기는데 기여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또 다른 괴뢰 정권인 몽강국(내몽골 지역), 일본의 점령지였던 한반도, 사할린, 쿠릴 열도에 대한 공격도 포함된다. 이 전투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이후 맺은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이루어졌다. 얄타 회담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유럽 전쟁이 끝난 3개월 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로 이미 다른 연합국과 약속한 바 있었다. 공격은 정확히 나치 독일이 항복한 58(모스크바 표준시로 59043)에서 3개월이 지난 89일에 이루어졌다. 86일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고, 8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은 이 두 원자 폭탄 투하 못지않게 일본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쟁이 계속 되었더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다른 연합군이 규슈에 도달하기 전에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까지 점령할 생각이었다. 독소 전쟁으로 경험을 쌓았고 질적으로 크게 발전한 소련군과 비교하여, 일본군은 전력의 태반이 남방으로 가 있는 데다가 새로 모집한 병력은 훈련 부족과 10만 명 이상이 소총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물자 부족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만주 곳곳에서 일본 관동군은 격파되었고 일본은 815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지만, 소련군의 공격은 8월 말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8월의 폭풍 작전(Operation August Stor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1983년 미국의 군사역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의 논문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으로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은 이러한 이름을 전혀 쓰지 않았다.

1.배경

할힌골 전투에서의 참패를 계기로 일본은 소련군의 강력함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소련과의 충돌을 가급적 삼가고자 하는 것이 군부의 일반적 의견이었다. 반면, 소련에게 있어서 일본은 잠재적인 적국임이 분명했지만, 머나먼 아시아보다 당장 눈앞의 나치 독일이 더 큰 위협적 존재임이 분명하였기에, 소련 역시 일본과 굳이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여, 19414월에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에 더 심화되었다. 당장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소련에게 일본은 관심쓸 겨를이 없었다. 일본 역시 그 시기에 대미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독일의 희망사항이던 소련 뒤통수치기 식의 선전포고는 할 여력이 없었다. 덕분에 소련은 극동과 시베리아의 병력을 모두 유럽으로 돌려서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는 19455월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최대 주적인 독일을 제거한 소련은 일본을 공격할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동시에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 항전에 생각보다 큰 희생을 치른 미국은 거듭해서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올림픽 작전이 벌어지면 서방 연합국은 백만 명 정도의 엄청난 인적 손실이 예정된 마당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이 손실을 없애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일본의 위협을 제거하고 극동에서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와 소련의 필요가 맞물리자 스탈린과 소련군 지도부는 유럽에서 승리한 뒤 3개월 이내에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만주 공격을 결정하고 그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 스타브카는 8월 중순 만주지역에 전면적인 공세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미국이 86일 히로시마에 핵공격을 단행하자, 일본이 조기에 항복해 향후 전리품 분배에 참여할 수 없게 될 거라는 불안감은 소련의 공세 계획을 앞당기게 했다.

 

88일 오후 5(모스크바 현지시각, 서울·도쿄 시각으로는 오후 11)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사토 나오타케 주소 일본 대사를 불러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의 파기와 선전포고를 통보했다. 89일 오전 0시에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1) 관동군의 상황과 소련군의 딜레마

만주를 관할하는 일본 중 25개 사단이 1945년 창설된 신규사단이고, 그 병력 자원의 질적 수준도 최하였다. 게다가 관동군의 사단 편제는 당시 세계적으로 표준이 된 3개 연대+1개 포병연대의 삼각편제가 아닌 제1차 세계 대전식의 4개 연대 편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동군이 아무리 장비나 병력이 빈약하더라도 만주국군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가까운 병력 수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독소전쟁에서 군인 1천만 명을 포함해 약 3천만 명 이상에 이르는 인적 손실을 입은 소련으로서는 관동군과의 싸움에서 다시 큰 인적 손실을 낸다면 더욱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할 판국이었다.

 

또한 만주의 지형 또한 소련군의 공격을 어렵게 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만주의 주위 삼면은 산과 삼림으로 에워싸여 있어 통행이 어려운데, 특히 서쪽의 대싱안링 산맥은 해발 1,900m에 이르고 산 너머 내몽골 지역은 광활한 반사막 지대이다. 몇 안 되는 고개도 늪지인 데다가 장마철이 되면 더 심해져서 습도, , 진흙으로 작전을 펼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통행의 어려움에 더해서 만주의 엄청난 크기는 잠재적인 공격 측의 기를 꺾어 놓았다. 만주 북쪽 끝에서 황해까지의 거리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코 앞까지의 거리였다. 관동군 사령부는 이 험한 지형을 이용, 인적 물적 열세를 지형적 이점으로 상쇄해 소련군을 격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소련군이 대싱안링 산맥을 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동쪽, 북쪽, 북서쪽의 철도를 따라 집중시켰다. 이 지역의 국경은 수많은 국경 요새들로 보호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1방면군은 종심 방어를 위해 휘하 부대들을 후방으로 물렸다. 3방면군은 만주의 서부를 담당했는데, 휘하 병력은 만주 평원 안쪽에 넓게 퍼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붉은 군대가 마냥 물량만으로 관동군을 이기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2) 소련군의 공격 준비

대일전 시작 전 극동 지역에는 종래에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satern Front)과 보로실로프(현 우수리스크)의 연해주군단(Primorsky Group of Forces)이 있었다.

 

스탈린은 만주에서 한참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자 극동의 전선군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자체 사령부인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하바로프스크에 설치하고, 그 아래에 만주동부 전선을 담당하는 연해주군단을 개편한 제1극동전선군, 만주북부 전선을 담당할 종래의 극동전선군을 개편한 제2극동전선군과 만주서부 전선을 담당할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을 설치한다. 극동군 총사령관에 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를 임명하고 공격 준비에 착수하게 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과의 전투 전력이 있는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적임자라는 말이 많았으나 스탈린은 바실렙스키를 택했는데 이는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주코프의 위신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렙스키는 위의 딜레마들을 고려하며 단독으로 8월의 폭풍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에 따른 전선군의 진군 방향과 사령관들 교체를 시작했다.

 

극동의 각 전선군 사령관들이 스타브카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제1극동전선군에는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독일 북부 집단군을 상대로 많은 경험이 있었으며 경보병 군단의 창설자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가 임명되었고 트랜스바이칼전선군에는 쿠르스크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서 명성을 쌓고 중앙유럽 중부를 석권하며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임명되었다. 2극동전선군에는 종래 극동전선군의 사령관인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이 임명되었다. 극동함대 사령관에는 해군대장 이반 유마셰프 제독이 임명되어 쿠릴 열도와 사할린 상륙 작전을 책임질 예정이었다.

 

한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이 제한된 데다가 극동에 전방 배치된 소련군이 별반 활동을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458월에도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고, 심지어 1945년 봄까지도 소련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연히 이와 달리 소련군 지도부는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된 최정예 부대 약 90여 개 사단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은밀하게 극동 지역으로 전개시켰다. 부대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 자신들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4년 동안이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소련으로서는 이 작전은 엄청난 역작이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많은 부대가 대개 중년과 소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2. 전개

소련군은 보로쉴로프(현재의 우수리스크)의 제1극동전선군, 하바로프스크의 제2극동전선군, 그리고 시베리아와 몽골에 전개한 트란스바이칼전선군을 통해 만주를 좌우로 협격하는 것을 시도했다.

 

트랜스바이칼전선군은 제6근위전차군을 주력으로 하여 고속 진격과 이를 통한 만주와 중국 본토의 단절, 일본군의 분산 및 포위를 시도했다. 이들의 좌측을 엄호하는 제36군은 하이라얼을 공략하는 한편, 다른 부대로 남하하여 일본군을 대싱안링 산맥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1극동 전선군은 동쪽에서 만주의 중심으로 진격하며, 813일에는 무단장까지 진출,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여 815일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은 주력부대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로 진격하여 함경북도 일대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조공 성격인 제2극동전선군은 15군과 2군을 투입해 각각 하얼빈과 치치하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러한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 관동군은 나름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장비, 물자, 병력,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소련군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독일을 상대로 단련된 소련군의 고속 진격은 독일이 1940년에 보여준 전격전의 재현이라고 할 정도였다. 소련군의 전차 및 기계화부대의 쾌속 진격 앞에 관동군은 산산조각이 났고, 주요 도시나 요새는 보병들의 맹공격으로 하나하나 함락당했다.

 

815일 일본의 항복 당시, 소련군은 이미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관동군에 대한 전과확대 단계에 진입한 상태였으며, 한반도에서도 89일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811일 웅기(선봉)를 시작으로, 812일에는 나진을 점령하고 813일에는 청진으로 진격했는데 이곳은 일본의 항복 후에도 전투가 계속되어 816일이 돼서야 점령했고 소련의 고려인 정상진도 소련 부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4] 소련군은 일본의 항복선언을 무시하고 계속 진격해서 한반도의 함흥을 거쳐 중부의 개성시(823일 진주, 92일에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 38선 분할 점령에 합의하면서 철수)와 랴오닝 반도의 끝인 뤼순까지 진출했다.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은 베이징을 공격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3. 결과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89~15)의 짧은 기간동안 2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과 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쿠릴 열도 상륙 작전(러시아어: Курильская десантная операция, 영어: Invasion of the Kuril Islands, Kuril Islands Landing Operation)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8월 소련군이 일본 제국이 지배하던 쿠릴 열도에 상륙한 작전이다. 이 작전이 성공하여 쿠릴 열도는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Soviet marines or infantry are loading on a ship[쿠릴 열도 상륙 작전]

 

 

2극동전선군

 

아무르강을 건너는 제2극동전선군 예하 제2적기군

 

2극동전선군 (2-й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фронт)은 서구의 군집단과 같은 규모인 소련 육군의 전선군 중 하나였다. 이 군단은 만주 전략공세작전 직전에 창설되어 194585일 임무를 시작했으며 같은 해 101일 해산되었다.

1.역사

창설된 직후 제2극동전선군은 일본 제국의 제1방면군과 제5방면군, 4군을 상대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2극동전선군이 상대해야 할 일본군은 만주, 사할린섬, 그리고 쿠릴 열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전선군이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을 건너 일본군의 저항을 무력화하는데 성공했다. 820일 전선군의 제15군이 하얼빈을 점령했으며, 이후 제2적기군이 칼로찬과 륜츠전 지역에 입성했다. 15군은 이 사이에 산신 군을 점령했고, 5소총군단은 볼리 지역에 입성했다. 대부분의 일본군은 820일 이후 소련군에 항복하기 시작했다.

한편 811, 16군은 남부 사할린에 공세를 가해 818일까지 섬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819일부터 25일까지 제16군은 홀름스크 항구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고 코르사코프에서 공정작전과 상륙작전을 동시에 수행했다. 825일 소련군은 사할린의 행정중심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점령했다. 9월 초 일본군의 저항은 끝났지만 소련군의 침공이 지연되어 일본 본토에 위치한 홋카이도 침공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한편 제101소총사단은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45101, 스타프카 VGK의 지시로 전선군은 해산되어 극동군관구로 재조직되었다.

 

2.19458월 구성부대

T2극동전선군은 194589일에 아래와 같은 예하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2적기군

-제5소총군단

-제15

-제16

-제10항공군

-캄차카 방어군단 제101소총사단

-아무르 군사전단

-북태평양 전단

 

3.참전

만주 전략공세작전의 주요 공격군[역할]

-만주 전략공세작전 남사할린 침공

-쿠릴 열도 상륙작전

-슘슈 섬 전투

 

-우파 민주국가(민주공화국, 입헌군주국) 이론[民營資本體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일본국 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 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미합중국 헌법[민주국가 헌법]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http://blog.daum.net/007nis/15876066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전문
http://blog.daum.net/007nis/15871495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로부터 해방법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독일 통일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048
*군국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전문과 평화주의 입헌군주제 일본국 헌법 전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4623
*러시아 연방 헌법[Конститу́ция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72
*中華民國 憲法(중화민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57658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http://blog.daum.net/007nis/15875575
*몽골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1736

 

 

-좌파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이론[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라오스 그리고 쿠바 등 5개국에 불과하다.[노동계급의 노농동맹(공산당) 령도(領導, 지도) 인민의회정부론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많은 분들은 노동자 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 나찌즘을 극우라고 표현하지만 좌익 파시즘으로 표현하고도 있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년 3월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69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베트남 헌법(2013년 개정)[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헌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http://blog.daum.net/007nis/15876070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제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제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제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이 의회 우위보다 강력한 지도자론(령도론)으로 나아갈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1인 전체주의 정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최고지도자)의 임기제한을 해야 인민회의정부(인민의회정부)가 될 수 있다. 중국 등소평헌법이나 쿠바 신헌법은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베트남도 형식상 국가주석 4년 중임제이다
북한정부의 혁명적 수령관은 공산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전제정치(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보다는 파시즘 민족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노선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이다 중국정부를 민주집중제(인민의회 정부론)라면 북한정부는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 파시즘 군정 김일성 김정일헌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