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鳩山氏が釜山大学で講演 「拉致ばかり取り上げ疎外」 본문
鳩山由紀夫元首相
鳩山由紀夫元首相は11~12日、韓国南東部の釜山を訪問。聯合ニュースなどによると、鳩山氏は11日、釜山大学での特別講演で「安倍晋三首相が北朝鮮による日本人拉致問題ばかりを取り上げ、米朝関係などで疎外されている」と述べた。
鳩山氏はさらに「日本政府がとるべき戦略は米朝平和条約(協定)が締結されるようにし、日本の安全を保障することだ」とし、「米朝平和条約締結後に日朝国交正常化を図ることだ」と語ったという。
鳩山氏は日韓の歴史認識について「戦争の被害者が『もう謝罪しなくてもいい』と言うまで、加害者は謝罪する心を持たなければならない」と強調。いわゆる徴用工問題について「1965年の日韓協定で個人の請求権問題が完全かつ最終的に解決されたわけではない」という自身の見解を繰り返した。
鳩山氏は12日には、釜山市内にある「国立日帝強制動員歴史館」を訪問。館内を見学後、屋上の追慕塔に献花し黙礼したという。
鳩山氏が言及した米朝平和協定は、北朝鮮が切望しているものであり、北朝鮮にとっては在韓米軍の撤退を意味する。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11 ~ 12일 한국 부산을 방문했다. 연합 뉴스 등에 따르면 하토야마 전총리는 11일 부산대학교에서 특별 강연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만을 거론하며 북미관계 등으로 소외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씨는 또한 "일본 정부가 취해야 할 전략은 북미 평화조약(협정)가 체결되도록 하고 일본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라며 "북미 평화조약 체결 후 북일 국교 정상화를 도모 것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토야마 씨는 한일의 역사인식에 대해 "전쟁의 피해자가"다시 사과하지 않아도 좋다 "고 말할 가해자는 사과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징용공(徴用工) 문제에 대해 "1965년 한일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 된 것은 아니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반복했다.
하토야마 전총리는 12일에는 부산 시내에 있는 "국립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을 방문. 관내를 견학 후 옥상 추모탑에 헌화를 했다고 한다.
하토야마 씨가 언급한 북미 평화협정은 북한이 갈망하고 있는 것이며, 북한에게는 주한 미군의 철수를 의미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하토야마 총리 (2010년)
하토야마 유키오(鳩山 由紀夫, 1947년 2월 11일 ~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93대 내각총리대신이다. 지역구는 홋카이도이며, 민주당의 대표로서 2009년 8월 30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 2009년 9월 16일에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됐다. 2010년 6월 2일,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과 함께 사임하였다.
일본의 유력 정치 명문가 출신으로 도쿄도 고이시카와 구에서 태어나 증조부 하토야마 가즈오는 중의원 의장을 지냈고,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는 1950년대에 총리를 지냈으며, 첫 번째 자유민주당 정권을 담당하였다. 외조부 이시바시 쇼지로는 브리지스톤 창업자다. 부친 하토야마 이이치로도 참의원으로 재직하며 1970년대에 외무장관을 지냈다. 동생 하토야마 구니오도 유력 정치인으로 여러 부처의 장관을 지냈다.
도쿄 대학 공대를 졸업한 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공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으며, 이후 도쿄 공업대학, 센슈 대학에서 경영학 조교수로 일하다가 1984년에 정계 입문을 이유로 퇴직하였다.
이후 자민당에 입당, 다나카파의 신인으로서 1986년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홋카이도를 지역구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지역구 내 득표율 2위의 성적으로 당선되었다. 1988년에는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 라는 초파벌적 정치집단을 결성, 리쿠르트 뇌물수수 사건 등의 당내 비리를 폭로하였고, 이 집단은 신당 사키가케로 이어졌다.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당 사키가케에 참여하였고, 55년 자민당 체제의 붕괴와 함께 등장한 호소카와 내각에서는 내각 관방 정무부장관을 담당하였다. 이후 성립된 자사사(自社さ) 연립정권 하에서는 사키가케의 간사장을 맡았다. 1996년에는 사키가케를 일신하여 새로이 창당하고자 하였으나 실패, 그 해 여음에 간 나오토, 동생 구니오 등과 함께 구 민주당에 참여했고, 1998년 개편된 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여 간사장을 맡았다. 1999년의 당 대표 선거에서 승리하며 당수가 되어 1999년~2002년까지 당 대표로 재직했다. 2002년 총선거에서 자민당에게 참패를 당하며 당 대표를 사직하였으나, 대표 사직 후에도 당내 최대 파벌인 하토야마 그룹의 대표로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중의원 선거에 계속 당선되어 2005년 총선에서 7선을 기록했다.
2007년의 참의원 선거의 대승 이후에도 간사장 직을 유지하였으나, 2009년 5월에 오자와 이치로 당 대표가 정치 자금 스캔들로 사퇴하면서 열린 대표 선거에서 오카다 가쓰야를 꺾고 승리, 7년여 만에 당수로 돌아왔다.
대표 취임 후 여러 보궐 선거에서 승리하며 돌풍을 일으킨 가운데 아소 다로 총리가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이에 따라 2009년 8월 30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당이 총 480석 중에서 308석을 얻는 압승을 거뒀고, 1955년 그의 조부가 기틀을 다진 자민당 장기 집권 체제가 54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9년 9월 16일에 열린 특별 국회에서 총리로 지명되었다
총리 취임 이후에는 선거 전에 내건 공약의 이행을 놓고 자민당 등과 대립, 연립정당인 사민당, 국민신당 등과도 마찰을 빚고 있었다. 주요 공약은 아동수당, 고속도로 무료화, 오키나와현의 미군 후텐마 기지 이전 등인데, 이 중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인해 미국의 심기를 자극, 대미관계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주범이 되었다. 5월 말까지 이전지를 확정짓지 못하면 총리직을 사임하기로 했었다.
이 외에도 전 비서의 정치자금 비리 등으로 야당의 공격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큰 정부의 복지수준을 주장하는 데 비해 선거를 이유로 증세에는 반대하는 포퓰리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어 각 언론사에서는 그 밑천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시일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2010년 6월 2일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후임은 간 나오토가 대행을 맡았다
출생: 1947년 2월 11일, 일본
직업: 정치인
성별: 남성
학력:
-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 동경대학교 졸업
경력:
2010.8 글로벌 서스테이너빌리티 위원
2009.9 ~ 2010.6 제93대 일본 총리
2009.5 일본 민주당 대표
- 일본 민주당 간사장
1996 일본 민주당 의원
1993 ~ 1996 일본 사키가케당 의원
배우자: 하토야마 미유키
종교: 침례교
사상:
하토야마 유키오는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의 영향으로 '우애'를 강조하였다. 그것은 유럽 연합의 선구자 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Richard Nikolaus von Coudenhove-Kalergi)백작의 '우애'이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자유, 평등, 우애'라는 세 단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 세 단어는 현재 프랑스의 나라 표어이다. 또한 이 '우애'는 프리메이슨의 이념이다.
그는 “자유주의는 사랑(애, 愛)이고, 이 사랑은 우애이다”라는 논리로 우애에 근거한 자유주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2001년에 오하시 교센(大橋巨泉)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맹해 중도좌파 정당으로서 성격을 선명히 하자”고 주장한데 대해 하토야마는 “민주당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할 수 없다”고 부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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