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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 민주화 시위 ‘유혈진압’ 주역 리펑(이붕) 전 中총리 사망 본문
1994년 3월 29일 방중한 김영삼 대통령이 리펑 총리와 만찬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9년 6·4 천안문(天安門) 사태 때 무력 진압을 주장했던 리펑(李鵬) 전 중국 국무원 총리가 지난 22일 밤 91세로 사망했다. 리펑은 장쩌민(江澤民·93) 전 국가주석과 함께 중국의 제3세대 지도부를 구성했던 인물이다.
87년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리펑은 이후 98년까지 총리를 지냈고, 이후 2003년 3월까지 우리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권력 2위로 군림한 기간은 16년이었다. 리펑은 28년 10월 중공 저장(浙江)성 군사위원회 서기인 리숴쉰(李碩勛)과 비밀당원 자오쥔타오(趙君陶) 사이에 태어났다. 그러나 리숴쉰이 31년 하이난다오(海南島)에서 체포돼 사망한 이후 10세 때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자로 입양됐다. 저우는 대장정 후유증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인 덩잉차오(鄧潁超)와 함께 여러 혁명 열사의 자제를 양자로 입양했는데 그중 하나가 리펑이었다.
재임 중 국무원 싼샤(三峽) 공정건설위원회 주임을 맡아 양쯔(揚子)강 홍수를 막는 싼샤댐 건설을 주도했다. 한국과의 수교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는데, 91년 5월 북한을 방문해 중국이 앞으로 “두 개의 코리아 정책을 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남북한 모두 유엔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자신만의 단독 유엔 가입을 바라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말라는 압박이었다. 결국 그해 9월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92년 4월 리펑 총리는 중국을 찾은 이상옥 외무장관을 만나 “물이 흐르다 보면 도랑이 생기게 마련(水到渠成)”이라고 말해 한·중 수교가 곧 이뤄질 것을 시사하기도 했다.
리펑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은 89년 천안문 사태다. 그해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 사망을 계기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 그는 양상쿤(楊尙昆) 주석 등과 강경 진압을 주장했고,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승인 아래 6월 3일 밤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를 무력 진압했다.
천안문 사태는 ‘인민의 아들’ 중국 인민해방군이 인민에게 총부리를 겨눴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의 큰 오점이 되고 있다. 리펑은 부인 주린(朱琳)과의 사이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뒀다. 아들 리샤오펑(李小鵬, 60)은 현재 중국 국무원 교통운수부 부장(장관)으로 있다
On March 15, 1989, US President George Bush visited China. He happily accepted the present–a bicycle from Premier Li Peng. (부시 전대통령과 이붕 전총리)
톈안먼 민주화 시위 ‘유혈진압’ 주역 리펑(이붕) 전 中총리 사망
1989년 중국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의 유혈 진압을 주도했다는 지목을 받은 리펑(李鵬) 전 중국 총리가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관영 신화통신과 홍콩 동망(東網) 등이 23일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리펑 전 총리는 고령에 따른 노환으로 전날 밤 11시11분께 베이징에서 숨을 거뒀다.
지난 2016년 이래 리펑 전 총리는 방광암으로 투병하면서 위중한 상태라는 억측이 분분했다.
리펑은 1988년부터 10년 동안 총리에 재임하고서 장쩌민(江澤民) 지도부 때 공산당 서열 2위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까지 역임했다.
그는 1989년 6월 톈안먼 광장에서 계속되는 민주화 시위를 강경진압하자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키고 자오쯔양(趙紫陽) 당시 당총서기를 실각시켰다.
리펑은 그해 5월19일 심야 베이징 시내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톈안먼 광장에서 계속 민주화를 촉구하는 학생과 시민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경고했다.
그는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에게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하자고 설득, 결국 수많은 희생자를 낳게 만들어 '톈안먼의 도살자'라는 악명까지 얻었다.
지금까지 리펑의 건강 이상설은 여러 차례 나돌았다. 2008년 2월 리펑이 중풍을 맞아 병원으로 급히 후송돼 목숨을 건졌다는 소문이 퍼졌다.
리펑이 뇌혈전을 일으켜 응급처치를 받았다는 일부 해외 매체가 전하기도 했다.
본명안 리위안펑(李遠芃)인 리펑은 1928년 10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태어났다.
리펑의 생부는 공산 혁명 초기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무장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생을 마친 공산혁명 열사 리숴쉰(李碩勛)이다.
공산중국 건국 이래 죽을 때까지 총리를 역임한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자로서 알뜰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또한 저우언라이의 동료로 1927년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 후 노동자 폭동을 조직하다 체포되어 처형된 자오스옌(趙世炎)은 외삼촌이다.
저우와 자오는 장제스의 북벌군이 상하이에 입성하기 전 노동자 폭동을 일으켜 군벌군을 쫓아내고 상하이를 장악했으며 이는 장제스가 상하이 무혈입성 후 반공 쿠데타를 일으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리펑은 이처럼 가계의 이력을 살펴볼 때 '태자당'의 '태자당'이다.
그는 공산중국이 최대 위기 상황을 맞은 톈안먼 사태 당시 초강경 정면 돌파 대응에 선봉에 섰다.
하지만 리펑은 공산당의 존망이 걸린 위기 국면을 벗어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음에도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는 오르지 못했다.
최고 지도자에게는 '통합'의 이미지를 갖출 것이 요구되는데 리펑은 이를 결여한 것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리펑은 장쩌민 총서기 아래서 '실세 총리'로 군림했으나 권력 서열 2위의 전인대 상무위원장(국회의장격)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중공중앙, 전인대상무위원회, 국무원, 전국정협 부고, 이붕 동지 서거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는 침통하게 선고합니다.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오랜 시련을 겪은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이며 걸출한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 중국공산당 제12기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제13기, 제14기, 제15기 중앙정치국상무위원, 국무원 전 총리,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인 이붕(李鵬) 동지가 지병으로 2019년 7월22일 23시11분 베이징에서 서거했습니다. 향년 91세입니다.
이붕 동지의 일생은 혁명의 일생, 전투의 일생, 빛나는 일생, 전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한 일생, 공산주의 사업을 위해 분투한 일생입니다. 그의 서거는 당과 국가의 중대한 손실입니다. 우리들은 그의 혁명정신과 숭고한 품덕, 훌륭한 작풍을 따라배워야 하며 더욱 긴밀히 습근평 동지를 핵심으로하는 당중앙의 두리에 굳게 뭉쳐 초심을 잃지 앓고 사명을 명기하며 중등권수준사회 전면 실현의 결승을 이루고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 위대한 승리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이붕 동지는 영생불멸하리!
리붕 동지 서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침통하게 선고했다. 중국공산당 우수당원, 시련을 겪어낸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전사, 걸출한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 중국공산당 제12기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제13기, 제14기, 제15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원 국무원 총리,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리붕 동지가 병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2019년 7월 22일 23시 11분 북경에서 91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리붕 동지는 1928년 10월생으로서 사천 성도사람이다. 그는 혁명가정에서 태여났으며 유년시기에 부친이 영용하게 취의하였다. 소년시기에 그는 가정의 영향을 받아 주동적으로 혁명사상을 접수하고 혁명사업에 투신할 뜻을 세웠다. 1941년 3월, 그는 연안에 가 혁명사업에 참가하여 혁명리론과 과학문화 지식을 교육받았으며 1945년 1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해방전쟁시기 그는 당조직의 호소에 향응하여 전선에 나갔고 선후하여 진찰기전업회사 기술원, 할빈유지공장 부책임자, 당지부 서기를 력임했다. 1948년 9월, 당조직의 배치에 따라 쏘련에 류학을 갔다. 1955년 귀국한 후 그는 주동적으로 기층에 가 사업하였는데 선후하여 풍만발전공장 부공장장, 총공정사, 동북전업관리국 부총공정사, 관제국 국장, 부신발전공장 공장장을 력임했다. 1966년부터 1979년까지 북경전력공급국 당위 대리서기, 혁명위원회 주임, 북경전업관리국 국장, 당조 서기를 력임했다. ‘문화대혁명’기간 충격을 받았지만 그는 당성 원칙을 견지하고 실사구시하게 투쟁을 진행하였다. 1979년 4월부터 전력공업부 부부장, 당조 성원 겸 화북전업관리국 당조 서기, 전력공업부 부장, 당조 서기, 수리전력부 부부장, 당조 부서기를 력임했다. 그는 창조적으로 당중앙의 ‘전력선행’ 전략을 관철하였는데 전력을 적당하게 앞서 발전시킬 것을 제기하여 우리 나라가 발전소 건설과 전력 생산, 전력망 관리 등 면에서 거족적인 진보를 이룩하도록 추동했는 바 우리 나라 전력공업의 걸출한 지도자, 핵발전사업의 중요한 개척자이다. 1983년 6월, 리붕동지는 국무원 부총리를 맡았으며 1985년 9월 중국공산당 제12기 5차 전원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로 추가 선출되였다. 그는 에너지, 교통, 중점건설대상 등 사업을 맡았으며 '7.5'계획 에너지교통 면의 발전방침 연구에 참여하고 종합적, 통일적인 교통운수체계 건립과 기본건설체제 개혁을 추동하고 중대한 기술장비의 연구 제조 템포를 다그쳤다. 1987년 11월, 리붕 동지는 중국공산당 13기 1차 전원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같은 달 6기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제23차 회의에서 국무원 대리총리로 임명되였다. 1988년 4월, 7기 전국인대 1차회의에서 국무원총리로 임명되였다. 그는 치리정돈과 개혁심화 방침을 견결히 관철하고 국민경제에 대해 거시적조절을 진행하는 새로운 수단과 새로운 방법을 탐색하여 우리 나라 경제가 곤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전시기에 들어서도록 추동했다. 1989년 6월, 중국공산당 13기 4차 전원회 후 강택민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중앙령도집단의 주요성원으로서 리붕 동지는 기치가 선명하게 중앙정치국의 대다수 동지들과 함께 과단한 조치를 취하여 동란을 제지하고 반혁명폭란을 진압하여 국내 국세를 안정시켰고 이 당과 국가의 전도, 운명과 관계되는 중대한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였다. 1989년 6월, 중국공산당 13기 4차 전원회의 후 강택민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중앙령도집단의 중요성원으로서 리붕 동지는 등소평리론과 ‘세가지 대표’ 중요사상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당의 11기 3차 전원회의 이래의 로선, 방침, 정책을 깊이 관철함으로써 당과 국가 사업의 발전을 위해 전심전력하였다. 1992년 10월, 리붕 동지는 중국공산당 14기 1차 전원회의에서 재차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93년 3월, 8기 전국인대 1차회의에서 그는 재차 국무원 총리로 임명되였다. 등소평 동지가 남방담화를 발표한 후 그는 등소평 동지의 개혁개방 사상 주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선전하고 관철하였으며 중국공산당 14차 대표대회 정신을 견결히 관철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개혁 발걸음을 다그치고 대외개방을 확대하고 거시적 조절을 강화하고 개선하였으며 당중앙의 령도하에 ‘9.5’계획을 주재하여 제정하고 한패의 국가 중대대상을 배치 및 건설함으로써 국민경제의 지속적이고 쾌속적이며 건전한 발전을 추동했다. 1997년 9월, 리붕 동지는 중국공산당 15기 1차 전원회의에서 또 다시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98년 3월, 9기 전국인대 1차회의에서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당선되였다.
중앙에 와서 사업한 후 리붕 동지는 국가교육위원회 주임, 국무원 환경보호위원회 주임, 중앙전문위위원 주임, 국가과학기술지도소조 조장, 중앙외사사업지도소조 조장 등을 겸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환경보호, 외교와 국방공업 등 령역에서 대량의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과학기술은 제1생산력’ 사상과 교육 우선발전 전략을 관철하였고 과학기술체제 개혁, 교육체제 개혁을 대폭 추진하였으며 지식인 정책을 착실히 락착하고 국가의 총체적 과학기술 실력을 제고하였으며 개혁개방 여러 전선에 대량의 인재를 수송하였다. 그는 환경관리를 강화하였고 실천중에서 환경보호 기본국책과 ‘세가지 동기화’, ‘세가지 통일’ 전략방침을 최적화였으며 중국특색 환경보호의 길을 초보적으로 개척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독립자주의 평화외교정책을 견결히 관철, 집행하였고 평화공존 5개 원칙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대량의 탁월하고 성과 있는 량자, 다자 외교활동을 조직, 참여하였으며 전방위적인 외교 새 국면을 개척하기 위하여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중공중앙의 통일전선과 인민정협의 방침과 정책을 견결히 관철하고 ‘한나라 두가지’제도 방침을 관철하였으며 향항, 오문 회귀의 각항 사업에 참여하고 지도하였다. 그는 삼협공사의 과학적, 민주적 결책과 건설중에서 중요한 작용을 발휘하였고 우리 나라 유인우주비행사업의 발전을 적극 지지하고 추동하였다. 리붕 동지는 우리 나라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중요한 개척자, 충실한 실천자, 적극적인 추동자이다. 그는 시종일관 중국국정으로부터 출발하여 개혁, 발전, 안정의 관계를 정확히 처리하였고 재무와 세무 체제, 금융체제, 가격체제, 대외무역체제, 사회보장제도와 국유기업 개혁을 통괄 추진하였으며 농촌정책을 안정시키고 경제특구의 발전을 지지하였으며 계획경제체제로부터 사회주의 시장경제체로의 전환을 온당하게 추진하고 20세기말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초보적으로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였다. 리붕 동지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민주법치 건설의 중요한 지도자이다. 그는 헌법수정소조 조장을 담임하면서 헌법 수정안 초안을 작성하고 전국인대에서 채택되게 했고 국가의 기본법 형식으로 등소평리론의 지도사상 위치를 확립하였으며 의법치국의 근본 방침과 책략,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기본 경제제도와 분배제도 및 비공유제경제의 중요작용 등 내용을 명확히 하였고 임기내에 법률과 관련 법률 결정초안 100여건을 심의 통과시켜 헌법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법률체계의 초보적 형성을 추동하였다. 리붕 동지는 인민군중 특히는 곤난한 군중들에게 깊은 감정을 지니고 빈곤해탈사업을 고도로 중시하였으며 국유기업 정리실업 종업원들의 질고를 다함없이 헤아려주었다.
2003년 3월, 리붕 동지는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 직무를 더는 담임하지 않았다. 지도자 일터에서 물러난 후 그는 호금도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중앙을 견결히 옹호하고 지지하였고 습근평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을 견결히 옹호하고 지지하였으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위대한 사업을 관심하고 당작풍 렴정 건설과 반부패투쟁을 견결히 지지하였다.
리붕 동지의 일생은 혁명적인 일생이고 전투적인 일생이며 휘황한 일생이고 전심전력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공산주의사업을 위해 분투한 일생이였다. 그의 서거는 당과 국가의 중대한 손실이다. 우리는 그의 혁명정신, 숭고한 품덕과 우량한 작풍을 학습하고 습근평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두리에 더욱 긴밀히 단결하여 초심을 잊지 않고 사명을 명기하며 초요사회 전면 건설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며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분투해야 한다.
리붕 동지 천추에 길이 빛나리!
[리펑(이붕,李鵬, 1928년 10월 20일 ~ 2019년 7월 22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로,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수교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와 전국인민대표대회 제9대 위원장을 역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총리를 지내면서 장쩌민(江澤民)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보조를 맞췄다.
1.생애와 경력
쓰촨 성 청두에서 태어났다. 리펑(李鵬)의 아버지 리옌쉰(李硯勛)은 중국 공산당 초기의 혁명가였지만 중국 국민당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주은래)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鄧穎超)는 그 밖에도 많은 양자를 기르고 있었는데, 열사의 아들이라 하여 리펑(李鵬)을 데려다가 보살펴 주었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의 제자(弟子)로 자란 리펑(李鵬)은 1945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중국 장자커우(張家口) 공업전문학교와 소련 러시아 모스크바 동력대학교 기계학과를 졸업하였다. 1982년에는 당 중앙 위원, 1985년에는 정치국원, 1987년에는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을 맡아 최고위 정치인의 자리에 올라섰다.
덩잉차오의 후원까지 받으며 국무원 총리까지 오른 정치인이지만, 1989년 톈안먼 사건을 수습한 이후, 조심스런 경제 정책으로 당시 최고 실력자이었던 덩샤오핑으로부터 개혁성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진 못했기 때문에, 자오쯔양 실각 후 남아 있던 정치국 상무위원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당시 그보다 아래로 정치국 위원이었던 장쩌민(상하이 시당위원회 서기)이 주석 자리에 올랐다. 그럼에도 중국 공산당의 개혁 진영의 한 자리에 놓였고 1988년 4월에는 중국 제4대 국무원 총리가 되었으며, 1998년까지 국무원 총리를 지낸 후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94년 중화인민공화국 총리로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회담을 갖기도 했다.
2.가족 관계
아들 리샤오펑(李小鵬)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교통운수부 부장이다. 딸 리샤오린(李小琳)은 중화인민공화국 국유 전력기업의 경영인을 지냈다.
3.약력
1928년, 쓰촨 성 청두에서 출생
1945년, 중국 공산당 입당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
1983년, 국무원 부총리 (총리 : 자오쯔양)
1988년, 국무원 총리, 국가경제체제개혁위원회 주임
1989년, 중화인민공화국 총리 자격으로 일본 방문
1994년, 중화인민공화국 총리 자격으로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방문
199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장도 겸임.
2002년 4월,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으로 일본 방문
2003년, 위원장을 사임.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은 우방궈이다.]
리붕 동지 유체 북경에서 화장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오랜 시련을 겪은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이며 걸출한 무산계급 혁명가, 정치가이며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이며 중국공산당 제12기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이며 제13기, 제14기, 제15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원 국무원 총리이며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인 리붕 동지의 유체가 29일 북경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서 화장되였다.
리붕 동지는 병환으로 2019년 7월 22일 23시 11분에 91세를 일기로 북경에서 서거했다.
리붕 동지가 병세가 심각하던 기간과 서거한 뒤 습근평, 리극강, 률전서, 왕양, 왕호녕, 조락제, 한정, 왕기산, 강택민, 호금도 등 동지들이 병원에 가 문안하거나 여러가지 형식을 통해 리붕 동지의 서거에 침통한 애도를 표하고 그의 가족에게 심심한 위문을 표했다.
29일 오전, 팔보산혁명공동묘지 장례식장은 장엄하고도 숙연했으며 애도곡이 무겁게 흘렀다. 대청 정면 웃쪽에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쓴 “리붕 동지를 침통하게 추모한다”는 프랑카드가 걸려졌고 프랑카드 아래에는 리붕 동지의 영정이 걸려져있었다. 리붕 동지의 유체는 생화와 푸른 측백나무들 가운데 조용히 누워있었으며 몸에는 진붉은 중국공산당 당기가 덮여있었다.
오전 9시 30분경, 습근평, 리극강, 률전서, 왕양, 왕호녕, 조락제, 한정, 왕기산, 강택민 등이 애도곡 속에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리붕 동지의 유체 앞에 다가가 숙연히 서서 묵도를 드리고 리붕 동지의 유체를 향해 세번 허리를 굽혀 경례함과 아울러 리붕 동지의 친족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위문을 표했다. 호금도는 외지에서 화환을 보내여 리붕 동지의 서거에 애도를 표했다.
당과 국가의 해당 지도동지들이 현장에 가 송별하거나 여러가지 방식으로 애도를 표했다. 중앙과 국가기관 관계 부문 책임동지들, 그리고 리붕 동지의 생전 친우들과 고향 대표들도 현장에 가 송별했다.
리펑 전 중국 총리 영결식 참석한 장쩌민 전 국가주석
리붕동지 생애 사진
1988년 등소평동지와 리붕동지가 북경 인민대회당 복건청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2012년 11월 14일, 18차 당대회 페막전, 습근평동지와 리붕동지가 함께 있는 모습이다.
2012년 11월 8일, 18차 당대회 개막전, 강택민동지와 리붕동지가 함께 있는 모습이다.
2007년 10월 21일, 17차 당대회 페막전, 호금도동지와 리붕동지가 함께 있는 모습이다
1949년 6월 1일, 리붕동지(뒤줄 왼쪽)가 쏘련 이바노브동력학원에서 수리화와 로씨야어를 복습할 때 로씨야어교원 페드로와(앞줄 왼쪽 세번째) 및 학생들과 찍은 단체사진이다
1959년, 리붕동지는 풍만발전소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1986년, 등영초동지와 리붕동지 및 그 부인 주림은 북경 중남해 서화청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1992년 6월 12일, 리붕동지가 유엔 환경발전대회 수뇌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이다.
1996년 2월 19일부터 20일까지 리붕동지는 50년간 떠나있던 연안에 돌아와 연안 지역의 간부군중들을 위문했고 이곳 인민들과 함께 설을 보냈다. 이것은 음력설에 리붕동지가 대추촌 양걸팀과 함께 섬북양걸을 추고 있는 모습이다.
1997년 7월 1일 새벽, 중화인민공화국 향항특별행정구 설립 및 특별행정구 정부 선서취임식이 향항회의전람쎈터 신익7층에서 성대히 개최했다. 향항(香港, 홍콩)특별행정구 초임 장관 동건화가 취임을 선포했고 리붕동지는 선서를 감독했다
1998년 3월 19일, 9기 전국인대 1차 회의가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페막했다. 리붕동지가 페막식에서 연설을 진행했다.
1998년 5월 5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오문특별행정구 준비위원회가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제1차 전체회의 설립과 개최를 선포했다. 이것은 리붕동지가 준비위원회 부주임위원 하후화에게 임명서를 발급하고 있는 모습이다.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人民共和國)“
同一介中華(民國的中華,中國)
中華民國(中國), 中華人民共和國(中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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