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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중동지역에서 사우디등 아랍인도 존중돼야 하며 페르시아인 이란인도 존중해야 합니다 본문

Guide Ear&Bird's Eye/이란

미국도 중동지역에서 사우디등 아랍인도 존중돼야 하며 페르시아인 이란인도 존중해야 합니다

CIA bear 허관(許灌) 2018. 8. 11. 20:57



He has also proposed to establish a new USSR that would include Iran and Turkey[Vladimir Zhirinovsky]

이란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페르시아족이 51%, 아제르바이잔족이 24%, 길란-마잔다란족이 8%, 쿠르드족이 7%, 아랍족이 3%, 루르족이 2%, 발루치족이 2%, 투르크멘족이 2%, 기타 1%(유럽계, 러시아인, 인도인, 유대인, 집시, 한국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 국가입니다

이란은 아랍인과 다르게 다수종족 페르시아 민족으로 아랍어가 아닌 페르시아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란은 러시아(구소련, 사회주의 공화국) 군사적 원조로 미사일이나 핵무기를 개발해왔습니다

이란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서방처럼 경제모델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중동지역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수립론 독자노선이 필요합니다. 이란의 적은 미국이나 서방보다는 아랍국가들입니다. 이란 2012년도 1인당 국민소득 $13,072 (77위)입니다.  이란정부는 대통령 4년 중임제 도입으로 급진적으로 개혁 개방화 정책으로 경제성장을 해왔고 중동지역에서 부유국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란이 민주주의 국가보다 사회주의 공화국이론으로 나아갈 때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고 중동지역에서 미국과 러시아 대립으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푸틴정부는 권위주의 자유민주정부이지만 중국 습근평정부는 인민민주주의 독재이론 사회정부입니다[이란과 이라크 전쟁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기타 페르시만 국가들의 경제적인 지원으로 소비에트 연합, 중국 프랑스로 부터 사들인 상당한 양의 무기로 무장한 사담 후세인은 1980 전쟁 시작 이후 처음으로 1985 1 28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란은 북한, 리비아, 중국으로 부터 지원을 받았다. 반면에 이라크는 소비에트 연합, 나토 연합, 프랑스, 영국,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스페인, 이태리,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미국으로 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란정부는 이슬람교 사회주의 공화국이론을 포기하고 자유민주국가로 나아갈 때 서방처럼 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수립이 될 것입니다

미국도 중동지역에서 사우디등 아랍인도 존중돼야 하며  페르시아인 이란도 존중돼야 합니다

중동지역 이슬람교는 국가마다 다르기 때문에 종족이나 언어 이슬람교 국가종교입니다

이란정부도 중동지역에서 자국이외 페르시아어를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이나 서방도 중동지역 일부세력 입장에 편승되어 온 이란 경제개발 성장 지연정책에 동조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란정부 "테헤란에서 이란과 이라크 7년 전쟁 전시관 개설"

Iranian children play on surface-to-air missiles during a war exhibition to mark the Week of Defense, which is held to commemorate Iranian sacrifices during the eight-year Iraq-Iran war in the 1980s, in Tehran, Iran, Sept. 24, 2011

이란-이라크 전쟁1980년 9월 22일 사담 후세인이란을 침공하면서 발생하였다. 군사행동의 주 목표는 샤트알아랍 강의 획득 및 이란의 혁명적 정권의 타도였다.

이라크는 선전포고없이 공격했지만 그들은 전쟁을 진척시키지 못하고 이란에게 격퇴당한다. UN 안보리의 휴전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1988년 8월 20일까지 백만여명의 희생자를 내며 전쟁을 계속한다. 2003년에 마지막 포로가 교환되었다. 전쟁은 지역 및 국제 정세에 영향을 주었다.

 

1.배경

이란과 이라크는 국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이나 이란은 그 중 80% 이상이 시아파이고, 이라크는 시아파와 수니파로 2등분되어 있으나 전통적으로 수니파가 상대적으로 다수인 시아파를 지배해 옴으로써 양국은 과거부터 종파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이란의 이슬람 혁명 성공으로 강경 급진 세력인 시아파가 집권함으로써 양국 관계가 격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양국은 제각기 이슬람 정통의 계승과 페르시아 왕국의 상속자임을 자처하면서 호르무즈 해협 3개 도서(島嶼)와 샤트알아랍 수로(水路)의 영유권을 주장, 역사적인 분쟁을 겪어오고 있었다.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의 시아파 정부는 이라크가 후제스탄 지역의 반정부 아랍인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이라크 내 시아파를 박해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등 설전을 전개하였고, 이에 이라크는 내정 간섭 중지를 경고함과 동시에 이란이 이라크 내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고 있다고 맞받아치는 등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고, 결국 양국 국경 지대에서 이란의 혁명수비대와 이라크군 사이의 무력 충돌로 확대되었다.

여기에 이란 혁명 정부의 중동에 대한 이슬람 혁명 파급기도와 팔레비 왕정의 붕괴로 중동 제일의 군사강국의 지위를 점한 이라크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 또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중동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친미정권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미국의 중동정책의 거점이었던, 샤 팔레비 이란 왕조가 호메이니 주도의 이슬람혁명으로 1979년도에 전격 붕괴하면서 미국과 서방국가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하였고 이는 중동 지역에 일시적인 힘의 공백을 가져왔다.

중동 석유에 경제체제를 의존하고 있던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이란에 등장한 반미이슬람정권의 영향으로 중동 전역에 반미·반서방 이슬람 원리주의 물결이 일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이란과 대립관계에 있던 이라크에 접근하여 사담 후세인 정권에게 막대한 외교적·경제적·군사적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초기부터 이라크에 상당량의 무기를 판매하였으며, 미국은 사담 후세인정권의 무차별적인 화학무기 사용과 민간인 학살도 묵인하였다.(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당시 명분은 대량살상무기 제거와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제거였으며, 주요 증거증의 하나로 이란-이라크전 당시 화학무기 사용이 제시되었다)

 

2.전개

이란이 미국과의 인질 사태로 서방 측의 경제봉쇄 조치를 당해 위기에 놓여 있고, 이란 정규군 또한 혁명 과정에서 전력이 약화된 것을 계기로 이라크는 1975년 체결된 양국간 국경 조약을 불평등 조약이라고 선언, 9월 17일 이의 폐기와 호르무즈 해협 3개 도서 및 샤트알아랍 수로에 대한 주권(主權)을 선언하고, 9월 22일 이란에 대한 전면 침공을 개시하였다.

당시 이란은 혁명의 후유증으로 내부적 재편성을 겪음과 동시에 미국과의 인질 사태로 서방 측으로부터 경제봉쇄 조치를 당하고 있었고, 혁명과 원유 수출 중단에 대외 자산까지 동결되어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으며, 혁명 정부 내부에서도 민주·민족·급진 이슬람 3파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팔레비 당시 중동 제일의 전력을 자랑하던 이란 정규군은 혁명 과정에서 약화되기 시작하여 호메이니가 혁명수비대(친위군)를 조직함으로써 그 위상까지 퇴조하였으며, 미·이란 인질 사태 이후 군수품 공급 중단으로 실질적인 전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군사 전문가들이나 이라크 자신도 이 전쟁은 단기간 내에 이라크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리라고 예상했으며 초기에는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호메이니의 신권적 지도하에 광신적 급진 이슬람주의에 기초한 이란 국민의 영웅적 저항은 11월 이후 정규군·혁명수비대·민병대의 반격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태의 변화로 나타났고, 1년 이내에 끝나리라던 예상과 달리 8년 동안에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3천억 달러 이상의 전쟁 비용이 투입되는 미증유의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이란·이라크전의 첫 번째 파급 효과는 미·이란 인질사태의 종식으로, 이란으로서는 전쟁 수행에 있어서 전비 충당과 미국의 위협 제거라는 목적에서 볼 때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라크는 예상 외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기 종식을 기도, 일방적인 휴전을 제의하였으나 호메이니는 이라크 정권 타도라는 초강경 자세를 고수하여 오히려 이란측이 이라크 영내로 진입하였고, 이 시점에 이르러 이라크 역시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이래 또다시 아랍 제국의 분열을 가져왔다. 특히 아랍 군주국들은 이란의 이슬람 혁명의 파급이란 결국 자신들의 권익상실이라는 것에 반발하여 이라크에 대한 지원과 접근을 강화했고, 이란 역시 이들에 대한 단교와 경고 조치로 대응했다. 또한 이란은 전비조달을 위해 OPEC의 공시가(公示價) 이하로 원유를 덤핑판매하여 산유국들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양측이 서로 치명적 타격을 가하기 위해 이라크가 이란의 유전 지대를 공격하기 시작하고 이란이 전면 공격을 가하는 형태로 가열되어 페르시아만 원유 오염사태가 발생하는 등 페르시아만 전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1983년 프랑스가 이라크에 쉬페르 에탕다르 전폭기, 엑조세 미사일 등 최신예 무기판매를 승인함으로써 사태는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란은 프랑스가 이라크에 무기를 공급할 경우 서방국가 원유 수송로의 중추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라크는 이란의 항만 지역에 기뢰를 부설했다고 발표, 이란·이라크 전쟁은 중대 위기로 치달았다.

1984년에 접어들면서 양측은 상대국 출입 유조선에 대한 공격을 시작, 페르시아만을 항해하는 유조선에 무차별 공격을 가해 주변국(특히 GCC)들과 석유 공급의 대부분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는 서방측 석유 소비 국가들을 긴장시켰다.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 중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 전투기를 격추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국제 연합의 중재도 무산되었으며, 이라크가 이란 영공 전역을 '전쟁 지역'으로 선포함과 동시에 화학무기(독가스)를 사용하는 등 전쟁은 최악의 국면으로 심화되었다.

또한 중동 전역은 레바논 내전의 격화까지 겹쳐 폭탄 테러·여객기 납치·외국인 납치사건 등이 발생, '테러의 해'로 지칭되리만큼 혼돈 속에 휩싸였다. 여기에 1979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석유 수요의 감소와 OPEC의 내분으로 공급 과잉과 유가 하락 사태가 발생, GCC를 중심으로 한 산유국 경제가 침체일로를 걷자 이란·이라크 전쟁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1986년 이란·이라크 전쟁의 여파는 미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3. 결과

전쟁 이전으로 되돌림 (Status quo ante bellum), UN 결의 619에 기초한 UN 이란-이라크 전쟁 감시 위원회의 감찰하에 이루어짐

 

 

 

 

                                                                  도시공격으로 사용한 이란 이라크 7년 전쟁때 미사일 모습(이란 이라크 전쟁 책임자 이라크 후세인)

Imposed War(강요된 전쟁), 이란에서는 Holy Defense(신성한 방어), 이라크에서는  Saddām's Qādisiyya 또는 (1) 페르시안 걸프전이라고 불리우는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0 9월부터 1988 8월에 걸쳐 발생한 이란 이라크軍 間 무장 충돌로서 20세기에 발생한 가장 , 재래식 무기에 의한 전쟁이다. 전쟁은 1990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인 걸프전앞에 발발한 전쟁으로 영어로는 Persian Gulf War(페르시아 걸프전)”라고 불리운다. 1980 9 22 이라크는 이란의 영공을 침공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는다. 이것은 오랜 역사동안의 국경선 분쟁과 오래동안 억압받던 다수파 시아 이스람교도들이 이란 혁명에 고무되어 야기시킨 시아 폭동의 두려움이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고 있다. 이외에도 이라크는 페르시아걸프 지역에서 패자로 군림하여는 목적도 있었다. 이란 혁명후의 혼란을 이용하고자 선전 포고도 없이 진격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진격한 국토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그나마 획득한 영토도 1982 8 20일에는 빼엇겨 원위치가 되었다. 이후 종전까지 6년간은 이란은 방어적 입장에서 공격적 입장으로 바뀌었다. UN 휴전 요청에도 불구하고 1988 8 20 까지 나라는 적대적 교전관계를 지속하였다. 마침내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조가 양국에 받아 들여져 전쟁은 종식 되었다. 이란의 무장군이 전쟁 국경선 위치로 철수하는 데에만도 주가 걸렸다. 최종적인 포로교환은 2003년에 이루어 졌다. 전쟁의 결과 양국의 군과 민간인 사망자가 50만을 넘었고, 보상도 국경선 변화도 발생하지 않았다. 길게 늘어진 전선의 참호, 기관총 진지, 총검 육탄전, 참호를 가로지르는 철조망의 사용, 無人지역을 가로지르는 人海공격, 이란 군대, 시민 이라크 주재 쿠르드족에 대한 과할 정도의 화학무기의 사용등은 분쟁이 종종 1 세계대전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때 UN안전보장 이사회는 전쟁에서 화학무기가 사용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발표에 이라크 화학무기르 사용했다는 점을 명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국제사회는 이라크를 적극적으로 비난할 없었다. 이는 이라크의 비난 받음을 막으려는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고 믿어지고 있다. 

 

배경

 

전쟁 이름의 유래

이라크-쿠웨이트 분쟁(1991. 1~2 사막의 폭풍 작전)이전까지 이란-이라크 전쟁은 걸프전또는 페르시아 걸프전으로 불리웠다. 이후 일차 페르시아 걸프전이라고 명명되었다. 반면에 이란-쿠웨이트 전은 처음에는 이차 페르시아 걸프전으로 불리우다가 이후에 걸프전이라고 불리워진다. 따라서 2003~2010년에 걸친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의 이라크 침공을 이차 페르시아 걸프전이러고 부른다. 이라크의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애초에 전쟁을 회오리바람 전쟁이라고 불렀다

 

기원

식민지배 이후 시대

1959 12 18, 이라크의 지도자 Abdul Karim Qassim 우리는 Al-Ahwaz Mohammareh [Khorramshahr] 거주하는 아랍 부족의 역사에 관련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토만은 이라크 영토의 일부이었던 Mohammareh 이란에 넘겨주었다.” 선언하였다. 많은 오일 매장량을 가진 지역을 이란이 소유하게 것에 대한 이라크 정부의 불만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이라크는 쿠제스탄에서의 분리주의 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랍연맹의 차기 회의에서는 영토문제를 주제로 올렸고, 특별히 이집트 대통령 Gamal Abdel Nasser 사후, Ba'ath 집권시에는 스스로 아랍세계의 지도자임을 천명하면서. 이미 체결된 이란과의 협의를 준수하지 않는등 불만을 드러내었다. 1969 이라크의 부수상은 이란과 관련한 이라크의 분쟁은 원래 이라크 영토이었는데, 외국 식민지배 동안에 이란으로 귀속되었던 Arabistan (Khuzestan) 영토 문제라고 하였다. 이라크의 라디오 방송은 이란의 아라비스탄 살고 있는 아랍인들에게 이란의 정권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하였다. Basra TV 이란의 쿠제스탄을 아랍 이름 Nasiriyyah 새로이 이름붙이고, 모든 이란 도시들에 아랍식 이름을 부여하였다. 1971 이라크는 이란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고, 영국이 철수한 페르시안 만에 위치한 아부 무사 섬에서의 영토권을 선언하였다. 그뒤 이라크는 7000명의 이란 출신 이라크 주민의 재산을 몰수하고 영토밖으로 내쫒았다. 다는 아니었지만 많은 추방된 사람들은 이란에 연고가 없는 이라크 시아파 무스림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페르시아어가 아닌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추방은 아랍의 유서깊은 민족주의당, 바스당에 하나의 전통을 만들었다. 이란과의 폭력적인 연계를 주장함으로서 시아 소수파에 대한 과소평가와 비적법성의 전통을 형성하였다. 국가간 적대감의 중요 요인중 하나는 페르시아 입구의 아르반드 루드(이란 ) <샤티 -아랍 수로>라고 하는 수로의 완전 장악권을 차지하려는 분쟁인데, 이것은 양국의 오일 수출에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란의 쿠제스탄과 바로키스탄에서의 분리운동을 조장하는 것과는 별개로 양국은 국외의 쿠르드족 민족주의자들에게 분리운동을 독려하고 지원하였다. 이란-이라크전(1980~1988) 초기 몇년간 이라크 정부는 쿠르족을 이라크전에 활용하기 위하여 쿠르드족에게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1984 크르디스탄의 애국동맹는 바그다드에 협력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쿠르드 민주당은 이란에 남기를 선언했다. 1975 알제리 협약에서 이라크는 관계정상화를 조건으로 수로를 포함한 영토 양보를 조인하였다. 1978 이라크의 이란 대사관이 이라크 정부에 반하는 pro-Soviet coup d'état 발견했을 까지만해도 양국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호전되어 있었다. 음모를 보고 받은 당시 이라크 부통령 사담후세인은 계획을 실행할 것을 부하들에게 명령하고, 책임을 당시 샤의 정권에 대항하여 추방된 망명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에게 돌리라고 지시하였다.

 

이슬람 혁명후

 

이란의 범이스람주의와 혁명적인 시아이스람주의(신정정치), 이라크의 아랍 민족주의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다.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를 강력한 지역 패권자로 격상시키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이란 침공에 성공하여 산유량을 늘리고, 페르시아 걸프에서의 지배력도 키우고 싶었다. 사담은 몇번씩이나 이란에 대한 그의 입장을 선전하면서 이스람의 이란 정복을 넌즈시 말하곤 했다. 반면에 호메이니는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의 이스람들, 특별히 그가 판단하기에 억압 받고 있다고 판단되는 시아파 이스람은 통일된 이스람 국가를 건립하기 위하여 봉기하여야 하며, 이란혁명을 본받아서 이란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메이니와 이란의 이스람 혁명가들은 사담의 세속주의와 아랍 민족주의 정당 바스당의 강령을 이스람적이고 사탄의 추종자라고 경멸하였다. 또한 이라크인들에게 사담과 그의 주장을 던져버리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대대적인 이란의 관리들에 대한 종교적인 숙정을 실시했다. 미국산 장비들에 대한 수리부품의 부족은 한때 강성했던 이란의 군력을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대부분의 이란 군대는 비록 의용군(혁명수비대)이라고는 하나 아주 빈약하게 무장하였다. 이란은 Shatt al-Arab 강에 최소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전쟁

 

이라크의 전쟁 구실과 목적

이라크의 전쟁 구실은 이라크 남동부에서의 이라크 외무장관 타리크의 암살시도라는 진위가 불확실한 것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연설에서 이것이 이란 정보부의 소행이라고 비난했다. 1980 3월까지, 양국간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고, 이란은 일방적으로 대사를 소환하고 외교관계를 하향조치하였고, 이라크도 맞대응하였다. 4월에는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고, 외무장관 암살시도 3 뒤에는 이전 공격으로 희생당한 학생들의 장례식에 폭탄공격이 발생했다. 이라크는 이란을 비난하며, 9월에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9 17 이라크 국회에서 행한 사담 후세인의 연설에서는 이라크 주권을 위협하는 빈번한, 노골적인 이란의 공격은 … 1975 체결된 알제리협약을 백지화 시켰다. … 강은 역사를 통해서 이름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전체에 대한 실제적인 권리를 이라크-아랍이 가지고 있다.

 

이라크의 이란 침공 목적은 아래와 같다.

l  Shatt al-Arab waterway 장악

l  UAE 대신해서 세개의 (Abu Musa, the Greater Tunbs Lesser Tunbs) 이라크 점유하에

l  쿠제스탄 병합

l  지역에서 이스람 시아파의 확산 금지..

 

1980: 이라크의 침공

 

1980 9 22, 이라크 공군은 이란의 공군기지 10곳을 육상에서 파괴하기 위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으로 일부 공군기지의 기반시설 파괴는 성공하였으나 심각한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단지 몇대의 MiG-23BN, Tu-22  Su-20 기종만이 이란 깊숙히 침투할 있었는데, 대부분은 이란의 수직적인 지형때문에 효과적인 공격이 이루어 지지 못했다. 세대의 MIG-23기가 간신히 테헤란을 공격하였으나 단지 몇대의 항공기를 파괴하는데 그쳤다. 다음날 이라크는 3개의 동시 공격으로 644키로미터에 이르는 국경에 육상공격을 감행하였다. 사담후세인에 의하면 침공의 목적은 호메이니의 종교운동의 예봉을 무디게 하고, 이라크와 페르시안 걸프지역의 국가들에 이스람 종교혁명 수출을 포기하게하는 이라고 한다. 6 사단으로 구성된 침공군중 4 사단은 이란 국경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쿠제스탄 지역을 향하였는데, Shatt al-Arab 이란의 나머지 영역과 분리하여 안전하게 점거하려는 의도이었다.  나머지 2 사단은 국경의 북쪽과 중앙을 향하게 하였는데, 이는 이란의 역습에 대비한 것이었다. 남쪽 가까이에 있는 4 사단중 2개는 하나는 기계화사단, 다른 하나는 장갑사단이었는데, 아바단과 코람샤 같은 중요 도시를 전략적으로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나머지 2 사단도 장갑사단이었는데, 포위작전 때문에 Khorramshahr-Ahvaz- Susangerd-Musian 국경선을 굳게 지켰다. 중부전선에서 이라크군은 자그로스산의 돌출 산자락 메한을 점령해서 Qasr-e-Shirin 방어하면서 전통적인 테헤란-바그다드 침공로를 차단할수 있었다. 북부전선에서 이라크군은 키르쿡 오일 복합단지를 보호하기 위해 술레이마니아 반대편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란 정규군과 혁명수비대군(Pasdaran) 각각 독립적으로 방어작전을 펼쳤다. 결과적으로 이라크군은 조직적인 저항에 부딪치지는 않았다. 혁명수비대는 열정과 끈기로 싸웠으며, 정면에서 공격을 맞았다. 침공 2번째 날에는 수십대의 이란 F-4기가 이라크의 목표물을 공격하였고, 수일내 이란 공군은 제공권을 장악하였다, 이들 폭격기와 헬리콥터에는 육상에서의 목표물을 제거하는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었다. 이라크군은 이란 포병의 공격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9 24 이란 해군은 바스라를 공격하였고, 이라크 파오항 근처의 두개의 오일터미널이 파괴 되었는데, 이것으로 이라크는 오일 수출에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란 공군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목표물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오일 시추시설, , 석유화학공장, 바그다드 인근의 핵반응시설등이 그것이었다. 9 28 UN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이라크 양국이 전쟁을 멈추고 중재안을 받아 들일것을 촉구하였다.

10 1 바그다드는 8차례의 공습을 받았다. 공습에 대응하여 이라크는 수많은 대응 공습을 실행하였다. 10 24 코람샤르가 이라크에 접수되었고, 11 후세인은 군에 Dezful Ahvaz 진격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진격은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이라크가 침공에 동원한 군력은 21 사단이었다. 반면에 이란은 13개의 정규사단과 1개의 여단이 맞서 싸웠는데, 이중 7 사단만이 국경에 투입되었다

1981: 이라크 침공, 장애물을 만나다.

 

이라크의 침공은 예기치 못한 강한 저항에 부딪치더니 1981 3월에는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처했다. 더구나 이란 국민들은 망명자들이 장담했던 바와 같이 호메이니 정부에 반대하기 보다는 다시 결집해서 저항에 앞장서 나갔다. 11월경에는 20만명의 추가병력이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이들중 많은 무리들이 종교적으로 이념 무장된 자원병들이었다.

1982: 이라크 퇴각, 이란 공세 변환

 

이라크가 공격을 시작한지 1년뒤 1981 3 경에는 전선에 변화가 생겼다. 공격이 주춤해지더니, 1982 3 중순경에는 이란이 공세로 바뀌고 이라크는 퇴각 형국에 빠지게 되었다. 그해 6월경에는 이란은 이전에 이라크에 빼앗겼던 영토를 수복하였다. 쿠제스탄 지역에서의 특별히 의미있는 반격의 하나는 1982 3 24일의 코람샤르 탈환이었다. 코람샤르 전투에서 이라크 전사자는 7000이었고, 17,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이란인 사상자는 10,000명이었다. 사담은 이란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사담의 퇴각은 군의 사기저하와 막대한 피해로 인하여 이상 이란 영토에서 주둔한다는 것이 어렵고, 또한 국경선에서의 이란의 방어선이 아주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판단한 지도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라고 Efraim Karsh 언급하고 있다. “싸우자, 승리의 그날까지 싸우자!”, “카르바라를 지나 예루살렘까지 구호아래 이란은 진격했다. 영웅을 이용하여 군의 사기를 고양시키는, 역사에 여러번 등장하는 전술은 여기 이란 군에도 적용되었다. Basij라는 젊은 자원병이 이라크 진지에 인해전술의 공격을 이끌어 것이다. 지원병들은 전투전 아슈라 이야기로 영감을 고조시킨다. 이야기는 Karbala 전투(이란 시아이스람의 3 이맘 호세인의 전쟁,순교이야기) 관한 것인데, 순교자의 극고의 영광을 표현한다. 가끔씩은 이맘 호세인(Imam Hossein)역의  배우가 (주로 고참병이) 흰말을 타고 전선을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전쟁 경험이 없는 병사들에게 피할 없는 전장에서, 이제 죽어 하나님을 만나기 , 앞장서 그들을 인도할 영웅 비전을 제공한다. 포와 로켓으로 무장한 수비대에 소총으로 뛰어드는 이러한 공격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었다.

7 13 이란군은 이라크의 두번째 중요한 도시 바스라를 향하는 전선을 넘었다. 그러나 방어군은 참호속의 어마어마한 군력이었다. 1980-1981 이라크 점령기간 동안 이란이 급조하여 구축한 방어선과는 달리 연결된 벙커와 지원을 받는 방어선은 전쟁 상태보다도 정비되어 있었다. 사담은 군력을 26사단, 3 독립여단의 50만명에서 55 사단, 9 여단의 105만으로 증강하였다. 사담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된 것이다. 이란이 이라크의 본토로 진격할 군은  연합작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란군의 특징은 포병,공군 탱크부대의 지원을 받는 육상 인해전술 공격이었다. 그러나 탄약의 부족으로 인해 전술부대는 이상 지원군의 지원을 받기 여려워 졌다는 점이다. 이라크군의 우수한 방어력은 1982 이후 대부분의 작전에서 수십만 이란군의 괘멸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고, 또한 대부분의 방어선을 지켜 것을 뜻하기도 한다. 바스라전투 (또는 라마단 작전)에서 다섯조의 인해전술 부대는 막강한 이라크의 화력과 맞다뜨렸다. 특별히 이란의 소년군들은 지뢰밭의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맨몸으로 자원하여 희생되어 갔으며, 또한 이라크의 신경가스와 겨자가스에도 많이 희생 당하였다.

1983: 전략적 교착상태

 

1982 여름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 이란은 그들이 바라는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전선에서의 심기일전한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전선에서 동시에 수적인 우세에 있는 이란군이 공격을 감행할 있었다면, 교착상태에 있는 전선은 돌파구를 마련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란군의 조직은 그러한 공격을 감행할 능력이 없었다. 이란은 북한, 리비아, 중국으로 부터 지원을 받았다. 반면에 이라크는 소비에트 연합, 나토 연합, 프랑스, 영국,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스페인, 이태리,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미국으로 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1983 한해동안 전선에는 5차례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으나,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휴전에 대한 호메이니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1984 2, 사담은 자신이 지명한 이란의 11 도시에 공습과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1984 2 22 이라크의 공습이 멈추자 이제는 이란이 이라크의 주요도시에 보복 공격을 시작했다. 서로 주고 받은 공격을 일차 도시전쟁(City War)”이라고 부른다. 전쟁 기간동안에 이러한 주고 받는 공습이 다섯차례 있었다. 이란에 대한 이라크의 공습은 이란 정부의 공격 의지를 꺽지 못했다. 2 15 이란군은 전선의 중앙부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는데, 여기는 이라크 2군단이 포진하고 있었다. 각각 25만의 병력이 대치하였다. 2 15~22 작전 여명5”, 2 22~24일의 작전 여명6”에서 이란군은 작전의 중심에 있는 도시 --아마르 쟁취하고 바그다드-바스라를 잇는 고속도로를 단절시키려고 시도 하였다. 도로가 점거당하면 이라크군은 방어전선의 군수물자 공급에 차질을 빗게 된다. 그러나 이란군은 고속도로 24Km 진격할 있었다. 반면에 카이바르에서의 작전은 이보다 훨씬 더한 승리를 가져왔다. 이라크의 거점도시 바스라로 향하는 수많은 공격중 하나인 작전은 2 24 시작되어 3 19일까지 지속되었다. 2 15 이후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던 이라크 군은 거의 방어선이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이란군이 마즈눈 섬의 일부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이라크의 방어는 성공적으로 지속되는 같이 보였다. 신경가스와 겨자가스를 사용한 이라크 군의 강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이란군은 전쟁 끝까지 유리한 전세를 유지해 나갔다

1984: 페르시아 만에서의 유조선(Tank war)

 

오일 운반선에 대한 전쟁은 1984 이라크군이 이란의 유조선과 카르그섬의 오일기지를 공격함으로서 시작 되었다. 이란은 쿠웨이트로 부터 이라크의 오일을 운송하는 유조선 이라크를 지원하는 유조선에 대하여 반격을 하였다. 양국은 상대국 지원국의 오일 저장시설과 오일 운송선에 대하여도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라크는 걸프만의 북쪽 이란 항구에서 부터 출발하는 모든 오일 수송선은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라크는 공격에 대함미사일을 장착한 F-1 헬리콥터와 전투기 Mig-23 사용하였다 이란의 오일 수출 기지인 카르크섬에 대한 빈복적인 공격에 대응하여 이란은 1984 8 13 바레인의 쿠웨이트 유조선, 5 16 사우디 근해의 유조선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무장 상선에 대한 양국의 공격이 잦아지면서 이란-이라크전에서 이러한 형태의 공격을 유조선 대한 전쟁이라고 명명하였다. USS Shark라고하는 미군함이 1987 5 17 이라크 전투기 F-1 미라지에 의해 엑조세 대함 미사일” 2발의 공격을 받았다. 샤크함으로 부터 통상적인 라디오 전파 경고를 받은 순간 전투기는 미사일을 발사했다. 호위함의 레이다는 미사일을 발견하지 못했고, 경고 또한 거의 미사일 발사와 동시에 이루어 졌다. 37명의 사상자와 2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상선에 대한 공격

 

영국의 보험회사 로이드는 탱크전에서 546개의 상선과 430명의 선원이 피해를 입고, 죽었다고 추산했다. 가장 공격은 이란에 의해 행해진 쿠웨이트 유조선에 대한 공격인데, 1986 11 1 쿠웨이트는 공식적으로 자국의 상선보호를 강대국에 요청하였다. 소비에트 연합은 1987 부터 유조선 용선계약을 승인했고, 미국은 1987 3 7일부터 미국기를 계양한 유조선에 대하여 보호를 제공할 것을 제안하였다. 전쟁기간 동안에 이라크는 두차례 쿠웨이트 유조선을 보호하는 소련연합의 군함을 공격하였다. 이중 한척은 이란의 오일을 운송중인 유조선 Seawise Giant호로 엑소세 미사의 공격으로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1985 - 86: 공격과 퇴각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기타 페르시만 국가들의 경제적인 지원으로 소비에트 연합, 중국 프랑스로 부터 사들인 상당한 양의 무기로 무장한 사담 후세인은 1980 전쟁 시작 이후 처음으로 1985 1 28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격은 별다른 이득을 나타내지 못하였고, 이란은 1985 3 11 코드명 Badr 불리는 작전, 바스라를 목표로 하는 특별한 공격 방식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맘 호메이니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란 국민들을 독려하였다. “사담은 이스람을 신에 대한 불경과 다신교로 돌려 놓기를 원한다. … 만일 미국이 승리한다면사담에게 승리가 돌아 간다면이스람은 향후 아주 오래동안 머리를 들고 살기 어려운 수모를 당하는 것이다. 전쟁은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 아니고, 이스람과 신성모독에 대한 전쟁이다. “ 한편 1984 지원없이 공격을 감행한 이란의 인해전술단의 실퍠는 정부에 군과 혁명수비대 사이의 보다 견고한 전술적 관계 개선을 추구하게 하였다. 이란 정부는 혁명 수비대를 보다 전투집단으로 조율해 많들어 나갔다. 바그다드-바스라 고속도로를 점령한 이란의 여명5,여명6 작전은 의미가 있는 승리이었고, 이라크는 이에 대하여 신경가스와 2 도시폭격이라는 공습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는데, 이때는 테헤란을 비롯한 20 도시에 공습과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지원

 

유조선 전쟁은 1984 이라크가 이란의 유조선과 카르그섬의 오일저장시설을 공격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이란은 쿠웨이트로 부터 이라크의 오일을 수송하는 유조선에 대하여 반격을 시작했고, 이후로는 이라크를 지원하는 모든 걸프만의 유조선으로 공격이 확대되었다. 공습과 소형 보트를 이용한 공격은 페르시아만 국가들의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이란은 오일 선적 항구를 라락섬에서 호르무츠섬으로 이제 옮긴 상태였다. 1982 이란이 전장에서 우세해지자 미국은 첩보 지원, 경제지원 1967 6일전쟁 이후 단절되었던 국교정상화 .민에 겸용으로 사용될 있는 장비 운송시설을 공급함으로서 이라크를 드러내놓고 지원하기 시작했다. 겸용장비라고 함은 중트럭, 무장 앰블란스 군용으로도 사용될 있는 산업장치등을 말한다. 대통령 로난드 레이건은 공식적으로 이라크가 미국에 패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수행할 NSDD ( 국방위) 지시하였다. 1982 6 국방위 552조는 지역에서의 상선에 대한 공격행위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군함에 대한 이라크의 공격

 

1987 5 17, 이라크 전투기 F-1 미라지는 페리급 미국 전투함 USS Stark(FFG31) 두개의 엑소시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였다. 첫발은 좌현쪽에 맞아 프로펠러에 이상을 보일정도이었으나 불발이었다. 둘째발은 동일 위치에 맞아 선채를 뚤고 들어가 내부에서 폭발하였다. 37명의 사상자와 21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라크 지도부가 공격을 승인하였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이라크 정부에 의한 공식성명( 군함이 이란-이라크 작전구역내에 있었다) 거짓으로 드러났고, 전투기 조종사의 공격 동기나 명령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퇴역한 이라크 공군사령관의 말에 의하면 비록 미국 정부에서 조종사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조종사는 처벌 받지 않았고,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사건이 미국 상선에 대한 유일한 미사일 공격 성공사례로 남아 있다. 

 

이란에 대한 미군의 작전

 

그러나 미국의 관심은 이란의 고립, 걸프만에서의 항해의 자유, 공동수역에서의 이란의 오일 채굴 대한 비난등이었다. UN 안보리 결의 598,987 힘입어 미국은 미국 국기를 게양한 쿠웨이트 유조선 Sea Isle City 공격한 이란에 대하여 이란의 오일기지를 공격하였다. 1988 4 14, 대잠 호위함 USS Samuel B. Roberts 이란의 기뢰에 공격당해 10명이 심하게 부상당했다. 4 18 미국은 Praying Mantis작전으로 반격을 취하였는데, 여기에는 이차대전 이후 최대의 해군력이 동원되어 이란의 오일시추기지, 2척의 유조선, 6척의 군함이 파괴되었다. 미군의 헬리콥터도 피해를 입었다.

민항기에 대한 미군의 발포

 

1988 7 3, 미순양함 USS Vincnnes 보호 임무를 수행하던중 이란항공 655기를 격추시켜 승객,승무원 포함 290명의 사상자를 내는 사고가 발생했다. 미국 정부는 항공기를 이란 전투기 F-14 Tomcat으로 오인되었으며, 이때 순양함은 국제수역에서 작전 수행중으로 피습의 위협에 처해 있었다고 밝혔으나 이후 거짖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란측은 순양함이 이란의 영해에 있었고, 이란의 여객기는 이륙후 고도를 상승하는 중이었다고 주장했다. 장성 William J. Crowe 나이트라인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당시에 순양함은 이란 영해내에 있었다고 밝혔다. 순양함의 함장은 당시 항공기에 자신을 소명하길 요구하고 신호를 보냈지만 반응이 없었다고 밝혔다. 이란뿐 아니라 두바이공항과 같은 독립적인 3자의 입장에서도 항공기가 자신을 밝히기 요청하는 군함의 요구에 응하였고, 고도를 상승중인 항공기가 공격을 당할만한 어떠한 형태의 몸짓도 하기 어려웠다는 이란 관리들의 말에 동의했다. ABC뉴스의 나이트라인의 조사에 따르면 페르시안만 내에서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해군의 보호활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었는데, 당시 민간항공기를 격추시킨 때에도 순양함은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1996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유감이 전해졌으나 이란 정부에 대한 특별한 유감은 전해지지 않았다. 미군에 의한 이란 민항기 격추는 호메이니에게 분쟁에서 끝내야 구실을 주었다고 이란학자들은 말한다. 이란 학자가 말하길 민항기 격추사건으로 부터 호모이니의 생각이 바뀌었다. 미국의 이러한 무차별 공격으로 부터 이상 이란을 위험에 노출 시킬수 없으면, 이제는 끝내야 시기라는 것을 결심했다. 

"도시의 전쟁"

 

전쟁의 막바지에는 양국 모두가 충분한 자주포나 공군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전쟁은 고착국면으로 접어 들었다. 비교적 전문성이 약했던 이라크 군은 수적으로 우세에 있는 이란군에 우위를 점할 없었다. 이란군은 고정포나 자주포에 있어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탱크부대는 약세에 있었다. 따라서 이란군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지상군의 수를 늘렸다. 그즈음, 1985 이라크 공군이 테헤란에 전략적인 공습을 시작하였다. 우세한 이란 공군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하여 이라크는 스커드 미사일로 공격을 전환하였고, 후세인 미사일은 스커드 미사일의 공격을 순조롭게 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은 리비아와 시리아에서 획득한 스커드 미사일로 대응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라크는 520발의 스커드 미사일과 후세인 미사일을 발사했고, 177발의 공격을 받았다. 1986 10, 이라크는 이란 영토에서 민간인 여객열차와 항공기를 공격하였다. 시라즈 국제공항에서 착륙한 이란항공 보잉737 대한 공격도 행하여졌다. 1987 초에 행해진 이라크 도시 바스라를 점령하려는 작전 카르바라-5 관련하여 이라크는 42일간 65 도시에 대하여 226회의 출격을 실행하여 민간인을 폭격하였다. 8개의 이란 도시가 이라크 미사일 공격을 받았고, 보르져드의 초등학교에서만 65명의 어린이가 희생 당했다. 이란도 바그다드의 주요학교에 스카드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였다. 사건을 도시의 전쟁이라고 한다. 

휴전을 향하여

 

1987년에는 이라크 전선의 북쪽과 남쪽 모두에서 이란의 공격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바스라를 함락시키기 위한 카르바라 5 작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전은 2개월 이상 동안의 교전으로 이라크 20,000, 이란 65,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끝났다. 이란의 장군 호세인 카라지도 이때 사망했다. 이란군은 이후의 작전 나사르4” 카르바라10”에서 이라크 북쪽의 저장량이 풍부한 유전 키르쿡과 몇몇 오일 저장지를 점령하며 이라크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이란은 이상의 진공에 성공하지 못하였고, 획득한 영토를 지켜내지도 못하였다. 7 20 UN 안보리는 미국의 지원하에 전쟁을 끝내고, 국경을 전쟁 이전으로 돌리는 결의안 598조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1988 4월에 이라크는 군대를 정비하여 이란의 국경을 침공하였다. 신속한 침공으로 1986 여명8 작전으로 잃었던 Faw 반도와 바스라 근처의 영토를 탈환하였고, 이란 북쪽 깊숙히 까지 침공에 성공하였다. 1988 7 이라크 항공기는 이란 자르단의 쿠르드족 마을에 시아나이드 화학폭탄을 투하하였다. 수백명이 죽었고, 생존자들은 아직도 여러가지 물리적, 정식적 고통으로 고생하고 있다. 1988 8 20 이란은 중재안을 받아 들였다. 이란의 무자헤딘 단체는 이란 정부가 중재안을 받아 들인뒤에도 10일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라크군이 이란의 쿠제스탄을 공격하였을때 무자헤딘은 이란의 서부를 침공하여 케르만샤의 혁명수비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라크군의 공군지원으로 무자헤딘은 많은 것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란의 공수부대가 후방에 침투하여 심각한 교전이 발생하였다. 전쟁을 끝내라는 국제사회의 압력에 못이겨 사담후세인은 전투기를 거두어 들였고, 무자헤딘 후방에 있던 공수부대도 철수할 수가 있었다. 작전은 무자헤딘의 패배로 끝났다. 사상자가 2000~10,000으로 투정되었다.

 

 

이란-이라크 군의 전력 비교

 

전쟁 발발시의 양국의 군사적 전력은 포병은 비슷한 편이었으나 전반적으로는 이라크가 월등한 우위에 있었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갭은 커졌다. 공군은 이란이 우세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라크가 우월해 졌다.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이라크의 전력이 월등하였다.

양국에 대한 외국의 지원

 

전쟁동안에 서방세계, 특히 미국은 이라크를 혁명후 이란의 대항세력으로 생각했다. 이라크에 대한 지원은 기술지원, 정보지원, . 양용 사용장비의 판매 위성정보지원의 형태로 제공되었다. 미군과 이란과의 직접교전도 있었지만, 국제사회는 그것이 이라크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인정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태도는 모호하여서 헨리키신져는 대변인 담화에서 양국 모두를 잃는 것은 유감이다라고 말했다. 30개국 이상이 이란, 이라크, 양국을 지원했다. 특별히 이라크는 비밀스러운 특별한 구매와 관련하여 10~12개의 국가와 관계를 유지하였고, 수많은 아랍의 상인과 이집트의 자원자들이 관련되었다.

 

Iraq

 

많은 강대국중에서 미국은 이라크쪽으로 편향된 편이다. 미국은 단절된 외교관계를 정상화 하고, 군민에 공통으로 사용할 있는 장비들의 수출을 허용하고, 군사용 장비들의 이라크로의 판매를 용인하는등 외에도 전장에서으 전술용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라크는 많은 회사를 앞세워서, 중개상을 통해서 회사의 전체 또는 일부의 소유권을 숨기고서 최종사용자를 날조하여 자신들이 획득한 것을 숨겨가며 필요한 것들을 취득하였다. 어떤 거래는 사람을 통해서, 여러국가를 통해서 선적과 제조를 세탁했다. 유럽에 방영된 다큐멘트리 Saddam Hussein-The Trial You Will Never See에서 Barry Lando  Michel Despratx 미국무장관이 레이건에게 보낸 비밀서한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해서 이라크에 전달된 서신에는 대통령 지미 카터의 이라크의 이란 침공을 용인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시리아정부군은  미영불 연합군 미사일 공격 이후 이란, 러시아, 시리아 깃발을 흔들었다.

이란정부도 핵합의 사항을 준수해야 하며 시아파 국가로서 아랍(중동) 주변국 의혹을 해소하고 평화와 경제정책에 중점을 두기 위해서는 시리아 내전 개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란정부도 이슬람 사회주의 이론이나 극렬 민족주의 국가주의(국가사회주의), 아랍주의, 이슬람 근본주의보다는 이란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개인의 경제 삶(경제적 풍요한 삶)을 존중하는 국가가 돼야 한다

-헤즈볼라는 1982년 레바논 전쟁에서 당시 호메이니를 지지하며 이스라엘에 대항한 시아파 민병대에서 출발하여 레바논 내전 당시 이스라엘이 차지했던 레바논 지역에서 저항 활동을 하였다. 헤즈볼라의 지도자들은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군대는 이란 혁명수비대가 조직하여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이란 대통령 선거, 투표까지 1주일

Iranian incumbent President Hassan Rouhani (C), who is also the President candidate, waves to his supporters during a campaign rally in Tehran, Iran, May 9, 2017. A total of 56,410,234 Iranians can cast their ballots in the country's 12th presidential vote slated for May 19.

오는 19일에 실시되는 이란 대통령 선거가 1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란 대통령 선거는 2기 연임을 목표로 하는 보수온건파인 로하니 대통령과 반미 강경보수파인 라이시 전 검찰총장, 그리고 수도 테헤란의 칼리파프 시장의 사실상 3파전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선거전에서 로하니 대통령은 미국 등과의 핵합의를 통해 경제제재를 해제시킨 실적을 강조하고, 대화노선을 유지하도록 주장해 여론조사에서 앞서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라이시 전 검찰총장과 칼리파프 시장은 제재해제 후에도 청년층 실업율이 악화되는 등 국민 생활이 오히려 열악해지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들 두 후보는 이란에 강경입장인 트럼프 정권에 반발하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는 이란과 국제사회의 관계, 제재 해제 후 이란에 대한 진출에 관심을 나타내 온 많은 외국기업의 활동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여, 선거전의 향방이 주목되고 있습니다.

 

Rouhani attends campaign rally in Tehran, Iran

 

Iranian incumbent President Hassan Rouhani (C), who is also the President candidate, speaks during a campaign rally in Tehran, Iran, on May 9, 2017. A total of 56,410,234 Iranians can cast their ballots in the country's 12th presidential vote slated for May 19.

 

Supporters of Iranian incumbent President Hassan Rouhani, who is also the President candidate, attend a campaign rally in Tehran, Iran, May 9, 2017. A total of 56,410,234 Iranians can cast their ballots in the country's 12th presidential vote slated for May 19.

 

 

 

이란 대선의 향방

이란에서는 일 주일 뒤인 5월 19일 대통령 선거를 치릅니다.
이번 선거에는 4년 전에 취임해 2015년 미국과의 핵합의를 이끌어 국제사회와 대화를 추진한 현직 로하니 대통령을 포함해 6명이 정식 입후보했습니다.
오늘 해설에서는 테헤란에 있는 타르비아트 모다레스 대학의 모흐센 에스라미 조교수에게 이번 대통령 선거의 전망을 들어봅니다.

이번 선거에는 연임에 도전하는 현직 대통령을 비롯해 3명의 후보가 국제 사회와의 대화를 중시하는 온건파 입니다.

한편 국제 사회와는 거리를 두는 강경보수파 후보는 검찰총장 출신인 라이시 후보, 그리고 현직 테헤란 시장인 칼리파프 후보 등이 유력합니다.

로하니 대통령은 지난 4년 동안의 노선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핵 합의를 유지해, 경제 제재 없이 경제 발전을 이룩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국제 사회와의 경제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겠다는 것이 2기째의 목표입니다.
하지만 선거전의 최대 초점은 국내의 경제 문제로 로하니 대통령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문제라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온건파 중에서 로하니 대통령이 유력한 선택지라는 것은 확실합니다만, 현 상태에서 지지 확대로까지는 이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현 정권과 대치하는 강경보수파도 괄목할 만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어, 유권자가 현상 유지를 선택할 것인지, 또는 노선 변화를 선택할 것인지, 의사 결정의 방향성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에 강경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슬람권의 복수의 나라 출신자 미국 입국에 관한 행정명령을 비롯해 이란과의 핵합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등 이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불쾌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대해 언급한 뉴스는 없었습니다. 이는 트럼프 정권이 이란 국내 문제에 개입할 생각이 없으며, 이란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란 유권자는 트럼프 정권의 행동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만, 이번 선거에는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이번에 6명의 후보 전원이 TV 토론회에서 '세계와 대화해 가겠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각 후보가 주장하는 국제 사회와의 대화 방법은 다릅니다.

정치, 경제 분야에서 열린 관계를 지향해 가겠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국내 질서와 국익을 지킨다는 조건 하에서 신중하게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란의 유권자가 국제 사회와의 관계 개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번 선거에서 그러한 의지를 표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해설은 다음 주에 실시되는 이란 대통령 선거에 대해 모흐센 에스라미 타르비아트 모다레스 대학 조교수에게 들어봤습니다.

 

이란 대선 '개혁-보수' 맞대결

진행자) 오는 금요일(19일) 실시되는 이란 대통령 선거에 국제사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요?

기자) 네. 올해 이란 대통령 선거의 유력 주자 가운데 하나였던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테헤란 시장이 월요일 (15일) 후보 사퇴를 선언하면서 보수 진영의 에브라힘 라시이 후보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인 화요일(16일) 개혁파 후보인 에샤크 자한기리 수석 부통령이 하산 로하니 현 이란 대통령 지지를 선언하면서 양자 대결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진행자) 보수진영의 지지를 모으게 된 에브라힘 라이시 후보는 어떤 인물입니까?

기자) 에브라함 라이시 후보는 검사 출신 이슬람 성직자입니다. 이란 정가에서 강경 보수 진영의 거물로 통하는데요.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지지를 받고 있어서, 하산 로하니 대통령과 ‘1대1’ 구도로 맞붙을 경우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분석입니다. 지난 9일 공개된 ‘이란 학생여론조사국’의 최신 조사에서는 로하니 대통령이 42% 지지율로 1위를 달리는 가운데, 라이시 후보가 27%로 2위, 갈리바프 테헤란 시장이 25%로 3위였는데요. 사퇴한 갈리바프 시장의 지지세 가운데 절반 정도만 라이시 후보로 옮겨가도 로하니 대통령에 맞서 막상막하의 판세가 되는 겁니다.

진행자) 보수 후보가 현 대통령을 물리치고 집권할 경우, 중동 정세의 급변이 예상된다고요?

기자) 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지난달, 이란과 주요 6개국이 지난 2015년 체결한 핵합의에 대해 전면 재검토를 선언하고, 이란은 탄도 미사일 시험발사를 지속하면서 대미 관계가 안 좋은 상황인데요. 강경 보수파가 집권하게 되면 미국과의 대치국면이 더 악화될 수 있다고 외신들은 내다보고 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대선 당일인 금요일(19일), 이란과 적대적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등 중동방문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주요7개국(G7) 정상회의, 벨기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정상회의로 이어지는 9일간의 첫 해외 순방에 나섭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대통령이나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기본권보장,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1단계 자본주의 민주주의 혁명 추진(경제 기반으로 정치)

2단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기반 구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