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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주둔 소련군 병력 10만 명 철군 본문

Guide Ear&Bird's Eye/아프가니스탄

아프간 주둔 소련군 병력 10만 명 철군

CIA Bear 허관(許灌) 2018. 5. 17. 22:03

1989년 2월 15일  소련군의 마지막 부대가 그라모프 중장의 인솔 아래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했다.

이는 1988년 4월 체결된 ‘아프간 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 협정’에 따른 후속 조치였다. ‘소련의 베트남전’이 되었던 아프간 전쟁에서 소련이 완전 손을 떼기로 한 결정은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내려졌다.

중국은 소련에 대해 관계회복의 전제 조건의 하나로 아프간 철군을 주장했으며 소련군의 아프간 철군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해 5월 15일 고르바초프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이 이루어졌다.

아프간에 대한 소련군 개입의 발단은 1978년 4월 공산 세력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제공했다. 아프간 왕정을 폐지하고 최고 실권자가 된 다우드 대통령 정권을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한 인민민주당(공산당) 내부에서 죽고 죽이는 살벌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1979년 9월 인민민주당 제1총재로 대통령을 맡고 있던 타라키가 총리를 맡고 있던 아민에 의해 피살됐다.타라키는 친소 성향인 반면 아민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햇다. 아민은 반공적인 이슬람 세력과의 협상을 모색 하려한 인물로 소련에게는 '아프간의 마오쩌둥'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소련군은 1979년 12월 아프간을 침공, 아민을 처형하고 해외 망명 중이던 카르말을 대통령으로 내세웠다. 이것이 소련의 아프간 전 개입의 시작이었다.

소련군이 침공하자 아프간에서는 이슬람 세력의 무자헤딘에 의한 게릴라전이 전개되었고 결국 소련은 막대한 군비 지출과 인명피해를 감당할 수 없어 철군하게 된 것이다. 9년 여의 아프간 전쟁으로 100만 명이 사상했으며 5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차 철군이 이루어진 1988년 8월 15일 당시 아프간 주둔 소련군 병력은 10만 명이었다.


*1988년 =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가 시작되었다. 이는 1988년 4월 체결된 ‘아프간 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 협정’에 따른 것이다.

협정은 1988년 5월 15일부터 3개월 이내에 아프간에 주둔한 병력의 절반을 철수시키고 9개월 내에 병력 11만 5,000명을 전부 철수하도록 규정했으며 소련은 고르비의 방중 3개월 전인 1989년 2월 15일 이를 완료함으로써 약속을 이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