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周恩來 사망..죽은자의 산자 쫓기 시작 본문

同一介中華(中國)/북경정부-中華人民共和國(中國)

周恩來 사망..죽은자의 산자 쫓기 시작

CIA Bear 허관(許灌) 2018. 1. 14. 17:07


중국 대륙에서는 겸손과 청빈의 권력을 구사한 인물이 주은래라면 대만에서는 장개석의 아들인 장경국 전 총통이다

주은래는 사망한 당시 남긴 유산은 단돈 5,000위안(약 65만원)이었고 1976년, 78세로 사망한 주은래는 유언장에 추도식을 크게 벌어지 말고 시신을 화장해 조국의 강산에 뿌려 달라고 적었다

주은래는 27세때 등영초여사와 결혼하여 50년을 함께 살아지만 자녀가 없었다 하지만 순국 동지들의 자식을 7명이나 양자로 키웠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붕 전 총리이다

중국 혁명 성지라는 연안에 가면 주은래의 옛 동굴집을 볼 수 있는데, 건너편 작은 집에서 이붕 전 총리를 키웠다고 한다

장경국은 아버지 장개석 전 총통이 부패로 대륙에서 패배한 것을 너무도 똑똑하게 지켜 본 터라 부정부패 일소와 청빈을 덕목으로 살았다

대만을 강소국으로 만든 그였지만 그의 사후에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어 기념관 조차 지을 수가 없었다 그저 옷 몇벌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76년은 공산중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정치드라마가 전개된 한 해였다. 시작은 걸맞게 '태산 명동'이었으나 끝은 맥빠지는 '쥐잡기'아니면 '술래잡기 놀이'였다.

한해 벽두인 1월 8일에 정치 무대의 2인자가 암으로 사망함으로써 '드라마' 대단원의 막이 극적으로 올랐다. 예고된 죽음이었으나 모두 긴장했다.

마오쩌둥은 6살 연하의 저우가 먼저 떠났다는 부음을 듣고 자신에게도 마르크스를 만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절감하고 후계질서 구축에 쫓겼다.

4인방은 건곤일척의 카운트다운이 드디어 울리기 시작했다는 초조감에 휩싸였다. 덩샤오핑 등 반 4인방 세력은 소나기를 앞두고 우산이 폭풍우에 날아간 망연자실의 심정이었다.

이후 10월까지 사태 전개는 매번 모두의 의표를 찌르거나 아무도 예기하지 못한 태산 명동 드라마의 점철이었다.

1월 말 마오의 차기 총리 선택은 '듣보잡'으로 여겼을 화궈펑이었다. 4월 초 천안문 반마오-반4인방 대규모 유혈 시위 사태로 수면 하 민심의 소용돌이가 분출했고 덩샤오핑이 실각함으로써 4인방 세력과 반 4인방 세력 간 불안한 세력 균형이 와르르 무너졌다.

바로 한해 전 프랑코의 죽음으로 종말을 고한 스페인 파시스트 체제가 소생될 때마다 프랑코가 " 신이여 당신을 만나기가 이렇게 힘듬니까"라고 신음을 내었을정도로 몰인정한 생명 연장 '오퍼레이션'으로 버텼듯이 문혁 체제는 마오의 억지로 유지된 목숨줄로 간신히 이어졌다.

7월 초에는 '총구'의 상징 주더가 저우의 뒤를 따랐고 그달 말에는 탕산 대지진이 일어나 수십만 명이 생매장됐다. 마치 '황제'의 사망에 앞서 순장시키듯이.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었고 한 달이 지나기 전인 10월 6일 베이징 정변으로 4인방이 체포됐다.

저우언라이가 죽은지 만 9 개월을 이틀 앞두고서였다.

'죽은 저우언라이가 '산 4인방을 잡다'였다. '태산명동' 후의 피날레는 총 한 방 쏘지 않은 '술래잡기' 놀이를 연상시켰다. <盲瞰圖子>  



197618일 중국인 사이에서영원한 총리로 불리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사망했다. 1898년생으로 향년 78세였다.

 

저우는 장쑤(江蘇)성 화이안(淮安)에서 태어났으며 저장(浙江) 샤오싱(紹興)이 원적이다. 샤오싱은 장제스(蔣介石)의 탄생지인 펑화(奉化)에 인접해있다.

 

장제스와 저우언라이는 이런 지연 때문인지 애초부터 정치 노선이 달랐음에도 관계가 각별했다. 1차 국공합작 기간 황푸군관학교에서 장과 저우는 교장과 정치부 주임으로 함께 일했다.

 

1936년 시안사변 당시 저우는 공산당 대표로서 장제스를 설득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항일전쟁 시기 충칭에 장기 머무르면서 2차 국공합작의 공산 측 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저우언라이는 처형까지 각오하며 내전 중단과 일본 침략에 맞서자는 장쉐량의 요구를 완강하게 물리쳐 장쉐량을 쩔쩔매게 하던 장제스에게 소련에서 인질 상태에 놓여 있는 아들 장징궈 문제를 언급해 장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고 한다.

 

저우언라이와 난징에서 날아온 부인 쑹메이링의 설득으로 장제스는 내전 중단을 구두 약속, 구금에서 풀려나 난징으로 돌아옴으로써 2차 국공합작의 물꼬를 텄다.

 

1949년 국공내전 패배로 장제스가 반공 교두보 지역을 놓고 하이난다오와 대만섬 사이에서 고민한다는 말을 전해듣고 "하이난다오의 민심은 험하니 대만이 나을 것"이라는 충고를 은밀히 전달햇다는 '전설' 또한 전해지고 잇다.

 

 

'공자의 유교''주자 성리학의 유교'가 질적으로 다르다고 한다면 '마오쩌둥의 공산중국''저우언라이의 공산중국'도 다르다고 할 수 있겟다.

 

오늘날 중국은 '저우의 중국'이라고 말해야 타당할 듯싶다. 또한 ''저우의 중국''마오의 중국' 보다 '장제스의 중국'과 더 가깝게 느껴질 수도 잇다.

 

저우언라이는 1913년 톈진(天津) 난카이(南開) 중학에서 공부한 뒤 1917년 일본에 유학했다.

 

1919년 귀국하여 텐진에서 ‘ 5 · 4운동 에 참가했고 각오사(覺悟社)를 조직했다.

 

1920~1924년 프랑스와 독일에 근공검학(勤工儉學)으로 유학했다.

 

유럽 유학 중에 학생과 근로자에게 마르크스 주의를 선전했고 유럽 중국 소년공산당(후에 유럽사회주의 청년단으로 개칭)을 창설했다. 192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 유럽총지부 서기에 임명됐다.

 

19248월 귀국 후 황포(黃埔)군관학교의 정치부 주임, 국민혁명군 제1군 정치부 주임, 중국공산당 양광구(兩廣區) 위원장, 상무위원 겸 군사부 부장 등을 역임하며 국공합작 기간 중 당이 직접 관할하는 무장역량인 예팅(葉挺) 독립부대를 창설했다.

 

1926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중공중앙의 군사위 서기 겸 중국공산당 저장(浙江)구 군위 서기에 임명됐다. 1927년 상하이에서 3차 무장봉기를 일으켜 장제스의 국민 혁명군 북벌군이 입성하기 전 시를 장악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상하이에 입성한 장제스는 공산 세력의 무장 역량 강화에 위기감을 느끼고 4124·12 반공 쿠데타를 일으켰고 상하이의 공산당 조직은 궤멸됐으며 그는 피신해야 했다. 이로써 1차 국공합작은 붕괴됐다. 적과의 동침이 파탄한 것이다.

 

이해 8월에 난창(南昌) 폭동을 지휘하여 공산당의 군대인 홍군 성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 8 · 7 회의에서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됐다.

 

1928년 중국공산당 6대에서 군사문제와 조직문제에 관해 보고하였다.

 

이후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을 하며 중앙 조직부장, 중국 군사위 서기에 임명되었다. 193112월 장시(江西)의 중앙 혁명근거지에 들어와 중공 소비에트 지구의 중앙국 서기, 중국 공농홍군 총정치위원 겸 제1방면군 정치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활약하며 국민당의 제4차 포위공격( 4차 초공(剿共))을 격퇴했다.

 

장제스의 5차 포위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공산당이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홍군 주력이 서북 지구 근거지로 이동하는 이른바 장정(長征) 중이던 19351월에 열린 쭌이(遵義)회의 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이 영도적 지위를 확립하는 데 기여를 하였다. 쭌이회의 이후에 중앙혁명 군사위원회 부주석(주석은 마오쩌둥)으로 있으면서 3인 군사지휘 소조의 구성원이 되었다.

 

193612월 시안사변(西安事變) 을 해결하여 2차 국공합작을 성립시켰다. 이후 항일전쟁 기간 중공중앙 대표와 남방국 서기 겸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으로 있으며 우한(武漢)과 충칭(重慶) 등 국민정부의 수도에 머물렀다.

 

19451010일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쌍십협정(雙十協定)’을 체결하였다. 194611월 옌안(延安)으로 복귀했다.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 총리와 외교부장을 겸임했다. 19722월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저우언라이 외교의 클라이맥스였으나 그 때에 바로 암에 걸렸다.

 

저우언라이는 이후 사망할 때까지 문혁 4인방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문혁으로 파괴된 정부와 당 조직을 보호하여 마오 사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저우언라이가 타계하기 바로 1년 전인 >b>197518일 덩샤오핑(鄧小平)이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102중전회에서 중공 중앙 부주석과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됐다.

 

앞서 15일 중공 중앙위원회는 1호 문건을 통해 덩샤오핑을 중공중앙 군사위 부주석 겸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국무원 제1부총리에 임명하였다.

 

자신의 사망을 꼭 1년 앞둔 저우언라이가 102중전회를 주재하며 제4기 인민대표대회를 준비했다.자신의 사후를 대비한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19351월 쭌이회의 이후 마오쩌둥의 1인자적 지위에 도전하는 법이 없었다. 마오가 대약진 운동을 실패하자 류샤오치(劉少奇)와 함께 노선 전환을 모색했으나 마오가 문화대혁명을 일으키자 주저없이 마오에 납작 엎드리는 자세를 취했다.

 

류사오치 일파가 마오를 소련에서 후르시초프를 실각시키는 방식과 같이 중앙위원회를 통한 정변을 제안했을 때 저우언라이는 "우리는 그를 이길 수 없다"라고 판세를 결정지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는 마오 노선에 대한 '반란'을 설계했다. 마오를 설득, 문혁 당시 류사오치에 이어 '주자파 2'로 낙인 찍혔던 덩샤오핑 중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마오는 저우가 사망한 뒤 화궈펑(華國鋒)을 후계자로 지명, 자신의 사후를 대비했으나 화는 애초부터 덩샤오핑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 사망 8개월 하루 뒤인 이해 99일 사망했다. 마오는 이 8개월 동안 화를 저우의 후임 총리와 당 부주석에 잇달아 임명, 자신의 노선이 사후에도 계속되도록 도모했으나 그의 바램은 불과 23개월만에 수포로 돌아갔다.

 

197812113중전회에서 화궈펑이 덩샤오핑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했으며 이후 마오 노선의 부활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全體主義(獨栽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后,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自由社會[民主化 政府]-"

*資本主義 三代原則(經濟):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共産主義 打倒]

*民主主義 三代原則(政治):民有民治民享之民主政府 等等

-民主政治要求 "人民本位(民主)"-

*極端的自由主義:自由放任(同性愛,痲藥服用, 無政府主義) 等等

*極端的社會主義:國家社會主義(國營企業,國營農場,軍國主義,洗腦指導者論) 等等

중국 공산당 대부 분 지도자들이 공산주의 노선보다는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해왔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인정하지만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한다

중국 공산당이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로 나아갈 때 21세기에도 존속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중국 국민들 중 자본가나 자산가들은 자유경제(자유주의 경제이나 기업 주도경제)를 존중하지만 근로자나 빈곤층은 사회경제(생존경제, 사회주의 경제나 국가주도 경제)를 존중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빈곤층만 공산당을 지지하고 자산계층이 공산당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중국 1인당 국민소득이 15,000달러이기 때문이다

중국정부도 자유무역과 사기업 주도에서 국가개입보다는 국가조정이나 협력이 돼야 할 시기이다

그러나 국가나 정부는 빈곤층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중국, 감세 및 요금 인하 지속적으로 추진

감세와 요금인하->기업수익과 일자리 창출->근로자 소득 증가->소비촉진과 내수경기 활성화[기업은 일자리 창출에 노력해야 하며 근로자들은 내수소비에 인정론(검소한 물품 구입)이 필요하다]

최근 미국의 세금 감면책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실상 중국은 몇년 전부터 구조성 감세를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일전에 본 방송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감세 및 요금 인하는 공급측 구조개혁의 중요한 조치라며 미국의 세수개혁을 합리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2012년부터 중국은 일련의 "안정적 성장, 구조조정, 민생혜택"에 방점을 둔 감세안을 출범했습니다. 세금 감면분야에서 중국은 영업세를 증치세(부가가치세)로 전환하는 시범을 전면적으로 추진하고 증치세 세율을 4단계에서 3단계로 통합하고 줄이면서 13%에 달하는 세율을 취소했으며 농산물과 천연가스 등의 증치세 세율을 13%에서 11%로 인하했습니다. 지금까지 영업세의 증치세로의 전환으로 1조 7천억원에 달하는 기업의 세수부담을 줄였습니다. 중국인민대학 재정금융학원 주청(朱靑)교수의 소개를 들어봅시다.

"2012년부터 시작해 중국은 줄곧 영업세를 증치세로 전환하는 조치를 실행해 왔습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조치는 감세 개혁입니다. 이 조치는 공제사슬을 타파하고 기업의 세수원가를 줄였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세금을 감면한 것으로 됩니다."

이외 중국은 또 소기업과 영세기업 발전을 지원하고 과학기술혁신을 권장하며 민생을 담보하고 개선하는 일련의 세수 감면정책을 출범했습니다. 요금인하분야에서 중국은 유료기금을 점차적으로 정돈, 규범화하고 보편적인 요금 인하책을 실시해 왔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2012년부터 중앙차원에서 이미 누계로 593개에 달하는 정부성 기금과 행정사업성 요금을 취소, 중지, 감면해 해마다 3200억원 인민폐에 달하는 사회부담을 줄여주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770여개에 달하는 지방성 요금을 취소하거나 중지, 감면해 해마다 470억억원 인민폐에 달하는 사회부담을 줄였습니다.

중국재정과학연구원 류상희(劉尙希)원장은 중국의 감세 및 요금 인하는 공급측 구조개혁을 촉진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의 감세 및 요금인하 조치는 공급측 구조개혁의 중요한 조치입니다. 지금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공급측 구조개혁에 세수정책도 상응하게 반영되고 있습니다. 감세 및 요금 인하는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한편 이는 또 세제개혁의 중요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세제를 보완하고 특히 영업세를 증치세로 전환하는 것은 가장 전형적인 세제보완책입니다. 이와 동시에 세수 정책도 반영되고 과학기술혁신과 중소기업 및 영세기업에 상응한 세수우대정책을 부여해야 합니다. 세제개혁과 세수정책의 병행은 모두 공급측 구조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미국 상하 양원은 각기 2017년 12월 2일과 11월 17일에 각자 버전의 "감세 및 일자리법"을 통과했습니다. 비록 두 버전에 여전히 세부적인 차이가 있지만 양자는 모두 전반적인 세제개혁과 관련해 기본적인 공감대를 달성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괄목한만 한 것은 C형 회사(중국의 법인기업에 해당)소득세 세율을 기존의 35%에서 20%로 인하한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추산에 의하면 인하된 미국 연방세 세율 20%에 주와 지방에서 징수하는 지방세를 합하면 최종 명의 세율은 약 26% 됩니다. 중국재정과학연구원 류상희 원장은 미국의 세제개혁을 대할 때 세율 인하만 볼 것이 아니라 각종 우대정책 취소로 과세기준이 확대된 점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의 세제개혁을 두 가지로 나누어 봐야 합니다. 하나는 명의 세율의 인하입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과세기준도 조정했습니다. 실제적인 세수부담은 세율에 과세기준을 곱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의 세율만 보고 과세기준의 변화를 홀시한다면 세수부담이 진정으로 어느정도 줄었는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미국의 기업소득세를 예로 든다면 명의 세율은 15% 인하됐지만 실제적으로 미국예산실의 분석에 의하면 실제적인 세수부담은 2%포인트밖에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큰 감세폭과 다릅니다. 미국의 세제개혁은 미국의 실제상황에 따라 명의 세율의 인하와 과세기준의 통합, 우대정책 취소로 이루어졌습니다. 실제적으로 인상과 인하를 결부한 감세 기교로 세제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 분석가들은 미국의 세제개혁으로 미국에로의 자금유동을 초래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몇년간 중국은 외자 유치를 위한 일련의 재정 및 세수정책 조치를 취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올해 8월 국무원에서 발표한 "외자 성장 촉진에 관한 약간의 조치 및 통지"가운데 세수와 관련된 정책은 모두 맞춤성과 대상성이 있습니다. 이 통지의 규정에 의하면 처분이익을 중국경내에서 재투자할 경우 일정한 조건에 부합되면 원천소득세를 잠정 납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10%에 달하는 원천소득세를 지금은 잠정적으로 납부하지 않아도 됨을 뜻합니다.[중국 국제방송]


중국 빈곤퇴치 속도와 질 모두 추구

                                                             중국, 아직도 7천여만명 여전히 빈곤[중국 빈곤층 주민 손 모습]

중국 빈곤층 해결방법은 紅(마스 레닌주의, 평등주의)보다는 展(자본주의, 1인당 국민소득-개혁개방)이 나다고 봅니다

유영부(劉永富)중국국무원가난구제개발판공실 주임은 7일 2020년 전으로 중국은 현 기준의 농촌인구 빈곤퇴치문제를 해결해 모든 빈곤현의 빈곤을 퇴치하고 지역성 빈곤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목표 실현을 위해 중국은 가장 엄격한 심사평가제도로 진정으로 가난구제를 담보하고 가난구제 난관돌파성과가 역사의 시련을 이겨내도록 담보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현재 중국의 빈곤인구는 4천여만명에 달합니다. 중국 집권당과 정부의 목표에 의하면 2020년에 가서 이들은 전부 가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빈곤퇴치 기준은 무엇인지? 각 지역의 발전수준이 다른 중국에서 빈곤퇴치를 어느 한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실현할 것인지? 등 문제에 대해 전인대 연도 정례기자회견에 참석한 유영부 국무원가난구제개발판공실 주임은 현재 중국 각 지역은 모두 빈곤퇴치의 난관 돌파 시간표를 제정하고 빈곤퇴치 기준을 설정했다고 소개했습니다

"빈곤퇴치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빈곤현과 빈곤촌이 '빈곤'이란 모자를 벗으려면 빈곤인구가 2%미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먹고 입을 걱정이 없어야 하며 의무교육과 기본 의료 및 주택 안전을 담보해야 합니다."

31년 전 중국은 최초로 가난구제기준을 제정했습니다. 그때 기준으로 전국의 빈곤인구는 1억2천5백만명으로 통제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4년 내에 4천만명 빈곤인구의 빈곤퇴치를 실현해야 합니다. 어떯게 하면 이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유영부 주임은 산업소득증대를 통한 빈곤퇴치, 이주를 통한 빈곤퇴치, 노무수출을 통한 빈곤퇴치, 생태보호를 통한 빈곤퇴치 등이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유영부 주임은 빈곤인구의 소득증대의 주요 착안점은 산업발전을 통한 빈곤퇴치라고 말했습니다.

"산업발전을 통한 빈곤퇴치는 여전히 맞춤형 가난구제와 빈곤퇴치의 주요 착안점이며 궁극적인 방법입니다. 빈곤인구는 빈곤퇴치의 주체이며 기업은 산업발전의 주체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가난구제사업은 정부에서 인도해야 마땅하지만 여전히 시장운영에 맡겨 빈곤인원들이 참여하고 기업이 추동하는 훌륭한 메커니즘을 형성해야 합니다."

산업발전을 통한 빈곤퇴치에서 농촌관광은 이미 중국농민들의 소득을 늘리고 농촌경제를 발전시키는 중견 역량으로 부상했습니다. 지난 5년간 중국은 농촌관광개발을 통해 약 1천만명 빈곤인구의 빈곤퇴치를 추동했습니다. 중국국가여유국 규획재무국 팽덕성(彭德成)국장은 관광을 통한 가난구제의 특점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관광을 통한 가난구제는 빈곤인원들이 자신의 노무와 토지, 주택을 생산요소로 관광경영서비스에 참여하는 산업을 통한 가난구제이며 조혈식(造血式) 가난구제입니다. 아울러 이는 빈곤인구들의 존엄을 지켜주고 그들에게 새로운 관념과 견문을 부여하게 됩니다. 관광에 의한 가난구제의 또 다른 특점이라면 재빈곤률이 낮은 점입니다."

주요 착안점을 확정했지만 아직도 어려움이 많음을 유영부 주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변경 민족지역과 빈곤촌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하며 병으로 인한 빈곤 및 재빈곤 초래, 학업으로 인한 재빈곤 및 극빈 초래 인원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배려하는 것 등이 유영부 주임이 지적하는 주요한 돌파구입니다.

유영부 주임은 가장 취약한 지역에서 가장 적절한 정책으로 빈곤퇴치의 질을 높이고 빈곤퇴치 후 다시 빈곤해지는 재빈곤 현상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확실한 가난구제를 담보하고 역사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중국은 가장 엄격한 심사평가제도를 실시해 가난구제 효과를 담보하게 됩니다. 유영부 주임의 말입니다.

"하나는 국가 관련부처의 심사평가입니다. 국가통계국과 국무원가난구제개발판공실의 관련수치를 통해 심사평가하는 것입니다. 이 수치는 통계와 조사를 통해 확보한 정보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각 성간 교차적인 심사평가가 있습니다. 중앙과 빈곤퇴치책임서를 체결한 중서부 22개성이 서로 교차해 심사평가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제3자 평가입니다. 과학연구기관에 위임해 농촌의 가정을 방문해 조사연구하는 것입니다."

올해 중앙정부의 빈곤퇴치 목표는 농촌빈곤인구 1천만명 이상을 더 줄이는 것입니다. 연간 목표는 비록 3월 초 전인대 연례회의 기간 전인대 대표들의 심의를 받게 되지만 빈곤퇴치사업은 끊임없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티베트자치구 라싸시 곡수현(曲水)현 삼유촌(三有)촌은 티베트에서 최초로 이주를 통한 가난구제를 실시한 마을입니다. 지난해 여름 700여명 빈곤세대가 새집에 이사한 후 젖소농장, 티벳 닭 사육, 약재와 목초 재배, 상점 운영 등 산업 프로젝트를 통해 집집마다 소득이 있고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2월 말 그들은 빈곤탈퇴 후 티베트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촌민 자시둬지의 말입니다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이곳으로 이사온 후 모든 것이 좋아졌습니다. 우리 삼유촌 촌민들은 하루속히 부유해져 국가와 사회 각계에 보답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최근 몇년간 중국은 해마다 1천만명 이상의 빈곤 퇴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난해는 이 수치가 1240만명에 달했습니다. 중국은 국내 빈곤인구를 대폭 줄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와 함께 가난구제경험을 공유해 오고 있으며 유엔 2030년 발전의정에서 제출한 목표 실현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습니다

 

"국가발전은 展(개혁개방, 자본주의)과 紅(공산주의, 평등)이 아닌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이다

 경제는 자본주의이며 정치는 민주주의이다

자본주의 3대원칙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등이며 민주주의 3대원칙은 民有, 民治, 民香정부(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이다

국민이 가난한 나라는 국가도 가난할 수 밖에 없다 중국의 발전은 1인당 국민소득 증가이다. 紅(공산주의, 평등)은 공산당 세력(마스 레닌주의 세력)만 배부른 가계(귀족가계)가 될 수 있다 "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全體主義(獨栽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后,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自由社會[民主化 政府]-"



*資本主義 三代原則(經濟):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

*民主主義 三代原則(政治):爲民有、民治、民享之政府 等等

-民主政治要求 "人民本位"-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2015년 5월 20일 전국 학생 영양 일입니다. 암웨이 공익 기금회 미세 공익, 시장공익 자선기금 중국 관심 아래 일대 공작위원회는 유명한 영화 배우 황 레이(黄磊) 함께 "백미행동(白米行動) '을 실시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중 하나 일색를 백미 만하고 영양 균형 잡힌 식사를 할 수없는 빈곤 지역 아동의 감정을 이해하고 남은 반찬 요금을 빈곤 지역 학교 급식실 건설 모금하도록 호소했습니다. 상해시의 100명 이상의 시민이 홍구 지역의 음식점에서 백미행동(白米行動)에 참여하여 빈곤 지역 · 산간 지역의 아동 영양 개선을 지지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약 2,600만명의 빈곤 지역 학생들이 영양 부족의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