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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4월 5일 淸明節 천안문 사건 본문
"주은래 전 총리 죽음 이후 4월 5일 "반장칭(反江靑), 반마오(反毛)" 운동으로 4인방 축출과 등소평 등장입니다"
오늘은 공산 중국이 좌편향에서 우선회로 코페루니쿠스적 전기를 마련하는 발단이된 1976년 청명절(淸明節) 천안문 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이 사건의 단기적 승자는 장칭(江靑) 등 4인방이었으나 그들은 이 사건후 6개월 만에 몰락했다.
덩샤오핑과 그 지지 세력에게는 청명절 천안문 사건은 '실패가 아닌 시련'에불과햇으나 4인방 세력에게는 ' 되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 좌절'의 씨앗이었다.
4인방은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의 정치 전략적 지지를 확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있었고 매스컴 그리고 공안 부문을통제했다. 반면 덩샤오핑 세력은 군부의 지지를 확보하여 수세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경제 부문에서의 성취로 민심의 지지를 확대해나가고 있는 와중에 청명절 시위로 민심의 지지 쏠림 현상을 확인하엿다.
마오의 전략적인 4인방에 대한 선택적지지로 덩샤오핑 세력은 일단 정치 권력에서 밀려났으나 당시 마오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베이징 정국은 안개 정국 상황에 빠져 들어갔다.
아슬아슬한균형에서 마오의 떠받치기로 간신히유지돼온 불안한 정세는 이해 9월 9일 마오의 사망으로 버티목의 상실로 제로섬의 카운트다운에 들어갓다. 결국 같은 해 10월 6일 베이징 정변이 일어나 4인방 세력이 일거에 축출되기에 이른다.
1976년 4월 5일 천안문 광장에서 4인방에 반대하는 대규모 유혈시위가 발생했다. 중국에서는 이를 ‘4 · 5 운동’이라고 부른다.
이 해 1월 8일에 사망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 대한 추모의 정을 표하기 위해 중국 일반 민중들은 청명절을 앞둔 3월 말부터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화환, 꽃다발, 헌사 등을 바쳤으며 시낭송과 연설을 통해 저우의 업적을 기리는 행동을 벌였다.
청명절인 4월 4일 저우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고조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4인방 세력은 이날 저녁 당 원로이며 덩샤오핑(鄧小平)과 가까운 예전잉(葉劍英), 주더(朱德), 리셴녠(李先念), 쉬스요우(許世友) 등이 불참한 가운데 정치국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4인방이 주도한 정치국 회의는 저우에 대한 추모열기를 ‘반혁명 성격을 지닌 반격행위’라고 규정했다. 4인방은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승인을 받아 밤중에 인민영웅기념비에 바쳐져 있던 화환, 표어 등을 전부 철거했다.
다음 날인 4월 5일 천안문 광장에나온 군중들은 인민영웅기념비 주변이 깨끗이 청소된 데 대해 분노하고 “화환을 돌려달라”. “나의 전우를 돌려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위가 점차 과격해지면서 ‘반장칭(反江靑)’, ‘반마오(反毛)’의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위대들은 민병, 경찰, 그리고 군병력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공안국의 방송선전차들에 불을 지르고 천안문 동남쪽에 있는 베이징 위수구(北京衛戍區)경위부대 막사를 점령, ‘수도 인민 총리추도위원회(首都人民總理追悼委員會)’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이어 베이징 공안국을 파괴할 것을 공공연히 선언하면서 베이징 공안국이 파견한 소방차와 음식운반차량을 불 지르고 경위부대에 들어가 집기와 막사를 불태웠다.
오후 9시부터 잔혹한 진압이 개시되었다. 이 저항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마오쩌둥과 4인방은 천안문광장 주위에 정규군 3개 사단과 약 4만 명의 노동자 민병을 투입, 사건을 유혈 진압하여 3,000여 명이 사망·부상 내지는 체포, 처형당하는 참극을 빚었다.
이틀 뒤인 4월 7일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어4인방의 일원으로 '문혁의 붓'으로 불린 야오원위안(姚文元)은 인민일보 기자가 쓴 '현장보도‘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천안문 사건을 ‘반혁명 정치사건’으로 규정했다.
중국공산당 부주석이며 부총리이던 덩샤오핑은 배후 조종자로 몰려 모든 직책에서 축출되었고 총리서리로 있던 화궈펑(華國鋒)이 정식으로 총리에 임명되고 당 제1부주석에 선출되어 마오의 후계자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4인방과 덩샤오핑이 사생결단의 정치투쟁 과정에서 화궈펑이 또 다시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다. 덩샤오핑으로서는 3 번째 실각이었으며 화궢펑으로서는 2 번재 어부지리였다.
1976년 '4·5 청명절 천안문 사건'은 13년 뒤인 1989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 6·4 천안문 유혈 진압 사태'과 발단과 전개 양상에서 진압 과정까지 모든 면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4인방이 체포됨으로써 덩샤오핑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음이 발표되고 1977년 7월 당 제 10 기 3중전회에서 당 부주석 자리에 복귀했다.
이 천안문 사건에 대해 1978년 11월 16일 베이징 시당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혁명적 행동’이란 역사적 평가가 내려졌다.
이와 함께 이 사건으로 박해를 받았던 이들을 복권시켰다. 이해 12월 중국 공산당 11기3중전회에서 ‘완전한 혁명운동’으로 선포되었다.
1976년 청명절 천안문 시위는 발발 불과 2년 8 개월 만에 완전히 '평반(平反)'되었다. 그러나 89 천안문 시위는 28년째를 맞는 2017년 현재까지도 반체제 인사들을 중심으로 '평반'이 꾸준하게 제기되고는 있으나 의미할 만한 움직임은 없다.
다만 2000년 9월 장쩌민 국가주석이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 젊은 대학생들의 열정을 이해한다"는 발언을 했을 뿐이다
4인방 중 장칭이 체포되어 재판정으로 들어서는 모습(좌), 젊은 시절 마오쩌둥과 장칭(우)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 3대 원칙: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
*국영 기업 [
국가
사기업 [
-고도소비사회는 소비가 투자라는 경제원칙이 적용되는 고소득층이 국가 경제 주도층으로 되어 가는 사회이다
-고도 소비사회(고소득층)에서는 자본주의민주주의(자유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자유무역으로 국가간의 경제통합이 필요하다
*극단적 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국영기업, 군국주의)
*극단적 자유주의(무정부주의-마약복용,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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