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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클린턴 외교자문 "북한, 아직 고통 못 느껴...압박 늘려야" 본문

Guide Ear&Bird's Eye/미국의 소리[VOA]

클린턴 외교자문 "북한, 아직 고통 못 느껴...압박 늘려야"

CIA bear 허관(許灌) 2016. 10. 25. 21:00

 

                                            미국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가 지난 23일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롯에서 열린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 후보의 외교 자문이 북한에 대한 강력한 추가 압박을 시사했습니다. 대북 제재가 아직 북한에 고통을 주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지적입니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북한에 더욱 강력한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그의 외교 자문이 밝혔습니다.

클린턴의 외교 자문인 로라 로젠버거 씨는 지난 21일 `VOA'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턴 후보는 북한에 압박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미국이 동맹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로젠버거] "They so far have been sanctioned but not to a degree that has really inflicted pain..."

지금까지의 대북 제재는 북한에 실제로 고통을 주는 수준이 아니었으며, 북한은 핵 포기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의 외교자문인 로라 로젠버거 씨가 VOA와 인터뷰하고 있다.

로젠버거 자문은 이를 위해 “중국 또한 북한에 대해 상당한 추가 압박을 가하도록 미국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로젠버거] "It may also mean doing some things China may not like. She belives.."

로젠버거 자문은 미국이 중국이 좋아하지 않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며, 클린턴 후보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미국과 동맹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이 모든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 방위태세를 점검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으로부터 압박을 받지 않으려면 중국은 북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미국과 협력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로젠버거 자문은 또 클린턴 후보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의 속도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고, 이것이 미국과 동맹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믿는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북한이 운반 가능한 핵무기를 확보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클린턴 후보의 입장”이라고 말했습니다.

로젠버거 자문은 특히 클린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계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로젠버거] "Pivot to Asia is something that she felt was a really big accomplishment of..."

클린턴 후보는 오바마 행정부 국무장관 재임 기간 중 큰 업적의 하나로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꼽고 있으며, 이 정책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란 설명입니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의 외교안보 자문역인 마이클 플린 전 국방정보국 DIA 국장은 21일 뉴욕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만나 한반도 정책 구상을 밝혔습니다.

 

미국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선후보(오른쪽)가 외교안보자문역인 마이클 플린 전 국방정보국장과 나란히 지난달 뉴햄프셔주 베드포드에서 열린 선거유세에 참석했다.

한국 언론에 따르면 플린 자문은 이 자리에서 트럼프 후보가 지금까지 밝힌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 주한미군 철수, 한국의 핵무장 허용 등의 발언에대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플린 자문은 “트럼프 후보가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겠지만, 한국과 긴밀히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플린 자문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해 “핵 능력을 축적할 뿐 줄이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며 북한의 핵 능력 제거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북한  평민층 식량난과  영양부족(실조) 북한 아동들 모습[Famine grips North Korea]

A malnourished boy stands in an equally emaciated cornfield,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29, 2011. [북한 함경남도 옥수수 밭에 서 있는 영양부족(영양실조) 북한 아동모습(2011년 9월 29일)]

 

 

             A homeless woman prepares a few shriveled ears of corn for lunch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점심 밥)

 

           Students and volunteers dig a canal on October 1, 2011 in Haeju ,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학생과 주민 자원자들 동원 근로사업)

 

                                        A woman cooks at home on September 29. 2011, in Hwanghaenam-do, North Korea(옥수수 밥을 준비하는 북한 어머니 모습)

 

    A malnourished boy lies on a hospital bed in Haeju,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October 1, 2011.(영양실조로 병원에 누워 있는 소년 모습) 

 

 

                                          A mother cares for her clinically malnourished child(영양실조로 누워 있는 아동을 간호하는 어머니 모습)

 

Malnourished infants lie on hospital beds in Haeju,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October 1, 2011(함경남도 해주 병원 입원한 영양실조 북한 아동들 모습)

 

 A boy prepares the soil for crops on a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집단농장에서 농작물을 위해 흙을 준비하는 소년모습)

 

 

         Women work on a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집단농장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들 모습)

 

 

                                        Pak Su Dong, the boss of the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집단농장 책임자 박수동씨 모습)

 

 

                                          Jo Tae Kun, a health-care assistant in a small village in Hwanghaenam-do, North Korea(마을 영양사 조태곤씨 모습)

 

 

            Two North Korean orphans dress to impress a foreign delegation(두 명의 북한 고아들이 외국 파견단 방문용으로 좋은 옷을 입은 모습)

 

자료:중국정부

http://www.china.org.cn/photos/2011-10/11/content_23591611_6.htm

 

 

힐러리 "중국 북핵 막지 않으면 미사일방어망 포위할 것"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이 3년 전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보유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초강력 수법으로 중국을 강력히 압박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13일 AP통신 등은 최근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클린턴 선거캠프 존 포데스타 선대 본부장의 이메일을 인용, 클린턴 후보가 지난 2013년 6월 골드만삭스에서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이같이 밝혔다고 전했다.

클린턴은 강연에서 "우리는 북한이 계속해서 미사일을 개발해 소형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손에 넣는다면 참지 않겠다는 입장을 중국에 전했다"며 "미사일이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에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이론상으로는 하와이와 서부 해안까지 도달할 수 있는 만큼 미사일방어망으로 중국을 에워 쌀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해당 지역에 더 많은 함대를 배치할 것"이라며 "중국이 북한을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가 북한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같은 발언은 클린턴 후보가 북한이 3차 핵실험을 실시한 2013년 2월 한 행사에서 북한이 미국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클린턴 후보는 또 "중국 인민해방군(PLA)이 북한의 최대 지원자로 중국군 지도부와 북한 간의 유대가 양국 관계의 핵심이 돼 왔다"면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측근들로 구성된 새 중국 지도부는 북한에 도발적 행위를 멈추라고 언질을 줬다"고 역설했다.

한편 3년 전 이런 발언은 최근 한미와 중국의 갈등을 고조시키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조치와 연관이 된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중국은 사드 한반도 배치가 자국을 겨냥한 것이지 북한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면서 자국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으며 글로벌 전략 균형을 훼손할 것이라면서 반대 입장을 거듭 표명했다.

sophis731@newsis.com

 

 

동북아시아(극동지역)은 한반도와 중국 동북3성, 러시아 극동연방관구, 일본등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의 직접적 위협은 동북아시아(극동지역)이다

 

                                                                                                    동아시아 국가 중국

중국은 동아시아 국가로 동남아시아(광동성, 운남성 등), 남부아시아(티베트 등), 중앙아시아(신장 등), 동북아시아(동북3성과 내몽골등), 소중국(한족 거주지)으로 구성된 동아시아 국가이다

 

 

                                                                           러시아 극동연방관구과 북극해, 미국 알래스카

*일본과 소련 만주국 승인

                                                                       일본과 소련은 만주국을 승인했다[한반도 통일이 중국정부의 이익]

1932년 3월 1일  만주국(중국 동북3성과 내몽골 지역) 건국과 1932년 9월 15일 일본은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고 만주국을 승인했다.

1932년 9월 15일 일본은 이해 3월 1일 성립된 만주국과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고 만주국을 승인했다.

일본과 일본 자신이 세운 괴뢰국 만주국과의 ‘일만의정서’ 협정 체결은 이날 일본 관동군(關東軍) 사령관 겸 주만(駐滿)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와 만주국 총리 정샤오쉬(鄭孝胥)에 의해 창춘(長春)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은 1932년 3월 만주국을 성립시켰으나 국제연맹의 리튼 조사단이 활동하는 동안 공개적으로 이를 승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리튼 조사단의 결론이 만주국을 인정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만주국을 승인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리튼 조사단은 1932년 2월, 만주사변 처리에 대해 국제연맹이 파견한 조사위원회를 말한다.

중국이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발생한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을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연맹규약 제15조에 따라 총회개최를 요구하자, 일본은 조사단 파견 제안으로 맞대응했고, 1931년 12월 이사회는 조사단파견을 결정했다.

조사단은 영국의 V.A.G.R. 리튼을 단장으로 하고,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독일 등의 장군·외교관을 포함하여 모두 5명이었다.

일본은 리튼 조사단이 도쿄에 도착한 다음 날인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의 건국을 선언케 하여 이를 기정사실화 하려 하였다.

조사단은 1932년 3월 13일 상하이에 도착한 뒤, 6월 초순까지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한커우(漢口), 베이징(北京) 등과 만주에서 조사를 마치고, 베이징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10월 1일 중·일 양국에 전달되었고 2일 공표되었다.

보고서는 '만주국'의 건국을 중국인의 자발적인 운동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만주를 중국주권의 범위에 포함시켰으며 지방적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함과 동시에 만주에 관한 일본의 권익도 승인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보고서에 불만을 나타냈다.

결국 리튼 보고서와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19인 위원회의 보고서가 국제연맹 총회에서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만주국 승인을 앞둔 1932년 일본에서도 큰 정치적 소용돌이가 벌어졌다.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가 해군의 과격 청년장교 그룹이 중심이 된 ‘5 · 15 사건’으로 피살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정당내각 정치는 붕괴됐다.

이후 혼란을 거듭하던 일본 정국은 이해 8월 초 수습의 가닥이 잡혔고 이는 국제여론을 무시한 만주국 승인으로 이어졌다.

9월 13일 일본 추밀원의 ‘일만의정서’ 통과에 이어 9월 15일에 협정 서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만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 2가지이다.

- 일본이 만주국 영역 내에서기존의 일-중 양국 조약. 협정, 기타 조관(條款), 및 공사 계약에 근거하여 향유하고 있는 일체의 권익을 만주국은 승인한다.

- 양국은 공동으로 국방의 책임을 지며 일본은 만주국 영역 내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를 갖는다.

의정서는 이해 3월 10일에 이루어진 일본과 만주국과의 밀약을 지속시킨 외에 일본이 만주국의 교통망, 광산, 국방. 치안 등을 위탁관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밀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조약 체결의 형식을 빌어 만주국을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1932년 3월 1일에 만든 괴뢰국가이다.

만주국의 영역은 현재의 중국 둥베이(東北)지구에 있는 3성(省)인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으로 구성되었으며, 만주국 성립 후에는 러허(熱河)성도 판도에 넣어, 1940년의 행정구획으로는 18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931년 9월 18일 류탸오거우(柳條溝) 사건을 통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중심인물인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가타쿠라 다다시(片倉衷) 등 관동군의 장교들은 사건 직후부터 당초의 만주에 대한 군사점령이라는 구상을 변경하여 괴뢰국가 건설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국민혁명(國民革命)에 부정적인 만주군벌의 시챠(熙洽), 장징훼이(張景惠), 창스이(臧式毅),장하이펑(張海鵬), 간츠산(干芷山), 마잔산(馬占山) 등에게 강요하여 각 성(省)을 독립시키고, 1932년 3월 1일에는 그들이 조직한 둥베이 행정위원회(東北行政委員會)에 의한 '건국선언'을 발표시켜 중국인 자신에 의한 독립이라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리고 톈진(天津)에 은거하고 있던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비밀리에 만주로 데려와 3월 9일 푸이의 집정(執政) 취임식이 거행되어 '만주국'의 모양이 갖추어졌다(후에 푸이 '황제'로 즉위).

만주국의 주권은 집정(황제)에게 있었으며 헌법은 없고 정부조직법이 이를 대신하였다. 입법·행정·사법·감찰의 4권분립제였으며 집정(황제)의 자문기관으로서 참의부(參議府)가 있었다.

정부조직법에 의하면 행정권이 강력하였고 행정의 중심은 국무원(國務院)이었으며 수반은 국무총리였다. 집정(황제)에 대한 보필의 책임은 국무총리 한 사람만이 지고, 국무원 예하의 각 부 총장은 소관 사무에 대한 행정장관이었다.

따라서 국무총리의 권한이 큰 편이었으며 이 국무총리의 참모적 지위에 있는 것이 총무청(總務廳)으로서 총무장관이 국무총리가 직접 관장하는 인사·회계·조달(調達) 등을 처리하였다. 이처럼 총무장관에게 실권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총무청 중심주의라 불렀다.

총무장관은 반드시 일본인이 임명되었으며 총무청 내의 각 처장과 행정 각부의 차장 이하의 일본인 관리를 사실상 감독하였다.

실질적 지배 주체인 일본 관동군은 4,000만 이상의 이민족(異民族)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민족협화(民族協和)'를 내세우고 그것을 '오족협화(五族協和)'에 의한 '왕도낙토(王道樂土)'의 건설의 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라는 관제조직을 1932년 7월에 발족시켜 민중 지배의 첨병으로 삼았다.

태평양전쟁( 1941년 12월 7일 ~ 1945년 8월 15일 ) 에 의하여 만주국은 식량과 광공업(鑛工業) 원료의 생산확대가 불가피하여 통제가 강화되었고 수탈적 요소가 더욱더 증대하였으며, 협화회가 이 수탈의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1943년 봄 이후부터 만주국의 물리적 기반인 관동군은 병력을 남방 각 지역과 일본 본토작전에 전용(轉用)하며 약체화하였으며, 1945년 8월의 소련 참전과 일본의 패전으로 만주국은 해체되었다.

 

*리튼 보고서

1932년 9월 30일 = 국제연맹이 만주(滿洲)의 자치를 제안한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를 일본정부에 전달했다.

리튼 조사단은 1932년 2월, 만주사변 처리에 대해 국제연맹이 파견한 조사위원회다. 중국 국민정부가 만주사변을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연맹규약 제15조에 따라 총회 개최를 요구하자, 일본은 조사단 파견을 제안했고, 1931년 12월 이사회에서 조사단 파견을 결정했다.

조사단은 영국의 V.A.G.R. 리튼을 단장으로 선임하고, 프랑스·미국·이탈리아·독일 등의 장군·외교관을 포함하여 모두 5명이었다. 1932년 3월 13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한 뒤, 6월 초순까지 상하이·난징(南京)·한커우(漢口)·베이징(北京) 등과 만주에서 조사를 마치고, 베이징에서 보고서를 작성한 뒤 9월 30일 중국과 일본 양국 정부에 전달했다.

보고서는 이해 3월 1일 일본의 조종에 따라 건국을 선언한 '만주국'이 중국인의 자발적인 운동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만주를 중국주권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만주에 지방적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하고 만주에 관한 일본의 권익도 승인했다.

보고서는 10월 2일 공표되었다. 일본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리튼 보고서의 채택과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19인 위원회의 보고서가 국제연맹총회에서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만주국(滿洲國,Manchukuo, Manchu Stat)

 

만주국은 한족, 조선족, 만족(여진족),몽골족, 일족(일본족)등 5종족이  1932년 3월 1일 세운 연합정부이다. 만주국은 지금의 중국 동북3성 지역 영토이며 인구 3,693만명수준이었다[1937년 자료]

만주국(滿洲國, 중국어 정체: 滿洲國, 병음: Mǎnzhōu Guó, 영어: Manchukuo, Manchu State)은 일본 제국이 만주 사변(1931년 9월 18일 ~ 1932년 2월 18일) 직후부터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이였다.

 

                                                                                      만주국 국기

1931년 일본 제국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점령하였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한 선통제(푸이)를 황제로 내세웠다(강덕제). 일본 제국에 철저히 종속된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은 1945년 8월 18일 붕괴되었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19일 선양공항에서 일본으로 도주하려던 푸이를 체포한 뒤 만주 전역을 점령하였고, 같은 해 11월 중화민국이 이 지역들을 넘겨받았다.

만주국의 영역은 한반도 및 중화민국, 소련, 몽골인민공화국, 내몽골자치연합정부(일본의 괴뢰정권)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만주국은 강덕제(푸이)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조선인, 일본인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1931년의 만주사변에 의해서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제국 육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였던 관동군이 행함으로써 사실상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다.

1932년 국제 연맹의 리튼 조사단은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권이며, 만주 지역은 중화민국의 주권 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중화민국의 입장을 지지해 일본정부를 비난했다. 이로 인해 일본은 1933년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직후,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으로 인한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만주국은 소멸했다.

 

1.역사

(1)Northeast China [traditional Chinese: 中國東北=滿州(만주)] Ruler

Gojoseon[B.C 2333-B.C 108, Korea People:고조선]->Han[B.C 108-A.D 313, Han China People:漢(한)-한나라의 청천강 이북지역 점령과 한사군 설치 그리고 청천강 이남 고조선 유민으로 진국등장]->Goguryea[A.D 313-668, Korea People:고구려]->Tang[A.D 668-698, Han China People:唐(당)나라]->Balhae[A.D 698-926, Korea People:조선족과 여진족 연합정부]->Liao[A.D916-1125, Khitan China People:遼(요)나라-거란족:(다우르족:達斡爾族(달알이족))]->Jin[A.D 1115-1234,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金(금)나라-여진족 또는 만주족]->Mongol[A.D1234-1368, Mongol People:蒙古(몽고)나라-몽고족]->Ming[A.D 1368-1644, Han China People:明(명)나라]->Qing[A.D 1616-1912,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淸(청)나라-만주족]->Republic of China[A.D 1912-1932, Han China People:중화민국-중국 국민당]->Manchukuo[A.D 1932-1945,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滿州國(만주국)-만주족=여진족]->소련 극동군 만주국 점령[1945년 8월 18일,8월 폭풍작전]->중국연합군 반환[1945년 11월, 소련극동군과 인민해방군이 점령 이후 소련군이 중국 연합군 동북3성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임표에게 넘겨 줌]->People's Republic of China[1949년 10월 1일~ Han China People: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

(2)국호

만주국 외에 대만주국(大滿洲國), 만주제국, 대만주제국(大滿洲帝國) 등으로 만주국의 공문서에서도 일정하게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국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만주국'이 가장 일반적인 호칭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만주국이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였다는 뜻에서 위만주국(僞滿洲國), 약칭 위만(僞滿)이라고 낮추어 부르기도 한다.

(3)건국과 멸망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1932년 1월에 장쉐량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진저우를 점령한 후 만주국 구상을 계획했다. 국제연맹에서는 중화민국에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였으나 리튼 조사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만주국의 수도는 지금의 창춘인 신징을, 연호는 대동이라 했으며, 황제는 이전 청나라의 황제였던 푸이로 옹립했다. 1932년 9월에 일만의정서를 조인해 일본이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으며, 이어 독일, 이탈리아, 교황청, 스페인, 헝가리 등 8개국이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했다. 1934년 9월 제정 수립으로 연호를 강덕으로 고쳤다. 만주국의 실세는 관동군 사령관, 경제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맡았다. 만주국에는 군대도 있었으나 할힌골 전투 등에서 소련군에게 패하는 등 무능력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꼭두각시 나라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지역을 공격(8월 폭풍 작전)함으로써 8월 18일 망하였고, 만주 지역을 점령한 소련은 같은 해 11월 해당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하였다

(4)건국의 배경

20세기 초 일본에서는 만주를 영향력 하에 두려는 제정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일본의 국가 안전보장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1900년 러시아는 요시카즈단 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권익을 독점했다. 이것에 대항하여 일본은 미국 등과 함께 만주를 각국에 개방할 것을 주장하며,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영일 동맹). 마침내 일본은 1904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싸워 승리하였고(러일전쟁), 포츠머스 조약으로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하고 요동 반도와 동청철도 남부의 조차권을 확보했다. 그 후 일본은 종래의 입장과 달리 러시아와 공동으로 만주에 대한 이익 확보에 나서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반발을 불렀다

(5)멸망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8월 8일 소련군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8월 폭풍 작전을 전개하였다.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한 직후 8월 18일 푸이가 퇴위함으로써 망하였고, 8월 말 소련군은 만주 전역을 점령하였다. 같은 해 11월 소련은 만주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하였고, 1949년 이후부터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치하고 있다.

 

2.국가체제

(1)정치

만주국은 한족, 조선족,만주족(만족, 여진족),몽골족, 일본족등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이념으로 미국을 모델로 건설된 아시아의 다민족 공생의 실험국가였다. 공화제 국가인 미국을 모델로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황제를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였다. 오족협화란 만주족과 몽고족·한족·일본인·조선인의 다섯 민족이 협력해서 평화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왕도낙토란 서양의 패도에 반대되는 아시아의 이상적인 정치 체제를 왕도라고 해서 만주국 황제를 중심으로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주에는 오족 이외에도 러시아 혁명 이후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피해 온 백계 러시아인 등도 거주하고 있었다.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패망한 녹색 우크라이나(Green Ukraine·Zeleny Klyn)의 우크라이나인 세력은 만주국과 접촉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일본·만주국·우크라이나의 삼국 동맹으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을 개시할 계획을 협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은 러시아인의 파시스트 조직을 지원할 방침으로 변경하고 러시아인 조직과 대립이 있는 우크라이나인 조직과는 단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우크라이나인 조직과 손잡으려고 했지만 태평양 방면에서의 고전도 있어서 극동에서의 반소 무력 항쟁은 실현되지 않았다.

만주국은 일본의 계획적 지원 아래 극히 단기간에 발전했다. 내전이 계속되는 중국으로부터 한인의 이주, 새로운 환경을 찾는 조선인의 이주, 특히 일본 정부의 정책에 따라 만주국의 준비된 농지로 이주하는 일본 국내인의 이민이 많았다. 이러한 이주에 의해서 만주국의 인구도 급격한 기세로 증가했다. 이민 정책의 성공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만주국이 일본에 있어서 개척지였음을 나타낸다.

-북한 제3공화국 先軍정치 헌법이 공화국 모델이면서 세습제 군정(국가원수는 김일성 직계 혈통주의 군주국)이 만주국 모델이다

(2)국가기관

만주국 정부는 국가원수로서 집정(執政, 후에 황제), 자문 기관으로서 참의부(参議府), 행정 기관으로서 국무원(国務院), 사법 기관으로서 법원(法院), 입법 기관으로서 입법원(立法院), 감찰 기관으로서 감찰원(監察院)을 두었다. 국무원에는 총무청(総務廳)이 설치되어 관제상으로 국무원 총리의 보좌 기관이었지만 실상은 일본인 관리의한 만주국 행정의 실질적인 핵심으로서 기능했다(총무청 중심주의). 그에 대한 국무원 회의의 의결이나 참의부의 자문은 형식적인 것에 머물렀고 입법원은 정식으로 개설조차 되지 않았다.

 

                                                                          만주국 국무원

(3)국가원수

만주국의 국가원수(집정, 후에 황제)로 푸이가 취임했고 1937년(강덕 4년) 3월 1일 제위계승법 제정 이후에는 푸이의 남계 자손이 제위를 계승해야할 것로 여겨졌다. 또한 제위계승법이 상정한 상황 외의 사태에 대비하여 만주국 주차 일본 제국 특명전권대사 겸 관동군 사령관과의 회담에서, 청조복벽파의 책모를 억제하고 관동군에게 황제 지명권을 확보시키기 위해서 남계 자손이 없을 때에는 일본 천황에 의해서 제위 계승자를 정하는 칙지를 황제의 선언으로 하는 등을 내용으로 한 각서에 서명하였다.

 

                                                                         황궁으로 건립된 동덕전(同徳殿)

           

                                                                       만주국 초대내각

(4)역대 지도자

ㄱ.황제: 푸이 (임기: 1932년 ~ 1945년)

 

푸이는 1934년 3월 1일에 만주국 황제에 즉위하여 강덕제(康德帝)가 되었다. 푸이의 황제 즉위에 아울러 국명도 만주 제국으로 불리는 것이 많아졌다. 연호도 '강덕(康德)'으로 변경되었다. 만주국 측에야는 당초는 '계운(啓運)'으로 예정하고 있었지만, 관동군의 간섭에 의해서 변경하였다. 동시에 자금성 시절부터의 내무부 대신이었으며 푸이와 일본 관동군과의 사이를 주선한 정샤오쉬가 국무원 총리로 취임했다. 같은 날 신징 시내에서 행해진 황제 즉위식에서 푸이는 만주국의 슬로건의 하나인 '오족협화'를 내거는데 있어서 만주족의 민족색을 내는 것을 싫어한 관동군으로부터의 강한 권유로 만주국군의 군복을 착용하였지만, 푸이의 강한 의지로 신징 시내의 순천(順天) 광장에 놓여진 특설 회장에서 즉위식에 앞서 즉위를 청조의 선조에게 보고하는 의식인 <고천례>(告天禮)를 행할 때에 푸이는 만주족의 용포를 착용했다. 그러나 동시에 만주국 정부에서는 이것은 청조의 복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성명이 나와 있었다.

푸이의 황궁은 집정 당시와 같이 만주국의 수도의 신징 중심부에 있었다. 당초 푸이 부부는 집정부의 집희루(緝煕樓)에서 살고 있었지만, 황궁으로의 위엄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만주국 정부에 의해서 1938년 새롭게 동덕전(同德殿)이 황궁으로서 지어졌다. 그러나 관동군에 의한 도청을 경계해 푸이 자신은 한번도 황궁으로서 이용하지 않았다.

관동군의 주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만주국의 헌법상에서는 황제는 국무원 총리를 시작으로 대신들을 임명할 수 있었지만, 차관 이하의 관료에 대해서는 1932년 조인한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에 의해서 관동군이 일본인을 만주국의 관리에게 임명 혹은 파면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관동군의 동의가 없으면 임면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관동군 장교인 요시오카 야스나오(吉岡安直)나 쿠도 타다시(工藤忠)가 항상 푸이와 함께 행동해서 푸이의 행동이나 발언에 대해 조언하여 황제의 칭호는 허울 뿐이었고 일본의 괴뢰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국체에 관련되는 중요 사항의 결정에는 푸이 뿐만이 아니라 관동군의 인증이 필요하였고 만주국 관직의 약 절반을 일본인이 차지하였으며 건국 당초 만주국 독자적인 군대나 국적법이 존재하지 않는 등, 관동군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1937년 2월 푸이와 관동군 사령관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의 사이에 만주국 황제에게 남자 자손이 없는 경우에는 일본 천황이 후사를 정한다는 각서를 교환하였는데 사실상 푸이의 후계자를 일본이 정하게 되었다. 이후 푸이는 이전에 비해 관동군에 의한 암살과 친일적인 성향을 가지는 황제로의 교체를 경계했다고 한다. 푸이는 1937년 만주 기인 타타라씨(他他拉氏)인 탄위링(譚玉齡)을 측실로서 맞아 상귀인(祥貴人)으로 삼았지만, 1942년 사망하였다. 푸이는 관동군에 의한 독살이라고 의심하였으며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그와 같이 증언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단순한 병사였다고 증명되었다. 한편 푸이는 1943년 한족(漢族) 리위친(李玉琴)을 측실로서 맞아 복귀인(福貴人)으로 삼았다.

만주국의 초대 국무원 총리로서 푸이를 지지한 정샤오쉬는 만주국의 실권을 잡은 관동군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고 푸이의 황제 즉위 불과 1년 후인 1935년 5월 사임하였다. 관동군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형태로의 만주국의 운영과 실권을 수반하지 않은 형태의 푸이의 황제 취임에 대해서는 일본 내로부터의 반발도 있었다. 당시 정계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아시아주의자의 거두로 겐요샤(玄洋社)의 총수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滿)는 만주국의 건국 당시부터 일본 정부와 관동군의 과잉 개입에 우려를 나타내었으며 1935년 푸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 초대를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일만 우호를 촉진하는 목적과 만주국 및 푸이의 위신을 국내외에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1935년 4월 푸이는 천황 히로히토의 초대에 의해 일본을 국빈으로서 공식 방문한다. 푸이는 일본 제국 해군의 연습 전함 히에이(比叡)를 타고 일본에 도착하였고 히로히토가 도쿄역까지 푸이를 맞이하러 나왔다. 1940년 6월 황기(皇紀) 2600년 기념 행사가 도쿄에서 행해졌을 때에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히로히토와 회견하였다. 푸이의 제2차 일본 방문에서 이세 신궁(伊勢神宮)을 다녀간 후에 만주국에 건국신묘(建國神廟)가 만들어져 신체로서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가 모셔졌고 만주국 국민은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숭배를 강제당하였다. 푸이는 두차례의 일본 방문에서 완룽을 동반하지 않고 단독으로 방일을 하였다.

193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치바 현(千葉県)에 살고 있던 푸이의 동생 푸제와 일본 사가 후작의 딸이자 천황가의 친척에 해당되는 사가 히로시(嵯峨浩)의 혼담이 관동군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1938년 2월 6일 주일 만주국 대사관에서 결혼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4월 3일 도쿄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당초 푸이는 사가 히로시를 관동군의 스파이로 의심했지만, 이후 2명의 아이가 태어나고 푸제와 사가 히로시의 관계가 양호하자 사가 히로시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푸이가 황제로 즉위한 4년 후인 1937년 7월 7일 베이징의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을 계기로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내전 상태에 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한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인 국공 합작(제2차 국공합작)을 구축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의 개전에 의해서 일본이 연합국과 교전 상태에 들어가면서 만주국도 일본과 아울러 연합국 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여 사실상 추축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 지역으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만주국의 종주국인 일본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의 사이에 <일소중립조약>이 존재하여 만주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에 의한 게릴라 공격이 자주 행해지고 있었지만 평정이 계속 되었다. 일본군은 1944년 가을에 들어가면서 각 전선에서 점차 패퇴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동시에 만주국 국경선을 돌파하였다. 소련군은 동·북·서쪽 세 방향에서 만주국의 수도 신징을 노리고 침공을 시작하였다. 관동군은 <일소중립조약>에 의지해 1942년 이후 증강을 중지하고 주력 부대가 남방 전선에 있었다. 관동군은 1945년 5월 독일의 패배 이후 대일 참전에 대비해 전진 배치된 소련군에게 결정적 반격도 하지 못하고 일본인 만주 거류민을 버려둔 채 패주한다.

일본은 8월 15일 연합국에 대해 항복을 선언한다. 8월 17일 총리대신 장징휘의 주재로 열린 국무원 회의에서 만주국의 해체를 결정하고, 8월 18일 푸이는 퇴위의 조칙을 읽어내려 만주국은 탄생한지 13년 만에 멸망한다. 8월 20일 푸이의 퇴위조서를 공포할 예정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1964년 다민족국가가 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조화를 목적으로 저우언라이에 의해서 만주족을 대표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으로 선출되었다

ㄴ.총리 목록

1대: 정샤오쉬 (임기: 1932년 ~ 1935년)

 

정샤오쉬(정효서)(鄭孝胥, Zhèng Xiàoxū, 1860년 4월 2일 ~ 1938년 3월 28일)는 만주국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자 서예가이다.

 

2대: 장징휘 (임기: 1935년 ~ 1945년)

 

징휘 (张景惠, 장경혜, 1871년~ 1956년 1월 11일) 는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총리대신을 지낸 정치가이다. 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자는 쉬우(叙五,서오)이다.

랴오닝 성 타이안 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 두부를 만들어 팔았으며, 친구사귀기에 능했고, 도박을 좋아하였다. 청일 전쟁 이후, 청나라는 만주지역의 통치력을 상실했고, 각지에서 기회를 틈타 무장세력이 발호하였다.

장징휘도 마을의 상무회장(商務會長)을 맡아서 자신의 사병격인 자위단을 조직하여 마을의 상인들과 부자들을 보호하였다. 당시 장쭤린이 토비인 진슈찬의 습격을 받자, 바자오타이(八角台)로 와서 펑더린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장쭤린과 장징휘는 만나자마자 의기가 투합하였다. 장징혜는 장쭤린을 자위단의 우두머리가 되기를 청했고, 스스로는 그의 부하가 되기를 원했다. 이때부터 장징휘는 장줘린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1902년 장쭤린은 청나라 조정에 출사하기로 결정했고, 장징휘도 그것을 따랐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초관(哨官, 하급장교계급)이 되었고, 1903년에는 방대(帮带)로 승진하여 청나라의 정식 군인이 되었다.

1906년, 장쭤린은 후로순방영총령(後路巡防營統令)에 임명되었고, 장징휘도 같이 승진하여 관대(冠帶)에 임명되었다. 1910년 장쭤린은 장징휘, 탕위린, 장쭤샹 등에게 지시하여 현역 군관으로서 펑톈강무당(奉天講武堂, 봉천군사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장징휘에게는 수시로 펑톈의 군사, 정치 동향을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장쭤린은 그리하여 봉계 군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장쭤린의 군대를 봉군(奉軍)이라고도 한다.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자, 장쭤린은 제27사단장에 임명되었고, 장징휘는 그 휘하의 연대장이 되었다. 1917년 펑위린이 장쭤린과 사이가 벌어지자, 장징휘는 장쭤린편에 섰고, 제53여단장으로 승진하였다. 1918년 2월 장징휘는 53으로 이끌고 직계 군벌을 압박하였다. 또한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여서 7개 혼성여단을 조직했다. 장쭤린은 장징휘를 임시 편성의 봉군(奉軍) 제1사단장에 임명하였고, 그를 봉군의 지역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같은해 8월 장징휘는 양위팅과 쉬수정과 연합하여 봉군의 명의로 4개 여단을 더 모집하였고, 세력을 강화하고 장쭤린에게 비밀리에 알렸다. 장징휘는 봉군 부사령관에 임명하였고, 장쭤린의 대리역을 맡아 북경에 주재하였다. 1920년 9월 중화민국 베이징 정부(쑨원의 중화민국 광둥 정부와 다름)는 장징휘를 차하얼 도통(都統)겸 육군제 16사단장으로 임명하였다.

제2차 직봉전쟁중, 장징휘는 다시 봉군 서로총사령관의 중임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결단력이 없고, 행동이 느려서 서로군은 참패했다. 그는 베이징에서 잠시 머물었는데, 직계 군벌인 차오쿤이 부정선거로 대총통이 된 후, 전국국도국(全國國道局)을 신설하자, 장징휘를 이곳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장쭤린은 이런 장징휘의 배신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1925년 겨울, 장징휘의 모친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들었지만, 감히 장쭤린이 지배하는 고향에 들릴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장쭤린의 부하들에게 부탁하여, 장쭤린에게 용서를 빌었고, 장쭤린은 그를 용서하고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장징휘는 이때 펑톈(선양)에 먼저 가서, 장쭤린을 먼저 찾아가서 통곡하면서 고두사죄를 했다고 전해진다. 장쭤린은 옛 동지였던 그를 용서하고 다시 봉군 독군서참의(督軍署參議)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장쭤린을 대리하여 베이징과 톈진을 오가며 바쁘게 일했다.

1926년 이후, 장쭤린이 베이징을 장악하자, 장징휘도 육군총장과 실업총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펑톈으로 돌아가면서 일본의 음모로 철도가 폭파되어 암살되었고, 장징휘도 크게 다쳤다.

1928년 말, 장쭤린의 뒤를 이어 봉군의 우두머리가 된 장쉐량은 그를 동성특별장관(東省特別長官)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장쉐량은 그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고,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항복한 후에 그는 난징으로 가서 군사참의원 원장을 맡았다.

 

만주 사변이 발발하여 1931년 만주 전역이 관동군에 점령되자, 장은 만주 하얼빈으로 돌아와 1931년 9월 27일에 "특별구 비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하려던 일본의 의도에 동조한 것이다. 일본군에 끝까지 저항하던 동북군의 잔존세력인 마잔산이 치치하얼에서 패주하자, 장징휘는 만주가 자치령이라고 선언했다. 장은 일본인과 타협하여 만주국의 헤이룽장 성 성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거지인 하얼빈을 떠나 치치하얼에서 거주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것때문에 관동군 인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32년 2월마잔산이 일본과 강화를 맺고, 그 조건으로 헤이룽장 성장으로 취임하여 장징휘는 잠시 그 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마가 1932년 4월 일본에 반란을 일으키자, 장징휘는 다시 헤이룽장 성장이 되었고, 만주국의 국정부 총장(국방장관)이 되었다.

1935년 5월 21일 장징휘는 관동군의 입김으로 정샤오쉬를 이어 만주국 총리대신에 올랐다. 이에 대해서 푸이는 반대했다고 한다.

만주국 총리로서 그는 수동적이고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리하여 관동군에 의해 임명된 일본인 고문들이 만주국의 행정을 실제로 책임졌고, 그는 불경을 베끼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그의 과거 전력때문에 그는 "두부총리대신"으로 경멸스럽게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장징휘는 한번은 땅을 강제로 일본인에게 불하시키려는 의도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장은 일본의 항복이후 만주국이 붕괴할 때까지 10여년간 총리대신으로 남아 있었다. 도조 히데키가 주도한 대동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만주국 대표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그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끌려갔다가, 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그에 넘겨져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되었다. 1957년 그곳에서 86세로 사망하였다.

가족으로는 제6남인 장멍스는 베이징국제관계학원의 일본학부 주임으로 일했고, 2004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제7기 전국정협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행정

1932년(대동 원년)의 건국 시에는 수상(집정제하에서는 국무원 총리, 제정 이행 후는 국무총리대신)으로 정샤오쉬가 취임했고, 1935년(강덕 2년)에는 만주의 독립선언을 발표한 둥베이행정위원회 위원장 장징휘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실제 정치 운영은 만주 제국 주차 일본 제국 특명전권대사 겸 관동군 사령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원수는 수상과 각료를 비롯해 관리를 임명하여 관제를 정하는 권한이 주어졌지만, 관동군이 실질적으로 만주국 고급 관리, 특히 일본인이 주로 취임하는 총무청장이나 각부 차장(차관) 등의 고급 관리의 임명이나 파면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므로 관동군의 동의가 없으면 임면할 수 없었다. 또한 공무원의 약 절반을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일본인을 만주국 정부의 각 행정관청의 장·차장으로 임명시켜 실권을 잡게 했다. 이것을 내면 지도라고 불렀다(2키 3스케, 일본어: 二キ三スケ). 즉 만주국은 정치, 경재적으로도 실질적으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껍데기뿐인 일본의 괴뢰 국가였다

(6)주요 도시

신징(新京·현재 창춘, 중국어 간체: 长春)

펑톈(奉天·현재 선양, 중국어 간체: 沈阳)

만저우리(중국어 간체: 满洲里)

지린(중국어 간체: 吉林)

퉁화(중국어 간체: 通化)

하얼빈(중국어 간체: 哈尔滨)

치치하얼(중국어 간체: 齐齐哈尔)

잉커우(중국어 간체: 营口)

단둥(중국어 간체: 丹东)

둔화(중국어 간체: 敦化)

하이라얼(중국어 간체: 海拉尔区)

(7)행정구역

신징 특별시(新京特別市)

지린 성(중국어 간체: 吉林省)

쓰핑 성(중국어 간체: 四平省)

퉁화 성(중국어 간체: 通化省)

젠다오 성(중국어 간체: 间岛省)

룽장 성(중국어 간체: 龙江省)

→ 현재 지린 성(吉林省) 일대

빈장 성(중국어 간체: 浜江省)

무단장 성(중국어 간체: 牡丹江省)

둥안 성(중국어 간체: 東安省)

싼장 성(중국어 간체: 三江省)

베이안 성(중국어 간체: 北安省)

헤이허 성(중국어 간체: 黒河省)

→ 현재 헤이룽장 성(중국어 간체: 黑龙江省) 일대

안둥 성(중국어 간체: 安東省)

펑톈 성(중국어 간체: 奉天省)

진저우 성(중국어 간체: 錦州省)

관동주(중국어 간체: 关东州) : 일본의 중국 조차지(1898년 ~ 1945년)

→ 현재 랴오닝 성(중국어 간체: 辽宁省) 일대

싱안 총성(중국어 간체: 兴安総省)

러허 성(중국어 간체: 热河省)

→ 현재 내몽골 자치구(중국어 간체: 内蒙古自治区) 일대

→ 현재 허베이 성(중국어 간체: 河北省) 일대

(8)2키 3스케(일본어: 二キ三スケ)

2키 3스케(일본어: 二キ三スケ)는 당시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5명의 일본인 실력자들에 대한 별명이다. 각자의 이름이 “키”또는 “스케”로 끝나는 것에 유래하고 있다. 그 중에도 도조 히데키는 나중에 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기시 노부스케도 일본 패전 후 총리에 올랐다. 아이카와 요시스케는 닛산의 전신인 닛산 콘체른을 만들었다.

도조 히데키: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호시노 나오키: 만주국 국무원 총무장관

기시 노부스케: 만주국 총무청 차장

아이카와 요시스케: 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 사장

마쓰오카 요스케: 남만주철도 총재

특히, 기시 노부스케, 아이카와 요시스케, 마쓰오카 요스케의 3명을, "만주 삼각 동맹"이라고도 부른다.

(9)선거와 정당헌법에 상응하는 조직법에 따르면 만주국은 일원제(단원제) 의회인 입법원의 설치를 규정했지만 선거는 단 한 차례도 실시되지 않았다. 정치 결사의 조직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협화회라고 하는 관민 일치의 유일한 정치 단체만이 존재하였고 정책의 국민에게의 침투나 국정의 지도를 수행했다.

(10)사법제도

헌법에 상응하는 조직법이나 인권보호법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을 모방한 법 제도가 정비된다. 당시의 일본 법과 다른 점은 인권보호법에서 법 아래 평등이 보증된 것, 조직법에서는 각 각료나 합의체로서의 내각이 아니고 수상 개인이 황제의 보필 기관으로 여겨진 것, 형법의 구성 요건은 거의 같지만 법정형이 일본 형법보다 약간 무겁게 규정되어 있는 것, 검찰 기구가 재판소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기관으로 여겨진 것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만주국 형법은 한국 전쟁 직후에 제정(1953년 9월 18일)된 대한민국 형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1)외교

 

                                                                                                    만주국을 승인한 국가

중국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역, 교통, 통신을 위해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3년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년 3월 3일)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년),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년 3월 23일, 법률상 1941년 4월 13일), 이탈리아(1937년 11월 29일), 스페인(1937년 12월 2일), 독일(1938년 5월 12일), 헝가리 (1939년 1월 9일)에 승인되었다.

흔히 바티칸 시국이 1934년 만주국과 외교 관계를 맺은 것으로 믿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바티칸 시국이 만주국을 승인했다는 영화 《마지막 황제》(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1987년 작품)를 참고한 잘못이다. 지린의 주교 가오더후이(高德惠, Auguste-Ernest-Désiré-Marie Gaspais)는 바티칸 시국의 외교 관계를 담당하는 국무성성(國務聖省)이 아닌 포교성에 의해서 만주국의 가톨릭 선교를 위한 바티칸의 임시 대표로 임명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년 6월 1일), 프랑스(1940년 7월 12일), 루마니아(1940년 12월 1일), 불가리아(1941년 5월 10일), 핀란드(1941년 7월 18일), 덴마크(1941년 8월),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년 8월 2일)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년 11월 30일), 타이(1941년 8월 5일),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12)군사

 

                                                                                             만주국 기병대 모습

만주국에는 일만의정서에 의해서 관동군이 주둔하였다. 1932년부터 만주군을 시작으로 군대가 창설되어, 황제 호위부대인 금위대과 해군, 비행대가 창설되었다. 만주국의 성격상 군대 역시 관동군과의 제휴를 전제로 하여, 관동군 지원 부대로서의 성격이 컸다.

3.교통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州鐵道株式會社, 일본어: 南満州鉄道株式会社 (みなみまんしゅうてつどうかぶしきかいしゃ) 미나미만쥬우테츠도우카부시키카이샤[*], 영어: South Manchuria Railways Corporation) 또는 단순히 만철(滿鐵)은 러일전쟁의 강화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1905년)에 의하여[1]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철도 및 부속지를 기반으로 1906년에 설립되어,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중국 동북지방(만주)에 존재한 일본의 국책회사이다. 철도사업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광업, 제조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사업을 전개한 복합기업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만주 식민화의 중핵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초기엔 다롄(大連), 이후 신징(新京) - 현재의 창춘(長春)에 본사를 두었다. 1945년에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실질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다른 의미로는 만철선(滿鐵線)으로 통칭하는 다롄~창춘~하얼빈 간의 철도 노선(남만주 본선 구간) 및 여기에 부속된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의 각 지선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계 대공황(1929년~39년)의 여파가 만주에도 세차게 밀려왔다. 만철의 주요 거래품목이었던 대두의 수요가 감소하고 수송량도 급격히 줄어들어 수송운임 수입이 격감했다. [2] 게다가 푸순탄의 판매도 부진했다. [2]당시 중국 본토에서 들어오는 수출 석탄의 가격에 비해 푸순탄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만주국 수도 신킹(Hsinking) 철도역

4.사회

(1)인구

1908년 만주의 인구는 1,583만명이었지만, 만주국 건국 이전인 1931년 4,300만명이 되어 있었다. 1941년 인구는 5,000만명으로 증가했다. 1934년 만주국의 인구는 3,088만명, 1가구당 평균 인원은 6.1명, 남녀 성비는 122:100로 추정되었다. 남성 인구가 많은 이민 국가의 측면이 강했다. 일본 식민지의 조선인이 많이 이주하였고, 대만인도 5,000명이 이주했다.

일본 측의 자료에 따르면, 1940년 만주국(헤이룽장·러허·지린·룽장·안둥)의 전체 인구는 43,233,954명이었다. 인구 구성은 아래와 같다. 통계의 만주인 가운데에는 68만명의 조선족도 포함한다. 또한 도시 지역의 주민은 전체 인구의 20% 정도였다.

 

                                                       만주국이 아편을 재배하여 수확하는 모습[아편(마약)을 전쟁물자로 이용했다]

민족 인구 수 비율

만주인(한족·만주족·조선족) 30,190,000명 97.8%

일본인 590,760명 1.9%

타인종(러시아인·몽골인 등) 98,431명 0.3%

1940년 주요 도시의 인구는 아래와 같다. 통계의 주체에 따라서 수치에 차이가 있는 것은 만주국의 행정권이 미치지 않았던 주요 도시의 만철 부속지 인구를 포함하거나 포함하지 않는가 따라서 통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도시 인구 수 연도

잉커우 119,000명 또는 180,871명 1940년

펑톈 339,000명 또는 1,135,801명 1940년

신징 126,000명 또는 544,202명 1940년

하얼빈 405,000명 또는 661,948명 1940년

다롄 400,000명 또는 555,562명 1939년

안둥 92,000명 또는 315,242명 1940년

지린 119,000명 또는 173,624명 1940년

치치하얼 75,000명 1940년

(2)민족과 언어

만주국 시대의 공식이념인 "민족협화", "오족협화"(五族協和)는 역사적인 만주의 이질성, 즉 만주족·한족·조선인·러시아인·몽고인뿐 아니라, 어룬춘족, 골디(Golie), 나나이족 등 십여 민족집단의 혼재를 반영한 면이 있었다. 하얼빈에는 50개 이상의 민족집단, 45개의 언어가 혼재했다.  만어(滿語)라고 불리던 표준 중국어와 일본어가 사실상의 공용어로서 사용된다. 군·관공청에서는 일본어가 제1 공용어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교육기관에서 일본어가 교수 언어로 여겨졌다. 몽골어·러시아어 등을 모국어로 하는 주민도 존재했다.

 

                                                                             1940년대 초 만주국 쇼와 제철소

(3)민주국의 조선인

만주국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참여했으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 독립 이후 정부와 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만주국 연합정부 5종족 중 하나의 종족 조선인이 만주군관학교에 많이 참여했다]

백선엽

박정희

박창암

박승환

이선근

정일권

최규하

김석범

(4)일본인 이민자

1931년부터 1932년까지 만주에는 59만명의 일본인이 있었으며 그중 10만명은 농민이었다. 잉커우의 인구의 25%가 일본인이었다. 일본 정부는 1936년부터 1956년 사이에 500만명의 일본인 이주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1938년부터 1942년 사이에 20만명의 청년 농민을, 1936년에는 2만명의 가족 이민자를 각각 보냈다. 이같은 이주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에 일본군이 동해와 황해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자 중지된다. 종전 후 소련이 만주를 침공했을 때, 85만명의 일본인 이주자가 포로가 되었다. 공무원과 군인을 제외하고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일본에 귀환한다. 공무원과 군인은 소련군의 포로로서 시베리아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고 포로교환협정이후 모두 석방시켰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은 극히 적었으며 매서운 시베리아의 툰드라지대에서 대부분은 동사하였다.

(5)유대인 자치구

1930년대 일본 정부는 유대인 난민을 만주국으로 이주시키려던 계획을 추진한다(복어 계획, 일본어: 河豚計画 (ふぐけいかく)). 1934년에 아유카와 요시스케가 처음 제안한 계획에서 시작되어 1938년의 5부장관 회의에서 정부의 방침으로 정해졌다. 육군대좌 야스에 노리히로, 해군대좌 이누즈카 고레시게 등이 실무를 주도하였다.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이탈한 유대인들을 만주국에 정착시켜 자치구를 건설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유대인 적대정책을 추진해가던 나치 독일과의 우호관계 손상을 우려하여 계획이 점차 흐지부지되었으며, 삼국 군사 동맹의 결성,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연합국과의 전쟁을 개시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사라져 결국 계획은 무산되었다

(5)국적법의 부존재

만주국은 패망까지 국적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 의미의 만주 "국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적법이 제정되지 않은 배경으로 이중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국적법상 일본인 정착민들은 "일본계​​ 만주인"이 되어 일본 국적을​​ 포기하게 되므로 만주로 유입되는 일본인 이주민이 감소할 우려가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던 조선인을 일본 국민으로 취급하고 있던 조선 정책과의 일관성 문제 등이 있었다.

 

5.문화

 

(1)영화

1928년 남만주 철도가 홍보부 홍보계 영화반, 통칭 〈만주철도 영화부〉를 마련해 홍보(선전)용 기록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1937년 설립된 국책 영화 회사인 〈만주영화협회〉가 영화의 제작이나 배급·영사 업무도 행해 각지에서 영화관의 설립·순회 영사 등도 행했다

(2)잡지

징의 예문사(藝文社)가 1942년 1월부터 만주국에서 처음으로 유일한 일본어 종합 문화 잡지 《예문》(藝文)을 발행했다. 1943년 11월 《만주 공론》(滿州公論)으로 제목을 고쳤다.

(3)스포츠

1932년 만주국 체육협회가 설립되었다. 만주국의 국기는 축구이며, 만주국 축구협회와 만주 축구 대표팀도 결성되었다. 야구에 있어서는 일본의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참가한 팀이 있었고 일본 프로 야구 첫 해외 공식전으로서 1940년 만주 리그전을 하였다. 또한 만주국은 건국 당초 올림픽의 참가도 계획하여 1932년 5월 21일 만주국 체육협회는 올림픽 조직위원회에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1932년 7월 개최)에 선수 파견을 정식으로 신청하였지만 참가는 할 수 없었다

(4)국화(國花)

국화는 난(蘭)이다.

*만국(만주국) 정치 슬로건

 

 

오족협화(五族協和)는 만주국의 나라 표어이자 건국 이념, 정치 슬로건이다. 중화민국 성립 초기의 정치 슬로건이었던 오족공화(五族共和)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오족공화의 '오족'(五族)이 한족, 만주족, 후이족(회족), 몽골족, 티베트족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오족협화는 일본 민족(야마토 민족), 만주족, 조선인(한민족), 한족, 몽골족의 협력을 뜻한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한다.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다

 

*내몽골자치연합정부(일본 괴뢰정권)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  Měngjiāng Liánhé Zìzhì Zhèngfǔ) 또는 몽강국은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자치구 일대에 있던 나라이다. 몽강국은 당시 만주국 챠하 주와 수이유엔 주를 통치 범위로 했으며, 수도는 장자커우였다

내몽골 독립 운동가인 뎀치그돈로프(德穆楚克棟魯普, 덕왕)에 의해 1936년 5월 12일 몽골군 정부(蒙古軍政府)로써 수립되었고, 1937년 10월에 몽골연합자치정부(蒙古聯盟自治政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뒤에 1939년 9월 1일에 다시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로 개칭한다. 그러나 뎀치그돈로프(덕왕)는 일본 제국에 협력하던 인물로, 몽강국은 만주국의 영향 아래 있던 일본 괴뢰국이였다.

그 결과, 이 지역은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하였으며, 결국 덕왕은 만주국의 푸이처럼 단지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몽골군과 소련군의 합동작전인 8월의 폭풍 작전으로 멸망, 현재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지고 있다.

몽강연합자치정부는, 약간의 대포와 군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전차나 비행기는 단 한 대도 없었고 소총 등의 총류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마민족인 만큼 기병대가 많이 있었다

 

-임표는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된 동북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맡아 1948년 11월 만주지역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국민당군을 격파하였다. 임표의 승리를 기점으로 전세는 공산당쪽으로 기울었고, 임표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된 자신의 부대(총병력 백만)를 이끌고 계속 남하하여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창 강을 도하하여

1950년까지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 성까지 도달하였다.

-동북3성(東北三省)은 중국의 6대 중국영토지역의 하나로서 동북부 지역을 말하며 과거에는 만주(滿洲)로 불렸던 지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랴오닝 성(遼寧省, 요녕성), 지린 성(길림省(성), 길림성),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흑룡강성)의 3개 성(省)이 포함된다. 이 지역 최대의 도시는 선양(瀋陽)이며, 그 외에 하얼빈(哈爾濱), 창춘(長春), 다롄(大連), 치치하얼(齊齊哈爾), 지린(吉林) 등의 도시가 있다.

동북 3성(만주지역)은 200만 명 이상의 조선족(한국인)이 거주하고 있고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어 한민족(조선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동북 3성(만주지역) 역사적 지배세력은 조선족(한민족)과 만주족(여진족), 거란족, 몽골족 그리고 한족(漢族, 한나라 후손)이다

-동북 3성(만주지역)의 인구는 현재 약 1억 명으로, 이는 중국 전체 인구의 8%에 해당한다.

동북 3성(만주지역) 지방의 민족 구성은 한족(漢族)이 92.4%를 차지하는데, 그 대부분은 청조(淸朝) 300년 간, 특히 19세기 말 이후에 이주하여 왔다. 19세기 말의 동북 3성 인구는 300만 미만이었으나, 그 후 1년에 50∼100만의 인구가 주로 산둥성[山東省] ·허베이성으로부터 유입하였다. 소수민족은 787만인데, 그 중 210만이 만주족(滿洲族)으로 주로 랴오닝성(요녕성)에 살고, 113만이 한족(韓族)으로 지린성(길림성) 동부 국경지대에 옌볜[延邊] 한족(조선족)자치주를 형성하고 있다. 또 몽골족 32만은 네이멍구 지역에 살고, 후이족[回族] 23만은 대도시에 분산거주하며, 그 밖에 퉁구스계(系)의 다구르족 ·오로촌족 ·시보족 ·오웽크족 및 러시아인 등이 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만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으나, 종전 후 거의 전부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동북3성(만주)지역에는 자치구로 만주족(만족)과 거란족, 조선족 등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는 조선족 36.7% : 약 80만명으로, 이 중 84%가 연길, 용정, 화룡, 도문, 훈춘에 거주한다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들 가운데 가장 많은 성은 김(金)씨이다 청나라 왕조 성씨를 김씨(金氏)를 많이 사용했다

 -만주족(滿洲族)이 건국한 국가(國家)
숙신. 읍루족(부여)--말갈족(발해)--->여진족(金)--->만주족(淸)--->만족(중국 56개 민족 중 한개 소수민족으로 편입)

 

                                                                                                          동아시아 국가 중국

 

*만주족(청족)이 세운 군사학교 '만주군관학교'

만주군관학교를 상징하는 문양. 가운데 5색 별은 '5족(五族)'을, 둘레의 노란색 곡식은 만주의 주곡인 '조(좁쌀, 小米)'를 상징한다. 가운데 오색별은 만주국의 슬로건인 ‘5족협화(協和)’를 상징하는 것이며, 5족(五族)은 만주족, 한족, 몽고족, 조선족, 일본족 등을 말한다. 둘레의 노란색 곡식은 만주지역의 주식(主食)인 조(좁쌀, 小米)를 그린 것입니다


만주군관학교란 만주국이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관학교를 말한다. 일본 관동군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령한 뒤 이듬해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의 경우 조선이나 대만처럼 총독을 파견하지 않고 중국인으로 ‘얼굴마담’을 내세웠다. 청조(淸朝)의 폐제(廢帝)인 선통제(宣統帝), 즉 푸이(溥儀)를 집정(執政)이라는 자리에 앉히고는 관동군 사령관이 실권을 행사했다. 수도는 신경(新京, 현 장춘), 연호는 대동(大同)으로 정했다.

만주국이 처음 세운 사관학교는 1932년 옛 수도인 봉천(奉天, 현 심양)에 세운 2년제 ‘중앙육군훈련처’로 흔히 봉천군관학교라고 부른다. 관동군은 만주를 점령한 후 군벌 장작림이 설립한 목단(심양의 옛 이름)의 군관학교를 접수하여 6개월 과정의 장기 장교훈련과정을 개설했다. 시험과목은 수학, 물리, 화학, 지리, 역사, 작문, 일본어 등이었으며, 시험은 각 군관구 사령부 소재지에서 실시하였다.

첫 3개 학년이 수료한 1년 반 이후에는 2년제 과정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도쿄에 있는 일반참모학교를 모방한 것으로 기본훈련 4개월, 정규수업 14개월, 현장실습훈련 6개월의 교육과정을 두고 있었다. 졸업시험에 합격하면 2~3개월간 상사 계급을 달고 견습사관을 한 후 소위로 임관되었다. 조선인은 4기생부터 입교할 수 있었는데, 1939년 만계(滿系) 군관후보 9기, 일계(日系) 군관후보 11기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봉천군관학교 출신(군수학교 졸업생 포함) 조선인으로는 3기 김정호 1명, 4기 강재호·김응조 등 7명, 5기 정일권·김백일·김석범·김일환·신현준 등 18명, 6기 양국진·최남근·박승환 등 7명, 7기 최철근 1명, 8기 석주암 등 3명, 9기 백선엽·윤수현 등 2명으로 총 39명 정도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대륙침략을 본격 개시한 일본 육군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장교 양성을 위해 1939년 만주국에 4년제 정식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정식명칭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로 흔히 신경군관학교라고도 불린다. (신경 교외 라라툰(拉拉屯) 지역에 위치한 옛 신경군관학교 시설은 현재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기술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1939년 4월 만계(滿系) 1기생 90명이 입교하였고 이듬해 일계(日系) 학생 172명이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개교식은 일계 2기생이 입교한 1941년 6월 20일 거행됐다.

예과에서는 학과 위주 교육을, 본과에서는 전술 위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교육내용과 복지 등에서 민족간에 차별대우가 있었다. 조선인은 초기에는 만계로 입학했으나 1943년 5기생부터는 일계로 편입되었는데 졸업 후 일본군 예비역 소위 편입과 동시에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1945년 8월 일제 패망 때까지 만계 7기, 일계 6기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임관은 3기생까지였다. 일계 생도 가운데는 일본인 외에 일본의 식민지 조선과 대만 출신도 포함돼 있었다.

신경군관학교(경리학교 출신 등 포함) 출신으로는 1기생은 김동하(해병 중장)·윤태일(육군 중장·국회의원)·방원철(육군 대령)·이기건(육군 중장) 등 13명, 2기생은 박정희(육군 대장·대통령)·이한림(육군 중장·건설부장관), 김재풍 등 11명, 3기생은 최주종(육군 소장·주공 사장)·강태민 등 2명, 4기생은 예관수·장은산 등 2명, 5기생은 강문봉(육군 중장·국회의원)·황택림 등 5명, 6기생은 김동훈·육굉수·김윤근(해병 중장, 호남비료 사장)·김학림 등 11명, 마지막 기수인 7기생은 김광식(여주대 학장) 등 4명으로 전체 졸업생 수는 48명이다

 

만주군관학교 출신들 가운데는 지리적인 요인으로 인해 북한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은 창군 초기 군부 내에서 ‘만주파’로 불리며 세력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정일권은 함경도파, 백선엽은 평안도파의 우두머리로 불렸다. 신경2기 출신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김동하·박임항·윤태일·김윤근 등 신경 출신 선후배들이 이에 적극 가담하여 도왔다. 그러나 나중에 이들은 박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해 이른바 ‘반(反)혁명사건’으로 몰려 권력에서 제거됐는데 흔히 이를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고 부른다.

한편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친일파로 볼 것인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선 당시 일본군(만주군 포함) 장교의 위상과 역할, 그리고 만주군관학교 입교자들의 성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군국주의 시대는 군인이 통치권력의 주체로 활동하던 시기로 일본 정부의 내각이나 조선·대만 총독 역시 전부 전·현직 군 장성들이었다. 당시 일본 군대는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정부조직 차원을 넘어 사회전반을 지배하는 최상층의 권력집단이었다. 따라서 이같은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장교의 위상은 평시의 ‘직업군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군관학교는 바로 그런 장교를 양성하는 국가기관이었다.


군관학교 입교자 가운데는 다양한 입학 동기를 갖고 있었다. 장교가 되기 위해 뚜렷한 목표의식과 투철한 시국관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중·고등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 차원에서 군관학교를 택해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또 주변의 권유나 심지어 장교 계급장을 단 제복차림에 반해 군관학교를 입교한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모든 군관학교 입교생들이 ‘황군(皇軍)’이 되기 위해 입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 일본군 장교의 임무가 무엇이었으며, 또 당시 우리민족이 처한 상황이 어떠했는지도 알고 있었다고 본다면 이들의 일본군 복무 전력을 변호할 명분은 그리 많지 않다. 결국 자원해서 군관학교에 입교했고, 또 졸업 후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전력자라면 그들을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보는 데는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다루지 못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인데 이는 전적으로 시대적 여건 때문이었다. 건국 초기 군부는 신성불가침 지대나 마찬가지였으며 그 당시 일본군 출신들은 ‘창군의 주역’으로 이미 한국군의 상층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설사 대상자가 있었다고 해도 반민특위에서 그들을 체포, 소환해서 조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 출신들은 본의 아니게 반민법정에서 면죄부를 받은 셈이 됐다.

다만 2005년에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항(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서는 일본군 소위 이상의 장교 출신자들을 조사대상자로 규정했다. 물론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라는 단서조항은 있다. 참고로 <친일인명사전>의 경우 하사관까지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만주국을 상징하는 난초꽃 문양이 컵 바닥에 새겨져 있다

만주국의 국화(國花)는 난초였으며, 이 문양은 난초 꽃잎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수석 졸업하는 박정희 생도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만주일보 1942.3.24)

 

                                                            ▲ 군관학교 생도들의 훈련장면

만주국은 국군 간부 양성을 위해 건국하던 그 해 봉천(奉天, 현 瀋陽)에 2년제 간부훈련소(사관학교)를 세웠다. 이곳이 이른바 봉천 군관학교로, 한국인들은 4기생 때부터 입교가 시작됐다.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초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신현준 등이 5기생 출신이며, 숙군 때 박정희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백선엽은 이곳 9기생 출신이다. 봉천군관학교는 9기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박정희가 예과를 마친 신경군관학교는 봉천군관학교 후신으로, 1939년 수도인 신경에 세워진 정식 4년제 사관학교였다. 이 해 4월 만계(滿系) 1기생 90명이 입교한 것이 그 첫출발로 1945년 8월 패전 때까지 만계는 7기, 일본계는 6기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김동하, 윤태일, 이기건, 방원철, 박임항, 이주일 최창언 등 1기생이 13명, 김묵, 이재기, 박정희, 이한림, 김재풍 등 2기생이 11명, 최주종 등 3기생이 2명, 예관수, 장은산 등 4기생이 2명, 강문봉, 황택림 등 5기생이 5명, 김동훈, 육굉수, 김윤근, 김학림 등 6기생이 9명, 그리고 마지막 기수인 7기생은 김광식 등 4명 등 총 44명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박정희가 5.16을 모의, 주도했을 때 주체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걸림돌이 되면서 박정희 친위세력에 의해 이른바 '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숙청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만주족 여인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 처형 시신 모습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한후 중국군이 북경(北京,베이징)에서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를 체포하는데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의 배경이 엃키고 설켜 재판이 어려웠습니다. 중국인으로 친다면 매국죄로 사형에 처할수 있었으나 일본인으로 치면 만주족 천도방자(川島芳子,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가 집적 살인하거나 죄를 저지른 증거가 없었으므로 일본교민이나 보통헌병처럼 일본에 돌려보내질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체포 후 북평감옥에 갇히며, 1947년 10월 5일 북경 민국법정의 재판을 통하여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1948년 3월 25일 아침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판결문

1. 피고는 중국과 일본국적을 다 가지고 있지만 숙친왕의 딸로서 의심할바 없는 중국인이다. 때문에 한간죄(漢奸罪)로 처리한다.

2. 피고는 일본정객들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있었으며 상해"1.18"사변에 남장을 하고 간첩할동을 진행하였으며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3. 피고는 부의와 그 가족을 천진에서 빼돌렸고 위만제국의 성립을 위해 준비공작을 하였다.

4.피고는 관동군과 장기간 래왕하였고 "안국군 사령"까지 담임했다.

*만주국[滿洲國, 만주제국]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한 일본 관동군은 1932년 1월 장쉐량[張學良]의 반만항일의 거점인 진저우[錦州]를 점령한 후, 2월 '신국가건설막료회의'를 개최해 만주국 건국 구상을 구체화했다. 이어서 관동군은 구(舊)봉천 군벌계 장성들을 앞세워 청조의 폐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집정이라는 자리에 앉힌 후, 국제연맹이 중국의 제소를 받고 파견한 리튼 조사단이 만주에 도착하기 전인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언했다. 만주국의 수도는 신징[新京 : 지금의 창춘(長春)]으로 하고, 연호는 대동(大同)이라 했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를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으며, 이어 독일·이탈리아·교황청·스페인·헝가리·폴란드 등 극히 일부 국가가 만주국을 승인했다. 이후 관동군이 러허 작전[熱河作戰]으로 청더[承德]를 점령해 만주국의 영역은 랴오둥[遼東]·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러허[熱河]의 4성(省)에 이르렀고 인구는 3,000만 명에 달했으며, 1934년 9월에 제정이 수립되면서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쳤다. 만주국의 실세는 관동군 사령관이었으며, 경제면에서도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전 철도를 경영하고 닛산[日産] 콘체른이 진출해 개발사업을 독점하는 등 일본이 실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만주국은 1945년 8월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본 관동군이 패퇴하면서 무너졌다.

 


*만주족 청나라(만주국)와 한족 중국을 구분해야 하며 전제군주국 청나라와 민주공화국 중국을 구분해야 대한민국 역사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일본정부 내 민주공화정 세력은 중국 손문과 장개석정부를 지원했으며 국가사회주의 병정분리주의 군사정부(일본 군벌)는 청나라(만주국)를 지원했습니다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세력과 국가사회주의 세력, 전제군주제 세력등을 연구해야 일본 역사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국가사회주의 세력은 병정분리주의 좌익군정을 의미합니다 총리가 군부 실세 군인으로 군과 내각등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여 국왕 이름으로 전쟁을 추진하는 경우이고 히틀러처럼 군이 의회와 내각을 장악한 후 군사대국을 추진하는 국가입니다] 

조선말기에도 청족세력과 한족세력 권력타툼이 조선왕실이었습니다 2차대전 추진세력이 일본, 만주국등이며 연합군이 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등입니다 2차대전을 마지막까지 전쟁을 하자는 세력이 만주군벌과 일본군벌이며 항복하자는 세력이 일본왕실과 민주공화정 세력내 입헌군주제 옹호세력입니다 중일전쟁과 세계전쟁 추진세력이 일본군벌과 만주국 군벌이라는 입장입니다

대한민국은 반청(反淸), 친한족(親漢族) 국가로 민주공화국입니다

 

 

*88독립 저격여단(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 (출처 : 한겨레신문)

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1개이다

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와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 여단 1 대대장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 88독립 저격여단  사실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부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여단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 1939년경부터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 밖에 일본 당국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남은 자들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활동 계속이 곤란 해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리안 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연해주의 보로시로후 · 우수 리스크 교외 북쪽 (A) 야영 (Северный лагерь 또는 лагерь А), 투르크 메니스탄의 케루키 교외 남쪽 (B) 야영 (Южный лагерь 또는 лагерь Б)를 설영했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이 야영지에 따라 제 88 독립 저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 · 나 · 나아 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 충족 동북 항일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 대부분 중국에서 조선인은 10%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 들어간 부대도 합류 해, 88 여단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리안 에서 온 많은 사람들 소련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받은 적군 계급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 지휘 관직 붉은 군대 장교 임명되었다. 병사 적군 군복 착용했다.

 

1944 4 현재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 - 스 메르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 소총 대대
무선 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9 ~ 1943 7 현재)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
88 여단 병사 만주 ·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 · 파괴 공작 활동에 종사했다.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 주보 1940 ~ 1943 사이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여단 그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 인 수행과이 때 발휘 된 용기 및 용기 "에 김일성에 적기 훈장이 수여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 1945 10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第88独立狙撃旅団(ロシア語: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略称88 осбр )は、ソビエト連邦が第二次世界大戦中に創設した民族旅団の1つ。極東戦線情報科に直属し、満州・朝鮮半島における偵察・破壊工作を使命とした。

旅団は、元東北抗日聯軍将兵が中核となり、主として中国人と朝鮮人から編成された。後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国家主席、金日成は、同旅団の第1大隊長を務めていた。ただし、朝鮮労働党の公式見解では、金日成は朝鮮人民革命軍を組織して東北抗日連軍本体とは共闘しつつも別行動であったとしており、その後の入ソの事実は無視されている。中国共産党は、この部隊を東北抗日連軍教導旅団(抗連教導旅)と称している。

後に旅団の中核となる東北抗日聯軍は、1939年頃から関東軍と満州国軍の大規模な掃討作戦により、多数の戦死者を出した外、日本当局に帰順する者も出始めた。周保中、崔庸健、金策、金日成等、残った者達も物資の不足により、活動の続行が困難となった。そのため、彼らはソ連に脱出することを決定した。

1940年12月末、聯軍はアムール川を渡って、ソ連領内に入った。ソ連領内では、聯軍の活動支援のため、沿海地方のヴォロシーロフ・ウスリースク郊外に北(A)野営(Северный лагерь又はлагерь А)、トルクメニスタンのケルキ郊外に南(B)野営(Южный лагерь又はлагерь Б)を設営した。当初、約100人がここで訓練を受けたが、後に200~300人にまで増加した

独ソ戦勃発後の1941年7月中旬、ソビエト政府は、日本の北進に備えて、これらの野営地に基づき、第88独立狙撃旅団を編成することを決定した。旅団は、ハバロフスク市のヴャツコエ・ナ・アムーレ(Вятское-на-Амуре)に配置することが決定された。1942年7月21日付極東戦線司令官ヨシフ・アパナセンコ上級大将の命令第00132号に基づき、旅団の編成の期間は、 同年7月28日から9月15日までの間と定められた。

部隊の充足は、東北抗日聯軍の中国兵と朝鮮兵の外、中国系・朝鮮系ソ連人、その他の少数民族(ナナイ人、エヴェンキ人等)から行われた。旅団隊員の大部分は中国人で、朝鮮人は10%に過ぎなかった。その後、後続してソ連領内に入った部隊も合流し、第88旅団の兵員数は、1,500人を超えた。

聯軍から来た多くの者は、ソ連の軍事学校の促成指揮課程か、管区少尉課程を受け、赤軍の階級を授与された(旅団長周保中は中佐、金日成は大尉)。通常、旅団の指揮官職には中国人が、副指揮官職には赤軍の将校が任命された。兵員は、赤軍の軍服を身に着けた。

1944年4月現在の編制。

旅団本部 - 旅団長:周保中中佐、参謀長:V.サマルチェンコ少佐

政治科 - 政治委員:V.セレギン少佐

防諜科 - スメルシ

第1独立狙撃大隊 - 大隊長:金日成大尉

第2独立狙撃大隊 - 大隊長:王效明大尉

第3独立狙撃大隊 - 大隊長:王明貴大尉

第4独立狙撃大隊 - 大隊長:姜健大尉

自動小銃大隊

無線大隊

独立迫撃砲中隊

独立工兵中隊

独立対戦車銃(PTR)中隊

独立経済中隊

独立機関銃小隊

軍事通訳課程特殊分隊

各独立狙撃大隊は3個中隊から成り、各中隊は3個小隊から成った。

装備(1942年9月~1943年7月現在)は、小銃x4,312挺、自動小銃x370挺、重機関銃x48挺、軽機関銃x63挺、火砲x21門、対戦車銃x16挺、自動車x23両。

第88旅団の兵士は、満州・朝鮮半島地域において偵察・破壊工作活動に従事した。その詳細は不明だが、旅団長の周保中は、1940年~1943年の間に計89人の減員(損害)があったことを報告している。その内訳は以下の通り。

第2極東戦線の諜報業務に派遣 - 9人

第1極東戦線の諜報業務に派遣 - 26人

未帰還 - 24人

スメルシに引渡し - 6人

傷病のため後送 - 15人

死亡 - 2人

旅団復帰 - 7人

1945年7月、ソ連対日参戦に備えて、旅団から無線機を装備した100人を投入する戦闘行動計画が立案された。しかしながら、ソ連軍の急速な進撃と日本の降伏のため、この計画は実行されなかった。かくして、第88旅団、その大隊長である金日成が朝鮮半島の解放に参加する機会は訪れなかった。

1945年8月29日、第2極東戦線司令官マクシム・プルカエフ上級大将の命令第010号/nに従い、「日本の侵略者との戦いの前線における戦闘指揮任務の模範的遂行と、この際に発揮された勇敢さと勇気」に対して、金日成に赤旗勲章が授与された。同命令により、第88旅団の将兵216人に、各種勲章とメダルが授与された(9月10日に更に58人追加)。

第88旅団は、1945年10月12日付極東軍管区司令官令第042号により解散された.]

 

 

 

1945년 8월 9일 소련측 연합군 만주국(관동군) 공격

 

                                                                  소련측 연합군 4곳에서 만주국 공격

1945년 8월 9일 0시 10분 소련 100만 대군이 중소 국경선과 중-몽골 국경선 등 4 곳을 통해 일본 관동군이 장악하고 있던 만주(중국 동북 지방 : 당시는 일본 괴로국 만주국이었다)로 진공했다.

소련은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 된 지 이틀만인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했고 선전포고 다음날인 9일로 접어들자마자 만주로 진공한 것이다. 이날 미국은 나가사키(長崎)에 두 번째로 원자 폭탄을 투하했다.

소련 지상군의 만주진공과 함께 소련의 태평양함대는 한반도 북부와 치시마(千島)군도로 상륙하여 지상군의 공격작전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소련군의 강력한 공격에 일본 관동군은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소련은 이해 얄타 회의 이후 만주진공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미국은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對日戰)참가를 대가로 소련에 중국의 동북(東北)지방, 즉 만주가 반소(反蘇)기지화 하는 것을 제약하는 일정한 법적 보장을 약속했다. 이는 제정 러시아 당시의 이권을 회복하는 것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밀약에 따라 미국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정부에 얄타합의 이행을 약속하는 협상에 나설 것을 압박, 소련의 만주공격을 유도했다.

 

이에 앞서 8월 초 소련은 병력 150만 명, 2만 6,000문의 대포, 5,000대의 탱크를 국경선 부근에 집결시켰다. 이 같은 병력 규모는 관동군을 수적으로 크게 앞서는 것이었다.

8월 15일 히로이토 일왕(일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 있은 지 이틀 뒤인 17일 소련의 극동군 사령관 바실리에프 원수는 일본군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고 최후통첩했다.

일본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山田乙三) 대장은 18일 휘하 관동군에 소련군에 투항할 것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일본군은 20일부터 소련군에 무기를 건네주고 항복하기 시작했다.

8월 30일까지 중국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관동군의 전면적인 무장해제가 이루어졌으며 소련군의 대일 진공작전은 21일 만에 종료됐다.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월 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년 8월 9일~15일)의 짧은 기간동안 8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8월 13일에 청진시에서 소련과 일본이 싸우면서 소련은 300명이 죽었고, 일본은 500명이 죽으면서 250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과 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또,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천황)이 방송을 통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이미 며칠 전 무조건 항복 의사를 미국 측에 전달했고 14일에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수락햇다.
이로써 8월 15일은 일본에게는 패전기념일(일본은 '종전 기념일'로 부른다), 중국에게는 승전기념일, 그리고 한국에게는 '광복 기념일(광복절)'이 되었다.

 

 

*얄타협정

루스벨트미국 댗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와 소련의 스탈린 원수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크리미아 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갖고 2차대전 전쟁 완수와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1945).
이 협정은 둘로 구성됐다.
1. ‘크리미아 회의의 의사(議事)에 관한 의정서’는 세계기구(국제연합) 창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개최, 대서양헌장 제원칙의 재확인,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소련 4개국에 의한 독일의 분할점령, 배상 위원회의 설치, 전쟁범죄인의 조사, 폴란드ㆍ유고슬라비아의 처리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2. ‘소련의 대일(對日) 참전에 관한 합의’에서는 소련은 몽골인민 공화국의 현상유지, 남사할린의 반환, 다롄(大連)항의 국제화와 소련에 의한 우선 이용, 뤄순(旅順) 군항(軍港)의 조차(租借), 남만주 철도의 중소 공동경영, 만주에서의 중국의 주권 유지, 사할린(樺太), 치시마열도(千島列島)의 할양 등을 대가로 독일
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대일 참전할 것, 중국국민 정부와 우호 동맹조약을 체결할 것 등이 약속되었다.
이 밖에 미국과 소련 간에 한반도 군사 분할에 대한 밀약이 있었다. 일본 항복 후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한반도를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양군의 경계선으로 38선이 설정됐으며 이는 2차 대전 종전 뒤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국의 남북 분단을초래하는결과를 가져왔다


*국민정부 일제 항복 앞두고 중소 우호동맹 조약 협상 개시

1945년 = 국민당 정부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쑹쯔원(宋子文)이 외교부 차장 후스쯔(胡世澤)과 선훙례(沈鴻烈)과 장징궈(蔣經國)와 함께 모스크바로 가 중소 우호동맹조약(中蘇友好同盟條約)체결 협상을 시작했다.

중화민국 정부의 이러한 특사 파견은 6월 15일 주중 미대사 헐리가 트루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얄타협정에서 미국이 소련과 맺은 비밀협약을 통고하고 소련과의 협정 체결을 권유한 데 따른 것이다.

중화민국, 즉 국민당 정부의 중국과 소련 간의 중소우호동맹 조약은 일본이 항복하기 하루 전인 이해 8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됐다.

이 조약은 얄타회담에 따라 중·소양국이 대일(對日)전쟁에 승리할 때까지 상호원조, 단독 불휴전 및 불강화(不講和)를 약속하고 일본의 재침략 방지에 대한 보장 등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조약은 중·소간의 우호관계를 토대로 체결된 것이 아니다. 얄타회담에서 합의된 소련의 대일전(對日戰)참가 조건에 대한 중국의 수용을 확인박기 위하여 미국의 중재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소련은 중국의 동북(東北)지방, 즉 만주(滿洲)가 반소(反蘇)기지화 하는 것을 제약하는 일정한 법적 보장을 받는다는 명목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제정 러시아 당시의 이권을 회복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실행되고 미구그이 원폭 투하로 일본의 패전이 명백해진 뒤에서야 중국이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이 조약은 1949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됨으로써 효력을 상실하였고, 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으로 대체되게 되었다

1945년 중소 우호 동맹 조약은 장제스의 불가피한 선택이자 한계였다. 장제스는 소련이 제정 러시아의 식민주의적 유산 상속을 인정햇다. 1950년의 중소 우호동맹 상호 원조 조약은 마오쩌둥이 장제스와의 천하 쟁패 싸움에서 승리한 동력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준다.

마오는 장제스가 엄두를 내지 못한 소련의 식민주의적 유산 상속 포기를 이끌어냈다. 마오는 직접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를 성취햇다. 19 45년 조약의 중국 측 협상 주역은 장제스의 처남 쑹쯔원거과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였다. 장제스는 이조약의 체결에 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이 모스크바에서 체결되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北京)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마오쩌둥(毛澤東)은 같은 해 12월 소련과 새로운 조약 체결을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중국과 소련 간에는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체결한 ‘중소우호동맹조약’이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대만으로 패퇴한 국민정부가 체결한 것이었다.

‘1945년 중소 우호 동맹조약’도 모스크바에서 체결됐다. 그것은 얄타협정에 따라 중·소 양국이 대일(對日)전쟁에 승리할 때까지 상호원조, 단독 불휴전 및 불강화(不講和)를 약속하고 일본의 재침략 방지에 대한 보장 등을 다짐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중국과 소련간의 우호관계를 토대로 체결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이 얄타회담(1945. 2. 4. ~ 1945. 2. 11. )에서 합의된 소련의 대일전(對日戰)참가와 그 조건에 대해 중국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미국의 중재 아래 일본의 항복 전날에 정식조약으로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비정상적 배경 하에서 체결한 이 조약을 통해 소련은 중국의 동북(東北)지방, 즉 만주가 반소(反蘇)기지화하는 것을 제약하는 일정한 법적 보장을 받았다. 이러한 법적보장은 마오의 눈으로 볼 때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유산을 승계한 것이기 때문에 마오는 대륙을 장악한 뒤 최우선 과제로 소련과의 새로운 조약 체결을 서둘렀던 것이다..

마오가 12월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나 소련이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협상은 해를 바꾼 1950년 1월 20일 시작됐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중국에서 날아 와 협상에 참여했다)중국 공산당 기록에는 마오쩌둥이 49년 말과 50년 초에 소련을 방문했다고 밝히고 있어 마오가 소련이 회담에 응하지 않자 중국으로 되돌아 갔다가 다시 소련에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에 온 마오를 노골적으로 홀대하던 소련이 뒤늦게 1950년 1월 20일부터 회담 논의를 시작한 것은 그보다 8일 전인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언급한 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의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전략이었던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49년 8월 5일 중국백서(中國白鼠)를 통해국민정부의 국공내전 패배가 국민당과 국부군의 부패와 무능 때문이라고 규정한 미국민주당의 트루먼 행정부는 '애치슨 라인' 선포로대만으로 쫓겨난 국민정부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중국 대륙의 새주인을 인정하고 악수를 먼저 공개적으로 내미는 것이었다. 이보다 일주일 앞선 1950년 1월 5일 영국은 서방 국 최초로 공산 중국을 승인햇다. 홍콩 식민지를 유지하는데 1차적 목적이 있었으나 세계 전략 적으로 미국의 힘을 윻럽으로 집중시키자는꾐수였다. 미국은 이를 덥석 받은 것이다.

이런 국제 정세 하에서 체결되었기에 마오쩌둥을 카운터파트로 한 중소 상호원조 조약은 소련의 양보가 두드러진다.

이 조약은 전문(前文)과 6개조의 본 조약 및 2개의 부속협정·교환각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련은 중국에서의 특권을 포기하는 데 동의하고 부속협정에서 1952년 이전까지 창춘(長春)철도의 일체 권리와 재산을 무상으로 중국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또 뤼순(旅順)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이 철수하고 다롄(大連)항도 반환하기로 했다. 이러한 특권이 바로 소련이 대일전 참전대가로 미국의 적극적지지 아래 국민정부로부터 얻어낸 것이었다.

뤼순과 다롄의 1945년 이후 시설물의 건축 비용은 중국 정부가 상환하기로 했으나 소련은 연 1%의 싼 이자로 3억 달러의 차관을 중국에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본 조약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을 방지하여 동북아와 세계 평화를 공고히 하는데 협력하기로 하고 경제문화 상호 협력관계를 강화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소련은 미국의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분쇄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특권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 조약은 마오가 장에 비해 더 민족주의적이라는 주장의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장제스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치외법권 등 식민주의적 특권 포기를 얻어낸 사실을 상기하면 장은 해양 세력으로부터 제국주ㅢ 트권의포기를 얻어내고 마오는 대륙 세력으로부터 제국주의 특권 포기를 얻어내는 역사적 역할 분담을 하였다는 평가도 내릴 수 있다. 장과 마오는국제정세 속에서 어부지리를 얻어냈다는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조약 체결 후 마오쩌둥의 티토화 전략을 주도하던 이른바 미국 국무부 내 '스틸웰 그룹‘의 발언권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스틸웰 그룹‘은 2차 대전 당시 중국 파견 사령관으로 중국 공산당에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장제스(蔣介石)의 요청으로 1944년 파면당한 조셉 스틸웰 장군과 의견을 같이 하는 미 행정부 관리들, 특히 국무부 내 관리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여전히 ‘마오의 티토화’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스탈린은 한반도에 친소 통일정권을 수립, 중국을 견제하자는 전략적 고려에 따라 김일성의 대남 전면적 침공 계획을 승인, 6.25가 발발하게 됐다. 6.25의 발발로 미국의 ‘마오의 티토화’ 전략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마오의 중국과 소련을 갈라서게 하기 위해 '애치슨 라인'이란 승부수를 던지자 '한국전 도발'이라는 역풍을 맞은 것이다. 스탈린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미국은중국과 소련이 북한을 앞세워 남침시킨 것은 궁극적으로 한반도를 발판으로 하여 일본 열도를 노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이 한국전 개입을 통해 불과 반년 전 선포한 '애치슨 라인'너머로전진 방어 조치를 취한 것은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애치슨 노선'은 '사화산'이되지 않고 '휴화산'으로 동면햇다. 1972년 2월 말 공화당 의 리처드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이 '휴화산'은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 4월 11일 발효된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은 유효기간을 30년으로 하였다. 체약국 중 한 나라가 조약 만료 1년 전까지 폐지를 제기하지 않으면 기한을 5년간 연장하기로 하였다.

조약 만료 1년 8일 전인 1979년 4월 3일 개최된 중국 5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7차회의는 "국제정세의 중대한 변화에 따라 이 조약을 만기 이후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고 이 조약의 폐기를 선언했다.

 

                                                                                               동아시아 국가 중국


2차대전때 미국축의 연합군

                                                                            1945년 8월 15일 이후 동북아시아(극동아시아) 지도[사진]

아시아 태평양지역 2차대전은 만주국(중국 동북3성과 내몽골)과 조선국(대일본제국 조선총독부) 등 일본축(군국주의 공화국 국왕제,軍政)과 중국과 러시아,영국(캐나다, 인도) 등 미국축(민주공화국,民政)의 대결이었다

 

1. 대일본 제2전선 구축[중국과 만주국 전쟁]

미국과 영국등 연합군은 일본군이 제1전선으로 태평양(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등 오세아니아)과 미국본토[영국 식민지 국가나 아메리카 대륙]를 공격하는 입장에서 제2전선구축이 필요했다

본래부터 미국정부는 외교적, 군사적으로 중국 장개석정부를 도와주었다

소련축 모택동(소련군 전위대 홍군, 공산주의)과 장개석(국군, 자본주의) 분열로 중국내전이 일어났고 미국정부의 압력으로 모택동과 장개석 연합이 이루어졌다

(1)미군시찰단 연안(延安) 방문

1944년 7월 22일 미군 대령을 단장으로 한 미군 시찰단이 주중 미군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홍군의 최고 지도부가 위치한 옌안(延安)을 방문했다. 8월 7일에는 2차 시찰단이 비행기 편으로 옌안에 왔다.
이들의 시찰 목적은 전선 후방 지역에서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의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젠잉(葉劍英)과 양상쿤(楊尙昆)의 영접을 받은 이들은 마오쩌둥(毛澤東),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만났으며 펑더화이(彭德懷)와 천이(陳毅) 등으로부터 8로군과 신4군의 전투 활약상황을 브리핑 받았다이들 시찰단은 옌안 외에 진찰기(晋察冀)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허베이성 일대), 진수(晋綏) 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네이멍구 일대) 등 홍군의 항일 근거지 등을 시찰했다.
이들 시찰단은 시찰을 마치고 미국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 공산당과 그 무장역량을 중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이들 미군 시찰단을 맞아 옌안에서 발행되던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우방 미국 군사사절단 환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시찰단이 미국에게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호의적 평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중 미군 총사령부의 군사시찰단 파견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움직임과 연계된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미국은 중국에서의 제2전선 역량 강화를 위해 모든 중국 군대의 통합을 희망했다.
헨리 월레스(Henry Wallace) 미국 부통령은 1944년 6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개선하여 항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7월 초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를 포함한 전 중국군 지휘자로 스틸웰(Stilwell) 장군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 초기 한국군의 작전권을 요구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협정을 통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렇게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루스벨트의 이 제안은 필연적으로 공산당이 참여한 중국의 연합정부 창설 제안으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이 일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미군 시찰단의 옌안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루스벨트는 결국 장제스와 심한 불화를 보였던 스틸웰을 소환하고 웨드마이어(Wedmeyer)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 공산당을 포함한 연합정부를 제안한 가우스(Gauss) 대사도 이해 11월 30일 스틸웰의 소환을 주장했던 패트릭 헐리(Patrick Hurley)로 교체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시도가 좌절된 셈이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은 유럽에서 처칠이 추구한 유고 정책 을 본 뜬 것이다. 유고에서는 나치 침공 후 왕정 세력의 게릴라와 티토가 이끄는 공산 세력 게릴라가 별도로 활동했는데 처칠은 티토의 게릴라가 적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역할을 하자 그들이 공산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햇다.
이 결과 2차 대전 기간 티토의 게릴라는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티토의 게릴라 세력은 종전 후 벌어진 유고 내전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왕정 세력을 격파하고 자체적으로 유고를 공산화하였다.
1940년 8월 20일부터 그해 12월 5일 까지 8로군 부총사령관 펑더화이가 지휘한 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미국에게 영국이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의 공산 게릴라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했던 것처럼 미국에게 마오쩌둥의 홍군의 전략적 가치를 괄목상대하게 만들엇다.
스틸웰 등 중국 주둔 미국 지휘부는 국민당 군대의 만연한 부패와 이에 따른 군사적 무능과 비효율에 불만을 품고 처칠이 유고에서 취했던 것처럼 공산 게릴라 세력을 적극 지원, 대일본 제2전선을 구축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 민주당 행정부는 2차 대전 기간 중국의 유고화를 시도하지 못했으나 이러한 기조는 루스벨트 사후 트루먼 행정부에 이어져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는 것을 방치햇고 중국 공산화 이후에도 애치슨 라인 발표 등 중국 유고화를 부단히 추구했다. 이런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무산시킨 것은 한국전(6.25 사변) 발발이었으며이 전략은 1971년 공화당 닉슨행정부의 키신저가 부활시킬 때까지 동면해야했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한반도 문제 해결 위한 4자 회담과 남북교차 승인, 유엔동시가입 등을 제의했다(1976).

(2)팔로군

1937년 7월 27일 마오쩌둥(毛澤東), 장원톈(張聞天)이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국공합작에 따른 홍군개편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항일전 기간 홍군이 ‘8로군’으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홍군 통솔기구의 명칭에 대해서 양보할 수 있지만 홍군과 소비에트 지구에 대해서는 전권을 보유한다고 천명했다.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이 홍군의 인사에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 이날 천명된 원칙의 요체였다.
다음 날인 28일에 8월 15일까지 홍군의 재편성을 마치고 같은 달 20일에 항일전에 출동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어 장제스(蔣介石)에게 전문을 보내 홍군을 국민혁명군으로 개명하여 장제스의 지휘 아래 항일전쟁에 동참시킬 뜻을 전달하였다.
공산당은 이 제안에서
①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실현
② 국민당정권의 전복을 위한 모든 폭동정책과 지주의 토지몰수 정책 취소
③ 소비에트정책과 홍군 명칭의 취소
④ 국민혁명군으로의 개편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명령 수용 등의 4개항을 제시하였다.
8월 장제스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지휘부를 인선하였다. 하지만 이 인선은 공산당이 결정한 것을 추인하는데 불과했다.
8로군 총사령관은 주더(朱德)이고 부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정치부를 설치하여 런비스(任弼時)를 주임에 덩샤오핑(鄧小平)을 부주임으로 하였다.
그 아래 3개 사단을 두었는데 115사 사단장에 린뱌오(林彪), 120사 사단장에 허룽(賀龍), 129사 사단장에 류보청(劉伯承)이 임명됐다.
8로군 개편 당시 총병력은 4만 5,000명이었다.
한편 주력군을 8로군으로 개편한 뒤 따로 1만 명의 병력으로 보안대를 창설하고 사령관에 가오강(高崗)을 임명했다.
8로군은 이후 국민혁명군 제 18 집단군으로 개칭됐으나 계속 8로군으로 불렸다.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활동한 중공 계 정규군과 유격대의 총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항일전쟁 개전 직후 8로군은 맹렬한 전투와 유격전으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항일전쟁 종전 뒤에는 신사군(新四軍)등과 합쳐져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3대 기율 8항주의(三大規律 八項主義)’로 대표되는 인민에 봉사하는 엄격한 규율에 의해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것이 중일전쟁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최대요인이 되었다
-국민당군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중일 전쟁 기간 내에 장비는 우수했지만 병력 보존에 우위를 두어서 일본군과의 정면 결전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관동군이 전략 요충지로 결정하고 쳐들어 오는 곳에서는 격렬히 저항하였고 정규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항상 소규모 전투에서 패전을 했으며, 같은 국민 혁명군에 속했던 팔로군을 간접적으로 탄압하였다. 또한 팔로군에 대해서 적극 공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예로 신사군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당군이 병력 보존을 고려한 것은 중일 전쟁이 끝난 후 공산당을 무력으로 즉각 없애버리려는 의도였지만, 이 전략은 완벽하게 실패가 되어 버린다. 항일전에서 과감하게 일본군과 싸운 팔로군은 화북을 중심으로 민중의 지지를 모은 것이었다. 그에 비해 국민당군에 대한 민중의 평판은 확고히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국민당을 돕던 미군도 사실상 팔로군과 주로 작전 수행을 하였다.(미국 육군으로부터 파견되었던 죠셉 스티르웨르 중장의 해임사건도 이것이 원인이 되었다.)

팔로군은 군복과 군모의 색은 함께 황토색.하지만 홍군시대의 남색의 군복의 군인도 많았다. 왼팔에 「8로」라고 쓰여진 완장을 붙인다. 군화는 신지않고 포화나 짚신을 신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팔로군은 점령지에서 어느 정도의 소지를 소유한 농민을 「부농」이라고 판단해 인민재판에 걸쳐 처형했다. 이것은 팔로군의 힘을 과시해 주민에게 공포심을 안게 하기 위한 목표였고 팔로군에 대한 부정적 측면으로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잔학행위는 지역 내의 빈곤한 자의 질투심, 복수심을 채우는 일로도 판단되어,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공헌한 면도 있다.

                                                                     1930년 말기와 1945년 8월까지 동북아 지도[동북3성과 내몽골 만주국]

 

                                                                                                      동아시아 국가 중국

제2차 대전 이후 중국은 미국과 소련 도움으로 내몽골와 동북3성(만주족과 몽골족,조선족등), 티벳(티베트족), 신강(회족)등 지배하는 동아시아 국가(동아시아 지배자)가 되었다

 

2. 대일본 제2전선 구축[소련과 만주국,조선총독부 전쟁] 

일본 관동군을 맞이해 소련군 다수가 사망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만주전에서 일본 지상군을 무릎 끓리며 소련군은 결국 일본 군국주의 의지를 꺽은 채 한국 해방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한반도 남쪽에 상륙했다. 다시 말해 일본이 항복을 선포하고 무조건 항복 협정에 서명한 이후였다. 진정한 역사적 사실은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군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데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군은 소련군이 합류하지 않는다면 일본을 항복시키는데 보다 큰 희생이 치러질거라는 계산을 미리 했다'고 알렉산드르 제빈 러시아 극동연구소 한국연구센터장은 말한다:

"미국은 만일 일본이 본국으로 돌아가 만주, 한반도에 위치한 일본군들을 집결시킬 경우 전쟁이 1년 더 소요될거라 계산했다. 그렇게 되면 일본 열도 상륙시 100만 여명의 미군 인명 피해가 예상됐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소련군이 일본군을 격퇴해 더 이상 사건이 확대되지 않기를 바랬다.

 포츠담 선언문에서 연합군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 참여가 서명되었다. 서명된 내용대로 5월 9일 유럽 전쟁에 승리한 지 정확히 3개월 후 소련군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얄타, 포츠담에서 진행된 연합군 회의 국제 문서 내용에 있다.

일본군 주력군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을 점령해야 사실상 전쟁이 종결될 수 있었다

일본국 제2차대전 전쟁 추진세력은 일본 민정세력(국왕, 의회와 내각)보다는 군정세력(공화국 국왕제 이론, 군사평의회)으로 군국주의자들이었다

 

(1)소련군은 연합국 미군원조로 여름 8월(북극해의 여름 )에 일본열도와 사할린, 만주국, 한반도를 점령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했다

미군의 청탁으로 소련군 참여는 소련이 극동아시 지역 국가(아시아 태평양국가)로 등장했다

그 이후 소련은 동남아와 태평양 그리고 중국 원조국으로 등장했다

 

                                                                                          아시아 태평양국가 러시아(소련)

 

(2)8월 13일 소련군 한반도서 일본군 패배 결정적 역할한 청진상륙작전 실시

1945년 8월 13일 이반 유마셰프 사령관 지휘 아래 태평양 함대 소일 전쟁 가운데 '청진상륙작전'이 실시됐다.

이 작전의 목적은 한반도 북부 연안 정친시에 소재한 일본 해군 기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일본 해군 기지를 진면 일본 제국 육군 주력 부대 가운데 하나인 관동군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둔지에는 중위인 소키티 니시바키와 케이사쿠 무라카미가 지휘하는 해군 기지 3개 부대 등 일본 군 4천명이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소련 태평양 함대 해병대는 바실리 투루신 13 여단장 바실리 투루신 소좌 지휘 아래 작전을 실시했다. 배로부터의 상륙은 스투제니치니코프 군 중좌가 지도했다.  

상륙 및 화륙 지원에는 12척의 상륙함 7척의 원양 구축함, 기뢰 부설함, 8척의 순찰함, 6척의 잠수함 보트와 18척의 어뢰 보트가 작전에 참여했다. 상공에서는 태평양함대 해군의 250여기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지원했다. 

200여 명으로 구성된 선봉 부대의 상륙과 어뢰 보트는 적들에게 뜻밖이었다.  상륙 작전 첫 째날 항구에서는 상륙 작전이 활발히 진행됐으며 도시 구역으로 바짝 다가섰다. 8월 14일과 15일 청진 항구에는 2개 대대 6천 여 명 이상의 주요 육전 부대원들이 상륙했다.

 

이반 치스치코프 사령관이 지휘하는 제1 극동전선 25여 군부대가 도시로 다가갔다. 이들은 이 시각 청진 시의 많은 지역을 점령한 육전대를 지원했으며 해군 기지를 장악했다. 그리고 작전은 끝났다. 관동군은 붉은 군대에 맞서 방어 조직 구성을 위해 병력을 철수하며 일본섬을 차단했다. 

청진를 점령하는 가운데 500여 일본국이 사망했으며 2,500명이 포로가 됐다. 소련 해병대의 경우 300명이 사망했다   

 

(3)일본은 100년 동안 홋카이도 북방의 4개 섬(쿠릴열도 4개 섬)에 대한 영토 주장을 하고 있다.

북방 4개 섬은 현재 러시아 영토이다.  

1) 1855월 11월 7일 러-일 통상 및 영토조약: 에토로후 섬까지 쿠릴 열도의 남쪽을 양보하고  그 북쪽에 위치한 북 쿠릴 열도는 러시아 영토로 합의(위 지도 빨간 줄).   그리고 사할린( 위지도의 노란색 지역)에서는 러시아인이 사는 지역은 러시아 영토로 일본인이 거주하는 남쪽 지역은 일본영토로 합의. (미분할로 남겨둠)

2) 1875년 5월 7일 러-일 국경 조약: 사할린을 러시아가 갖는 대신 쿠릴 열도 전체를 일본 측에 양도하기로 합의.

3) 러-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Portsmouth)조약을 체결하면서 사할린을 북위 50도선으로 분할하여 점령함.

 또한 패전국인 러시아의 동의 없이 북쪽 사할린도 일본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지명도 일본어로 개칭.

4) 러시아의 강력한 항의로 1925년 1월 20일 조약을 체결 북 사할린에 주둔하던 일본군 철수.

5) 일본이 패색이 짙어지던 1943년 11월 27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중국의 장개석 총통, 영국의 처칠 수상이 카이로 회담을 개최하여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한 조선과 만주 태평양상의 모든 영토를 박탈하기로 선언.

카이로 회담 이후 루즈벨트와 처칠은 소련 스탈린은 얄타에서1904~1905년 러-일 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긴 전체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회수 받음.  이때 일본 영토였던 북방 4개 섬이 소련령이 되었다.

6) 1945년 8월18일 스탈린은 트루먼에게 일본 영토 홋카이도 절반을 소련군이 점령할 수 있도록 동의해달라고 제안.

트루먼은 홋카이도 점령은 이미 맥아더에게 위임하여 불가능하다는 회신을 보내고 대신 미국이 전략적으로 필요한 쿠릴 열도 중 한 섬에 미군 비행장과 군항시설 건설을 요청.

스탈린은 트루먼의 요청 거절.

이때부터 꾸릴 열도를 두고 미-러 양국의 전략과 이해가 충돌하기 시작되었다.  일본의 영토였던 남 사할린과 북방 4개 섬을 1946년 소련 영토에 편입 시켰다.

현재는 북방 4개 섬은 러시아의 사할린 주에 소속 되어 있다.

7) 1955년 러-일 전쟁으로 단절되었던 두 나라는 런던에서 대표가 모여 평화조약과 단절되었던 통상 및 수교.

8) 1956년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러-일 공동선언에 합의 이때 러시아는 북방 4개 섬 중 일본에서 가까운 2개 섬 하보마이 군도와 시코탄 섬을 일본에 양도 약속.

9) 1960년 미국과 일본은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일본에 육. 해. 공군을 주둔시킬 수 있고 외국과 군사충돌이 있을 경우 일본이 지원하고 자위대의 방위력 강화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오키나와 등의 일본 영토에 반영구적인 군사기지로 건설, 사용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은 미국과 일본의 상호방위조약이 소련을 겨냥한 반공군사동맹으로 인식하고 반환 예정인 2개 섬도 군사기지로 사용 될 것을 우려 양도를 거부했다.

반면에 미-일 상호 방위조약체결 이후 2차대전 패전국 일본은 미국의 원조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선진국으로 도약한 일본은 이때부터 소련을 향해 강력하게 영토반환문제를 제기했다. 게다가 일본은 소련이 요구하는 평화조약과 경제협력 체결을 거부하면서  1956년 흐루시초프가 약속했던 북방 2개 섬을 즉시 양도하라고 촉구했다.

소련은 요구했던 평화조약체결 및 경제 협력을 철회하고 반환도 거부했다.

10) 1991년 코르바초프 일본 방문했다. 기회를 엿본 일본은 북방영토문제를 거론했으나 고르바초프는 북방 섬에 대한 논의 회피하고 경제적 이득만 챙기고 돌아갔다.  고르바초프가 일본을 방문할 때 소련 학계와 국회 그리고 극동 러시아 어민들의 항의  즉,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 때 약 4만 명의 전사자와 약탈해간 재산과 자원의 보상을 어디에서 받느냐는 여론을 염두에 둔 조치.

11) 경제 강국으로 변모한 일본은 자금 원조와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무제한 투자 조건을 내걸고 옐친의 일본 방문을 성사시켰다.

1993년10월13일 일본을 방문 한 옐친은 많은 이득을 보고 일본수상과 동경선언을 발표까지 공포하였으나 북방 4개 섬 반환에 대한 안건에는 침묵했다. 엄청난 자금과 정성을 쏟았던 일본은 러시아와의 협상에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수억 달러의 자금만 날리고 체면도 구겨지는 노리개감이 된 셈이다.

12) 2005년부터 일본에 새로운 안을 제시하였다.

" 일본의 광범한 경제적 투자와 권한을 인정해 주면 러시아의 행정주권을 인정해 주겠다. “

이것은 일본이 러시아에 무릎을 꿇고 물러섰다는 말이다. 이런 전조는 1963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과 러시아가 체결한 어업조약에서도 볼수 있다.

이 어업조약은 문서화 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북방 4개 섬을 러시아 영토임을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실제적인 국경선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북방 4개 섬에 경제적인 투자를 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주권은 러시아에 주겠다는 말이다

일본은 북방 4개 섬에 러시아 주권을 인정하면서 무엇때문에 자국도 아닌 곳에 복지시설을 건설하고 전기를 공급하고 주민들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있다

북방 4개 섬과 남 사할린은 한 때 일본의 영토였다.

소련과의 평화조약에서 얻은 합법적인 영토였다.

그런데 2차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략하여 일본이 연합군의 자격으로 참전한 러시아에 이 영토를 빼앗겼고 러시아 자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일본은 이렇게 빼앗긴 영토를 찾기 위해 60여 년 동안 집요하게 매달렸다.

엄청난 외교적 노력과 천문학적인 자금을 러시아에 쏟아 부었다. 1998년 러시아 IMF 때 국제통화기금에서 제공한 자금보다 더 많은 달러를 퍼부었다.

러시아에서 제안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엄청난 손실을 보면서까지 추진했고 그 사업으로 손해본 액수가 수억 달러에 달한다.

러시아 극동 주민을 위한 의료. 식품. 주거 등 복지 전반에 걸쳐 막대한 자금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지금 북방 4개 섬에는 일본이 무상으로 지어준 안락한 시설에서 러시아 인들이 편히 살고 있다.

또 사할린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모두를 높은 값에 수입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러시아는 2개 섬을 반환한다. 에토로우 섬을 분할하여 반환한다는 등

변죽 울리는 안건만 제시할 뿐 이득만 챙기고 나면 원론적인 소리로 얼렁뚱땅 넘어갔다.

러시아의 반환 발표에 들떴던 일본은 변덕스런 러시아에 모욕적인 수모를 당했으나 어쩔수 없었다.

러시아의 문 앞 개처럼 언제쯤 던져질 북방 4개 섬에 침 흘리는 형상이 지금 일본의 처지다

 

 

 

 

                                                            쿠릴(Kurilskiye, 지시마) 열도 지도[사진]

*쿠릴(Kurilskiye, 지시마) 열도

러시아 연방 캄차카 반도의 남단에서 시작하여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북동부에 이르기까지 1,200㎞에 걸쳐 뻗어 있으면서 오호츠크 해와 태평양을 가른다. 이 열도를 이루는 섬의 수는 56개이며, 그 총면적은 1만 5,600㎢이다. 이 열도는 태평양을 둘러싸고 있는 불안정한 지질대의 일부이다.

100개 이상의 화산 중 35개는 활화산이며, 온천 역시 많다. 이 열도에서는 지진과 큰 해일이 일상적으로 느껴질 만큼 흔하다. 특히 1737년에 발생한 해일의 높이는 64m에 이르렀는데 이는 기록상 세계 최고높이이다. 이 열도와 나란히 뻗어 있는 태평양 기저의 쿠릴 해구는 깊이가 1만 542m이다.

기후는 혹독한 편으로 겨울은 길고 추우며 눈이 많이 내리고, 여름에는 안개가 많이 끼고 습윤하면서 서늘하다. 연평균강수량은 760~1,000㎜이며, 9월말부터 6월초까지 내리는 눈이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북쪽 섬들의 툰드라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오면서 다양한 식생이 분포하며, 남쪽의 보다 큰 섬들에는 울창한 산림이 형성되어 있다.

게잡이를 비롯한 어업이 유일하게 중요한 산업이다. 주요중심지는 가장 큰 섬인 이투루프 섬에 있는 쿠릴스크 시와 파라무시르 섬의 세베로쿠릴스크 시이다.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러시아인들로 그들은 17~18세기에 열도를 탐험한 후 정착했다. 그러나 1855년 일본인들이 남쪽의 섬들을 점령했고, 1875년에 열도 전체를 손에 넣었고 이름을 지시마[千島] 열도라 고쳤다. 1945년 얄타 협정에 따라 쿠릴 열도는 소련에 양도되었으며,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추방되고 대신 소련인들이 들어왔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열도의 남단부에 있는 4개의 섬들에 대한 역사적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쿠릴 열도에 대한 소련과 일본의 분쟁으로 1956년 양국은 관계를 정상화했으나 평화조약을 맺지 못하고 있다.

 

 

미국, 하와이 일본계 주민 수용소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

Honouliuli National Monument in Hawaii permanently protects a site where Japanese American citizens, resident immigrants, and prisoners of war were held captive during World War II. Located on the island of Oahu, the monument will help tell the difficult story of the internment camp’s impact on the Japanese American community and the fragility of civil rights during times of conflict. Photo by R.H. Lodge, courtesy Hawaii’s Plantation Village.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계 주민이 강제수용된 역사를 후세에 전하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와이 주의 최대 수용소 터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수용소는 진주만에 가까운 하와이 주 최대 규모로, 일본계 주민을 중심으로 약 400명의 시민 외에 약 4천 명의 전쟁포로가 수용돼 있었습니다.

백악관은 사적으로 지정한 이유에 대해 "일본계 주민사회에 미친 충격과 전시 중 공민권의 취약성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미국에서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후인 1942년 2월 19일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계 주민을 강제수용하는 대통령령을 발표해 약 12만 명이 수용소에서 고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사적은 미국 역사의 아픈 부분을 상기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제2차세계대전에서 싸운 일본계부대에 최고훈장 수여하기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중 미군을 지원해 유럽의 격전지 등에서 싸운 일본계 미국인 부대에 미국 국민에게 있어 가장 명예로운 '의회훈장'을 수여하는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중 미국에서는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적성외국인'으로 수용소에 강제로 보내졌고, 일부 일본계 미국인은 군에 지원해 독일과 이탈리아 등의 격전지에서 싸우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법안은, 일본계 미국인 부대가 국내에서는 인종차별과 싸우고 국외에서는 파시즘과 싸워 용맹함을 보여주고 국가에 헌신했다며, 미국 국민에게 있어 가장 명예로운 '의회훈장'을 수여하기로 하고, 5일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했습니다.

백악관에서 서명에 입회한 육군 출신 테리 시마 씨는, 목숨을 잃은 전우들의 공적을 기리는 일이라며, 미국의 일본계 미국인 사회에 있어서도 기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미 의회, 일본계 노병들에 금메달 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일본계 미국인 노병들에게 미 의회 금메달이 수여됩니다. 온갖 차별 속에서도 미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한 공로를 인정받은 건데요. 바락 오바마 대통령은 어제 (5일) 관련 법안에 서명하며 이들의 무훈을 상기시켰습니다. 어떤 의의가 있는 건지 알아보겠습니다

문) 미국 정부가 다시 한번 참전용사들의 공로를 기리는 법안을 마련했군요. 이번에는 일본계를 따로 분류해서 메달을 수여하고 있네요.

답) 예. 미 의회 금메달이라고 하면 민간인 최고의 영예에 해당되는데요. 미군으로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6천 여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이번에 그 영예를 안게 됐습니다. 어제 (5일) 오바마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면서 공식화 됐구요.

문) 이렇게 일본계만 따로 떼어내서 상을 줘도 되나요? 차별 논란은 없을까요?

답) 차별 말씀을 하셨는데, 거의 70년 전에 일본계 미국인들이 이미 받은 차별에 대한 보상 차원이라는 점에서 미국 내에서 충분히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적국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당시 미국에 이민 와서 살던 일본인들은 하루아침에 적국 안에 갇힌 셈이 돼 버렸습니다.

 

문) 실제로도 격리 수용됐잖아요.

답) 그랬었죠. 미국이 스스로 부끄러운 역사로 인정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1942년 2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행정명령 9066에 서명하는데요. 모든 일본계 미국인들을 현 거주지에서 지정된 수용소로 이송해 그 곳에 구금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문) 그러니까 일본계 미국인들로서는 조국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에서 완전히 이방인 취급 당하는 일이 벌어진 거군요.

답) 바로 그렇습니다. 일본계라고는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엄연한 미국 시민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1942년 3월에서 5월까지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는데요. 가족이 각각 다른 수용소로 이송돼 생이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당시에 미군에서 복무 중인 일본계 미국인이 5천 명 이상이었다고 하는데요.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에 이들은 모두 현역에서 제대 조치 당했습니다.

문)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된 거죠. 일본계 미국인 입장에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미국에 대한 애국심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상황으로도 이해가 되네요.

답) 물론 그런 동기도 작용을 했을 겁니다. 2차 대전에서 미국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고 싶다, 이런 의사를 끊임없이 표현했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나 봅니다. 미군에서 받아 주질 않았던 거죠. 군 복무 부적합, 또는 적성국가의 외부인으로 분류되기 일쑤였다고 하네요. 엄연한 미국 시민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문)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계 부대가 따로 편성이 된 거죠? 이번에 의회 금메달을 받게 된 초석이기도 하구요.

답) 바로 그렇습니다. 일본계가 주축이 된 미 육군 442연대 100대대가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끝장을 본다’는 구호를 내걸고 2차 대전에 참전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는데요. 가족이 미 당국에 의해 격리 수용돼 있는 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미 정부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점, 이 부분을 높이 사야 한다는 목소리가 세월이 흐를수록 높아졌고 또 받아들여진 겁니다.

문) 미국 정부로서도 특정 민족을 격리 수용했던 역사의 어두운 구석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뭔가 조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답) 맞습니다. 이미 미국 정부는 지난 1988년 일본인 강제수용에 대해 사과한 바 있습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 정부는 과거의 실책을 거듭 사과한다는 점을 이번에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니엘 아카카 미 상원의원은 442연대 일본계 미군이 전쟁에서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미국을 보다 관대하고 공정한 나라로 변모시키는데도 기여했다,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문) 미국 정부의 양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한편으론 일본계가 너무 피해자로만 묘사되고 있는 건 아닌가, 사실 그런 논란도 있지 않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미국 바깥에선 반대로 일본이 타민족을 억압했던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분명하니까요. 특히 한국에선 미국은 70년 전 일도 일본에 사과하는데 일본은 왜 일제 침략에 대해 사과할 줄 모르냐, 거꾸로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너무 피해자인척 하지 마라, 이런 시각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문) 미 의회에서도 그런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의원이 있잖아요. 의외로 일본계 더군요.

답) 맞습니다. 마이크 혼다 의원, 2차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됐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일본군 강제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총리의 공식 사과를 요구한 결의안을 하원에 제출한 인물이기도 하구요. 미국이 사과한 것처럼 일본도 사과하라, 이런 주장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미국의 소리]

 

 

"Capitalism  Anti Communism! Democracy Anti Totalitarianism(Dictatorship)!

After the capitalist democracy revolution, liberalism(Civil liberties) and Socialist(social rights, Right to life) coexist (respect) is a free society. -Freedom Society[Democratization government]-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全體主義(獨栽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后,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自由社會[民主化 政府]-"

*Three principles of capitalism:Private property, pursuit of profit, Principle of free market competition Etc.[資本主義 三代原則: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

*Three principles of Democracy: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Etc[民主主義 三代原則:為民有、民治、民享 等等]

-Guide Ear[Intelligence, Bird's Eye&Guide Ear]-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 깃발[소비에트 홍군에서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개편]

1937년 7월 27일 마오쩌둥(毛澤東), 장원톈(張聞天)이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국공합작에 따른 홍군개편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항일전 기간 홍군이 ‘8로군’으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홍군 통솔기구의 명칭에 대해서 양보할 수 있지만 홍군과 소비에트 지구에 대해서는 전권을 보유한다고 천명했다.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이 홍군의 인사에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 이날 천명된 원칙의 요체였다.

다음 날인 28일에 8월 15일까지 홍군의 재편성을 마치고 같은 달 20일에 항일전에 출동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어 장제스(蔣介石)에게 전문을 보내 홍군을 국민혁명군으로 개명하여 장제스의 지휘 아래 항일전쟁에 동참시킬 뜻을 전달하였다.

공산당은 이 제안에서

①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실현

② 국민당정권의 전복을 위한 모든 폭동정책과 지주의 토지몰수 정책 취소

③ 소비에트정책과 홍군 명칭의 취소

④ 국민혁명군으로의 개편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명령 수용 등의 4개항을 제시하였다.

8월 장제스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지휘부를 인선하였다. 하지만 이 인선은 공산당이 결정한 것을 추인하는데 불과했다.

8로군 총사령관은 주더(朱德)이고 부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정치부를 설치하여 런비스(任弼時)를 주임에 덩샤오핑(鄧小平)을 부주임으로 하였다.

그 아래 3개 사단을 두었는데 115사 사단장에 린뱌오(林彪), 120사 사단장에 허룽(賀龍), 129사 사단장에 류보청(劉伯承)이 임명됐다.

8로군 개편 당시 총병력은 4만 5,000명이었다.

한편 주력군을 8로군으로 개편한 뒤 따로 1만 명의 병력으로 보안대를 창설하고 사령관에 가오강(高崗)을 임명했다.

8로군은 이후 국민혁명군 제 18 집단군으로 개칭됐으나 계속 8로군으로 불렸다.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활동한 중공 계 정규군과 유격대의 총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항일전쟁 개전 직후 8로군은 맹렬한 전투와 유격전으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항일전쟁 종전 뒤에는 신사군(新四軍)등과 합쳐져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3대 기율 8항주의(三大規律 八項主義)’로 대표되는 인민에 봉사하는 엄격한 규율에 의해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것이 중일전쟁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최대요인이 되었다

 

                                            1930년 말기와 1945년 8월까지 동북아 지도[동북3성과 내몽골 만주국]


 

 

 

                                                                      1945년 8월 15일 이후 지도

팔로군(八路軍),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은 1937년 제2차 국공합작후에 중국 공산당 휘하 독립적 성향을 가진 부대로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설립되었고 신사군과 함께 화베이 지방에서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한 부대이다. 적극적인 항일전과 민심도모로 인해 중일 전쟁 기간에 중국 공산당에 큰 발전을 기여했다

1.개요

마오쩌둥은 군벌이나 열강에 대항하려면 민중에 의한 혁명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 국민당에서는 1920년대 1차 국공 내전 당시 빈약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군대의 수나 그 재정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군대를 이용해 상하이 쿠데타(중국어: 四·一二事件)를 부흥시켰고, 제1차 국공 합작을 붕괴시켰다. 중국 공산당은 이 씁쓸한 경험으로부터 독자적인 군대의 창설을 해야했다.

중국 공산당에 있어서 큰 기회로 바뀌었다. 마오쩌둥에 의한 인민전쟁 이론(「점화한 적군을, 인민의 바다안에 매장한다」―인해전술)에 따라, 공산당은 중국 각지에의 침투 공작을 적극적으로 행했다. 공산당에 협조적인 지역을 넓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공산당 세력은 풀뿌리적으로 증식하였고 중일 전쟁이 끝난 1945년 980,000명 정도의 게릴라 군을 모으게 된다.

그러나 1937년에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후 8년동안 중국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무기와 군사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국민당 정부군은 전쟁발발 직후부터 일본에 밀리기 시작하여 충칭으로 임시수도를 옮기고 서부 산악지대를 근거로 지구전을 펼쳐야만 했다. 팔로군은 일본군에 제대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동부해안지대에서 북경-서안-장사-계림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중국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다. 중국 국민당의 국민 혁명군과 중국 공산당 휘하에 있던 팔로군은 전쟁기간동안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일본의 패전 후, 국공 내전이 재개하면서 팔로군은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만주의 할힌골 전투(러시아어: Бои на Халхин-Голе)에서 승리한 소련군은 관동군의 장비를 접수하였고 이것을 그대로 팔로군에게 주었다. 또 일본군의 군인이나 민간인을 팔로군에 가세하는 것으로 군사 기술이나 전문 기술을 얻을수 있었다. 공군이 없었던 팔로군은 일본군의 항공 부대의 장교를 회유하여 항공대원 양성하였고, 포병 전술, 전략 측이 미비하여 기본적으로 체계화 된 일본군의 포병 전략을 베이스로 하였다. 또한 팔로군 내 조선인이 간호, 의사들 그리고 좌익 아나키스트 계열의 항일군이었던 조선의용대를 필두로 국공 내전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승리하고도 팔로군은 긴 세월에 걸쳐 징용 했고 팔로군은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최종 승리하여 1949년 10월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큰 역할을 완수했다.

2.활동 지역

팔로군은 주로 관동군 점령지역의 후방 교란과 게릴라전을 담당했다. 1940년 8월에는 화북에서 백단 대전이라고 하는 철도나 탄광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 공세를 실시했지만, 관동군은 이 팔로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특수치안부대, 간도특설대를 미리 조직하였고 팔로군 일부는 백단 대전에서 금세 소탕되었다.

3.승전국(勝戰國)

2008년 현재, 중국 국민의 대부분이「중공은 일본과의 전투로 승리했다」라고 믿고 있다.「중공은 일본과의 전투로 승리했다」라고 하는 이유는 원래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상대로 해서 이길 확률이 거의 없었으나, 갑자기 터진 중일 전쟁에 의해 중국 공산당은 활발한 게릴라 작전등을 펼쳤고 이에 대해 지지를 얻었다는 애매모호한 주장들을 펼치고 있다.

4.전신 체계

당초 조직 된 홍군(중국 공산당군)은 마오쩌둥 지휘하의 중국공농홍군과 남창 봉기로 주덕 밑의 홍군인 정강산에서 합류해 중국공농혁명홍군 제4군이 되어 후에 중국공농홍군 제4군이 되었다. 제4군은 서금의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에 본거지를 두었지만, 5회에 걸치는 국민당군의 포위 공격에 맞아, 근거지를 떠나고 대장정을 시작하게 된다

 

5.규모 및 규모 변화

팔로군은 비정규적인 게릴라 전을 구사하였으나 정규 전술을 썼던 국민당에 비해선 사상자가 적었다. 중국측 자료주장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의 경우는 약 300,000명의 사상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팔로군은 소련에 의해 압수된 수 많은 일본군측의 장비와 무기들을 소련측으로부터 흡수함으로써 장비로서 정규적 전술을 펼칠수 있는 군대를 만들수 있었으며, 팔로군의 숫자를 계속 늘릴수 있었다.

(1)국민혁명군 제8로군

1937년 - 120,000명

1938년 - 156,000명

1940년 - 400,000명

1944년 - 600,000명

1945년 - 980,000명

(2)중국 공산당

1946년 - 1,200,000명

 

6.조직

(1)지휘부

사령관:주더

부사령관:펑더화이

참모장:예젠잉

정치부(제8로군정 지부) 주임:런비스

(2)예하 부대

제115 사단장 린뱌오, 부사단장 네룽전, 부대 주 지휘관 뤄룽환

제120 사단장 허룽, 부사단장 샤오기, 부대 주 지휘관 관웅

제129 사단장 류보청, 교위단장 쉬샹첸, 부대 주 지휘관 장하오

각 사단은 각각 2개 여단이 있다.

독립단- 조선인으로 구성 된 여단이다. 조선의용대 또는 1940년대 초반에 차출된 동북항일연군이 주축을 이뤘다.

기병단 - 주로 측면을 교란하던 기병대였다.

포병단 - 팔로군이 숲속이나 농촌지에 요새를 구축할 때 그 수성전은 주로 포병단이 맡았다.

타격단 - 팔로군의 주력 여단이었으며 게릴라 전술을 통한 관동군 후방 교란이 주요 목적이었다.

교도단 - 주로 경비 또는 죄수 교도를 맡았다.

특무단 - 지금의 헌병대의 역할이며 팔로군 내 군경 역할을 했다.

국민당군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중일 전쟁 기간 내에 장비는 우수했지만 병력 보존에 우위를 두어서 일본군과의 정면 결전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관동군이 전략 요충지로 결정하고 쳐들어 오는 곳에서는 격렬히 저항하였고 정규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항상 소규모 전투에서 패전을 했으며, 같은 국민 혁명군에 속했던 팔로군을 간접적으로 탄압하였다. 또한 팔로군에 대해서 적극 공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예로 신사군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당군이 병력 보존을 고려한 것은 중일 전쟁이 끝난 후 공산당을 무력으로 즉각 없애버리려는 의도였지만, 이 전략은 완벽하게 실패가 되어 버린다. 항일전에서 과감하게 일본군과 싸운 팔로군은 화북을 중심으로 민중의 지지를 모은 것이었다. 그에 비해 국민당군에 대한 민중의 평판은 확고히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국민당을 돕던 미군도 사실상 팔로군과 주로 작전 수행을 하였다.(미국 육군으로부터 파견되었던 죠셉 스티르웨르 중장의 해임사건도 이것이 원인이 되었다.)

팔로군은 군복과 군모의 색은 함께 황토색.하지만 홍군시대의 남색의 군복의 군인도 많았다. 왼팔에 「8로」라고 쓰여진 완장을 붙인다. 군화는 신지않고 포화나 짚신을 신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팔로군은 점령지에서 어느 정도의 소지를 소유한 농민을 「부농」이라고 판단해 인민재판에 걸쳐 처형했다. 이것은 팔로군의 힘을 과시해 주민에게 공포심을 안게 하기 위한 목표였고 팔로군에 대한 부정적 측면으로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잔학행위는 지역 내의 빈곤한 자의 질투심, 복수심을 채우는 일로도 판단되어,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공헌한 면도 있다.

7.3대 기율과 8항주의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에는 「3대 기율 8항주의」(三大纪律八项注意)라고 하는 규칙이 있었다. 이는 팔로군이 대중에게 지지를 받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으며, 후에 한국전쟁 당시 중국에서 파견된 인민지원군에게도 나타났다. 이 규율을 어긴 팔로군은 중형을 받게 되었고 심하면 총살형에 처해졌다. 팔로군은 장개석 휘하의 국민혁명군과는 반대로 이 엄격한 군대 교조로 인해 게릴라 전으로 큰 전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1)3대 기율[三大規律]

1.모든 행동은 명령에 따라야한다

2.인민의 바늘 하나, 실 한 오라기도 공짜로 취하지 않는다.

3.모든 전리품은 공유하여야 한다.

(2)8항주의[八項主義]

1.병사를 구타하거나 욕하지 않고 불필요한 상명하복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사람은 때리거나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2.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3.공평하게 사고 판다[매매는 공정하게 하여야 한다]

4.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

5.말할 때는 온화하게 한다[말을 부드럽게 하여야 한다]

6.빌린 것은 반드시 되돌려 준다.

7.파손한 물건은 반드시 배상한다.

8.농작물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8.소멸

1947년에 제2차 국공합작이 국민당군의 선공으로 붕괴하면서 팔로군은 신사군과 함께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편입되었다.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국 공산당의 당군이며,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규군이다.

*신사군 사건(新四軍事件) 또는 원난 사건(皖南事变)은 중일 전쟁중인 1941년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이 공동 항일 전선을 펼 당시 일어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고 이론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사건을 두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가들의 평가가 나뉘는데 중화민국 쪽에서는 이를 공산군의 불복종에 대한 징벌이라고 보는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쪽에서는 국민당의 배신행위라고 보고 있다.

제2차 국공 합작이후 양쯔 강 남쪽에서는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신사군이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산군과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장제스는 점차 공산군과의 협력을 꺼리게 되었고 1940년 12월 신사군을 안후이 성 및 저장 성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은 이에 동의하고 병력을 양쯔 강 이북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신사군 공산당 장교들은 이 명령에 반발했으나 결국 이동에 합의했다.

예팅이 이끄는 신사군의 정예 병력 9,000명은 3개 방면으로 나눠 양쯔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고 1월 5일 도하를 마치고 집결하였다. 이때 갑자기 8만명의 국민혁명군이 나타나 이들을 포위하고 다음날 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숫적 열세에 밀려 신사군은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고 부대장 예팅은 부하를 살리기 위해 1월 13일 국민당군측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예팅이 협상하러 오자 갑자기 국민당측은 그를 체포해 버렸고 결국 신사군의 부부대장도 전사하고 2,000명의 병사만 살아서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1월 17일 장제스는 신사군의 해체를 명령했고 예팅은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그러나 1월 20일 옌안의 공산당 군사위원회는 부대를 재건하기로 결정하고 천이가 새로운 부대장이 되었고 류샤오치는 정치위원이 되었다. 신사군은 7개 사단 및 1개 여단으로 구성된 9만병력의 규모로 재편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실상 제2차 국공 합작은 결렬되었고 국민당은 항일전선을 깨뜨렸다는 비난에 당면한 반면 공산당은 항일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비록 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인해 양쯔강 남쪽의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인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신사군(新四軍) 깃발

1938년 1월 6일 신사군(新四軍)이 난창(南昌)에서 정식으로 구성됐다.

신사군은 1934년 10월 홍군의 주력이 장정(長征)을 시작, 서천북상(西遷北上)한 뒤 화중(華中), 화난(華南)에 남아서 유격전을 계속해 온 홍군 잔존 부대로 구성되었다.

신사군이란 명칭은 2차 국공합작 후 국민당 정부가 1937년 10월 이들 잔존 게릴라 부대의 재편을 허용하고 이 부대에 '국민혁명 신편 제4군(國民革命新編第四軍)'이란 부대명칭을 붙인데서 비롯됐다.

군장(軍長)에 예팅(葉挺), 부군장에 샹잉(項英), 참모장에 장윈이(張雲逸), 부참모장에 저우쯔쿤(周子昆), 정치부 주임 위안궈핑(袁國平)이 임명됐으며 4개 지대를 관할했다.

3년 뒤인 1941년 1월 6일환난(皖南), 즉 안후이(安徽)성 남부에서 활동 중이던 신사군 9,000명이 장제스(蔣介石)의 명령을 받고 양쯔강(揚子江) 이북으로 이동하던 도중, 국민당 군 7개 사단 8만 명의 포위공격을 받는다.

2,000명만이 포위망을 돌파했으며 부군장 샹잉과 7,000여 명은 전사하고 군장 예팅도 포로가 되었다. 이는 공산군 세력이 강화되고 있는데 대한 국민당군의 초조감의 발로로 ‘환난사변(皖南事變)’으로 불린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적인 일본군을 앞두고 벌인 동족상잔에 대해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를 빗대 ‘千古奇冤 江南一葉; 同室操戈 相煎何急’ 이라는 시를 신화일보(新華日報)에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은 천이(陳毅)를 대리군장으로, 류샤오치(劉少奇)를 정치위원으로. 장윈이(張雲逸)을 부군장으로 삼아 신사군 재건에 나섰으며 한층 강한 군대로 발전했다. 항일전쟁 후 내전 당시 화둥(華東)야전군으로 활동했다.

 

*미군시찰단 연안(延安) 방문

1944년 7월 22일 미군 대령을 단장으로 한 미군 시찰단이 주중 미군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홍군의 최고 지도부가 위치한 옌안(延安)을 방문했다. 8월 7일에는 2차 시찰단이 비행기 편으로 옌안에 왔다.

이들의 시찰 목적은 전선 후방 지역에서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의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젠잉(葉劍英)과 양상쿤(楊尙昆)의 영접을 받은 이들은 마오쩌둥(毛澤東),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만났으며 펑더화이(彭德懷)와 천이(陳毅) 등으로부터 8로군과 신4군의 전투 활약상황을 브리핑 받았다이들 시찰단은 옌안 외에 진찰기(晋察冀)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허베이성 일대), 진수(晋綏) 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네이멍구 일대) 등 홍군의 항일 근거지 등을 시찰했다.

이들 시찰단은 시찰을 마치고 미국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 공산당과 그 무장역량을 중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이들 미군 시찰단을 맞아 옌안에서 발행되던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우방 미국 군사사절단 환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시찰단이 미국에게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호의적 평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중 미군 총사령부의 군사시찰단 파견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움직임과 연계된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미국은 중국에서의 제2전선 역량 강화를 위해 모든 중국 군대의 통합을 희망했다.

헨리 월레스(Henry Wallace) 미국 부통령은 1944년 6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개선하여 항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7월 초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를 포함한 전 중국군 지휘자로 스틸웰(Stilwell) 장군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 초기 한국군의 작전권을 요구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협정을 통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렇게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루스벨트의 이 제안은 필연적으로 공산당이 참여한 중국의 연합정부 창설 제안으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이 일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미군 시찰단의 옌안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루스벨트는 결국 장제스와 심한 불화를 보였던 스틸웰을 소환하고 웨드마이어(Wedmeyer)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 공산당을 포함한 연합정부를 제안한 가우스(Gauss) 대사도 이해 11월 30일 스틸웰의 소환을 주장했던 패트릭 헐리(Patrick Hurley)로 교체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시도가 좌절된 셈이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은 유럽에서 처칠이 추구한 유고 정책 을 본 뜬 것이다. 유고에서는 나치 침공 후 왕정 세력의 게릴라와 티토가 이끄는 공산 세력 게릴라가 별도로 활동했는데 처칠은 티토의 게릴라가 적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역할을 하자 그들이 공산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햇다.

이 결과 2차 대전 기간 티토의 게릴라는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티토의 게릴라 세력은 종전 후 벌어진 유고 내전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왕정 세력을 격파하고 자체적으로 유고를 공산화하였다.

1940년 8월 20일부터 그해 12월 5일 까지 8로군 부총사령관 펑더화이가 지휘한 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미국에게 영국이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의 공산 게릴라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했던 것처럼 미국에게 마오쩌둥의 홍군의 전략적 가치를 괄목상대하게 만들엇다.

스틸웰 등 중국 주둔 미국 지휘부는 국민당 군대의 만연한 부패와 이에 따른 군사적 무능과 비효율에 불만을 품고 처칠이 유고에서 취했던 것처럼 공산 게릴라 세력을 적극 지원, 대일본 제2전선을 구축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 민주당 행정부는 2차 대전 기간 중국의 유고화를 시도하지 못했으나 이러한 기조는 루스벨트 사후 트루먼 행정부에 이어져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는 것을 방치햇고 중국 공산화 이후에도 애치슨 라인 발표 등 중국 유고화를 부단히 추구했다. 이런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무산시킨 것은 한국전(6.25 사변) 발발이었으며이 전략은 1971년 공화당 닉슨행정부의 키신저가 부활시킬 때까지 동면해야했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한반도 문제 해결 위한 4자 회담과 남북교차 승인, 유엔동시가입 등을 제의했다(1976).

 

*1950년 = =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언급했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이후 이를 '애치슨 라인'으로 지칭됏다)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의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이와는 무관한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의 전통적인 대아시아 군사전략이었던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만 섬으로 쫓겨 온 국민 정부를 보호하지않겠다는 것이며 이는 '마오의 공산 정권'이 유럽에서의'티토의 유고'처럼 소련의팽창주의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엇다.

'애치슨 국무부' 내의 친 중국 공산당 성향의 이른바 '스틸웰 그룹'이 입안한 이대 중국 전략은 한국전 발발로 파탄이났다.

중국 대륙의 변화에 미국이 '애치슨 라인'으로 '장군'하자 그 바로 한 달 이틀 뒤에 ' 스탈린의소련'이 '중소우호동맹 상호 원조조약'이라고 '멍군' 하며 응수햇다. 이는 한반도에서 동서 진영의 제로섬 게임을 불러일으키고 말앗다.

'애치슨라인'의 '중국 대륙 구상'은 그러나 죽지 않앗을 뿐만 아니라 사라지지도 않았다. 1972년 2월 리처드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중소 미중화해로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났다.
*1979년 = 덩샤오핑(鄧小平)이 ‘4항 기본원칙’을 발표했다. 4대 현대화를 추진함에 있어 견지되어야 할 4가지 원칙을 밝힌 것으로 이는 덩의 대담한 개혁, 개방 정책 추진에 대한 반대파의 공세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의 길 견지;
2. 무산계급 독재 견지;
3. 공산당의 영도 견지;
4.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毛澤東)사상 견지.

 

 

                                                       덩샤오핑은 "울때까지 기다려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형 인물

9월 12일은 린뱌오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다. 1948년 9월 12일은 그의 지휘 아래 국공내전 3대 전투의 하나이자 첫 번째 승리인 랴오선 전투가 개시된 날이고 그로부터 꼭 23 년뒤인 1971년 9월 12일은 그의 마쩌둥에 대한 쿠데타 기도가 실패로 긑나 가족과 함께 항공 편으로 소련으로 망명하다가 몽골 상공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한 날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11년 뒤 바로 같은 날인 1982년 9월 12일 중국 공산당 12기 1중전회에서 당 주석제가 폐지됐다. 이와 함께당 주석에서 밀려나 부주서으로 있던 화궈펑(華國鋒)이 정치국에서 축출되고 덩샤오핑(鄧小平)이 군사위 주석으로, 당 주석으로 있던 후야오방(胡耀邦)이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당주석제 폐지에 따라 당 총서기가 중국 공산당의 대표, 즉 당수가 됐다. 그러나 당의 실질적 최고 지도자는 당 군사위 주석을 맡은 덩샤오핑이다.

화궈펑은 정계에서 완전 축출되지 않고 당 중앙위 위원 자리는 유지햇다.

당 총서기와 군사위 주석을 각기 다른 사람이 따로 맡는 최고 권력의 명실(名實) 분ㅇ리의 '2원 체제'는 1989년 11월에 그보다 5개월 전 천안문 사태로 총서기에 선출된 장쩌민이 덩샤오핑으로부터 군사위 주석 직을 인계 받으면서 종식됐다. 2002년~2004년 장쩌민 군사위 주석-후진타오 총서기 2원 체제가 잠시 부활햇으나 다시 한 사람이 총서기와 군사위 주석을 함께 보유하는 1원 체제로 돌아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잇다.

덩샤오핑이 군사위 주석 직을 맡아 최고 실력자가 된 이날2인자로서 1인자 마오쩌둥을 살해하고 스스로 1인자가 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소련 망명 시도 중 추락사한 린뱌오의 11주기엿다.

1인자를 꿈꾸었으나 실패한 린뱌오와 성공한 덩샤오핑을 일본의 역사적 인물과 비유한다면 린뱌오가 '울지 않는 종달새는 죽여 버려라'의 '오다 노부나가' 형 인물이라면 덩샤오핑은 '울때까지 기다려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형 인물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천하 통일 직전에 측근에 기습으로 할복자살했고 도쿠가와이에야스는 오다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면종 복배하며 때를 기다리다 200년 동안 지속되는 도쿠가와 바쿠후 시대를 열엇다. 린뱌오는 다름아닌 친딸의 밀고로 사실상 암살 당한 셈이었고 때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 시대'라는 마오 시대와는완전히 구별되는 그리고 지속 가능성이 있는 시대를 열었다. 9월 12일은 공통정으로 1인자가 되려는 강한 야심을 가슴에 품고 있엇던 두 2인자의 흉일이자 길일이엇더다. 또한 전자의 실패는 후자의 성공의 반면 교사임과 동시에 길을 터주는 역할을 했다.
린뱌오의 사망은 군부 통제의 공백을 불러 일으켜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하여 유배되어 있던 덩샤오핑에게 복권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린뱌오 사망과 관련, 중국 당국의 공식적인 설명과는 달리 린뱌오 일행이 베이징(北京)에서 살해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린뱌오의 군부 측근으로 그의사망 후 숙청됏던추후이줘(邱會作은 '린뱌오 사건' 40주년 이던 2011년 '린뱌오 쿠데타 기도 사건'은 조작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
린뱌오는 각급 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50만 명의 홍위병들 앞에서 처음으로 "위대한 인도자, 위대한 영수, 위대한 원수, 위대한 조타수 마오주석(偉大的導師,偉大的領袖,偉大的統帥,偉大的舵手毛主席)"이라는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 송사를 낭독했다.

린뱌오는 중일 전쟁 당시 국민당의 국민정부 군의 쑨리런(孫立人)과 함게 사단급 이상 규모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패배시킨 중국인 장군으로 유명하다.
린뱌오는 일본 패망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공산군 내전 승리의결정적 전투인 3대 전투 중 첫 번째인 랴오선 전투를 지휘했고 핑진 전투에서도 중심적 역할을했다.
린뱌오는 국공내전 말기 인민해방군 재편성 과정에서 제4야전사 사령원이 되었으며 문화 혁명 기간 중 제4야전사 출신들이 군부 요직을 장악햇다. 이것이 제2야전사 정치위원이었던 덩샤오핑이 그의 사망후 정치적으로 부활한 배경이다.

린뱌오는 공산 정권 수립 후 계급제도 도입 때 10대 원수의 한 명이 되었다.
린뱌오는 중국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군사 전략가이기는 햇으나 정치적 측면에서 마오쩌둥의 한 수 아래엿다. 그의 정치적 책략은 마오쩌둥과 비교하면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었던 셈이다. 마오는 한국 전 개입을 결정한 뒤 그를 북한 지원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햇으나 그가 병을 핑계로 회피하는 바람에 펑더화이로 대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펑더화이는 미군과의 전투를 통해 현대전을 뼈저리게 경험한 한국전 참전 이후 마오의 인민 중시 게릴라 전술 전략에서 이탈햇고 린뱌오는 마오의 군사 전략을 적극적으로 지지, 정치적 입지가 극과 극으로 갈렷다. 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린뱌오 역시 결국 마오의 정치적 버린카드가 되어 펑더화의 전철을 밟았다.

                             린뱌오가 '울지 않는 종달새는 죽여 버려라'의 '오다 노부나가' 형 인물  린뱌오(임표) 시체 모습

 

                                                  홍위병들과 함께 한 당시 중공의 실세. 린뱌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린뱌오 사망 사건 5년 전인 1966년 8월 31일 린뱌오가 천안문 광장에서 개최된 제2차 홍위병 사열식에서 마오쩌둥이 지켜보는 가운데 축사를 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장칭江淸, 세 번째가 저우언라이周恩來이다.
 

 

동북아시아(극동지역)은 한반도와 중국 동북3성, 러시아 극동연방관구, 일본등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의 직접적 위협은 동북아시아(극동지역)이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투항 선언에 뒤이어 국공 내전이 개시되자 국민당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을뿐만 아니라 미국의 원조로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산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본부가 있던 옌안마저 함락되었다. 린뱌오는 친소성향으로 소비에트 홍군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된 둥베이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맡아 1948년 11월 만주 지역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국민당군을 격파하였다. 린뱌오의 승리를 기점으로 전세는 공산당쪽으로 기울었고, 린뱌오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된 자신의 부대(총병력 백만)를 이끌고 계속 남하하여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창 강을 도하하여 1950년까지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 성까지 도달하였다.[린뱌오는 1938년 3월, 전리품으로 얻은 일본군 망토를 입고 승마 중 일본군으로 오인되어 아군에게 오인 사격을 받아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이후 옌안으로 후송되었다가 후에 소련 모스크바까지 가서 1942년까지 요양하였다. 이때 신경의 부상으로 물과 바람을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산수화까지 보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스탈린이 가장 흠모한 중국 군인이 린뱌오었다]

 

East Asia China

                                                                                동아시아 국가 중국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후이족(회족, 신강),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이다 

오족공화(五族共和)는 중화민국 성립 초기의 정치 슬로건이다. 이 원칙은 중국에 있는 5대 민족과 관련이 있다. 당시에 사용된 국기인 오색기(五色旗)에서 빨간색은 한족, 노란색은 만주족, 파란색 몽골족, 하얀색은 후이족(회족), 검정은 티베트족을 뜻한다. 여기서 회족은 무슬림으로, 위구르족을 포함한다. 청나라 때 신장 지역은 회강(回疆)이라고 불렀다. 오색기는 1928년 북양 정부가 무너지고 중국 국민당(한족)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사용되지 않고 있다.

중국은 통일된 다민족 국가이며 또한 세계적으로 인구가 제일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에는 13억 인구, 56개 민족이 있다.

 중국 민족에는 한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위글족, 묘족, 이족, 쫭족, 부이족, 조선족, 만족, 뚱족, 요족, 바이족, 투쟈족, 하니족, 까자흐족, 따이족, 리족, 리수족, 와족, 써족, 고산족, 라후족, 수이족, 둥샹족, 나시족, 징퍼족, 끼르끼즈족, 투족, 다고르족, 머로족, 챵족, 부랑족, 쌀라족, 모난족, 거로족, 시버족, 아창족, 프미족, 따쥐크족, 누족, 우즈베크족, 러시아족, 어윈커족, 더앙족, 보안족, 위구족, 징족, 따따르족, 두룽족, 오로죤족, 허저족, 먼바족, 뤄바족, 지노족이 망라된다. 이밖에 중국에는 아직 민족이 식별되지 않은 적은 인구가 있다.

                                                              Manchukuo[滿州國, 1932-1945]:동북3성(만주)

                                              Měngjiāng Liánhé Zìzhì Zhèngfǔ(蒙疆聯合自治政府, 1937-1945):내몽골

                                                                         East Asia China[2016]

 

                                                  Shinjang Uyghur aptonom rayoni (新疆維吾爾自治區):신강

1933년 11월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이 처음으로 건국되었으나 3개월 만에 소멸되었고, 1944년 다시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에 병합되었고, 1955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되었다

 

                                                    Bod-rang-skyong-ljongs( 西藏自治區):티베트(티벳)

1912년부터 1950년까지 현재의 티베트 자치구(우창 지방과 서부 캄 지방)는 달라이 라마가 수장으로 있는 티베트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Northeast Asia[Far East, 2016] 

 

 

 

 

북한 탄도미사일 1천여 기…한국 "킬체인·KAMD·사드로 대응"

“우리 군이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킬 체인과 KAMD를 통합적으로 운용해서 대비를 해 나가고 있고 앞으로도 해 나갈 것입니다. ‘킬 체인’은 북한 미사일의 발사 징후가 보일 때 육상에 있는 미사일을 사전에 폭파하는 사전공격 개념이며, KAMD는 북한이 쏜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방어 차원의 무기체계라고 설명했습니다"

한국 군 당국이 발간한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이 현재 작전 배치해 보유하고 있는 탄도미사일은 1천여 기.

400여 기에 이르는 사거리 3000km의 단거리 스커드 미사일과 사거리 1천300km의 중거리 노동미사일 300여 기, 그리고 사거리 3천500km의 무수단 미사일과 KN-08 등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 등입니다.

이 가운데 한국을 겨냥한 단거리 스커드 미사일은 비무장지대 DMZ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안쪽에 배치돼 있으며 한국 전역이 타격권에 들어갑니다.

중거리 노동미사일은 통상 일본의 미군기지를 겨냥한 무기로 인식됐지만 정상보다 각도를 높이거나 연료를 적게 주입해 발사하면 한국 내 목표도 타격할 수 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은 독일에서 '타우루스' 공지대미사일을 수입하여 올해안으로 배치를 완성할 계획입니다.

'타우루스' 미사일은 길이가 5미터, 직경 1미터, 무게 1400킬로그램으로 사거리가 500킬로미터에 달하며 저공비행과 스텔스기능이 있고 한국 미사일방어체계 '킬 체인(Kill chain)의 주요 구성부분입니다

 

북한은 올해 들어 300mm 방사포를 비롯해 신형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과 무수단 계열 중거리 미사일,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SLBM, 그리고 최근에는 스커드와 노동 계열 미사일까지 다양한 탄도미사일을 동해와 서해상으로 지속적으로 발사하고 있습니다.

SLBM과 같은 기술력 개선을 위한 시험발사도 있지만 미국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드의 주한미군 배치 확정에 대응한 무력시위 차원의 도발도 있습니다.

한국 군 당국이 발간한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이 현재 작전 배치해 보유하고 있는 탄도미사일은 1천여 기.

400여 기에 이르는 사거리 3000km의 단거리 스커드 미사일과 사거리 1천300km의 중거리 노동미사일 300여 기, 그리고 사거리 3천500km의 무수단 미사일과 KN-08 등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 등입니다.

이 가운데 한국을 겨냥한 단거리 스커드 미사일은 비무장지대 DMZ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안쪽에 배치돼 있으며 한국 전역이 타격권에 들어갑니다.

중거리 노동미사일은 통상 일본의 미군기지를 겨냥한 무기로 인식됐지만 정상보다 각도를 높이거나 연료를 적게 주입해 발사하면 한국 내 목표도 타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19일 북한이 발사한 세 발의 탄도미사일 가운데 노동미사일 한 발은 의도적으로 고각으로 발사해 사거리를 줄였을 가능성이 제기됐습니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김동엽 교수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동엽 교수/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지난번에 화성-10호를 그렇게 쐈고 이 때까지 쏜 것들과 거의 동일하게 쐈어요. 한 발 노동 미사일은 500-600km도 날아간 것 같은데 무서운 건 고각발사를 했다는 거죠.”

한국 군 당국은 북한의 탄도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미사일 발사 징후가 보이면 선제공격 한다는 개념의 ‘킬 체인’과 발사된 북한 미사일을 요격하는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KAMD를 2020년대 중반까지 구축할 방침입니다.

한국 국방부 문상균 대변인의 지난 4월 25일 브리핑 내용입니다.

[녹취: 문상균 대변인/ 한국 국방부] “우리 군이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킬 체인과 KAMD를 통합적으로 운용해서 대비를 해 나가고 있고 앞으로도 해 나갈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이춘근 연구위원은 ‘킬 체인’은 북한 미사일의 발사 징후가 보일 때 육상에 있는 미사일을 사전에 폭파하는 사전공격 개념이며, KAMD는 북한이 쏜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방어 차원의 무기체계라고 설명했습니다.

한국 군 당국은 군사정찰 위성과 고고도 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 등을 통해 북한 동향을 감시하면서 장거리 공대지 유도탄 ‘타우러스’ 등으로 정밀타격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최근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 배치가 확정된 사드 역시 북한 미사일 방어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한국 군 당국은 북한이 한국의 수도권 이남 지역으로 스커드나 노동미사일을 발사하면 한국 전역에 배치된 패트리엇과 사드 등 다층 방어체제로 방어한다는 계획입니다.

한국의 국책연구기관인 국방연구원 이호령 박사의 설명입니다.

[녹취: 이호령 연구위원/ 한국 국방연구원] “실질적으로는 노동미사일과 무수단 미사일 이런 것도 고각으로 쏘면 다 한국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것으로도 사드가 요격할 수 있는 기능이 다 있는 거죠.”

이 박사는 사드가 한국에 배치되면 북한으로 하여금 미사일 발사를 주저하도록 만드는 억지 효과도 상당하다고 평가했습니다.

한국 군 당국은 내년 말까지 성주 지역에 사드 배치를 완료하고 오는 2018년에는 수도권에 신형 패트리엇-3를 증강 배치해 방어체계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북한정부 탄도 미사일 배치도

 

 

                                                                                                     탄도 미사일

                                                                                                               인공위성

미사일 방어 전투는 미사일 탄두를 식별하고 그 미사일 탄두를 파괴하기 위한  한 순간의 전쟁이다. 한국도 나토나 이스라엘처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DD) 배치로 탄도 미사일은 물론이고 지구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까지 요격할 수 있는 미사일 방어체제(MD)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재래식 핵무기 등 쓸모 없는 무기도 많다
사드배치로 북한도 대화의 장으로 나올 것이다

 

러시아군 2인자인 퇴역 장교 레오니드 이바쇼프 지정학 문제 아카데미 소장은  "한국 사드는 공중방어시스템이나 방어막 체제들 가운데 한 요소로 볼 수 있지만 향후 10년 간 성능을 높이고, 더욱 효과적인 기능을 갖춘 이지스 시스템(ACS)처럼 운용될 수 있다"며 "동남아시아에는 현재 10여 척의 이지스 구축함이 있고 일본에 배치한 장비들은 향후 한국의 사드와 통합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사드의 X-레이다가 2000km까지 탐지가 가능하다

아시아 태평양 연합군 창설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한국등이 북한 핵무기 포기와 한반도 비핵화 준수에 노력해야 한다

                                    지난달 29일 미국 우주비행사 스콧 켈리 씨(오른쪽)가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임무를 마치고 후임자와 악수하고 있다

국제우주정거장에는 보통 6명이 체류하는데요. 미국과 러시아가 각각 2명, 3명씩 배정하고 나머지 국가에서 1명씩 올려 보냅니다. 승무원 교대는 보통 1년에 4번 정도 진행되는데요. 한 번 올라가면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체류하게 되죠, 하지만 최근에는 1년 체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 변동 사항이 많다고 합니다.

 

미 북부사령관 "북 핵미사일 미 본토 도달 가능"

"현재 북한 핵무기 수준 아직은 핵탄두 개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핵폭탄 15-20개 정도가 전부다. 미사일의 경우 750kg 탄두로 최대 4,000km까지 날아가는 중거리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핵확산금지조약 구축국이자 기탁국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의 지위와 양립할 수 없다"

 

북한이 핵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공격할 능력이 있다고 미군 고위 지휘관이 밝혔습니다. 하지만 미군은 북한의 핵미사일을 충분히 요격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빌 고트니 미 북부 사령관 겸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 사령관

빌 고트니 미 북부 사령관 겸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NORAD) 사령관은 7일 미국 연구기관인 애틀랜틱 카운슬 연설을 통해 북한의 미사일 능력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녹취: 고트니 사령관] "I agree with the intel community that we assess that they have the ability..."

고트니 사령관은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해서 로켓에 실어 미국 본토까지 보낼 수 있다는 미국 정보당국의 평가에 동의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미사일 방어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이러한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덧붙였습니다.

고트니 사령관은 그러나 미군이 핵미사일을 충분히 방어할 수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고트니 사령관] "We’re ready for him, and we’re ready 24 hours a day if he should be dumb..."

고트니 사령관은 “김정은이 미국을 공격하는 어리석은 짓을 해도 우리는 24시간 대응할 준비가 됐다”며 북한의 미사일을 격추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트니 사령관은 아울러 미군이 현재 미사일 방어체계를 현대화하는 데 투자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미사일 발사 가능성은 한층 효과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신형 센서와 레이더를 확보하고 미사일 방어에 드는 비용을 줄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앞서 미군 고위 지휘관들은 북한이 핵미사일을 미국 본토까지 쏠 수 있다고 거듭 밝혔었습니다.

미군 합참의장 지명자인 조셉 던포드 해병대사령관은 7월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북한이 "미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틴 뎀프시 미 합참의장도 지난 7월 ‘2015 군사전략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한 불법 국가이며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VOA 뉴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는 재래식 무기 핵폭탄으로 핵무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중국정부 대륙간 탄도 미사일 둥펑(DF)-5B 신형 핵 미사일(nuclear missiles)[사진]

"현재 북한 핵무기 수준 아직은 핵탄두 개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핵폭탄 15-20개 정도가 전부다. 미사일의 경우 750kg 탄두로 최대 4,000km까지 날아가는 중거리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이외 최근 잠수함용 탄도미사일이 개발됐다. 잠수함도 1척 제작된 가운데 현재 또 한 척이 제작되고 있다. 2020년도까지 북한은 디젤 잠수함 2척 제작을 완수할 계획이다. 사격 거리 3천 미터에 각각 미사일 2개씩 장착될 예정이다. 이 미사일용 핵탄두 개발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최소 2020년도까지 핵실험 1개가 수행되어야 한다. 이 실험이 있기 전까지 북한의 핵탄두 개발을 예기하는건 시기상조다. 이 작업이 완수되면 잠수함은 1차 공격용으로 이용될 것이다. 그러나, 미사일 모두 합해봐야 전부 4개인 잠수함 2척으론 한국 해군의 대잠수부대의 무기력을 고려할 때 공격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외, 지상 포격 이동 시설에도 문제가 있다. 주로 출발 직전 급유가 필요한 액체 미사일이 이용되기 때문에 한국군의 표적이 되기 쉽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북한의 핵공격 위험성은 보이지 않는다."[블라디미르 예브세예프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군사전문가 견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말하기는 시기상조]

 

                                                            대륙간 탄도 미사일 둥펑(DF)-5B 신형 핵 미사일(nuclear missiles)

핵탄두 3개 이상을 동시에 장착한 채 미국 본토까지 타격할 수 있는 둥펑-5B (DF-5B)도 열병식에 처음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인 둥펑-5B는 최대 사거리가 1만5천 km에 달해 미국 전역을 사정권으로 하고 있다

 

북한 좌익군정은 함북 길주군 풍계리 한 지역 높은 산(高山) 지하핵실험 장소에서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에 성공했으며 동일 장소에서 2009년 5월 25일 2차 핵실험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동일 장소에서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했다

 북한정부는 공식적 입장에서 "이전과 달리 폭발력이 크면서도 소형화, 경량화된 원자탄을 사용해 높은 수준에서 안전하고 완벽하게 진행된 이번 핵실험"이라고 표현했다

 

-북한정부 3차 핵실험 장소로 풍계리[Pungge-Yok, 함북 길주군 풍계리,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과 2009년 5월 25일 2차 핵실험 장소]와 용덕동[Youngdoktong, 고폭실험은 영변에서 북서쪽 40㎞ 지점에 위치한 북한 평안북도 구성시 용덕동에서 실시되었다고 미국CIA정보 바탕]으로 파악해오고 있다

장거리 탄도 미사일 실전 배치지역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Musuda-Ri], 함경남도 호천군 상남리[Sangnam-Ri], 양강도 김형직군 영저리[Yong Jo Ri]등이다

 

북한정부도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군정분리주의 좌익군정[국방위원회와 인민군총참모부, 지도자와 군벌]에서  연합군(연방군) 군정통합주의 문민정부[인민정부, 주석과 수상, 내각(인민무력부장)]으로 권력변경이 돼야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노선 포기와 평민층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다.


북한 주민은 대학진학 상류층(30%이내)과 의무교육 중졸 평민층(70%이상)으로 구분 돼 있다  북한 주민(평민) 중 33% 배고픈 사람들(영양실조와 기아위기 계층)이다

북한정부 위협은 미국이나 한국정부(남한정부) 보다는 평민층 33%이상 식량난과 김일성 직계 세습제 좌익군정 체제위협 등 내부위기이다

 

 

항공모 킬러로 불리는 준중거리 탄도미사일 (MRBM) 둥펑(東風)-21(DF-21D) 재래식 미사일

                                  항공모 킬러로 불리는 준중거리 탄도미사일 (MRBM) 둥펑(東風)-21(DF-21D) 재래식 미사일(사진)

준중거리 탄도미사일 (MRBM)인 둥펑-21 (DF-21) 역시 미 해군과 일본 등을 겨냥해 개발한 무기로 알려져 있다.

‘항공모함 킬러’로 불리는 이 미사일은 최대 사거리가 1천450km 로 중국 해역에 가깝게 배치된 미군 전력을 언제든 타격할 수 있음을 과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 인민 항일 전쟁 · 세계 반파시즘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대회가 9월 3일에 베이징(북경)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제 17부대 (대함 탄도 미사일 부대)가 등장 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부대는 전략 공격 부대에 속한 16 발의 DF-21D 탄도 미사일을 두 군용 차량 "용사(猛士)"에 의해 구성된다.

열병식 등장한 DF-21D 미사일을 보고 미군에 의해 "해전(海戰)" 라고 되어 있다. 외신 기사에 따르면 중국의 DF-21D 재래식 미사일은 이동 중인 항공 모함을 공격 할 수 있고, 향후 약 10년간에 걸쳐 미국 항공 모함의 실질적인 위협이 될 것이다

 

     

      

                

 

                                                             중거리 탄도미사일 (IRBM) 둥펑-26 (DF-26) 재래식 미사일(사진)

중거리 탄도미사일 (IRBM)인 둥펑-26은 최대 사거리가 4천 km로 태평양 지역의 미 핵심 전략기지인 괌을 타격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둥펑-26은 ‘괌 킬러’로 불리고 있으며 이동식 발사대까지 갖추고 있어 사전탐지가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대 사거리가 1700㎞인 둥펑-21D는 세계 유일의 중거리 지대함 미사일로, 미국 항공모함을 겨냥해 만든 ‘항공모함 킬러’다. 둥펑-21D의 파생종인 둥펑-26은 사거리가 3500㎞에 달하고 미군의 전략기지인 괌을 타격할 수 있어 ‘괌 킬러’라는 별명이 붙었다. 모두 미국 함정을 염두에 둔 미사일들이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 둥펑(DF)-5B 신형 핵 미사일(nuclear missiles)

   

 

 

 

                                           대륙간 탄도 미사일 둥펑(DF)-5B 신형 핵 미사일(nuclear missiles)

핵탄두 3개 이상을 동시에 장착한 채 미국 본토까지 타격할 수 있는 둥펑-5B (DF-5B)도 열병식에 처음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인 둥펑-5B는 최대 사거리가 1만5천 km에 달해 미국 전역을 사정권으로 하고 있다

 

대국(大國)의 무기, DF-5DB 대륙간 탄도 미사일

 

 

 

 

 

 

 

 

 

 

 

DF-5B nuclear missiles are displayed in a parade in Beijing, capital of China, Sept. 3, 2015. China on Thursday held commemoration activities, including a grand military parade, to mark the 70th anniversary of the victory of the Chinese People's War of Resistance against Japanese Aggression and the World Anti-Fascist War[DF-5B nuclear missiles:DF-5B 핵 미사일]

 

중국 인민 항일 전쟁 · 세계 반파시즘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대회가 9월 3일에 베이징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사진은 제 21부대 (DF-5 대륙간 탄도 미사일 부대). 이 부대는 전략 공격 부대에 속해 4발의 DF-5 미사일이 두 군용 차량 "용사(猛士)"에 의해 구성된다. DF-5 미사일은 대형을 위한 두 가지로 나누어 수송된다. 2 대의 "용사(猛士)"가 선두를 달리고 부대를 이끌었다.

DF-5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중국이 개발한 1 세대 전략 미사일로 수백 만톤의 열 핵탄두를 1 만 ㎞ 이상 떨어진 지점에 발사한다. 이 미사일은 효과적인 전략적 억지력을 형성하고, 중국의 국가 안전의 초석이 되었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 둥펑(DF)-31A 신형 핵 미사일(nuclear missiles)

                       

 

 

 

                        미국 본토 서부지역 사거리를 두고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 둥펑(DF)-31A 신형 핵 미사일(nuclear missiles)

DF-31A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DF-31 미사일의 개량 판으로 사거리가 연장되어 미국 본토 서부지역 사거리를 두고 있으며, 기동성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다.

 

구소련 원자 핵 폭탄과 북한 핵탄두 기폭장치 추정 물체

사진 위쪽 소련이 1961년에 노바 야제 믈랴 제도에서 실시한 핵 실험(원자 핵폭탄)과 사진 아래쪽 북한 핵탄두 기폭장치 추정 물체

 

북한의 방위산업은 현재 탄도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할 능력이 없다고 전문가들이 리아노보스티 통신의 질문에 이같이 밝혔다.

북한이 탄도 미사일용 핵탄두를 소형화하고 표준화하는 과제를 실현했다는 북한 김정은의 말을 인용하여 수요일 보도한 연합뉴스에 대해 전문가들이 이같이 논평했다.

 

알렉세이 페넨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국제안보문제 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북한 수령의 최근 말은 의도적 선언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지적했다: "기술적 관점에서 북한은 아직 열핵 탄두를 제조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이런 선언은 자신의 능력만 믿고 한 의도적 선언이며, 북한이 탄도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일은 5-7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외부의 도움이 있는 경우 기간 단축은 가능하다".

페넨코는 현재 기술 특성상 북한의 원자폭탄은 잘해야 1952-1953년 대의 미국 및 구소련 핵폭탄 모델에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르게이 그리냐예프 전략평가 및 진단 센터 사장이 북한 탄도 미사일 발사 시 발생할 수 있는 높은 사고 가능성을 상기시키며 이 견해에 동감을 표했다: "북한이 핵탄두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현재 수준보다 높은 기술 수준이 필요하다. 이는 북한 탄도 미사일 발사 시 높은 사고 가능성이 반증해준다. 핵무기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실제적으로 북한은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으나 미사일 핵 보호를 위해 충분한 기술에 대해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전문가는 강조한다.

 

동시에 페넨코는 김정은의 선언은 실제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제3국, 첫 번째로 중국이 이런 기술을 평양 정권에 이전했을 수 있다. 베이징 정부는 한반도의 불안정이 광범위한 반중국 연합을 만들고자 하는 미국의 계획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인다. 또한, 1950년 중반부터 북한의 모든 핵 프로그램은 중국의 핵 프로그램과 관련이 있었다"고 그는 강조한다.

 

 

                                                                                중공군 14개 사단이 압록강을 도하하고 있는 모습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압록강 도하를 시작했다. 이날 이후 중공군 18개 사단이 압록강을 통해 한반도로 진입, 한국전에 개입했다.
이 날은 38선을 돌파한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한 날이다(백선엽 장군이지휘하는 국군 1사단은 이보다 4일 전인 10월 15일 평양에 진입했다).

미국이 한국전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해군과 공군을 한국에 파병하고 제7함대를 대만 해협에 출동시키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는 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국이 대만을 침략한 것이라고 비난, 중국의 한국전 개입을 예고했었다.

중국은 한국전 개입을 ‘항미원조(抗美援朝)’로 부르고 있으며 ‘집과 국가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것(保家衛國)’으로 규정하고 있다.

                                       1951년 1월 4일 저녁,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가는 모습

 

                                        경기도 안양 수리산에서 제 3전투가 시작되었다  돌을 들고 전투에 참가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네 번째 전투에서 기관총으로 횡성을 공격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1951년 4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후퇴와 많은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군인들이 포로가 되었다 임진강을 방어하는 중국 인민 지원군(인민해방군) 모습

 

서울을 점령한 북중(朝中)연합군

                                       1950년 12월 북중(朝中)연합군 창설과 중국 인민해방군 한국전쟁 개입[김일성과 팽덕회 모습]

1951년 1월 4일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남침은 중국 동북3성 소련측 북중연합군(조선인) 주축으로 추진했고 소련은 기권, 중공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한국전쟁 이후 중공(중국 인민해방군)은 북한 인민군을 사실상 장악해왔다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38도선 이남과 서울 그리고 한강이북을 점령한 후 축배를 즐기는 모습과 한강 이남을 점령하기 위하여 정찰하는 모습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한국전쟁(6.25 동란) 중 북한을 지지하고 도왔던 국가들은 어떤 나라들입니까? 공식적으로 중국과 체코슬로바키아등 2개국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은 유엔내에서는 유엔군을 구성하여 북한의 불법적 남침을 격퇴하려고 하였습니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정식명칭)은 유엔의 투표에서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기권을 하였으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결성되어 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한국을 제외한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며 비공식적 지원국은 2개국, 의료지원국은 5개국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지원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비공식 지원국이었습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의료지원을 하였습니다(소련은 유엔에서 한국전쟁 참전 결의안 선거에서 기권을 했으며 한국전쟁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한국전쟁 이후 소련 공산당 출신 허가이나 박헌영등이 북한 권력에서 제거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중국 공산당 출신 김일성이가 북한 권력을 장악했다. 한국전쟁 때 인해전술 떼거리 중국 인민해방군 100만명이 희생했다 중국도 남북지역 구분으로 한국전쟁을 지지하는 세력은 한족보다는 소수민족으로  만주지역 다수 민족인 만주족등이 지지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한국전쟁과 한족이 전쟁에 개입할 때 독립운동과 세력확대로 새로운 군사대국으로 등장을 시도해왔다 중국지역에서 한족 이외 다른 민족의 인구 3억에서 4억 규모이다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 출신으로 중국인, 만주인, 조선인 연합군 소련 극동사령부 88특별여단 소속 대대장 출신이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만주지역과 한반도지역 점령한 후 중국인과 조선인 혼성군 88특별여단 주축으로 중국 내전 공산혁명에 주력부대었다 임표 동북3성 총사령관으로 만주국을 소련군과 함께 점령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중국내전 승리에  결정적  지위와 역할을 했으며 내전승리 이후 조선의용대 출신 지원과 함께 남침을 추진했다 임표, 팽덕회 동북 3성등이 한국전쟁 배후세력으로 활동했다 임표는 모택동 다음 2인자로 문화혁명 주도와 중미수교 이후 모택동을 암살하려다가 실패이후 소련으로 망명 도중 살해되었다 중국정부 내부 반미 친북 김일성세력이 소련군 지원세력이다 임표나 김일성등은 소련군 즉 KGB 조직원이었다 이들 소련방위대로 중국과 북한에서 활동해왔다 중국 동북 3성이 남침을 도와줄때 북한정부가 남침을 할 것으로 본다 중국과 미국 수교이후 조국을 소련으로 생각하는 소련 공산당 전위대가 대부분 제거되었다 중국이나 북한 내부 공산주의 세력 태자당 출신이 과거처럼 외국세력에 아부할 가능성도 있다)

 

*2차대전 때 소련측 연합군 만주국 무력점령과 동시에 동북3성 소련군 88특별여단(임표등 팔로군) 장악 그리고 소련군 88특별여단 조선족(한국인) 출신이 소련군과 함께 38도선 이북지역 점령--->동북3성 주력부대 임표등 중국내전 개입-->중국 모택동부대 본토 장악---->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동북 3성 조선족(한국인) 북한 인민군 주축으로 구(舊) 일본 관동군 탱크로 남침-->남한지역 남로당이 지하세력이 무장봉기와 인민위원회 구성--->일시적으로 남한 점령-->유엔 한국전쟁 개입과 유엔군 구성-->유엔군 38도선 이북지역 진격---->중화인민공화국(중공군) 개입과 38도선 이남지역 진격--->정전협정 체결

-중화민국 장개석부대는 중국 남부지역 장악과 인도, 영국군 연합으로 동남아 점령을 했지만 동북3성이 모택동부대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만주지역에서 세력 상실

-극동지역과 일본 북해지역 소련군 장악 

-이승만 토지개혁으로 평민층 지지기반 확대와 인민위원회 설치로 공개재판으로 남한지역 민간인(양민) 처형 학살, 전쟁물자 현지에서 조달하는 약탈전쟁 방식등으로 남한지역 평민층 저항으로 북한정부 전면적 전쟁이 패배했다고 평가.  유엔이 남한과 일본등 그리고 동남아 공산화(공산정부 등장)에 대한 우려  

 

*민주전선 입장에서 남북 평화통일 준비

남과 북 통일은 전쟁이 아닌 민주전선 입장에서 평화통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민주전선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세력)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세력) 연합정부입니다

민주전선 입장에서 남과 북통일은 만주지역을 중국정부 영토로 인정하며  극동지역은 러시아정부 영토로 인정합니다

만주지역이나 극동지역이 중국 소수민족 영토로 인정하여 독립국으로 등장하는 것을 사전에 와해(제거)할 수 있는 군사적 동맹을  중국, 러시아정부와 협력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정부는 북한  좌익군정과 협력하여 만주지역이나 극동지역 소수민족 독립운동 세력 등장 그리고 전쟁을 추진하는 세력 등장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공산주의 반대는 민주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입니다

 

1단계 세습제 좌익군정 타도와 사회민주주의 세력 북한권력 장악[민주전선 구축]

2단계 민주연합(민주공화국이냐 연방공화국이냐)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 연합정부 구성]

3단계 국가수립[남북한 권력분배]

동북아(아시아 태평양) 자유무역협정과 동북아(아시아 태평양) 연합군 단일군사기구 창설[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인도, 통일한국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