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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은래 前총리『자신의 유해를 화장해 조국 산하에 뿌려달라』 본문

同一介中華(中國)/북경정부-中華人民共和國(中國)

중국 주은래 前총리『자신의 유해를 화장해 조국 산하에 뿌려달라』

CIA Bear 허관(許灌) 2015. 8. 4. 11:47

 

 

 

 

 

관생(冠生) 중국 주은래 前총리 "자신의 유해를 화장해 조국 산하에 뿌려달라. 유해를 의학 해부용으로 써 달라.그리고 해부용으로 용도가 다 했을 때는 주저없이 화장하라. 화장 후 재는 보관하지 말고 고별식과 추도식도 절대 하지 말라"

 

주은래는 사망한 당시 남긴 유산은 단돈 5,000위안(약 65만원)이었고 1976년, 78세로 사망한 주은래는 유언장에 추도식을 크게 벌어지 말고 시신을 화장해 조국의 강산에 뿌려 달라고 적었다

 

주은래는 27세때 등영초여사와 결혼하여 50년을 함께 살아지만 자녀가 없었다 하지만 순국 동지들의 자식을 7명이나 양자로 키웠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붕 전 총리이다

 

중국 혁명 성지라는 연안에 가면 주은래의 옛 동굴집을 볼 수 있는데, 건너편 작은 집에서 이붕 전 총리를 키웠다고 한다

 

 

주은래의 6무(六無)

1. 사불유회(死不留灰)

죽어서 유골을 남기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주은래가 사망한 시점은 역사의 격변기였습니다.

임표(林彪) 집단이 막 숙청되고 강청(江靑)의 4인방(四人幇)이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1976년 1월 주은래가 사망하였다는 소식과 슬픈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고 TV로 간략한 고별의식이 중계되었는데, 이때 강청은 모자도 벗지 않고 고개를 숙여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었다고 합니다.

며칠 지나 화장을 하였고, 1월 15일 추도회가 끝난 후, 부인 등영초는 생전에 유골을 남기지 말고 대지에 뿌리라는 유언을 전하여, 주은래의 유골은 그가 대학을 다니고 혁명을 시작했던 천진에서 황하 입구까지 농업용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뿌려졌습니다.

유골이 없으므로 유골을 묻은 장소나 비석도 당연히 없다고 합니다.

 2. 생이무후(生而無後)

살아서 후손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중국인의 습관에 후손을 잇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가장 큰 불효가 후손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은래는 혁명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자손을 보살피고 (총리를 지낸 이붕이는 주은래의 양자) 자신은 후손을 두지 않았습니다.

 3. 관이무형(官而無型)

관직에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수 천 년 이래로 관직은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관직이 높을수록 특수한 대우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주은래는 외교, 공무를 수행할 때는 관리였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보통의 백성과 똑같이 생활하였습니다.

그는 중국 역사 이래 처음보는 평민재상이었다고 합니다.

 4. 당이무사(黨而無私)

당에 있으면서도 사사로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레닌은 사람은 계급으로 나누어지고, 계급은 정당이 영도하며, 정당은 영수가 주재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있으면 당이 있게 마련이죠.

정당 외에 붕당, 향당 등의 사당(私黨)이 있는 것입니다.

모택동 주석도 일찍이 당 외에 또 당이 있으며, 당내에도 파벌이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당을 이루고, 이익이 맞는 사람끼리 당을 이루며, 당을 이룬 뒤에는 사익을 취합니다. 그러나 주은래는 당내에 파벌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당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 노이불원(勞而不怨)

고생을 해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은래는 혁명사업과 국가건설에 많은 고생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해방 전에는 상해노동자궐기투쟁, 대장정, 삼대전역, 지하투쟁 등으로,해방 후에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무척 고생을 많이 하여, 업무량으로만 계산한다면 주은래의 업무량이 당시 당원들 중에서 가장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 마디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6. 사불유언(死不留言)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1976년 주은래가 죽기 전에 모택동도 매일 한 번씩은 주 총리의 병세를 물어보고,부인도 매일 병석에서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혁명 원로들은 사인방에 의해 거의 다 타도되고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 섭검영(葉劍英) 원수였습니다.

섭검영은 백지를 비서들에게 주고 혹시 주은래 총리가 무슨 말씀을 하시면 하나도 빼지 말고 기록해두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사망 후에 다시 받아 본 백지에는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은래라고 어찌 남기고 싶은 말이 없었겠습니까?

아마 후일의 분란을 미리 막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주은래는 중국 인민의 가슴 속에 영원한 총리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노련한 외교관으로서, 유능한 행정가로서, 헌신적인 혁명가로서, 그리고 실용적 정치가로서 중국 현대사에 남긴 그의 족적은 매우 크다. 그의 삶은 현대적인 공산주의 혁명가의 삶과 관리집안 출신으로 "최후의 만다린(궁정관료)"이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삶이 교차하는 역설적인 것이었다. 그는 마오의 관념적이고 급진적인 정책을 자신의 권한 안에서 최대한 완화시키도록 노력했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홍위병들의 파괴으로부터 많은 문화유적지들을 보호하고, 숙청인사들을 보호하였다.

주은래의 여성 편력은 깨끗하였다. 마오를 비롯한 많은 중국 지도자들의 비행이나 추문에 대한 사후 폭로나 비화가 잇다르고 있지만, 주은래는 이들과는 달리 청빈하고 성실한 삶과 근무로 예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려는 시도를 하던 중국 사회과학원에 경고를 표하였으며, 이는 훗날 동북공정으로 나타나게 되는 중국의 국수주의를 우려한 바 있다. 1963년 6월 28일 중화인민공화국을 42일 간 방문한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주은래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총리는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질타하며 역사침공 행위에 대해 북한에 공식 사과하기도 하였다

 

주은래는 중국 장쑤 성 화이안에서 하급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5촌 아저씨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유년기에는 양할머니(원래는 종조모)에게 전통적 고전 교육을 받았고 청소년기에는 생부의 친동생인 친숙부에게 신식 교육을 받았으며 27세 때인 1925년 8월 8일 중국 광둥 성 광저우에서 등영초(鄧穎超)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