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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ing Changbai Mountain reserve in China
CIA Bear 허관(許灌) 2015. 8. 2. 12:07
Located on the border between China and the DPRK, Mount Changbai is one of the most famous mountains in China. It belongs to Changbai Mountain Range, which extends from northeast China’s Heilongjiang, Jilin and Liaoning provinces to the DPRK’s Ryanggang and Chagang provinces. The most well-known site of the mountain is Heaven Lake, a crater lake known for its beautiful scenery. Changbaishan Nature Reserve was involved in the UNESCO's "Man and Biosphere" program in 1980 and has become part of the world's biosphere reserves.
중국의 놀라운 장백산(백두산) 보호지역
중국과 북한의 경계에 위치한 장백산(백두산)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산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북한의 양강도와 자강도 지방에 북동 중국의 헤이룽장, 지린 랴오닝 지방에서 확장 장백산(백두산) 범위에 속한다.산의 가장 잘 알려진 장소는 천지(天池),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분화구 호수입니다. 장백산 자연 보호구는 1980년에 유네스코의 "인간과 생물권"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세계 생물권 보호 구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백두산(白頭山)을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창바이-Changbai Mountain )으로 부른다
백두산(白頭山)은 북한 양강도 삼지연군과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걸쳐있는 화산이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중국어 간체: 长白山, 정체: 長白山, 병음: Chángbái shān, 장백산), 만주어로는 골민 샹기얀 알린이라고 부른다
높이는 2,750m로,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머리가 1년 중 8개월이 눈으로 덮여 있는데다가 흰색의 부석(浮石)들이 얹혀져 있어서 '흰머리산'이라는 뜻으로 '백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두산의 최고봉은 장군봉(將軍峰)이다.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 쌍무지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대각봉, 녹명봉, 천문봉, 망천후 등 2,500m 미만인 봉우리도 여럿 있다. 정상에는 칼데라 호인 천지(天池)가 있다.
백두산부터 지리산(智異山)까지 이르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은 한반도의 기본 산줄기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 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한민족과 만주족에게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되었고, 환웅이 신시(神市)를 열고 단군이 태어난 성지라 여겨 신성시되었다. 또한, 백두산은 남만주 북동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뻗은 장백 산맥(창바이 산맥)의 주봉이기도 하다.
1.백두산 명칭의 기원
백두산이라는 말은 『고려사』성종 10년(981년)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13세기 말 문헌인 『삼국유사』, 『제왕운기』에는 태백산으로 나온다. 단군신화, 부여,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을 무대로 언급하고 있다.
혼용되던 이름은 한국(조선)에서는 대체로 10세기 후반부터 이 산을 백두산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전까지 이 산은 한국에서 백산 또는 태백산, 불함산 등으로 불렸다.
-단군신화에서 환인의 아들 환웅이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한 태백산은 대개 백두산으로 간주되어 왔다. 현존하는 태백산(太伯山)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제왕운기 · 세종실록지리지 · 동국여지승람 · 동국사략 · 동사강목은 '태백산(太白山)', '백두산(白頭山)', "백산(白山)'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이 산을 태백산(太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불렀으며 이 산 주변에 백산부(白山部)라는 고구려에 속한 말갈 세력이 존재했다.
고려 중기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설명할 때는 환웅이 자리잡은 태백산에 '묘향산(평안도 지방)을 이른다'는 주석을 달았으나 고구려 건국신화 부분에서 동부여 왕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난 부분에서는 태백산에 특별한 주석을 달지 않았는데, 지리적인 상황으로 보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태백산을 일연의 주장한 묘향산으로 보지 않고 백두산으로 본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처음부터 태백산이라고만 적고 별도의 주석을 달지 않았으며, 부여, 옥저, 신라(원문: 시라(尸羅)), 고례(高禮), 예맥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일연이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단 데에는 백두산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서대석 교수 주장), 묘향산이 불교의 성지라서 그 영향을 받았다는 설, 백두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면서 백두산 신앙의 요소가 묘향산으로 이동한 것을 반영했다는 설(최남선 주장), 고조선의 수도가 요동 지방의 아사달에서 한반도 북부의 왕검성(지금의 평안도 일대)으로 이동하면서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면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한국에 현존하는 사서(史書)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근의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9세기와 10세기에 백두산의 분화가 있었고, 이 가운데 9세기의 분화는 발해의 멸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백두산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인 10세기 중반에 폭발하여 그 화산재가 멀리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까지 날아갔다. 당시 백두산의 화산 활동으로 분출한 화산재의 양은 100 ~ 150㎦로 추정되는데, 이는 2010년 유럽의 항공대란을 일으킨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분출량(0.11㎦)의 1천배나 되는 엄청난 양이다.
사서(史書)의 기록 등에 따르면 1413년, 1420년, 1597년, 1668년, 1702년 등에 백두산이 화산재나 화산가스를 내뿜었거나 이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기록들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종 2년(1420년) 5월, 천지의 물이 끓더니 붉게 변했다. 소떼가 크게 울부짖었고 이러한 현상은 열흘 이상 지속됐다. … 검은 공기는 인근지역으로 가득 퍼졌다."
"현종 9년(1668년) 4월, 한양과 함경도 등 일대에 동시에 검은 먼지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숙종 28년(1702년) 6월, 한낮에 함경도 지역 일대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비린내가 나는 황적색 불꽃이 날아왔다. … 같은날 인근 지역 현성에서는 연기가 가득한 안개가 갑자기 북서쪽 지역에서 몰려들어 … 사방에 생선 썩는 냄새가 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눈송이 같이 날라 다니던 재는 1촌(약 3cm) 두께로 쌓였고, 재는 마치 나뭇조각 같았다
2.중국측 장백산 명칭의 기원
백두산에 관련된 신화는 한민족(조선민족)뿐만 아니라 만주족(청나라)에게도 나타난다. 만주족의 기원신화의 중심지 또한 백두산이며 청나라 시절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산으로써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산해경의 기록에선 불함산(不咸山)으로,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221∼589)에는 태백산(太白山)·도태산(徒太山) 등 여러 이명으로 불리웠다. 현대에는 '창바이산(長白山)'이라고 통일되었는데, 이는 만주어로 '긴 흰 산', '큰 흰 산'이라는 뜻의 '골민 샹기얀 알린(golmin šangiyan alin)'을 의역한 것으로, 역사적으론 요, 금나라 시기부터 쓴 것으로 추정된다
*골민 샹기얀 알린(golmin šangiyan alin,長白山)
간도 영유권이나 백두산 영토분쟁은 중국정부 소수 민족 만주족(만주국, 청국)과 한국(한반도, 조선족) 분쟁이다
현재 중국에서 사용하는 장백산(長白山)이란 호칭은 요사(遼史)에 처음 보인다. 금사(金史)에서 장백산이 왕조가 일어난 땅이라 하여 덕호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는 등 중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백산이란 이름은 만주어로 길고 흰 산이라는 뜻인 골민 샹기얀 알린(golmin šangiyan alin, 長白山)을 한자로 의역한 것이다. 청나라 기록인 만류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이 외에도 도태산, 종태산 등의 이름이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라고 기록하였다.)
중국 금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면서 흥왕지지(興王之地), 즉 왕조가 일어난 땅으로 생각하며 매우 중시했다. 금 장종(章宗) 시절인 1193년에는 장백산신을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로 봉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후일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에서도 청황실을 문수보살과 연결지었고, 장백산을 만주족의 기원지로 본 것도 참고할 만한 일이다[국토의 동북방에 있는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신다는 구절 때문에 중국에서는 오대산을 청량산과 동일시하며 문수보살의 성지가 되는 경전적 근거가 되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설화에서도 오대산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그 영향을 볼 수 있다]
1616년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후 1644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만주족(여진족의 후신)의 상당수가 군사들을 따라 이 지역에서 중국 본토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본래 만주족들이 살던 지역이 공동화(空洞化)되자, 청(淸)은 강희제 집권기인 1677년에 '흥경 이동, 이통주 이남, 백두산·압록강·두만강 이북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封禁地)로 정하고 만주족이 아닌 타민족의 거주와 개간, 삼림 벌채, 인삼 채취 등을 엄금하였다
3.백두산 부근의 국경과 영토 분쟁[조선족과 만주족 영토분쟁]
1712년(숙종 38년)에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 청나라의 제안에 따라 경계비인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세워졌다. 정계비가 세워진 곳은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해발 2,150m 지점이었다.
백두산은 현재 천지를 경계로 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두 나라는 1962년에 조중 변계 조약(朝中邊界條約)을 체결하여 백두산과 천지(天池)를 분할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백두산의 북서부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남동부는 북한에 속하며, 천지의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45.5%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
반면,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지도들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북쪽 산마루를 이은 선'을 한국과 중국 사이의 국경으로 보아 천지(天池)를 포함한 백두산 정상부 전체와 비룡폭포(장백폭포)를 한국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실질적 영역인 천지 서북부와 그 북안의 영유권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한 번도 밝힌 적이 없다. 이에 반해 중화민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간도협약 당시 국경으로 삼은 석을수보다 남쪽에 있는 홍단수를 두만강 상류의 국경으로 보아 천지와 장군봉(將軍峰) 등 정상부 뿐만 아니라 천지에서 남동쪽으로 40여 km 떨어진 삼지연(三池淵)까지를 중국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백두산 영토분쟁은 중국정부 소수 민족 만주족(만주국)과 한국(한반도) 분쟁이다
조중 변계 조약(朝中邊界條約, 중국어: 中朝边界条约)은 1962년 10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국이 평양에서 체결한 국경 조약으로, 1964년 3월 20일 베이징에서 양국이 의정서(조중 변계 의정서, 중국어: 中朝边界议定书)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되었다.
이 조약은 백두산 · 압록강 ·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양국의 국경선을 명확히 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과 중화인민공화국 저우언라이가 양국을 대표하여 서명하였다
1.조약내용
조중 변계 조약은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그리고 황해 영해(領海)의 국경선에 관한 내용을 적고 있다.
조약문에 따르면 백두산 천지(天池)의 경계선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마루의 서남쪽 안부(鞍部, 안장처럼 들어간 부분)로부터 동북쪽 안부까지를 그은 직선'으로 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현재 천지의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45.5%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
또한, 조약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경계 및 두 강의 하중도와 사주(砂洲, 모래톱)의 귀속에 관한 내용도 담고 있는데, 이 조약의 의정서에는 양측 국경의 총 451개 섬과 사주 가운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64개의 섬과 사주(총 면적 87.73㎢)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은 187개의 섬과 사주(총 면적 14.93㎢)에 대해 영토권이 있음을 열거하고 있다
2.역사적 배경
조선과 청나라는 1880년대에 두차례 걸쳐 백두산과 그 동쪽의 국경을 명확히 획정하기 위한 감계(勘界) 회담을 가졌으나, 회담은 모두 결렬되었다. 제1차 감계회담(1885년)에서는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동위토문(東爲土門)의 "토문(土門)"이 두만강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양측이 다투었다. 당시 조선측은 정계비의 위치상 '토문은 두만강과 별개의 강이다'고 주장하였고, 청측은 양국의 기본적인 국경선이 두만강이라는 전제하에 '토문은 곧 두만강을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제2차 감계회담(1887년)에서 조선측은 백두산 산정(山頂)에서 가장 가까운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紅土水)를 국경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청측은 북포태산(北胞胎山)에서 발원하는 두만강의 지류인 홍단수(紅端水)를 국경으로 주장했다가 조선측 대표인 이중하의 논리에 밀리자 홍토수의 남쪽 지류인 석을수(石乙水)를 경계로 삼자고 수정제의하였다.
1909년 9월 4일, 조선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청나라와 일제(日帝)는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백두산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를 그 상류의 경계로 정하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일제가 체결한 조약인 간도 협약은 무효가 되었다. 이에 새로 국경선을 정하기 위해 체결된 조약이 조중 변계 조약이다.
3.조약 의의와 한계
(1)조약의 의의
조중 변계 조약은 백두산의 국경을 자연 경계인 천지(天池)로 하고 그 동쪽 국경을 천지에서 가장 가까운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紅土水)로 하는 자연스러운 국경을 정함으로써 19세기 후반부터 한세기 동안 논란을 이어 온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의 국경선을 명확히 획정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2)조약의 한계
조중 변계 조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측이 모두 비밀로 하였기 때문에 그 구체적 내용은 1999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조약은 양국이 모두 그 체결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없는 비밀 조약이므로 한반도 통일 과정이나 그 이후에 국경 분쟁의 불씨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냉전시대였던 1980년대 초에 백두산 천지(天池)를 북·중 양측이 분할했다는 사실이 한국 사회에 알려진 후 한동안 한국전쟁 참전의 대가로 북측이 천지의 절반을 중국측에 할양했다는 주장이 신뢰할 만한 근거 제시 없이 대북(對北) 불신감에 의존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으며, 현재도 북측이 토문(土門)을 국경으로 주장하지 않아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포기했다는 식의 부정적인 평가가 없지 않다.
*간도 문제(間島問題)는 만주에 있는 간도 지방의 영토귀속권(領土歸屬權)을 가지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서로 분쟁한 사건이다.
간도는 원래 읍루(挹婁)·옥저(沃沮)의 옛 터이며 고구려와 발해의 고지(故地)로서 발해 멸망 이후에 여진족이 거주하면서 변방을 자주 침범하였으므로 고려의 윤관(尹瓘), 조선의 김종서(金宗瑞) 등이 이를 정벌한 바 있다. 그러나 청나라가 건국한 후 북방의 경계선이 분명치 못하여 오랫동안 한광지대(閑曠地帶)로 존속해 오던 중 점차 조선의 유민(流民)이 입주하여 미개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자 청나라는 처음 간도를 금봉지(禁封地)로 설정하고 주민의 거주를 금지하였으나 산둥 지방의 유민이 잠입(潛入), 조선 유민과 대립하여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1712년(숙종 38) 참판(參判) 박권(朴權),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는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과 경계선을 결정, 목극등과 조선 통관(通官) 김경문(金慶門)이 실지를 답사하여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그 후 1881년(고종 18) 청나라에서는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징(吳大徵)을 보내어 간도의 정식 개척에 착수하였다. 이때 청나라는 간도의 조선인 주민을 청나라 사람으로 취급하겠다고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간도의 유민쇄환(流民刷還) 문제를 주장하는 한편, 1883년(고종 20) 5월 어윤중(魚允中)·김우식(金禹軾)에게 정계비를 조사케 하고, 9월에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李重夏)·종사관(從事官) 조창식(趙昌植)을 회령(會寧)에 파견, 청나라의 덕옥(德玉) 가원계(賈元桂)와 담판하게 하였다.
청나라는 정계비에 적혀 있는 '토문(土門)'을 두만강의 동어이자(同語異字)라 주장, 조선측에 실제적인 증거를 들어 간도는 마땅히 토문강 이남, 즉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회담은 3차에 걸쳐 개최되었으나 청나라측은 자기의 불리함을 알고 마침내 이를 결렬시켰으므로 아무런 성안(成案)을 보지 못하였다.1900년(광무 4) 러시아 제국이 간도를 점령하자 이를 한성 주재 청국공사(淸國公使)에게 통고한 후 포병(砲兵)을 양성하고 조세를 받아 간도 지방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양국간에는 다시 분규가 거듭되다가 러일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패전하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간도 문제는 일본 제국과 청나라 간의 외교문제로 바뀌었다. 일본 제국은 처음에 통감부(統監府)의 출장소를 용정촌(龍井村)에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 조선의 영토로서 인정을 하였으나 1909년(융희 3) 남만철도(南滿鐵道)의 안봉선(安奉線) 개축문제로 청나라와 대립하자 간도 협약을 체결하고 남만주에 철도부설권을 얻은 대가로 간도 지방을 청나라에 양보하였다.
길림성 창바이(長白) 조선족 자치현
창바이 조선족 자치현(중국어 간체: 长白朝鲜族自治县, 정체: 長白朝鮮族自治縣, 병음: Chángbái Zhāoxiānzú Zìzhìxiàn, 중국조선말: 장백 조선족 자치현)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바이산 시에 위치한 자치현으로 중국에서 유일한 조선족자치현이다. "창바이 현"으로 불리기도 한다. 면적은 2,497.6 km², 총인구 8만5천여 명 중 조선족은 1만4천여 명이다.
지린 성 남부 압록강 상류로, 백두산의 서남쪽에 인접해 있다. 현(县)의 남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 혜산시 · 삼지연군 · 보천군 · 삼수군 · 신파군 · 후창군과 접하며, 북쪽은 린장 시 · 푸쑹 현과 접해 있다. 국경선의 길이가 260.5Km로 지린 성에서 국경선의 길이가 제일 긴 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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