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삼한통일(삼국통일) "대한민국" 본문
삼한통일(삼국통일)
"삼한(삼국)정통설, 대한의 삼한(삼국)이다.삼한의 마한(고구려=고려), 변한(백제), 진한(신라)이다. 대한민국
三韓(三國)正統說, 大韓的三韓之也. 三韓的馬韓(高句麗=高麗)弁韓(百濟)辰韓(新羅)之也. 大韓民國"
극동지역 지배자가 만주지역과 일본 쿠릴반도와 북부지역 그리고 한반도 북쪽 지역 지배자가 될때도 있었다
일본 북부지역은 옛날부터 극동지역 영향력이었다
대한(大韓)은 삼한(삼국)통일을 의미하며 삼한정통설[三韓(三國)正統說]에 기반으로 건국한 나라이다
만주지역과 극동지역 일부 땅이 우리 옛 민족의 땅이다
아직도 우리 민족이 거주하고 생활해오고 있다
중국은 통일된 다민족 국가이며 또한 세계적으로 인구가 제일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에는 13억 인구, 56개 민족이 있다.
중국 민족에는 한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위글족, 묘족, 이족, 쫭족, 부이족, 조선족, 만족, 뚱족, 요족, 바이족, 투쟈족, 하니족, 까자흐족, 따이족, 리족, 리수족, 와족, 써족, 고산족, 라후족, 수이족, 둥샹족, 나시족, 징퍼족, 끼르끼즈족, 투족, 다고르족, 머로족, 챵족, 부랑족, 쌀라족, 모난족, 거로족, 시버족, 아창족, 프미족, 따쥐크족, 누족, 우즈베크족, 러시아족, 어윈커족, 더앙족, 보안족, 위구족, 징족, 따따르족, 두룽족, 오로죤족, 허저족, 먼바족, 뤄바족, 지노족이 망라된다. 이밖에 중국에는 아직 민족이 식별되지 않은 적은 인구가 있다.
중국에는 한족이 총인구에서 92%를 차지하며 소수민족 인구가 8% 정도 차지한다. 한족 외의 55개 민족은 상대적으로 한족보다 적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소수민족”이라고 부른다. 소수민족은 주요하게 중국 서북, 서남, 동북 등 지역에 분포되어있다.
기나긴 역사 발전에서 중국 각 민족은 점차 한족을 주체로 한 대잡거, 소짐거의 국면을 형성했다. 55개 소수민족가운데서 회족, 만족이 한어를 통용하는 외 기타 각 민족은 자기 민족어거나 한어를 쓴다. 다년간 56개 민족은 960만 평방킬로미터의 땅위에서 함께 노동하고 생활하면서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창조했다.
1.인구가 500만명 이상인 민족
한족
한족은 중국 56개 민족가운데서 인구가 제일 많은 민족이며 세계적으로 인구가 제일 많은 민족이기도 하다. 오늘 날 한족인구는 12억정도에 이른다. 한족은 원래 “화하(華夏)”의 중원 주민으로서 지금까지 5천년의 문명사를 갖고 있다. 그후 기타 민족과 점차 동화, 융합되었다. 한나라(漢朝)때무터 한족이라고 불렀다. 한족은 자기의 언어문자를 갖고 있다. 한어는 한장(漢藏)어계에 속하며 북방말, 오어(吳語), 상어(湘語), 감어(赣語), 학카어(客家)語, 민(福建)남(闽南)어, 민북(闽北)어, 광동어(奧語) 등 8대 방언으로 나뉘며 공동어는 보통말이다. 한자는 세계적으로 제일 오랜 문자의 하나로서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이 차츰 변화되어 오늘 날의 네모꼴 글자로 되였으며 도합 8만자 이상이다. 통용되는 글자는 7천자 좌우 된다. 한어는 지금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문자의 하나이다. 한족의 기본음식 구조는 곡물을 주식으로 삼고 각종 동물과 야채를 부식물로 한다. 장기간의 발전과정에 한족은 하루 세끼의 식사습관을 형성했다. 쌀음식과 가루음식은 한족 주식의 두가지 큰 품목이다. 이밖에 기타 곡물, 예하면 옥수수, 수수, 곡물류, 감자류 등도 잡곡도 부동한 지역에서 주식의 구성부분으로 된다. 여러 측면의 영향을 받아 한족은 음식 습속에서 부동한 유형의 요리 습관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늘 한족과 기타 해당 민족의 음식 맛을 “남쪽은 달고, 북쪽은 짜며, 동쪽은 맵고 서쪽은 시쿨다”는 말로 개괄한다. 지금 여러 지역에서 민간 입맛의 기초위에 이미 비교적 대표성이 있는 호남요리, 사천요리, 동북요리, 광동요리 등 8개 요리체계를 이루었다. 술과 차는 한족의 주요한 두가지 음료이다. 중국은 차의 고향이며 또한 세계적으로 술빚는 기술을 제일 먼저 발명한 나라의 하나이다. 술문화와 차문화는 중국에서 역사가 오래다. 술과 차 이 두가지 주요한 음료외 일부 과일제품도 부동한 지역가 부동한 계절에 즐겨 마시는 음료로 되고있다. 한족은 명절이 아주 많다. 음력설은 제일 전통적인 명절이다. 이밖에 중대한 명절에는 또 음력으로 정월 보름날의 원소(元宵)절, 양력 4월 5일의 청명절, 음력 5월 초 닷새의 단오절, 음력 8월 보름날의 중추절 등이 있다.
쫭족(壮族)
쫭족은 중국 소수민족가운데서 인구가 제일 많은 민족으로서 주요하게 중국 남방의 광서쫭족(廣西壮族)자치구에 집거하고있다. 쫭족은 쫭족어를 사용한다. 이는 한장어계에 속한다. 쫭족은 중국 남방의 토착민족으로서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수만년전에 쫭족의 선민들은 바로 중국 남방에서 생활하였다. 1958년, 광서쫭족자치구가 설립되었다. 쫭족은 주요하게 농업생산에 종사하며 벼와 옥수수를 주로 재배한다. 쫭족은 노래를 부르기를 즐기며, 좡족마을은 “노래의 바다”로 불리운다. 아름다운 쫭족비단은 쫭족인민들의 전통적인 수공예품이다. 쫭족사람들은 거개 자연과 여러 신의 원시종교를 숭배한다. 당나라, 송나라후 불교, 도교가 선후로 쫭족지역에 전해졌다. 근대에 기독교, 천주교도 쫭족지역에 전해졌지만 그 영향은 크지 않다.
만족(满族)
만족은 전국 각지에 분포되여있으며 그 가운데서 동북부의 요녕(遙寧)성에 제일 많다. 만족은 만족어를 사용한다. 이는 알타이어계에 속한다. 한족과 혼거하고 내왕이 밀접하기 때문에 지금 만족은 모두 한어를 사용하는데 습관되어있다. 다만 일부 편벽한 집거마을에서 아직도 일부 노인들만이 만족어를 할줄안다. 만족은 여러 신의 싸만교를 신앙했었다. 만족은 역사가 유구한 민족으로서 그 선민은 2천여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들은 줄곧 중국 동북의 장백산 북쪽, 흑룡강 중하류, 우쑤리강 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생활하였다. 기원 12세기 당시 “여진”이라고 부른 만족이 금나라를 세웠다. 1583년, 누르하치가 여진 각 부를 통일하고 8기 제도를 세웠으며 만족문자를 창립하고 1635년 민족을 “만주족”이라고 했다. 1636년, 누르하치는 황제로 되였으며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다. 1644년, 청군이 관내에 들어갔다. 청나라는 중국에서 통일된 중앙집권을 한 제일 마지막 봉건왕조로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후 정식으로 “만족”이라는 칭호가 있게 되었다. 만족은 중국의 통일, 강역의 개척, 경제문화의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회족(回族)
회족은 인구가 980여만으로서 주요하게 중국 서북부의 녕하(寧夏 )회족자치구에 집거하고 있다. 중국 기타 지방에도 회족들이 많이 집거, 산재하고 있다. 회족은 전국 각지에 널려 있으며 중국에서 분포가 제일 넓은 소수민족이라고 할수 있다. 회족은 한족과 장기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때문에 거개 한어를 사용하고 있다. 기타 민족과 함께 생활하고있는 회족들 역시 그 민족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일부 회족인은 아랍어와 페르샤어에 능숙하다. 회족의 내원은 기원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랍과 페르샤 상인들은 중국에 와서 장사하고 중국 동남연해의 광주(廣州), 천주(泉州) 등 곳에 머물어 생활하였다. 수백년동안의 발전을 거쳐 점차 회족의 일부로 되었다. 이밖에 13세기 초반, 전쟁때문에 부득불 중국 서북부에 대량으로 이주한 중아시아인, 페르샤인, 아랍인들이 통혼, 종교신안 등 형식으로 부단히 한족, 위글족, 몽골족과 융합하여 차츰 회족을 형성했다. 회족은 이슬람교를 신앙하며 도시, 향과 진 지어 마을에 모두 청진사가 있으며 청진사를 둘러싼 주거의 특점을 형성했다. 그들은 특수한 음식습관을 갖고있는데, 사람들은 늘 “회민(回民)”, “청진”이라는 간판을 건 식당, 식품점을 볼수 있다. 이런 식당과 식품점은 전문 회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회족의 경제문화수준은 비교적 높으며 중국의 역사발전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
묘족(苗族)
묘족은 인구가 약 894만으로서 주요하게 귀주(貴州), 운남(雲南), 사천(四川), 광서, 호남(湖南), 호북(湖北), 광동(廣東) 등 곳에 집거하고있다. 묘족은 묘족어를 사용한다. 이는 한장어계에 속한다. 지난날 묘족은 통일된 문자가 없었다. 1956년, 묘족은 4가지 방언의 라틴병음문자를 창제하거나 개혁하여 통일된 묘족문자를 형성했다. 묘족은 중국에서 역사가 오랜 민족의 하나이며 4천여년전의 역사서적에 벌써 기재가 있다. 옛 역사서적에 전한데 의하면 황제, 염제와 합하거나 싸운 치우가 바로 묘족사람들이 신봉하는 선조이다. 전쟁과 기근, 질병 그리고 인구의 번성, 농경지의 황폐화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묘족은 부단히 이주하였다. 이로하여 묘족은 분포가 광범하고 방언, 옷장식, 머리장식, 습관에서 아주 큰 차이를 이루었다. 각 지방에 분포된 묘족은 많은 자칭 이름이 있는데 일례로 옷장식에서 긴 치마, 짧은 치마, 장각묘(長角苗), 홍묘(紅苗), 흑묘(黑苗) 등 이름이 서로 다르다. 묘족은 거의 모두 만물이 영험하다고 하는 원시종교를 믿는다. 묘족은 벼와 옥수수 재배를 위주로 하며 겸하여 기름오동, 유채 등 경제작물과 삼칠, 천마 등 귀중한 약재를 재배한다.
이족(彝族)
이족은 인구가 770만으로서 주요하게 운남, 사천, 귀주, 광서 이 네개 성과 자치구에 분포되어있다. 이족은 이족어를 사용한다. 이는 한장어계에 속한다. 한족과 거주, 연계가 비교적 많은 이족사람들은 한어에 능숙하다. 이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비죠적 많고 분포가 비교적 넓으며 역사가 유구한 소수민족이다. 2000여년전 북쪽에서 남하한 저족, 챵족이 남방 토착 부락과 부단히 융합되어 새로운 민족인 이족을 형성했다. 역사상 이족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장기적으로 노예점유 제도를 유지한 것이다. 1949년, 공화국이 창립된 후 민주개혁을 진행하여서야 이족사회에 남아있던 노예제도가 점차 없어졌다. 이족들속에서 지난 날 여러 신의 숭배가 유행되였으며 청나라 초반에는 도교가 성행하였다. 19세기 말, 천주교, 기독교가 전해졌으나 신자는 아주 적다.
몽골족(蒙古族)
몽골족 인구는 580여만으로서 주요하게 내몽골(內蒙古)자치구와 신강(新疆), 청해(靑海), 감숙(甘肅), 흑룡강(黑龍江), 길림(吉林), 요녕(遙寧) 등 성과 지역의 몽골족자치주, 현에 집거하고 있다. 몽골족은 몽골어를 사용한다. 이는 알타이어계에 속한다. 몽골의 칭호는 제일 오랜 것은 당나라때이다. 그때 몽골은 몽골 많은 부락에 있는 한 부락의 명칭이였다. 이 부락의 발상지는 어르구나강 동쪽기슭 일대인데 그후 점차 서쪽으로 이동되었다. 각 부락들은 서로 인구와 가축, 재부를 약탈하였으며 그칠새 없는 부락전쟁을 형성했다. 1206년, 테무진(鐵木眞)이 몽골 대칸으로 추대되였으며 칭키스칸으로 호칭하고 몽골국을 세웠다. 이로써 중국 북방에 처음으로 강대하고 안정하며 부단히 발전하는 민족인 몽골족이 나타났다. 그후 칭키스칸은 몽골족 각 부락을 통일하고 중국을 통일했으며 원나라를 세웠다. 몽골족은 거개 라마교를 신앙한다. 몽골족은 중국의 정치, 군사, 경제, 과학기술, 천문력, 문화예술, 의학 등 여러 측면에서 모두 중대한 기여를 했다.
2.인구가 10만명 이상인 민족
중국에서 인구가 10만 이하인 소수민족은 도합 20개로서 각기 부랑족, 따지크족, 아창족, 푸미족, 어윈커족, 누족, 징퍼족, 징족, 지노족,더앙족, 보안족, 러시아족, 위구족, 우즈베크족, 먼바족, 오로죤족, 두룽족, 따따르족, 허저족, 고산족, 로바족이다.
로바족(珞巴族)
로바족은 인구가 3천명으로서 중국에서 인구가 제일 적은 소수민족이다. 로바족은 주요하게 티베트자치구 동남부에 분포되어 있다. 머퉈(墨脫)현 북부에 거주한 로바족은 티베트어를 사용하며 기타 로바족은 모두 로바어를 사용한다. 로바어는 한장어게에 속한다. 부동한 지역의 로바족은 서로 다른 방언을 갖고 있다. 로바라는 단어는 티베트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 뜻인즉 “남방사람”이라는 뜻이며 티베트족이 그들을 부르는 호칭이였다. 1949년, 공화국이 창립된 후 로바족은 민족평등의 권리를 향수했으며 나라와 각 민족의 지원으로 현대화한 생산의 길에 들어섰으며 경제문화가 신속히 발전하였다. 로바족은 만물이 영험하다는 원시종교를 신앙한다.
두룽족(獨龍族)
두룽족은 인구가 7400명으로서 운남성 공산(貢山) 두룽족-누족자치현 두룽강유역의 강골짜기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두룽족은 두룽어를 사용한다. 이는 한장어계에 속한다. 원래 본 민족 문자가 없다. 두룽족은 만물이 영험하다는 것을 신앙하며 자연물을 숭배한다. 두룽족의 족칭은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 여강로(麗江路) 풍속 조항에서 볼수 있는데 “교(撬)”라고 칭한다. 명청시기 “구(俅)”, 혹은 “곡(曲)”이라고 칭했다. 공화국이 창립된 후 자기 민족의 소원에 따라 자칭 “두룽”이라는 칭호를 채납하였다. 지난 날 두룽족의 사회생산력 발전은 아주 낮았으며 원시적인 목제거나 죽제의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고 화전경작하는 농업생산에 종사했으며 채집과 어렵은 없어서는 안될 생산 보충이였다. 공화국이 창립된 후 두룽족은 이 낙후한 모습을 철저히 개변하였다. 두룽족은 부지런하고 손님을 즐기며 친구를 중하게 여긴다. 늘 한 집에 일이 있으면 온 마을이 도와준다. 수렵한 야생동물은 수렵자들이기만 하면 모두 배당된다. 그들은 신의를 중히 여기고 약속을 존중하며 소박한 도덕관념이 있다. “밤이 되어도 문을 닫지 않고 길에서 떨군 물건을 줏지 않는것”은 두룽족의 전통적인 미덕이다.
지노족(基诺族)
지노족은 인구가 2만여명이며 주요하게 중국 서남부 운남성 시쐉판나(西雙版納)주의 한 큰 산에 집거해있다. 지노어를 사용한다.이는 한장어계에 속하며 본 민족 문자가 없다. 지노족은 지난날 만물이 영험하다는 것을 신앙했으며 선조 숭배가 성행했다. 지노는 이 민족의 자칭이다. 지노족의 내원에 문자기재가 없다. 지노족은 제갈량을 숭배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지노족은 제갈량이 남쪽을 징벌하던 부대의 일부분으로서 보이(普洱), 묵강(墨江) 지어 보다 먼 북방에서 이주해 왔다고 한다. 공화국이 창립된후 지노족은 직접 원시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에로 진입했으며 화전경작, 죽각기재, 물물교환,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병을 치료하던 등 낙후한 모습을 철저히 개변하였다. 지금 지노족의 간부, 의사, 상인, 농업과학기술인원들은 모두 성장하였다.
오로죤족(鄂倫春族)
오로죤족은 인구가 8천여명으로서 내몽골자치구와 흑룡강성이 인접된 대소흥안령에서 살고있다. 내몽골자치구 후른베르맹에는 오로죤족자치기가 설치되어 있다. 오로죤족은 오로죤어를 사용한다. 이는 알타이어계에 속한다. 본 민족 문자가 없으며 한문을 통용한다. “오로죤”은 민족 자칭으로, “산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청나라 초의 사료에 기재되어있다. 오로죤족은 장기간 수렵생활을 위주로 채집과 어획을 보조수단으로 한다. 거의 모든 남자들은 모두 우수한 기마수와 백발백중의 사수이다. 그들은 여러 들짐승의 습성과 생활규률을 손금보듯 하며 풍부한 수렵경험을 갖고있다. 20세기 40년대 그들은 여전히 원시공사 잔여를 갖고있는 유렵민족이였다. 수렵물은 부족 내에서 평균 분배했으며 원시사회의 공동소비와 평균분배의 일부 습관을 보존하고있었다. 노인, 약자, 부상자, 장애자는 남보다 더 배당을 받을 수 있다. 공화국이 창립된 후 오로죤족은 단번에 사회주의 단계에 들어섰다. 지금 그들은 이미 정착생활을 실현하고 수렵과 고별하였으며 삼림과 야생동물의 보호자로 되었다. 오로죤족은 손재주가 좋아 봇나무껍질로 정교한 수공예품인 옷, 신, 함, 통, 상자 등을 만들어낼수 있다. 지어 가볍고 교묘한 벗나무껍질로 배를 만들수 있다. 이런 물품에는 아름다운 도안이 있는는 가볍고 오래 견디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오로죤족 사람들은 싸만교를 보편적으로 신앙하며 자연물을 숭배하고 만물에 영험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선조에 대한 숭배가 성행한다.
따따르족(塔塔爾族)
따따르족 인구는 5천명으로서 신강위글자치구에 산거했으며 비교적 집중된 곳으로는 이녕(伊寧), 탑성(塔城), 우룸치(烏魯木齊) 등 도시가 있다. 따따르어를 사용한다. 이는 알타이계에 속한다. 일부 노인들이 따따르어를 사용하는 외 일반적으로 모두 현지의 까자흐어거나 위글어를 사용한다. 따따르족은 아랍 자모를 기초로 한 문자가 있다. 까자흐족, 위글족이 잡거하여 있고 관계가 밀접하기 때문에 이 두 민족의 문자는 따따르족의 통용문자로 되고있다. 따따르족은 거개 이슬람교를 신앙한다. 따따르족의 선민은 중국 북방의 돌궐칸 나라의 한 부락은 “따따르”에서 왔으며 제일 일찍 당나라에서 나타났다. 기원 13세기 몽골족이 서정할때 서방사람들은 몽골인을 따따르라고 불렀다. 기원 19세기초부터 적지 않은 따따르는 러시아로부터 중국 신강에 이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후 또 일부 따따르가 이주하여 중국의 따따르족이 되였다. 마을에 거주하는 따따르는 주요하게 목축업에 종사한다. 따따르인들가운데서 인텔리 특히 교육사업인원들은 거개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신강의 교육사업에 뛰어난 기여를 했다.
3.중국정부의 민족 정책
중국은 통일된 다 민족국가이다. 중국정부는 각 민족 평등과 단결, 호조의 민족정책을 집행하며 소수민족 신앙자유의 권리와 풍속습관을 존중하고 보호한다.
민족구역자치제도는 중국의 중요한 정치제도이다. 이것은 국가의 통일영도하에 각 소수민족 집거지가 구역자치를 실행하며 자치기관을 설립하고 자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나라에서는 민족자치지방에서 현지 실제상황에 근거하여 나라의 법률과 정책을 관철, 집행하며 소수민족의 각급 간부와 각종 전문인재, 기술노동자를 대량 양성하도록 보장한다. 그리고 민족자치지방의 각족 인민들이 전국인민들과 함께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역량을 집중하여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을 진행하며 민족자치지방의 경제, 문화의 발전을 가속화하고 단결, 번영한 민족자치지방을 건설하도록 보장한다.
수십년동안의 실천속에서 중국의 집권당인 중국공산당은 민족문제와 관련한 일련의 기본관점과 정책을 형성했다.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족의 산생, 발전, 소실은 아주 긴 역사과정이며 민족문제는 장기적으로 존재한다.
사회주의단계는 각 민족이 공동으로 번영하고 흥성하는 시기로서, 각 민족사이의 공동 요소는 부단이 늘어난다. 그러나 민족특점과 민족 차이는 계속 존재한다.
민족문제는 사회문제의 일부분이며 민족문제는 오직 전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점차 해결해야 한다. 중국 현 단계의 민족문제는 다만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공동위업에서 점차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각 민족은 인구의 다소, 역사의 길고 짧음, 발전전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두 조국의 문명에 기여했으며 모두 일률로 평등해야 한다. 응당 각 민족 인민의 대단결을 강화하고 나라의 통일을 수호해야 한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사회주의의 근본 과업이며 또한 중국 현 단계 민족사업의 근본 과업이다. 각 민족은 서로 돕고 공동으로 진보와 번영을 실현해야 한다.
민족구역자치는 맑스주의 민족이론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중대한 기여이며 중국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제도이다.
도덕과 재능이 겸비한 웅대한 소수민족 간부대오를 건설하는 것은 민족사업을 잘 하고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이다.
민족문제와 종교문제는 일부 지방에서 흔히 한데 겹친다. 민족문제를 처리할 때 또한 나라의 종교정책을 전면적으로 정확하게 낙실하는데 주의를 돌려야 한다.
이밖에 중국정부는 소무민족지역의 경제, 문화, 교육 등 각항 사업의 진보를 촉진하고 종교를 신앙하는 군중을 포함한 광범한 소수민족 군중들의 물질문화생활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소수민족의 종교신앙을 존중하고 소수민족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데 특별히 주의를 돌리고있다. 종교문화를 포함한 각 민족의 문화유산과 민간예술에 대해 보편조사, 수집, 정리, 연구, 출판을 진행했다. 나라에서는 또한 대량의 자금을 투입하여 소수민족지역에서 중요한 역사, 문화가치가 있는 사찰과 종교시설을 보수했다.
4.소수민족 간부선발과 육성
중국정부는 소수민족간부에 대한 육성을 아주 중시한다. 소수민족간부의 수량은 비교적 큰 성장을 가져왔으며 많은 소수민족간부들이 현급 이상의 각급 지도자로 선발되였다. 현재 중국 5개 자치구의 주석, 30개 자치주의 주장, 119개 자치현, 기의 현장과 기장은 모두 민족간부들이 담임하고있다.
각족 인민들은 나라의 정치사회 사무 관리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다.
중국의 인민대표대회와 정치협상회의 기구에서 56개 민족은 모두 자기의 대표와 위원을 갖고 있는데, 그 비중은 10% 이상을 차지한다.
동북아시아 "동아시아지역 한중일 구역(한자문화권, 한자어를 사용하는 나라 중국, 한국, 일본등 삼국)"
동아시아 지도
중국은 동북아시아지역과 동남아시아지역, 중앙아시아지역으로 분포 돼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중국 다수민족 한족은 한반도, 일본 남부지역 민족과 문화적으로 공유해왔다. 만주, 극동지역에서는 조선족(한국), 만주족, 거란족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일본 북부지엑에서도 문화적으로 공유해왔다
러시아 극동지구[극동 연방관구]는 9개 자치주로 구성 돼 있다
1.아무르 주 2. 유대인 자치주 3.캄차카 지방 4.하바롭스크 지방 5.마가단 주 5a.축치 자치구 6.사하 공화국 7.사할린 주 8.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러시아 극동지구[극동 연방관구]는 9개 자치주 중 하바롭스크 지방, 사할린 주(사할린 섬),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등지가 한민족 고구려나 발해 영토였고 아직도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 하바롭스크 지방[지도4-하바롭스크 지방]
북위 48도 42부, 동경 135도 12부에 있다. 아무르 강의 우안에 있고, 우수리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경유로는, 8,523km의 지점에 있고 7시간의 시차가 있다
중국과의 거리는 30km이다.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의 합류점에 있는 대우수리섬(중국명: 黒瞎子島)은 중소 국경분쟁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영유권을 서로 주장하고 있었다. 2004년의 국경 확정 문제는 대우수리섬이 러시아와 중국의 공동 관리에 합의했기 때문에, 하바롭스크에 대한 국경 문제는 거의 완벽하게 해소되었다.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지도8-연해주]
프리모르스키 지방(Примо́рский край)은 러시아 극동에 있다. 연해주(沿海州)라고도 불린다. 면적은 16만5,900 km², 인구는 207만1,210 명(2005년 기준)이다.
프리모르스키 지방은 서북쪽으로 중국, 서남쪽으로 북한 라선특별시, 동쪽과 남쪽으로 동해와 접한다.
큰도시 — 블라디보스토 (613,400명), 나홋카 (174,600명), 우수리스크 (156,000명), 아르툠 (111,500명).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연해주에 최초로 살았던 사람들은 고아시아인들과 퉁구스 인들이었다. 5~6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에 이주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나나이, 우데게이, 에벤키 같이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아직도 연해주와 아무르 주에 거주하고 있다.
698년부터 926년까지는 발해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발해는 연해주 외에도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통치했으며, 만주와 이 지역의 일부를 통치하였던 고구려의 후예와 퉁구스 계통의 말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발해는 동아시아의 중세봉건국가로, 농업, 목축 등의 산업과 함께 고유의 전통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발해는 당, 일본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였다.
1115년부터 1234년까지 극동 러시아의 남쪽 부분은 보다 강력한 제국인 여진족의 금나라가 지배하였다. 여진족은 퉁구스계의 민족이다. 유목과 농업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금나라는 또한 야금, 조선(造船) 등의 산업이 있었다. 금나라는 발해와 마찬가지로 송, 고려,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북중국을 점령한 금나라는 꽤 강한 국력을 과시하였다.
금나라는 몽골 제국 칭기즈 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이후 300년 이상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독특한 동식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과 만주를 기반으로 활동한 만주족(금나라 여진족의 후신)이 17세기 초 중국 대륙을 정벌하고 청나라를 건설하면서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17세기 중엽 러시아 제국이 헤이룽 강(黑龍江, 아무르 강)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청나라와 충돌하였다.(청-러시아 국경 분쟁) 1689년에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 스타노보이 산맥을 국경으로 정하고, 연해주는 계속 청나라에 속했다. 그러나, 제2차 아편 전쟁(1856년 - 1860년)으로 청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러시아 제국은 남진하여 1858년 하바로프스크를 건설하였다.
니콜라이 무라피요프-아무르스키 백작에게 있어서 러시아가 해안지방을 획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러시아는 1858년 체결한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 강(헤이룽 강, 黑龍江)의 이북 지역을, 1860년에 체결한 베이징 조약으로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를 차지하였다.
1859년부터 1882년 사이에 95개의 정착지가 건설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도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당시 인구의 3분의 2 이상은 농업, 수렵, 생선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19세기 말엽에 석탄 채굴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케일, 녹용, 목재, 게, 건어물, 해삼 등도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랄산맥 아래의 첼랴빈스크까지 개통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1922년부터 이 지역의 발전은 러시아를 새로 차지하게 된 볼셰비키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어업과 광업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고 철도와 해운업 역시 발달했다
*사할린 주(사할린 섬)
사할린 섬 과 쿠릴 열도 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의 주는 1947년 사할린 섬 남부와 쿠릴 열도를 일본으로부터 이양받은 후 설립되었다. 어업·제재업과 사할린 남부의 채탄, 북부의 석유 채취가 주된 경제활동이다. 면적 87,100㎢, 인구 714,000(1993).
사할린에는 한민족 재외동포(사할린 고려인)들이 상당수 살고 있다. 2002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이 주민의 83%를 차지해서 1위인데, 2위는 바로 한인 교포다. 30,000명으로 주민 수의 5.5%를 차지한다
극동지역 지배자가 만주지역과 일본 쿠릴반도와 북부지역 그리고 한반도 북쪽 지역 지배자가 될때도 있었다
일본 북부지역은 옛날부터 극동지역 영향력이었다
Northeast China [traditional Chinese: 中國東北=滿州(만주)] Ruler
Gojoseon[B.C 2333-B.C 108, Korea People:고조선]->Han[B.C 108-A.D 313, Han China People:漢(한)-한나라의 청천강 이북지역 점령과 한사군 설치 그리고 청천강 이남 고조선 유민으로 진국등장]->Goguryea[A.D 313-668, Korea People:고구려]->Tang[A.D 668-698, Han China People:唐(당)나라]->Balhae[A.D 698-926, Korea People:조선족과 여진족 연합정부]->Liao[A.D916-1125, Khitan China People:遼(요)나라-거란족:(다우르족:達斡爾族(달알이족))]->Jin[A.D 1115-1234,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金(금)나라-여진족 또는 만주족]->Mongol[A.D1234-1368, Mongol People:蒙古(몽고)나라-몽고족]->Ming[A.D 1368-1644, Han China People:明(명)나라]->Qing[A.D 1616-1912,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淸(청)나라-만주족]->Republic of China[A.D 1912-1932, Han China People:중화민국-중국 국민당]->Manchukuo[A.D 1932-1945, Jurchens China People or Manchu China People:滿州國(만주국)-만주족=여진족]->소련 극동군 만주국 점령[1945년 8월 18일,8월 폭풍작전]->중국연합군 반환[1945년 11월, 소련극동군과 인민해방군이 점령 이후 소련군이 중국 연합군 동북3성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임표에게 넘겨 줌]->People's Republic of China[1949년 10월 1일~ Han China People: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
-임표는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된 동북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맡아 1948년 11월 만주지역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국민당군을 격파하였다. 임표의 승리를 기점으로 전세는 공산당쪽으로 기울었고, 임표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된 자신의 부대(총병력 백만)를 이끌고 계속 남하하여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창 강을 도하하여
1950년까지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 성까지 도달하였다.
-동북3성(東北三省)은 중국의 6대 중국영토지역의 하나로서 동북부 지역을 말하며 과거에는 만주(滿洲)로 불렸던 지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랴오닝 성(遼寧省, 요녕성), 지린 성(길림省(성), 길림성),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흑룡강성)의 3개 성(省)이 포함된다. 이 지역 최대의 도시는 선양(瀋陽)이며, 그 외에 하얼빈(哈爾濱), 창춘(長春), 다롄(大連), 치치하얼(齊齊哈爾), 지린(吉林) 등의 도시가 있다.
동북 3성(만주지역)은 200만 명 이상의 조선족(한국인)이 거주하고 있고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어 한민족(조선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동북 3성(만주지역) 역사적 지배세력은 조선족(한민족)과 만주족(여진족), 거란족, 몽골족 그리고 한족(漢族, 한나라 후손)이다
-동북 3성(만주지역)의 인구는 현재 약 1억 명으로, 이는 중국 전체 인구의 8%에 해당한다.
동북 3성(만주지역) 지방의 민족 구성은 한족(漢族)이 92.4%를 차지하는데, 그 대부분은 청조(淸朝) 300년 간, 특히 19세기 말 이후에 이주하여 왔다. 19세기 말의 동북 3성 인구는 300만 미만이었으나, 그 후 1년에 50∼100만의 인구가 주로 산둥성[山東省] ·허베이성으로부터 유입하였다. 소수민족은 787만인데, 그 중 210만이 만주족(滿洲族)으로 주로 랴오닝성(요녕성)에 살고, 113만이 한족(韓族)으로 지린성(길림성) 동부 국경지대에 옌볜[延邊] 한족(조선족)자치주를 형성하고 있다. 또 몽골족 32만은 네이멍구 지역에 살고, 후이족[回族] 23만은 대도시에 분산거주하며, 그 밖에 퉁구스계(系)의 다구르족 ·오로촌족 ·시보족 ·오웽크족 및 러시아인 등이 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만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으나, 종전 후 거의 전부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전 선언한 ‘옥음방송’ 원본 처음으로 공개 예정 (0) | 2015.07.09 |
---|---|
Northeast China [traditional Chinese: 中國東北=滿州(만주)] Ruler (0) | 2015.04.05 |
가회전투 (0) | 2015.03.18 |
미얀마에서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 추모제 (0) | 2015.02.28 |
미국, 하와이 일본계 주민 수용소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 (0) | 2015.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