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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리콴유 싱가포르 전 수상 타계 본문

Guide Ear&Bird's Eye/싱가포르

리콴유 싱가포르 전 수상 타계

CIA bear 허관(許灌) 2015. 3. 23. 21:17

 

초대 수상을 지낸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전 수상이 23일 새벽 향년 91세의 일기로 타계해 싱가포르에서는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습니다.

리콴유 전 수상의 시신은 23일 오후 많은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입원 중이던 병원에서 수상부 건물에 안치됐습니다.

싱가포르 중심부에서는 의회를 비롯해 여기저기에서 조기가 계양됐으며 수상부 앞에 설치된 게시판에는 수백 명이 줄을 지어 메시지를 적거나 헌화하며 국부의 타계를 애도했습니다.

또 리콴유 전 수상의 선거구에서는 오랫동안 지지해온 이들이 전시장을 마련해 1965년 독립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리콴유 전 수상의 사진을 40장 정도를 전시했는데 부근에 사는 주민들이나 소셜미디어에서 전시를 알게됐다는 젊은이들 1000명 이상이 방문해 리콴유 전 수상의 공적을 기렸습니다.

오후에는 대형 신문사가 리콴유 전 수상의 타계를 다룬 신문을 특별 발행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싱가포르 정부는 23일부터 오는 29일까지 국가 애도 기간으로 정하고 29일에는 리콴유 전 수상의 국장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Democracy reverse is dictatorship (Totalitarianism) which Communism is not

and capitalism reverse is Communism.

Capitalism  Anti Communism! Democracy Anti Totalitarianism(Dictatorship)!

Since Capitalism Democracy's revolution, liberalism(Civil liberties) and socialism(living rights) coexistence(Respect) democratic republic(freedom society) It is.[Night Watch-Light through the Darkness]"

"In a different world we need to find a niche for ourselves[Lee Kuan Yew]"

                                                                               Lee on the campaign trail in 1958

29일 오후 싱가포르대서 장례식…오바마ㆍ시진핑ㆍ반기문 애도 표명
싱가포르의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안정의 기틀을 세워 '국부'로 존경받는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가 23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싱가포르 총리실은 이날 성명을 통해 "리 전 총리가 오늘 오전 3시18분 싱가포르 종합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며 "리셴룽 총리가 매우 슬퍼하고 있다"고 밝혔다.

리 전 총리는 지난달 5일 폐렴으로 입원한 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왔다.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싱가포르 국민은 오늘의 싱가포르를 있게 한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23일부터 오는 29일까지 7일 동안을 애도 기간으로 정하고, 29일 장례식을 국장으로 거행하기로 했다.

리 전 총리의 시신은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대통령 궁인 이스타나궁 내 공식 총리 공관인 스리 테마섹에 안치돼, 그의 아들인 리셴룽(李顯龍) 총리 등 가족들이 애도하게 된다. 이어 25일부터 28일까지는 의사당에 안치돼 국민의 조문을 받을 예정이다.

장례는 29일 오후 2시 싱가포르대학 문화센터에서 국장으로 치러지고 장례 후 리 전 총리의 시신은 화장될 예정이다.

관공서 등 공공건물마다 그를 애도하는 조기가 내걸렸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성명을 발표해 리 전 총리의 타계에 깊은 애도를 전하고 리 전 총리의 가족, 싱가포르 국민과 정부에 위로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반 총장은 "싱가포르가 올해 독립 50주년을 맞는다"며 "싱가포르의 국부인 그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 놀라운 인물을 잃은 싱가포르 국민의 애도를 함께 한다"며 "그는 역사의 진정한 거인, 현대 싱가포르의 아버지, 아시아의 위대한 전략가의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조전을 통해 "리 전 총리의 불행한 서거에 중국 정부와 인민을 대표하는 동시에 개인의 명의로써 깊은 애도를 표명한다"면서 고인을 싱가포르 공화국의 창시자, 국제사회의 존경을 받는 전략가이자 정치가, 중국 인민의 오랜 친구, 중국과 싱가포르 관계의 창시자·개척자·추동자 등으로 평가했다.  

고촉동 전 싱가포르 총리는 "이 슬픈 소식을 듣고 눈물이 샘 솟는다"며 "그는 나의 지도자, 멘토, 영감이었고 내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었다"고 밝혔다.

토니 애벗 호주 총리는 성명을 내고 그가 50년 전 가장 취약했던 국가를 독립으로 이끈 "우리 지역의 거인"이었다며 "그의 지도력 때문에 싱가포르는 세계의 가장 번영된 국가, 금융 강국, 기업하기에 가장 쉬운 나라 중 하나가 됐다"고 강조했다.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말레이시아 국민을 대표해 싱가포르 국민에게 애도를 표한다"며 "그의 업적은 위대하고, 그의 위업은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가 영국 식민지였던 1959년 자치정부 시절부터 독립 이후 1990년까지 총리를 지내 세계 사상 가장 오랫동안 총리로 재직했으며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부국으로 건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리셴룽(李顯龍·63) 현 총리의 아버지인 리 전 총리는 집권당인 인민행동당(PAP)을 창당해 35세의 나이에 자치정부 총리에 올랐으며 제3세계 도시 국가에 불과했던 싱가포르를 금융, 물류 선진국으로 탈바꿈시켰다.

리 전 총리가 입원해 병세가 악화하자 싱가포르 국민은 그의 출신 선거구인 탄종 파가르 지역 당국이 마련한 전시장에 그의 건강을 기원하는 기를 달고 서명, 메시지, 꽃 등을 전시하면서 그의 쾌유를 기원해 왔다.

리셴룽 총리는 TV에 나와 울먹이며 부친인 리 전 총리가 나라를 건설하고 싱가포르 국민에게 자랑스러운 국가 정체 의식을 불어넣었다고 강조했다.

리셴룽 총리는 "우리는 앞으로 그와 같은 인물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며 "많은 싱가포르인들에게, 또 다른 이들에게도 리콴유는 싱가포르 자체였다"고 덧붙였다.

그가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리 전 총리의 타계를 전하자 "위대한 인간, 위대한 위업" "그는 세계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등의 애도 글들이 쇄도했다. 

▲ 1923년 9월16일= 중국 광둥성 출신 싱가포르 화교 가정에서 태어남
▲ 1949년= 영국 유학. 케임브리지대학교 법학과 입학
▲ 1947년 12월=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콰걱추 여사와 결혼
▲ 1950년= 영국에서 변호사 시험 합격. 싱가포르 귀국 후 변호사 개업
▲ 1954년= 인민행동당(PAP) 창당. 초대 사무총장
▲ 1955년= 국회의원 당선
▲ 1959년= 총선에서 PAP가 51석 중 43석 석권하며 영국 식민지 싱가포르의 자치정부 총리로 취임(35세).
▲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
▲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
▲ 1967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창설 주도
▲ 1990년= 총리직 사퇴. 고촉동 총리 취임
▲ 1990~2004년=선임장관
▲ 2004년=장남 리셴룽 총리 취임
▲ 2010년=부인 콰걱추 여사 별세
▲ 2015년 3월 23일=91세를 일기로 타계

 

 

 

                                                                As the elder statesman, Lee Kuan Yew remained a popular figure

"두려운건 현실안주" 리콴유 어록

▲"언론의 자유는 싱가포르의 통합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구와 선출된 정부의 주요 목적에 종속돼야 한다."(1971년 6월 국제언론인협회 총회 연설에서)

▲"나는 시민의 개인적 삶에 간섭한다는 비난을 종종 듣는다. 그래,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 치의 후회도 없이 말하는데 당신의 이웃이 누군지,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당신이 어떤 소리를 내고 어떤 언어를 쓰는지 같은 아주 개인적인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경제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1986년 국경일 연설에서)

▲"이웃나라들처럼 하면 죽을 거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남들에 비해 내놓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과 다르고 나은 것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은 청렴이고 효율이며 성과주의다. (이런 것들은) 효과가 있었다."(2007년 8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다음 세대에 말해야겠다. (이전 세대가) 이뤄놓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마라. (그간의 발전이) 영구적인 것이라고 믿으면 모두 무너질 것이고 두 번째 기회는 없을 것이다."(2010년 9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내가 한 것 전부가 옳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두 고결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현실 안주다.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적은 노동으로 더 많이 원하는 경향이 있다."(1970년 연설에서)

▲"말썽꾼을 정치적으로 파괴하는 게 나의 일이다. 내 가방 안에는 매우 날카로운 손도끼가 하나 있으며 만약 말썽꾼과 겨루게 된다면 나는 손도끼를 사용할 것이다."(1997년 야당 지도자 J.B. 제야레트남에 대해)

▲"그녀 없이 나는 다른 사람으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다만 그녀가 89년의 인생을 꽤 잘 살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겠다. 하지만 마지막 이별의 이 순간 내 마음은 슬픔과 비탄으로 무겁다"(2010년 부인 콰걱추(柯玉芝) 여사가 별세하자)

 

                                                                  An appearance on the BBC's Panorama programme in 1969

리콴유 "이웃 피해 없게 살던 집 헐어라" 생전 유언

3월 23일 타계한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생전에 미리 이웃 주민을 배려해 살던 집을 헐어버리라고 유언했다.

리 전 총리는 2011년 1월 현지 매체에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살던 집을 헐으라는 유언을 미리 남겨놓았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자신의 집이 국가의 성지로 보존되면 이웃 주민들이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될까 우려한 것이다.

 리 전 총리는 당시 "인도 초대 총리 네루나 영국의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집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폐허가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어 "내 집이 남게 되면 주변 건물들을 높이 올릴 수 없게 된다"며 "내 집이 철거되면 도시계획이 바뀌어 건물들이 더 높아지게 되고 땅값 가치도 커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리 전 총리의 발언은 당시 중국 경화시보(京華時報)가 싱가포르 신문을 인용해 보도했다.  

리 전 총리는 지난달 5일 폐렴으로 입원한 뒤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으며 이날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Lee Kuan Yew - known almost universally as LKY - is considered the founding father of modern Singapore, and has been the point around which politics in the city-state has revolved for nearly five decades.

But Singapore's stability and growth have been achieved in part through its only cursory nod towards democracy, and a determined quashing of dissent and free speech.

As news emerges that "The Old Man" has died at the age of 91, the BBC looks back at some key images from his life.

 

Lee Kuan Yew was born on 16 September 1923 in Singapore, to third-generation migrants from China. He lived for a short period in this house on what is now Neil Road. Singapore was at that time under British imperial rule, meaning he was born a British citizen and grew up with English as his first language - he did not speak Chinese until he was in his 30s. He studied at an English school in Singapore, becoming the highest achieving student in his year in Singapore and Malaysia.

 

The outbreak of World War Two put Lee's plans to travel to England for further study on hold. In February 1942, the British colonial army surrendered to the invading Japanese, starting a "reign of terror". Lee narrowly escaped being rounded up and killed in the Sook Ching massacre, one of the most large-scale atrocities of the occupation years. He later said he believed between 50,000 and 100,000 people had died, and that the British failure to prevent the massacre was further proof that Singaporeans should be free to rule themselves.

During the war, he went on to work as a Japanese interpreter and ran his own black market glue business.

 

After the war, Lee belatedly began his university education, studying first at the prestigious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then at Cambridge. While in England he married Kwa Geok Choo (seen above in 1965), a brilliant Singaporean scholar and later lawyer, at a secret ceremony in Stratford-upon-Avon.

In 1949 he turned his back on a possible British legal career and returned to Singapore, where he practised law and became involved in the trade union movement.

 

Lee Kuan Yew campaigns in Singapore ahead of the 1958 general elections

In 1954, LKY became the founder and general secretary of the People's Action Party (PAP), a socialist alliance of Chinese and English-speaking movements which aimed to bring an end to British rule.

In December 1959, Lee - seen above campaigning for a 1958 by-election - was present as Britain granted autonomy to Singapore, though it kept control of foreign affairs and defence.

 

Two days later, Lee - then aged 36 - was sworn in as the first prime minister of self-governing Singapore, a position he would hold for the next three decades. He embarked on an ambitious five-year programme of slum clearing, building low-cost quality housing, industrialisation and tackling corruption. He spoke fiercely of the need for Singapore to be a multi-racial nation.

 

The PAP also began campaigning for Singapore to split entirely from the UK and merge into the Federation of Malaya, believing the island to be too small and lacking in resources to survive alone. on 16 September 1963, Lee announced the successful merger from the steps of City Hall, ending 144 years of British rule.

 

Lee Kuan Yew calls for calm during racial unrest in July 1964

But racial tensions were growing between the Chinese majority in Singapore and Malays over what the ethnic character of the Federation of Malaysia should be. Despite Lee's appeals for calm, several large-scale riots left hundreds injured and more than 20 people dead.

 

On 9 August 1965, a weeping Lee announced he had agreed to Malaysia's request that Singapore leave the federation to stop the bloodshed from destabilising the union. It was, he said, "a moment of anguish" and went against "everything we stood for". Two days later, Lee declared tiny, isolated Singapore to be an independent nation.

 

Over the next 31 years, Lee's vision for Singapore turned it from an abandoned and vulnerable colonial outpost to one of the world's wealthiest nations. The country became pioneers in mass house building and nationalised healthcare, while Lee was adamant that education was essential, often saying Singapore's only natural resource was its people, and strongly encouraged well-educated people to marry and have children. Singapore opened up to foreign investment and expertise, recruiting migrant labour widely while enforcing strict racial quotas in housing.

 

Lee was unapologetic in the face of criticism that Singapore interfered too much in individuals' lives, telling the Straits Times in 1987 "had I not done that, we wouldn't be here today. We decide what is right. Never mind what the people think."

Reflecting on his time in power in a New York Times interview in 2010 he said: "I'm not saying that everything I did was right, but everything I did was for an honourable purpose. I had to do some nasty things, locking fellows up without trial."

 

Lee was critical of what he saw as the overly liberal approach of the US and the West in general, saying it had "come at the expense of orderly society.

"In the East the main object is to have a well-ordered society so that everybody can have maximum enjoyment of his freedoms. This freedom can only exist in an ordered state and not in a natural state of contention and anarchy," he said in an interview with Foreign Affairs in 1994. He made no secret of the fact that he wanted the PAP to hold onto power.

In 1981 Joshua Benjamin (known as JB) Jeyaretnam - leader of the Workers' Party - won the first ever opposition seat in Singapore. Furious with Jeyaretnam's criticisms of his handling of Singapore, Lee brought repeated defamation lawsuits against him and in 2001 he was declared bankrupt, meaning he could not hold office and was reduced to selling his book on the street to pay his debts. He died in 2008.

 

Lee was a source of advice for a parade of foreign leaders seeking to better understand Asia.

Chinese leader Deng Xiaoping visited Singapore in 1978 to learn more about its model of development. UK Prime Minster Margaret Thatcher said Lee had a way of "penetrating the fog of propaganda and expressing with unique clarity the issues of our time and the way to tackle them", while US diplomat Henry Kissinger said no world leader had taught him more than Lee Kuan Yew.

When they met in 2009, US President Barack Obama described Lee as one of the "legendary figures of Asia in the 20th and 21st Centuries".

 

In her later years, Lee's wife Kwa Geok Choo suffered from ill health and dementia and was confined to bed. In the 2010 New York Times interview, he said the stress of caring for her was harder than anything he had faced in politics.

"She understands when I talk to her, which I do every night. She keeps awake for me; I tell her about my day's work, read her favourite poems," he said. The agnostic Lee told the Times he had taken up Christian meditation to "keep the monkey mind from running off into all kinds of thoughts".

 

Kwa died in October 2010. Thousands lined the streets to pay tribute, or visited her body lying in state.

"Without her," Lee said at her funeral, "I would be a different man, with a different life".

 

Lee's political involvement continued almost until his death. Though he stood down as prime minister in 1990 he remained a senior minister, his opinion sought on all matters. He represented the Tanjong Pagar constituency in central Singapore for almost his entire political life, campaigning for office here in 2011.

 

One of his last major public appearances was at the age of 90, when he attended celebrations for Singapore's National Day, marking 49 years since he signed the deal which had filled him with such dread. He died months before seeing the 50th anniversary.

 

싱가포르 국민, 일상생활 유지하며 리콴유 애도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타계하자 싱가포르 국민은 일상을 유지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애도를 표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리 전 총리가 타계한 이날부터 오는 29일까지 7일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정했으나 장례일인 29일도 공휴일로 선포하지는 않았다.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질서 정연한 싱가포르의 국민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 청사 등 공공건물에는 조기가 내걸렸으나 국민의 일상생활은 평소와 다름 없이 계속됐다.

그러나 리 전 총리의 오랜 선거구, 그가 지난달부터 입원했던 병원, 그의 시신이 안치된 이스타나 궁 주변 등에는 그의 타계를 애도하는 국민의 슬픔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리 전 총리가 지난달 5일부터 폐렴으로 입원해 머물렀던 싱가포르종합병원 바깥에는 많은 국민이 조화와 카드를 헌사해 그의 일생을 기리고 애도를 표시했다.

리 전 총리의 시신이 싱가포르종합병원을 떠나 23일 이스타나 대통령궁 내 공식 총리관저인 스리 테마섹으로 옮겨지자 국민은 이스타나 궁 바깥에 모여 그의 타계를 안타까워했다.

많은 국민이 리 전 총리의 시신이 운구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이스타나 궁 바깥으로 몰려들었으며, 그의 시신이 이스타나 궁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국민은 박수를 치거나 "리콴유 감사합니다"를 외쳤다고 싱가포르 언론이 전했다.

이스타나 궁 정문에는 국민이 애도의 글을 남길 수 있도록 방명록과 카드가 비치됐다.

정부는 싱가포르의 국외 공관에도 방명록을 비치해 국외 거주 국민과 외국인들이 조의를 표명할 수 있도록 했다.

리 전 총리의 선거구인 탄종 파가르 지역에서는 지역 당국이 마련한 전시장에 주민들이 애도하는 깃발, 서명, 메시지, 꽃 등을 전시했다.

당국은 국민이 조문할 수 있도록 오는 25일부터 장례식 전날인 28일까지 리 전 총리의 시신을 안치할 예정인 의사당에도 애도의 글을 남길 수 있는 게시판을 설치했다.

또 '리콴유를 기억하며'(Remembering Lee Kuan Yew)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국민은 물론 외국인들도 애도를 표명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웹사이트에는 23일 내내 애도 글이 이어졌다.

모하마드 샤히드 빈 아리프는 "잘 가시오 리콴유 선생. 독특한 팀을 이끌었던 특별한 인물이 특이한 싱가포르를 건설할 수 있는 안내와 지도력, 방향을 제공했다. 일생 내내 지속됐던 당신의 정열과 싱가포르라는 과업이 더 높이 상승하길 바란다"고 썼다.

류 패트릭은 "나는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가슴은 검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어떤 말이 위대한 지도자의 타계로 인한 깊은 슬픔을 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토로했다.

제임스 운은 "당신을 한 번도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지만 10대에 싱가포르를 방문해 들었던 당신의 연설을 잊을 수 없다. 당신이 세운 싱가포르의 기틀을 믿고, 나와 내 가족의 미래를 잘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는 싱가포르인이 됐다"고 강조했다. 

제랄딘 탄 위는 "친애하는 선생님/조기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이별을 고합니다/우리가 작별 인사를 고하는 지금/완전한 휴식을 갖길 바랍니다"라는 시를 써 올렸다.

삼 쿠나는 "60년대는 싱가포르에서 민족간 긴장이 높았다. 리콴유는 분명한 다민족 자세를 취했으며, 모든 이에 대한 기회균등은 나같은 소수민족 출신도 안심시켰다. 1965년 이후 싱가포르 거리는 안전해졌고 모든 싱가포르인들은 국내외에서 평등한 기회와 존엄성을 부여받았다"고 감사를 표했다.

리 전 총리가 싱가포르를 경제적으로 번영시켰으나 민주적인 지도자였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국민은 이런 논란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타계 앞에서 깊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Flowers, messages and other tributes have been piled up outside the hospital where Lee Kuan Yew died

 

A girl writes a condolence card while paying tribute to former Singaporean Prime Minister Lee Kuan Yew outside Singapore's Istana, March 23, 2015. Lee Kuan Yew died at 3:18 am on Monday at the age of 91, according to a statement released by the Prime Minister's Office (PMO) on Monday.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우는, 리콴유 전 총리가 타계했습니다

진행자) 오늘은 리 전 총리의 타계 소식 자세히 살펴볼까요?

기자) 싱가포르의 경제 기적을 일궈내면서 '국부'로 불려온 리콴유 전 총리가 오늘(23일) 타계했습니다. 리 전 총리는 폐렴 합병증으로 지난 2월초부터 입원해 중환자실에서 지내다가, 오늘 9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싱가포르 국민들은 큰 슬픔에 빠졌고, 국제사회도 아시아의 대표적 지도자 중 한 명인 리 전 총리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리 전 총리가 수십년 간이나 싱가포르의 총리를 지냈죠?

기자) 그렇습니다. 리콴유 전 총리는 싱가포르가 영국 식민지였던 1959년 35살에 자치정부 총리로 취임한 후, 1962년 말레이시아 연방으로의 편입과 3년 뒤 독립을 거쳐, 1990년까지 무려 31년 간이나 총리직을 역임했습니다. 싱가포르가 작은 도시 국가임에도 아시아의 대표적인 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리 전 총리의 지도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진행자) 리 전 총리의 재임 기간 동안 싱가포르가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기자) 싱가포르가 말레시아 연방에서 독립할 당시 1인당 국내총생산은 400달러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리 전 총리가 퇴임한 1990년에는 1만2천750달러까지 증가했고요, 지난해에는 5만6천113달러로 아시아 1위, 세계 8위를 기록했습니다. 국제사회는 싱가포르의 이런 눈부신 경제 성장을 '싱가포르의 기적'이라고 불렀고요, 싱가포르는 한국과 홍콩, 타이완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기도 했었습니다.

진행자) 동남아의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에서 벗어난 후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아직까지도 개발도상국이나 빈곤국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싱가포르는 유독 눈부신 성장을 이뤘기 때문에, 더욱 리 전 총리의 지도력에 주목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리콴유 전 총리가 어떤 인물인지도 좀 소개해주시죠?

기자) 리 전 총리는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23년 싱가포르의 부유한 화교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다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됐는데요. 1954년 인민행동당을 창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1959년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싱가포르의 첫 총리가 됐고, 이후 31년 간이나 총리직을 역임했습니다.

진행자) 리 전 총리가 싱가포르를 경제 부국으로 이끈 비결은 뭡니까?

기자) 리 전 총리의 집권 초기인 말레이시아 연방 시절 가장 큰 목표는 정치적, 사회적 화합이었습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와의 갈등이 커지면서 결국 독립을 선택했고. 이후 경제 발전에 주력하게 됩니다. 리 전 총리는 자원이 거의 없는 도시 국가에서 인재를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고요. 특히 우수한 인재들이 공직에 진출해서 나라를 이끌 수 있도록 유도하고, 이들이 부패를 저지르지 않도록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보수를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리 전 총리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싱가포르가 빠르게 안정화하고, 해외 자본에 개방적인 정책을 펴면서, 외국의 투자가 몰려들었는데요. 싱가포르는 동남아의 물류 중심지이자 금융 중심지로 거듭나면서,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진행자) 하지만 리 전 총리가 독재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는데요?

기자) 싱가포르가 서구 선진국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면서, 반대 세력을 탄압했기 때문입니다. 보안법을 적용해서 정치인과 활동가, 노동조합원들을 구금했는데요. 한 신문사 편집장은 재판 없이 17년 간이나 구금되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교회 관계자와 학자 수십 명이 좌익 음모 혐의로 체포된 적도 있고요. 싱가포르는 아직까지도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가장 억압하는 나라 중 하나로 분류됩니다.

진행자) 일반 시민들에 대해서도 엄격한 통제 정책을 폈죠?

기자) 그렇습니다. 싱가포르가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고 범죄율이 낮은 도시가 된 이면에는 경범죄에 대해서도 무겁게 처벌하는 엄격한 통제 정책이 있었는데요. 이에 대해 시민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리 전 총리는 국민을 탄압하기 위해 무력으로 잔인한 인권 침해를 저지르거나, 혹은 부정부패로 국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든 다른 독재자들과는 다른데요. 리 전 총리는 퇴임 후 싱가포르를 잘 사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치가 반드시 필요했다며, 이는 자신과 싱가포르의 모든 시민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리 전 총리는 1990년 고촉동 전 총리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줬는데요. 지난 2004년 고 전 총리가 14년간 집권한 후 물러나자, 리 전 총리의 아들 리셴룽이 총리로 취임해서 싱가포르를 이끌고 있습니다.

진행자) 리 전 총리를 잃은 싱가포르의 표정은 어떻습니까?

기자) 오는 29일까지 일주일간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발표했는데요. 오늘 리 전 총리의 시신이 병원에서 대통령궁 내 총리 관저로 운구되는 것을 보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싱가포르의 오늘을 있게 한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며 슬퍼했습니다. 아들 리셴룽 총리는 싱가포르 시민들이 리 전 총리와 같은 지도자를 다시 볼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 자체였다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미국 바락 오바마 대통령도 성명을 발표했군요?

기자) 오바마 대통령은 리 전 총리 가족과 싱가포르 시민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 리 전 총리는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국가를 건설한 통찰력 있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리 전 총리는 인류사의 진정한 거인이자, 현대 싱가포르의 아버지, 가장 위대한 아시아의 전략가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리 전 총리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감을 불러일으킨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Singapore's Prime Minister Lee Hsien Loong views a condolence card at the Istana tribute site for Singapore's former prime minister Lee Kuan Yew in Singapore, March 24, 2015. Singapore's Prime Minister Lee Hsien Loong spoke to visitors at the Istana Gate on Tuesday when he stopped to read some of the messages left for Singapore's founding prime minister Lee Kuan Yew.